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 소파개정 요구 시위 현장

지난 11월 30일부터 시작된 광화문 촛불시위에 주말마다 세 차례 참여하였다. 그때 만났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짧게 담는다.

1. 반미의 계절

바야흐로 반미의 계절이 왔다. 그것도 이전 시기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나이와 계층을 뛰어 넘어 저 밑바닥에까지, 대중적인 양상을 띄고 왔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서는 참으로 고대해 마지않던 계절이다. 17년 전 1985년 5월 23일, 대학생 73명이 미문화원을 점거 농성한 사건은 광주민중항쟁의 진상 규명과 혈맹이라는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독재정권의 살인 만행마저도 묵인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 사건으로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이 공개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반미의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그것은 분단된 한반도에서의 미국이란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제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도 ‘반미’를 얘기하는 것은 ‘이적 행위’였으며, 그러한 사람은 ‘빨갱이’거나 극소수 불순한 이념분자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처럼 금기였던 ‘반미’가 이제는 초등학교 꼬마들의 입에까지도 오르내리는 이 시대의 ‘화두’가 되어버렸으니, 이른바 ‘운동권’의 그 오랜 염원이 비로소 결실을 맺은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그간의 노력과는 무관한 지점에서 촉발되고 번진 것인가. 어쨋거나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정객들과 경제계가 ‘보이지 않는 손’을 운운하며 경계하고 겁을 낼 만도 하다

지난 11월 20일과 22일의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인사건’에 대한 미군의 무죄 평결, “미군의 과실은 없으며, 불의한 사고였다!”, 이후 ‘재판 무효’와 ‘부시 공개 사죄’, ‘소파(sofa) 전면 개정’을 주장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끊이지 않고 있으며, 그 열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해가고 있다.

특히 지난 11월 30일(1만여 명 참가) 이후로 매일 진행되는 촛불시위는 그 불길이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고, 12월 7일(2만여 명 참가), 12월 14일(5만여 명 참가)까지 계속 이어졌다. 촛불시위에는 어린 애기를 안고 나온 젊은 부부 외에도, 초등학생, 중고등학생을 포함, 대학생, 중년을 넘어 예순을 내다보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지식인과 종교인 뿐만 아니라 작가와 문화예술인, 이름없는 네티즌들, 심지어는 거리의 노점상에 이르기까지 계층을 불문한, 그야말로 전민중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대통령 후보들도 표를 얻기 위해서라도 반미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마저 속셈이야 어떻든 소파 개정에 서명하고 공약으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반미 분위기는 그 주체의 저변 확대, 곧 대중화와 자발성이라는 면에서 앞 시대와는 뚜렷이 구분이 된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시대의 반미는 전보다 훨씬 강력한 전염성과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우연히’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겨울 동계올림픽에서 우리의 금메달을 빼앗아간 안톤 오노 사건이 그 발단이었다. 이처럼 지금의 전민중적인 반미의식은 미국에 대한 철저한 인식의 결과라기보다는 어느 정도는 그 바탕에 정서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민들의 반미감정을 ‘지나가는 현상’이라고 지적한 공로명의 말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이 싫다’는 대답이 59.6%였던 데 비해, ‘좋다’는 대답은 33.7%에 지나지 않았던 지난 해 2월의 설문조사 결과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심판의 불공정한 판정으로 쇼트 트랙의 김동성 선수가 금메달을 놓친 冬季올림픽을 전후한 조사들입니다. 이러한 수치는 지나가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불공정한 판정을 한 심판은 미국인이 아니고 호주人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미국의 책임인 것처럼 매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 [월간조선] (2002년 6월)

하지만 그가 결정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착각한 점이 있다. 우리 국민들이 안톤 오노 사건에서 분노했던 대상은 심판이 아니라, 심판을 속이면서까지 금메달을 차지하려는 안톤 오노 개인의 비열함과 그의 현란한 ‘헐리우드 액션’이었으며, 무엇보다 그러한 짓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도리어 한국민을 이상한 민족으로 취급한 미국 언론의 행태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러한 미국의 오만함은 안톤 오노 사건에서 그치지 않고, 미국전투기 F-15K 강제 구매 압력과 같은 내정 간섭적인 일들과 끊이지 않고 날로 대담해 지는 주한미군의 범죄과 그 사후 처리에서도 빈번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결국 한국민의 반미감정은 ‘지나가는 현상’이기는커녕 오히려 태풍처럼 거세어져 오늘을 강타하기에 이른 것이다. 말하자면, 우연한 감정적 계기들을 통해 국민들은 미국(미군)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조금씩 학습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일어서는 불꽃

지난 11월 30일 늦은 시간, 촛불시위가 열리는 광화문을 찾았다. 다른 볼 일을 보느라 카메라도 미처 챙기지 못 하고, 따라서 취재는 포기하고 간 것이다. 뒤늦게 길을 나선 것은 쓸쓸한 거리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늦으나마 현장의 그 뜨거운 열기를 확인하고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8시 넘은 시간에 지하철 종각역에 내렸다. 세종로 네거리로 향하는 길에 벌써 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촛불을 들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한편에는 촛불을 들고, 나처럼 늦게 시위현장으로 가는 사람들도 몇 있었다. 교보문고 근처에 이르자, 아직 시위가 끝나지 않았는지 1000여 명 넘는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노래부르며 경찰과 약간은 느슨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시위군중은 밀집된, 일사분란한 대열이 아니었다. 이미 정리집회가 끝난 탓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지도부’가 따로 없었던 것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촛불시위 자체가 한 이름 없는 네티즌의 제안으로, 역시 이름 없는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시작된 것이다.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촛불을 앞세우고 숙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민노당 권영길 후보의 유세 차량에서 흘러나오는 <퍼킹 유에스에이>라는 노래 때문에 그래도 시위 분위기는 완전히 가라앉진 않았다. 세종로 네거리 기념비전 앞에 모여든 군중들은 여전히 경찰과 대처하며 “미군경찰 물러가라!”, “ 폭력 경찰 물러가라!”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군중들은 함께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9시가 되자 조금씩 발걸음을 돌리던 군중들은 9시 30분쯤에는 거의 돌아가고 세종로 네거리는 다시 텅 비었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옆으로 차들이 쌩-쌩 달렸다. 내 마음에는 바람이 일었다. 교보문고 앞 화단을 빙 돌아가며 시민들이 세워둔 촛불들이 여전히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길가 여기저기에도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찬 바람에 흔들리는 불꽃! 몸부림 치듯, 애처롭게, 타오른다. 아플까, 자신의 몸을 태움으로써 어둠을 사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꺼질 듯 다시 곧게 일어서는 불꽃!

