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서막 80년 사북을 묻다
<먼지, 사북을 묻다>의 감독, 이미영
전철역을 걸어나오자 유령처럼 배회하던 도시의 찬바람이 코트 속을 파고들었다. 안국역 근처 어디라고 했는데 나는 한참 동안이나 방향을 잡지 못 하고 두리번거렸다. 호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약도를 꺼내들고 방향을 가늠해 보다가 곧 옷깃 세우고 안국동 돌담길 쪽으로 냅다 달렸다. 높은 돌담이 끝나는 길에 자잘한 카페가 늘어서 있었고 ‘서울아트씨네마’(구 ‘아트선재’)가 보였다. 건물 위에 매달린 ‘서울 독립영화제’ 현수막이 추위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영화 <먼지, 사북을 묻다>의 마지막 상영이라는 소식을 들었는지 입구에는 생각보다 많은 관객이 몰려와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명사가 던져주는 의미심장함과 그것이 불러오는 조급함이 사람들을 불러낸 것이 아닐까 싶다. 이미영 감독은 인터뷰 요청 답신에 “어쩌면 이번 상영 끝나고 지방에 내려가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가 아니면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조급함이 나를 인터뷰 자리로 끌어낸 것일까.
이미영 감독의 <먼지 사북을 묻다>는 1980년 4월에 일어났던 ‘사북항쟁’의
진상을 본격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즉 이 작품은 당시
사북탄광 광부들이 처해있던 비인간적 상황과
그에 대한 항쟁의 성격을 조명함으로써 과거
“불순분자의 사주를 받은”“광부들의 집단난동”으로 일반에게 인식되었던
‘사북항쟁’이 정당하게 평가되기 위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된다.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 탄탄한 기업을 가진 경영자로서, 혹은 군과 경찰 고위 간부로 살아가는 그들의 오만한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감독의
비판정신은 분명 단순한 저널리즘을 넘어 시대의 진실에 육박하고 있다.
– 인권영화제 심사평
영화가 끝나고 이미영 감독은 “정말 오늘이 마지막인 것 같아 속 시원하게 모두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1997년부터 6년 간, 20대의 빛나는 날들을 모두 검은 탄광의 이야기를 만드는 데 바쳐왔다.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라니, 이 감독의 눈빛에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나는 <먼지, 사북을 묻다>의 스텝과 몇 명의 관객이 모인 조촐한 송년회 자리에 함께 하기로 했다. 송년회 자리에 인터뷰가 어울리지는 않지만 양해를 구하고 ‘음주 인터뷰’를 감행했다. 연말 술자리 모임이 많은 탓인지 인사동은 우리에게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인사동 주변 술집과 카페를 먼지처럼 휩쓸려 다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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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영 프로필 *
1975년 청주 출생
고려대 독문과 졸업
1999년 <먼지의 집>공동기획, 연출
서울다큐멘터리 영상제 신진다큐멘터리 감독상
부산국제 영화제 Wide Angle 부문 상영
2000년 <먼지의 집> 스위스 프리부르그영화제 초청
2001년 사북 고한 이야기. <폐광촌 소녀의 겨울나기> 발표
2002년 <먼지, 사북을 묻다>
부산국제 영화제 Wide Angle 부문 상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 특별상 수상
체코 One World IFF 2003 초청
미영, 사북을 파헤치다
1980년 4월 21일 강원도 정선의 탄광촌 사북. 동양 최대의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의 광부와 그 가족들은 어용 노조와 열악한 노동환경에 항거하여 곡괭이와 몽둥이로 무장, 3일 동안 사북읍을 점거한다.
이 소요에 경찰은 즉각 병력을 투입하였으나 노조원을 경찰 짚차로 사망시키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이에 이원갑, 신경 씨를 중심으로 광부 대책위가 구성된다. 이들은 어용 노조지부장 이재기 씨와 반공 이데올로기로 사건을 매도한 경찰을 규탄하며 그 동안 쌓여왔던 분노를 한꺼번에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노동자들은 지서를 공격하고, 회사간부와 어용노조 간부의 집을 부수었다.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이재기 노조지부장과 부지부장, 대의원 등 어용노조 간부의 집을 찾아내어 기물을 파괴하였다. 특히 옆집으로 도망가 숨어있던 노조지부장 부인(김순이)을 찾아내 광업소로 데려와 두 손과 허리를 묶고 린치를 가했다. 이때 노조지부장 부인을 폭행하는데 부녀자들이 적극 가담하였다.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술 취한 광부들의 집단난동”, “불순분자의 사주” 등의 이름으로 ‘사북사태‘를 타전한다.
이때 언론은 ‘노조지부장 아내 린치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여 “천인공노할 사태”로 국민들에게 각인시킨다.
그러나 언론에서 “폭도”, “아수라”, “술 취한 광부들의 난동” 등으로 보도한 사북사건은 실제로는 전혀 달랐다. 자발적으로 무기고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3,000명이 광장에 모여 난상토론을 벌여 11개의 합의사항(노조간부의 완전퇴진과 직선제 실시, 암행독찰대 (노무 감시조직) 폐지, 이번 사태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을 일체 묻지 말 것 등)을 만들어 냈다.
뿐만 아니라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병력과 광부들이 대치하던 중 투석전 (안경다리 접전)이 발생하는데 이때 부녀자들이 돌멩이를 함께 나르며 싸우기도 했다.
얼마 후 계엄군이 근처 지역으로 투입되었고 경찰은 소요를 정리하기 위해 협상 팀을 가동한다. 광부들은 ‘책임자를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3일간의 항쟁을 정리한다.
그러나 ‘사태‘라는 이름을 뒤집어 쓴 사북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며칠 뒤(5월 8일 밤)부터 이원갑, 신경 씨 등의 광부 대책위원을 비롯해 가담자 200여명이 간첩의 굴레를 쓰고 계엄군에 의해 마구잡이로 연행되고 고문을 통한 거짓 자백을 강요받는다. 도시 전체는 며칠 동안 공포로 휩싸인다.
