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석 – 장애인이동권연대 공동대표

‘장애인 이동권 연대’ 박경석 공동대표를 처음 보게 된 것은 11월 19일 국가인권위원회 건물에서였다. ‘장애인 이동권 연대’에서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의 교통수단 이용 및 이동보장에 관한 법률’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열고 있었던 것이다. 39일간의 단식농성 현장이 국가 인권위원회 건물이었는데 박경석 대표는 다시 몸을 추스려 꼿꼿이 앉아 있었다. 전날 미국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다음날 바로 공청회에 참여하는 것은 어지간한 부지런쟁이들도 따라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공청회에서 잠깐 인사를 나누고 다음날 명륜동 ‘장애인 이동권 연대’ 사무실로 달려가 인터뷰를 했다.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이하 ‘장애인 이동권 연대’)에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박경석 공동대표는 걱정스런 어조로 사무실로 직접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퍼슨웹 사무실까지는 ‘절대’ 가지 못 하고, 쉽게 움직일 수도 없으니 직접 명륜동까지 와서 인터뷰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교통 여건은 장애인이 ‘마음 놓고’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극히 제한되어 있거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박경석 씨에게 ‘이동’하는 문제는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도 전에 ‘장애인 이동’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TIP1. 이동권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접근권’(rights to access)과 함께 쓰이거나, 접근권의 하위 권리로 불린다.

접근권이란 장애인이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기회의 균등과 적극적 사회 참여를 목적으로 교육, 노동,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근본적 권리를 말한다. 접근권에는 물리적 장벽을 없애는 것으로의 이동권과 시설이용권, 각종 정보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장벽을 없애는 것으로서의 정보통신권(정보 접근권) 등 세 가지 권리가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접근권의 하위 개념 중 물리적 장벽을 없애는 것으로서의 권리 중 하나가 이동권이라 할 수 있다. 이에 근거, 이동권은 물리적 장벽, 특히 교통시설 이용 등에서의 제약을 받지 않을 권리로 정의할 수 있다.

 

 

 

 

1. 아저씨 이름이 (이)동권이야?

 

혜화동으로 향하는 4호선 전철 안에서 나는 단 한번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전철역 리프트를 이용하는 것을 본 적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듣게 된 것이지만 붐비는 전철역의 대부분은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령 설치가 되어있다 하더라도 비장애인들의 통행을 막는다는 이유로 전원을 꺼둔다고 한다.

 

전국 도시철도 전체 역은 378개이고(2001 12월 기준) 그 중에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은 101개 역이다. 그중 휠체어 리프트는 240개 역 중 877대가 있다고 하는데 평균적으로 한 역당 겨우 2대가 있는 꼴이다. 그나마 그것 중에 제대로 움직이는 것은 거의 없을 뿐 아니라겨우 움직이는 리프트를 이용하려면 최소 20분 정도를 참고 기다려야 한다. 계단 한 번 오르는데 20분에서 30분정도 걸린다고 생각해보자. 문제가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장애인 이동권 연대’ 박경석 공동대표를 처음 보게 된 것은 11 19일 국가인권위원회 건물에서였다. ‘장애인 이동권 연대’에서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의 교통수단 이용 및 이동보장에 관한 법률’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열고 있었던 것이다. 39일간의 단식농성 현장이 국가 인권위원회 건물이었는데 박경석 대표는 다시 몸을 추스려 꼿꼿이 앉아 있었다. 전날 미국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다음날 바로 공청회에 참여하는 것은 어지간한 부지런쟁이들도 따라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공청회에서 잠깐 인사를 나누고 다음날 명륜동 ‘장애인 이동권 연대’ 사무실로 달려가 인터뷰를 했다.

 

 

 * 박경석 (42, 지체장애인)

 

83년 군 제대 후 행글라이더 사고로 장애 겪음

91년 숭실대학교 사회사업학과 입학

94년 ‘노들 장애인 야간학교’ 교사 생활 시작

97 6월 ‘노들 장애인 야간학교’ 교장 취임

2001 1월 오이도역 장애인 수직형 리프트 추락사고 대책위원

2001 4월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 공동대표

 

> 미국엔 무슨 일로 다녀오셨습니까?

 

> 미국엔 처음 다녀왔어요. 미국 장애인 단체 ‘인디펜던트 리빙’(Independent Living)이라고 독립 생활운동 하는 곳이죠. 미국 장애인단체가 한 300여 개가 있는데 그 중에 잘나가는 단체가 어떻게 운영되는가 견학하고, 정책이 어떻게 입안되는가 그쪽 연구소도 돌아보았습니다. 일단 한국보다 넓으니까 보이는 건 많고, 정말 넓더군요. 개인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는 싫어하지만.

 

> 미국은 장애인 시설이나 운영이 한국하고 비교했을 때 어떻습니까?

 

> 물론 잘 되어 있겠지요. 나라가 크고 사람도 많이 사니까. 경험할 수 있는 게 일단 대중교통이 잘 발달되지 않은 것 같았어요. 승용차 중심의 문화니까. 시카고 같은 경우에는 버스의 75%가 리프트가 달려 있습니다. 지하철은 타보지 못 했는데 장애인용 주차시설이나 소위 물리적인 환경 같은 것들이 한국보다 나은 것은 사실입니다.