“불꽃은 꿋꿋하고 약한 수직이다. 한번의 입김이 불꽃을 흐트러지게 하지만 그것은 다시 곧 바로 선다… ‘촛불은 고고하게 타며, 그 주홍빛은 불끈 일어선다.’ 이렇게 트라클의 한 시구가 말하고 있다.”

– 갸스똥 바쉴라르, <촛불의 미학>

2.1 산산이 부서지는 이름이여!

한참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문득 내 시선에 잡히는 광경이 있었다. 조금 전부터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둘이 화단 가에 세워진 촛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시위가 끝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돌아간 시각.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은 채 그들이 보는 것은 무엇일까.

학생 1> 좀 늦었어요. 학교는 가까운데, 과제를 끝내고 오느라… ‘학생 행동의 날’ 시위에도 참가했고, 오늘이 두 번째예요. 학교 게시판에 시위한다는 공고를 보고 참가하게 되었어요.

그는 이화여고 2학년이라고 했다. 학교 게시판에는 이번 일에 대해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내가 여중생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울먹였다. “촛불은 참 따뜻한 건데…” 그리고 한참만에 말을 잇는다.

학생 1> 그 따뜻한 촛불로 동생들의 죽음을 추모해야 한다니… 사람이, 여자애들이 그 ‘육중한’ 탱크에 깔려 죽었는데도, 미군은 전혀 죄가 없다니, 이런 세상이 어떻게 가능한 건지…

그는 자신의 여동생이 죽은 것처럼 울먹였다. 그리고 다시 침울과 침묵 속으로 잠겼다. 이번 사건에 이처럼 광범위한 계층의 시민들이 이토록 분노하며 가슴 깊이 아파하는 데에는 장갑차의 ‘육중함’과 ‘거대함’에 대비되는 어린 소녀의 ‘가냘픔’과 ‘왜소함’의 이미지가 그들을 더욱 치떨리게 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미군의 재판에서 느꼈던 ‘납득할 수 없음’, 또는 ‘어이 없음’은 정부마저 자기 국민을 내팽겨쳐 두는 판국에 호소할 데도, 따져 물을 데도 없는 답답한 현실에서 대~한민국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시민들에게 깊은 무력감과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이런 생각들이 그날 밤 내내 나를 사로잡았다. 거기다 사진에서 본 광경이 떠올라 아이들의 그 가냘픈 몸이 궤도에 깔려 산산이 부서지는 처참한 상상에 몸을 떨었다.

2.2 불의한, 또는 어이없는 재판

못다 핀 꽃 같이 가녀린, 아무 잘못도 없는 어린 여중생 둘이 육중한 궤도차량에 깔려 무참히 죽었다. 이것이 사건의 실체고, 진실이다. 그럼에도 죽인 자는 무죄 평결을 받았고, 웃었다. 11월 20일과 22일의 주한미군의 재판은 형식과 내용 모든 점에서 모순 가득한, 불의한 재판이었다. 피해자는 한국민인데, 한국 쪽의 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상태에서, 가해자 미군을 판검사와 변호사, 배심원마저 모두 미국인인 미군의 법정에 세웠으니, ‘공정함’과 ‘정의’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어불성설이다. 그 때문에 시민단체들은 사건 발생 초기부터 줄기차게 재판권 이양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한 정당한 요구를 ‘군사법정은 민간법정보다 더 엄격하다’는 말로 거부하더니, 결국 ‘짜고 치는 고스톱’마냥 ‘뻔한’ 혹은 ‘조작된’ 결론을 내렸다. 더구나 통신장비 이상 유무가 궤도차량 관제병과 운전병의 서로 상반된 입장을 모두 정당화시켜 주었으니, 기본적인 형식논리마저 갖추지 않은 재판이 무슨 재판이라고 할 것인가. 이 어이없는 재판 앞에서 바보나 노예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공분을 느끼지 않을 것인가. 도무지 기가 찬 나머지 말문이 막힌, 그래서 한동안 후비듯 아픈 가슴만 어루만지던 시민들이 드디어 스스로 일어섰던 것이다.

12/7일 나는 다시 광화문 앞으로 나갔다. 카메라를 든 손이 얼 정도로 바람이 찼지만, 지난 11/30일보다 그 열기는 더욱 뜨거웠다. 나 또한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 하였다.

“미선이를 살려내라! 효순이를 살려내라!”

2만이 넘는(경찰 추산 1만7천) 군중의 외침은 위협적인 선동이기보다는 흐느낌에 가까운 절규였다. 애기를 안고 있던 젊은 여인은 눈시울을 붉혔고, 어린 여학생들은 흐느꼈다. 청년들은 목이 쉬도록 고함질렀고, 나이든 중년의 남자들은 차마 입을 떼진 못 하고 주먹만 굳게 말아 쥐었다. 그들이 높이 치켜든 촛불들 하나하나는 반디불처럼 미약하지만, 일어선 불꽃들은 모여서는 어느 새 거대한 ‘불길’을 이루었다. 수백 미터에 이어지는 군중의 행렬은 느리면서도 힘이 있었고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그들은 서두르지도 않았고, 과격하게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지도 않았다. 평화로우면서도 결코 물러섬이 없이 경찰과 맞섰다. 민노당, 사회당 깃발과 민주노총, 한총련 등의 이른바, 운동가들 외에도 인테넷 대책위와 여러 인터넷 동아리들의 깃발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오히려 대다수는 그런 깃발과는 무관하게 참석한 것 같았다.

군중들 속에 이리저리 떠밀리다가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애 넷과 마주쳤다. 내 물음에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탰다.

퍼슨웹(이하 ‘퍼’)> 어떻게 나왔어요?

