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체크>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인터뷰 요지
“민주노동당은 위기에 봉착했다”
민주노동당의 대선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는 것이었다. 노회찬 총장의 평가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제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현재 “민주노동당은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이 노회찬 총장의 진단이다. 이러한 진단에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표출된 시대의 흐름, 혹은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열망 앞에 과연 민주노동당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가 하는 성찰이 담겨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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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대선에서 ‘노사모’가 한국 사회에 준 충격에 민주노동당도 자유로울 수 없다. 왜 민주
노동당의 당원이나 자원봉사자들은 ‘노사모’회원들 같은 열정과 헌신을 보여줄 수 없었는가? 민주노동당은 왜 개혁당에게 ‘새로움’의 이미지를 새치기 당할 수밖에 없었던가?
이에 대해 노회찬 총장은 우리나라 운동권 문화가 가질 수밖에 없었던 ‘패배주의와 폐쇄성’이 민주노동당에 있지 않은지를 자문할 필요가 있다 했다.
“‘운동권인 것’ 자체를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만, 제가 우려하는 것은 건…(중략)… 새롭게 형성되는 에네르기를 가진 집단의 눈에 민주노동당이 보수적인 집단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점입니다…(중략)..이게 참 억울하지만, 그걸 부정하지만은 못 하는 거기에 여러 복잡한 게 있습니다…(중략)… 개혁당 때문에 더욱더 그렇게 비치게 될 소지가 있어서 상당히 긴장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중략)…가장 큰 문제는 패배주의와 폐쇄성입니다. 물론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외부로터 온 것입니다…(중략)…성공하려고 하는, 이기려고 하는 그런 세력의 태도나 문화가 부족하죠.”
성찰과 점검은 이제 곧 2004년 총선을 준비해야 하는 민주노동당에 요청되고 있다. 작년 지방선거와 대선을 통해 얻은 ‘제3당’이라는 지위를 실질화하기 위해서, 노동당은 우선 보수우익과 싸워야 함과 더불어, 개혁당과도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제를 위해서는 민주노동당이 어떻게 더 유능하고 유연해질 것인가가 최우선의 문제로 제기된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민주노동당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원칙 즉, 민중적 원칙과 계급정당ㆍ이념정당으로서의 면모를 놓치지 않아야 된다고 노회찬 총장은 말했다.
“기본적으로 저는 진보정당이 이념정당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런 전망과 지향ㆍ철학이 없다면 진보정당 할 이유가 없죠. 뭐 개혁당 하거나 심지어 정치를 안 할 수도 있죠.”
포기할 수 없는 이념정당ㆍ계급정당으로서의 원칙이 언제나 ‘일반 국민’에게는 민주노동당의 문턱을 높게 하는 한계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원칙이야말로 ‘정치개혁’이나 ‘지역주의 극복’ 정도의 지향성밖에는 없고 이념적으로는 빈곤한 개혁당과 민주노동당의 차별성이라는 것이 노총장의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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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으로 개혁당과의 공조는 부분적으로 가능하리라는 것이 노총장의 답변이었다. 정당명부제의 도입, 국가보안법 철폐 등과 같은 문제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그를 넘어서는 선거에서의 공동행동, 연합공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민주노동당이 2004년의 총선에서 원내 진출을 하게 될 가능성은 크다. 다른 변수가 많지만, 만약 2002년의 두 선거에서처럼 지지를 받을 수 있다면, 민주노동당은 1-2석의 지역구 국회의원(울산 동ㆍ북구와 창원을이 유력한 편이다.)과 4-6석의 비례대표 의석을 갖게 될 확률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는 한국 정치사나 노동운동사에서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주노동당은 한편으로 의원단을 통해 원내 활동을 하면서, 다른 한편 국회와 제도 바깥의 싸움도 하는 새로운 운동의 전범을 만들어내야 한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내 의원단의 활동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
또한 누가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이 될 것이며, 그 후보자들을 어떻게 뽑을 것인가?
기본적으로 민주노동당에는 중앙당 권력에 의한 ‘공천’이라는 게 없다고 할 수 있다.
지역구 의원 후보는 지역 당원들이 직선으로, 비례대표는 당대의원들이 선출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례대표 후보도 당원 전체의 직선으로 뽑자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고 하는데, 노회찬 총장은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찬성한다고 했다. 보수정당에서와 같은 ‘안배ㆍ배려’는 민주노동당에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저도 직선이 더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중략)…거기서 더 나아가서, 보수정당이 하는 방식으로 전국구 후보를 ‘안배, 배려’해서 정하는 걸 안 해야죠. 그런 건 진보정당에서 할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안배’라는 것은 지역이나 정파나 세력관계에 따라 나눠먹기식으로 하는 것이고 ‘배려’는 유교적인 관점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든지, 공이 많은 사람한테 주는 건데요. 히딩크가 왜 우리 국민들에게 좋은 평가받았습니까? ‘어디 출신, 어떤 경력’이 아니라 철저하게 잘 싸울 수 있는 선수들을 실력대로 뽑았거든요. 저희도 그렇게 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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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이 말은 민주노동당의 진로와 관련된 인터뷰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말은 2002년을 거치며 달라져버린 민주노동당의 위상을 압축하여 나타낸다. 대선을 거치면서 민주노동당은 그들 운동권들의 정당이 아니라,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책임있는 현실적 정치세력으로서, 그리고 전체 진보정치 세력의 실질적 대표체로서 이전과는 다른 당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석에서
노회찬 자신의 역정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에서 세 가지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첫째는 노회찬 총장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다. 경기고에 다닐 때부터 그는 자생적 ‘운동권’이어서 학교공부를 뒤로 제쳐두고 동기들 몇몇과 어울려서 유인물도 만들고 ‘학습’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민족과 민주주의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함석헌ㆍ백기완ㆍ김상현 같은 이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70년대적인 풍경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이 때 같이 했던 고등학교 친구 중에는 아직 현장을 지키며 노동자로 사는 친구가 있다 한다.
둘째 대목은 80년대 이야기다. 노회찬 총장은 ‘인천지역민주주의노동자연맹’, 약칭 ‘인민노련’출신이다. 이 ‘인민노련’은 80년대 말에 결성되었던 전위 지향 조직 중 가장 크고, ‘현장’에 실질적인 기반을 둔 조직이었다. 당시의 대학가 근처 인문사회과학 서점에서는 이들 전위지향조직들이 낸 기관지와 팜플렛을 사 볼 수 있었는데, ‘인민노련’은 PD경향의 한 대표였다. 당시 혹자들은 ‘인민노련’을 경제주의ㆍ개량주의라 비판했지만, 필자는 대학 2-3학년 때, ‘인민노련’이 다른 조직과 달리 실제로 노동현장에 의미 있는 규모의 노동자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비감’을 가지고 있었었다. 인민노련은 ‘민중당’, ‘한국사회주의노동당’ 등 민중정당ㆍ진보정당 건설 운동의 한 뿌리를 담당해오기도 했는데 ‘인민노련’의 결성 과정을 이번 인터뷰에서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노총장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노총장은 인천의 노동현장에 있을 때 만난 부인과 34살에 결혼했다. 16살 때부터 공장노동을 하고 노동운동을 한 노회찬 총장의 부인은 재작년에 고입검정고시를 쳐서 합격했다. 노총장은 결혼할 때 부인의 학력이 그냥 ‘중졸’인 줄 알고 ‘속아서’ 결혼했다 했다. 현재 <여성의 전화> 대표인 노총장의 부인은 작년에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한 이후에, 이제 대학입시에 도전하겠노라고 했다 한다.
노회찬 총장은 자기 생애에 아직 별로 ‘성공’한 일이 많지 않은데, 결혼만은 ‘대성공’이라 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결혼을 통해서 삶이 ‘고양’되었다는 것이다.
1. 새 판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노무현 정권과의 관계
퍼슨웹(이하 ‘퍼’)> 노무현 정권이 김대중 정권과 다른 점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권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 나갈 건지요?
노회찬(이하 ‘노’)> 저는 노선 상으로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 크게 다른 점이 없을 거라 봅니다. 김대중 정권의 민주당과 노무현 정권의 민주당이, 뭐 당 이름이 변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똑같습니다. 민주당은 정치적으로는 신보수주의고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노선에 충실한 당입니다. 이 점에는 앞으로도 절대로 변함이 없을 거라 봅니다. 그런데 정책적인 차원에서는 그렇지만, 정치문화나 정치행태에 있어서는 상당한 변화가 생길 거 같습니다. 이제까지 한국 정당문화가 근대적인 붕당체제였다면, ‘탈근대적’이라 할만한 큰 변화가 생길 거 같습니다.
물론 실제로 그게 어느 정도까지 추진될지는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노무현 정부가 당내에서 구 주류를 완전히 내쫓지 못할 거기 때문입니다. 내쫓아야 되는 데 말이죠. 사실 민주당 쇄신파는 쿠데타 같은 ‘인적청산’을 시도했었는데, 신기남ㆍ추미애 두 최고위원만 사퇴해버리고 나머지 구주류측을 사퇴하게 하는 데 실패했습니다.(이 인터뷰는 1월 6일에 이루어졌다. – 편자 주)
신문에 보도된 내용은 아닌데, 운동권 출신들만 모아서 인적청산 요구를 또 하려 했는데 내부 조율이 안돼서 실패한 일도 있었죠. 결국 잘 안되고 있는 거죠. 디제이가 동교동 해체를 얘기하자, 인적청산을 안 하겠다고 화답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서로 양해가 이뤄지고 결국 동거할 수밖에 없게 되어있습니다. 구주류가 당내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후일을 도모할 거고요. 지금 한나라당과의 의석 수 차이가 워낙 크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다음 총선에서 의석을 늘리려 할 겁니다. 이것도 노무현 씨가 당내 개혁을 끝까지 할 수 없는 이윱니다.
