인천 차이나타운 그리고 그곳의 청춘들

내가 옥상이를 알게 된 것은 스물두 살인 여동생과의 수다를 통해서 였다. 성격 좋은 내 동생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있는데, 그 중 나로 인해서 '빨간 돼지'라 불리는 친구가 있다. 남에게 별명 짓길 즐겨하는 나는 통통한 그 친구가 빨간색 티를 입은 것을 인상 깊게 보았던 터에 '빨간 돼지'라는 별명을 지어준 것이다. 빨간 돼지는 우연한 계기로 인천의 유일한 화교 학교인 인천화교중산중학교(仁川華僑中山中學校)에 다니는 친구를 몇 명 사귀었고 옥상이는 그 몇 명 중에 하나였다.

INTRO

– 화교청춘, 임옥상, 황의복을 만나다

 

추적 추적 비가 내리는 일요일.
이런 날은 대개 소파에 널브러져 TV를 보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게 제격이다. 우산을 쓰고 우중충한 거리를 걷는 건 아무래도 귀찮다. 나는 옥상 이와의 첫 번째 만남에서 십 분을 늦었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 만남에서도 또 십 분을 늦었다. 약속시간을 제법 잘 지키는 편인데 유독 비가 오는 날이면 늦고야 만다. 당연한 일처럼 우산을 잊고 나가기 때문이다.

내가 옥상이를 알게 된 것은 스물두 살인 여동생과의 수다를 통해서 였다. 성격 좋은 내 동생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있는데, 그 중 나로 인해서 ‘빨간 돼지’라 불리는 친구가 있다. 남에게 별명 짓길 즐겨하는 나는 통통한 그 친구가 빨간색 티를 입은 것을 인상 깊게 보았던 터에 ‘빨간 돼지’라는 별명을 지어준 것이다. 빨간 돼지는 우연한 계기로 인천의 유일한 화교 학교인 인천화교중산중학교(仁川華僑中山中學校)에 다니는 친구를 몇 명 사귀었고 옥상이는 그 몇 명 중에 하나였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잠자리에 누운 자매는 수다를 떨었고 수다의 소재는 우리가족에서 점차 친구, 혹은 친구의 친구 등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때 나는 빨간 돼지가 임옥상이라고 하는 화교 아이를 만났는데, 같이 놀아 보니 무척 재미나다는 얘기를 들었더랬다.
그날 들었던 옥상이를 비롯한 화교 청춘의 얘기는 언제가 그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만들었고, 우연히 퍼슨 웹에 발을 들여 놓게 된 나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첫 인터뷰 상대를 옥상이로 정했다.

겹겹의 우산 너머로 키가 훤칠하고 쭈뼛 쭈뼛 세운 머리를 한 옥상이가 보였다. 옥상이 곁에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낯선 친구가 서 있었다. 옥상 이는 얼굴을 익혀 두려고 시도했던 첫 번째 만남에서 같이 오기로 약속한 친구 아닌 다른 사람을 데리고 나왔다.

옥상> 걔가 너무 쑥스러워 해서요. 그냥 얘 데리고 나왔어요.

우리는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는 입을 모아 비부터 피하자고 했다. 우리 셋은 비를 싫어했고, 오후 4시가 넘은 시각이지만 모두 식사 전이었다. 나는 작년 여름, 에든버러에 가기 위해 20여 일간 일했던 레스토랑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파빌리온’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은 신포동에 있었고, 신포동에 가려면 동인천과 신포동을 이어주는 지하도를 따라 십분 가량을 걸어야 했다. 우리 셋은 그 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화도 없이 걸어갔다

 

TIP 1.
화교(華僑)란 말은 중화(中華)의 화(華)와 일시거주를 뜻하는 교만(橋萬)의 교(橋)에서 온 것으로, 중국 본토가 아닌 해외에서 사는 중국인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본 인터뷰에서는 “중국, 대만 국적을 가지고 본국 이외에서 정재(定在)하는 사람들 또는 현지 국적을 가지는 중국계 주민”이란 의미로 화교란 용어를 사용한다.(주)
인천화교의 시초는 청나라 상인들로, 이들의 유입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과 청나라간 불평등 통상조약인 한청상민수륙무역장정(韓淸常民水陸貿易章程)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제물포구(현재는 제물포 역으로 이름만 남아있으나 그때 당시에는 항구 역할을 하였다)를 통해 항구에서 가까운 인천 선린동 일대에 조계(租界-주로 개항장(開港場)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를 형성하며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상하이 등지에서 구입한 영국제 면제품과 중국산 비단을 들여와 조선인 객주를 통해 금, 은, 인삼 등을 가져가는 중계무역을 주로 했다. 인천은 구한말 당시 화교 1만 여명과 많은 내국인들이 모여들던 개항기 최대의 번화가이자 ‘최고의 백화점’이었다.
한국 화교의 90% 정도가 산동성(山東省) 출신인데, 이러한 사실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1898년 의화단(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으로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피난지로서 한국을 택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더불어 가뭄, 홍수 등의 자연적 재해로 비옥했던 농지마저 경작이 불가능해지고, 1920~21년에 산동성, 안휘성(安徽省), 강소성(江蘇省)에 걸쳐 일어났던 대홍수는 2,3백만의 수재민을 내었고 그로 인해 산동성의 농가 중 80%는 생계유지가 불가능해졌다. 초기 대부분의 화교는 농민 출신이었던 것도 이에 기인한다. 이러한 이유로 산동성의 중국인들은 배로 하루면 닿는 거리인 인천으로 넘어온 것이다.(주2)

주1) 카세타니 토오모, <서울의 차이나타운-배제와 동화 속의 재한 화교 에스니스티>, 한국학 연구9
주2) naver 백과사전 & 중화민국 한국 연구학회 간행, 〈한국화교사화〉, 여한 60년 견문록(旅韓 60年 見聞錄), 1983.

