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길 – 역사학자 혹은 통일운동가

학자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다.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공부만 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공부도 잘하고 또 공부한 만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아는 것은 곧 행하는 것이고 행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 한데 그게 쉽지가 않다. 앎과 삶이 다르지 않은 사람들, ‘대가(大家)’라는 단어는 그런 사람들에게 잘 어울리는 말일 게다. 강만길 선생은 한국사학계의 어른이자, 남한 사회의 어른이기도 하다. ‘어른’을 만나는 자리여서 좀 편치는 않았지만.

프롤로그

 

학자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다.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공부만 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공부도 잘하고 또 공부한 만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아는 것은 곧 행하는 것이고 행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 한데 그게 쉽지가 않다. 앎과 삶이 다르지 않은 사람들, ‘대가(大家)’라는 단어는 그런 사람들에게 잘 어울리는 말일 게다. 강만길 선생은 한국사학계의 어른이자, 남한 사회의 어른이기도 하다. ‘어른을 만나는 자리여서 좀 편치는 않았지만.

강만길, 1933년 마산에서 태어난 그는 1961년 석사학위논문(고려대학교 사학과)으로 학계에 얼굴을 내민 이래로 30여 권의 한국사 관련 저작을 내놓은 역사학계의 원로이다. 현재에는 상지대학교 총장으로 재직 중에 있지만 그보다는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의장, ‘경실련 통일협회이사장, [통일시론] 편집인 및 발행인, [민족 21] 발행인과 같은 직함이 말해주듯 주로 통일운동계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다. 나야 공부에도 통일에도, 그다지 재능이 없는지라 인터뷰 내내 바늘방석을 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원주까지 먼길이 수고롭게 느껴지지 않았던 인터뷰였다.

 

강만길 선생과의 인터뷰가 정해진 뒤 관련 자료를 뒤지던 중 지난 5월 월간조선에 실린 한 르포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원주 상지대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라는 섹시한 제목이었는데, 내용 역시 월간조선답게 섹시했다.

 

* 참고: 월간조선 기사

 

요는 관선이사 체제 하에서 임명된 전임총장 김찬국, 한완상 등 조선일보의 척도로 보자면적합치 않은인물들이 상지대를엉망으로만들어놓았다는 기사였는데, 공교롭게도 김찬국, 한완상은 모두 차기정부의 각료후보에 올라있기도 하다.


고발된내용들은 모두가 강만길 총장이 취임하기 이전에 발생했던 사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월간조선의 기사가 실린 것은 강만길 현 총장의 재임 초기였다. 마침 상지대를 찾았을 때 정문에는 교육부를 상대로 한 소송(1)에서 승소했다는 플랭카드가 커다랗게 걸려있었다.

 

2001 2 16일 전 이사장인 김문기가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행정법원이 상지대의 손을 들어주어, 현 재단의합법성을 인정받았고, 뒤이어 문교부를 상대로정이사 체제 승인 요구 1심에서 인정받았다. 소위시민대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제도실험이 성공적인 몇 걸음을 떼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이야기의 시작은 플랭카드와 관련된 상지대 이야기부터 꺼내는 게 좋을 듯 했다.

 

퍼슨웹(이하’)> 지난 5월 달(2002 5) [월간조선]에서 별다른 이슈도 없었는데 상지대 문제를 크게 다룬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물론 강총장님이 부임하시기 이전의 일인데요. 1993년 이후에 드러난 상지대 재단관련 문제는 이제 모두 해결이 된 건가요?
강만길(이하’)> [월간조선] 그 기사는 다음 호에 반론보도문을 실었습니다. 우리가 소송(?)을 내서 이긴 거죠. 이 학교의 원 설립자(故원홍묵 선생)는 돌아갔어요. 그 다음에 중간에 인수한 사람이 설립자라고 주장을 했는데, 그것도 교육부에서 결론이 났어요. 법률적으로.

 

> 원고가 김문기 전 이사장이었지요?
> 그렇습니다. 이 학교의 임시이사가 파견된 지 10년쯤 되었는데, 이제 임시이사가 있을 이유가 없다. 학교도 정상화되었고 또 많이 발전한 상태니까. 우리가 정이사 체제로 바꾸어달라고 교육부에다가 요구했는데 안 들어줬지요. 그래서 소송을 제기한 겁니다. 그게 1심에서 승소를 한 거고. 교육부에서 항소를 해서 결과를 두고 봐야겠지만현재 우리나라에 우리 학교처럼 임시이사 체제로 있는 데가 한 십여 군데 됩니다. 개중에는 20년 동안 임시이사제로 있는 데가 있습니다. 이건 아주 잘못된 거지요. 아무런 분규도 없고 공부 잘하고 있는데 왜 임시이사제로 있을 필요가 있는가? 우리의 경우는 정이사체제로 바꾸는데 문제는 어떤 체제로 갈 건가 하는 거죠. 그래서 나온 것이 시민대학입니다. 지금은 시민사회가 아주 활성화되어 있고 시민운동이 활발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건전한 시민단체, 예를 들어서 YWCA나 참여연대 같은 건전한 시민운동 단체의 대표로서 이사를 구성한다. 이것이 시민대학이라고 부르는 이유죠. 우린 그걸 요구하고 있습니다. 심의 중에 있으니 결과는 두고 봐야죠. 한 가지 더 보태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 사립학교들이 설립자들의 개인 사유물로 되어있는 문제입니다. 설립자가 학교 운영권을 본인만 쥐는 것이 아니라 상속까지 하고 있어요. 이런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죠. 설립할 때는 개인 재산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설립된 이후에는 이것은 공공재산입니다. 사회의 재산이죠. 개인의 재산이 아닙니다. 이걸 개인 재산시하는 것을 바꾸어야 합니다.

 

상지대는 1955관서대 의숙으로 출발하여 1962재단법인 청암학원으로 정식 설립되었다. 1973년 문제의 김문기(12, 13, 14대 국회의원)씨가 3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는데, 김씨의 이사장 취임 다음해인 74년에 학교법인과 학교명칭이 각각상지학원상지대학으로 변경되었다. 1993년 문민정부시절 학교재단 비리문제로 재단이사장 김문기씨가 구속되자 새롭게 구성된 임시이사진은 법인의 정관을 변경하여 이사진을 새롭게 구성하였는데, 그 이래로임시이사체제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인터뷰에서 말한교육부를 상대로 한 소송임시이사체제정이사체제로 전환을 허가하지 않는 교육부를 상대로 상지학원이 제기한 소송을 말한다.
사학재단비리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또 인터뷰의 목적과는 달랐기 때문에 인터뷰 당시 약간의 논란을 일으켰던 질문을 하나 더 던지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기로 했다.

 

> 연세대학교가 2004학년도 신입생모집부터 기여우대제를 실시하겠다고 얼마 전에 발표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십니까?
> 사실 이게 왜 그런 말이 나오는가 하는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사립대학들이 등록금 의존율이 80%를 넘습니다. 그래서 재정위기를 해소하려면 등록금을 올리는 외 다른 방법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기부금입학문제가 나오는 것인데, 내가 보기에는 이 문제를 기여입학제로 해결하기보다는 국고지원을 높이는 방법으로 해결해야지기여입학으로 가게 되면, 만약에 돈을 낸다든지 하는 문제로 해결된다면, 이건 학생사회와 대학사회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국고지원으로 해결해야죠.

살아온 날들

 

강만길 선생은 우리와 인터뷰 하기 전에도 이미 다수의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는데, 유년기의 이야기는 별로 많지 않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강만길 선생의 연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933.10.25 마산에서 출생
1946
경남 마산중학교 입학
1952
 경남 마산고등학교 졸업. 같은 해 고려대학교 사학과 입학.

1959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같은 해 대학원 진학.
1959-1966
 국사편찬위원회 부편사관 근무(김용섭, 이현종 등과 함께)
1961
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조선왕조 전기의 공장 연구
1967
 고대교수 부임
1975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취득
1980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해직
1984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복직

1991
 월간<사회평론> 발행인

1996
 ~ 현재동아시아 평화,인권국제회의 한국위원회 대표
1996
~ 2000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통일협회 이사장
1998
~ 2000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1998
~ 현재청명문화재단 이사
1999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정년퇴임
1999
~ 2001계간 <통일시론> 편집인 겸 발행인

2001
~ 현재 상지대학교 총장

 

 

> 개인적인 질문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대학 선택하시고 대학원 진학하실 때가 한참 사회가 복잡할 때인데요. 직업으로 학자의 길을 선택할 때에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가 영향을 주었을까요?

> 우리가 대학에 들어갈 때는 6.25사변이 한창일 땝니다. 또 대학 1학기를 남기고 군대를 갔어요. 근데 그때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대학원 외에는요. 그때 대학을 졸업하고 선생으로 갈 기회도 있었는데 안 했고. 그렇다고 집안이 또 넉넉한 것도 아니었거든요. 아무런 주저없이 코스 밟듯이 대학원엘 갔죠.

 

> 애초에는 고대사에 관심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 그건 학부 3학년 때 보고서 주제를 그렇게 쓴 겁니다. 우연히 [사총]이라는 잡지에 수록이 되어서 그런건데사실 관심은 좀 있었어요. 노예제 문제였죠. 우리의 노비제도와 서양의 노예제의 차이랄까. 그래서 백남운 선생의 글도 많이 읽고 했는데.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역시 근대사를 해야겠다 했어요.