그 후로 20여 년 지난 동안 죄의식과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지내던 사북 관련자들이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20대 후반의 젊은 감독 이미영 씨가 다큐멘터리 영화 <먼지, 사북을 묻다>를 통해 묻히고 소외되었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의 먼지가 쌓인 상자, 그 잊혀진 역사의 뚜껑을 연 이미영 감독은 “어떻게 이 첩첩 산중에서 항쟁이 일어날 수 있었으며 사람들은 어째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시간은 기억에 물타기를 계속하고 있다”며 우리를 재촉한다.
참고 자료: <1980 4월 사북>(사북 사건 자료집) – 정선지역발전연구소
이미영(이하 ‘이‘)> 이제 볼 사람들은 거의 다 봐서 오늘은 그렇게 사람들이 많지 않았어요. 원래는 영화 출연하셨던 아저씨들도 오기로 하셨는데 오늘은 사정이 있는지 못 오셨네요. 반지의 제왕이 한 시간만에 35만 명이 들었다는데 우리 영화는 3개월 동안 3500명 들었거든요. 비교가 안 되죠.(웃음) 하지만 관객은 다른 것 같아요. 주말에 <반지의 제왕>을 보러 가는 사람들하고 안 되는 시간 쪼개서 우리 영화를 극장(상영관)에서 보고, 감독을 만나고 하는 사람들은 다르잖아요. 독립 다큐를 많이 보지 않는 상황에서 그 관객들이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퍼슨웹(이하 ‘퍼‘)> 오랜 기간 동안 작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 같다는 말씀은 뭐죠?
이> 이 영화 작업만 2년8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사실 오늘 상영 끝나는 이날까지 제작기간이라고 생각해요.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후에 이 영화에 출연하신 분들이 상황을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오늘이 되어서야 마음이 놓이네요. 상영은,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게, 오늘에서야 정리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퍼> 이제 사북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는 것인가요?
이> 손을 떼겠다는 얘기는 아니예요. 사북은 저와 실제 관련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관계없었던 것을 어떻게 하면 나의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을 했었어요. 저와 주변의 관계들을 풀어내는 작업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이 영화를 만든 건데, 지금은 좀 쉬려고 해요.
한 평범한 여대생이 어떻게 사북이라는 동네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일까? 그리고 그 곳의 어떤 이야기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변하게 만든 것인지 궁금해졌다. 영화가 감독 ‘이미영‘의 시선에 따라 관객들에게 하나씩 답변을 해주고 있었다면 나는 이미영 감독의 시선을 거꾸로 타고 올라가며 묻는다.
퍼> 사북에 가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이> ‘사북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야 겠다‘라고 정해놓고 간 것은 아니고 그냥 서울을 떠나고 싶었어요. 97년이었고, 학생이었을 때니까, 대학 4학년 휴학할 때였네요. 학교에서 일도 잘 안 되고 연애도 잘 안 되고, 그래서 일단 떠났는데 우연히 발이 닿게 된 거예요. 제가 사북을 찾아간 게 아니고 어떻게 보면 사북이 제게로 왔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사북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이제 6년 동안이나 왕래를 하고 있네요.
우연히 찾아가게 된 사북. 아는 사람도, 반기는 이도 없는 그 시커먼 먼지투성이 오지에서 이미영 감독은 5년 전 <먼지의 집>을 제작하게 된다. 그러면서 듣게 된 ‘사북사태‘는 의문에서 의심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고 감독은 뒤집힌 퍼즐 조각들을 하나 둘 끼워 맞춘다. 아주 천천히,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귀기울이지 않았던 ‘사북사태‘는 감독의 뷰파인더 안에서 세상 밖으로 천천히 ‘항쟁‘의 이름을 달고 나왔다. 때문에 <먼지의 집>과 <먼지, 사북을 묻다>는 20년의 세월 속에 끊어져 있던 선을 잇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퍼> 사북 문제를 소재로 삼게 된 계기와 함께 영화를 만들게 되는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이> 처음부터 ‘사북항쟁‘에 관련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어요. 사북항쟁은 실제 일어난 객관적인 역사 상황이었는데 그것이 그곳과 다른 지역, 특히 서울 같은 지역에는 왜 이슈화되지 못 했을까 하는 의문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광산 노동자들은 70년대의 가장 어렵고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일을 했던 분들인데 어떻게 계엄 상황에서 가장 격렬하게 폭발적으로 싸울 수 있었을까? 하는 그런 의문이요. ‘동원탄좌‘가 폐광되어 가는 시점에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겹치면서 사건의 중요성과 개인적인 것이 접목된 거죠. 바로 그 시점부터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학교 다닐 때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라는 책에서 본 적이 있기는 했는데 그때는 머릿속에 기억되지 않고 통과가 된 것 같아요. 책에도 한 페이지 정도 나와 있긴 했던 것 같은데, 이 이야기를 직접 들었을 때는 상당히 충격이었어요. 그렇게 점점, 그 사건의 무게와 사실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지역에 대해 피부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것과 관련된 사람들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퍼> 그 분들을 찾아다니시려면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어떤 방식으로 그분들을 만나서 얘기를 듣게 됐습니까?
이> 어떤 날은 광부 아저씨들 휴게실을 직접 찾아갔어요. 거기서 사북사태를 겪고 당시 사북에서 살았다는 한 분을 만나려고요. 제가 그 때 기억이 어땠냐는 질문을 했는데 대꾸도 하지 않고 갑자기 사라져버리셨어요.
물론 제 인터뷰 방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그 분들이 피곤해서 피했을 수도 있었죠. 나중에 알게 된 건데 당시에 연행되어 갔고, 고문을 받고 나온 사람들은 그 사건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리고 자신이 겪은 일이 아니라 해도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는 그 얘기하는 것을 꺼려한다는 것도 알게 됐죠.