문화, 제도적 차이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대중교통이 발달한 나라와 자가용이 발달한 그 나라하고는 단순비교 할 사항이 아니죠. 하지만 물리적 환경을 보면 여기보다 나은 것 분명한 사실입니다. 도로 턱이 낮고 주차장도 많고 사회복지 수단, 연금들이 나와서 돈 조금 더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도로 턱이 낮고 주차장도 많고 사회복지 수단, 연금들이 나와서 돈 조금 더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에 비해 삶의 질이 나은가’라고 했을 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 나라도 수많은 장애인들이 노동하지 못하고 실업자로 살아가고 차별받고 있는 것은 현실이니까. 빈민으로 살아가고 삶의 질이 낮은 문제에 대해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최근 ‘장애인 이동권 연대’가 시민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 같습니다. 실제 크게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 미국 다녀온 건 개인적으로 다녀온 거니까, 뭐 이걸 달라진 거라고 할 수 없겠고요. ‘장애인 이동권 연대’가 시민들한테 많이 알려졌죠. 작년 4 20일 장애인의 날에 오이도역 추락참사 대책위가 만들어 졌는데 여기서 정부가 사과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문제 때문에 서울역 철로 점거하면서 항의를 하면서 시작했어요. 지금에 비하면 그때는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문제는 사실 화두조차도 안 되는 시기였습니다.

일단 지속적인 일인 시위의 방법 등으로 알려왔지만 그런 건 한순간 알려지는 것이지 본질적인 접근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고민하고 준비한 것이 장애인 이동의 문제가 전반적 기초의 문제라는 것이고 기본적인 것이라는데 합의를 보았죠. 그러한 구조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단발적인 투쟁이 아니라 장기적 투쟁에 대응하자 해서 이동권연대가 발족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100만인 서명운동, 버스 타기, 천막농성 같은 지극히 캠페인적이고 합법적인 것부터 비합법적인 투쟁까지 쓸만한 건 다 쓰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언론의 조명을 받았고, 또 사람들에게 알려내는 데 성공한 것 같아요. 발산역 리프트 사고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많이 알려졌으니까 이렇게 인터뷰도 오시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 ‘장애인 이동권 연대’는 어떠한 단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 초기 연대사업은 7개 단체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오이도역 대책위’ 할 때도 20여 개 단체가 있었는데 그 이후 해산하면서 투쟁의 방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 하기 시작한 것이죠. ‘지체장애인협회’ 같은 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장애인 단체인데 집회 다음날 보건복지부 전화 받고 탈퇴해 버렸어요. 이런 과정을 겪어나가면서 핵심적인 7개 단체가 주축이 되었고요. 그 사람들하고 우리들 이야기를 알려나갔습니다. 지금은 정확히 몇 개 단체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30여 개 단체(지역 빼고)가 있다고 하네요. 워낙 이름만 그럴 듯한 단체가 많아서 말이죠.(웃음)

 

> 초기에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형성되지 않아 어려움도 겪으셨을 텐데요.

 

> 어려움이야 지금도 겪고 있습니다. 100만인 시민 서명운동을 할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지나가던 어떤 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휠체어 탄 장애인한테 “엄마 이 아저씨 이름이 ‘이’ ‘동’ ‘권’이야?”하고 말이죠. 이동권이 뭔지도 모르는 그때, 장애인보고 이동권이 이름이냐고 물어볼 때에 비한다면 지금은 굉장한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 졌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 측면 속에서 보면 아직도 많은 장애인 단체가 고립되어 있고 장애인의 권리에 대한 문제가 이 사회 속에서는 배려의 차원, 베풀어주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 한 것이 현실이지만요.

 

박경석 대표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과거보다 상당히 좋아졌고 어느 정도의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 졌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았을 때 상당수의 비장애인들은 여전히 장애인의 삶을 이해하고 편의를 생각할 정도로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단지 장애인의 날이나 장애인 올림픽을 하는 날 그저 그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약한 사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장애인들은 사회 제도와이웃 속에서 철저히 고립되어왔고 여전히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자리를 내어 주는 것에 대해 인색하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박경석 대표는 예전보다 많은 변화를 감지하고 그것을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토대로 삼고 있는 것이다.

 

> 장애인 운동이 고립되어 있다는 것은 장애인 운동을 시민운동으로 바라보지 않는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

 

> 난 우리가 시민운동이다, 규정 받기도 싫고 시민운동 자체를 개인적으로 별반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게 시민운동이다 혹은 시민 없는 시민운동의 형태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규정받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습니다.

근데 시민운동에서 규정한다면 그렇게 규정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장애인운동이고 시민운동의 형태를 뛰어넘는 장애인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장애인운동의 많은 진영이 관료화되어 있고 정부의 떡고물에 놀아나는 게 현 상태인데, 시민운동도 못 따라가는 형편에 굳이 시민운동이 우리를 그렇게 규정지으면 지으라고 하세요. 시민운동을 따라가려는 마음도 없으니까요.