 

사회경제사의 대가 백남운은 해방 직후 조선신민당을 조직하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인 정치인으로도 유명하다. 백남운으로 상징되는 맑스주의적 역사학은 그 주역들이 대부분 월북납북되었던 관계로 10여년 이상 남한학계에서는 등장하지 못했다. 단절된 맥을 이었던 첫 세대가 바로 강만길, 김용섭 등 남한의 사회경제사 1세대라고 부르는 이들이다. 이들은 북한에서 먼저 제기된자본주의 맹아론에 호응하여 한국사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을 논증하는 이른바내재적 발전론의 토대를 닦은 주역들이다.

 

> 대학원 생활에서 어려움은 없으셨는지요.
> 그때 우리가 소위 말하는 사회경제사를 하는데, 선배학자들 가운데 사회경제사를 전공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일제시대 몇 분 계셨는데 대부분 북으로 가셨고, 역사학자들 가운데는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어떤 방법론으로 해야할지가 고민스러웠죠. 그때 김용섭 교수 등과 같이 공부할 때였는데 서로 자극도 받고 뭐 이렇게 했죠. 김교수는 농업사, 나는 상업사를 하게 된 거죠. 그게 제일 어려움이었지요. 선배들이 없었다는 것.

 

> 당시 사회경제사 연구하는 거에 대한 반대는 없었습니까?
> 있었지요. 뭐 아직도 전부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기는 그런데(웃음) 내가 고려대학에 취직을 하러갔는데, 면접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공이 뭐냐고 해서 사회경제사를 한다고 하니까 그때 이사장이 이상한 눈으로 보더라고요. ‘사회경제사란 게 뭐냐고 다시 묻길래 얼른상공업사다라고 했지요.(웃음) 그런 기억이 나는데. 조선 후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당시에는 제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조선후기가 역사적으로 몰락해가는 추세였는데 일본에 의한 개항이 그걸 되돌려 놓은 것이다라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결론이었습니다. 소위봉건사회 결여론인데실제로 그들이 사료를 갖고 구체적으로 연구해 놓은 것이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어요. 조선후기 경제사 관련 연구가 당시에 고작삼정문란정도였어요. 경제사란 것이 풍부한 것인데 매우 빈약했죠. 그래서 실제적인 자료에 근거해서 실제로 조선후기가 그처럼 몰락하고 있었는지 아닌지 밝혀야 하는 거죠. 그래서 시작하게 된 겁니다.

 

언제나처럼 그들의 첫 시작도 이처럼 어렵고 또 외로웠다. 지금에야 그게 위대한 첫걸음이었고 또 반드시 해내야 할 과업이라고 평가하지만 말이다. 책에서 볼 때에는 뭔가 드라마틱하기도 했는데, 당사자로부터 직접 듣고 있으려니 마치 군대시절의 이야기처럼 그저 재밋기만 했다. 그래서계속 재미있는 이야기만 들려주이소하고 연애담을 듣고자 말을 돌린다.

 

> 결혼은 언제 하신건가요?
> 61년도지요. 대학원 다닐 땐데. 그 때 국사편찬위원회에도 나갈 때였으니까 경제적으로는 뭐, 사실 그때 제가 결혼할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이 대학 다닐 때 다 돌아가셨어요.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결혼을 하게 된 거죠. 석사학위 논문을 쓸 때라 정신도 없었고.

 

> 사모님께서는 학자남편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으시죠? ^^)
> 글쎄, 거의 불만이지요. 평생 불만이지. 원래 학문하는 사람이라는 게 이해력이 있는 아내를 얻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요새는 좀 달라졌는데. 요새 눈으로 보면 다 옛날 사람이니까 결혼을 하면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뭐, 결혼 생활 자체에 크게 문제가 있거나 그런 건 없었던 거 같아요.

 

> 사모님께서 그래도 이해를 많이 해주시는 편이었나 봅니다.
> 이해를안 할 수가 없는 입장이지, .(웃음)

 

이 말을 하시면서 강선생은 약간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전반적인 표정은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 옛날에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 교수임용까지는 비교적 평탄하게 해오신 셈인데, 첫 번째 옥고를 겪는 게 언제, 무슨 일이었습니까?
> 학생선동이었어요. 잽혀가기를 (1980) 5 25-6일쯤 아닌가 하는데. 그때 서울에 있는 학생들이 주로 광주출신인데, 광주가 저런 상태니까 서울에서 들고 일어나려고 했어요. 황지우(시인) 이런 친구들인데. 그들이 나한테 성명서를 받으려고 했던 모양이에요. 그 계획서가 압수가 됐던 모양이에요. 난 사정도 모르고 끌려갔고. 가서 보니까 그런 이야기에요. 5 16일날 대학생들이 크게 데모를 했어요. 고려대생도 나갔는데 나도 같이 나갔어요. 학생들이 저렇게 나가는데 교수들이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젊은 교수들 몇 사람들하고 같이 나가서 시청 앞까지 나갔죠. 학생들을 보호하면서 말이지요. 이걸 경찰이 학생들을 데리고 나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학생들이 교수가 나가자고 한다고 나갈 사람들이냐? 이렇게 대꾸했지요. 그래서 뭐 그런 죄목으로 한달 정도 유치장에 있었어요. 거기서 나오니까 학교에서 사표를 요구했어요.

 

> 해직 이후 4년 간 강단에 서지 못하시면서 [(고쳐 쓴)한국근대사], [(고쳐 쓴)한국현대사]를 쓰셨는데, 어떤 글에서 보니까악에 받쳐서 썼다라고 표현하셨던데요.(웃음)
> 창작과 비평사에서 당시 생활비를 좀 도와줬어요. 그래서 책을 써야겠다 했죠.(웃음)

> 두 번째 연행되신 사건은?
> 그건 1978 (광주의) 송기숙 교수가 국민교육헌장 반대운동을 했는데 서울에서 동참하자고 해서 그러자고 했어요. 근데 뭐, 그 뒤로 연락이 없었는데, 광주에서 그 일이 터지니까 내가 같이 들어간 거죠. 나 서명은 안 했어요. 같이 하기로는 했는데. 그때 남산 지하실에 갔죠. 이틀인가 오래는 안 있었고.

 

> 그리고 1983년 말에 또 잡혀가시죠?
>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에서의 강연 때문에 이영희 교수하고 같이 잡혀갔죠. 당시 그들이 이영희 교수나 나를 내놓지 않을 수 없었?div id=”article-content” class=”text-content”>

연로한 진보학자 혹은 진보적인 노학자

 

2003년 현재, ‘강만길은 역사학자로서보다는통일운동가로 일반에 더 잘 알려져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는 강만길 선생 본인의 최근 관심사를 반영한 것이기도 한데, 기실 강만길 선생에게통일운동가역사학자는 다른 의미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 보수가 되기 십상이라는데, 강만길 선생의 글을 보면 갈수록 앞으로 내닫는 발걸음이 빨라지고 또 경쾌하다.

 

 통일관련 강연요청이 있으면 사양하지 않고 어디에든 갑니다. 내일도 지방에서 강연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

 

유신 때와 비교해 보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글과 행동을 일치시키기란 쉽지 않다. 강연은 또 다른 글쓰기고, 글쓰기는 말하기의 연장이다. 그의 글과 말 속에는 일관된, 그리고 단 한가지의 주제가 있다. 바로통일이다. 저 건너 위태롭게 벼랑에 서 있는우리의 반쪽이와 관련된 질문을 시작으로 넓은 의미에서 분단과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 북한문제와 관련해서는 선생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2000년 정상회담 때 그리고 작년 3월 학술회의 때 방북하셨죠?
> 2000 11월 달에 또 한번 들어갔었지요. 2001 3월 학술회의 준비차 갔더랬지요.

 

> 여러 번 방북하셨는데, 남다른 감회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 많죠. 우선 거기 감으로서 북쪽을 훨씬 더 많이 알게 되었다는 거. 우리 통일문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앞으로도 남쪽사람들이 북쪽에 많이 가봐야 한다. 많이 가봐야 실정을 알게되고, 또 우리의 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될 거에요.

 

> 방북하시면서 만난 북한사람들에 대한 인상은 어땠습니까?
> 주로 역사학자들을 만났는데, 특히 남쪽에도 많이 알려졌지만, 허종호교수, 또 우리가 전부터 알고 있던 분들은 대부분 돌아갔고젊은 역사학자들을 제일 자주 만나고또 이야기도 많이 한 사람은 허종호(북한 사회과학원 조선력사학회 회장) 박사죠.

 

> 자료를 보니까 선생님께서 북한학자를 처음으로 만난 건 1998년 상해의 한 학술대회였는데요?
> 상해에서 만난 사람은 역사학자는 아니었어요. 그때 가서 만난 감격이나 인상하고, 그 뒤나 별 차이가 없어요. 다 우리 민족이고 또 같은 대학교수이고그렇게 큰 차이를 못 느꼈어요.

 

> 북한학자들은 남한 학계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던가요?
> 우리 읽는 글 다 읽고, 우리 경력도 다 알고 있고정확하죠.

 

> 94년 당시 만날 때는 정보기관에서 교육(?)은 받으셨나요?
> 그때는 뭐, 지금도 하고 있잖아요, 북한사람을 만날 때 쓰게 되는 접촉허가서(?)를 받아야되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땐 어느 정도 교육도 받았던 거 같아요. 요새는 접촉허가만 받으면 되죠.