퍼> ‘사북사태‘는 사실 우리가 기억조차 할 수 없거나 잊혀져 있는 사건이지 않습니까?
이> 네, 그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나섰을 때 정작 그것에 관해 어떤 자료가 모아져 있거나 사건에 단서가 되는 것이 거의 없었어요. 단지 남아있는 것이라곤 과거에 대한 부끄러운 기억들과 그 사람들 간의 갈등, 서로를 외면하는 상황뿐이었죠. 정말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도대체 왜 그럴까, 도대체 어떻게 되었기에 저 사람들이 그럴까하는 호기심이 생겼어요. 그게 이 작품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겁니다. 카메라도 중간에 샀고요.
퍼> <먼지, 사북을 묻다> 만들기 전에는 사북에서 뭐 하면서 지내셨습니까?
이> 처음엔 영화 만들면서 그 지역에서 지역 운동 같은 것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개인적인 이유로 사북항쟁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먼지, 사북을 묻다> 작품 사이에는 다른 작업을 했죠. 97년에 만들었던 <먼지의 집>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동원탄좌 이야기예요. 동원탄좌의 하청업체 격인데 40여명의 노동자들이 일하는 탄광이 어느 날 폐쇄되는, 갑작스런 상황을 따라가 보는 기록영화였습니다.
퍼> 작업을 하신 기간이 6년이라고 들었습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인데 사북에 주거를 두고 작업을 했나요?
이> 주거를 둘 때가 있긴 했어요. 몇 달 동안은 있었지만 계속 있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정작 영화 작업을 할 때 여기 출연 하셨던 분들은 사북을 거의 떠나셨기 때문이죠. 그래서 계속 전국 여기저기를 다녀야 했었어요. 사북에 있었을 때는 자료집 만들어야 할 시점이라던가, 그쪽에서 촬영을 할 때라든지 이런 때였죠.
죄인은 하늘을 볼 수가 없잖아
이미영 감독은 ‘사북사태‘에 관한 내용 우연히 듣게 되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것은 ‘민주화 항쟁‘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접근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북의 주민들과 ‘사북항쟁‘을 ‘사태‘로 기억하는 대 다수의 지역주민들은 이 감독의 의문을 받아들이지 못 했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80년 사북‘은 국가 권력이 만들어 놓은 모습 그대로, 사북에 침투한 ‘간첩들‘이 주동한 ‘집단 소요‘ 또는 ‘사태‘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저희가 인터뷰 하러갔는데 신고가 들어온 거예요. 지역주민들이 웬 낯선 사람들이 ‘사북사태‘를 조사한다고 경찰에 신고했어요. 국가정보원에서 우리를 조사하러 나오더라고요.
난 임금 때문에 싸웠어요. 민주화 운동할 줄도 모르고. 난 우리 엄마 배밖에 난 이후로요, 그런 고생 나 첨 해봤어요. 한 가지 불만인 게 우리가 그때 임금하고 노조지부장 부정선거 때문에 싸운 건데, 내가 지금 억울한 건 고춧가루 물을 막 당기요. 난 국민학교도 안 다녔는데, 이북에 광부들이, 씨발 난 지도도 볼 줄 모르는데, 이름도 못 적는 기 어이 이북을 넘어가요.
고춧가루물을 막 들이밀어서… 거기 갔다왔냐고 물으니 기냥 갔다왔다 했지요. 아파 죽겠던데요. 뭐, 그리고 이놈의 새끼들이 담배 한 대 주면요. 안 갔다왔다, 갈 줄도 모른다, 그러면 또 패고… 취재하다 보면 병신 된 사람도 많을 기요. 그때 붙들려간 게 추리고 나니까 100명 이상 넘었웅께요.
– 전효덕(당시 37세 당시 탄광노동자. 계엄 포고령 위반. 소요, 특수 공무 방해 치상으로 구속)
퍼> 정작 지역주민들이나 이 사건을 겪은 당사자들도 민주화 운동이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을 텐데요.
이> 처음에 이 사건이 민주화 운동이냐 아니냐 라는 질문에 저희는 당연히 민주화 운동이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오히려 제가 그분들에게 물어봤을 때 당사자들은 이 사건이 부끄러움이나 오해들 때문에서인지 기억하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았어요.
이게 무슨 민주화 운동이냐 라고, 우리가 고문 받고 그렇게 했던 것들은 당연한 거다라고 생각하고 계셨어요. 오히려 그것이 제게는 충격이었죠.
퍼> 무엇이 작업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이었습니까?
이> 이 분들과의 정서적 괴리감 같은 게 큰 어려움이었죠. 영화 찍기 전까지 이분들이 우리스텝들을 신뢰하는 기간을 작업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될 것 같아요. 당연하잖아요.처음에 어떤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은 것을 물었을 때 무슨 얘기를 하겠어요. 저라도 그랬을 것 같은데…
그래서 편지도 쓰고 집에 찾아가고, 식당 하시는 분 댁에 가서는 ‘오봉‘도 나르고 채소도 씻고 설거지도 하고 그랬어요.(웃음) 나중에는 “우리 닭 먹으러 왔거든요” 하니까 “너희들한테는 닭 안 팔어.”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되다보니까 나중에는 도덕적인 문제까지 고민하게 되었어요. ‘이분들에게 정말 이 사건이 중요한가‘ 하는 고민 말이죠. 이 사람들은 정말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데 내가 이거 해서 뭐 하나 하는 그런 고민이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죠.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이게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면 지금 말하고 있는 민주화 운동이란 아예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이것이 항쟁이냐 아니냐의 문제도 중요하다, 그리고 이 분들의 관계를 이야기해야겠다, 라고 말입니다.
이 감독이 사북에 내려갔을 때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어렵게 찾아낸 당시 사북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처벌(고문)에 대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서로 간의 오해와 불신이었다.