기본적으로 사회를 바꾸는 것은 가장 차별 받는 사람의 시각에서 세상이 바뀌어야 하는 변혁의 문제이고 이것이 자본의 질서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지금의 시민운동을 따라가고 싶지 않습니다. 장애인운동을 시민운동과 비교해서 뭐 하자는 건지, 정말 개인적으로 보면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 못하는 것 같아요. 장애인운동이 그런 형태들로 굴러와 있었다. 뭐 그런 것이 우리에 대한 반성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굳이 반성을 한다면 시민운동에게 할 필요도 없는 건데.

2. 언젠가 우리의 손으로

쇠사슬을 끊을 것이다

 

> 그동안 많은 투쟁들이 있었는데 어떤 성과가 있었습니까?

 

 > 개선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선점의 시각을 어디에 두고 보아야 하는 문제가 있지만요. 용산 고등학교에 저상버스가 한 대 들어가 운행하고 있고, 내년에 서울시에서 저상버스를 도입하고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달라져 있지요.

그리고 공무원들이 많이 변했습니다. ‘장애인 이동권 연대회의를 대하는 모습이 그전에는 콧방귀도 안 뀌고 말조차도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동권 문제가 나오면 우리한테 공문도 보내고 있어요. 사회적인 현상은 그렇고, 정부 태도는 저희가 그래놨더니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도화 되고 당연한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데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아이 떼쓰는 것에 아무 관심이 없다가 더 울어 대니까 조금 관심 가져주고 하는 기분이 든다고 할까요. 그들이 정하는 대책들에 안주해야할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면 아직 멀었습니다. 그동안 지내왔던 일들을 생각해 보아도 한참 멀었지요.

 

저상버스는 일반버스보다 출입문이 5cm가량 낮고, 바닥이 출입문과 같은 높이다. 중간출입문에는 휠체어나 유모차의 출입을 위해 인도와 출입문을 연결하는 이음장치(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어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을 비롯해 거동이 어려운 노인이나 보폭이 좁은 어린이들도 안전하게 승하차 할 수 있다.

이 저상버스 도입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고 2002 9 18일에는 서울시에서 저상버스를 도입하겠다는 보도 자료를 발표하였고 9 24일 위원회를 구성, 2003 7월 일반노선에 50대의 저상버스를 도입하겠다고 결정했다.

 

> 이쪽 대학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장애인용 리프트나 엘리베이터가 잘 설치되어 있던데요.

 

> 여긴 그나마 사정이 나은 겁니다. 하지만 내 가슴 속 심장에 칼을 10센티 정도 찔러 놓고 한 1밀리 빼면서 좀 좋아졌지 않았냐, 하는 것 같지요. 내 가슴속에 있는 칼은 다 뽑아야지. 동등하게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비장애인의 90%이상이 장애인 이웃을 두는 것이 싫다고 말했는데 이러한 문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부분은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이나 무지 때문에 나온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나도 허리를 다쳐 중도 장애인이 되었기 때문에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었죠. 못 보니까 당연히 생각도 안 할 것이고 그것이 불편한지도 모르잖아요.

 

> 장애를 입기 전에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죠?

 

> 저도 대학교 다니고 난 뒤에 떨어져서 24살에 장애를 입었는데 그때 그전까지 내가 일상 속에서 장애인을 몇 번 봤는가 생각 해봤습니다. 그런데 가끔 지나다가 다리 조금 저는 장애인을 본 기억 밖에 없는 거예요.

대학 2학년 때인가 같은 과 여학생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다리를 절면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을 그것도 비 오는 날 뒤에서 보니까 참 센티멘털한 감정이 있었어요. 우산이라도 씌워주고 싶은 그 정도의 멜랑꼴리한 거죠. 제게 장애인은 완전히 자기의 감정에 사무치는 대상일 뿐이었지, 그들의 삶이 어떤가 하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휠체어 탄 장애인이나 뇌성마비 장애인은 보지도 못 했고 4 20장애인 날 행사를 텔레비전으로 보면 장애인들 막 웃고 있고 비장애인들 나와서 봉사해주는 그 정도 수준이지, 다른 사람은 못 보잖아요. 그저 단순히 뇌성마비 장애인의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니까. 사람들은 아, 장애인은 아름다운 사람이구나, 혹은 불쌍하구나 라고 느끼지만 저들의 삶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 것들이 바로 쌓여 온 거고. 그런 무관심과 단절이 사회 속에서 장애인을 규정하는 온갖 이데올로기와 편견을 만들어 낸 거죠.

이것들을 바꾸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그들과 만나야한다는 것입니다. 뇌성마비 장애인도 자주 만나면 처음에는 밥도 같이 먹기 싫었는데 왜냐, 밥알이 팍팍 튀니까, 침도 막 흘리니까

 

인터뷰를 도중 전화가 울려 인터뷰가 끊겼다. 며칠 후에 있을 ‘장애인 버스 타기에 관한 내용인데, 이번에 인천지역에서 함께 연대할 단체가 생겼다며 연신 즐거워했다. 또 다른 전화가 걸려왔는데 이번 것은 대선관련 건으로 보였다.

 

> 무슨 선거대책 본부라는데, 아 미치겠다, 선거철이라 그런지 전화가 많이 오네요. 미안합니다. 어디까지 했지요?

 

> 서로 만나야 하는 문제요.