아이1> 인터넷에서 효순, 미선 언니를 더 자세히 알게 되었어요. 친구들 말 듣고 사진 봤는데, 너무 잔인해요.

아이2> 지난 번 오노 사건 때도 참았는데, 이번에는 참을 수가 없었어요. 두 생명을 죽였잖아요.

아이3> 아빠가요, 우리나라가 힘이 없고 정치가 힘이 없으니까, 국민이 나서서 해야 댄대요.

퍼슨웹> 그럼, 아빠가 여기 나오는 거 알아요?

아이3> 네, 다들 허락 받고 나왔어요. 우리가 가서 다신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당연히 나서야한다고 생각해요. 나라가 힘이 없으니 우리라도 나서야죠. 미국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네요.

아이4> 다른 친구들도 관심이 많은데, 미국보고 싸가지 없다, 그래요.

이들을 만난 지 이틀 뒤에 신문에서 ‘초등학생 무죄평결 무효화요구 혈서’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그것이 그저 철없이 일어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번 반미 시위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예전의 민주화 시위나 노동 관련 집회와는 달리, 초등학생에 이르는 어린 학생들의 참여가 압도적이라는 점이다. 아마도 또래의 억울한 죽음에 무관심한 정부와 무기력한 어른들에 대한 불신도 없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역사를 돌아보면, 학생들의 시위는 어제오늘은 일이 아니다. 4월 혁명의 시발점이 된 2.28 대구 학생시위는 고등학생들이 주도하였다. 1960년 2월 28일 대구 경복고 학생들은 자신들이 야당의 선거 유세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요임에도 등교를 지시한 당국의 조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발표한다.

인류 역사에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렇게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디 그 어느 역사 속에 끼어 있었던가? 오늘은 바야흐로 주위에 공장 연기를 날리지 않고 6일 동안 갖가지 삶에 허덕이다 쌓이고 쌓인 피로를 풀 날이요, 내일의 삶을 위해, 투쟁을 위해 그 정리를 하는 신성한 휴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하루의 휴일마저 빼앗길 운명에 처해 있다… 우리는 끝까지 이번 처사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있을 때까지 싸우련다. 이 민족의 울분, 순결한 학도의 울분을 어디에 호소해아 하나?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1인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

– <2월 28일 경북 고등학교 학생들의 결의문>

부산에서도 여타의 지역과 마찬가지로 고등학생들이 먼저 4월혁명의 햇불을 치켜 들었으며,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실종, 4월 10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라 학생과 시민들을 또다시 분노케했던 김주열은 당시 마산상고 1학년이었다. 마침내 4월 19일에는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은 물론이고 초등학생까지 시위 대열에 합류한다.

2.3 ‘대~한민국’의 배신

11월 29일 시위에서 태극기를 온 몸에 두르고 있던 남학생을 만났다. 그는 교육대학교 2학년이며, 자신을 ‘매지스트'(magist)라는 아이디로 소개했다. 왠 거냐고 물으니, 월드컵 때 쓰던 것이라 한다. 그러고 보니, 광화문은 지난 번 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붉은 열정과 함성으로 가득 찼던 곳이 아니었던가?

매지스트> 아이들에게 이런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정말 막막하더라구요. 그 애들에게 제대로 얘기하기 위해서라도 참석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번 광화문 촛불시위는 여러 모로 지난 6월의 월드컵을 연상시켰다.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지난 6월광화문 거리 응원에 나왔던 시민들과 비슷했다. 첫째, 그들이 붉은 악마들처럼 광화문 앞 세종로 사거리를 해방구로 삼은 것이나, 타의에 의해 선동된 군중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자발적으로 모여든 군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둘째, 월드컵 16강 진출에 흥분하던 군중들과 마찬가지로 참으로 다양한 연령대, 계층의 사람들이 모였다. 게다가 그들은 집회에 스스로 즐겁게 참여한다. 예전의 투쟁적인 과격한 이미지는 찾기 힘들며, 민중가요보다는 윤도현의 <아리랑>이 더 익숙한 사람들. 그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며, 더 신나게 외친다. 몸도 흔든다. 몸짓에 따라 위아래로 흔들리는 촛불의 ‘군무’는 아름다웠다. 셋째, 그들은 “대~한민국”을 환호하며, 이 나라 국민이 된 것을 무엇보다 자랑스러워하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민족이니 민중이니 하는 이념보다는 소박한 수준의 애국심만이 이들의 에너지였고, 자발적 참여의 추동력이었다. 공교롭게도 여중생 살인 사건은 월드컵 기간에 일어났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할 때, 이들 평범한 시민들의 분노가 어디에서 연유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차적으로는 오만한 미국(미군)에 대한 분노였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는 ‘기이한’ 재판 결과를 두고 ‘공정했다’고 자평한 주한 미대사의 말은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망발이었다. 일본 오끼나와 주둔 미군의 일본 초등학생 성추행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 공개 사과를 했던 미국이 한국에서는 살인자를 두둔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데에서 그만 굴욕감을 느낀 것이다.

12월 14일을 ‘주권회복의 날’로 선포한 것은 우리나라의 주권이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무엇보다 일본과 독일에 비해서 엄청나게 불평등한 소파 협정에 민족적 자존심이 막대한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12월 14일 부인과 함께 나왔던 김영근(30, 상업) 씨는 “우리가 주권이 있는 나란데, 오만한 미국이 우리를 기만하는 것에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영근> 효순이 미선이의 넋을 기리기 위해 그리고 힘을 보태기 위해 이렇게 참여했다. 시위는 처음이지만… 자식이 있었으면 꼭 데리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미국보다 우리 국민들을 더 슬프고 분노케 만들었던 것은 월드컵 때 그토록 열광하던 ‘대~한민국’이 자기 국민에게 보여준 ‘배신’ 때문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뭐라고 해도 ‘배신’이다. 월드컵 때 그렇게 목놓아 부르짖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국민의 억울한 일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는 사실 확인에서 오는 충격! 미국은 살인자마저 보호하려고 애를 쓰는데, 한국은 자기 국민 하나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 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미국에게 당당하게 요구해야할 것도 제대로 하지 않고 눈치만 보는 처사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건 초기에 재판권 이양을 미국에 요구하라고 여러 차례 말했지만, 뒷짐 지고 섰다가 결국 여론에 밀려 재판권 이양을 요구하는 시늉을 하더니, 재판이 무죄로 평결나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 재판부의 결정을 존중한다’ 어쩐다는 논평이나 내는 정부. 앞장서서 미국의 대변인 노릇을 하더니 소파 개정을 외치는 국민들의 분노가 치솟자 그제서야 ‘개선’ 운운하는 정부. 게다가 반미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확산되자,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느니,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반미시위는 자제해야’한다느니 하면서 국민들의 자발적인 저항마저 폄하하고 불순한 세력의 선동으로 몰아가는 것에 믿었던 국민들로서는 역겹지 않을 수 없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은 정말 소박하게 한국이 월드컵 16강에 들기를 바랐던 것처럼, 이번 사건에서도 한국 정부가 자기네 국민들을 정말 제대로 보호해 주는, 그래서 자신들이 자부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주기를 바랬다.