 

분단 이래로 남북한은 각기 상대방에 대한 법제적 인정을 해놓고 있지 않다. 물론 국제법적으로 양체제는조약에 준하는 형태로 상대 체제를 인정해 놓고 있지만, 국내법 상으로 양국은 모두 전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점이 현재 논란중인실정법을 넘나들 수밖에 없는 통치행위가 발생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그 행위에 대한 사과(혹은 처벌)를 요구하는 원칙주의자들의 논거가 된다. 통일부 홈페이지에는북한주민접촉허가서라는 문서양식이 올라있는데, 문서의 아랫면에는 다음과 같은 지시문이 등장한다. 세상이 좋아져서 문구가 많이 세련되어졌다.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 제9조제3항 및 동법시행령 제19조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북한주민과의 접촉을 신청하며, 북한주민과의 접촉 중 국가안전보장, 공공질서, 공공복리 및 남북한 관계개선을 해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임을 서약합니다.”(북한주민접촉신청서 가운데)

 

> 남북한 학자의 공동연구 경험도 몇 차례 있으신데, 이후의 계획은 어떠신지요.
> 사실은 남쪽의 역사학자들이 북에 가서 많이 봐야 한다고 생각해서 남쪽의 역사학자들을 모아서 북에 가려는 계획을 세웠었어요. 근데 핵문제 때문에 또 막혀버렸어요. 유감스러운데 앞으로 그 계획은 상황이 풀리면 추진할 겁니다.

 

> 공동연구를 할 때에 장단점은 어떤 게 있을까요?
> 지금까지는 일본과의 관계, 독도문제나 식민지 문제 등을 했기 때문에 그건 남북의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는 그런 문제는 아닙니다.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는) 그런 문제는 피했기 때문에, 주로 일본관련 문제만 다루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었지요.

 

직장야구팀의 친선경기밖에 안 해본 놈이 메이저 리그 톱스타를 어렵게 만나는 자리에서당신 타격 스탠스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라고 말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동네축구인도 나름의 축구관이 있고, 헌책방 아저씨 가운데에는 웬만한 서지학자 뺨칠 정도의 견문을 가진 이가 드물지 않다.
일본과 관련된 문제에 남북의 이해관계가 다를 수 없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답변이었다. 독도(+일본교과서) 문제를 제외한다면 남북은 대일정책에 있어서 매우 다른 길을 걸어왔고, 또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으로 보인다.

 

> 남북한을 모두 아우르는 교과서 서술의 필요성을 말씀하셨는데, 현재 누구도 시도를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계획이 없으신지요.
>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해방 이후 남쪽은 남쪽 역사만 쓰고 북은 북의 역사만 쓰고. 남한에서는 이후에 이제 북한사라는 이름으로 씁니다. 역사서술 자체가 분단되어 있는 거지요. 하나로 된 우리 현대사가 필요하다, 완전 통일이 되기 전에도 그런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남북의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통일을 앞당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상황이 어렵습니다만 앞으로 좀 더 상황이 진전되면, 어느 시기엔가는 가능할 것입니다. 방법으로는 제일 좋기는 남북의 역사학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하는 것이겠지요.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면 남쪽의 역사학자만이라도 개별적으로 우리 현대사, 남한도 북한도 아닌 우리 전체의 현대사를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비교적 일찍 착안을 해서 고민을 좀 했는데, 그렇게 객관적으로, 그러니까 남에서도 문제가 안 되고 북에서도 문제가 안 되는 그런 역사를 앞으로 써나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시일이 많이 필요하지요. 내 나이가 그렇게 될까 싶습니다.(웃음)

 

남북을 아우른 교과서라. 뒤에 다시 나오겠지만현행 국사교과서에 대한 강만길 선생의 입장은 국정교과서의 폐지론에 서 있다. 아무리 국사교과목이라 하더라도 정부가 저술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나중에 다시 나오게 된다.

핫 이슈, “북핵문제

 

강만길 선생과 인터뷰를 했던 시기는 2002 11월 중순경이었다. 따라서 지금과 약 두세 달의 시차를 두고 있는 셈이다. 애초 시민방송(R TV)의 인터뷰는특별한 이슈때문에 강선생을 선정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마침 당시가북핵프로그램파문‘(켈리 대북특사가 방북 이후 불거져 나온 소위우리는 핵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란 발언으로 시작된 일련의 국제적 파장을 가리킴) 직후였던 지라 이 문제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북한의 소위핵프로그램 10 16일에 알려졌으니, 약 한 달쯤 됐습니다. 그 뉴스를 들으실 때 느낌이 어떠셨는지요?

> 핵문제는 내가 전문가는 아닌데일반론적으로 말하자면핵문제는 두 가지가 있지요. 평화적인 핵의 사용문제와 군사적인 핵, 그러니까 핵무기인데,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핵은 많이 가진 자부터 없애야 합니다. 왜 많이 가진 자는 가만이 있고, 여러 가지 이유, 자위수단이나 이런 걸로 조금씩 가지겠다고 하는 쪽부터 먼저 압박을 해야 하는가. 이것은 핵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핵무기가 얼마나 무서운 겁니까? 그렇다면 이건 많이 가진 쪽에서부터 핵을 없애가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절차지요.

 

> .
> 물론 많건 적건 원칙적으로 핵무기는 없어야 합니다. 가공할 무기인데. 한데 누구는 가지고 누구는 못 가진다. 가진 자는 강자가 되고 못 가진 자는 약자가 되는 이런 원리는 곤란합니다. 또 한 지역에서도 어떤 나라는 가지고 어떤 나라는 못 가지게 되어 가진 측은 언제나 강자가, 못 가진 쪽은 언제나 약자가 되는 현실은 아주 잘못된 현상입니다. 핵이 위험하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니까 많이 가진 자가 먼저 없애야지요. 많이 가진 놈이 적게 가진 자한테 없애라고 하는 게 도대체 무슨 논리인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 현 정권의 대북정책과 관련해서 많은 말이 있습니다. 대선 과정에도 그랬고. 중유공급중단 문제나 북한 침공문제 등등과 관련해서 여러 이야기가 오가면서 화해국면의 한반도가 다시금 위기상황으로 접어들고 있는 듯 합니다.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어떤 처방이 필요할까요?
> 대북관계는 개인이건 단체이건 북을 화해의 대상으로 생각하느냐 적대의 대상으로 생각하느냐의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화해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북한의 체제를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정권이건 자신의 체제를 무너뜨리면서까지 화해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북한이 핵을 가졌는지 여부를 알 수는 없지만, 가졌다면 미국이라는 엄청난 핵무기보유국과 적대관계에 있다는 사실, 그로 인해 자위책으로 가지려고 하는 겁니다. 따라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게끔 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바로 북미 간의 적대관계를 푸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쪽에서도 무장을 풀지요. 근데 계속 압박을 하면서 핵무기를 못 갖게 하는 것은 무조건 항복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북한의 체제를 인정을 해주고, 북한이 무장을 하지 않게끔 푸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만 침략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조약상의 보장을 요구하는 거지요. 아무리 대통령의 말이라도 입으로만 말하는 것과 문서로 남기는 것은 다르지요. 북의 핵문제를 제대로 풀어나가려고 하면 당장에는 미국쪽이 더 너그러워야 합니다. 남북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문가들은 남한이 북한의 20배의 국력을 갖고 있답니다. 너그러워야지요. 그리고 적대의 대상이 아니라 화해와 협력과 평화의 대상으로 생각하면 문제가 어렵지 않게 풀립니다.

 

핵무기가 나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강만길 선생은 평화적인 핵의 이용을 인정하는 편이지만, 그조차 거부하는 환경주의자들이 점차 많아지는 추세다. 미국은 핵을 평화롭게 이용하는 국가이자 야만적 목표에 활용해보았던 유일한 국가인데 그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6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45
7, 이탈리아와 독일은 이미 항복했고 마지막 남은게다짝 신은 키작은 애들의 저항만 분쇄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무더운 남방전선에서 훈도시 차림의 이 무지막지한 동양전사들의 저항에 진저리가 난 미국은 미덥잖은 소련을 극동전선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45 2월 얄타에서 이미 비밀리에 합의된 바 있었다.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 문제를 교섭하려던 미대통령 트루만은 7 16일 참모로부터 다음과 같은 귀띰을 받게 된다.

