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은 다 부질없는 것

최근 고우영은 큰 수술을 받았다. 대장암 수술인데, 그것 때문에 당시 연재 중인 <수레바퀴>도 한 달 이상 쉴 수밖에 없었다. 한 달만에 재개된 <수레바퀴>의 첫 화면은 가슴팍에서 배꼽아래까지 흉하게 꿰맨 자신의 복부를 그린 삽화였다. 나는 그때 고우영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일산의 그의 사무실에서 첫인사를 나누면서 물은 것이 수술 얘기였다. 아들 만나러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복통으로 입원한 뒤 바로 수술했다고 한다. 10여분 늦게 통증이 왔다면 비행기 안에서 봉변을 당할 뻔했다는, 지금 듣기에도 섬뜩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고우영은 너스레를 떨었다. “아, 그거 ‘숏’나게 아프데.. 그리고 배 째는데 아랫도리 털을 왜 다 미는거야? 허허...” 고우영은 허허로운 유머와 입담으로 인터뷰 내내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그 분위기는 늘 입던 옷을 입은 것처럼 부담이 없었다.



퍼슨웹(이하 ‘퍼’)> 수술 받으시고 작품활동에 지장은 없으세요?

고우영(이하 ‘고’)> 있지만 없는 척하고 해야죠


육체적으로도 힘드실텐데 하루 작업량은 얼마나 되시는지요?

수술 뒤라서 하던 거 다 줄이고 지금은 일일 신문 하나 하죠. 단행본으로 치면 4페이지. 그리고 주간지 몇 개 외엔 전부 끊었습니다. 가끔 강의 해야하는 거 이런 거, 등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서… 지금은 ‘투병중’이니까 내년 3월까지 몸을 추스리고 다시 하면 되겠죠.


만화가 육체적으로 힘들죠?

책상에 앉아있는 사무직인데, 굉장히 힘듭니다 어떻게 아냐면, 며칠동안 가만히 앉아서 일을 많이 하면 체중이 팍 줄어요. 설렁탕을 한 그릇 먹고 앉아서 일을 해도 소화가 쑥쑥 됩니다. 정신노동도 스테미너가 꽤 소모되는 모양이죠? 무척 힘들죠.



1. 추동성에서 고우영으로


‘고우영’ 하면 어떤 것이 떠오를까. 나는 그가 이미 60을 넘었다는 것과(이것은 내가 사람을 나이로 평가하는 못된 습관에서 비롯된, 그러니까 서열과 위계를 생각할 때 나올 수 있는 의례적이면서도 조건반사 같은 관심이다.) 내가 어렸을 적, 시간 때우기에는 최고의 만화(한 페이지에 남들 두 세배의 말과 그림이 있으니까)를 그린 만화가였다는 점을 기억한다. 그렇게 읽은 고우영의 만화가 <삼국지>, <수호지>, <임꺽정>, <초한지>, <삽팔사략> 등이다.


누구나 비슷하지 않을까. 요즘의 코믹스에 길들여진 눈에는 촌스럽기 그지없을지 모르지만, ‘대본소’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첫손에 꼽을 사람이 고우영일 것이다. 그리고 촌스럽다고 할지언정 만화를 늘 가까이 접해온 한국의 범인(凡人)들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 석자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그는 그 이름 자체로 고유한 브랜드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이름이 일반명사가 되어 있지는 않을까. 물론 개인들마다 편차가 있겠지만.


만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작고하신 형님의 작품을 이어서 계속 연재하면서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육이오 전에 형님 두 분이 만화를 그렸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형님 그리는 걸 어깨 너머로 봤고, 만화 그리는 집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란 거죠. 그러나 직접적인 계기는 그런 것보다 만화가 직업이 되어야 할 코너에 몰리니까 자연스럽게 직업이 되었죠.


만화로 생계를 삼으셨던 형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경제적인 곤란 때문인 것이죠?

호구지책으로 하긴 했는데, 그러나 제가 하기 싫은 것을 누군가 시킨다면 안 될 것이고 생래적으로 재밌으니까 한 거겠죠. 만약에 다른 직업이 더 즐거웠으면 그 길로 갔겠죠.


선생님의 초창기 작품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진 게 없습니다. 초창기엔 어떤 작품을 그리셨습니까?