퍼>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밀고 나가는 데 ‘김대중’과 ‘노무현’이 같을 수 있다 해도, 미시적으로 보면 정치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유주의나 보수주의 진영이 분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 출범을 보면 한국사회에서 자유주의도 제 발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요?
그리고 노무현정권이 사회ㆍ경제정책에 있어서는 이전과 큰 차이를 못 보여준다 해도, 정치문화와 관련해서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할 때, 그것을 상징하고 있는 게 바로 ‘개혁당’인 것 같습니다. 개혁당은 자유주의적인 색채를 더 뚜렷이 갖고 있어서 노무현에게는 또 다른 쓰임새가 있을 것 같고요. 민주노동당과 개혁당의 변별성이나 양자의 경쟁이 계속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노> 저는 본질적으로는 한국에는 자유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고 보는데, 자유주의적 현상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디제이 같은 경우가 대단히 우경화되어있긴 하지만 일종의 사민주의자라 생각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났던 민주사회주의적 경향의 세례를 입었던 사람이죠. 자기 당과 관계없이 그런 지향을 가진 사람이 사실 디제이고 또 노무현인 것 같습니다. 민주당에는 훨씬 보수적인 사람이 많죠.
디제이나 노무현도 그런 개인적인 성향과 철학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실 정치에서 외화되는 것은 완전히 보수주의 신자유주의 일색입니다. 지금 현재로서는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죠.
제가 현재 민주노동당이 위기라고 이야기하는 게 뭐냐면, 바로 이런 문제에 관련된 겁니다. 민주노동당이 갖고 있는 장점이 두 측면이 있었는데 하나가 정치 개혁적인 면입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사실 탈계급적인 거예요. 어느 계급이든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이죠. 그런데 이게 워낙 오랫동안 안 되어 왔기 때문에 대단히 개혁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는 ‘반 신자유주의’로 집약되는, ‘평등’과 관계된 우리 당 고유의 철학과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겁니다. 사실은 저번 대선에서는 후자보다는 전자가 더 중요했습니다. 두 번째 거는 사회적으로 소화가 안 되고, 상품성이 떨어지다 보니깐 후자(‘평등’)에 우리가 더 많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자(민주노동당의 진성당원, 상향식 공천, 의원 후보 당원 직선 등과 같은 선구적인 정당정치 실험을 말한다.- 편집자주)가 더 돋보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날 개혁당이 나타난 겁니다. 사실 개혁당은 아예 후자가 없어요. 오로지 전자만 갖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몸이 더 가볍고 더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고 ‘정치개혁’을 표현하는 데도 우리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거죠. (실제로 1월 16일 MBC <백분토론 특집>에 출현한 개혁당 유시민 대표는 “개혁당의 정당 운영 방식은 민주노동당에서 많이 배운 것”이라 발언하기도 했다.- 편집자주) 개혁당이 있기 전에는 ‘정당개혁’에서는 민주노동당이 다른 보수당에 비해 독점적으로 훨씬 우월한 지위를 갖고 있었는데, 개혁당이 출현해서 그 지위를 나눠주거나 개혁당이 더 많이 가진 것처럼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민주노동당이 제3당의 지위를 개혁당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고 봅니다.
개혁국민당 VS 민주노동당
퍼> 그러니까 개혁당과의 변별성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 민주노동당 위기의 핵심이라는 말씀이네요.
노> 특히 2003년은 정치 개혁의 해입니다. 내년 선거를 앞두고 그간에 누적된 정치에 대한 불만이 표출될 겁니다. 호남에 있는 민중들도 노무현 당선으로 끝났다고 안 볼 겁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다 ‘정치개혁’ 수준이지 계급 계층적인 이해의 표출은 아닌 거예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두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개혁당이 계급적 뿌리가 없는 당이기 때문에 우리는 노동당이 기반하고 있는 계급적 이해를 가지고 본질적 차이를 나타내고 심화시켜야 된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이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지만 아직 ‘상품성’이 높지 않다는 겁니다. ‘정치’ 자체만 갖고 현실 정치에서 만만치 않다는 점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게 어려운 점이 많다는 겁니다.
퍼> 노동당과 개혁당의 관계 자체는 어떻게 되어 갈 거 같습니까? 공조가 가능하리라 봅니까?
노> 공조가 필요하다면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개혁당은 두 가지 안티테제를 갖고 정립된 당이라는 점을 알아야 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당원들도 오해가 많은 것 같은데, 흔히들 개혁당을 ‘민주당의 2중대’라 보는데 어떤 측면에서는 맞지만,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 속에서 그건 오햅니다. 실제로 개혁당의 1차적인 안티테제는 민주당이에요. 개혁당은 민주당을 비판하고 공격함으로서 크려고 하는 거예요. 기왕의 민주당 지지자들 중에서 개혁적인 부분을 쟁취하는 것을 자기 발전 전략의 주요대목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잘 봐야 된다는 거죠.
또 하나의 안티테제는 민주노동당이에요. 자기들이 개혁을 모두 자처하면서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나머지 세력 전체를 보수로 삼는 보수 대 개혁의 논리를 내세우는 방식으로 민주노동당과 차별화하려는 전략을 갖고 있습니다. ‘탈 이데올로기, 탈 조직, 탈 집단’과 같은 정서를 잘 활용하면서 우리와 차별화한다는 시도를 하려하겠죠. 그래서 개혁당과는 어쩌면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이나 정당명부제 실현 운동을 같이 하는 정도 이상의 것을 같이 할 게 없지 않겠느냐는 거고요. 다만 당과 집단차원에서는 그러하고 개혁당에 있는 개개인들은 전혀 다른 문제죠. 민주노동당이 적극적으로 견인해야 할 사람들이 개혁당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민주의의 현실화?
퍼> 노무현 정권 시대의 과제가 한국 정치 내에서 보수우익의 실질적 지분과 지지율을 낮추고, 그 빈 데를 진보 세력이 채우는 거라 생각합니다. 이번 선거에서 노동당이 선전하고, 그 정책이 공감을 얻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사민주의(정책)가 우리 정치사에 이제 제대로 진입했다, 사민주의가 우리 정치의 한 현실이 된다’고 평가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민주노동당(의 정책)이 사민주의적인 거 맞습니까?
노> 뭐, 족보를 따져 이름을 붙인다 하면 우리 당 정책을 ‘사민주의’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규정하는 게 적합한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민주노동당이 내왔던 정책은 사민주의자만 내세울 수 있는 거 아니고, 만약에 사민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해서 얘기해도 된다면, 사회주의자도 특정시기에는 사민주의적인 정책을 낼 수 있고 심지어 사민주의보다 더 낮은 단계의 정책도 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 정책이 사민주의적 특성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 정책들 때문에 민주노동당이 사민주의당이라 일반화시키기면 안 된다 생각합니다.
퍼> 아까 총장님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에서는 자유주의도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일면으로는 맞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하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의 선전이 아주 놀라운 것이라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고요. 사민주의적인 게 과연 가능한가 말이죠. 한편으로 생각하면 한국의 정치 지형이나 지정학적 상황, 미국과 북한의 존재, 이런 요인들 때문에 ‘늘 민주노동당은 5% 정당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노> 저는 그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이런 정치지형, 역사와 배경 때문에 ‘사민주의조차 혁명적이다’는 견해에도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논리는 결국 진보정당 안 된다는 논리고, 또 운동하는 사람 내부적으로는 ‘안 되는 일 하는 나는 얼마나 훌륭한가’ 그런 논리예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넘어져도 울지 않으리’ 그런 정서에서 나오는 논리죠.
냉정하게 보자고요. 실제로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진보정당에 거리감을 갖는 그런 세대들은 점점 소수화되고 있어요. 50-60대들로 가니까요. 오히려 지금 부닥치고 있는 건, 20대가 될 10대들이나 30대가 될 20대들이 자본주의의 절대적 힘에 세례를 받아서 새로운 보수주의적 태도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거든요. 그게 민주노동당이 앞으로 부딪칠 더 곤란한 현실이지, 뭐 ‘북한 쳐들어올지도 모른다’ 이런 낡은 생각이나 자유주의ㆍ민주주의조차도 하기 힘들었던 여건은 이미 과거 속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봐요. 신자유주의 때문에 제대로 민주주의를 맛보기도 전에 급속히 보수화되는 신세대들이 걱정인 거죠. 그래서 ‘5% 이상 넘기 어렵다’ 이런 생각엔 근거 없다고 봐요.
“민주노동당이 집권해도 세상 안 바뀐다”
퍼> ‘의회에 진출하는 사민주의적 정당이 된다는 것’이 현실로 되고 있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민주노동당이 계급정당이며 이념정당이어야 한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운동정당, 계급정당, 이념정당으로서의 면모가 어떻게 담보될 수 있는 겁니까?
노> 전혀, 아무도 담보해주지 못 하는 거겠죠. 많은 실패가 역사적으로 있었지만 새롭게 도전을 하고 실험을 하는 거죠. 담보되어 있다고는 전혀 보지 않습니다. 두 가지 면(의회정당-제도정당 / 이념정당-계급정당)을 조화시켜 나가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거죠. 어차피 정치는 현실인데, 최선이 아니면 차선, 차선이 아니면 차악을 택하는 겁니다. 언제든지 제도 바깥이 더 낫다 하면 그거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정세가 이런 류의 당을 요구하고, 정세가 근본적으로 급변할 가능성이 없어서 그런 거지, 사실은 정세에 따라서 제도를 넘나들 수 있다고 봅니다.
퍼> 무척 의외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알기로 노회찬이라는 활동가는 진보정당 활동을 한 지가 벌써 10여 년이 되었고, 합법활동ㆍ의회활동을 강조하는 운동의 흐름을 대표하는 분으로 알았는데요. 그런데 아직도 ‘제도 안팎을 넘나들 수 있다’고 말씀하시네요.