 

> , 만나야 되는 문제이고 이런 문제를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을 내 옆에서 만나야만 잘생긴 사람도 있고 못생긴 사람도 있고 이상한 사람도 있고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것 아닙니까. 그렇게 생활 속에 다가오는 것들로 받아들여져야 장애인에 대한 무지와 편견들이 해소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철학적으로 정책적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지요. 질문의 대답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박경석 대표도 장애를 입기 전에 매우 활동적인 젊은이였다. 군대를 제대한 83년 대학 행글라이딩 서클에 가입해 경주 토함산에서 전국규모의 행글라이딩 대회가 있기 전까지, 그곳에서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는.

 

조종하던 행글라이더가 창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러나 갑자기 날개 연결 고리가 끊어지고 행글라이더는 절벽을 향해 곤두박질 쳤다. 갈비뼈가 양쪽으로 4대 부러지고 폐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했던 것은 6,7번 척추 골절이었다. 잠시 의식이 들어왔을 때 하반신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진 뒤 척추가 움직이지 않도록 침대에 묶여있었어요. 하루에 몇 번씩 악몽을 꿨죠. 꿈에서는 걷는데 눈 뜨면 움직이지 못 해요. 과거를 떠올리면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석 달 뒤 처음으로 휠체어에 앉혀졌어요.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고 휠체어에 앉게 되었을 때, 이제 어떻게 죽을까 하는 생각만 했었지요.

 

 > 최근 투쟁하는 모습을 보면 리프트에 쇠사슬을 묶고, 사다리도 등장합니다.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 , 별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굳이 그걸 묶는 이유를 얘기하라면 이런 거죠. 우리가 데모를 하는데 경찰들이 와서 살짝 들고 가 버리면 얼마나 쪽팔리는 일입니까. 도로점거를 하기로 했으면 더 오래 해야 하는 게 싸우는 사람의 원칙이 아닙니까. 위협한다고 해서 술술 나올 수 없는 문제고. 장애들이 그렇게 묶지 않으면 경비원이 실실 웃으면서 밀어버리면 그 얼마나 쪽팔린 일입니까.

 

> 집회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군요.

 

> , 그것이 본질적인 것입니다. 또 ‘쇠사슬과 사다리라는 것은 차별에 대한 우리 분노의 표현이죠.  

 

세상이 우리 장애인들에게 만들어 놓은 일종의 함축된 ‘형상이죠. 이것을 풀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을 풀기 위해서라도 묶는 거예요. 그 쇠사슬이 지금은 경찰들에게 잘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 스스로 이 쇠사슬 잘라내겠다는 표현이지요.

 

> 정부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이미지에 일대 반격을 가하신 거군요.

 

> 그렇죠. 아름답고 불쌍하고 동정의 대상이어야 할 장애인들이, 힘도 없어 보이는 장애인들이, 자기 한 몸 못 가누는 장애인들이 ‘갑자기철도를 점거하고 쇠사슬을 묶고 도로로 나가고 하는 겁니다. 이게 희극 스토리든 비극 스토리였든 그것들에 대한 반응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고 봅니다.

 

>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이나 의미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집회를 보았을 때 적지 않은 놀라움을 겪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하하.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동권을 요구하는 건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노동자 투쟁이나 감옥에 있는 사람들, 비정규직 철폐 같은 자기들 의지 표현하는 사람들이나 차별받는 사람들 이야기 할 때는 ‘아, 저 사람들은 항상 그런 놈들이구나‘, 하고 느끼잖아요. 저런 사람들 원래 그런 놈들이야, 하고 생각할 거고. 거기에 맞춰서 보수언론도 그렇게 조장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보수 언론들이 우리 장애인들이 싸우니까 충격적이었는지 어땠는지 노동자 투쟁하고 다르게 장애인의 투쟁을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신문이나 뉴스를 보고 우리의 투쟁하는 모습에 놀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만큼 그들이 장애인들에 대한 문제와 장애인들의 삶이나 현실을 모르고 있었던 이유 때문일 겁니다. 두 번째 문제는 장애인 문제에 대한 표현들이 사랑이나 동정이나 시혜로 풀어나가려 하는 것이죠. ‘사랑의 리퀘스트같은 것을 보면 예쁘게 생긴 장애인이 손가락 네 개로 아름다운 피아노를 치는, 그 장애를 극복하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잖아요. 물론 그 장애 극복에 대한 것을 평가절하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보수언론들이나 세상이 이미 장애인의 문제를 그렇게 이미지화 시키고 있다는 거죠.

 

장애인 문제에 대해 사람들은 불쌍하다 그러면서 혀를 차고, 불쌍하다 그러면서 돈 몇 푼은 던져 줍니다. 그것이 자신의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동냥처럼 생각하지요. 그럴 땐 언제든지 ‘나는 착하고 선하다.’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장애인 때문에 자기 이익에 조금의 손해라도 가면, 한 시간 또는 삼십 분 정도 늦으면 당장 ‘병신 새끼들하면서 욕합니다. 그래 우린 병신입니다. 병신이라도 당당한 병신이길 원합니다. 지금까지 장애인 문제 때문에 침묵하고, 정말, 받아야 될 차별 다 받아가면서 살아 왔는데 이제 그러지 맙시다. 정말 그러지 맙시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 보고서 <버스를 타자!> 영상물 중에서

3. 장애인 법, 시행은 하되 강제는 없다

 

11 19일 국가 인권 위원회에서 ‘장애인, 노인, 임산부의 교통수단 이용 및 이동보장에 관한 법률‘ 제정을 위한 공청회가 열렸다. 이번 공청회에는장애인 이동권 연대‘가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문제와 사회적 약자의 이동에 관한 문제를 현행법상에서 현실적으로 규정하자는 의미로 마련된 것이었다.