 

1. 화교 청춘의 학교

 

자그마한 녹음기라 거부감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옥상이는 말을 못하겠다며 어색해 했다. 옥상이와 같이 온 친구는 한 술 더 떠 모자의 챙을 천막 삼아 당최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퍼> 친구 분도 학생이시죠, 어느 학교 다니세요?
옥상> 동국대요.

퍼> 아,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나도 어지간히 긴장을 했나보다. 만난 지 족히 이십분이 지나고 나서야 이름을 물었다.

의복> 왕의복, 이요.
퍼> 네? 뭐라고요?

의복이의 목소리는 모자의 챙에 막혀서 내게 까지 건너오지 않았다. 두세 번을 물어서야 겨우 이름을 알아들었다.

퍼> 와. 정말 멋진 이름이네요.
옥상> 제 이름도 멋있다고 그랬었잖아요.
퍼> 그러게. 왕의복, 황옥상. 둘 다 정말 멋진 이름이에요.

내가 이름이 멋지다고 한 것은 더 정확히 말하면 독특하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단순히 이름을 발음할 때의 느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화교’라는 존재 자체가 내게 주는 의미가 그러했다. 그런데 그 신선함에는 애매하고 석연치 않은 감정이 묻어 있었다.

나는 동인천 역 가까이에서 24년간을 살아왔고, 그동안 허름한 인천역 근처에 자리한 더 허름한 모습의 차이나타운을 스쳐가곤 했었다. 단지 스쳐 갔을 뿐, 그곳에 내 스스로 발을 들여 놓은 일은 없었으며 그곳에 사는 이들은 내게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차이나타운은 가시거리에는 존재하지만 애써 초점을 맞추고 보고자 했던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곳은 가시거리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그 느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는 ‘석연(釋然)치 않다’라는 표현 말고는 그 어떤 표현도 동원할 수가 없다.

 

차이나타운은 최근 들어 재개발 바람이 불기 전까지는 몇 십 년 동안 한결 같이 쇠락한 모습이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에도,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에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에도 우리 식구는 그곳에서 외식을 했는데, 그때마다 차이나타운은 매번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렇게 허름한 곳에 우리를 데려가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권의 발달로 화려한 거리였던 동인천, 신포동 너머에 존재하는 쇠락한 차이나타운에 가는 일은 도서관의 향토 자료관에 가서 근대화 초기의 도시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는 것 보다 더 지루한 일이었다.
그런데 무슨 감정의 인과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동인천과 신포동이 쇠락하면서부터 차이나타운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그곳이 재개발되면 동인천과 신포동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의 존재감을 느꼈다고 할까. 차이나타운도 동인천과 신포동처럼 오래 전에는 매우 번성했던 거리였을 것이고, 쇠락한 그곳에서 나는 동변상련의 쓸쓸함, 애잔함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어쨌든, 여러 가지 감정들이 긴장과 뒤섞여 나는 차분해지려 애를 써야했다. 옥상이는 내게 누나 되니까 반말을 써도 된다고 했고, 의복이는 식사를 주문하라는 데도 한사코 복숭아 아이스티를 마시겠다고 우겼다.

퍼> 그런데 화교들은 대학교에 어떻게 가는 거야? 한국애들처럼 시험 쳐서 가니?
옥상> 아니요. 나처럼 엄마, 아빠가 둘 다 화교인 애들은 아무데나 원서 넣고 면접 보면 갈 수 있어요. 나는 인하공전 가고 싶어서 간 거구요. 엄마, 아빠가 둘 다 화교인 나 같은 애들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빼고는 거의 다 갈 수 있어요. 이 학교들도 갈 수는 있는데 한국 애들처럼 수능 시험 보고 가야하니까 가는 애들이 거의 없죠.

퍼> 그러면 의복이는 왜 동국대 간 거야?
의복> 엄마가 한국 사람이라 서요.
옥상> 엄마나 아빠 둘 중에 한 분이라도 한국 사람이면 거의 동국대 가요. 다른 학교에서는 안 받아줘요. 다른 데 가려면 수능 치고 가야 돼요. 그런데 이번에는 동국대에서 화교 애들 안 받아 줬어요. 얘네 후배가 의복이처럼 엄마가 한국 사람인데 동국대 들어가려고 했거든요. 근데 떨어졌어요.

퍼> 왜 떨어진 거야?
옥상> 그거야 모르죠.

퍼> 그럼 떨어진 친구들은 다른 학교에 들어갈 수가 있나?
옥상> 아뇨. 제가 알기로는 없어요. 그래서 동국대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어요.

퍼> 만약에 내년에도 못 들어가면?
옥상> 중국이나 대만에 가겠죠.

퍼> 중국이나 대만에 가는 친구들이 많아?
옥상> 대만에 많이 가요. 근데 그 동안 한국에서 자라왔으니까 가서 적응 못하는 애들이 많죠. 가족들, 친구들 모두 한국에 있으니까 외로워서 다시 돌아오는 애들도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대학을 졸업해도 대개는 다시 한국에 돌아오는데, 선생님밖에 못해요.

퍼> 둘 다 과는 어떻게 돼?
옥상> 저는 항공운항과, 얘(의복)는 중문과요.

퍼> 저번에 만났을 때 옥상이가 화교 애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한국 애들이랑 다르게 배워왔기 때문에 힘들다고 그랬었는데, 의복이도 그래?
의복> 네. 저도 힘들어요.

퍼> 중문과를 선택한 이유는 뭐야?
의복> 그냥.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정해져 있으니까 중국어 배워서 가이드나 하려고요.