노> 기본적으로 당연한 생각이라 봅니다. 민주노동당이 ‘세상을 바꾸자’는 슬로건을 걸고 있는데, 과연 ‘민주노동당이 집권을 하면 바뀝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좀더 좋은 고지, 좀더 유리한 정세를 만들지는 몰라도 민주노동당이 집권하면 세상이 바뀐다, 이런 건 아니라 봅니다. 민주노동당이 집권하면 자본주의가 철폐됩니까? 선거를 통해서 한 당이 집권하는 문제와, 한 사회가 전면적으로 다른 사회발전단계가 넘어 가느냐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 이겁니다.
퍼> 그러면 옛날 역사유물론 교과서에 나오는 ‘사회발전 단계론’ 같은 그런 생각을 믿으시는 편입니까? 물론 민주노동당이 만들고 싶어하는 사회가 ‘더 나은 자본주의 사회’ 이상이라는 것을 압니다만, 그것이 사회당에서 말하는 것과 비슷한 ‘사회주의’ 사회인가요?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 같은 걸 총장님께서도 갖고 계시나요?
노> 저는 여전히 역사 유물론 위에 서있습니다. 뭐, 사회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변혁 이후의 사회에 대한 상(像)이라든가, 변혁의 과정, 또 당장 해야 될 현실에서의 실천이 어떤 것이냐에 대한 생각이 사회당과 다릅니다. 반복되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진보정당이 이념정당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런 전망과 지향ㆍ철학이 없다면 진보정당 할 이유가 없죠. 뭐 개혁당 하거나 정치를 안 할 수도 있죠…
‘원내진출’만 노동당의 목표는 아니다
퍼> 정세에 따라서 제도와 비제도를 넘나들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만약 2004년에 원내에 민주노동당이 진출한다고 했을 때, 의회 속에 있는 노동당의 역할과 제도 바깥의 역할이 나눠지지 않겠습니까?
노> (말을 자르며) 의회에 진출하게 되는 것을 ‘제도권과 비제도권’으로 보지 않고 단지 ‘원내ㆍ원외’로 봐야죠. 진보정당이 원내로 들어간다면 원내활동이 있을 것이고 바깥활동이 있을 것인데 보수정당은 원내활동만 있고 원내 활동에 대한 준비, 즉 당선만 준비하는 활동만 있죠. 그러나 저희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거죠.
이제는 그 고민을 좀더 현실적으로 할 필요가 있어요. 의석 만드는 게 멀지 않았기 때문에요. 원내 1-2석일 때는 아니지만, 만약에
원내 한 10석만 되도 ‘민주노총’ ‘한국노총’이 전혀 따로 움직이는 조합운동도 아마 역할이 달라질 거라고 봅니다. 원내 진출을 수단으로 봐야되는데, 이 수단을 활용하는 시스템이 구축되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지금 ‘한국노총’ 출신으로 의원된 사람들이 ‘한국노총’에 무슨 도움을 줘요?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민주노총’ 같은 경우에 늘 봉착하는 ‘총파업 딜레마’ 같은, 노동운동의 한계를 돌파하는 데 원내가 도움을 줘야 한다고 봐요.
그러나 ‘원내’로만 그 문제들도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정치운동하고 연관되는, 결국에는 대중운동과 파업- 그런 것하고 원내활동을 잘 조화시켜 나가는 게 목표죠. 단순히 국회의 의원 수를 몇 명 만드는 것만 민주노동당의 목표가 아닙니다.
퍼> 그렇다면 노동당의 목표가 뭡니까? 근본적인 변혁?
노> 일단 제1야당이죠. 당은 수권이 목표겠지만, 집권한 후에 어떻게 하느냐? 선거해서 야당 됐다가 잘 되면 여당 되고 하는 것을 반복하느냐? 그게 유럽사민주의가 걸어간 길 아닙니까? 그런 걸 넘어서는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겠죠. 결과적으로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한 가장 빠르고 올바른 길이 민주노동당이 집권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면 세상을 바꾸는 일에 운동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텐데 진보정당말고 다른 거 해야지요. 물론 집권한다는 것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는다는 건데요, 그게 곧 세상을 바꾸는 거죠. 그리고 국민의 지지로 얻은 힘을 또 집권하는 데만 쓰지는 않아야 된다는 거고요.
짧은 기간이었지만 지난 3년 간 당의 활동에 대해서 당원과 국민들로부터 어느 정도 검증을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당이 지켜야 될 것들 또 지켜도 될 것들이 나타났는데 이런 것들을 꼭 지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 당의 기본정책들은 20%넘는 지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국민들로부터 ‘정책적 우위’를 검증받은 셈이니 우리 당의 기본 정치노선을 계속 견지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중에 부족하거나 현실적으로 더 고쳐야 될 부분은 좀더 고쳐 나가야 된다고 보고요.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은 누가?
퍼>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내 진출’과 ‘진보정당 의원단’은 우리 정치사상 대단한 실험이 될 것 같습니다. 전국 5% 정도를 득표하면 4석 정도의 전국구 의원이 생긴다고 들었는데, 비례대표를 어떻게, 누구로 정할 것인가 하는 것도 대단히 큰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노> 비례대표제가 어떤 식으로 제도화 되느냐 – 전국 단위냐, 권역 단위냐, 몇 %를 반영할 거냐에 따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의석에도 차이가 있을 수 있겠죠. 좀 지켜봐야 할 것 같고요.
비례대표를 정하는 건 당헌상문제입니다. 당헌상 당 대의원대회에서 비례대표가 선출하게 되어 있고, 그중에 ‘여성 30%이상을 할당’한다고 명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국회의원후보와 마찬가지로 비례대표 후보를 전체 당원 직접투표로 선출하자는 아래로부터의 요구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고요. 아무튼 다수 당원들의 의견을 따라야지요.
퍼> 민주노동당의 지향으로 봤을 때는 당연히 당원 직선으로 비례대표 후보들이 정해져야 할 것 같은데요.
노> 원칙적으로 저도 간선보다 직선이 더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직선이냐 간선이냐가 아닙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보수정당이 하는 방식으로 전국구 후보를 ‘안배, 배려’해서 정하는 걸 안 해야죠. 그런 건 진보정당에서 할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안배’라는 것은 지역이나 정파나 세력관계에 따라 나눠먹기식으로 하는 것이고 ‘배려’는 유교적인 관점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든지, 공이 많은 사람한테 주는 건데요. 예를 들면 히딩크가 왜 우리 국민들에게 좋은 평가받았습니까. 어디 출신, 어떤 경력이 아니라 철저하게 잘 싸울 수 있는 선수들을 실력대로 뽑았거든요. 저희도 그렇게 해야지요.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퍼> 고양의 재보궐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떤 방침으로 임하실 예정입니까?
노> 준비를 좀 하고 있는데, 저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총력을 투입하다시피 해야 된다고 봅니다. 이전에는 재보궐 선거는 그냥 해당 지구당에 많이 맡기고 주변에선 좀 도와주는 정도였는데요.
보선 때문에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지난 11월 26일이 대선 후보 등록일이었어요. 이제 우리 당은 11월 26일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미 민주노동당은 이전과는 다른 당이 되었습니다. 새로운요구와 새로운 활동의 필요에 직면해 있는 거죠. 그런 면에서 이번 보궐선거는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유시민 씨가 출마할 거라 하는데, 사실은 걱정이 많습니다. 결국에는 제3당의 지위를 놓고 한번 겨루는 것 일 수도 있거든요. 당락을 떠나서 민주노동당 위세와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선거로 만들어야 될 거 같습니다.
퍼> 총장님은 강서 지구당 위원장이신데요. 2004년에는 어떻게 지역구로 출마하실 겁니까? 아니면 비례대표로… 너무 이른 질문인가요?
노> 당원들이 결정하는 데로 따라야죠.
2. “민주노동당은 위기에 처했다”
– 대선이 노동당에 남긴 것
“어느 정도 성공적”
퍼> 민주노동당의 대선 선거 결과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 일색인데요. 대체 어떤 점이 성공적이었다는 겁니까? ‘성공’의 기준이 뭡니까?
노> 우리가 설정해놓은 민주노동당의 발전단계가 있고, 그 각 단계에서 성취해야 될 목표가 있는데, 그것을 얼마만큼 선거를 통해서 달성했는가가 평가의 기본관점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이번 대선을 통해서 얻고자했던 많은 것을 어느 정도 얻었다는 겁니다. 아쉬운 대목이 대단히 많고, 미흡하고 잘못된 점들이 여러 가지 있지만 총평할 때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는 겁니다.
6월 지방선거의 바탕 위에서 이번 대선을 치뤘습니다. 민주노동당은 지방선거에서 134만표를 얻어 일약 제3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6.13 지방선거에서 많은 유권자들에게 우리 당을 선택할 기회는 주어졌지만 우리 당의 방향이나 노선을 알릴 기회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대외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지만 대내적으로는 ‘4%-100만표’라고 설정했어요. TV 토론회에 나갈 수 있느냐는 게 불확실했고, 역대 진보정당의 후보가 대선에서 2%를 넘은 적이 없었지만, 지방선거에서 134만표를 얻었기 때문에 ‘4%-100만표’는 가능한 목표라 봤습니다.
내용적으로는 ‘제3당의 지위와 영향력’을 보다 공고히 하는 것,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 다음 단계로서의 총선에 더욱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 이런 점까지 합해 볼 때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는 겁니다.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의 공식적인 선거평가는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을 참고 – 편집자주]
민주노동당은 진짜 ‘제3당’인가?
퍼> 재밌는 표현인데요.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는 표현이. ‘제3당으로서 지위를 얻었다’, 또는 ‘3당으로서 국민들에게 (긍정적으로) 각인되었다’는 게 과연 실질적인 것인지 따져봐야 될 것 같은데요. 선거기간에 나온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공약이 지지를 얻었다지만, 한편 ‘황당하다, 추상적이다’고 생각하는 유권자도 분명히 많았습니다.