여기서 ‘장애인 이동권 연대는 그 동안의 투쟁성과를 토대로 장애인 문제에 대한 사회구조적 한계를 소관부처의 문제, 현행 법률의 한계, 지방 자치단체의 선심에 의지해야 하는 문제로 지적했다. 또한 장애인 이동에 관한 법률과 정책 제정 시 지방자치단체가 아닌 중앙정부가 관할할 것과 강력한 이동보장 법률의 제정, 소관부처를 보건복지부가 아닌 건설교통부가 일임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법률제정을 요구하는 공청회와 토론회가 진행되었고 곽노현 방송대 법학과 교수(국가인권위원회), 어명소 건교부 육상교통기획과 사무관, 이민종 변호사(민주노동당 인권위원회), 강동구(국민통합21 정책 3팀장), 김은희 도시연대 사무국장, 이신해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박사, 박경석 장애인 이동권 연대 공동대표가 참석했다.

 

>지난 11 19일 국가인권위에서 장애인 이동권 법률 제정에 관한 공청회를 진행했습니다. 그곳에서 39일 동안 단식도 하셨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 , 의미가 남달랐다기보다는 바로 옆 사무실이 우리가 있었던 공간이고 뭐, 농성했던 장소에서 토론회를 하니까 그렇죠. 국가인권위였기 때문에 남다른 의미는 별로 없어요.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얘기니까. 단순히 국가인권위만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마찬가지죠. 사회가 가지는 인권에 대한 문제를 국가 인권위에서는 좀 더 진보적으로 다루려고 하는데 그 속에서 얼마나 모순 덩어리가 많으냐하는 것입니다.

 

> 국가인권위가 상대적으로 장애인들에게 대해서는 상당히 호의적인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실제 공청회 때에는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 , 호의적이라면 이런 것이겠지요. 관공서를 점거하는데 만약에 경찰서를 점거했다고 하면 한 방에 깨지는 거고 국가인권위를 점거하면 39일까지 버틸 수 있었다는 거죠. 하지만 장애인 인권 문제에 있어서 본질적인 접근을 해나갈 때 과연 국가인권위가 철저하게 약자의 편에 서서 우리 이야기를 해주는 공간인가라고 했을 때, ‘아니다라는 겁니다. 이미 그곳은 공무원 집단이고 관료화된 전문가의 허상과 관료들의 간섭에 젖어 있는 곳이라고 개인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어차피 그곳도 정부기관이니까 관료화되는 과정들이 보이고 있다는 거죠. 점점 그렇게 되어 가는 겁니다.

 

공청회는 민주노동당 이민종 변호사의 발제로 시작되었다. 그는 발제문에서 영국은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해 ‘접근위원회‘(England Access Community)를 구성한 것과 미국이 11년에 걸쳐 만든 ‘ADA(Americans with Disabilites Act)‘, ‘장해자(障害者)플랜을 통해 장애인의 생활환경 개선책을 제시한 일본의 ‘교통베리어프리법을 소개하며 우리나라도 더 현실적인 장애인 이동권 확보를 위한 노력과 관련법 제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에 건설교통부관계자는 개인적으로 개정을 원하지만 현실적인 한국 교통여건의 문제를 들어 어렵다는 입장을 표시했다. 이에 박경석 대표는 현재의 법안은 특별한 규제가 없고 강제성이 없는 선언적 조항들 때문에 ‘지켜도 그만 지키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법안이라며 강력한 행정권한을 부여하여야 한다고 했다.

모당의 경우 토론의 주제와 상관없이 자신이 속한 당과 대통령 후보를 선전하기에 급급해 주제와 관련 없는 발언을 하거나 전문성이 없는 토론자를 참석시켜 빈축을 샀다.

 

 > 이번 공청회는 각 기관의 입장을 표명하는 선에서 마무리 된 것 같습니다.

> 그것이 한계죠. 그들이 밤새도록 이동권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도 아닐 테고 기조 발제 하는 사람 정도가 알뿐이지 자기문제가 아닌데 할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들이 있겠죠.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의견을 나누는 것들이 아니니까요.

 

> 정당이나 단체를 홍보하려고 와서 앉아있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던데요.

> 그건 어디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얼마 뒤면 선거인데.

 

> 법률안 제정 요구의 의미는 뭡니까?

> 원래 편의 시설문제를 이야기 할 때는 장애인만을 국한시켜서 접근하지 않아요. 노인의 문제, 임산부, 아이들의 문제까지, 편의 증진법도 그렇고요. 굳이 새로운 사실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의미라는 것은 저상버스를 타면 휠체어 탄 장애인은 물론 편하고 그 사람에게 편하면 어린아이들에게도 편할 것이고 유모차를 미는 임산부에게도, 노인에게도 도움이 될 거죠. 모든 사람이 편하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필요하단 얘기니까.