초창기라면 중학교 2학년 부산 피난 당시에, 물론 끄적거린 건 이전이지만, 형들 하는 것 보고 습작한 건 많지요. 만화가 손에 익을 만큼 많이 그렸는데, 내가 그린 만화가 인쇄미디어를 통해 책으로 나온 건 중학교 2학년 때예요. 중2면 만화를 제대로 볼 줄도 모르는 나이에 그걸 그렸냐고 그러는데, 정부가 피난갔을 때니까 사회가 혼란스럽지만. 중학교 2학년짜리가 그린 만화가 출판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얼마나 혼탁한지 알겠지요? 하여튼 그때 디즈니의 미키마우스처럼 우리나라 쥐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16페지짜리 만화가 나왔는데, 이름하야, “쥐돌이!”


주로 소년만화를 그리신 거군요.

그걸 효시로 해서, 출판사에서 물론 보따리 출판사지만, 줄줄이 청탁을 하니까 계속 그렸죠. 환도해서 고2,3 때, 지금 생각해도 우습지만, 출판사 사장이 학교에 찾아와서, 교무실에 와서는 학부형인척하고, 부르죠. 삼촌, 아버지처럼 가장을 하고 교정에 나가서는. 이번엔 32페이지 짜리 하나만 그려달라, 이런 식으로 청탁했죠. 그런데 그게 혼신을 다해야만 나오는 거거든요. 그땐 더 힘들죠, 지금도 힘들지만. 그렇게 납고(納稿) 하고 하는 게 내 성적에는 지장이 없었어요. 계속 우등만 하고. 학적부 뒤지면 나오겠지만 공부 참 잘 했습니다. 생계는 고3때 집안이 몰락하고 난 뒤에는 밥벌이를 해야하니까 주로 직업화되었고. 그전에는 학생이니까 잘한다, 재밌다 하니까 신바람에 장남 삼아, 취미 삼아 시작한 거고. 직업이 된 건 고3때죠.


고우영은 만화도 잘 그리고 공부도 잘 했다고 말하면서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고우영에게서 더 자세하게 가족사를 캐물을 수 없었다. 59년도 그가 형의 유작 <짱구박사>를 추동성이란 이름으로 이어 받았을 때, 가계는 형들의 잇단 죽음으로 생계곤란을 겪을 때였고, 고우영은 무척이나 힘든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다른 매체에서 들은 얘기의 자잘한 사정을 굳이 이 자리에서 따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재미있고 체질에 맞는 직업이 만화가가 된 것을 느긋하게 긍정하는 고우영의 여유에 토를 달고 싶지 않아서였다. 또 우리에게 고우영은 <삼국지>의 고우영이니까.


일간 스포츠에서 72년 1월 1일자로 <임꺽정>을 그리면서 일순간 스타 만화가로 떠오르기 전까지 10여년은 무명작가로서 많은 고생을 하셨을 텐데요.

무명은 아니었어요. 꽤 유명했어요. 다만 그땐 아동만화작가였죠. ‘앗짱’이니 ‘짱구박사’니 하는 게 꽤 있었어요. 그때는 가명으로 하다가, 동성고를 다녔는데 그래서 필명을 ‘추동성’이라고 했죠. 상당히 알려진 만화가였어요. 그래도 수입은 별로였죠. 일간 스포츠도 마찬가진데, 장편만화가 하나뿐이었고 원고료의 기준이 없었으니 주는 대로 받은 거죠. 남들은 인기도 있고 그리고 뜨니까, 테레비에도 불려가니까 대단한 원고료 받는 줄 알지만 열악했어요. 요즘은 스포츠지 말고도 많잖아요. 우리가 힘든 세상에 토양을 닦았다고 할까. 지금 신문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은 유복하고 행복하다고 해야겠죠, 우리랑 비교하면.


추동성에서 고우영이라는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 일간스포츠에서 연재하면서부터이시죠? 그 전과는 다르게 성인취향의 만화인데, 성인취향으로 가게 된 계기는요? 그리고 역사물을 그리시게 된 건요?