거리에서 만난 고등학교 사회과 교사(33세)는 부인과 함께 아들과 딸을 데리고 나왔다. 그는 아이들이 떳떳한 나라에서 자랐으면 좋겠다고 했다.

퍼> 선생님처럼 자제분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

교사> 아마 부모된 입장에서 미선이와 효순이가 이렇게 처참하게 죽은 것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 그 무자비한 탱크에 깔려 죽는다는 거,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거든요.

퍼> 대선후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개정 얘기를 하는데?

교사> 표를 많이 의식하고 하는 것 같아요. 별로 진실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권영길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정부의 노력 뒤에 국민들이 이렇게 힘을 받쳐야만 실제 개정되지 않을까요? 결국 국민의 힘이죠.

퍼> 사회과 선생님이시라면, 수업 시간에 이번 일에 대해 아이들에게 따로 가르치는 것이 있습니까?

교사> 사회과다 보니까, 수업 시간에 틈틈이 아이들에게 관련된 이야기를 하죠. 하지만 오히려 아이들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요. 이런 시위도 인터넷이라는 아이들이 먼저 알아요. 예전의 아이들이 아니더라구요.

날이 추워 함께 나온 아이들도 여간 고생이 아닐텐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사> 일부러 데리고 나왔어요. 물론 아이들이 오늘 행사의 의미를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커서라도 어느 순간에 미국이라는 존재를 깨닫을 때, ‘나도 어렸을 때 그 자리에 있었지’ 하고 되돌아볼 수 있다면 부모로서 뿌듯하고 고마울 것 같애요.

 

3. 미군(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인 사건’은 85년의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처럼 우방이요, 혈맹이라고 믿었던 대다수 선량한 시민들에게 미국의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회의로 이끌었다. 과연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여고생들은 다시 흔들리는 촛불을 한없이 바라본다. 말이 없다. 마침 그들의 시선이 머무는, 촛불이 놓인 화단가 조그만 돌 아래에는 “미군 없는 세상,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적힌 피켓이 놓여 있었다. 한 학생이 입을 뗀다. 그는 눈짓으로 그 피켓을 가리키며 말했다.

학생1> 미군이 왜 우리의 평화를 해치는 존재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어요. 친구들과도 미군의 성폭행과 같은 일들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요, 미군의 폭력 문제나 범죄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토론하고는 해요.

미군 범죄라는 말을 들으니 갑자기 1992년 10월의 윤금이 사건*이 떠오른다. 그가 얼마나 끔찍하고 잔혹하게 살해당했는지 당시 온 국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지금도 그 끔찍한 사진을 도저히 볼 수 없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친다. 당시 26세였던 윤금이는 항문에 우산이 꽂히고 자궁에는 맥주명 2개와 콜라병이 박히고, 온 몸에 세제가루를 뒤집어 쓴 채로 발견되었다. 살인자는 ‘케네스 리 마클 3세'(당시 20세, 美 제2사단 25보병연대 5대대 이등병)였다. 도저히 그를 인간이라 하기 어렵다.

* ‘군 여중생살해사건 해결 서울모임’

http://cafe.daum.net/antiusacrime 카페의 사건자료실 참고

3.1 개조심, 미군조심!

미군의 주둔의 역사는 곧 미군 범죄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단순한 교통 위반 사건에서부터 폭행, 강도, 강간, 살인 등의 중범죄에 이르기까지 그 수가 결코 적지 않다.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67년부터 1998년 말까지 발생한 미군인 범죄(미군속 범죄 포함)는 50,082건이며 범죄에 가담한 미군(미군속 포함)은 56,904명이다. 경찰에 접수되지 않은 사건까지 감안한다면 실제로는 더욱 많은 범죄가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의 통계를 근거로 1945년 9월 8일 미군주둔 이후 1999년 10월 현재까지 발생한 미군범죄는 약 10만 건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주한미군 범죄근절운동본부'(www.usacrime.or.kr) 자료실 참고

문제는 이들 범죄 대부분에 대해 우리가 재판권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인 범죄 재판권행사 사건 현황(아래 표 참조)을 보면, 1997-2001(7월)까지 발생한 2,394건에 대해 우리 쪽이 재판권을 행사한 경우는 140건(5.8%) 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설사 우리 쪽이 재판권을 행사하는 경우에도 미군은 제대로 처벌받지도 않는다. 위 기간에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는 겨우 3건에 지나지 않는다.

강도, 강간, 살인을 저지른 흉악범도 대부분 집행유예, 형중지, 가석방 등으로 풀려났다.(2001년 국정감사 법무부 제출자료: 한나라당 김원웅 의원)

결국 미군에게 당한 피해는 미친 개에게 물린 것과 마찬가지로 최악이다. 왜냐하면, 범죄자 미군이 도망치면 그만이고, 설사 현장에서 붙잡는다고 해도 소파협정 때문에 우리 경찰은 제대로 조사도 못 하고 미군 범죄자의 신병을 미군에 바로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형편이니 제대로 된 피해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렵고, 오히려 ‘부주의했다’는 핀잔을 우리 경찰로부터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처벌은 고사하고, 어디 하소연할 데도 딱히 없다. 지난 6월 6일 월드컵으로 한창 뜨겁던 때에 결국 숨을 거둔 전동록 씨.