노> 정치적인 신뢰와 지지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에 누적된 경험을 통해서 발생하는 효과지요. 민주노동당처럼 그전에 보지 못 했던 전혀 다른 새로운 정치적인 현상과 정치 세력을 지지하게 될 때에는 상당한 많은 작용들의 누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추상적이다’, ‘비현실적이다’고 느끼는 반응은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더 노력해야 되는가를 경각시켜 줍니다만, 그런 반응이 결코 부정적인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96만표의 순도
퍼> 민주노동당을 지지한 문제의(!) ‘96만표’의 성분에 대해서는 분석했습니까?
노>그걸 다 ‘과학적으로’ 분석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이건 사실 대단히 주관적인 판단입니다만, 6월 지방선거 정당 투표 때 얻은 134만 표는 민주노동당을 제1차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아도 ‘우리 사회에 민주노동당 같은 정당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표가 대부분이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제 직관으로 134만 표 중에서 34만 명은 이번에도 계속 민주노동당을 찍었고 100만 명은 안 찍었다고봐야 될 것 같습니다. 이번 대선의 96만 표의 1/3은 지방선거에서 이어진 지지표고 또 2/3는 신규 지지자들이라 봐야 될 거 같습니다.
고도 산업사회에서 진보정당이 갖는 잠재적인 지지계층이 통상 전체 유권자의 30%정도라고 합니다. 유럽에서는 그 30%를 갖고 잘 하거나 못 하거나에 따라 생기는 ‘플러스 알파’를 가지고 집권을 하거나, 또는 연립정부를 구성하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2월 대선의 96만 표는 바로 그 30%에 해당되는 30%의 일부의 성격을 갖는다고 보고요, 134만 표중의 100만 표는 30플러스 ‘알파’에 가깝다고 봅니다.
제 관점에서 이 100만표는 ‘전과 1범’인데(웃음)… 이 사람들의 전과는 앞으로 더 쌓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때로는 민주노동당을 찍었다가, 때로는 안 찍었다 하며 왔다 갔다 할 소지가 많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신규 지지 약 60여만 표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TV토론을 통해 얻은 부분입니다.
퍼> 그 신규 지지가 어떤 계층, 또는 세대의 표입니까?
노> 96만표의 2/3가 대부분 저학력ㆍ저소득층이며, 그리고 연령대는 굉장히 다양하게 4-50대까지 걸쳐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저희의 ‘무상 교육, 무상 의료’에 대해서, 자기 경험에서 우러나는 지지를 보낸 분들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 사회의 가장 하층을 차지하는 ‘서민’층이지만, 한국의 민주화운동 진보운동이 실질적으로 포괄해내지 못하고 접근하기 어려웠던 층이라 의미 있습니다.
퍼> 그런 층의 표가 그야말로 민주노동당의 ‘고정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노> 이번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를 찍은 사람들은 일단 노무현을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노무현 현상’에 흔들리지 않고 찍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회창 지지’에서 ‘노무현 지지’로 가지 않고, 바로 우리 당 지지로 올 수 있었던 거죠.
실제 지역별 득표현황들을 보면, 오히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지역이 3% 수준입니다. 대도시 화이트칼라들이 계급이해에 상관없이 대부분 빠져나간 거죠. 대신 민주노총계열 대공장이 있어서 블루칼라들이 밀집되어 있는 경기 일부 지역이나, 강원도 원주 같은 데서는 계급투표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20몇 %가 나온 구들이 있죠. 그리고 문제는 5% 이상이 나온 강원도와 충청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인데, 거기가 바로 ‘서민투표’가 이루어진 지역입니다. 물론 호남에도 서민이 많지만, 아시다시피 이번엔 호남은 지역주의로 갔습니다.
투표 당일 날, 제가 중앙당에서 유권자들이 걸어오는 전화를 받았는데요. 그 날은 대부분 ‘지지한다’는 전화였는데, 그 목소리 들으면 알지 않습니까? 4-50대 가장에 노동자, 남녀는 반반 씩이었어요. 언어 구사를 들으면 서민들에 저학력… 이런 분들이 전화를 걸어 말하는 게, ‘당신들 말하는 무상 의료ㆍ무상 교육이 진짜냐?’는 겁니다. 이런 분들은 ‘내가 권영길을 찍으면 노무현이 떨어지냐, 붙냐’는 식의 복잡한 전략적인 고려를 거의 안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전화를 해서는 ‘내가 보기에 당신들 떨어질 거 같은데 당신들 혹시 붙을 걸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하더군요.
이런 전화 몇 통이 다는 아니지만, 저는 우리 당 지지계층의 구성이 양질(良質)로 변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층의 표만 얻어서 되는 거는 아니겠지만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표고 대단히 어렵게 얻은 표고, 당의 일상활동으로는 대단히 더디게 얻을 수밖에 없는데, 대선이라는 것을 통해서 또 TV라는 것을 통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얻을 수 있었다는 게 저희로서는 소중한 거죠.
“진보정당은 이념정당, 계급정당”
퍼> 서민 계층의 지지가 ‘양질(良質)’이라고 표현을 하셨는데, 민주노총 조합원이라든가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20-30대와 화이트칼라층이 민주노동당의 더 중요한 본질적인 지지기반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 의미에서 ‘서민’ 지지층을 ‘양질’이라 표현할 수 있나요?
노> 깊은 논의가 필요한 대목인데요, 제 말씀에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도시 노동자나 화이트칼라층의 의미를 평가절하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진보정당’이라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이념 정당입니다.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이후에는 ‘이념’이라는 말 자체가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이념정당 아닌 진보정당은 결국 진보정당이 아니다’는 진보정당 특유의 생존특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계급정당입니다. 운동권 일각에서는 ‘계급’을 세분화해서 노동자 계급과 다른 계급을 대립시켜 생각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말하는 계급은 결국 하층계급을 좀더 넓게 잡은 근로계층입니다. 이것이 노동당의 지지기반으로서, ‘이념’과 절대로 분리 될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죠. 이념적 지향과 다르게 지지계층을 다른 데서 구하거나 또는 기본적인 지지층을 갖지 못 하면 ‘이념’은 오래 갈 수도 없고, 이것을 확고하게 견지해야 다른 중간적인 층도 지지하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퍼> 그런 의미에서 대선 때 노동당과 민주노총과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노> 민노총의 조직적이고 공식적인 지원은 없었습니다. 이는 민노총 조직의 특성이나 현 상태와 결부된 문제죠. 민노총의 공식적인 결정이 얼마나 조합원 전체에게 관철력이 있느냐, 또는 관철될 수 있는 상태에 있느냐가 문제겠지요. 많이 나아졌지만 이런 부분에서 상위 단위의 관철력은 아직 미미한 게 사실이었다고 봅니다. 더구나 이번에 노무현 씨가 후보로 나왔기 때문에 상당히 많이 흔들리는 측면도 있었다고 봐요. 많은 민노총 조합원이 노무현 후보를 찍었겠죠. 그러나 오히려 다행스러운 것이 민노총의 공식적인 ‘권영길 지지’ 결정이 조합원들에게 관철되기에 미흡했어도, 민주노총에 내에서 ‘권영길 지지’에 대한 공식적이고 조직적인 방침을 재고하자는 시도조차 없었다는 점이죠.
퍼> 그럼에도 민주노총이 선거활동의 중요한 창구나 기반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제 100만표 지지 시대를 맞는 노동당으로서는 정당의 사업을 민노총 같은 대중 조직들을 통해 우회하거나 대중조직에 정치적 조직화를 위임하는 형식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국민과 근로대중들을 상대할 필요성이 커질 듯한데요.
노> 위임한 건 아니지만, 별도의 실천이 없다보니깐 결과적으로 위임한거나 다름없는 상황이 지속되었고, 그런 한계가 선거 때마다 지적되는 것에도 공감이 됩니다. 조합적 대중조직에 위임된(?) 정치활동을 우리가 직접 해야 하겠지만, 좀더 다른 차원의 문제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민주노총의 정치 결정에 따라서 일관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민주노총이 배태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민주노동당에 대해서조차도 아주 냉정한 관찰자 입장에서, 일반 유권자의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또는 노동자 ‘계급’에 못 미치는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노동당을 더 많이 본다는 것이죠. 그래서 귀속감을 갖거나 의식을 갖고 바라보기보다는, 저 당과 나와의 이해관계가 뭐냐, 또는 당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느냐, 이런 걸 냉정하게 보면서 투표한다는 거죠.
퍼> 민주노총의 조합원들이 아직 계급투표를 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또는 그냥 조합주의적인 의식에 머물러 있다, 이런 말씀인가요?
노> 저는 “노동자들이 자기정당을 가질 때 비로소 계급이 된다”는 고전적 명제가 전적으로 올바르다고 봅니다. ‘정당을 가진다’는 말은 그 정당의 소속원이 되거나 그 정당의 변함 없는 지지자가 된다는 거죠.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선 노동자지만, 퇴근하면 노동자가 아닙니다. 근데 우리 당은 공장 안에 있는 게 아니라 길바닥에 있다는 거죠. 노동자가 공장만 벗어나면 그냥 시민이거나 시민보다 낮은 수준이 되어 버리는 상황에서 공장 안에 있는 노조 사무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선거에서 드러난 민주노동당의 한계
퍼> ‘유보적인, 제한적인 성공’이라 하셨는데, 민주노동당이 안고 있는 고민이 약간 드러납니다만, ‘목표의 근사치까진 갔지만 목표를 달성하지 못 하게 했던’ 어떤 본원적인 문제가 선거과정에서 드러났나요?