그전엔 아동만화만 그렸고. 71-72년에는 아동 동화작가들과 함께 삽화를 주로 그렸어요.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림체였거든요. 거기에 몰두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일간 스포츠에서 성인도 볼 수 있는 만화를 그려달라고 청탁이 왔어요. 첨에는 .거절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리게 된 거죠. 그때는 성인 극화란 게 없었어요. 아동만 본다는 것으로 천대받던 만화쪼가리를 제대로 된 문화장르 레벨의 만화를 그려보자는 욕심이었죠. <임꺽정>은 여러 번 읽었고. 임꺽정은 명종실록이 다룬 실존인물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실존인물을 다룬 것이죠. 위정자가 보기엔 역겹겠지만, 법치국가에서, 민초, 서민, 반항성이 있는 사람에겐 아름다운 고전 아닙니까. 역사를 왜곡 안 하는 범위에서 재주를 피워 봤죠. 왕년에 문학을 하려했던 문학청년이니까, 14개월 동안 했는데 좋은 호응을 받았어요.


사실상의 출세작 <수호지>도 그런 인기 속에서 탄생한 것이었군요.

<임꺽정>은 신문사상 처음 시도한 거라 첨에는 육 개월만 가자고 했다가, 이거 된다, 그래서 1년 하게 되었고 2개월을 더해서 14개월을 연재했어요. 그걸 그리면서 저는 강박감에 시달렸죠. 말이 쉽지 신문 전면에 5단 통광고 빼고 전면을 채우는 건데, 그걸 줄거리 연출하고 지문 쓰고 대사 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죠. 그걸 일 년 하니까 심신이 고달팠었죠. 그래서 하여튼 더 이상 못 하겠다고 하고 일체 관계를 끊었죠. 신문사에서 가만 두지 않더군요. 단 하루도 못 쉬게 했어요. <수호지>를 고른 건 편집회의에서였어요. 첨엔 못 한다, 못 한다 그러다가 <수호지>라니까, 그럼 하겠다, 그랬죠. 육이오, 국민학교 오 학년 때 그 <수호지>를 처음 읽었어요. 그걸 탐독하고 자라면서 또 읽고 그랬는데 어른이 되었을 때 군말 없이 다시 했어요. 소재가 좋아서 편집진에게 제가 속아넘어간 거지.


새로운 유명세를 타게 된 것 같은데, 그 뒤에 만화기획에 변화가 있었나요. 신문사에 계속 끌려 나간 건지요?

신문사는 주어진 지면을 제게 주고 여튼 자유의사에 맡겼어요. 기한도 없이. 내가 잘 나가니까. 그러니까 계속 한정 없이 그리는데, 그게 어떤 의미에서는 쉽죠. 이건 300회 소화시켜라. 1년에 마무리 해다고, 하면 큰 덩어리 하나 자체에도 기승전결을 만들어야죠. 다 그걸 맞추잖아요. 소위 ‘야마’라는 커다란 플롯도 만들고. 끝나는 기안을 안 준다 하면 운신하기 좋죠.

상당히 파격적인데요.

내가 돈을 벌어주니까. 그게 백상 장기영 사주가 기획한 것 같아요. 그분이 진취적인 분이예요. 앞을 바라보시고 카테고리에 갇혀 있기 싫어하고. 기획도 그분 아이디어 같고. 회사에서는 현대물은 모험이니 지금처럼 역사물로 가자고 했죠. 그리고 이유는 또 있었어요. 한국일보가 일찍이 해외에 한글판 신문을 많이 보급했습니다. 미주판에 한국일보 본지는 아니지마는 일간스포츠가 자매지니까. 거기 만화를 무단전재 했죠. 나도 몰랐는데 미국 가봤더니, 이민간 사람들이 그 만화 볼려고 한국일보를 구독하고 있더라구요. 광고효과도 되고 해외에서 더 이용가치가 있었죠. 해외에서는 현대물보다는 역사물을 더 좋아하니까.

2. 예능은 체질이야


선생님의 만화를 보면 특히나 주인공이 생동감이 넘칩니다. <수호전>의 그 유명한 ‘무대’부터 해서 말이죠. 어떨 땐 만담처럼 걸쭉한 입담을 보여주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현실적인 면면을 보여주는데요. 그 소재나 아이디어는 어디서 다 얻으시는지요?