그는 지난 해 7월 16일 미군 부대 공사 도중 미군의 22,000볼트 고압선에 감전되어 팔과 다리 사지를 잘라내고 1년 가까이 투병 중이었다. 고압 전선은 피복도 씌우지 않아, 공사 직전에도 위험을 경고하며 여러 차례 고압선 이설 또는 철거를 요구했음에도

수수방관만 하던 미군 당국에 의해 결국 참변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도 미군 측은 달랑 60만원만 던져주고 사과도 없이 가버렸다. 미군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이 그뿐만 아니다. 조중필, 이정숙, 신차금, 박순녀, 이기순, 정종자, 강미희…

그런데 미친 개에게 물린 경우는 개 주인이 관리 부주의에 대한 책임을 지겠지만, 미군 당국은 책임은커녕, 오히려 미군들의 범죄를 발뺌하고 은폐하며 나아가 묵인한다. 이번 사건에서도 미군은 해당 부대 중대장 등 지휘관을 기소하거나 문책하지 않았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잔악한 범죄도 용인하는 것이다. 적어도 미군범죄에 대해 한국정부가 수사권, 재판권, 형집행권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 하는 한, 우리 국민의 억울한 희생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미군 범죄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예를 들어, 노근리 사건과 같이 6?25전쟁 중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이 한반도 여러 곳에서 자행되었다. 이밖에도 최근의 한강 독극물 방류 사건과 상시적인 미군 기지 기름 유출과 갖은 환경 파괴… 그들은 우리 땅에서 공짜로 기지를 사용하며 온갖 특혜를 다 누리고 있다. 대체 그들은 우리의 ‘동맹'(同盟)이 확실한가.

7일 세종로 사거리를 점거한 시민들은 내쳐 미 대사관 앞 길로 달렸다. 이 과정에서 전경들과 시위대 사이에 약간의 충돌이 일어났다. 시위 주도 차량에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다칠 수 있으니 중고생들은 피하라고, 어른들이 나선다고 방송했다. 하지만 닭장차들이 일렬로 길게 미 대사관 정문을 막고 있었고, 그 뒤로 전경들이 몇 겹으로 늘어 서있어 대사관 가까이로 접근할 수는 없었다.

미 대사관 앞 길을 점거한, 해방 후 처음 있는 일이라는데, 시위 군중들은 집회라기보다는 축제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모두들 촛불을 흔들며 <아리랑>, <광야에서>, <아침이슬>을 불렀다. 그때였다. 부시 마스크를 쓴 사람이 대사관 앞에 길게 늘어선 닭장차 위로 올라가더니 무릎을 꿇고 손을 싹싹 빌면서 국민들에게 사죄하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들은 열광하였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간혹 “부시, xxx” 욕설을 내뱉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또 한 사람이 버스 위로 올라가 종이 방망이를 들고 부시를 잡으러 간다. 그를 보고 도망가는 부시… 결국 잡힌 부시는 종이 방망이에 몇 대 맞는다. 결국 부시는 전경 차 위에서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모형 탱크에 깔린다. 퍼포먼스 아닌 퍼포먼스에 시민들과 아이들은 시위에 나온 것도 잊고 즐거워했다. 이윽고 정리집회가 시작되면서 함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코트를 입은 한 중년 아저씨는 군중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줍게 촛불을 치켜 들고 작은 소리도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닭장차 너머 미대사관 관계자들의 마음이 어떨지, 혹 창가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싶어 불켜진 창을 유심히 봤지만, 창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긴 토요일 밤 9시 넘은 시각까지 그들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정작 중요한 당사자 중의 하나인 미국은 없는 자리에서 시민과 결찰이, 우리끼리 이렇게 대치하고 몸싸움을 벌일 까닭이 무엇인가. 지난 11월 26일 MBC <피디수첩>은 소파개정을 외치며 의정부 미2사단 앞에서 시위하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한국 경찰과 그들 너머로 사진 찍으며 웃고 있는 미군의 모습을 오버랩 시켰다. 혹시 그들은 소파 개정을 외치는 한국민들을 향해 어디선가 예의 그 웃음으로 히히덕 거리고 있지나 않을지…

전경들과 대치하고 있던 시민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앳된 전경(21살)에게 다가가 불쑥 마이크를 내민다. 그는 대학 1학년을 다니다 입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퍼> 사람들이 ‘미국 경찰’이라고 비아냥거리는데,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전경1> 저희도 마음 같아서는 (시민들과) 같이 하고 싶지만… (주변에서 여럿이 웃는다) 근데 저희는 잘못된 게 아니에요. 저희한테 뭐라 그러시면 안 되요. 임무에 따라 하는 거니까.

그가 입을 열자 주변에 선 여럿이 따라서 웃는다. 시위하는 시민들을 방패로 내리찍고 할 인물들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그들 모두는 정말 앳된 얼굴의, 이제 겨우 스물 두서너 살 정도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젊은이들이다. 시위대와 별다른 충돌이 없는 탓인지, 그렇게 긴장한 표정은 아니었다.

전경1> 저희 영창 가요. 편집해 주세요. 아니면, 44일 후에나 실어주세요. 군대 나갈 거니까.

퍼> 불가피하게 시위 군중들과 충돌하게 되면, 물리력으로 힘으로 해야할 때도 있을텐데요?

전경1> 그럴 때는 정말 갑갑하죠. 하지만 힘으로 해야할 때는 해야죠.

퍼> 그렇게 해서 만약 다치기라도 한다면? 친구거나 동생이거나 형, 누나, 선배일 수도 있는데?

전경1> 그건 때에 따라 다르죠. 저희는 임무를 완수해야 하니까.

퍼> 임무에 따라 심하게 대응할 수도 있겠네요? 방패로 내리찍고?

전경1> 그렇죠. 그러나 방패로 내리찍는 것은 안 배웠구요. 저희는 시키는 대로 다 해요.

퍼> 티비에서는 방패로 내리찍는 애들도 있던데?

전경1> 걔네들은 나가리구요. 훈련이 안 된…

퍼> 개네들은 정말 미국 경찰들인가보죠?