안경다리 접전(경찰 소요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안경다리‘근처에 300여명의 경찰을 소총으로 무장시켜 작전을 폈으나 광부들과 부녀자들의 투석전에 의해 실패함)에서 투석혐의로 구속되었던 박노연 씨는 자신이 처벌(고문)을 당하게 된 원인을 사북사건으로 연행되어 고문 받던 김분연(당시46세) 씨가 자신을 고발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사건 이후 서로의 얼굴도 보지 않고 단 한마디도 않은 채 한 마을에서 20년 동안 벽을 쌓고 살아 왔다고 한다.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과 경찰의 보복 수사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병들게 한 것이다.
이> 영화 보셔서 알겠지만 마지막 장면 기자회견 있잖아요. 이 아저씨 아줌마들이 사건 이후로 처음 모이게 된 거예요. 그 첫 모임이 2001년 9월이었고 영화 상영 시작은 2002년 4월이니까 아무래도 그동안 점점 더 많은 분들이 모이게 되셨죠.
처음에는 그분들 굉장히 당황해 하시다가 저희가 던진 질문들이 ‘민주화 운동관련법‘이 만들어지는 것과 맞물리면서 이 문제에 대해 고민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신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시 농성 지도부 급이었던 아저씨들이 이 영화에 나오는 분들을 모아 냈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퍼> 영화에 나온 분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이> ‘사북노동항쟁 명예회복추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2002년 8월에 민주화운동관련법, 의문사진상규명법과 관련해서 시위를 하고 있어요. 며칠동안 국회 앞에서 자동차 끌고 오셔서 시위를 하셨고 민주화운동법이나 의문사진상규명관련법이 사북만 관련된 것들은 아니지만 같은 맥락에 있다고 판단하고 싸우고 계시는 거죠. 며칠 전 강릉에서도 시위를 하셨어요. 요즘도 계속하시고 계시는데 바로 보이는 성과가 안 나타나는 거죠. 대선이 끝나서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는데 저희는 계속 주목해서 찍고 있습니다.
사북, ‘항쟁’으로 피어나라
퍼> 감독님이 의도한 대로 영화가 만들어진 것 같습니까?
이> 다큐가 재미있는 게 처음에 생각하던 대로 안 되고 애드리브가 많은 겁니다. 힘들었던 것은 처음에 아무 것도 없으니까 직접 다 찾아야했어요. 인물들은 서로 싫어하고 있고, 보면 아시겠지만 인터뷰를 해도 거의 대부분 직접 찾아가서 집안 일도 하면서 예쁘게 보이려고 노력 많이 했어요. 그렇게 되다보니까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 진 거죠. 한 2년 내에 끝내려고 했는데 잘 안 되고 자기 페이스 조절도 안 됐죠.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시간과 정열을 투자하는 일은 그만큼의 ‘깡‘과 ‘믿음‘이 있다는 것의 반증이다. 엉켜버린 역사의 실타래를 푸는 일에 뛰어든 이 감독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민들레처럼 질기게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사람에 대한 ‘믿음‘때문이 아니었을까.
퍼> 이 영화가 아직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전하실 계획은 없습니까?
이> 독립다큐멘터리 영역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은 미약해요. 나머지는 저희가 개척해 나가야 할 영역이죠. 미흡하지만 안간힘을 써서 개척했던 부분이 순회상영이었어요. 사실 순회 상영이 제작팀보다는 사북 아저씨들을 위한 자리로 기획된 것이거든요. 아저씨들 중엔 극장을 처음 가보신 분들도 계시고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 잡아보신 경험이 없었던 분들도 계세요.
아저씨들은 “우리가 법적으로 명예회복이 된 것은 아니지만 상영장을 찾은 여러분들에게만은 명예회복이 된 것이 아니냐, 우리는 상영장에 갈 때 기쁘다”고 하세요.
오늘은 어떻게 돼서 못 오셨지만 매번 영화 상영 때마다 관객들과 함께 계셨어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한 것 같고 앞으로 더 좋아졌으면 해요. 그건 여러 조건들이 필요하겠지만.
퍼> 아직 ‘사북항쟁‘ 관한 역사적인 평가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먼지, 사북을 묻다> 이 영화가 그 사건을 재해석하는 지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데요.
이> 제가 사실 담론 이끌어내서 그것을 구체화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영화작업이었죠. 그 이외의 것은 또 다른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퍼> 사북항쟁에 관한 자료가 책으로 나와 있던데 어떻게 만들어진 겁니까?
이> 저 혼자 한 것은 아니고 1999년에 사북에 있는 지역 단체 분들과 함께 만들었어요. 한 천 부 정도 찍었는데 2003년 4월 정도에 꼼꼼하게 손봐서 다시 만들 계획이예요.
그 분들 지금 막 고무되어 있으니까 만드는 건 문제가 아니죠. 지난 번 나온 것은 저희 홈페이지(http://www.dustsabuk.com)에 올라와 있어요. 사북항쟁을 주제로 연구나 세미나를 할 때 도움이 될까 해서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많은 부분에서 ‘사북항쟁‘을 ‘민주화 운동‘으로 재평가한다는 것에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가장 큰 문제가 ‘노조위원장 부인의 린치 사건‘인데 이것은 항상 자본가와 어용노조에 의해 유린되었던 광부들의 고용, 임금조건보다 크게 다루어지는 걸림돌이었다. 한 달에 광부 10명 중 1명씩이 죽어나가던 탄광의 노동환경 개선보다 훨씬 큰 지점에 서 있던 것이다. ‘윤리적 문제‘는 결국 끊을 수 없이 따라오는 ‘낙인‘같은 것인데, 이 문제에 있어서 이미영 감독은 단호했다.