글쎄 그거,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만화 그리는 만화가체질에 맞아서 한 거지. 늘 얘기한 거지만 예체능은 체질이 있어야 돼요. 체질적으로 타고나야지, 소양이 없으면 아무리 두들겨 패며 가르쳐도 안 되는 거죠. 나도 그런 것 같아요. 해외여행을 가거나 사람을 만나도 항상 그런 재미있는 일들이 생겨요. 유쾌하게 사니깐 그런 일이 야기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난 시각으로 보면 재미난 것만 보이는 거죠. 그 대신 20년이 지난 지금도 킥킥하고 웃을 유머는 내가 봐도 웃기지만, 그래도 그거 그릴 때 우리도 웃으면서 그리지는 않거든요.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웃을 것이다, 하면서 얼굴 찡그리고 그리는 거죠. 나는 그런 유머는 타고 났다, 그렇게 밖에 말 못 하겠네요.


‘나는 원래 그렇다’는 대답은 질문한 사람을 할 말 없게 만들어 버린다. 고우영은 자신에게 만화나 그 유머가 그렇다고 하니 나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자신도 할 말 없다는 것이 그 대답이었을 것이다. 타고나서, 체질이라서 만화를 그린다는데 더 이상 말이 필요하겠는가. 40년 만화쟁이의 만화는 그저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었던 것인가.


그림체는 그 사이 많이 바뀐 셈이죠?

주위에서 그래요. 그리는 사람으로서는 그림체가 초창기에는 여러 번 다듬고 했는데, 이 짓도 40년 하니까 천천히 다듬는 잔손이 가는 그림은 스스로 유치해요. 뭐랄까, 일필휘지, 한 번에 그어서 그리는 게 좋죠. 펜촉이 철필이지만 유연하게 움직여요. 마치 이미자가 목청을 마음대로 움직이며 노래하는 것처럼. 먹을 찍어서 굵게 하든 세필을 쓰든 해서 단선으로 할 때 기분이 좋아요. 보는 사람은 그렇지 않죠. 이 자식 배 불렀나, 그러겠지만서두.


바뀐 건 그림체만 아니라 구성도 많이 변했죠? 칸도 예전에 조밀했었는데, 요즘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이 여유가 있으시더군요.

그 사정은 그래요. 나의 극화는 처음부터 일간 스포츠에 연재 된 겁니다. 그 당시 스포츠지가 유일무이였어요. 나에게 주어진 지면도 식탁에서 보든 전철에서 보든 저녁에 보든 일단 내 지면에 온 고객을 위해서는 5분쯤은 붙들어 두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그래서 칸도 조밀하게 넣고 대사도 많이 넣고 해서 시간을 붙들어 두고 싶은 거죠. 써비스 차원에서 조밀조밀 했죠. 내 걸 보면 독자도 재미나게 봐야 한단 거죠. 지금 그렇게 하면 아무도 안 보겠죠. 글자도 많고 하니까. 이거 보고 딴 것도 빨리 봐야하는데.


예전처럼 그리기는 참으로 힘드셨나 보더라구요. 칸 하나 비워놓고 “한 칸 거저 먹었네”라는 말도 자주 보이곤 했잖습니까?

하도 피곤할 때, 에잇, 그러면서 그런 짓도 했지.


회화는 따로 공부하신 적 있으세요?

타고 났으니까… 회화는 우리 둘째아들이 잘해요. 그 사람은 회화과 가야 할 사람이 잘못 갔어. 시각디자인 쪽으로 갔는데 굉장히 잘하는데, 나보다 잘 해요. 


타고난 그림 솜씨라.. 화풍은 독창적인 고우영체라 하겠네요.

그건 내가 만든 화풍이죠. 대개 그게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누구 밑에서 활동을 하면, 사부와 똑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도움을 받지요. 저는 어디 문하생으로도 간 적이 없으니 나만의 그림이죠.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제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죠.


자기의 그림을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그린다고. 고우영의 대답은 허허 웃으면서 넘어갔다. 뭐 하다보니 그렇겠지, 하는 말투지만 자신이 그려온 만화에 대한 믿음은 단호해 보였다. 타고난 것에 평생을 두고 일가를 이루었다고 할 그에게 부러울 게 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랄지 예의랄지, 고우영은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 찍으신 적 있으시죠?