노> 선거 결과의 성패와, 성패를 떠나서 드러난 문제와 한계를 구분할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만. 일단은 저는 96만 표가 미흡하다고 봅니다. 목표 100만 표에서 4만 표 부족한 것을 문제로 삼는 것은 아니고, 막판 ‘정몽준 소동’ 같은 악재가 없었다면 좀더 표를 얻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만약에 120-30만표를 얻었다면 그 정치적 효과는
단순히 20~30만 표 더 얻은 것 이상이었을 겁니다. 그 다음에는 뭐 일반적으로 드러난 한계란 건, 우리 민주노동당이 가지고 있는 수준 그 자체입니다. TV토론에 나가서 보여준 건 후보의 얼굴만이 아니라 우리 당의 정책과 주체성이거든요. 그런 점에 있어서는 그나마 아쉬운 대로 어느 정도 표현을 해냈고 성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여러 가지 정치 활동들- 사이버상에서의 활동이라든가, 홍보활동이라든가, 그외 좀더 폭 넓은 지지자들을 규합해 나가기 위한 조직활동이라든가… 이런 부분에서는 우리가 아직 상당히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검증이 됐다고 봅니다. 다만 그것이 절대적인 영향을 안 미쳐서 다행인 거죠.
퍼> 오히려 그런 ‘한계가 득표에 방해 요인이 아니었다’고요?
노> 우리의 현재 수준이 그렇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30% 정도의 지지를 받는 당이 선거를 통해서 30~40% 얻으려고 할 때, 이것이 끼치는 영향과 저희처럼 5%도 안 되는 지지율을 갖고 있는 당이 지지를 규합하려 할 때 작용하는 원인은 같을 수 없다고 봅니다. 예컨대 사이버 활동이 미치는 영향이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에게 미치는 영향과 우리한테 다르다는 거죠.
퍼> 좀더 파급력 있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안 되었던 주-객관적 요인들이 있을 텐데, 창당한 지 얼마 안 된 소수 정당으로서의 객관적 한계는 차치하고, 민주노동당 내부의 주체적인, 즉 조직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에 대해서 묻고 싶은데요.
노> 그것이… 뭐, 한계는 이제 그런 거죠. 크게 두 가지로 소프트웨어적인 것과 하드웨어적인 것인데요… 우선 ‘공선본'(공동선거운동본부)이 대단히 형식적이었습니다. 공선본이 운동권 내부용일 뿐이었지, 4번을 찍은 사람들 중에서도 권영길 후보의 선거 진영이 민주노동당만이 아닌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결합된 공선본이라는 걸 보고 찍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편집자주- ‘공선본’은 지난 11월 23일 발족한 ‘2002년 대선 승리를 위한 범진보진영 공동선거운동본부’의 약칭이다. 공선본에는 민주노동당ㆍ민주노총ㆍ전국연합ㆍ한총련 등의 단체가 결합하여 ‘권영길 지지’로 단결하기로 했다. 그러나 선거 운동 기간 말미에 공선본의 몇몇 단체의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 – 예컨대 한총련 의장ㆍ서울연합 의장 등이 소위 ‘반창 연대’를 명분으로 ‘기호 2번 지지’를 선언하며 이탈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공선본이 의의가 없었다는 건 아니고 운동 내적으로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었지만, 절대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깐 이 선거 조직이 방대하긴 했지만 모든 것이 급조되고 또 내부의 결합력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 한 상태에서 선거를 치르다 보니 그 공선본의 크기만큼의 운동력을 발휘되지 못 했습니다. 이거는 공선본 조직의 문제만은 아니라 다른 문제입니다만, 나중에 ‘반창 연대’ 문제까지도 발생을 하면서 상당한 혼란도 생기게 됐죠.
노사모와 비교하면
퍼> 민주노동당 조직은 100% 효율적으로 잘 돌아갔다고 보십니까? 공선본이 형식적이었던 것처럼 형식적이었거나 안 돌아간 부분은 없었나요?
노> 우리 당원들이 부분적으로 볼 때는 ‘노사모’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적극적인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분위기가 ‘노사모’ 같은 뜨거운 열정과 열광이 없었거나 적었다는 평가가 있지요. 그런 시각에 대해 동의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 원인이 뭐냐? 원인은 다양하다고 보는데, 변명 같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당선을 목전에 둔 집단하고 그야말로 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단계적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목표인 집단하고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이야기하면 87년이나 92년 대선과 비교될 부분이 생기겠지만요. 그리고 당의 사업을 평가하면서 당이란 원래 이래야 된다는 식의 도덕적 기준을 갖고 평가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정당이 선거를 하는 데 시스템이 얼마나 제대로 갖춰졌는가를 갖고 평가해야죠. 기본적으로 노동당의 시스템에는 이상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 시스템에 붙은 뼈와 살들이 다 열정적으로 움직였느냐 하는 건데, 뭐 상당히 그러지 못한 경우들도 많았다는 거죠. 아직 우리 내부의 정치적 통일성이 낮은 수준이고 선거과정의 일들에 대한 평가가 통일되지 못 해서 소극적으로 일에 임하는 게 합리화되는 그런 일도 없지 않았지요.
또 하나는, 당원들이 자신의 생활처지에 맞게 선거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고 독려하는 일이 부족했죠. 당원들에게 어렵더라도 출퇴근 시간에 거리에서 홍보활동하는 데 나와 달라고 하는 것 외에, 각자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조직화하지 못 했잖아요.
‘노사모’의 열정은 좀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정몽준이 지지철회를 하던 그 밤에 제가 아는 한 당원은 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서로 다른 7명의 노사모 회원한테서 ‘네가 민주노동당원이라는 거 알고 존경하는데, 이번만은 2번 찍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는 겁니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는 사람은 성격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도 전화 걸어서 지지해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절박함과 열정이 과연 우리한테 있었느냐 하는 점이 여러 가지로 짚어봐야 할 대목이 많겠죠. 이것은 단순히 내부의 정파문제로도 설명될 수 없는 거고요.(민주노동당 내부에서 기호 2번을 지지하며 ‘해당 행위’를 한 당원들이 있었고 최근까지 그들에 대한 징계문제를 놓고 작은 마찰이 있었다. – 편집자 주)
왜 ‘노사모’보다 덜 뜨거우냐?
퍼> ‘노사모’가 ‘붉은 악마’ 또는 ‘촛불시위’의 연장선상에 있고, 우리 사회의 20~30대가 사회를 바꾼다, 이런 평가가 선거 후의 분위긴데요. 총장님께서 선거 직후에 직접 노동당 게시판에 ‘노무현의 승리이고 노사모의 승리이다’고 쓰셨던데요. 노무현 정권 출범의 의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노> 그렇죠. 노무현의 승리이자 노사모의 승리죠. 그런데 민주당의 승리는 아니죠. 오히려 민주당의 패배죠. 그게 중요한 점인데요. 김대중 대통령이 ‘동교동계는 해체한다’라고 얘기했는데, 그게 비극이죠. 사실 동교동계는 5년 전에 해체해야했어요. 5년 전에 디제이가 이길 때도 국민들이 동교동계는 다 싫어했단 말이에요.
노무현 씨 당선은 3김(三金)시대의 마감이죠. 우리 국민들이 사실 87년까지 92년까지, ‘독재냐 민주냐’의 구도 이외의 것은 생각을 못 했습니다. ‘독재와 민주’의 그 어마어마한 대립 속에서 침묵을 지키거나 어느 한 편을 들거나 한 거죠. 3김은 ‘민주냐 독재냐’는 구도의 상징이라서, 정치개혁 자체에 대한 열망이 있었지만, 3김 중에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지, 제대로 된 정치개혁이나 구시대 정치 청산에 대한 욕구를 국민들이 펼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디제이를 찍으면서도 동교동계의 문제는 뒤에 둘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디제이까지 대통령이 되고 나니까 결국에는 그동안에 눌려 있었던 정치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는 그런 세력과 그런 인물을 원하게 된 겁니다. 그게 ‘노무현’과 딱 맞아떨어진 거죠. 그게 ‘노사모’가 결집 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노사모’가 만들어지고 난 2년동안은 거의 세력 확대가 안 되다가 이번 대선 기간에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점입니다. 디제이 정권이 이제 끝난다는 말이죠. 또 하나는 ‘붉은 악마’와 11-12월달의 ‘반딧불’입니다. 한국은 시민사회가 없는 나라고 ‘시민계급의 형성’ 없는 역사적 과정을 밟아왔기 때문에 ‘광장문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장’을 3~5월에 국민 경선의 ‘노사모’가 채웠고 6월 달에는 ‘붉은 악마’가, 다시 11-12월에는 촛불 시위대가 채운 겁니다.
그간의 여러 가지 역사적인 장애물이나 더 시급하다고 믿어졌던 일 때문에 눌려왔던 그런 에네르기들이 30대가 주도하고 20대가 따라오고, 일부 40대가 가담해서 폭발한 거죠. 이 에네르기는 정치적이기도 하고 문화적이기도 합니다. 이번엔 노무현을 택했지만, 계속해서 노무현으로 간다는 보장도 없는 거고요.
아무튼 민주노동당으로서도 이 부분에 대단히 주목을 해야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만. 그런 점에서 그런 에네르기가 뒷받침된 ‘노사모’같은 집단과, 엄청나게 탄압을 받으면서도 완전히 지하에서부터 시작해서 지상에까지 자력으로 나타나서 이제 겨우 전체 국민들에게 선을 보인 세력의 열기를 그냥 평면에서 비교하는 건 좀 그렇습니다. 저기는 저렇게 뜨거운데 여기는 ‘골수’들이 왜 덜 뜨거우냐(웃음). 이렇게만 이야기하기 힘든 게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은 위기에 봉착했다!
퍼> 80년대부터 자라온 그 ‘골수’들과 새롭게 나타난 젊은 열기가 ‘접속’할 수 있는 지점이 뭔가요?
노> 그걸 찾는 게 민주노동당의 2003년의 과제고, 그런 점에서 민주노동당은 이제 선거 끝나자마자 위기에 봉착했다는 겁니다.
퍼> 사실 2002년 6월과 12월의 광장에 실제로 민주노동당의 지분이 많다고 생각되거든요. 그 ‘접속’의 지점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 하는 문젠데요 어딘가에서 총장님이 ‘운동권스러운 운동방식도 문제다’고 써놓으셨던데요.