 

가카, 알라모고도로부터 연락입니다. 불꽃놀이가 성공적으로 끝났답니다.”
머라꼬? 일마 이기 정신이 있나 없나? 정상회담으로 바빠 죽겠구마, 그런 사소한 일까지 내한테 보고해야되나? 거 불이나 안 나게 조심들 해라케.”
(YS톤으로)
“……”

 

소위맨하탄프로젝트로 유명한 미국의 핵폭탄 개발계획은 1941년에 개시되어 이날, 그러니까 1945 7 16일 멕시코주 알라모고도(Alamogordo)에서 원폭실험이 성공으로 그 결실을 맺게 된다. ‘로열스트레이트 플러쉬‘, ‘마스타카드(Master Card)’, ‘S-1프로젝트등등으로 불리던 원폭개발 계획이 성공함에 따라 미국은 소련의 빠른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서 동경과 나가사키에 하나씩 낙하시켰다. 이 효과적인 살상무기의 위력을 확인한 강대국들은 경쟁적으로 개발에 착수하여 소련, 프랑스, 영국, 인도, 파키스탄, 중국, 이스라엘 등등이 원폭보유국에 이름을 올려놓게 된다. 남한과 북한 역시 이자랑스러운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적대관계 해소를 위해인정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남북동시 유엔가입과 합의서 교환으로 법적인 상호인정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보다 더 진전된 인정, ‘허용이 필요할 땐데요, 법적인 문제 말고 아직 남한이 북한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분야일까요?
> 지금 북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다시피 사회주의권이 몰락했고, 거기에 경제적으로 미국의 경제봉쇄, 자연재해 등등 복합적인 어려움에 봉착해 있습니다. 이걸 어느 정도 남한이 잘 이해해주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곤경에서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남한이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민족으로 볼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적으로 본다면 무너지길 바라겠지요. 한데 지금은 남북관계가 적대관계로만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구상에 같은 민족이 분단되어 있는 곳이 한반도가 유일합니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 있더라도 남북이 적대관계에서 위기가 상존해 있는 지역으로 지목받는 상황에서 어떻게 세계 무대에서 한국인이 떳떳하게 활동할 수 있겠습니까? 좀더 사람답게, 허리펴고 떳떳하게 살기 위해서도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사실 위의 질문은도대체 언제까지 북한에 대한 비판을 참아야 하겠습니까?”라는 인터뷰어의수구적 본능에서 나온 불평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말은 쉽지만 분단이라는 장애에 대한 실감을 별로 하지 못하는 전후세대인 나로서는 쉽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문제가 대북문제다. 언제나 대북강경책과 반북이데올로기를 부추기는 작자들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북한에 대한없는애정을 의식적으로 쥐어짜냈던 것 같다. 이 기회에 강만길 선생께 북한문제에 대한 나의 시각을 교정받아 보고자 하는 것은 인터뷰에 대한사적인 기대였다. 특히 북한체제에 대한냉전적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

 

> 현장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이 곤혹스러워하는 문제가운데 하나가 탈북자 문제, 인권문제입니다. 보수언론이 전가의 보도처럼 이용하는 문제인데요. 북한에 대한 철저한 인정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 문제까지 포함되는 것인가요?
> 탈북자 문제는 살기 어려우니까 결국 탈출하는 건데이걸 해결하는 길은 탈북자가 안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안 생기게 하는 것은 북의 경제적 회복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탈북자들이 남한에서도 적응을 잘 못하고 또 중국하고 마찰도 생기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됩니다. 궁극적으로 탈북하지 않아도 되게끔 북한의 경제를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 외에 다른 해결책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백만의 탈북자가 나와서 북한이 완전히 붕괴되는 상황인가 하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그럴 경우 중국이 가만이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경우라면 6.25때 남한이 북진통일을 이룬 것과 같은 상황이 되는 것인데, 중국이 그런 사태를 두고보지 않지요. 지금 이제 인권문제를 이야기하는데인권문제는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세계의 기준에 의해서 볼 때에 그런 겁니다. 북한의 인권문제는 남한이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데북한은 지금 생존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저 어려운 조건 속에서 밥을 굶는 어려운 상황, 또 전력이 없어서 아파트가 출퇴근 시간만 엘리베이터가 가동되는 상황인데인권문제보다 생존문제가 먼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뭐랍니까너무 북의 입장에 선다고 할지 모릅니다만, 사실 우리가 남북 문제를 생각할 때에 언제나 남의 입장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북의 입장에 설 필요가 있습니다. 역지사지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강만길 선생의 대답은생존이 문제인 사람에게 예의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라고 단순하게 정리해볼 수 있겠다. 예의는인간답게사는 문제이고 생존은 말 그대로살아남는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는 절박한 문제이다. 언뜻 쉽게 결론이 내려지는 문제인 듯도 했지만, 나중에 박정희에 대한 평가문제와 관련해서 다시 미궁으로 빠지게 되었다.

통일, 이미 걸어오고 있는 길 이름

 

 

북한의 핵문제는 자연스럽게통일이라는 민족적 당위의 문제로 이어졌다. 굳이 같이 살아갈 이유가 없는 존재에 대해서는 무시하면 그만이다. 모기나 날파리 쫓듯 휘휘 손사래 쳐서 멀리 쫓아버리면 그만이다. 팔자나 운명은 그런 점에서 무척이나 가혹하다. 쉽게 쫓아내버릴 수 없다. 함께 살기엔 더더욱 쉽지 않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감옥에 갔으며 앞으로 또 갈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돈을 손해볼 테고 어떤 사람은 기분이 상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에게 통일은 오매불망 꿈에도 그리는 첫 번째 소원이기도 하다. 왜 그런가?
강만길 선생은 우리에게 왜 통일이 필요한지, 왜 그것이 운명이나 팔자가 아니라 세계사적 발전법칙에 부합하는필연적인 도정일 수밖에 없는지 따끔하게 가르쳐준다. 서슬 퍼런 유신 말기부터 시작된 그의 통일철학을 들어본다.

 

> 78년의 분단시대 역사인식에서 처음 제기하신 남북을 아우르는 역사관, 북한의 입장에서도 사고할 수 있는 사고이런 건데. 선생님께서는 92년 남북합의서를 강조하십니다. 7.4 남북공동성명이나 80년대 후반의 대중적 통일운동이 아니라 남북합의서를 중요하게 평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늘 제가 말하지만 베트남식의 전쟁통일이나 독일식의 흡수통일이 아니라 협상통일만이 우리의 방법이라고 늘 이야기합니다. 남북합의서로 말하자면 사실 그것이 공존관계를 정착시킨 것이지요. 협상통일을 위해서는 공존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불가침을 약속하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지요. 그 바탕 위에서 협상을 통해서 통일로 갈 수 있는 겁니다. 92년인가요, 남북합의서가 남북의 공존을 위한 바탕을 마련한 셈이고, 6.15 공동선언은 평화정착을 위한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합니다. 6.15 공동선언 이후에 장관급회담이 이루어지면서 거쳐 철도가 이어지고, 또 공단을 만든다, 육로관광을 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이건 통일의 과정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것은 남북한의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 이런 것은 아니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과정의 사업이지요. 평화가 상당히 정착된 시점, 휴전조약을 평화조약으로 바꾸고 또 군축을 하는 단계를 거쳐 상당한 정도의 평화가 정착되어야만 분리된 남북의 두 체제를 어떻게 하나로 만들 것인가하는 문제가 논의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협상통일은 우선은 공존(상호인정) 단계, 평화정착 단계, 그 다음에 이제 통일단계로 접어드는 과정입니다. 지금 현재는 이제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드는 과정입니다. 만약 통일과정을 좀 넓게 설정해서 상호인정평화정착과정까지 포함한다면 통일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지요?

 

> .
> 우리의 논의가 어떻게 통일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전제하지 않고 자꾸 통일 통일하는데, 그게 아니라 어떤 과정을 밟아서 어떤 통일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대로 이해해야지요.

 

1992 9 17 3항의 부속합의서(protocol)의 채택으로 마무리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는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이조약으로서 상대방의 존재와 불가침, 교류 등에 대한 약속을 남겼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적십자를 통한 교류나선언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남북 양측이 일종의약혼신고를 한 셈이다. 이때까지 남북은 서로에 대한 철저한 불인정, 괄시, 무시, 흘겨보기, 홀대, 비아냥, 꼬집기, 할퀴기, 물어뜯기, 쥐어박기, 걷어차기, 꼬집기, 심지어는빠샤‘(!)까지,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서 상대방을 괴롭혀왔다. 물론 그 사이 적십자 회담이나 7.4 남북공동성명과 같은 막간극을 벌이기도 했지만 큰 흐름은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역사였다. 한데 그 물꼬가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시점을 강만길 선생은 1992년 남북합의서 채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 선생님께서는 “20세기적 근대, 한국적 근대는 통일이 되어야 완성된다고 하셨는데, 대략 언제쯤으로 예상하고 계십니까?
> 그것은언제냐보다어떤 통일이냐하는 문제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남에서는 1 1체제를 통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데 북에서는 1 2체제라도 통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만 합니다. 어떤 통일을 할 것인가. 1 1체제로 간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겁니다. 한데 지금은 그 논의를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북에서 말하는 1 2체제 소위 연방제 통일안을 남에서는 적화통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쪽에서 그 통일안을 찬성하게 되면 국보법에 걸립니다. 근데 과연 1 2체제 통일안이 과연 적화통일안이냐, 아니면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면서 통일을 하려는 체제유지통일안이냐 이런 문제도 있습니다. 한데 그런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될 수가 없죠. 그래서 세월이 좀 지나서 이런 문제가 학계에서나 사회에서 활발하게 논의가 진행될 수 있게 되면 우리의 통일이 언제쯤 가능할지어떤 통일이냐라는 문제가 선결되어야지, 그것을 기초로 해서 언제쯤 될지 결론이 나오겠지요. 언제 통일이 될 것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 연방제 문제는 지난 정상회담으로 상당부분 금기가 풀린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 6.15 공동선언의 제2조항인데사실 따지고 보면 조항은 대단히 애매한 소리입니다. 여기서는 연방제를 승인한 거 아니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아니지요. 원래 연방제는 군사·외교권을 하나로 하는 겁니다. 당장에 군사외교권을 통일하는 문제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 다음 장관급 회담이 이루어지면서 외교마당에서 협조하겠다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당장 하나로 할 수 없으니외교마당에서 협조한다이게 낮은 단계이죠. 지금은 아닙니다만, 앞으로 국방장관 회담이 더 진전되면 남쪽에서 군사훈련을 하거나 이동이 있을 때 북한에 알려준다거나 참관을 하게 하는 것. 공격용이 아니라 훈련용이라고 통보하는 것이죠. 이렇게 하는 것은 군사권을 하나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낮은 단계인 겁니다. 그렇죠? 공동선언의 조항이 대단히 애매합니다만, 사실 지난 20년 간 남북한의 연방제와 연합제는 완전한 평행선을 긋고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이제 조금씩 양쪽이 방향을 틀어서 미래의 어느 시점에 합치될 수 있도록 하자 하는 뜻을 갖고 있는 거지요.