퍼> 옥상이는 왜 항공운항과에 간 거야?
옥상> 저는 여행사 같은데서 일하거나 잘하면 공항에서도 일할 수 있다 그래서요. 화교 중에 공항에서 일한다는 사람 얘기 들은 적이 있어요.

밥을 먹느라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 속에 녹음기는 접시와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만 부지런히 담았다. 나는 내가 대학에 들어오게 된 동기와 심리학, 사회학을 복수 전공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학과를 선택해서 원서를 넣을 때 나는 직업에 대한 고려는 전혀 해보지 않았다. 우리는 나이가 들 수록 꿈이 작아지게 마련이다. 작아진다는 말은 좀 더 실현 가능한 꿈을 꾼다는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무엇보다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으로 생각을 수렴하게 된다. 그렇지만 졸업을 2개월 앞 둔 나는 아직까지도 이것이 불가능하다.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 내가 하고 싶은 일들 가운데 혹은 그렇지 않은 일들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추려 내는 작업은 하고 싶지만 할 수는 없는 일들을 체념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체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런데 옥상이와 의복이는 스무살 때 이미 대학을 결정하면서 내가 할 수 없었던 그것을 한 모양이다.

 

 

 

TIP 2.

화교청춘 옥상이와 의복이가 초등, 중등, 고등 교육을 받은 학교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인천화교중산중학교(仁川華僑中山中學校)이다. 현재 서울에 있는 한국화성화교중학(韓國華成華僑中學)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한국화교학교이며 99년 통계에 의하면 중·고등부를 합하여 273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한국화교학교의 학제는 학교에서 사용되는 교과서가 중화민국(대만) 정부로부터 전량 무상으로 제공받고 있으므로 중화민국 교육체제와 일치한다. 6년의 소학교(초등학교를 말한다) 과정을 거친 학생들에게 중학교 3년과 고등학교 3년의 과정이 이어진다. 대한민국의 중·고등 교육과정과 다른 점은 3월이 아닌 8월에 첫 학기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다만 커리큘럼에 있어서 교사 정원의 한계 등의 이유로 대만에서와 같이 다양한 교과 과목이 개설되지 못하고 있다.
인천화교중학의 교과는 한성화교중학의 그것에 비해 대입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성화교중학에서는 과거 고3때 귀국 진학반과 한국내 대학 진학 반으로 나누던 것을 한국 내 대학 입학지원자가 근래 급증하자 97년부터는 2학년부터 나누어 한국 내 대학 입학지망자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였다(98년 조사에 따르면 179명의 고3 학생 중 한국 내 대학 희망자가 122명이었다). 그러나 인천화교중학은 학생 수의 제한과 재정적 어려움으로 한국 내 대학 지원생들에게 별도의 반을 운영하면서 한국의 역사, 지리 등의 과목을 개설해주지 못하고 있다.
사실, 대개의 화교 수험생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대학입학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문제는 그들이 대학에 간 후 적응상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 정책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화교는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내적 결속을 다지고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한국사회에 대한 적응에 문제를 초래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사회는 각종 연줄망이 중요한 사회적 자원으로 동원되고 있다. 그러나 혈연, 지연에서 연줄망 동원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화교에게 교육의 독립성과 그에 따른 독자적인 학벌형성은 학연을 통한 주류사회와의 연결마저도 막는 결과를 낳았다.

2. 화교 청춘으로 살아가기

 

퍼> 어제 친구들이랑 차이나타운에 있는 ‘풍미(豊美)’가서 저녁 먹었었는데. 그 식당 알아?
의복> 네. 알아요. 거기 양 적고 비싼 집이에요. 맛은 있는데.
옥상> 우리 집 오세요. 우리 집도 중국집 해요.

 

퍼> 그래? 그럼 좀 있다 저녁 먹으러 가도 돼?
옥상> 좋아요. 좀 있다 같이 가요.

 

퍼> 의복이네도 중국집 하니?
의복> 네. 강원도에서 중국집 해요.

 

퍼> 왜 강원도에 계신거야?
의복> 할머니가 한국으로 이민 오실 때 강원도로 오셨대요. 그때부터 그냥 거기서 사세요.

 

퍼> 그럼 의복이만 인천에 있는 거야?
의복> 아니요. 누나랑 같이 올라와서 자취해요.

 

퍼> 누나랑 어디서 살아?
의복> 북성동서 살아요. 차이나타운.

우연히 의복이가 누나랑 산다는 얘기를 들었고, 나와 같은 나이라는 의복이 누나의 얘기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나는 의복이에게서 의복이 누나의 신상명세에 대한 정보를 얻어냈다. 의복이 누나는 송내역 근처에 있는 중국집에서 써빙을 하고 있는데, 현재는 휴학 중이라 했다. 나는 왜 휴학 했는지가 궁금했다. 나처럼 졸업에의 도피를 목적으로 휴학했는지, 집안 사정 때문인지. 내가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두 가지였다.

퍼> 누나는 왜 휴학한거야?
의복> 그냥요.
옥상> 짤린거에요. 엄마 때문에.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 나는 어떤 말로 부가적인 질문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고맙게도 말을 꺼낸 책임감을 느낀 듯 옥상이가 말을 이었다.

옥상> 엄마가 한국인인 거 학교 측에 걸려서 휴학처럼 하고 짤린 거예요.

퍼> 어느 학교 다녔는데?
의복> 인하대요.

퍼> 인하대는 부모님 중 한 사람이 한국인인 경우에 못 들어가?
옥상> 네. 그런 애들은 대부분 동국대에 가요.

퍼> 그런데 어떻게 입학했어?
의복> 아버지만 계신다고 해서 간 거예요.