 

> 현재 장애인 관련 법안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 장애인 복지법이 있는데 편의 고용촉진법, 편의 시설, 장애인 교육에 관한 법률이 있지요. 그런데 이동의 문제에 대해서는 편의증진법이 다루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대중교통의 문제는 다루고 있지 않고 있어요. 그저 권고 사항이나 이런 것이 있다는 정도지 구체적으로 법이 강조, 강요하는 사항은 빠져 있으니까. 그러니 법률적으로 제한이 없는 법을 누가 지키려 하겠습니까. 장애인을 배제시켜도 그것이 차별인지 뭔지도 모르고 그저 경제적인 부분들만 고민하면서 비장애인 중심으로만 사고하고 그것에 맞춰진 것들만 발달하는 것이죠. 그것들에 대한 제도적 허점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장애인 이동에 관한 법률을 내놓은 거죠.

 

법률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기본적인 필요와 상식, 열망이 담기고 진보적 실천이 담겨야 한다는 한 법률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불가능이 가능성의 영역으로 전이하는 단계는 배려의 차원이 아닌 지켜지면 옳은 것이고 지켜지지 않으면 틀린 것인 도덕의 최소한인 것이다. 이것이 권리의 개념인데, 국가가 지켜주지 않는다면 사법 권력이 원상복구 시켜주어야 하는 것이다.

 

권리라는 증명서 앞에서 ‘공공성, 공공복리는 큰 소리를 내지 못 하는 것이다. 이동할 권리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최소한의 권리이고 그것의 보장이야말로 공동선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제도는 ‘공공성이라는 명분 아래 장애인의 이동할 권리를 밀어내고 있다. 때문에 ‘장애인 이동권 연대는 이동할 권리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 이번 공청회를 통해 대선후보에 관해 검증하는 기회로 삼겠다고 하셨는데요.

> 검증이야 다 되어 있지요. 그러한 부분들에 대해서 대선후보들이 장애인 이동권에 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고민하지 않을 것이고 이동권 문제에 대해서는 긍정하고는 있지만 아주 상식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못 할 것이라는 거죠. 보수정당에 있는 사람들은, 대통령 후보들은 과연 우리가 제기하는 부분을 정책실무자들과 논의한 것을 가지고 와서 하려고 하느냐. 그것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동권 이야기 하지만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고민하는 모습들이 하나도 안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들은 꽝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박경석 씨는 보수정당들이 이제 차라리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속 편할 정도로 다가온다고 했다. 그래야 왜 안 되는가를 따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다 된다고 웃으며 이야기하면서 뒤로는 뒤통수치는 문제들이 가장 어려운 문제가 아니냐며 반문했다.

 

> 대선후보 공약을 검토한 다음 공문을 보낸다고 했습니다. 답변이 왔습니까?

> 답변 안 왔어요. 아직.

 

> 한 군데서도 안 왔나요?

> , 민노당, 사회당까지 다 보냈는데 실무적으로 확인은 못했지만 사회당에서는 공문을 못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받으면 당장 보내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실무적인 문제지 실제 어느 당에서 직접 움직이냐가 문제의 핵심이죠.

(민주노동당 심재옥 의원 시정 질의 내용 및 답변)

 

> 어떤 당에서 대책을 세우고 있습니까?

> , 민노당은 대책을 세우고 있어요. 장애인 이동권 연대에서 같이 활동하는 조직의 하나이기 때문에 뭐, 서류 같은 것은 문제될 것이 없고, 만약 민노당이 집권을 하게 되면 이동권 문제에 대한 어려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정책적으로 약속한 문제이기 때문에 책임지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다른 정당들은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정책적으로 답변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4. 꼬셔서 조직화하다

 

2000년도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매일 외출할 수 있는 장애인은 전체의 59.6%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것은 전체장애인의 약40%는 원하는 시간에 목적하는 장소에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실제 장애인들의 65%가 외출할 때 불편을 느끼고 그 원인으로 대중교통이 불편(52%)하기 때문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나마 외출을 할 수 있는 장애인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중증 장애인은 외출할 엄두도 내지 못 할 뿐만 아니라 외부와 단절된 공간 속에서 지내야 한다고 했다. 이제 박경석 대표는 그 외출 할 수 있는 장애인들을 ‘조직화하기에 이른다. 제도교육이 확실하게 비껴간 ‘방구석에 박혀있는 장애인들을 밖으로 불러내어 ‘노들 장애인 야간학교를 거점 삼아 조직운동을 전개한다.

 

 > 94년까지 직장생활 하시다가 그만두고 야학 교사를 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 누가 추천해줘서 성남에 있는 복지관에 취직을 했어요. 근데 한 일년(1) 정도 다녔어요. 그것 하면서 생각하기로는 야학은 본업이고 직장은 돈벌기 위한 부업일 뿐이었고 그리고 그러한 부분들에서 요구가 들어오는 거죠. 직장에 좀 더 남아서 일을 하라. 그런데 나는 근무시간만 끝나면 퇴근해서 야학하는 일에만 신경을 쓰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갈등이 있었죠.

 

> 거기서 무슨 일을 하셨나요?