 

 

> 결국 지향해야 할 점은 남북이 같은 체제 하에 사는 것이 궁극적인 통일이라고 봐야겠지요?
> 세계사의 흐름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중국은 지금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체제 아래에서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홍콩도 이미 중국 아래에 들어와 있는 거고. 이런 것이 언제까지 가능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고. 1 1체제만이 완전한 통일인가 하는 문제인데. 20세기 동안 독일과 베트남이 1 1체제로 통일했습니다. 한쪽은 전쟁을 통해서였고 한쪽은 흡수통일이었습니다. 한데 우리는 지금 전쟁통일은 물론이고 흡수통일도 반대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그렇다면 흡수도 아니고 전쟁도 아니면서 1 1체제로 갈 것인가? 아니면, 뭐 이런 말하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지 모르겠습니다만(웃음), 우선은 중간 단계로서 1 2체제로 갔다가 다시 마지막에 1 1체제로 갈 것인가. 이건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또 실험이 필요할 것입니다. 북에서 지금 신의주 특구를 하겠다고 하는데. 이건 사회주의체제 안에 한 부분으로 자본주의를 두겠다는 겁니다. 군사권과 외교권이 없는 거지만. 이건 통일의 한 실험입니다. 북한사회와 신의주특구가 어떤 관계로 발전할 것인가, 이게 서로 보조적인 역할을 할 것인가, 아니면 예전처런 적대적 관계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지요. 남쪽의 자본주의와 곧바로 그런 실험을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많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특구를 통해서 시험을 해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 시험의 결과는 우리의 통일과 관련해서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요.

어느 시점을통일이라고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비단 일반 국민들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북은 물론이고 통일에 한평생을 고민해온 통일 운동가들 사이에도 일치되지 않는 논쟁적 문제이다. 한때, 그러니까 남한의 정치체제가 아스팔트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을 때, 또 변혁운동도 그에 걸맞게이분 저분 모든 분이 함께하는대동잔치처럼 분화되지 않았을 때, ‘통일은 계급갈등, 지역갈등, 남녀갈등(?), 노소갈등 등 모든 부조리와 모순의 해소와 동음이의어에 가까웠다. 80년대 이후 운동이 이념적으로 계급적으로 세련되어 감에 따라 통일의 의미에 대한 이해방식도 분화하기 시작했다. 80년대, 통일관의 차이는 남한 사회의 변혁이 우선이냐 통일이 우선이냐 양자가 함께 가는 것이냐 등을 둘러싼 다분히엘리트 중심적 논쟁이었는데, 2003년 현재의 지형은 다소 변화한 것 같다. ‘통일변혁의 우선순위 논쟁은 이제 한물 가버린 것으로 보이는데, 그 주된 원인은변혁의 가치가 심각하게 훼손되어 버린 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변혁은 언제나 급격한 사회경제적낙차를 가진단절을 의미했는데 오늘날 이 같은 가능성은 이제 아예 물건너 간 것 같다. 요즘 세상에 도대체 어떤 시점을, 어떤 사건을 두고 변혁이라 불러야 할지 누구도 답하지 못할 것이다. 미국이 무정부상태에 빠지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다우지수가 ‘0′을 기록하는 날이 온다면, CIA가 해체되는 세상이 온다면 아마 그건 변혁(혹은 파국)의 날로 기록될 만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민주노동당이 원내로 진출하는 날이 그 날(역시 변혁 혹은 파국의 날)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이마에 굵은 주름간 사나이가 청와대에 입성하는 날(마찬가지로 낭패 혹은 환호의 날)이 그 날이 될 수도 있다.

 

통일은 그렇지 않은 줄 알았다. 나는 여전히 통일은 삼팔, 아니 휴전선이하고 터지는 구체적인 날짜가 정해지는 사건인 줄 알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처럼 말이다. 한데 강만길 선생의 말씀은 그같은통일관이 사실은허상임을 깨우친다. 통일은사건이 아니라지난한 과정에 대한 이름이다. 따지고 보면통일포비아는 한순간에 우리가 딱딱한 북한의 체제 아래에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이었고, 그들이 우리의 방만한 체제에 내던져진다는 공포였다. 사춘기 소녀의첫날밤 포비아와도 비슷하겠다. 순진무식한 인터뷰어에게 강만길 선생은, 첫날밤을 치르기 전에 우리는 손도 잡아야 하고, 어깨도 보듬어 봐야 하고, 입술도 적셔봐야 하고 또아무튼 한 걸음 두 걸음, 한 꺼풀 두 꺼풀 차근차근 진행해야 한다고 일러주신다. 물론 우리 가운데에는 손잡은 순간 애인이라고 성급히 외치는 철부지도 있겠지만, 결혼하고 수십 년이 흘러도아직 마누라는(남편은) 믿을 수 없어라며, 법적 혼인관계보다 심리정서적 혼연일체감의 성취를 진정한 의미의결혼단계로 인정하려는 신중파들이 있을 테다. 이 경우 누구도 정확한시점을 결론 내릴 수는 없다. 매우 우둔한 질문이었다. 따라서 인터뷰어는 재빨리 화제를 돌려 즐거운 지난 여름의 추억으로 선생을 안내하면서 마무리했다.

 

 

> 6.15 남북합의서는 현지에서 보신 거지요?
> 물론이지요.

 

 

> 처음 그 합의서를 접했을 때 감회가 어떠셨습니까?
> 평양 순안비행장에 우리가 탄 비행기가 (대통령 전용기보다) 먼저 내렸습니다. 기자들과 함께. 대통령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현장에 나왔어요. 그 순간에, 상당한 가능성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틀 동안 상당히 어려웠어요. 그랬는데, 6 14일날 저녁 만찬장에서 합의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때 정말 대단히 기분이 좋아서 술도 좀 먹고 그랬지요.

 

 

이 말을 하는 강만길 선생의 표정에서 당시의 흥분을 읽을 수 있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한다

 

 

논쟁적인 말이다. 역사는 그대로이지만 역사교과서는 수시로 바뀐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는 현재가 주도할 수밖에 없는청문회형대화일 수밖에 없다. 현재는 우월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과거가 갖지 못한 정보를 끊임없이 수집하거나, 자신의 전망을 변화시키거나, 질문자를 바꿔가며 과거를 압박한다. 결국 지금까지 과거는 언제나 질문자들이 원하는 답변을 충실히 전해왔다. 이 대화법의 매뉴얼은 일찍이 이 에치 카아 선생이 간결히 정리하신 바 있으니 달리 덧붙일 필요는 없으나, 50여년 이상 생명력을 유지해오던 한반도의 패러다임이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지금 현재 특별히 고충을 느끼는 집단은 다름 아닌 역사가일 테다. 앞서도 언급하였듯 강만길 선생은 1978 ?분단시대 역사인식?이란 책으로 이같은 고민의 일면을 토로한 바 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강만길 선생은 새로운 역사서술의 필요성을 제기해왔는데, 2000년 정상회담을 현장에서 목도한 그의 주장은 점차 구체적이고 또 강도 높게 이어진다.

 

> 북일수교 문제도 현재 난관에 빠진 상태입니다. 여러 글에서 북일수교가 남한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현재 진행되는 수교는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 북일수교가 한일회담의 전철을 밟지 않아서야 한다는 점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한일조약의 어느 곳에도 일본의 35년 간 강제지배에 관한 사실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또 배상조약이 아닙니다. 현재의 북일조약, 조일조약이죠. 만약 이것도 한일조약처럼 된다면 영원히 역사의 왜곡을 시정할 수 있는 길이 없게 됩니다. 양국 사이에 분명히존재했던 지배피지배 관계가 어디에도 남지 않게 되는 거죠. 나중에 통일이 되면 조약이 이제 하나로 합쳐져야 되는데, 그때는 이제 제대로 된 조약이 표본이 되겠지요. 또 배상도 받아야 되고. 지금 납치문제로 잘했네 못했네 하는데, 35년 동안 한반도 사람들에게 일본이 가했던 압박과 희생이 얼마인데그 문제(납치자문제)가 일본 언론에 크게 나와서 문제로 삼음으로써 결국 배상금을 줄이고 또 조약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책략이지요. 거기에 쉽게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물론 납치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35년간 일본이 가한 압박과 희생과 비교가 안 되지요. 그 문제 때문에 조약에서 일본이 유리하게 하려는 시도는 일본이 다시 죄를 짓는 겁니다. 특히 남쪽에 있는 사람들은 북일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문제입니다. 북일수교는 통일 이후에 한반도와 일본이 어떤 관계에 놓일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이걸 이해하고 조일조약이 정당하게 올바르게 이루어지도록 협력해야죠.