가루지기죠. 신문 연제에서 2/3쯤 그렸을 때 모 영화사에서 와서 가루지기 원작을 샀어요. 그런데 영화 만들 때는 커트를 자르잖아요. 영화사에서 보니 내 만화랑 영화의 커트가 똑같다고 감독도 해달라 그러더군요. 저는 한 달간 도망다녔죠. 영화인에 대한 모독이다, 내가 어찌… 그랬는데, 아시다시피 영화판은 위계질서가 군대 저리가랍니다. 위에서 시키면 죽어도 해야합니다. 영화사에서 고우영이 잡아다 감독 시켜, 그러니 한도 없이 쫓아다니면서 졸라대더라구요. 결국 제가 졌는데, 일생을 영화에 바친 분들에겐 안 된 거죠. 그러나 영화사엔 좋았죠. 감독, 각본을 한 사람이 다했으니. 광고도 되고. 그리고 그 땐 외국영화 수입하려면 한국영화를 만들었어야 됐어요. 쿼터제라서 외국 필름 사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기도 했죠. 돈은 적게 들이고, 흥행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그래도 내껀 만원사례 몇 번 있었고 흑자에 들었다구. 근데 멋모르고 하나 했는데, 영화 만드는 희열도 또 있더군요.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면서 한 커트씩 찍는데, 싸나이로서 할만한 일이죠.


다시 영화를 만들고 싶단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여건이 맞는다면 진짜 잘 만들 것 같애.


만든다면 어떤 걸루…

내가 만든 극화 중에 제일 심혈을 들인 것이 일지매예요. 줄거리를 일백프로 만들고 소재 없이 한 게 일지맨데, 일지매는 머리를 짜고 짜서 기승전결을 만든 거죠. 그걸 만들어 보면 재밌을 거 같애.



3. 만화 또는 역사


그의 만화 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만화십팔사략>이었다. 십팔사략은 중국 송대의 역사서이다. 사기니 자치 통감이니 하는 이전의 역사서 열열덟 권의 다이제스트판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 책을 다시 만화로 재탄생시킨 것이 <만화십팔사략>이다. 말이 쉬워 요약한다는 것이지, 그 복잡다단한 중국의 역사를 한 작가가 꿰뚫어 그림으로 그려낸다는 것은 보통의 시각으로서는 엄두를 내기가 어려운 일이다.

이 일이 가능할까 생각했었지만, 마지막 권이 나올 때까지 고우영은 흐트러짐 없이 중국사를 여유롭게 ?슷떳?고 있었다. 역사를 한 줄로 꿰어 내는 것, 그것도 만화그리기와 같은 체질일까 아니면 어떤 힘이 숨은 것일까. 


선생님은 주로 역사물을 그리시는 것 같은데, 현대물을 그려보고 싶단 생각은 안 드세요? 

현대물은 주간지에 여러 가지 많이 그리긴 했어요. 신문연재가 아니라서 그런지, 히트 못 해서 그런지 잘 기억이 없네요. 역사물을 자꾸 받다보니 역사물 전문가가 됐지. 그러다가 내 파트가 쪼개진 것이지요. 요즘 굳이 현대물에 대한 욕심은 없어요. 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생각도 들고 후배를 위해서 자릴 비켜야지.


작품의 자료는 대개 중국 고전일텐데 원전은 어떤 것으로 보세요. 중국 원전은 읽으세요?

네, 닥치는 대로 읽죠. 그 덕에 한자실력이 꽤 늘었죠. 중국현지 답사도 가고. 저희들은 책을 많이 봐야 해요. 이것저것. 영역을 넓혀야, 알아서 손해는 없으니까. 책 한 권 읽고 거기서 힌트를 조금 얻을 수도 있는 거죠. 일본사람이 보는 중국역사를 보는 것도 좋겠죠. 서양사람이 보는 중국역사도. 시간 나면 뭐든지 읽는 습관이 생겼어요. 그것도 꼼꼼히 정독하는 게 많죠.