퍼> 이 영화는 사북 항쟁을 직접 경험한 당사자들의 이야기라는 데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외의 영역 즉 ‘노조위원장 부인‘ 린치 같은 것이나 여성의 성 고문 같은 것도 좀 더 크게 다루어졌어야 한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저도 이 사건을 들었을 때 충격적인 부분이 그런 것이었어요. 이 사건을 이렇게 정리하는데 2년이 걸렸는데 날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죠. 이 사건이 앞에 나오는 ‘노조위원장 부인 린치와 고문, 여성 린치‘ 같은 것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하는 것 말이죠.
일단 노조위원장 부인 린치와 관련 된 것은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 충격 속에서 이 사람들이 얼마나 절박했길래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조위원장 부인에게 린치를 가했던 사람들이 여성이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성고문‘ 같은 것을 당했을까 하는 것은 지금의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당연히 문제가 되는 거죠.
하지만 저는 고민을 하다가 일단 이 사건을 여성주의보다 계급성이 강한 것으로 바라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현장의 광부들은 폭도 또는 술 취한 사람들로 매도되었고 그렇게 그 분들과 사북항쟁은 노조위원장 부인 린치 사건이라는 도덕적인 문제들 때문에 매도 된 것이죠. 도덕과 여성의 문제는 다른 것인데.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다루려면 또 다른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고 봐요.
“나는 젤로 힘든 기 다리도 아픈 건 아프지만은, 젤로 힘든 기 젖통을 이렇게 좌악 잡고 이렇게 끌어올리는 것이야, 서서. 미치겠어. 그거는. 진짜로 기절해서 주, 죽어 자빠져.”
– 김분연(당시 46세 사북 사건으로 연행되어 고문 받음. 사건 이후 무속인이 됨)
“정선 경찰서로 실어가면 경찰들이 군화발로 막 밟고 그리고 여자들을 잡아다가 옷을 벗기고, 가슴잡고 일어나라 그러고 무릎꿇게 하고, 여자들이 경찰에 가서 당한 일들은 말도 못 해요. 여자들이 거기서 나와서는 말도 못하고 잠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서 깨고… 자기들이 잘못했다는 것 때문에 더 괴로운 거야. 그리고는 숨는 거야.”
– 손인숙(당시 사북, 고한성당 수녀)
사북항쟁은 ‘노조위원장 부인 린치 사건‘이라는 이유로 아직까지 ‘윤리적 혐의‘를 벗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영 감독은 이 사건을 ‘노동자들의 자발적 저항, 자본가에 대한 계급투쟁‘의 시각에서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감독이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문제를 해석하고 이슈화시켜 낼 수도 있었지만 자신은 그것에 관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쪽으로 사건을 해석했다고 한다. 그 외 다른 부분은 각자의 다른 영역에서 좀 더 세밀하게 해석해 주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는 그만큼 사북과 관련된 역사적 해석이 전무한 상태이거나 그것을 어느 한 개인이 독점하고 있는 상황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실제로 경험하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이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고 있고 권력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믿고 있는 이미영 감독은 영화 속에서 “무엇 때문에, 무엇이 그들을 20년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했는가?” 라고 끝없이 질문하고 있다.
80년대의 미망을 버려라
사북과 관련되어 빼놓고 넘어 갈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사북사태‘의 주동자로 ‘황인오‘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 23세의 젊은 노동운동가로 80년대 운동판의 전설로 기억된다. 그는 지난 84년 최초로 정리된 사북사태 자료인 ‘사북사태 진상보고서‘를 ‘노동, 현장의 소리‘라는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사북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옥고를 치른다.
사북사건 이 후 그는 사북에서 노동상담소를 운영하다가 90년대 초 사북을 떠났고 그 후 조선노동당 중부 지역당 사건 등에 연루되어 고문과 옥고를 치른 뒤 안기부에서 반성문을 쓰고 풀려나게 된다. 그리고 2002년 8월 25일까지 <사북으로 돌아가다> 라는 글*을 연재했다.
그러나 이미영 감독은 언론이나 역사가들이 ‘사북항쟁‘을 이야기 할 때마다 황인오 씨를 중심으로 두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영 감독에 의하면 “당시 황인오 씨는 사북탄광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며(실제 탄을 캐지는 않았고 검탄–탄을 검사하는 작업–을 하던) 단지 사회전반에 대한 엄청난 열정이 있었던 젊은이였다”고 한다. 그는 사북 중앙교회에 다니면서 청년회 활동을 통해 이 사건을 외부에 알리는 일들을 했을 뿐, 주동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여러 정황 때문에 주동자로 지목이 되었던 것이지 그가 마치 사북항쟁을 주동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퍼> ‘사북항쟁‘과 관련되어 공식적으로 알려지기로는 황인오 씨가 이 사건을 주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황인오 씨 말로는 ‘영화가 사실과 다르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이> 그분도 이 영화를 보셨어요. 저희 작업하는 데 엄청난 문제로 작용했었다고 기억해요. 대부분 언론에서는 그분이 이야기하는 것을 주목하고 또 사실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외부에 그릇 알려져 있거든요.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사건이거나 아예 모르는 사건이긴 한데, 당시 외부에 알려지기로는 ‘황인오‘라는 사람이 이 사건을 주도했다고 알려졌고 지금도 그런 줄 알고 있어요.
80년대 운동과 관련되어서 구체적으로 이름이 났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실제로 이 사북항쟁은 어떤 한 사람이 주도하거나 어떤 정치적 이념을 가지고 일어난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저희도 작업하면서 이런 문제들 때문에 많이 어려웠죠.
퍼> 황인오 씨가 이 사건에 깊숙하게 개입되지 않았다면 영화나 사북과 관련되어서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요?
이> 사북항쟁 이후로 그 분의 개인적인 삶의 여정이 순탄치가 않았어요. 물론 황인오라는 사람이 시대의 희생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중요한 건 이 분이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전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이 사건이 자기와 관련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절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주도했다”라는 식으로 그냥 스멀스멀 넘어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정황자체를 설명할 수 있었지만 계속해서 자신과 연관을 지으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곤 다른 사람에게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이죠. 그 사람으로 인해 역사가 왜곡되면 안 됩니다.