 

> 이 문제는 북일수교의 문제를 계기로 남한에서도 과거청산문제가 좀 더 냉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한데 오히려 남한의 주요 언론들은 이 문제를 북한의 대남공작과 관련한 사과의 문제로 다루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쉽게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수언론의 시각문제도 있지만 그같은 인식이 일반국민들 사이에서도 없지는 않거든요. 한국전쟁의 문제라든지. 냉전기간 동안 진행되었던 남북간의 여러 불행한 사건들에 대해서는 어떤 자세로 접근해야 할지
> 아주 간단합니다. 4.3문제가 해결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해방 후 50년 동안 남북이 완전한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역사해석이 적대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한데 지금은 이제 화해의 시대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역사서술이 재해석되어야 할 부분이 상당히 많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우리 민족 문제나 세계평화문제를 생각해서 남북이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아니면 화해관계로 돌아서는 것이 바람직한가? 이건 누구에게 물어봐도 명확한 문제입니다. 화해관계로 돌아서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과거 50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과거처럼 적대관계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화해의 입장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인터뷰가 있기 직전이었던 2002 11 20, 정부의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는 신고된 제주 4.3항쟁 희생자 14천 여명 중에서 일단 1715명을희생자로 지정하고 명예회복 절차를 밟기로 했다. 오랫동안폭도라는 라벨이 붙었던 제주 4.3항쟁의 참가자들에게희생자라는 새로운 라벨을 붙여주기로 했다는 결정이다. 하나의 사건이다. 주지하듯 그 뒤 많은 민간단체들, 한국논단을 비롯하여전몰군경 무슨무슨회‘, ‘애국 여차저차회‘, ‘건국동지 이런저런회‘, ‘애족일념 기타등등회등의 단체에서 이같은 정부의 조치를선전포고로 간주한 듯한 성명을 신문지상에 늘어놓았다. 아직 화해할 준비가 덜 되었다는 뜻 정도로 이해해주자. 열받은 사람이 열을 식히려면 시간이 좀 걸리기 마련이다. “당신들은 받을 열이라도 남았지만 그들은 싸늘한 얼음장이 된 지 50년이 훨씬 넘었다. 그것도 누명을 쓴 채로라고 타이르면 사람인 이상 이해하리라.

 

4.3 항쟁, 대구인민항쟁, 2.8 구국투쟁, 5.10 단선반대투쟁, 여순봉기, 유격투쟁 등등 아직 많은 사건들은화해의 시각에서 새롭게 쓰여야한다. 당연히 용어도 적절하게 고쳐져야 하고. 한데통치행위라는 광범한 행동자유를 보유한 대통령조차 쉽게 접근하지 못할 한가지 사건이 있는데, 아마도새로운 역사쓰기의 최종 순간에 새롭게 고쳐질한국전쟁과 관련된 무엇일 것이다. 놀랍게도 강만길 선생은 김대중 대통령이 국군의 날 치사 때 썼다는통일시도란 용어와 유사한통일전쟁이란 용어를 1999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워낙이 민감한 사안이라 인터뷰어의 질문도 좀 길어진다.

 

> 관련된 문제를 좀 구체적으로 여쭙겠습니다. 가장 어려운 문제인데 한국전쟁 문제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국군의 날 치사에서 사용했던 용어도 이와 관련되어 있는데. ‘통일전쟁이라는 용어가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이랄까요, 젊은 연구자들도 섣불리 잘 쓰지 못하는 용어인데 선생님께서는 좀 다르신 것 같습니다. 단순한 용어의 문제가 아니라 그같은논쟁적용어의 사용을 통해서 후학들에게 혹은 이 사회에 던져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학자나 교육자는 어디까지나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이들이 자신의 이론을 현실에 묶어두면 존재의의가 사라집니다. 6.25 전쟁은 사실 처음에는 북에서 통일할 뻔했고, 유엔이 참전하면서 남에서 통일할 뻔한 사건입니다.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안 되었지요. 한데 이를 침략전쟁으로 보면 적개심과 원한과 이런 것들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한데 이를 통일전쟁으로 보게 되면 어떤 결론이 나오는고 하니, “한반도는 전쟁의 방법으로는 통일이 안 되는 곳이다라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것이 6.25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역사적 교훈입니다. 전쟁의 방법으로 통일이 안 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평화통일안이 나오게 됩니다. 평화통일론도 처음에는 이적론(利敵論)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상식이 되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6.25 전쟁을 침략전쟁으로만 보면 언제나 원한과 적개심을 갖게 된다. 북을 적으로 생각할 때는 그것이 효력을 가졌지만, 민족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고자 하는 지금, 북한을 화해와 협력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지금은 역사인식이 크게 바뀌어야 합니다. 그 중요한 고리의 하나가 바로 6.25 전쟁입니다. 전쟁으로는 불가능했음에도 당시에는 남과 북이 모두 전쟁으로 통일을 하려고 했어요. 남쪽에서도 북진통일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평화통일론이 나오게 되는 거지요. 지금은 상식이지요. 역사학이 이런 역사의 진실이라고 할까, 역사의 이해방법이라고 할까 이런 것을 이야기해야지요. 그게 역사학자의 의무입니다. 그런 민족적인 문제를 역사학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역사학이 존재할 이유가 없지요.

 

> 남북한 정권의 정통성 문제가 사실 기존의 역사서술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요, 관련된 질문입니다만, 남북한이 관련된 사건의시시비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까요?
> 역사학자들이 인식이 아까 말한 것처럼 화해적인 평화통일적인 방향으로 바뀌게 되면 개별사실들에 대한 해석이 바뀌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대립적 인식 속에서만 연구가 이루어져왔는데, 이제는 대립이 아니라 화해와 협력의 인식으로 바뀔 겁니다. 당연한 거지요. 옛날에 천주교를 사교라고 생각했을 때 천주교 박해는 신유사옥이었는데, 종교자유가 인정되면서 신유박해가 되는 거지요.

 

괜히 새가슴이 되어 질문을 던졌다. 사실 강만길 선생의 부연설명을 듣고서도 한글 독해가 잘 안 되는 남산 벙커 속의 닭머리들은세상 참 좋아졌다…’라고 한탄할지 모르지만 사실 선생은 매우 강한 비판의 속내를 갖고 있다.
옹진반도에서부터 시작된 대규모의 포격을 신호로 동부전선으로 전개된 1950 6 25일의 전면전은 지리한 3년간의 공방 끝에 약간의 경계선의 변동과 엄청난 인명의 희생으로휴지(休止)’되었다. 아직까지는휴화산에 속한다. 한데 6 25일 이전, 그러니까 남북에 각각 분단정권이 들어선 1948 9 9일 이후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전쟁시나리오는 허풍이건, 진짜이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이승만, 이범석 같은 건국의 영웅들이 그랬고, 김일성과 박헌영 같은반역의 무리들이 또 그랬다. 미국은 6 19, ‘인민군 공격부산 방어선으로의 신속후퇴인천에서의 합동작전으로 이어지는신기(神氣) 내린 무당에 가까운 예언적 전쟁계획 ‘SL-17′을 승인유포했다. 이 모든 전쟁책동에는 한결같이 ‘()통일‘(reunification)이란 단어가 나란히 등장했다.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가장 침튀기는 논쟁은누가 먼저 총질 아니 대포질을 해댔냐인데, 강만길 선생의 말은 누가 먼저이건 간에전쟁은 통일을 위한 수단이 결코 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여기까지 들어놓고서도 아직도 경기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면 연락주기 바란다. 이제 갓 돌 지난 아들 주려고 미리 사놓은 [‘아장아장한글 첫걸음. 너무너무 쉬워요!]란 그림책을 보내드릴 터이니.

역사책의 쓰임새, 역사학자의 가치

 

 

2002 7 29일 교육과정평가원 검정을 통과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김영삼 정부에 대해선 비리와 대형사고 등으로 평가절하하고 현 정권인 김대중 정부에 대해선 개혁과 남북화해, 노벨상 수상 등을 집중 부각시켜 교과서를 정권의 도구로 이용한다는 비판이 일부언론을 중심으로 크게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러면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를강남지역의 수입 소비재를 중심으로 한 이상과소비현상을 억제하고, 또 침체에 빠진 생명보험업과 건설경기 부양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쓰란 말인가? 이런 짓들을 하니까 집권은 가능한 오래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아무튼.