전경1> 그렇게 말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본인과 주변이 모두 웃음)

* 이때 옆에 있던 다른 전경(23살)이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도 대학 1년을 마치고 입대했다고 한다.

전경2> 우리가 먼저 치고 그러진 않아요. 왜 같은 국민들끼리 같이 쳐요. 쓸데 없이. 이번 일이야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죠. 제가 지금 군인이 아니라면, 당연히 지금과 반대로 생각하죠.

그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다 믿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의 마음은 시위에 나선 분노한 시민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야말로 비극이 아닌가. 살인자는 도망가고 없는데, 뜻이 같은데도 전경과 시민이라는 처지가 달라 자기 의사에 반하여 서로 대치할 수 밖에 현실. 이는 반동강 난 우리 민족의 현실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것 아닌가.

3.2 미군, 민중의 삶에 질곡이 되다

학교에 붙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인 사건’에 관한 대자보를 본 중국 여학생 하나가 내게 물었다. “미군이 왜 주둔하고 있지요?” 그의 물음은 한국에 대체 무슨 이익이 있어, 미군의 주둔을 허용하느냐 하는 뜻이었다. 그는 주권국가가 외국 군대의 주둔을 허용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니 미군 주둔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익이 있을 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뒤집어 보면, 이번 일처럼 억울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고서도 미국에 당당하게 따지지도 못 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를 볼 때, 미군 주둔을 허용한 댓가로 얻는 이익이 어디 있느냐는 반문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다만 “미군의 주둔이 북한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잠재적 주적인 중국을 대비한 것이다”는 말로 미군이 한국만 아니라, 중국에게도 큰 위협이 될 것이라는 뉘앙스를 전했다.

2002년 10월 8일자 <문화일보>에는 ‘동서남북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한민족의 통일에 대해 토론을 벌였던, 한 독일 청소년의 말이 실려 있다.

(주한)미군이 작전권을 쥐고서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킨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왜 한국인들은 그냥 있는지 의문이다. 시위하고 싸워서 미군을 나가라고 해야 옳지 않은가. 왜 그렇게 미국에 의존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지난 7일 친구와 함께 “살인자 처벌 않는 소파법 개정하라!”라는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에 참여하고 있던 주영민(중3, 학생회 부회장) 학생을 만났다. 그는 미군 관련 시위는 두 번째이며, 메이데이나 농민대회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벌써부터 그러면(?) 공부는 언제 할까. 그는 내 심중을 읽었는지, “공부는 집에서 하죠. 부모님도 아세요.”라고 했다.

퍼> 미국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요?

주> 미국은 옛날로 치자면, 로마제국, 아니 그보다 더 한 것 같아요. 다른 나라에서 노동력 착취를 통해 자본을 형성해서 그것으로 다른 나라의 권력을 위협하고요.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서 언론과 교육, 사회복지에 관한 정책을 매수(?)해서 민중의 삶을 위협하는 나라죠.

메이데이나 농민시위에도 참여했다는 말도 놀라웠지만, 그의 입에서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 적지 안이 놀랐다. 신자유주의에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짧은 설명을 부탁했다.

 

주> 기업에다 무제한적인 자유를 주어서 기업 활동에 대한 정부의 규제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란 정도로 알고 있어요.

퍼>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을 것 같은지?

김희범(중3)> 불의에 대한 투쟁 정신을 배웠습니다. 소극적으로 집에만 있을 게 아니라, 이런 나쁜 행위에 대해서는 이렇게 나와서 항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이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나이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신자유주의’니, ‘투쟁’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쓰는 것이 어색한 듯했다.

나이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 내가 너무 구닥다리인가. 일부러 도전적으로 물었다.

퍼> 그럼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게 무슨 짓인가’, 라는 어른들의 질문에는 어떻게 답을 하겠는가?

김> 저희 아버지께서도 저희들을 ‘선거권도 없는 놈들이’ 하시는데… 저희가 선거권을 갖는 나이가 되면, 그 때 바로 그 정신(불의에 항거하는)이 ‘땅’ 하고 생기겠습니까? 지금부터 (사회문제에 대해)생각해야죠. (학교)공부는 공부대로 열심히 해야겠지만.

‘항거하는 정신’ 운운하는 대목에서 나는 그만 한 방 얻어맞고 말았다.

이 땅에서 미군은 주둔군이 아니라, 거의 점령군 수준으로 행세한다. 사실상 미군이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는 점령군 자격이었다. 《매일신보》 1945년 09월 11일 자에 실린 <조선주민에게 포고함>이란 기사에서 하지 중장은 미군이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함”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점령의 목적이 “항복문서 조항이행과 조선인의 인권 及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고는 하였지만, 그 점령의 대상이 일본군 또는 일본이 아니라, 바로 조선인민과 조선땅이었음은 명백하다. 그는 자신을 ‘전세계 민주주의 국민의 대표’라고 내세우며 자신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을 요구하며 아울러 불복종 시에는 엄중 처벌을 다짐한다. 그에 앞서 그는 당년 9월 8일 경인지역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의 통행금지를 선포한다. 복종을 강요하고 엄중 처벌로 으름장을 놓는 그의 모습 속에서 마치 미군이 항복을 받아낸 나라가 일본이 아니라, 다름 아닌 한국인 것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군과 소련군의 남북한 분할 점령은 애초 조선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미군(미국)의 존재는 어쩌면 한반도의 분단상황을 더욱 고착시키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민중의 삶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미국은 주한미군을 통해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언제든지 민족의 생존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 지난 94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한반도에 긴장이 조성되었을 때에도 미국은 독자적으로 전쟁을 준비했었다. 게다가 98년에는 북한 핵공격을 전제한 가상 훈련도 실시했다고 한다. 전쟁이야말로 민중의 생존을 극단적인 파국으로 몰고가는 가장 악랄한 수단이다. 그들은 분단상황을 이용해 국내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려고 할 것이다. 지난 80년 광주 민중항쟁 경우에서처럼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쿠테타 정권의 학살마저도 눈감아 줄 자들이다. 그뿐인가. IMF 때나 지난 봄, k-f15기 강제 구매에서 보듯이, 국내 경제도 가능하면 쥐락펴락 하기를 원한다. 분단과 긴장 상황의 최대 수혜자는 누가 될 것인가. 명약관화하다. 군사비가 증액될수록 민중의 복지는 땅에 떨어진다. 또한 앞에서 누차 지적한 대로, 광범위한 지역을 군사기지로 무상으로 얻어 쓰는 미군의 군사기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미군 범죄는 일반 국민들의 일상적 위협이 되고 있다.