지금 연재하는 만화는 <수레바퀴> 뿐인 것 같은데요. 한국 역사를 다루신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중국역사를 꿴다는 느낌으로 <십팔사략>을 했죠. 여담이지만 그거 너무 힘들어서, 그게 ‘씹팔사략’이 되기도 했어요. 끝난 이후 모 출판사에서 조선조 역사를 그렇게 그려달라는 청탁이 왔는데 마침 신문에 지면이 왔길래 그렇게 시작한 겁니다. 그러다가 궤도를 잃었어요. 단행본과 신문독자는 취향과 목적이 다르거든요. 그러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게 된 거죠. 궤도를 바로 가기 위해서는 좀 쉬어야 겠어요. 단행본으로 내야 될 것 같아요.


‘수레바퀴’라는 제목은 역사의 수레바퀴라는 말일텐데요…

맞아요. 그게 정답입니다. 똑같죠. 과거 역사를 오버랩시켜보면 일 밀리도 안 틀리는 일이 가끔 있잖아요. 그걸 경각시키는 목적이었는데…. 지금 테레비에서 하는 역사물도 그렇습니다. 대선 직전에는 그렇게 만들죠. <여인천하>에서도 느닷없이 대선 얘기 나오고 정치자금 얘기 나오고 그렇거든요. 그거 좀 억지 같기도 하고. 다음 적절한 기회를 삼아서 조선 역사를 처음 목적대로 완성해야죠.


<수레바퀴>는 이런 이유로 이미 연재가 끝이 났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서 시작하여 왕자의 난에 이르기까지는 잘 나간다싶더니 어느 순간 야사로 돌변해 있었다. 그것도 궁중의 동성애, 어우동 같은 성스캔들만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었다. <십팔사략>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그리고 수레바퀴라는 말이 적어도 무슨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독자라면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의구심은 길게 가지 않았다. 고우영은 과감하게 연재를 중단한 것이다. 대가다운 솔직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선생님의 역사관이 어떤 것일까, 저는 궁금하네요. <삼국지>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허무주의가 아닐까 합니다. 관우가 죽을 때, 유비가 죽을 때, 특유의 역사관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인생이란 별 것 없다. 속세는 하찮은 것이니 욕심이란 부질없는 것… 이런 의식이 깔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허허, 그렇게 우러났다면 정확히 본 거겠죠. 의도적으로 한 건 아니지만, 제 가치관이 현세가 아닌 영원한 세계에 있는 거니 그게 묻어났을 수도 있죠. 결국 그런 것 아닙니까. 하찮은 게 이승이고, 우리가 목적은 저승이다, 이렇게 말들 하죠.


우문이었다. 우문은 이 인터뷰에서 하나 더 있었다. 중국사를 그리는 것이 혹시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 아닌가 싶어서 만주 태생에 대해서, 중국에 대한 친밀감, 어렸을 적 중국 경험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고우영은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중국과의 우호 선린 등의 동문서답이었다. 우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만화만 그렸을 뿐, 역사를 그린 것은 아닌데. 앞서도 말했지만, 시켜서 시작했고 좋으니까 그렸고, 체질이라서 이 일을 계속한다는 게 고우영의 대답이다. 이것은 그가 그린 내용이 아니라, 그가 그려낸 방식이 증명해 준다. 흥겨운 입담과 유머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군말 없이 수긍하고 있지 않은가. 인터뷰랍시고 너무나 당연한 것을 어렵게 따지려 든 자신이 좀 한심해 보였다. 우문에 대가는 현답도 주지 않은 것이다.


최근에 시디롬으로 또 전집으로 <삼국지>가 다시 출간되었죠. 그런 형태의 만화는 어떻게 보세요?

아직은 시디로 만들면서 복원하니까 사람들이 많이 샀죠. 그래도 미진한 게 있었죠. 역시 만화는 종이로 봐야지. 그래서 다시 책으로 만들었는데, 또 팔리더라구요. 마르고 닳도록 우려먹는구나 하는 욕을 들을 것 같은데, 그대로 애정어린 손길로 사줘서 고맙더라구요.


어느 인터뷰에서 고우영은 복간된 <삼국지>를 “앵벌이 보낸 아들 되찾은 기분”이라고 했다. 그 기분이란 것은 상상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단지 이리저리 칼질 당한 원고를 20년만에 되살렸다는 것 자체만으로 보는 우리로서는 지금과 20년 전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까.