퍼> 그러니까 입학원서를 낼 때 거짓으로 쓴 거구나.
의복> 네.

퍼> 그런데 어떻게 사실이 들통난거야?
의복> 학교에서 무슨 일로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어머니가 받았어요. 어쩌다가 자기가 엄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한 거예요. 그래서 학교에서 알게 된 건데. 근데 뭐 딱 그 이유 때문은 아니고,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그만 다닌다고…

의복이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거두어 복숭아 아이스티가 담긴 유리잔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힘들게 머리를 굴리던 나는 동감의 표현이 무난하겠다 싶었다.

퍼> 누나는 상심이 컷겠다.
의복> 그냥 뭐, 잘 모르겠어요..

마침, 의복이 누나에게서 카페 입구에 와 있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의복이는 누나를 잠깐 만나고 오겠다며 일어섰다.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상반되는 두 가지 느낌의 갈래가 동시에 마음속에서 뻗어 나갔다. 의복이에게는 지금 나눈 얘기가 낯선 이에게 말하기 곤란한 얘기일 것이다. 이번 인터뷰에 대해 옥상이와 지난 번 만났을 때 자세한 설명은 해 주었지만 옥상이는 충분히 이해하는 것 같지 않았고, 그런 옥상이가 의복이에게 이번 인터뷰에 대해 얼마만큼의 이해를 구했는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나는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의복이에게 누나에 대한 질문을 그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심과 인터뷰어라는 사명감이 동하여 마치 묵직한 낚시대를 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퍼> 말하기 힘든 얘긴가?
옥상> 의복이네 누나가 의복이 학교 보내려고 자기 학교 포기한거거든요.

퍼> 그랬구나.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옥상> 예. 형편이 안 좋아서요.

퍼> 마음이 안 좋겠다.
옥상> 그런 건 아닌데. 누나를 많이 생각하긴 하죠.

퍼> 내가 이런 질문해서 의복이가 당황한 거 아닐까?
옥상> 아니에요. 괜찮아요.

 

옥상이에게 의복이네 집안 사정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던 찰나에 의복이가 돌아왔다. 옥상이는 의복이가 자리에 앉아마자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말을 건냈다.

옥상> 먹어, 의복아.
의복> 아니야.

느닷없이 낯선이에게 자신의 아픈 얘기를 털어놓게 함이 미안한 걸까. 옥상이는 잘 먹던 새우볶음밥을 의복이 앞에 밀어 놓았다. 접시의 반도 채 가리지 못하는 양이다. 그래도 나는 애써 나를 외면하려는 의복이의 눈동자를 좇으며 물었다.

 

퍼> 누나는 다시 학교 다닐 수 없는 거야?

 

대답하기가 싫은 건지 마땅한 대답을 찾고 있는 건지 의복이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의복> 다닐 수는 있어요. 어차피 입학하긴 했던 거니까.

퍼> 그럼 다시 복학할지도 모르네.
의복> 아니요. 안 갈 것 같은데.

퍼> 왜?
의복> 잘 모르겠어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시는 의복. 누나의 학교에 대한 질문은 이쯤 해야 했다. 아쉬운 마음이 마음 한 켠에 남아있더라도.

 

퍼> 의복이는 그 누나랑 둘 뿐이야?
의복> 제가 막내에요. 누나는 세 명.

 

의복이의 첫째 누나는 한국 남자랑 결혼하여 대만 국적을 포기하였다. 한국 남성과 외국인 여성이 결혼할 경우, 여성은 신고만 하면 한국국적을 취득할 수가 있기 때문에 의복이의 첫째 누나가 대만 국적을 포기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첫째 누나가 낳은 아이들은 모두 한국국적을 갖고 있어 한국 학교에 다닌다고 한다. 화교 여성과 한국 남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자동적으로 한국국적으로, 화교 남성과 한국 여성 사이의 아이는 자동적으로 대만(중국)국적자가 된다. 중국이나 한국이나 부계혈통을 중시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화교여성의 경우, 최근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사람의 50% 이상이 국적을 한국으로 변경하고 있다고 하니 의복이의 첫째 누나가 독특한 경우는 아니었다.
둘째 누나는 같은 화교와 결혼해서 화교들이 주로 갖는 직업 중 하나인 가이드를 하고 있다. 의복이가 가이드를 직업으로 삼고자 한 것도 둘째 누나를 모델링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셋째 누나는 언급했듯이 송내역 근처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서빙을 한다.

3. 화교라는 존재 자체의 불평등

 

퍼> 둘 다 여자친구는 있어?
옥상> 둘 다 있어요.

퍼> 여자친구들은 화교?
옥상> 아니요. 둘 다 한국사람.

퍼> 어떻게 만난 친구들이야?
옥상> 저는 씨씨구요. 얘도 씨씨에요.

퍼> 얼마나 사귀었어?
옥상> 일년 정도요.
의복> 알고 지낸 건 더 오래 됐는데 만난 건 일 년 정도 됐어요.

퍼> 그럼 여자친구 부모님이랑 인사는 했어?

 

의복이와 옥상이는 그런 질문을 왜 하냐는 얼굴이었다. 그들이 화교임은 그들에게 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게 아닐까. 내 질문의 의도를 눈치 챈 듯 의복이가 대답했다.

 

의복> 여자친구의 부모님이 제가 화교인 거 알아요.

옥상> 저도 알아요. 근데,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아직 어리니까 뭐라 그러겠어요? 결혼할 것도 아니고.