 

 

 

4. 반미를 넘어!

4.1 반미가 왜 안돼? 대체 뭐가 두려워?

미군 주둔의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반드시 한국에만 이익이 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인데, 미군 주둔이 적어도 현 시기에서 불가피하다면, 왜 정부는 부당하고 불평등한 소파 협정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쳐 평등하고 그리하여 진정으로 호혜적인 관계로 나아가지 않는 것일까.

14일, 세종로 네거리 이순신 동상 바로 앞, 전경들 틈바구니에서 만난 박순희 선생(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대표)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대뜸 “김대중이가 깨끗하지 않으니까 그런 거지!”하는 말로 일축하였다.

그는 이순신 동상 바로 앞에서 시민들과 대치하고 있는 전경들 틈을 헤집고 들어가 “미국 대통령은 한국인의 자존심을 짓밟지 말라”라고 쓴 피켓을 이순신 동상에 꽂으려고 하다가 전경들이 저지하자, 그들 바로 코 앞에서 바락바락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박> 이러니까 나라 꼴이 이 모양 되는 거야. 너희들 자존심도 없어? 그렇게 창자가 터져 나오게 죽은 효순이 미선이 생각하면 열불도 안 나? 뭐야, 시민들이 자주적으로 나와서 하는 걸 왜 막아? 미국놈들 똥개야?

마침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이순신 동상 바로 아래는 돌단을 쌓아 도로보다 1미터 가량 높아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최전선’에서 멀리 조선일보 사옥 쪽으로, 시청역에서부터 이순신 동상까지 촛불을 들고 모여든 엄청난 군중들을 한 눈에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전경들에게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큰 소리로 대거리하는 키 작은 ‘아줌마’의 기세에 나부터가 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퍼> 어떻게 오셨습니까?

박> 저는 에프-15케이 전면 반대하느라 4월 19일, 청와대 앞에 면담하러 갔는데, 경찰 차에 치여서 5개월 동안 치료받고 있었어요. 경북 봉화에서. 근데 오늘 여기 안 오면 죽어도 도저히 눈을 못 감을 것 같더라구요.

퍼>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대통령은 ‘개선’을 지시했다는데?

박> 기만하는 거죠. 김대중 그 사람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우습게 된다는 거 역사가 증명해 주는데,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 정신 차릴 때가 됐는데, 뭐가 두려워? 몇 번 죽을 뻔하다가 살아서 대통령까지 해먹었으면 됐지. 뭐가 두려워서 미국놈들한테 말도 못 하고 그따위로 나오냐구? 김대중 자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나도 김대중 때문에 내란음모 사건으로 1년 동안 수배 당하고 감옥 갔다온 사람이야. 내가. 그런데 저는 대통령까지 해처먹었는데 뭐가 두려워서 이따위로 비겁하게 이러냐고? 미국 놈들 비위맞추는 거도 아니고, 비굴하게…

그는 ‘김대중 그 사람’이라고 했다. 하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감옥까지 갔다왔으니, 김대중과 맞장 뜬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퍼> (나도 덩달아서) 김대중이 왜 그럴까요?

박> 자기 두려운 게 있는 거죠. 떳떳하지 못 한 게…

퍼> 미국에 무언가 발목 잡힌 게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나도 정말 궁금한 대목이다)

박> 예. 깨끗하지 못 한 게 있다는 거죠. 모든 게 다 ‘공수래공수거’라고, 사람들이 다 내려놓으면 얼마든지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는데, 자기 허물이 있기 때문에 그리 못 하는 거죠.

문정현 신부님과는 매향리 이후로부터 활동을 같이 많이 해왔는데, 미국놈들 잘못하는 거에 대해 5-6년 동안 정말 외롭게 투쟁해 왔어요. 우리가… 그러다가 효순이 미선이가 희생양이 되어 우리를 일깨워 주어 미국의 본질을 알게 되었어요. 병원에서 만난 열댓 분들의 어르신들도 모여서 웅성웅성 했어요. 미국놈들 나쁘다고…

퍼> 지금 언론에서는 반미는 안 된다고 하는데..

박>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인다는 거? 그러니까 그 본질을 못 버리고 있는 거죠. 이회창이도 지금 이 사건이 크게 번지니까 미사에 참여한다 어쩐다 하지만, 자기 표에 문제가 있을까 두려워서 처세를 그렇게 하는 거지, 근성은 못 버려요.

퍼> 이번 시위가 반미시위가 아닌가요? 아니, 우리가 반미하면 안 되나요?

박> 왜 안 돼요? 이게 분명히 반미죠. 물론 미국 전체 국민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죠.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 나쁜 짓을 하는 사람, 자기 양심을 속이고 약소국이라 해서 짓밟고 다른 사람들을 압제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반대하는 거죠. 우리 모임 중에 외국 신부님 수녀님 계시지만, 다 여기에 나오셨어요.

기만적인 언론들은 늘 수사를 즐겨 사용한다. 혹세무민하기 위해서다. ‘반미’라는 말이 미국 전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미국의 부당함과 오만함, 그리고 평화에 반하는 일방적 폭력성에 대한 거부와 저항을 뜻한다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아는 사실인데, 마치 극단적인 이념투쟁인 것처럼 몰고 간다. 그렇다면, ‘반미’의 반대는 ‘친미’인가? 흑백논리가 아닐 수 없다. 시민들은 조선일보를 규탄하였고, 사옥을 향해 달걀을 던졌다.

박> 그리고 우리가 반동강 난 것은 우리 때문인가요? 다 미국놈들 소련놈들 때문에 그런 것이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인데… 이것을 제대로 교육시켜야지. 지식보다는 의식 있게 살아가는 민족을 맨들어야지, 이게 다 기득권을 가진 놈들, 배운 놈들, 정치하는 놈들이 권력 가지고 민중들을 수탈하기 위해 길들여 놓은 것 아닙니까?

