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김정진. 민주노동당(이하 ‘민노당’) 정책부장 겸 인권위원회 총무. 올해 4월에 공익 법무관 생활을 마치고 민노당 중앙당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는 별도로 변호사 개업을 하거나 로펌 혹은 합동법률사무소에 고용되지 않고 전적으로 민노당에 근무하며 월급을 받는 상근직으로 일하고 있다. 민주노총 같은 단체에도 상근직 변호사가 있기는 하나, 정당, 그것도 의석을 가진 소위 제도권 정당이 아니라 민노당 같은 진보 정당에서 상근하는 것으로 변호사 생활을 개시한 이는 김정진이 최초이고 또 유일하다고 한다. 법조인의 정치 입문 경로를 법조인으로서 성과를 쌓은 후 정당이나 행정부의 고위직을 맡게 되는 경우와 정치적 사건을 주로 다루는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직업적 정치인으로 전업하는 경우로 크게 구별한다면(이회창이 전자라면 노무현은 후자라 하겠다)김정진의 정계 입문은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는 진보정당에 참여하겠다는 본인의 의지를 처음부터 뚜렷이 한 경우이다.
이 글을 쓰는 나는 그를 1998년 사법연수원의 어느 모임에서 처음 보았다. 나보다 한 해 연수원 선배인 그는 무언가 불만이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 불만은 그의 얼굴에 그늘이라 할 만한 것을 드리우고 있었다. 음울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 그늘이었다. 그와 나 사이에 친교라 할 만한 것이 도무지 없었기에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불만을 갖고 있는지 자세히 알 도리는 없었다. 한 해가 흐른 후 그가 연수원을 수료하자 내가 그를 다시 볼 일이라곤 통 없게 되었다.
올 봄 그가 정한 진로에 대한 소식을 듣고서 나는 놀랐다. 그건 분명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의 선택은 해마다 쏟아지는 적지 않은 신참 법조인들의 고만고만한 진로 선택과 선명하게 차별되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그로부터 엿보았던 ‘불만’이 결국 이런 식으로 표출된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놀라움은 호기심으로 바뀌었고, 그가 어떤 포부를 갖고 그런 선택을 하였는지 구체적인 확인을 하고 싶었다. 인터뷰는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춘다. 김정진이 지금의 김정진이 된 과정과 그 이면.
1. 술과 정치의 나날들
퍼슨웹(이하 ‘퍼’)> 실물을 뵈니 훨씬 젊어 보이시네요.
퍼슨웹 사무실에 나타난 그에게 신문 사진으로만 그를 보았던 다른 인터뷰어가 이렇게 말을 건다. 그는 나이보다 중후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듣는 모양이다. 실제 그를 보면 그가 여전히 청춘의 영역에 속해 있음을 대번에 알 수 있다. 매우 뽀얀 그의 얼굴은 젊은 수줍음을 품고 있다.
김정진(이하 ‘김’)> 이런 에피소드가 있어요. 당사에서 진보정치 기자가 자다가 절 보고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하더라구요. 알고 보니, 잠결에 제가 권영길 대표인 줄 알았다는 거예요.
그의 이 대답은 우리를 박장대소하게 했다.
퍼> 대학 다닐 때는 주로 뭐하고 지냈나요?
김> 주로 술 마셨는데요.
대뜸 그는 술, 이라고 답했다.
퍼> 술만 마셨나요? 당시의 일상 생활을 영화 찍듯이 묘사해 보실 수 있을까요?
김> 곤란한데… 제가 사시 합격한 거 보고 친구들이 놀랬어요. 다들 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오전 10시부터 술 마시기 시작해서 하루 종일 마신 적도 많아요. 술을 ‘많이’라기보다는 ‘자주’ 마셨지요. 그 때 1주일 용돈이 3~5만원이었어요. 시내버스비가 150원, 학생회관 밥이 600원 정도 했죠. 월/화요일에 이미 술 값으로 용돈을 다 탕진해 버리곤 했어요. 그 때 친구가 알콜 중독 판별표를 가져와서 한 번 해 보니까 9점이 나왔어요. 5점 이상이면 입원 치료 요함이더라구요. 중증이었죠.
퍼> 술만 먹었나요? 공부나 연애는?
김> 수업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잘 듣지는 않았어요. 학점도 나빴죠. 1학년 1학기 때만 좋았어요. 92년 여름부터 고시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전까지는 학과 공부는 제대로 안 하고 이 책 저 책 잡다하게 읽었죠.
퍼> 이 책, 저 책 보셨다면, 맑시즘 책은요?