노> 상당히 어려운 문제인데요. 저번에 ‘앙마’와 ‘범대위’가 대립한 그런 문제가 대표적일 겁니다. 사실 11-12월의 시위에 연단 위에 있던 대부분 사람이 민주노동당원이예요. 당원임을 밝히진 않았지만. 그래서 사실 12월 판을 짜는데 있어서는 우리 당이 다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여온 사람들한테는 배척받고 있는 상황이 온 거죠. 이게 어느 쪽이 옳으냐의 문제로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결국에는 저희 같이 더 목적의식적인 집단의 책임이 더 큰 거예요. 더 목적의식인 집단이 대중들을 포용하고 같이 올바른 방향으로 같이 가려고 해야 되니까요.
‘운동권 문화’를 부정적으로만 봐서도 안 되겠죠. 제가 9월에 브라질 가서 제일 감동했던 건 뭐냐면 PT당 사람들이 ‘좋은 의미에서 운동권적’이었다는 점인데요. 예를 들면 한국에 찾아왔던 스웨덴 사민당이나 프랑스 사회당의 인사들한테서 전혀 느끼지 못 했던 그런 뭉클한 걸 브라질 사람들한테서 엄청나게 많이 느꼈어요. 운동권의 좋은 점요.
민주노동당이 보수다?
퍼> 그게 뭡니까?
노> 열정, 헌신, 소박- 이런 겁니다. 그래서 ‘운동권인 것’ 자체를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만, 제가 우려하는 건 뭔가 하면, 마치 그 판을 다 만들어 놓고도 ‘니네 뭐냐’ 하는 식으로 오해받고 비판받는 억울함처럼, 새롭게 형성되는 에네르기를 가진 집단의 눈에 민주노동당이 보수적인 집단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이게 참 억울하지만, 그걸 부정하지만은 못 하는 거기에 여러 복잡한 게 있습니다. 극복하고 싶은 낡은 것을 계속 지탱한다는 의미에서의 ‘보수적’이라는 말인데요, 지금 우리한테 그런 측면이 좀 있습니다. 특히 개혁당 때문에 더욱더 그렇게 비치게 될 소지가 있어서 상당히 긴장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운동권의 가장 큰 문제는 패배주의와 폐쇄성입니다. 물론 그 책임의 상당부분은 외부로터 온 것입니다. 그 극심한 탄압을 오랫동안 받아왔고, 자유주의 세력한테 빼앗겨왔으니까요. 늘리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힘들었던 시대에서는 지키는 것만으로도 자기 존재가 확인되는 그런 문화에만 익숙한 거죠. 뭔가 성공한 적이 별로 없는 거예요. 성공하려고 하는, 이기려고 하는 그런 세력의 태도나 문화가 부족하죠. 우리한테 익숙한 말이 어떤 거냐면 ‘넘어져도 난 울지 않을 거야’ 이런 거예요. 안 넘어지려 하는 게 아니라 미리부터 울지 않겠다는 거. 그리고 누굴 감옥에 집어넣으려는 노력을 하는 거보다는 ‘나 감옥에 들어가는 거 겁나지 않아’ 이런 거 있잖아요.(웃음)
퍼> 운동권의 언어 문제, 문화 문제도 무시할 수 없는데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이런 면에서는 전혀 안 달라진 것도 상당히 많은 거 같습니다. 총장님은 ‘오래된 운동권’이신데 당내 2-30대 당원들하고 잘 통하시나요?
노> 당내의 세대문제를 묻는 건가요? 그런 게 없진 않겠죠. 오히려 저는 그거보다 더 큰 문제가… 민주노동당에 입당할 정도 되면 세대를 떠나서 일정한 기본이 있어요. 30대건 40대건, 당 바깥 사람하고 당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갭이 있는 거 같아요.
그런 점에서 민주노동당의 사고나 활동에서의 개방이 필요하죠. 변절하지 않고 싸우는 것만이 최상인 시기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또 그것만으로도 ‘참 훌륭하다’고 평가받아 마땅한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 가지고 안 된다는 거죠. 오히려 거기에만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아주 낡은 게 되죠. 대중은 ‘나 한번 웃겨봐’나 ‘날 한번 감동시켜봐’인데, ‘난 근엄해’ 뭐 이런 식으로 안 된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저는 진보정당의 활동방식, 고유한 문화 같은 게 더 필요하다가 봅니다.
‘평등’ 대 ‘자주’
퍼> 선거 기간 민주노동당의 제일 큰 슬로건이 ‘부유세 신설’ㆍ‘줏대 있는 나라’였는데요. 이게 ‘평등’과 ‘자주’, 당내 좌우의 이해를 절충한 건가요. 촛불시위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당내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궁금합니다.
노> 중앙당 차원에서 한 일 중에 제일 중요했던 게 TV토론이었고, 그 다음이 중앙 유세단의 유세활동, 그 다음이 광화문에서 벌어진 시위에 참가하는 거였습니다. 이걸 놓고 좀더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권자들한테 가장 더 많이 영향을 미쳤던 TV토론에서 우리 후보는 두 가지 얘기를 다 했습니다. 평등과 관련해서 ‘부유세 무상교육 무상의료’, 자주와 관련해서 그 또 ‘주한미군 철수’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그런데 시청자들 뇌리에 뭐가 남았느냐. ‘자주’는 안 남고 ‘평등’만 남았다 이거죠. 그럼 자주는 왜 안 남았느냐.
‘소파개정’에 다른 후보들이 다 찬성하고 나와버려 쟁점이 희석이 됐어요. 그리고 주한미군 문제도 청취자들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로 안 받아주면서 결과적으로 ‘자주’와 연관된 부분은 별로 안 남고, 어딜 가나 ‘부유세 신설’ 내지 ‘무상교육 무상의료’가 선명한 쟁점이 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점에 있어서는 유감이 없다 이거고요. 다만 미국과 관련해서 좀더 우리가 설득력 있게 민주노동당다운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었는데 다른 후보 진영 때문에 이것이 물타기 되어버려 아쉬운 게 있죠.
근데 유세단 같은 경우에는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표현해 내지 못 하고 한쪽으로 치우쳐서 활동을 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득표에 좋은 영향을 줬던 안 줬던 간에 상관없이 솔직히 평가를 받아야 될 부분입니다. 반미시위는 선거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회창, 노무현이 다 소파개정 한다고 했지만 우리는 후보가 직접 시위하는 데 갔었고, 득표와 무관하게 언행이 일치하는 집단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건 잘했습니다. 반미시위 때문에 우리가 선거운동력을 낭비하거나 한 것도 없었기 때문에 잘 한거죠.
문제는 그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던 반미시위의 덕을 누가 봤냐는 건데요. 당연히 노무현 씨가 절대적으로 큰 득을 봤죠.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의지나 전술과는 무관한 거였습니다. 다만 반미시위가 확산될수록 그 성과가 다소 민주노동당에게 올 거라고 생각한 그런 생각을 갖고 선거운동에 임한 측이 있었다면 그 선거운동은 완전히 잘못된 거라 생각합니다.
3. 사석(私席)에서
노회찬 총장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온 후, 1979년에 고려대에 입학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사회변혁에 관심을 가져 자생적인 ‘운동권’이 되었다. 대학도 제대로 다니지 않고, ‘끈’도 동료도 없이 혼자만의 판단으로 1982년부터 노동현장에서 일했다.
‘인민노련’의 기억
노> 83-4년쯤 되면 한 해에 한 100여 명씩 대학생들이 노동현장으로 ‘위장취업자’가 되어 들어왔잖아요. 내가 공장에 들어가던 해에는 아마 공장에서 일하는 ‘위장취업자’가 다 해도 10명도 안 되었을 거예요. ‘위장취업자’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으니까요. 외로움도 있었죠. 뭐라 그럴까 사막에 혼자 떨어진 느낌인데요. 그런데 그런 외로움보다 혼자 해결해야 될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노동운동에 관련된 서적이라곤 없었어요. 일본 책 구해보고 영어 책 구해보고 한 번 또 구하면 여러 명 돌려보고. 그 모든 걸 다 직접 해야 했는데, 그게 나중을 위한 좋은 훈련이 되었어요. 나는 취직하려고 노동청 자료실까지 직접 들어가서 자료를 찾아 읽어야 했거든요.
퍼> 그러다 ‘선’이 닿은 게 언제쯤이십니까?
노> 원래는 대공장 들어가려고 기아자동차에 시험 쳐서 붙었는데 실수를 해서 예비군 때문에 대학출신이라는 게 밝혀져서 떨어졌어요. 그래서 인천에 있었던 현대정공 하청 회사에서 아주 초보적인 운동을 하고 있었죠. 그때만 해도 저희는 변혁을 위해서 노동자가 되어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서 기술도 배웠어요. 청소년 직업학교 다녀서 용접기술을 배웠죠. 그러고 있는데 83년쯤 되니깐 1명 2명 현장에 대학출신이 생기더니 84년 되니깐 더 많은 수로 학교 졸업한 위장 취업자들이 오는 거라. 자연스럽게 그 전에 알고 지내던 후배들이 같이 하자해서 써클을 만들었어요. 그 써클이 그 당시로서는 내가 알기로는 전국에서 젤 컸어요. 그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하게 컸지. 인민노련이 인천, 주안, 부천팀이 모여서 만들어지는데 그 중 한 축이 되죠.
퍼> ‘인민노련’의 활동이 정리되어 있는 기록으로 있나요?
노> 검찰 공소장 외에는 없죠. 그런 작업도 해야될 텐데…
퍼> 그 서클 이름이 뭐였습니까?