박순희 선생의 목소리는 조금도 잦아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12월 14일, 시청역에서부터 광화문 앞 이순신 동상 앞에 이르는 그 넓은 도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함성도 결코 잦아들지 않았다.

“소파협정 개정하라!” “양키, 고 홈!”

시민 자유 발언 시간에 한 연사가 말했다. “효순 미선이가 지금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촛불을 든 채, 하늘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치켜 들었다. 나도 따라서 고개를 들다가 순간 섬??한 느낌이 들었다. 높다란 빌딩 사이로 검은 구름이 두껍고 낮게 깔린 어두운 하늘, 그 위에서 내려다 본다는 우리의 누이가 바로 여기 내 옆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시민들의 함성 속에서 효순 미순이는 살아 있었던 것이다.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던 그들이 시민들의 절규 속에서 제 목소리를 찾았고, 타오르는 촛불 속에서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4.2 반미를 넘어, 민중의 현실로!

‘주권회복의 날’로 선포한 12월 14일, 지하철은 1호선 종각역, 5호선 광화문 역에서 서지 않고 통과했다. 이미 엄청난 인파가 광화문 근처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시청역에서부터 이미 분위기가 달랐다. 그런데 그것은 시위라는 어감이 주는 긴박감 또는 긴장감과 전혀 다른, 무언가 들뜬 느낌이었다. 대목을 만난 듯, 초를 파는 데 여념이 없는 노점상들과 촛불을 손에 들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가볍게 내딛는 걸음걸음에서는 흡사 축제를 즐기러 가는 사람들 같았다.

지하철 출구를 나서니그야말로 대단한 장관이 눈 앞에 펼쳐졌다. 지난 11/30일, 12/7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시청역에서 전경들의 저지선이 있는 세종로 이순신 동상까지 4-500미터 되는 길이의 대로를 인파가 이미 꽉 채우고 있었다. 울산에서 올라왔다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격스웠다. 그렇게 많은 촛불이 밤 거리를 밝히는 광경은 난생 처음 보았다. ‘촛불의 바다’, 그 바다를 봄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했다. 그리고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광화문 촛불시위에 모인 시민들은 월드컵 때 대~한민국을 외치던 시민들과 비슷하면서도 한편 질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어느 틈엔가, 소박하나마 정치적 각성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대한민국 만세’라는 소박한 민족주의 내지 애국주의에 매몰되지 않을 가능성을 엿보게 되는 것이다. 촛불시위를 최초로 제안했다는 아이디 ‘앙마’라는 사람은 “우리는 대한민국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며 “이라크에선 미선,효순 같은 아이들 백 만명이 죽었다. 이젠 그들에게도 관심을 갖자”고 말했다.

지난 7일 미대사관 맞은 편에서 만나, 서울대 국문과 과장이자 민노당 학생위원회 소속인 황예인 씨는 “단순한 감정적 차원의 반미를 넘어서서 민중의 삶을 위한 점더 본질적인 측면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퍼> 이번에 반미감정이 저변으로 확대되었는데?

황> 대다수가 미국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근데 반미가 단순히 한국 국민이어서 미국을 반대하다, ‘한국 대 미국’이라는 식의 구도가 되어선 안 된다. 한국과 미국의 지배계층에 대한 것이라면 긍정할 만하다. 의식 있는 사람들이 문제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사람들의 의식(분위기)를 좀 끌고 오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퍼> 그렇다면 어떤 점들을 부각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나?

황> 여중생의 죽음이 슬프고 억울하다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지배계층이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전혀 보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문제의 해결은 보수정당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보적인 세력들이, 지배계급에 반대하며 다른 체제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노무현이나 이회창은 지금의 반미 분위기를 표를 얻는 데 한 번 이용해 볼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국민들은 알고 있다. 실제로는 해결 의지도 없다는 것을…

퍼> 감정적 반미, 일시적 유행으로서의 반미는 안 된다는 뜻인가?

황> 그렇다.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이게 권력관계라는 거, 미국에 종속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식민지적 상황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극복을 위해 대중적으로 형성된 반미 감정을 바탕으로 국보법 철폐, 미군 철수와 같은 진보적인 논의들도 함께 풀어내야 한다.

매주 토요일마다 촛불시위에 부인과 함께 참여한 민노당 권영길 후보는 별다른 연설도 하지 않고 시민의 한 사람으로 집회를 끝까지 지켰다. 어린 학생들은 코카콜라나 맥도날드와 같은 미국 제품을 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불매운동을 하려면 미국이 깜짝 놀랄 만큼 지독하게 할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민중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가는, 군사력을 앞세운 미국의 일방적 독주, 그 폭력성을 깊이 인식하는 일이급선무인지도 모른다.

교보문고 앞 도로 쪽에 있는 혜정교(惠政橋)터 기념석 앞에는 시민들이 갖다둔 수십 개의 초들이 타고 있다. 종이컵을 둘러 씌운 탓에 불꽃은 종이컵을 태우며 서로 어울려 더 큰 불꽃으로 타올라 기념비를 뜨겁게 달구고 마침내 열기로 부숴버릴 듯한 기세였다. 혜정교는 중학천(中學川) 위에 놓였던 다리로 복청교(福淸橋)라고도 하는데, 민중의 수탈자였던 탐관오리들을 공개 처형하던 곳이라 한다. 기념석 윗부분에 “that never sleeps”(그것은 결코 잠들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촛불은 차가운 바람에 자주 꺼졌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옆 사람의 초로부터 불을 댕겼다. 촛불은 김수영의 <풀>과 비슷하다. 바람에 잠깐 쓰러지고 흐느낄 수 있으나 다시 일어나고 다시 열정적으로 타오른다. 설령 꺼질 수는 있으나 곧 다시 옆의 촛불에서 불꽃을 댕겨 소생한다. 마치 우리의 생명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이어져 있으며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라도 시켜주듯이… 그리고 미선, 효순의 꽃다운 넋은 광화문의 그 함성으로, 그 무수한 촛불로 되살아났던 것이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김소월, <초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