 

퍼> 부모님은 혹시 한국 사람이랑 화교 중에 누구랑 결혼해야 한다, 그러진 않아?
옥상> 할머니는 꼭 화교랑 결혼하라고 그러시죠. 근데, 아직 어린데요. 커서 나이 먹어서 생각할 일이에요. 그건. 노는 건 그냥 아무나하고 놀면 어때요.

 

옥상이의 한마디에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생각해 본 질문들을 적어온 노트를 힐끗거렸다. 노트를 힐끗거린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퍼> 화교는 군대 안가지? 신체검사도 안하고.
옥상> 네. 3년 벌어서 좋아요.

 

퍼> 근데 군대 안 간다는 사실이 한국인으로 인정 안 한다는 거랑 같은 얘기 아닌가?
옥상> 그렇죠. 군대 뿐 만이 아니라 우리는 주민등록증도 없으니까.

 

퍼> 대신 외국인 등록증이 있지?
옥상> 주민등록증 같은 건데 좀 다르죠. 얼마 전에 외국인 등록증에서 영주 자격 비자로 바뀌었어요.

 

옥상이는 외국인 등록증을 꺼내 자신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고 보여주었다. 사진 옆에는 등록 번호와 성명이 기재되어 있고, 국적은 TAIWAN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F-5’라는 표시가 보였다.

 

TIP 3.

F-5 는 영주자격 제도로 장기 체류 거주 비자였던 F-2 소지자 중 5년 이상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사람, 일정 금액 이상을 국내 산업체에 투자한 사람, 영주 자격을 받은 부모의 출생 자녀로 미성년자에게 영주 자격 비자(F-5)를 취득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것이다. F-5가 생기기 이전에 한국에는 영주권 제도가 없었다. 그리하여 화교는 외국인으로서 ‘외국인 출입관리법’을 따라야 했으며, 5년 마다 갱신해야 하는 F-2 비자를 사용해야 했다.

 

옥상> 얼마 전에는 F-2 였는데, F-5 로 바뀌었어요.
퍼> 뭐가 달라진 거야?
옥상> 핸드폰 살 때 좀 달라요. F-2 였을 때는 핸드폰 살 때 이십 만원을 더 내야 했어요. 요금을 밀려놓고 외국으로 도망 갈까봐 20만원을 선납해야 핸드폰을 쓸 수 있었던 거예요. 핸드폰을 해지할 때 그 돈을 돌려주기는 하지만. 근데 지금은 핸드폰 그냥 살 수 있어요.

 

퍼> 아직도 사이트는 가입이 불가능하다고 그러던데, 다음(daum.net)아이디는 있어?
옥상> 사이트 가입 안돼요. 우리는 컴퓨터에 주민등록번호가 입력이 안돼요. 그래서 이메일은 친구가 만들어 줬어요.
퍼> 자기 이름으로 안 되어있는 거네?
옥상> 그렇죠. 그냥 이메일은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만든 거예요.
의복> 다른 사이트에는 가입해 본 적 없어요.

 

옥상이와 의복이의 무감각한 대답을 들으며 나는 해방 후 전쟁을 거쳐 분단이 고착화 된 이후에 2만 명 정도이던 남한의 화교 인구가 자연 증가해서 1972년 32,989명에 이른 후에는 지속적으로 감소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가장 강력한 이유는 두말할 나위 없이 한국사회와 정부가 화교들에게 가한 여러 가지 차별 때문이다. 그들이 당하는 차별에 대해 언급하자면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워도 모자라겠지만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심각한 불편을 끼치는 몇 가지 차별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TIP 4.

화교들은 직업을 선택할 때 제한을 받는다. 공무원 및 공공단체의 임직원이 될 수 없으며, 변호사법, 공인회계사법, 의료법 등에 의해 대부분이 전문직종인 국가인정자격부문의 자격취득이 어렵다. 일반 기업체 취업도 어렵지만 일단 회사에 취업을 해도 수혜 대상이 되지 못하는 국민연금을 납부해야 한다.
정부는 한국전쟁 이후에 외국과 무역을 할 때 외국인의 외화사용을 제한했고, 또한 한국인은 등록만 해도 되었던데 비해서 외국인은 반드시 허가를 받도록 했다. 당시 한국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외국인들이라고 해야 거의 대부분 화교였는데 이러한 제약들 때문에 대개는 사업을 포기했다. 또한 1961년에 시행된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으로 졸지에 농토를 잃은 화교들은 농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화교들은 동족들 간에 기술을 전수 받을 수 있는 업종인 요식업으로 몰려들게 되었다.
1968년 토지법이 개정되었다고는 해도 화교들은 주거용 주택은 200평 이내, 영업용 상가는 50평 이내, 2채의 영업집 소유금지 규정에 묶여 여전히 경제적으로 결정적인 불이익을 당해왔다. 그래서 번듯한 중국음식점을 내려고 해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잘 아는 한국인의 이름을 빌려서 운영을 하다가 마음을 달리 먹은 한국인에게 가세를 날린 얘기는 매우 흔한 사건이다.
토지법에 의한 불이익은 한국이 IMF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외자유치 목적으로 외국인의 국내부동산 취득을 자유화한 1998년 6월에야 비로소 사라졌다. 그러나 땅 값은 지난 수 십 년간 이미 오를 만큼 올라서 화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되었다. 더구나 이러한 자유화가 화교들의 권익을 보호해주기 위해서 실시된 것이 아니라 외자유치를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정부가 화교들을 배려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없다.(주5) 한마디 덧붙이자면 화교들은 물론, 선거권도 없다.

4. 중국인 없는 거리, 차이나 타운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나는 비 오는 날 돌아다니는 게 제일 싫다는 옥상이를 설득해 차이나타운에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다. 의복이는 여전히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친근해진 기분이 들었다.