노> 당시에는 경찰에 잡혀가면 단 10시간 안에 모든 걸 다 불게 만드는 고문을 하는 그런 시기였죠. 한 사람이 85년에 잡혀가는 바람에 그 이름을 안 쓰게 되었는데, 잠정적으로는 ‘인천 노동자 해방투쟁동맹’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다가 87년 1월에는 ‘살인강간고문정권 타도투쟁위원회’라 부르고 ‘TD 타투 ㅌㄷ’이라는 약칭을 일부러 썼어요.(타투 또는 ㅌㄷ은 김일성이 조직했던 유명한 1930년대의 반제투쟁동맹의 약칭이기도 한데, 이런 명칭을 굳이 써보았다는 것이다. – 편집자주) 그리고 그 이름으로 플랭카드 만들어서 박종철 49제 같은 싸움할 때 공개적으로 들고 나가고, 타도 투위 이름으로 인천 현장의 NL에게 같이 하자는 제안을 한 거예요.
퍼> 처음부터 전위당을 염두에 둔 조직을 만드려 했나요?
노> 최종목표는 비합법 정당을 만드는 거였지만 그럴 능력과 사정이 안 되니깐 반합법 정치노동자 조직을 우선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을 한 게 85년도였어요. 그래서 85년도에 인천에서 나름대로 영향 있는 서클들이 모이기 시작했어요. 모일 때 두 가지 중요한 기준이 있었어요. 뭔가 하면, 하나가 ‘반교조주의’였어요. ‘인민노련’밖에서 뭐 어떻게 평가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스스로 견지하고 싶었던 ‘반교조’가 그 당시 내용으로는 ‘반-주사'(주체사상-편자주)ㆍ‘반CA'(사노맹 계열의 좌파 운동조직의 별칭-편자주)’였어요. 다른 하나는 ‘실사구시’와 ‘대중 사업능력’이었어요. 머리와 말은 정말 똑똑한데 대중 속에서는 꼼짝 못하는 그런 걸 평가 절하하고 실무적인 능력을 중요시하고자 했죠.
아까 말했던 세 서클의 대표자가 만나서 같이 반합법 조직을 만들기로 한 게 85년이었고 85년이 나름대로 유화국면이었어요. 그 당시 우리는 군부독재가 오래 못 갈 거라 봤어요. 81-3년 같이 철저하게 탄압하는 상황은 아닐 거라 봐서 조직의 이름과 존재까지도 감추는 활동은 비효율적이라 본 거죠. 그래서 ‘반합법’이란 ‘인민노련’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문건도 뿌리고 활동을 하지만, 성원의 이름은 철저히 숨기는 방식이죠. 그런 조직 형태는 당시로는 잘 맞았어요.
퍼> 처음부터 NL과 같이 하자 했다고요?
노> 그래요. 그 쪽을 배제한 적은 없어요. 조직을 같이 만들자 해서 87년 6월 10일 부평연합 시위에사 발대식을 하고 조직을 만들었고 3개월 후에 중앙위원회가 열렸는데, 모여 보니까 자기들이 소수파임을 감지한 주사파들이 집단 탈퇴를 해요. 그래서 연합한 거는 3개월이고 그 이후엔… 뭐… 이번에 부산에서 열린 TV토론 때문에 갔다가 그 중에 중요한 인물이었던 사람을 만났어요. 노무현 미디어팀에 있데요.
김문수 장기표 정태윤 김근태
퍼> 옛날에 총장님은 한나라당에 있는 김문수ㆍ이재오ㆍ정태윤ㆍ박종운 같은 사람들과 동지적 관계에 있었죠? 저는 항상 그런 사람들이 제일 이해가 안 돼요. 한나라당에서 뭘 한다는 건지?
노> 저는 잘 이해가 되요. 그건 뭐 별 의미 있는 건 아니죠. 개인적으로 보면 김문수 씨나 장기표 씨 같은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그 명망이 대단하다는 게 아니라, 나는 그 사람들이 어떤 활동가인지를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에요. 나이든 교도관들 말이, 80년대에 통틀어서 수 만 명이 교도소를 다녀갔지만 그렇게 전투적이고 한 마디로 못 말리는 정치범이 바로 김문수ㆍ장기표예요.
그 분들이 지금은 개량, 아니 개량을 넘어선 뭐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지만, 내가 활동가 시절에 본 그 사람들의 지략이나 근면성실성, 그리고 뭣보다도 전투성은 참 대단했어요. 그 대목은 내가 애석하게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에요. 이재오 씨는 내가 뭐라 말할 처지는 아니고, ‘인민노련’과 직접 사람은 정태윤 선밴데, 그 선배의 ‘인민노련’ 활동은 아직도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어요. 한나라당 간 이후에 대해서는 따로 평가해야겠지만 그 시절에는 모범적인 활동가였어요.
40대의 위기
퍼>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데요. 동세대인으로서, 김문수ㆍ장기표ㆍ정태윤 같은 사람들의 행로가 이해되신다는 겁니까?
노> 본인들이 저한테 잘 설명을 해줘서 이해는 하죠. 전혀 동의할 수는 없지만. 결국에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역사유물론 교과서에 보면 ‘역사와 개인’ 같은 항목이 있잖아요. 역사를 개인 중심으로 봐서 그렇게 되는 거죠. 민중당이 해산되고 난 뒤 제가 감옥에 있던 91년도에 김문수 씨가 면회를 왔어요. 와서는 ‘무슨 책 읽느냐’고 묻길래, ‘북한판
마르크스 선집 12권짜리가 있어서 여유 있게 보고 있다’고 했더니, 김문수 씨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엘빈 토플러 얘기를 하면서 자기가 ‘토플러 책 몇 권을 넣겠다, 그런 걸 봐야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짐작은 했었지. 내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이 양반을 만나서 ‘민중당이 어려웠고 해산에 참 억울한 심정도 많겠지만 가장 중요한 거는 계속 하는 거다’, 그렇게 강력하게 설득을 했어요. 이때 김문수 씨가 나에게 한 이야기는 ‘나는 우리 가족한테 죄인이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죄인이 되고 싶지 않다. 운동하면서 성과 얻었는지 모르지만, 가족들 고생하는 거는 더 참을 수가 없다.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노회찬 니 얘기 다 옳다, 그러나 살아 생전에 그건 다 안 된다. 그러면 오히려 무책임 한 거 아니냐? 살아 생전에 이룰 수 없는 주장만 계속하고 가족은 가족대로 고생하면 뭐냐? 너는 100을 하겠다고 하는데 나는 2~3개만 하겠다. 그 2~3개만 잘하면 살아있는 민중에게 도움되는 거 아니냐’ 이런 식의 이야기가 다 똑 같아요.
나는 내가 좋아했던 선배인 장기표 선배가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도 뻔질나게 면회 갔었습니다. 당시 우리 동료들은 ‘장기표 씨는 개량주의자다’ 그랬지만 나는 그렇게 안 봤어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은 같이 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장기표 선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딴 게 아니라 민중당을 해산한 데 있어요. 민중당이 한계나 문제가 많은 당이었지만, 그걸 계속하면서 고쳐 나가면 되는 건데, 그렇게 하지 않은 거죠. 결국 이 양반이 그걸 인정하는 데 10년이 걸렸어요. 2년 전에 만났을 때 그걸 인정했어요. ‘니 말이 맞았다.’ 장기표 선배도 마찬가지로 ‘살아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을 일은 안 하겠다.’고 했어요. 김근태 선배는 93년도엔가 많이 만났어요. 김근태 선배한테 ‘진보정당 같이 하자’고 제안했는데, 이 선배는 ‘일단 김대중 정권을 만들자. 그래야 진보정당이 잘 된다’고 했어요.
내가 선배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93년도에 스스로 만든 이론이 있었어요. 93년이면 내 나이가 38인가 그랬는데요. 그때 내가 선배들을 보면서 느낀 게 ‘40대 위기론’이예요. 멀쩡하게 운동 잘하던 사람도 나이 40이 되면 달라지기 쉽상이에요. 40이란 나이가 주는 의미가 있잖아요. 뒤돌아 보게 되고 또 앞을 보면 얼마 안 남았거든. 그래서 살아서 할 수 있는 일만 하자고 되는 거죠. 역사의 스케줄이 있고 한 개인의 인생 스케줄이 있는데, 둘을 비교할 수 없는 거라고. 역사의 스케줄은 개인과는 무관하게 얼마나 도도한가요. 근데 개인 스케줄을 역사의 스케줄에 투영을 시켜요. 40이 넘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없다고 보니까 초조해지는 거죠.
사람들이 욕을 많이 하지만, 하나 변호하고 싶은 건, 40살까지만 놓고 보면 장기표나 김문수보다 열심히 산 사람 있냐 이겁니다. 40살까지만 보면 그 사람들한테 배울 게 더 많지 욕할 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보면 나이가 40쯤 되면서 인생 앞뒤 보니깐, 인생스케줄로 역사를 재단하게 된 거죠. 그래서 그 때 나도 40 앞둔 사람으로서 스스로에 대한 경각심을 갖기 위해 ‘40대 위기론’을 떠벌리고 다닌 거 같습니다. 내 후배들한테도 ‘나 곧 40된다, 나 잘 봐라. 내가 존경하는 선배들 40대 이후에 이렇게 됐다.’ 그 이야기를 한 지가 엊그제 같은 데 이제 50대에요. (웃음)
퍼> 그러면 총장님 경우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껏 흔들림 없이 어린 날에 세웠던 원칙을 계속 유지하고 가동해나간 동력이 뭐라 생각하십니까.
노> 뭐 개인적인 특성도 있겠죠. 내 세대하고 관계가 있어요. 우리 세대가 운동적 흐름으로 보자면 과학적 사회주의 1세대입니다. 부족한대로 과학적 사회주의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자기 것으로 실천에 적용하려고 몸부림 쳤던 1세대들이 우리 이전에도 있겠지만, 개별적인 차원이고요. 그런데 우리 때는 그런 일이 좀더 확대되죠. ‘사회를 보는 시각이 역사유물론 위에 서있다.’고 지금도 여전히 이야기 할 수 있고, 20년 후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거예요.