퍼> 황인오씨가 바라보는 시각과 다른 입장에서 사북에 관한 영화를 만드신 거네요. 직접 황인오 씨를 만나서 이런 이야기 해보셨습니까?
이> 언젠가 한 번 아저씨들과 함께 만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자기는 시간이 없다는 거예요. 시간이 없다니까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사북항쟁은 노동자들에 대한 거잖아요.
물론 그가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고통받았던 걸 이해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정말 운동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던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죠. 이미 그렇게 운동진영에 알려져 있고, 그 사건이 가지고 있는 것에 진실을 규명하자고 한다면, ‘커밍아웃‘ 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라고 말이죠.
사북항쟁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사람은 황인오 씨와 같은 ‘혁명적 운동가‘ 혹은 정치적으로 사북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북사건이 진정한 항쟁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되고 기억되기 위해서는 실제 현장을 겪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그들을 20년 동안 ‘반벙어리‘로 만들었던 제도권력의 입을 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영 감독이 약간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호흡을 조금이나마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감독이 담배를 한 대 피우는 사이 ‘송년회‘ 자리에 함께 참석한 젊은 여성 관객(안진희)에게 <먼지, 사북을 묻다>에 대한 영화평을 들어보기로 했다.
퍼> <먼지, 사북을 묻다> 어떻게 보셨나요?
관객> 굉장히 무거운 주제라 긴장을 하고 봤는데요. 너무 괴로울 것 같다는 생각 말이죠. 그런데 감독의 나레이션도 그렇지만 20대의 티 없는 감수성으로 ‘아저씨‘, ‘아줌마‘라는 표현들이 그런 무거움들 덜어주어서 좋았어요. 예상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봤습니다. 20대인 저는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거든요. 여론으로 많이 알려져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퍼> 영화는 역사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20대가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는데 이 영화를 만든 감독과 비슷한 세대로서 느끼는 점이 있다면?
관객> 저도 90년대 학번으로 운동권도 아니었고 역사적 경험이 없었어요. 그래서인지 ‘부채의식‘ 같은 게 있어요. 우리가 잘 모르고 다가가자니 좀 무겁고, ‘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는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이 감독님은 본격적인 작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6년 동안 이 사건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는 것을 알고 마냥 겁만 먹고 접근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관객과의 대화 속에서 나온 90년대 학번이 가지는 ‘부채의식‘이란 것은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었다. 80년대 학번보다 경험도 부족하고 이론도 모자란다는 인식이 90년대 학번의 공통분모였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러한 것들이 이미영 감독이 영화판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퍼> 이 감독님 94학번이죠. 80년대 학번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소위 386이라 불리는 선배들이 픽픽 쓰러져 나갈 때 참 이해하기 힘들었거든요. 어쩌다 저렇게 될까 하는 생각 말이죠.
이> 제가 그 시대에 참여하거나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객관적인 것이다‘라고 이야기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사회에서 가르쳐준 대로 살아갈 순 없지, 하는 생각을 갖고 대학에 왔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하고 싶은 것 하는 게 맞는 것이고, 누구한테 강요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거든요.
80년대 학번들은 스스로 객관화 된 잣대를 만들어 놓고는 한국사회의 현실 안에서 타협하고 있어요. 자신이 겪었던 기억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면서 강요하고 ‘그것이 옳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걸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퍼> 꼭 그 분들에 대해 분노하고 계신 것처럼 들리는데요.
이> 분노해요. 그때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물 대포 맞던 사람들이 현실에 나름대로 순응하면서 살거든요. 기억만 가지고 있죠. 현실에서는 과거의 기억 가지고 정치활동을 하잖아요. 그런데 왜 진짜 필요한 현실의 상황에서 그 사람들이 없는 거죠? 예전에 동물원이라는 밴드를 좋아했었어요. 이 사람들 하는 얘기가 우리가 80년대에는 자유를 잃어 버렸는데 아이엠에프 터지고 난 후에 우리는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퍼> 90년대 학번들은 80년대 학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험도 없고, 운동도 밑바닥을 향해 곤두박질 치던 시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다닐 때 어떤 생각하면서 살았습니까?
이> 90년대 운동이 쇠퇴하고 포스트모던이 막 들어오던 시기였잖아요. 제가 졸업할 때쯤 IMF가 터지고요. 한국의 학생운동이 퇴조하는 시기였고. 어떻게 보면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다만 제가 자유스러웠던 것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사는 게 나한테 맞는 것인가, 이런 것을 끊임없이 질문했던 것 같아요. 사북에 간 것도 그런 것으로 해석 될 수 있겠죠. 90년대 이후에 사람들을 묶을 수 있는 틀이 없는 것 같아요. 뭐 요즘은 힙합으로 묶는다지만 깊은 곳을 볼 수는 없잖아요. 사회와 그 구조를 보는 눈이 없는 거잖아요.
퍼> 90년대 학번들은 386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있다는 식의, 그들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잖아요.
이>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386세대, 그 미망을 버려야 해요.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거든요. 그것 버리고 또 다른 희망 만들어야지요. 그것 만들어서 거기서 같이 살아야 해요. 386의 담론들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그 386도 살고 우리도 같이 사는 거예요. 저는 가능하다고 보고 그건 필연적인 것이라고 봐요.
퍼> 90년대 한참 화두가 되었던 것이 정치 이외의 문화를 토대로 한 변혁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때 일찍 깨우친 사람들은 죄다 영화판으로 갔다는 말도 있는데 감독님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80년대는 그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었어요. 사람들을 모아내고 세미나 같은 연구들이 활발했는데 새로운 담론은 생산해 내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지금까지 끌고 가고 있어요. 낡은 것인데 우리가 그것에 편입 할 수는 없거든요. 그 선배들 속에 편입할 수 없는 장벽들이 존재하고 있고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그것과는 다른 도전들이 필요한 거죠.