> 총무과장이었어요. 거긴 복지관이니까 월급 잘 주고 서비스 잘 하고 돈 잘 받고 하는 일을 했지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열심히 월급 받아서 뭘 할까 고민을 하게 된 겁니다. 한달 100만원 봉급 받는다고 잡으면 1년에 1200만원이죠. 10년 하면 12. 그걸 모으기 위해서 이런 기계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좀 철학적인 차원으로 고민하게 된 겁니다.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것일까 하는 고민들이 있었던 것이죠.

 

갈등 때문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가 노들야학에 대해 지닌 애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 박경석 대표가 미국을 여행하는 동안 쓴 글을 읽어보자.

     

  눈물에서 인생을 배운대. 빨리 힘내기를퍽큐어메리카에서 오랜만에 컴퓨터에 앉아서 노들홈페이지를 보니 눈물이 나네, 그리움으로. 연극제 사진을 보니 더욱 그리워지고.

(중략) 쌍둥이 형의 UBF센터에서 한글로 컴퓨터를 할 수 있다니 정말 반갑다. 맨날 영어를 보고 들으니 눈도 말도 돌아가더구먼. 물론 쌍둥이 형이 미국온 지 14년이 되어 가는데 처음으로 어떻게 사는가를 눈으로 보고 있으니 감회가 무량하구. 살아있으니 만나고.

“사람과 사람과의 아름다운 힘이 되는 / 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 친근함과 재미와 분노가 날카로운 힘이 되어 터져 나오는

그러한 노들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노란들판을 생각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미국의 장애인운동 지도자가 이런 말을 했대. 첫째도 ‘투쟁‘, 둘째도투쟁셋째도 ‘투쟁이라고. Nothing About us Without us!

노란들판에서 오늘도 열심히 투쟁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움과 안부를. 힘내고 시유레이타

 

어깨 꿈  

     

> 박경석 대표님이 장애인 이동권 투쟁하는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 원동력이요? 추상적으로 말해야 하나 직접적으로 말해야 하나? 좀 추상적으로 얘기 한다면, 밥을 먹으니까 움직이는 게 되죠. 밥이 제 동력 입니다. 하하. 제가 39일 동안 굶어 봤는데 그 정도까지 밖에 못 하겠더라고요. 그 뒤엔 죽든지 말든지. 밥 못 먹으면 움직이지 못 합니다.

직접적인 제 투쟁의 원동력은 장애인이 떨어져 죽고, 다치고. 버스를 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당연하게 느끼게 만드는 이 사회에 대한 분노죠. 차별하는 문제, 기본적인 권리조차도 보장받지 못 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구걸하듯이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모습과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마치 떡고물 던져주듯 장애인 문제를 생각하는 사회의 기만적인 모습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 다음에 이동권 투쟁에 대한 것은 제가 이곳 노들야학에 있으면서 느끼는 아픔과 분노입니다. 그들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제도교육을 이제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분노와 고민의 문제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돈버는 문제는 무시할 수 없었을텐데요?

> 솔직히 돈버는 문제는 나의 고민이 아니었어요. 성경에도 있는데 내일 먹을 것을 오늘 걱정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그런 것도 있고, 배고파보지 못 해서 배고픈 것이 실질적으로 나의 경험이 아닙니다. 아무리 배고파도 먹고 살 길은 있겠다, 그렇게 생각한 거죠. 그것들 때문에 절박하진 않죠.

그런 문제가 절박한 사람들에 대한 선택들을 가로막거나 내가 더 우월하거나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부분들 내게 행운이 있다면 가족들이 있고 가족들 속에서 나를 지원해줄 경제적인 부분들이 있다면 그것을 나의 발전에 쓴다기보다는 그런 것이 일을 때라도 좀더, 다 떨어지기 전에 한판 결판을 붙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감사하죠. 가족들한테.

 

> 현재 ‘노들야학학교교장으로 계시죠. 어떻게 운영되고 있습니까.

> 올해가 10주년인데요. 기념행사 노들의 밤 준비하고 있습니다. 93 8 8일에 만들어졌으니까 정확하게는 내년이죠. 이번에 10번째 노들의 밤 하는 겁니다. 운영은 학생들이 35명 정도 되고 교사들은 20명 정도 있습니다. 대학생들 위주인데 간혹 직장인들도 있고 백수들도 있어요.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친구들도 있고. 

 

그래서 운영은 정부로부터 받는 운영비는 거의 없습니다. 운영비용은 야학 ‘비정규 학교라고 해서 구청에서 나오는 일, 이백만 원이 있는데 그거 가지곤 택도 없는 거죠. 4, 5천만 원 정도 날아가는데 힘들죠.

 

> 수익이 필요할 텐데, 어디서 만들어 지는 겁니까?

> 야학 교사들한테 돈을 받습니다. 온라인상에 있는 후원자들이 있는데 아주 귀한 존재들이지요. 뭐 그렇게 먹고살고 있습니다.

 

> 교사들한테 돈을 받는다는 건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 야학운영비죠. 가르칠 기회를 줬으니까, 당연히 돈 내야 하는 거죠. 그게 활동하는 기본이니까.

 

노들야학은 전국 장애인운동 청년연합회, 장애운동단체, 전국장애인 한가족 협회, 전국장애인협회를 통합하면서 만들어졌다. 조직 운동은 어떻게 보면 ‘쪽수인데 그 쪽수들이 보이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문제는 장애인 시설이 대부분 갇혀 있고 밖으로 나오질 않는 이유 때문이었다. 때문에 조직화도 되지 않고 교육도 못 시키겠고 해서 어떻게 하면 ‘잘 꼬실 수 있는공간을 만들까 하는 궁리를 하다가 검정고시를 배울 수 있는 야학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 꼬셔요? 어떻게 꼬셨는데요?