 

택시는 그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총 12년을 다녔던 인천화교중산중학교 앞에 섰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학교 앞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레스토랑에 있을 때는 조금 위축돼 보였던 옥상이와 의복이는 익숙한 동네에 도착하자 활기를 띤 모습이었다. 서로 때리며 장난도 치고 소리 내어 웃는 그들을 보니 과연 청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걷다보니 무척 허름한 건물이 눈에 띄였다. 나는 “이런 집들은 사람이 살까….?”라고 혼잣말을 했다. 이에 옥상이는 “거기 사람 사는데 아니에요. 마작, 아시죠? 어른들이 마작 하려고 납둔데요. 낮에는 저렇게 폐쇄시켜 놓았다가 밤에는 열고 들어가서 마작하는 거예요.” 라며 신나서 얘기를 건냈다.

허름한 집이 늘어서 있는 언덕길을 따라 오 분쯤 내려가자 몇 개의 중국집이 눈에 들어왔다. 옥상이는 한층 더 신이 나서 각 중국집의 이름을 중국어로 말해 주며 이곳은 친구의 어머니가 하는 곳, 이곳은 양 많고 싼 곳이라는 시키지도 않은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옥상이와 의복이 때문에 오 분도 채 안되는 거리를 십분 가까이 걸어야 했다.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어른들과 일일이 중국어로 인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옥상’과 ‘의복’이 아닌 중국 이름으로 그들을 불렀다. 내가 알아들은 말을 ‘잘 가’라는 인사 ‘짜이찌엔’ 뿐이었다.
삼거리에 다다르자 오른쪽에는 공터 위에 붉은색 철근이 직사각형 모양으로 골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올해 7월이면 해외자본의 투자로 중국전통풍물상가가 들어설 자리였다. 그곳에는 ‘중국 풍물 상가 조성 사업’이라는 제목 아래 공사의 목적인 ‘중국 전통 풍물로 볼거리를 제공하고 관광객 방문을 촉진시킨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공터 구석에는 1917년에 세워졌다가 상가의 건립을 위해 무너뜨린 중화기독교회(中華基督敎會)의 간판이 쓸쓸하게 놓여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공사를 추진하는 곳이 ‘사단법인 중화기독교회 유지재단’이라는 것이다. 단지 이름만으로 그 내막을 파악하긴 어려울지 모르지만 내게는 역사를 허물고 자본을 끌어 모으겠다는 의지로 공사를 단행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퍼> 저기 교회 있던 자리잖아. 거기 가본 적 있어?
옥상> 놀러 가끔 가봤어요.

퍼> 역사적으로 오래 된 데라고 들었는데.
옥상> 맞아요. 저기 왜 없앴는지 모르겠어요.

퍼> 재개발이 되는 거 니들이 보기엔 어때? 

옥상> 이상한 게 너무 많이 생겼어요.
의복> 가로등만 많고…. 갑자기 많이 변하는 거 같아요. 확 확.
옥상> 여기가 차이나타운이라고 할 수 있나? 너무 허접하잖아요.

 

삼거리에서 아래쪽으로 난 길 끝에는 차이나타운을 상징하는 ‘패루(牌樓)’가 자리하고 있었다. 패루는 인천 차이나타운과 자매결연을 하고 협조체제를 강화하자는 의미로 중국 위해(威海)시에서 기증한 것이라 한다.

 

퍼> 그래도 저런 건 멋진 것 같은데.. ‘중화로(中華路)’ 라고 써진 건가?
옥상> 네.. 중국의 거리. 저거 금으로 쓴 거래요.

퍼> 저 아래 또 하나 있던데.
옥상> 원래 이거를 다른 데다 지으려고 그랬는데 잘못 지은거래요.
의복> 아니야. 원래 여기랑 다섯 개 더 지을라고 그랬어.

 

옥상> 근데 왜 두개 밖에 없어?
의복> 돈이 모자라서 나머지는 안 지었대요.

금칠로 번쩍거리는 거대한 용이 돋보이는 북성동사무소를 지나는데, 옥상이가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

 

옥상> 밤에는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에 불이 들어온대요.
의복> 여기 이렇게 된지 일년도 안됐어요. 요즘에 동네에 놀러오면 깜짝 놀라요. 다 변해서..
옥상> 건물에 하나씩은 붉은 색이 있는 거 같아요. 다 빨개요, 다.

퍼> 친구들 여기 남아 살아?
옥상> 아뇨.

퍼> 그럼 누가 살아?
옥상> 한국 사람들이 살아요. 의복이도 살고. 가게만 여기 있는 사람들도 많고. 엄마 말로는 땅도 많이 못 사게 하고 그래서 진작 중국이나 대만으로 간 사람들도 많대요.
의복> 차이나타운인데 차이나타운이 아니에요.

의복이가 중얼거리듯 내뱉은 한마디는 재개발로 공사가 한창인 거리에서 나무에 못 박는 소리, 건물을 부수는 소리에 묻히지 않고 기가 막힌 속도로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TIP 5.