우리 세대 특징의 또 하나는 ‘전후세대’라는 점입니다. 전후세대로서의 특성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중요한 건 우리는 ‘한국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예요. 어렸을 때 보고 회상할 때마다 잊기 어려운 장면들이 있는데, 그 장면들이 나를 규정하는 자아가 된 거 같아요. 그 장면들이 나름대로 정치적으로 역동적인 장면들인데요. 저는 4.19와 5.16날이 다 기억나요. 저는 1960년 4월 19일날 서대문 형무소에 있었거든요. 내 나이가 5살 땐데. 엄마 따라 외삼촌 면회 갔다가 나오려 하는데 형무소 근처에서 데모가 벌어지는 바람에 못 빠져 나와서 쩔쩔맸던 기억이 나고요. 또 열차 타고 부산에 왔을 때 우리 집 근처에 도지사 공관이 시위 민중들의 돌팔매질로 파괴되고 우리 식구들이 덜덜 떨고있던 장면이 기억나고요. 또 5.16쿠데타가 나던 날 7시에 통금이 내려서 차가 안 다니던 바람에 어머니가 팔뚝에 야간 통행증 도장을 받았던 기억. 그리고 초등학교 다닐 때 월남 파병가던 군인들 환송식에 부산부두에 동원돼서 태극기 흔들던 기억. 그런 것들이 한국 자본주의 변천사를 반영한 일이고, 또 무엇보다 전태일이 그랬죠.
미디어 정치… 정치가로서의 길?
퍼> 총장님은 스스로 운동가와 정치가중에 어떤 쪽에 더 가깝습니까? 물론 우리말에 ‘정치’라 하면 부정적인 뉘앙스가 묻을 수밖에 없지만요.
노> 스스로는 운동가지. 아직도 내 스스로는 남들이 인정하든 안 하든 ‘노동운동가’가 내 영예로운 직업이에요. 가장 영예로운 직업.
퍼> 그건 지향적인 판단일 테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노> 다른 사람들은 저를 정치가로 많이 보겠죠. 근데 나는 좀더 지켜 봐주길 바래요. 좀더 시간을 더 갖고 봐주길 바라고 있고.
퍼> 지난 번 대선 과정에서 토론 때문에 ‘노회찬 신드롬이 일어났다’고 했을 때는 느낌이 어떠셨어요? (‘노회찬 신드롬’은 지난 11월 KBS 심야토론에 출연한 노회찬 총장이 이재오ㆍ김민석을 효과적으로 ‘공격’하여 네티즌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에서 비롯되었다)
노> 그때는 뭐, 겸연쩍고 좀 놀랐죠. 전혀 그런 경험이 없었고 우리 세대는 개인을 앞세우는 데 익숙지 않아요. 그 후에 느낀 거도 많고,
TV토론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도 더 많이 하게 됐죠. 이번 대선 때 총6번 TV토론에 나갔는데 내가 제일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사람들이 많이 못 봐서 그런지 별 반응이 없었는데요.
퍼> 아무래도 이재오ㆍ김민석하고 같이 나왔던 게 컸겠죠?
노> 시청률이 너무 높았죠. ‘후보 단일화’ 선언하고 난 직후여서 거의 후보토론회만큼 시청률이 나왔다 그래요. 그 토론회 직후에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아는 체를 해서 말조심해야겠다고 느꼈어요. 내용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토론이었고, 긴장도 많이 했어요. 통합의 당사자도 아니고, ‘후보 단일화’를 비판해야 되는데, 한나라도 비판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어려웠죠. 그래서 사실은 내 스타일로 봐서도 굉장히 오버한 거예요. 토론을 잘 해도 별로 얻을 건 없는데 잘못하면 완전히 한나라당하고 입장이 비슷하다는 식으로 난도질당한다는 위기감이 들었죠. 그래서 ‘후보단일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대해서, ‘단일화에 대해서 비판할 자격이 있는 당은 민주노동당밖에 없다.’는 걸 강하게 내세웠죠. 한나라당에 대해서 구분해놓고 갔어야 했거든요. 더구나 그날 토론 방식은 순서가 딱 정해진 게 아니라, 즉흥적으로 모든 발언을 하는 것이었어요.
퍼> 소위 ‘미디어 정치’가 이번 대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노무현도 미디어 정치의 승리자고요. 민주노동당도 미디어 정치 시대에 맞는 지도자를 길러야 할 텐데요. 긴장도 많이 했고, 어려웠다고 말씀하셨는데 TV 출연이 노총장님 적성에 잘 맞던가요?
노> 너무 잘 맞다는 걸 이번에 알았어요. 그래서 내가 후보로 안 나가더라도 토론에는 내가 나가야 되겠다는 생각까지 해 봤죠.(웃음) 토론회에 나가면서 느낀 건,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말을 잘 한다’는 평가보다도 절묘한 짧은 한 마디 한 마디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거예요.
시청자들이 권영길 후보한테서 감동을 느낀 거도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권영길이 하네’라든가 ‘권영길 정말 똑똑해. 논리 정연해.’가 아니라,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거, 내 마음 속에 응어리졌던 걸 저 사람이 말하네.’라고 느낄 때라는 거죠. 국민들 눈높이를 정확히 맞춰서 풀어주는 게 필요한 화법인 거예요. 이런 걸 이번 대선 때 배웠어요.
퍼> 노총장님도 이번 대선에서 좋은 의미로 ‘부각’된 분 가운데 하나임에 분명한 거 같습니다. 아까 본인은 계속 ‘운동가로서의 지향’을 갖는다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요구할 것이고 민주노동당으로서도 그럴 수 있다고 보입니다. 양자를 일치시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닌데요.
노> 당을 위해서 그런 것을 위해서 내가 잘못되어 있는 측면을 지적받고 고치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그런 걸 위해서 쇼를 해야된다면 난 안 할 겁니다. 그냥 내 진면목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건 나한테 안 맞아요.
퍼> ‘미디어 시대’, ‘이미지 시대’라서 기본적으로 김대중이든 노무현이든 화장을 해야되고 이미지도 만들어야 됩니다. 그런 건 자기 의사나 지향성과도 무관한 면이 생겼죠. 민주노동당의 지도자들이라고 해도 그런 데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정치가’라면 누구나 감수해야 할 요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노> 감수 안 하겠다는 건 아닌데.(웃음) 쇼는 하기 싫어요.
“결혼은 대성공”
퍼> 결혼은 언제 어떻게 하셨나요?
노> 인천에서 활동할 때 만났죠. 활동하는 와중에 딱 보고 ‘와, 저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다’해서 한번 시도했다가, 단호히 거절당했죠. 그러다 몇 달 있다가 재도전했어요. 88년도 총선에 내가 형님으로 모시던 해고 노동자가 한 분 있었어요. 그 분을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하고 선거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같이 활동했어요. 그 때 친해져 가지고, 노동운동은 자기가 나보다 선배라고 그러죠.
퍼> 부인이 먼저 노동현장에 계셨던 건가요?
노> 내가 다른 분야는 잘 모르겠는데 노동운동과 관련해서는 나름대로 확고한 게 있고 직업을 쓸 때도 ‘노동운동가’라 쓰지만요. 그런 게 있어요. 우리 마누라가 노동자 출신이에요. 그런데 결혼 할 때 우리 마누라 학력에 속았어요.(웃음) 마누라는 옛날에 중학교 졸업이라고 분명히 나한테 말을 한 거 같은데, 이 양반이 뒤늦게 고입검정고시를 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처음에 반대했어요. ‘그깟 제도교육 받아서 뭐하냐’고요. 그런데 작년에 70년대 노동자 사이에서 약간 붐이 좀 불었어요. 배움에 대해 목마른 게 있겠죠. 그래서 ‘고입 검정고시’를 본다는 거야.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하긴 했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지니깐 학력 인정이 안 되는 비정규중학교를 다닌 거죠. 이 사람은 16살 때 대성목재에 취직하려고 언니 주민등록을 썼대요.
평소엔 제가 전혀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지만 작년 8월에는 초등학교를 졸업증명서도 같이 떼러 가고 시험 보러 가는 날에도 마누라를 태워줬어요. 그 시험이 주로 8월에 있다더만요. 아, 그런데 내가 그날 충격 받았어요.
퍼> 왜요?
노> 우리 마누라 때문에 충격받은 게 아니고, 시험장 앞에 서 있으니까 중학교 졸업장 따려고 사람들이 시험 보러 죽 걸어오는데, 오는 사람들이 전부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이었어요. 50대부터 10대까지 연령대도 참 다양한데, 멋있게 잘 차려입은 20대 여성들도 참 많았어요. 이렇게 배움에 목마르고 중학 졸업장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걸 처음 알았죠. 특히 여자들이 학교에 못 가는 경우가 많으니까 특히 많고요. 마누라는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나는 차 세워놓고 보면서 그거 보면서 움직일 수가 없는 거라. 근데 이 사람이 다행히 한번에 시험에 붙었어요. 그랬더니 대입검정고시도 한다고 하는 거야. 아마 운동권에 있었기 때문에 한 번에 붙었을 거예요. 나이 50이 넘어서 공부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퍼> 지금은 어떤 활동하시는데요?
노> ‘여성의 전화’에서 일해요. 내가 태어나서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해왔는데 아직까지는 성공한 게 한 가지밖에 없어요. 결혼이에요. 아직까지 성공한 게 결혼밖에 없어. 세상에 이렇게 결혼만큼 좋은 게 없다고 생각해요.
퍼> 왜 그런가요?
노> 다행히 운동하느라고 늦게 결혼했어요. 34살에 했는데, 늦게 결혼해서 그런지 좀 안정적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던 거죠. 그보다 더 어릴 때 결혼했으면 달랐을지도 모르지만요. 결혼할 때 ‘이 여자랑 결혼하면 내 인생이 질적으로 좋아질 것 같다, 많이 배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뭐 지식을 배운다는 게 아니라. 난 그게 굉장히 강했고요. 지금도 그 생각이 변함이 없어요.
– 인터뷰 기사 작성에 도움을 주신 정종권 민주노동당 구로을지구당 위원장과 <퍼슨웹>의 “모험” 양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