> 조사를 하다보니까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정상적인 교육을 못 받았어요. 제도교육을 받고 싶어하는 욕망을 발견한 겁니다. 그런 욕망이 있는데 무슨 사회과학적인 강좌, 세미나 등의 현란한 것들을 준비한다면 오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가장 욕구의 절실함에 맞는 것들을 가지고 다가가야지만 조직화가 쉬울 거라고 생각했지요. 뭐가 절실할까 생각하던 중에, 물어보니 검정고시를 배우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검정고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서 교사들을 모집하고 학생들은 검정고시 가르쳐 줄 테니까 오라고 한겁니다.

 

 > 장애인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려면 기존의 이동수단으로는 부족할텐데 어떤 방법으로 불러냈나요?

> 부족하지요. 나이가 늦어서 검정고시 교육이라도 받아보고 싶었는데 이동하지 못해 받지 못하는 것, 뭐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물적 토대도 없는 것이고 매일 데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수업을 받으러 나오라고 하면 이동을 못해서 못 나간다고,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어봐요. 어떻게 하긴 지가 알아서 나오든지 말든지 해야죠. 우리가 그걸 다 커버할 수 없는 거잖아요. 최근에야 봉고 한 대 생겨서 돌리는데 기름 값이건 인건비건 정부로부터 도움 하나 받지 못 하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다 할 수는 없는 것이 결국 능력이 없어서 데리러 가지 못 하는 것인데, 그것이 그들에게 다시 ‘방구석에서 죽든 말든 맘대로 해라‘하는 것하고 같잖아요.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데

 

> 교사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입니까?

> 운동권 학생들은 잘 안 오더라고요. 그 친구들은 너무나 바빠서요. 말은 잘하고 실천은 투쟁을 위해 나가는데 우리의 의미들이 잘 전달되지 않아서 그런지 잘 안 옵니다. 그래서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들은 심성이 착한 부류에 있는, 봉사 부류에 있는 사람들이 교사를 하는 거죠. 뭐 운동권 학생들 심성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모집해서 서로 부딪치고 술 마시고 하면서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야, 장애인들한테 우리는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고, 선생들한테는 장애인문제는 그런 게 아니야 하면서 의식화 시킵니다. 나중에 그렇게 해서 장애운동을 진행하는 것이고요 그런 사람들이 노들야학을 만든 거고. 그렇게 10년이 흘렀습니다.

 

운동 진영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시민단체조차 장애인 운동을 ‘인권의 문제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처음부터 그것을 ‘운동의 개념이 아니라는 시각을 가지고 단순 이익 집단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 때문이 아닐까. ‘운동 내부의 보수주의는 그 시야가 좁고 ‘연대 범위또한 얕은 것이 아닐까.

 

 > ‘노들 장애인 야간학교홈페이지 아이디가 ‘어깨 꿈입니다. 어감이 상당히 좋은데 무슨 의미 입니까?

> , ‘어깨 꿈. ‘어차피 깨진 꿈입니다. 하하하. 내가 너무 실망을 줬나? 내가 모르고 바래왔던 세상이 만든 꿈, 그것들을 좇아가는 건 나는 어차피 깨졌다는 겁니다. 너희들의 기준에서 보는 그런 것들은 다 버렸다고, 이제 어차피 깨진 꿈 다르게 해 볼란다는 겁니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꿈에서 깨졌다. 이미 볼 장, 안 볼 장 다 봤다. 이거죠. 내가 너무 실망을 안겨 준 것 같네요. 하하

 

다른 모일간지의 인터뷰에서 “과거에 걸었던 시절을 더 이상 꿈꾸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약간 울먹거렸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의 슬픔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의 환하게 웃는 모습은 과거의 꿈이 어차피 남의 것이었으니 이제 내 꿈을 꾸며 살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 그들이 만들어 놓은, 비장애인의 기준에서 장애인을 차별하게 만들어 놓은 세상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모두 같은데 같은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고 가야하는데 그걸 왜 나는 당연하게 겪어야 되는가 하고 느낍니다. 그걸 뚫기 위해서 나는 왜 나의 모습을, 아름답지도 않은데 아름답게 만들어야 하고 사랑스럽지도 않은데 사랑스럽게 만들어야 하는가. 불쌍하지도 않은데 불쌍하게 만들어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추어 가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역할을 할 필요가 없죠. 전혀.

 

그는 지금까지 20, 30년 살아왔던 차별적인 세월 그리고 ‘집구석에만 있어야 했던 세월, 장애인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누구나 다 동의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에 들어가면, 어느 누구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지금 사회의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박경석 씨는 자신도 비장애인으로 있었다가 장애를 가지게 되어서 그런지 장애문제에 대해 관심 없다면 그렇게 살다 죽으면 된다, 다만 관심이 있고 고민한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것이 관심이나 긍정의 차원이 아닌 인간의 권리에 대한 문제로 접근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연대는 “몸으로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의 실현”이라는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