제가 할 수 있는 건, 학교 나올 때 그 장벽들을 버리고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보니까 그건 영화였어요.
이 독립영화판이 그런 사람들이 들어오고 좀 더 파고드는 문화 쪽으로 변화하고 있지요. 그렇게 다가가는 문제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 영화 판 안으로 들어오면 좀 더 복잡하지만.
이미영 감독은 간혹 주변에서 ‘이미 끝난 이야기를 가지고 왜 그렇게 끄집어내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이미영 감독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비록 자신이 경험한 사건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이제 어느 정도 정리되고 끝난 이야기라고 말할 때 그것에 편승하지 않고 자료와 ‘경험자‘를 바탕으로 한 일관 된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사람들의 머릿속에 잊혀지거나 기억 없는 사북은 이 감독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객관적 사실에 불과 한 것이다. 아직 명확한 평가가 없는 이상 어느 누구도 ‘사북항쟁‘을 정리 할 수 없고, 이미 끝난 낡은 이야기라고 말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영화는 나에게 무엇인가?
비주얼은 혁명의 매체로 가장 널리 쓰이는 방식 중의 하나다. 특히 다큐멘터리라는 넌픽션이 주는 리얼리티는 드라마보다 훨씬 큰 감동을 줄 수 있다. 현실 세계의 이미지를 적나라하게 담아내어 관객의 삶 속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퍼> 어떻게 다큐멘터리 영화를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이> 전 돈도 없고 빽도 없고 계보도 없는 사람이잖아요. 어디 들어가서 연결되고 그런 게 아니고. 다큐멘터리는 하다보니까 하게 된 거예요. 그전에 무슨 영화 전문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학교 졸업하면서 ‘다큐 해야겠다‘ 고 생각한 거죠.
어렸을 때 굉장히 가난했었어요. 그 가난에 대한 기억들을 가지고 중학교 때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죠. 영화가 주는 환타지 때문일 거예요. 국민학교 때부터 영화 보는 게 최대의 낙이었던 것 같은데, 대학에 들어와서 영화 세계를 알려면 사람들을 만나야겠다하는 생각을 한 거죠. 당장 영화 만드는 것보다 어떤 영화를 만들까 고민하게 되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영화는 뭘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까 제게 다큐멘터리가 맞더라고요 .
퍼> 이 다큐멘터리 영화내용이 상당히 드라마틱한데 시나리오 작업을 통해 드라마로 만들 계획은 없습니까?
이> 일단 사북항쟁을 가지고 한다면 제작비가 문제죠. 물론 그런 생각도 했었지만 이제 제가 사북에 대해 관심 있는 것을 드라마로 만든다고 한다면 그곳에 남아있는 젊은 친구들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아니면 그곳을 떠나갔던 젊은 친구들의 이야기나 혹은 50, 60년대 당시에 탄광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이야기도 될 수 있겠죠. 조용하던 동네가 탄광 개발로 인해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변화되는 것들을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요.
다큐멘터리가 리얼한 것이 매력이기도 하지만 한계도 있어요. 사람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 있어서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보여줘야 하는 한계들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당사자들은 모르고 찍는 사람만 아는 부분을 고민하죠. 카메라 안의 혹은 카메라 밖에서 들은 얘기들을 드라마로 만든다면 또 다른 맛이 나겠죠. 하지만 지금 이것을 드라마나 시나리오로 만들 계획을 하고 있거나 하진 않아요.
퍼> 영향력이 더 큰 드라마나 주류 영화를 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습니까?
이> 물론 드라마도 좋아하지만 연출된다는 한계가 있어요. 다큐는 현실을 보게 되거든요. 넌 픽션이 주는 힘, 그 매력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둘 다 재구성된 것이긴 하지만 사람이 직접 사실적으로 말하는 것이 중요하죠. 그러다 보면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보이기도 하고요.
저하고는 정말 다른 세계잖아요. 그런 세계 살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제가 변하고 있었어요. ‘아, 내가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이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죠. 영화는 일단 저의 경우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표현 방식인 것 같아요. 현장에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좋거든요. 그러면서 제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와 만나게 되고 그런 분들과 관계를 맺는 것들이 중요하죠.
다큐멘터리의 리얼리티 때문에 감독이 너무 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은 기본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그 리얼한 현장을 찍어내는 일이 힘든 것이 사실이고 사람들을 표현해 내는 것이 비록 독하게 보일 지라도.
퍼> 감독들은 영화 만들어 놓고 ‘편집‘ 때문에 고민을 하는데 이 감독님의 경우엔 어땠습니까?
이> 원래는 900분 짜리 영화였는데 이걸 두 시간으로 압축을 시키려니까 보여주지 못한 부분들이 많죠. 기존 단편 같은 경우는 생각했다가 며칠동안 찍잖아요. 다큐는 그런 면에서 너무 힘들어요.
퍼> 개인적으로 홈페이지에 있는 음악을 관심 있게 들었습니다. ‘개 같은 세상에 너무 정직하게 꽃이 피네‘ 하는 곡이 영화 끝나는 부분에도 나오던데 어떤 분이 참여했습니까?
이> ‘미선이‘하시던 조윤석씨가 음악 담당해 주셨어요.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죠. 그리고 공명, 정명화씨가 음악은 담당하셨어요. 영화에 참여하신 분들은 저희 선배부터 시작해서 영화 끝나고 크레딧 올라갈 때 나온 분들이 함께 한 것이고요. 거의 부분적으로 참여 하셨지만 필요에 의해서 ‘급조‘될 때도 있었어요. 회사나 이런 게 아니니까요.
실제로 2년여에 걸쳐 영화의 후원회원을 모집하였고 그 사람들의 이름은 영화가 끝나는 크레딧 부분에 자잘한 글씨로 적어두었다. ‘급조‘되는 스텝들이라는 말에 독립영화 판의 상황을 더 듣기로 한다.