현재 차이나타운 계획은 중국의 한국에 대한 전면 여행 자유화 조치로 우리나라를 찾는 중국 관광객이 연간 20만 명 이상으로 크게 늘어날 전망이라는 데 탄력 받아 서울 상암동의 차이나타운 건설계획과 화교경제인연합회와 인천시가 추진하고 있는 송도 매립지의 차이나타운 건설계획, 인천시 중구의 차이나타운 계획 등이 잡혀 있다. 과연 차이나타운 건설 계획의 붐이 일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중 중구의 차이나타운은 한국 차이나타운의 원조 격이라는 데 의미가 크며 건설 계획도 주목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인천시 중구는 2003년까지 선린동과 북성동 일대의 기존 화교 촌이 있는 3,600여평 부지에 중국식당가와 풍물 전시장, 중국문화 공연장, 중국 상품 판매거리를 만들 계획이다. 현재 인천역 건너편에 세워져있는 패루에서 시작하여 자유공원에 이르는 길을 시범거리1구간으로 정하여 상가 외관을 중국풍으로 꾸미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다. 또 중국풍 패션 가로등 설치, 차 없는 거리 지정, 중국풍 조형물 설치, 패루 및 화표 설치, 면세점 건립, 삔관이라고 불리는 중국식 복합숙박시설 건립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차이나타운 개발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차이나타운의 주인은 화교들일진대(너무나 순진한 생각일까), 나는 차이나타운에서 그들이 주인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다. 물론 외부인의 시선과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 정부의 차별정책으로 이미 많은 화교가 한국 땅을 등졌고, 인천 차이나타운에도 그곳에 거주하는 화교는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차이나타운 건설과 관련하여 최근에 많은 계획들이 발표되고 있는데 뒤늦은 감도 없지 않으며 여행객을 유치하여 돈을 벌어보자는 목적만 강조되는 듯 하다. 지금에서라도 개발이 되니 다행인 걸까.

북성동사무소를 지나쳐 패루에 까지 다다르자 하인천 파출소가 보였다. 파출소를 보자 옥상이는 간판을 가리키며 반가운 듯 한마디 했다.

옥상> 여기가 진짜로 오래된 파출소에요.
의복> 저희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요.

퍼> 한번도 안 바뀌고?
옥상> 네.

옥상이의 감회에 젖은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농담을 던지고 싶었다.

퍼> 너 여기 자주 왔었구나.
옥상> 아니요. 우린 다른데 다녔어요.

퍼> 다른 파출소에는 왜 갔는데?
옥상> 아니. 그냥.. 싸워가지구요.

퍼> 누구랑?
옥상> 한국 애들이랑.

퍼> 한국 애들이랑 왜 싸웠는데?
옥상> 많이 싸워요. 괜히 동인천 갔다가 시비 붙고…. 지금은 안 그러니까 그만 물어봐요.

옥상이는 창피한 듯 저만치 도망 가버렸지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국 애들이랑 자주 싸웠다는 말을 생각했다. 나의 학창시절을 돌이켜 보건대, 중고등학교때 대개 남자아이들은 지나가다가 눈빛 한번 잘 못 스치면 싸움을 벌이곤 했다. 청소년기의 아이들은-특히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이 보충수업, 자율학습을 받으며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아이들은-다양성에 대한 체험과 이해가 부족할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있어 남색 바탕에 하얀 실로 ‘화교중산중학교(仁川華僑中山中學校)’라고 씌어진 가방을 들고 다니는 화교 아이들은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화교아이들에게는 가방 하나 다른 것 메고 다닌다고 모아지는 시선이 적잖이 부담스럽고 억울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 이유 없이 다툼을 벌였을 수도 있겠지. 그들이 싸운 이유는 ‘다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게 아닐까.

5.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옥상이는 자기네 중국집에 가자며 택시를 잡았다. 오 분쯤 달렸을까 예전 인천터미널이 있던 자리의 육교 밑에서 옥상이는 택시를 세웠다. 옥상이네 중국집 ‘萬里城(만리성)’은 익숙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음식을 먹어 본일은 없지만 동인천 근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예전 인천 터미널 근처에 있는 큰 중국집’하면 떠오를 정도로 오래되고 유명한 집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옥상이가 엄마를 소개했다. 옥상이의 엄마는 30대 초반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고 엄마 옆에는 옥상이와 똑 닮은 옥상이의 누나가 있었다.

 

퍼> 화교 몇 세대세요?
옥상이 엄마> 화교 2세대지.

 

퍼> 옥상이 아버지도 화교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만나셨나요?
엄> 중국 사람들은 이상하게 우연히 만나 지더라고요. 그이는 인천에 살았고 나는 서울에 살았었는데, 직장에서 일하다 만났어요.

 

퍼> 직장이라면 어떤 직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엄> 이런 계통이지, 뭐. 요리 집이죠.

퍼> 화교는 국적이 모두 대만이라고 들었어요.
엄> 무조건 대만이에요. 중국 수교가 92년도 였나요, 그 보다 훨씬 전에 우리가 이민 왔는데 수교가 안됐던 당시니까 중국 국적을 가질 수가 없었죠. 아이가 태어나면 협회에 가서 등록을 해요. 그때 자연적으로 대만 국적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퍼> 애매모호한 것 같아요. 고향은 중국이고, 국적은 대만이고, 사는 곳은 한국이라.
엄> 외국에 나가도 여권 상으로는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에요. 미국 같은 데서는 아예 받아주지를 않아요. 얘가 거기 가서 어떻게 될지를 모르거든요. 예를 들어, 죽을 경우에 고국으로 보내야 하는데, 대만에서는 안 받아 줘요. 국적은 대만이라고 나오지만 대만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니까. 부모의 신분이 확실할 경우에만 한국으로 시신을 보내는 거죠. 한국 사람일 경우에는 부모가 없어도 한국으로 시신을 보내주겠지만.

퍼> 혹시 국적을 바꿀 생각은 안 하셨나요?
엄> 그게 쉬운 게 아니에요. 내가 바꾸면 내가 바뀌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손까지 다 바뀌는 거잖아요. 뿌리를 어떻게 바꾸나요, 못 바꾸죠. 한국 사람들도 어디 외국 가서 살 때 국적 바꾸나요? 쉽게 잘 안 바꾸잖아요. 우리도 같아요.

 

 

TIP 6.