<삼국지>의 삭제 상태는 무식한 수준이었다. 원고 자체가 수정액 범벅이 되어 있었고, 군데 군데 먹칠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대개는 지나친 성 묘사가 문제되었다. 예를 들면 시간(屍姦)을 하는 장면은 아예 통째 들어져 나갔고. 강간당한 여인의 복부에 난 커다란 구멍은 그냥 지워져 버렸다. 그리고 도대체 알 수 없는 이유로 지워져 버린 대사와 지문이 수두룩하다. 


그래도 70년대엔 그림이 검열을 많이 당했다고 하셨는데요. 어느 정도였습니까?

나 혼자 당한 건 아니지만, 세월이 그랬었죠. 군사정권에, 유신에… 한 사람의 뜻대로 움직여야 하고 경직되어 있었고 그리고 통치자를 할퀴는 이야기는 안 되고, 미풍양속을 해치는 그림도 안 되고. 그러니까 군인 내지는 중학생 수준의 통치를 받을 때죠. 임꺽정이니 수호지니 하는 걸 다룰 때 반항적인 인물은 안 되는 거죠. <삼국지>를 다루더라도 저변에 깔린 건 칼자루 쥔 군주가 백성을 학대한다는 측면, 이런 잘못된 사회를 꼬집고 할퀴어서 우리는 더 좋은 미래를 지향해야 한다는 모토를 두고 그리니까 그분들이 보기에는 싫죠. 지금 얼른 생각난 게 있네요. 양산박에 관군이 쳐들어 왔을 때 양산박 도둑놈들, 그게 도둑이지만 평범한 도둑은 아니죠. 송나라라는 게 한족으로서는 마지막이었어요. 그만큼 부패되고 썩었을 때 이야기죠. 그때 천지의 양산박의 도적이 도적이 아니오, 호걸이요, 지고한 뜻을 가진 사람이란 말예요. 양산박의 수호지란 첨부터 썩은 국가를 탓하는 목표를 가진 책인데, 군사정권에서 좋아할 리가 없죠. 그걸 재미로 유머로 얽어 나가는데 관군을 보고, ‘저놈들 권력을 돈으로 사고 팔아서 이자 붙여 먹는 놈들이다.’ 그런 말을 나둘 리가 없죠.


내용에 대한 ‘칼질’도 많았었군요.

계엄령 때는 각 신문사에 파견된, 그러니까 문화군인들이 그냥 한 판 들어낸 적도 있고. 어떤 건 상가집 풍경이라고 해서, ‘야, 빈대떡 탄다’, 등등 재미나게 묘사했는데, ‘지금 계엄령을 때렸으니까 지금 분위기가 상가집으로 표현한 거지?’ 그렇게 한 판을 다 드러낸 적도 있어요. 사회자체가 유치하고 경직되었죠. 말하자면 버스 정류장에서 남녀가 키스했다고 잡아갈 때죠. 당하고 나면 황당하고 억울하고 분하죠. 지문 하나를 써도 거기에 내 철학이 있고 그걸 씹어서 여과된 문장인데 이거 안돼, 찍, 면도칼로… 다툼도 많았죠. 지금의 안기부 그때 ‘중정’이죠. 거기에 있던 친구가 하나 있어요. 지금은 여행도 같이 가고, ‘오날날, 친구가 되야서….’ 걔가 기안 잡아서 썼던 것이 이런 놈은 잡아가야 겠다, 하고 지금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부장에게 기안을 올렸는데, 부장이 ,‘얘는 애교로 봐줘’ 해서 살아난 적도 있었죠. 사회란 게 그렇죠. 정당하게 이건 네 잘못이니까 맞아라, 그런 게 아니죠. 그저 때리면 맞는 거죠. 그리고 이름 불면 같이 끌려 가서 맞고… 저는 다행히 맞진 않았는데, ‘네가 그린 거 다 싸둬’ 그러면 싹 가져 가죠. 일 주일이고 이 주일이고 가서 연락이 없잖아요. 그땐 전화가 오면 깜짝 깜짝 놀라죠. 그렇게 책을 뺏긴 게 많은데 소환 당한 적은 없어요. 다행이죠.