퍼> ‘급조‘되었다고요? 독립영화 판에서 스텝 수급이 힘든가 보군요.
이> 다큐멘터리는 ‘쥐약‘이예요. 단편은 며칠 안에 찍을 수 있으니까 준비만 좀 잘하면 되는데, 이건 뭐, 주구장창(?) 언제 뭐가 될지도 모르고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아저씨들이 그러더라고요. “영화 언제 나오냐, 나오기는 하는 거냐?”
퍼> 스텝 수급이나 자본과 관련해서 지원 받는 게 있습니까?
이> 저흰 독립영화판에서는 나올 돈도 없고 인맥도 없어요. 제작비 빠듯해서 방 빼고 그런 상황이었으니까. 끝나고 어제 제가 계산을 해봤거든요. 봤더니 남은 수익이 일년에 300만원 벌었어요. 그나마 우리가 적극적으로 마케팅하고 순회 상영했죠. 이건 독립영화 판에서 새로운 시도였거든요. 그렇게 막 조직을 하고 돌아다녔는데 300만원 이예요.
퍼> 300만원 벌었으면 적자는 아니네요.
이> 제작비 빼고 상영료만요. 후반 작업 한 비용하고 촬영비 등등 빼고 해서. 입장료만 300만원 벌은 거죠.
이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고정된 스텝도 쓸 수 없었고, 또 살고 있던 방을 빼야 했으며 아르바이트도 하며 영화의 부족한 자금을 충당했다고 한다. <먼지, 사북을 묻다>의 총 제작비가 5천만 원이었는데 순회 상영을 해서 번 300만원 빼고 지금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미영, 사북에 묻히다
명대로 다 살아보지 못 하고 죽어가고 병들어간 이웃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려움을 느낀다. 딸만 셋 남긴 채 싸늘한 시체로 실려나온 배인환, 한 해만 더 머물다 간다던 장경상, 정운진, 김형록… 그들의 시체를 거두면서 삶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신 경(당시 38세, 탄광노동자, 反노조 집행부)
퍼> 꽤 긴 작업이었는데, 이 영화를 끝까지 끌고 나갔던 힘은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이분들에게 한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하겠다는 것이 가장 컸죠. 중간에 입원도 했지만 제가 하고 싶었기 때문일거예요. 드러내놓고 나레이션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고요. 70년대 ‘조국근대화‘의 명목 아래 고통받는 사건이 20년 후에도 다른 사건 아래 묻혀있는지 알아내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현재 한국사회에서도 처절하고 치열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파> 앞으로 상영관에서 이 영화를 보기 힘들텐데 바라는 게 있다면?
이> 일단 공식적으로는 끝난 거지만 대학이나 단체에서 섭외가 들어오면 상영할 계획은 있어요. 바라는 거라면 독립영화 상영관에서 다큐 같은 영화들이 같은 색깔을 가진 영화들이 더 많은 관객들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이죠.
퍼슨웹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건… 이 시대가 너무나 많이 해체되어 있잖아요. 학교에 운동하는 애들이 왜 이렇게 없지, 그런 지금이지만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열정이나 열망 같은 것들이 같이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있네요. 특히 저같이 외로워하는 사람들이 꿈을 나누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사회에 이미 드러나 있는 것 말고요. 아직 드러나지 않았고 좀더 처절한 삶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져 있는 사람들한테 손길이 필요하지 않나 ‘이주노동자, 여성…같이 연대할 수 있는 공통분모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퍼> 이번 영화 이후에 어떤 계획이 있습니까?
이> 이제 좀 쉬고 싶어요. 좋은 말로 하자면 다음 작품 구상이지요. 그런데 제가 좀 지쳐 있는 것 같아요. 사북에 다시 내려가서 좀더 생각해 볼 계획입니다. 그리고 체코 프라하에서 열리는 세계 인권영화제에 우리 영화가 초청되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 알아보아야 할 것 같고 그 다음에 가든 말든 결정을 해야죠.
퍼> 고향 청주로 가시는 건가요, 아니면 사북으로 가시게 되는 겁니까?
이> 청주로 가요. 집에 가서 좀 쉬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려고요. 그런 다음엔 다시 사북에 갈 계획입니다. 사북에 한 번 놀러 오세요. 사북은 저에게 공구리 전법을 쓰는 것 같아요.
퍼> 공구리 전법요?
이> 네, 콘크리트요. 한 번 발을 넣으면 절대 빠져나갈 수가 없죠. 사북에 대한 기억은 아프잖아요. 제게도 그랬고 그분들에게도 그랬죠. 그런 것들이 서로의 가슴에 닿으면 정말 빼내기 힘들어요. 제게 사북은 그런 곳입니다.
새벽 5시, 대중교통이 다시 다니기 시작하는 시간이 되어서 인사동을 빠져나왔다. 하루밤 사이에 이미영 감독과 사북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담을 수는 없었다. 역사의 늪에 빠져 6년 동안 허우적거렸던 이야기를 단 한번의 인터뷰로 담으려했던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미영 감독은 ‘이제 좀 쉬면서 천천히 사북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돌아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은 ‘정리하면서 끝낸다‘는 뜻이 아니라 ‘계속 진행될 것이다‘의 의미로 들렸다. 오랜 기간의 싸움으로 공력을 소진한 전사가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새벽을 달리는 전철 속에서 졸음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이미영 감독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우리 인식 속에는 누군가에 의해 고정된 역사가 있다. 그것에 천천히 구멍을 내는 것은 상상만 해도 흥분되는 작업이다. 마치 추리 소설과도 같은 역사를 캐내는 작업은 최소한 한쪽으로 기울어버린 역사에 균형을 잡는 일이 아닐까.
인터뷰가 끝난 다음 날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먼지, 사북을 묻다>가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