한국화교는 대부분 대만여권을 소지하고 있다. 그동안 이해관계로 중국여권을 취득한 화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중국이 개방정책을 취한 이후 대만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대만여권으로는 동남아 여러 나라나 일본의 비자도 받지 못하고 홍콩이나 미국의 비자를 얻을 수 있는 것이 고작이다. 그리고 결혼으로 인한 자연적 국적 취득이 아닌 경우에 화교가 대만국적을 포기하고 한국국적을 얻으려 해도 자격요건이 너무 까다롭다. 화교가 한국국적을 얻으려면 현금 5천만 원 이상 소지에 좋은 직장과 한국인의 보증이 있어야 한다.

 

손님이 계산을 하는 바람에 옥상이의 어머니는 카운터로 가셨고, 의복이는 드디어 모자를 거꾸로 돌려썼다. 낯선 이와 대화를 할 때는 눈을 가릴 수 있어 좋은 도구였던 모자가 먹을 때는 꽤나 거추장스러웠던 모양이다.

 

퍼> 옥상이는 전에 한번 나 봤잖아. 오늘 인터뷰 하는 거 알고 나왔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나왔어?
옥상> 아무 생각 없이 나왔는데. 저희한테 뭐 물어볼 게 있나요. 엄마들이나 할 말 많죠.

퍼> 아닌데. 니들 얘기가 더 듣고 싶은데.
옥상> 우리야 뭐. 성공하기만 바라죠.

퍼> 성공하기만 바란다고?
옥상> 네.

퍼> 성공이 뭐 같은데?
옥상> 성공하기는 어려워요.

퍼> 지금 하고 싶은 게 뭔데?
옥상> 지금? 의사요.

퍼> 양약의사를 말하는 거야?
옥상> 네. 양약의사.
퍼> 하고 싶으면 하면 되잖아.

 

98년 통계에 따르면 인천에 살고 있는 화교 약 3000여 명 중에 의사가 직업인 사람은 단 2명뿐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내가 던진 어설프고 궁색한 조언은 옥상이에게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화만 돋우는 발언이었다.

 

옥상> 못하니까 포기했잖아요!

 

옥상이는 대상 없이 버럭 화를 냈다.

 

퍼> 왜 승질을 내니?
옥상>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으니까 승질 나죠. 어렵죠, 어려워요. 죽을 때 까지 공부해도 안 될 것이 뻔한데 바보도 아니고 왜 해요? 우리는 공부에 취미가 없다니까요!

의복> 누나도 지금 되게 황당할 거야.

 

그동안 도무지 내게 마음을 열지 않은 것 같이 보였던 의복이가 동감의 표현을 해준 것은 옥상이의 돌발적인 발언에 당황한 내 마음을 진정시켜 줄 만큼 위안이 되었다. 나는 용기백배하여 의복이에게 물었다.

 

퍼> 의복이는 지금 하고 싶은 게 뭐야? 없어?
의복> 그냥 뭐. 옛날에는 하고 싶은 게 되게 많았는데요. 포기해야 할 것 다 포기하고 나니까 하고 싶은 게 없어요. 생각이 안나요.

퍼> 포기하고 나니까 생각이 안나?
의복> 진지하게 생각할 수가 없어요, 이제는.

생각해 봤자 포기해야 하니까 생각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의복이의 말. 나는 뭐라 해 줄 말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때 날아드는 옥상이의 쐐기를 박는 한마디.

 

옥상> 포기가 더 쉽잖아요.

                                                                                                            
긴장한 탓인지 파빌리온에서 먹은 스파게티는 소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무리의 손님이 계산을 마치고 나가자 잠시 한가해진 옥상이의 엄마와 착잡한 마음으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퍼> 한국어랑 중국어를 둘 다 유창하게 구사하시는데, 자신이 중국인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세요.
엄>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이 처음부터 중국 사람이라고 보진 않았어요. 한국 사람처럼 보지.

 

퍼> 그럼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엄> 아니요. 나는 중국 사람이죠.

 

날이 좀 개는가 싶더니 어느덧 어둠이 깔렸다. 옥상이는 아까부터 계속 문자를 보내던 친구와 술 약속이 있다고 했고, 의복이는 신포동에 셋째 누나를 만나러 가야한다고 했다. 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허탈함을 동반한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그들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퍼> 의복아. 너는 네가 중국 사람이고 생각해, 아니면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해?
의복> 중국 사람이요.

퍼> 중국말을 하고 아버지가 중국 사람이니까? 아니면 국적이 대만이니까?
의복> 아니요. 그냥 나는 중국사람 같아요.

퍼> 한국사람 같지는 않고?
의복> 어떨 때 보면 한국사람 같기도 하구요. 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나는 내가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한 거 같아요.

퍼> 편해?
의복> 네. 그냥 중국이 더 나은 것 같아요. 안 물어봐도 옥상이도 그럴꺼에요.

의복이의 말처럼 옥상이도 자신을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편하다고 했다. 편하다는 말은 당연하다, 자연스럽다는 말과 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그들이 살아가는 지금-여기는 분명 한국이다. 그런데 그들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으로 자신들을 규정하고 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며 그들은 그 간극을 어떻게 메울까.
인터뷰의 마지막 몇 줄을 쓰며 나는 자문해본다. 내가 옥상이와 의복이를 인터뷰 하고 그것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하면서 내가 쓰고자 하는 맥락 속에 그들을 도구로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지는 않을까. 그 속에서 옥상이와 의복이는 어떻게든 왜곡되는 게 아닐까. 내가 그들의 삶을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처럼 답답한 현실에 인생을 담보 잡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묻고 싶은 말이 있다. 내가 그들을 인터뷰 하던 그 날, 그들 삶을 비집고 들어가 그들 마음이라는 연못을 흙탕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