 

1973년 들어서 박정희는 문교부 연두 순시 등을 통해서국적 있는 교육을 강조하고 다니셨단다. 무슨 뜻인가? 그 전에는 교실에서 일일이 주민등록증이나 주민등록 미발급자들에게는 등본과 초본 등을 통하여 한국인임을 확인하는 과정이 없었으나, 이제부터는 철저한 서류심사를 통해서 한국인들만 입장을 허락한다, , 이런 건가? 아니라고? 하기야 박통께서는 워낙에 심오하고 또 전례 없는 개념과 표어들, 예컨대민족적 민주주의하면 (?)된다!’와 같은 것들을 많이 발표하셔서 그 많은 개념과 표어들의 내포와 외연을 일일이 속시원하게 까발리기가 힘들다. 그냥 대통령이까라고 해서 깠었다‘. 국적있는 교육에 대한 교육관료들의 답변은 바로국정 교과서제도였다.
문교부는 1973 6 23, 74학년도부터 초중고등학교의 국사교육 강화를 위해 교과서를 현재의 검인정으로부터 국정으로 바꾼다고 발표하고, 집필자를 선정하여 국정 국사교과서 집필을 의뢰하였는데, 뒤에 나오겠지만 강만길 선생도 그같은 제안을 받았다. 이듬해 그러니까 1974 2 22일 문교부는 투철한 주체적 민족사관 확립을 위주로 한 중.고등학교 국정교과서를 발간하여 신학기부터 쓴다고 발표하여, 1974 1학기부터 중고등학교에서는 국정 국사교과서를 가지고 국사교육을 하게 된다. 그리고 국사교과서의 국정제도는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

 

> 최근에 문제가 되었던 국정교과서와 관련한 질문입니다. 당대의 정부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어떤 기준에 의해서 내려져야 하는지의 문제와, 김대중 정권에 대한 평가랄까요.
> 해방 이후에 우리 역사를 쓰거나 인식하는 기준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민주주의입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큰 길입니다. 또 하나는 민족통일 문제입니다. 그것도 평화적 통일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잣대로 놓고 어떤 정권이 여기에 얼마만큼 공헌을 했는가하는 겁니다. 그게 역사적 평가가 될 것입니다. 박정희 정권을 예로 들자면, 정치적인 민주주의를 굉장히 후퇴시켰습니다. 그 다음 경제는 상당히 성장시켰지만 경제적 민주주의는 굉장히 후퇴시켰습니다. 사회적 민주주의 역시 당연히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격차가 벌어졌지요. 문화적 민주주의 역시 군사문화가 온 사회를 뒤덮게 만들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평가는 아주 명백합니다. 거기에 남북한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어가려는 노력 역시 7.4 공동성명이 하나 나오기는 했습니다만 그 역시 유신에 이용된 거지요. 역사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만한 것이 거의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거기에 비해서 김영삼 정권이나 김대중 정권은 민주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에 일정한 역할을 했습니다. 다만 김대중 정권은 IMF의 뒤처리를 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에 신자유주의적 원칙에 입각했다는 점이 불행이지요. 그러나 어떻든 여러 방면에서 발전했습니다. 또한 김영삼 정권은 군부세력을 후퇴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죠, 금융실명제도 그렇고. 불행하게도 김영삼 정권은 남북정삼회담을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주석이 사망하면서 못 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에 남북관계가 크게 후퇴했습니다. 불행한 일이었습니다만 김대중 정부는 남북문제도 상당한 진전을 보았습니다. 역사적 평가를 어디다 둬야 하는가? 민주주의의 문제와 민족문제를 핵심에 두어야 한다는 데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렇게 보면 특정정권에 대한 평가의 문제는 너무도 분명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왜 역사교과서 서술에서는 그것이 자꾸 문제가 되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되요.

 

강만길 선생의 이 말을 들으면서, 김일성과 김정일 정권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하실지 궁금했는데, 아직 그 같은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때가 아니고 또 묻더라도 나같은, 그리고 퍼슨웹같은 마이너 매체가 아닌 공식적이고도 권위있는 질문자가 던져야 할 질문인 거 같아서 그냥 자기검열해버렸다.

>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IMF 이후 많이 살아났는데, 대중적인 기억상실증세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역사교육을 더 강화해야 해결이 될 것인지
> 그건 역사 교육의 문제라기보다는 역사학, 국사학을 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입니다. 욕먹을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선 일본 사람들의 군위안부 문제입니다. 유엔까지 갈 정도로 많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문제인데. 우리나라 국사학자가 군위안부 문제로 논문한 편 쓴 게 없습니다. 학문이 뭘 하자는 겁니까? 역사학의 문제는 특히 수학공식이나 영어단어 몇 개 더 아는 것과는 다른 겁니다. 우리 사회가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기여해야 되는 건데. 오늘을 사는 우리들과 거의 관계가 없는,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있는 현실. 역사를 바로 세워서 그 민족사회를 보다 나은 곳으로 나아가게 하는 임무를 망각하는 거죠. 여기에는 역사학계의 책임이 무척 큽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늦었지만 그래도 최근에 한두 편의 학위논문이 나왔다.

 

> 분단시대 역사인식의 서문에서도 그렇게 표현하셨고, 또 그 이후에도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소위 역사학자들의 사회인식, 사회적 문제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것인데요. 지난번 남북정상회담에 원로역사학자의 자격이 아닌 민화협 공동의장 자격으로 참가하신 것도 역사학계의 좌표가 어디인지 되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만,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면서도 국사학계가 남북문제나 민족문제, 통일문제와 관련해서 거시적 안목으로 역사적 조망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 식민지 시대를 겪은 것이 큰 불행입니다. 그럴 때 국내의 역사학자들이 왜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게되었는가, 식민지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등의 문제를 연구대상으로 삼기는 참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바깥에 있는 역사학자들, 정통적인 역사학자는 아닙니다만 박은식같은 학자들은 그런 주제를 연구했습니다.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그런 고민의 성과물입니다. 바깥에서는 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국내에서는 그걸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현재에 가장 가까운 근대사를 연구했던 사람들의 관심주제는 기껏해야민비와 대원군이 어떻게 싸웠는가하는 문제로밖에 내려올 수 없었습니다. 일제시대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근데 해방이 된 뒤에는 이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역사학의 대상이 된다고 이야기를 해줘야 합니다. 해방이 된 뒤에 한국 역사학계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사가 고작이었습니다. 일본인이 물러간 뒤에 일본의 지배와 싸웠던 역사를 말하는 것은 이제 아무런 위험이 없는 거지요. 당연히 독립운동사를 해야합니다. 그러나 해방 뒤에는 분단의 시대입니다. 이 분단의 문제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극복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식민지 시대에 식민지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라는 고민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거지요. 당연히 역사학의 대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면 해방 이후 역사학자가 분단극복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닌 거지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좀 오래되었지만 적극적으로 현실정치에 개입한 역사학자가 없지는 않다. 정인보와 같은 인물은 초대 내각에서 대통령 직속의 감찰위원장직을 맡아서 조봉암과 임영신 등을 내각에서 축출하는 데에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근대역사학이 성립되어 역사연구를 직업적으로 삼은 사람들은 대개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속세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미덕일지 몰라도, 식견 높은 어른들의 훈수가 필요할 때에도 말을 아끼는 것이 때로는 섭섭할 경우가 있다. 물론 그래서 강만길 선생의 존재가 빛나는 것이겠지만.

 

> 얼마전 한 잡지에서 근대화론으로 유명한 학자의 인터뷰를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의 기준이 선진자본주의를 캐치업(catch-up)하는 데 기여를 했냐 아니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요. 근대화론자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경제제일 논리가 IMF 이후 만연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재화와 부를 가질 것인가가 인생의 목표가 되고 있는 상황인데요, 이는 역대 정권의 평가와 관련한 문제와도 관련이 있을 듯 합니다.

 

> 역사학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제시대 경제사 연구를 역사학 쪽에서는 거의 손을 뗐습니다. 경제학에 맡겼죠. 경제학에서는 거의 수치를 중심으로 했어요. 이걸. 예를 들면 이겁니다. 우리가 우리의 정권이 유지되면서, 지배를 받지 않고, 우리의 정권인 경우에 철도를 50키로 밖에 못 놓았는데 일본이 100키로를 놓았다 칩시다. 비록 우리가 50밖에 못 놓았지만 이건 우리의 필요에 의해, 우리의 역량에 의해서 한 것입니다. 근데 100키로를 놓았다고 해도 그건 일본의 목적, 필요를 위한 것입니다. 또 그것을 건설하는 역량, 주체성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게 있는 겁니다. 그게 역사적 해석과 경제적 해석이 다른 게 그 점이지요. 설령 50밖에 못 놓았다고 해도 우리의 주체성, 역량에 의해 놓은 것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역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양적인 잣대만이 아니라 질적인 잣대를 가져야죠. 근데 자본주의 자본주의체제가 질적인 문제보다 양적인 문제에 더 가치를 놓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회주의의 도전을 받게 된 거죠. 그렇죠? 사회주의의 도전 때문에 자본주의가 상당히 양보를 하게는 되었지요. 사회복지라든지. 그래서 자본주의가 살아남게 된 겁니다. 도전하던 사회주의는 무너졌고. 한데 사회주의가 망한 이후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가 방자한 길을 가고 있는데, 21세기도 신자유주의, 방자한 자본주의가 계속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습니다.(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반드시 새로운 도전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낮지만 확고한 어조로) 지금은 국가사회주의가 무너진 현재에는 세계가 자본주의적인 방법이 진선미(眞善美)인 것처럼 유행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역사는 절대로 하나의 체제가 오래 지속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 오래 지속되면 반드시 부패한다는 것. 역사공부를 오래하면 다 알게 되어 있는 사실이지요.