“매 맞으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이렇게, 이렇게 된다고. 하하.. ” 고우영은 손발이 비틀리는 시늉을 해가면서 허털스럽게 웃어보였다. ‘젊은 당신이 잘 알겠소?’ 하는 말 같기도 하고 그 매를 나는 안 맞아서 다행이었다는 회상 같기도 했다.


성적인 것만을 문제삼은 것은 아니었군요.

성적인 것은 구색을 맞춘 거죠. 탄압을 하는 사람을 보면 큰 것을 은폐하기 위해 일부러 작은 거, 지저분한 것까지 걸죠. 그러면 대중에게 명분이 서죠. 큰 건 말 안 하는 거죠. 많은 대중은 그거, ‘참 싸다’ 그러죠.


곡절이 많으셨군요. 어딜 봐도 선생님처럼 60대 나이에 연재만화를 매일 그려내는 작가는 찾을 수 없습니다. 육체적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대단한 정력이신데요. 

힘이라기보다는 다른 건 할 줄 모르니까 그렇겠죠. 한때 한 6개월 외국 싸돌아 다니다 온 적이 있어요. 그때 칸칸이 만화 그리는 게 지겹더라고. 그래서 만화 그만두고 딴 일 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머리를 짜봐도 할 줄 아는 게 없더라고. 제일 힘 안 들게 사는 것이 만화가 된 거죠. 그 대신, 글쎄, 4-50년 해 오는 동안 전부는 아니겠지만, 제 책을 보는 사람, 저를 아는 사람들이 ‘얘는 착한 놈이야’ 하면서 좋아하고, 제 이름만 보고 미소를 띄워 주고 그런 게 큰 보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은 만화계의 원로급이신데, 현재의 우리나라 만화판이 보시기에 어떠세요? 

저를 노땅처럼 취급하는데, 아직 저의 선배들 많습니다. 저는 아직 청장년으로 생각하는데… 우리나라 만화는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아요. 만화 수요가 많이 늘어나구요. 만화의 질은 독자와 똑같이 자랍니다. 그리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똑같이 잘 해야죠. 그런 측면에서 한국만화 미래는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테크닉도 늘겠지만, 심심풀이로 보는 게 아닌 ‘컬춰’를 형성하는 장르가 될 거란 걸 믿어 의심치 않거든요. 근데 그렇게 되어 나가기 위해서는 호구지책이 아니라 발전해나가자는 노력이 있어야겠죠. 제 등을 밟고 후배들이 일어서고 있다는 긍지가 있습니다.


만화 그리는 직업이란 게 아직도 열악하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환경이 필요할까요. 

지금 말이죠. 우리 2-30대에 비하면 천국이예요. 만화 그리는 직업이라 결혼 겨우 했어요. 극구 반대하는 처가집 몰래 결혼하다 시피 했죠. 만화 그리다 베레모 쓰고 나가면 아는 사람에게 매맞을 정도였죠. 만화가가 무슨 베레모야, 그러구. 만화쟁이라는 거죠. 한 일환데 예전에 몇몇 우리 친구들이 신촌의 어느 대포집에서 한참 유행하던 철학에 대해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칸트, 데카르트, 니체 한참 몰두했죠. “인간이기에, 너무나 인간이기에” 이러면서 있는데 옆에 또래의 대학생이 가만히 우리 얘길 들어보니 직업이 나오잖아요. “씨벌… 만화 그리는 놈이 무슨 니체야?” 그러면서 한바탕 싸운 적도 있어요. 여튼 지금은 좋아진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 만화계는 아직도 열악하다. 출판사의 횡포는 여전하고, 시장은 왜곡 되어 있으며, 일본만화 배끼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그러나 고우영은 좋아졌다고 말한다. 이 말은 요즘의 현실을 접어두거나 어두운 현실을 숨기려는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지금의 고우영이 할 수 있는 무거운 책임감을 그 말 속에 담아 둔 것이리라. 40년을 몸 담아온 이 세계에서 아무 것도 나아지지 않았다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이란 말인가. 좋아져야할 미래를 기원하는 조금 나이 많은 현역작가의 바램이지 않을까. 앞으로 계속 만화를 그릴 고우영에게는 좋아질 미래만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