 

근대화론으로 유명한 학자는 다름 아닌 안병직 교수다. ‘신앙고백과도 같은 체험을 통해서 오랜 운동권과의 관계를 절연한 안교수는 1980년대 중반부터 소위중진자본주의론‘ ‘식민지 근대화론등이라는 이름으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의 결과를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여왔다. 혹자는 그가 일본 기업체가 제공하는 연구비를 받아서 변절했다는 등의 중상을 하기도 하지만 그건 과도한 평가이다. 인터뷰어 역시 거기까지는, 즉 식민체제가 모기나 거머리같은흡혈체제만은아니라는 점에는 공감이 가기도 했다. ! 용어 사용에 주의해야 하는데아무튼 뭐 그럴 수도 있다고 넘어갈 수 있는데, 월간조선과의 인터뷰를 보고서는 입이 따~악하고 벌어졌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월간조선 2002 5월호의 기사를 보시길)

* 월간조선 5월호 기사

餘震

 

내일 아침 강연차 광주로 내려가야 한다는 칠순의 노학자는 여전히 지친 기색 따위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질문지의 내용은 소화했다. 너댓 개 남은 질문 가운데서 약간은 떨떠름했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 두 가지를 던지기로 했다. 첫 번째는 교과서 문제다.

 

> 74년에 국정교과서 체제가 만들어 졌고, 선생님께서도 근본적인 문제를 당시에 제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3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데
> 나는 박정권이국정화할 때 나보고 그 한 부분을 쓰라고 왔어요. 그때 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국사학계에서는 이를 받아서 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국정이 안 될 것이다.” 이렇게 답했어요. 근데 뭐, 결국 나왔죠. 이 역시 국사학계의 문제입니다. 근데 그것이 민간 정권이 두 번째 들어섰는데 아직도 그대롭니다. 여러 번 글을 쓰고 항의를 했는데 아직 시정이 안 되고 있어요. 우리 역사학계의 문제입니다. 역사적인 해석이야말로 획일화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상식입니다. 다양한 교과서 속에서 선택을 해야하는데. 아마 머지 않아 해결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서(국정체제를 유지하면서) 일본교과서의 반동화 보수화를 꾸짖기가 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는 해결해야합니다. 일본 교과서에 대해서 한 마디 합시다.
일본은 침략전쟁은 부인, 미화하는 것으로 가고 있는데 이것은 과거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교과서로 과거를 배우는 젊은 일본인들은 다시 침략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침략을 침략이 아니라고 가르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20세기의 제국주의 냉전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제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한데 일본은 그들의 젊은 세대들에게 침략주의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일본이 아무리 경제가 발달하고 문화가 발달해도 21세기에는 소위 선진국, 문명국 소리를 못 듣게 될 겁니다.

 

이 질문이 약간 꺼림직했던 이유는, 앞서 남북한을 모두 아우르는 공동교과서 서술의 필요성을 강만길 선생은 인터뷰 뿐 아니라 여러 글에서 강조한 바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강만길 선생이 그 같은 교과서를 쓴다고 하더라도 스스로가 국가나 정부가 아닌 이상국정교과서비판남북한 공동의 교과서는 양립가능한 이야기이다. 허나
문제는 단지 교과서의 종류가 정부가 발행한 단 한가지 종류이냐 혹은 국가가 인허가한 여러 종류이냐가 아니다. 영어나 수학이 아니라국사를 가르친다는 행위 자체가 갖고 있는 문제이다. 노골적인 사람은 국사는 특히 한국사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민족주의로 똘똘 뭉친. 혹은 주체주의로 똘똘 뭉친. 양자는 공히 바람직한 종류의 국가관, 민족관, 체제관을 전제하고 있는 셈인데, 만약 남북공동의 역사교과서가 생긴다면 그 역시 이같은전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남과 북의 이해관계가 다를 수 없는 문제라는 말에서도 그와 같은 의구심이 들었는데, 강만길 선생에게역사교과서‘ ‘역사교육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물어야 했는데, 두 번째 질문이 마침 이와 관련이 있는 문제이다.

 

>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최근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통일이라는 용어 자체가 오염이 되었다는 등의 비판을 제기하는데, 탈민족주의 논의에 대한 소감은 어떠신지요.
> 우리에게 민족주의가 성립된 것은 외침 때문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지속된 것은 분단 때문에 그렇습니다. 같은 민족이니까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있지만,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를 좀 더 인간답게, 좀 더 떳떳하게 살기 위해서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점도 있습니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7천만 인간이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도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한데 우리가 같은 민족이니까 우리 민족문화를 하나로 구성해서, 세계에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민족의 존재이유가 선다, 하는 정도까지는 민족주의가 효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데 통일이 된 이후에는 또다른 민족이 우리를 침략하지 않을 때 그럴 때는 민족주의는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민족문화의 독자성은 지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가 4-500년 지속되면서 모든 민족의 문화가 선진자본주의의 문화로 획일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문화는 획일화되면 발전이 되지 않습니다. 각 민족이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세계의 문화가 교류를 해야 합니다. 선진자본주의의 문화로만 지구가 가득 차는 것이 세계화가 아닙니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색깔로 세계문화가 채워져야 합니다. 현재 남쪽은 일본·미국의 문화에 가깝고 북한은 중국에 가깝습니다. 이대로 세월이 더 지나면 지구상에 우리 민족의 문화란 소멸하고 말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우리가 인류(문화)의 발전에 더 이상 기여할 방법이 없게 됩니다. 통일이 되어서 우리 문화의 독자성을 살린다면 세계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문화는 발전시켜야죠. 한데 평화가 계속되면 민족주의는 서서히 약화될 겁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민족주의를 유지할 필요도 없지요. 저는 21세기는 보다 평화적인 시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민족주의도 점차 약화될 것입니다. 최근의 탈민족주의의 논의는 세계화의 흐름과 같이 제기되고 있다고 보이는데 그 세계화는 잘못 해석하면 전체 인류(민족)의 선진자본주의 문화화로 오해될 소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좋지 않은 길이지요. 이점까지 염두에 두면서 탈민족주의를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민족주의의 효용(?)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뿐 아니라 지구공동체의 혹은 세계사의 발전을 이끄는 기본동력이라는 것이 강만길 선생의 설명이다. 근대의 문턱에서 개항과 쇄국, 급진온건 개화의 갈림길에 고민하던 지식인들 가운데에는 민족주의의 활력을 세계사의 발전법칙으로 보는 이가 적지 않았다. 보편적 발전법칙 위로 자신들의 궤도를 설정해 두는 것은 비록 멀고 고단한 길이라도 흥을 잃지 않고 여정을 즐길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이다. 앞서의 답변들을 종합해 보건대, 선생의 입장은 민족주의는 보편타당한 세계사적 발전과 궤도를 공유하고 있으며, 지금은 상궤인 듯 보이는 오만한 미제(!)나 자본주의 역시 길고 긴 역사를 배우고 익힌 이에게는한여름 밤의 꿈보다 짧은 해프닝에 불과해 보일 뿐이다. 3세계를 압박하여 식민지화했던 제국주의는 탈민족주의의 틈에 끼여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또 다른 식민화의 길을 강요하고 있다. 비록 정치와 경제의 발전을 가져다 줄지는 몰라도 문화적 획일화는 구식민지의 억압체제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이다. 그러니 아직은 민족주의가 할 일이 많고 또 가야할 길이 멀다.

 

> 장시간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 , 감사합니다.

 

강만길. 20세기 한국이 낳은 위대한이런 상투적인 마무리 수사들은 생략하자.
인터뷰는 사실 빡빡했다. 소리내서 잘 웃지도 못하고, 꼿꼿히 허리를 펴고 있느라 힘도 들었다. 사무실은 더웠지만 단추를 풀어버릴 수도 없었고, 담배가 땡겼지만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도 될지, 깍지를 껴야할지무릎에 손을 해야할지도 어정쩡했고. 통일에 대해, 북한에 대해 아직도 갸우뚱하는 인터뷰어를한방에 정리해주셨으면, 그래서 나도 그럴듯한진보적 통일론자로 만들어주셨으면 하는 기대는 그다지 흡족하게 채워진 것 같지 않다. , 골수에 사무친 이 공포심이여
!
허나 한가지 기분 좋은 흔적은 내게 남겼다. 올해로 만 칠순을 맞이하는 노인네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매력같은 거다. 일흔은 커녕 서른이 되면 무슨 낙으로 살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서른이 되고 보니 이제마흔이 되면 어떻게 살지라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발하는 의문이 있다. 또 한편으로는역사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무슨 낙으로 살까라는 측은지심에서 발한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이날 인터뷰에서 나는 두 가지 의문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
수십 년 동안 역사공부만 해온 칠순 노인은 무척이나 여유가 있었다. 통일을 부르짖는 직업적 운동가나, 치적을 내세우는 직업적 정치인이나, 학문만 내세우는 직업적 교수 등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말 그대로의여유만만함말이다.

 

“21세기에도 방자한 자본주의가 계속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새로운 도전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하면서 얼굴에 비쳤던 선생의 여유로우면서도 단호한 표정을 사진으로 담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니들이 게맛을 아러?”의 강만길 버전인 셈이다. 광고는 그저 웃기기만 했는데, 강선생의 그 한마디는 다른 종류의 느낌이다. 책을 읽어서 받게 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충격파가 약하게 뒤통수를 건드렸다. 그리고 그 파장은 일찍이 포기했던 욕망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선생의 얼굴에서 잠시 볼 수 있었던 그 천금같은 여유를 얻을 수만 있다면삶은 앎과 바꿀만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