김> 봤죠. 제일 감명 읽게 읽은 건 <공산당 선언>이구요. 정치 팜플렛은 이렇게 써야 하는 거구나 싶었죠. 1학년 때 읽었어요. 지금도 가끔 보죠. 그리고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실천에 관한 독창적 해석이죠. 자본론은 1권만 읽었어요. 어렵더라구요. 지금하고는 많이 다르지만 자본주의의 기본 틀이 뭔지 배웠죠. 이렇게 움직이는구나,발전하는구나 하는… 대부분 1,2학년 때 읽었어요.
퍼> 예전에 하신 인터뷰(2002. 4. 22. 발행 민노당* 주간신문 [진보정치] 84호 및 5월 한겨레 신문의 인터뷰**)를 보니 학생 운동 경험은 없다고 되어 있더군요.
김> 시위에 나간 적은 있었죠. 학생운동에 대한 언론 보도는 대학 입학 전에는 안 믿었어요. 근데 알고 보면, 사실 용공 맞지요, 뭐.(웃음) 들어와서 학생운동권의 실체를 알고 충격 받았어요.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어요. 이게 학생운동권에 가담 못 하게 된 이유 아닐까 싶기도 한데, 4월 15일인가 막 학교 안에서 사람들이 모여 고기를 구워 먹는 거예요. 장군님 탄신일이라는 거예요. 주점에 모여 장군님 노래 부르구. 또 하나는 과에서 민주주의가 뭐냐, 이러면서 토의하는데 선배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해야 한다고 하여 엄청나게 충격 받았죠.
퍼> 학생운동에 대해 부정적이셨군요.
김>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었다고 해야겠죠. 저는 당시 학생운동이 주체사상이나 고전적 레닌주의를 신봉하는 것에 놀랐어요. 과도한 규정성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엄밀하지 못한 인식으로부터 엄밀하지 못한 실천이 나오는 건데, 한국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것도 다 역사적 맥락이 있는 건데…
퍼> 당시 학생운동권 중에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은 없었나요? 학생운동에서 말하는 것에는 동조하지 않더라도 정말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운동하게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김> 저는 사상보다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주장을 따지자면, 이른바 좌파라는 사람들 이야기가 더 맞는 것 같았어요. 최소한 더 현대적이었죠.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별로였어요. 제게는 인간적인 측면이 더 중요한 문제였어요. 반면 NL은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 많았어요.
퍼> NL은 이른바 품성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었죠.
김> 품성이라기보다는, 운동가라면 저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자세가 된 사람들이 있었죠. 하지만 가끔씩은 하는 얘기가 황당하게 들리는 때도 없진 않았어요.
퍼> 90학번이시니까 학부 때가 한창 사회주의권 국가가 변화 내지 몰락하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정세나 상황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셨나요?
김> 말씀하신 것처럼 1991년에 소련 공산당이 붕괴했죠. 사회주의가 학내에 영향을 많이 끼친 것 같아요. 대자보에 맑스 레닌의 저작이 주로 인용되었고요. 저도 영향을 당연히 받았죠. 사회주의로 가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때 학보사에서 여론 조사 하면 반 정도가 바람직한 체제가 사회주의라고 답했지요. 그런데 학생 운동권에 선뜻 가담하기는 어려웠어요.
식민지냐 신식민지냐 차이는 있어도 당시 학생운동권의 양대 정파인 NL과 PD 공히 한국 경제가 세계 경제에 종속되었다고 사고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 경제는 이미 수준이 올라가 있었어요. 종속성을 띠었다고 보기 어려웠단 말이죠. 독점이 강화될수록 종속이 심화된다거나, 과연 식민지나 신식민지로 파악하는 게 맞는가? 제가 사구체 논쟁에 대해 책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당시 운동권의 전제에 공감하기가 어려웠어요.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었다고 해야겠죠. 운동권들 내부에서도 저처럼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당시에 용감하게 그런 말을 꺼내기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해요.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이른바 한국 사회성격 논쟁 혹은 사회구성체론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던 1990년, 김정진이 대학에 입학한 당시 신식민주의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하 ‘신식국독자론’)과 독점 강화/종속 심화 테제는 널리 복창되고 있었다. 1988년에 출판된 무크지 [현실과 과학] 제2호의 특집 <사회구성체론의 이론적 규명>에서 이진경은 “식민지적 종속의 심화가 반봉건적 관계의 강화 및 자본주의적 발전의 저지로 귀결된다는 명제가 현실에 비추어서 다시 검토되게 되고, 그 결과 종속의 심화가 오히려 독점의 강화로 귀결되었다는 명제가 현실적 설득력을 가진 것으로 제기되게 된다”고 강조했다.
한편 1980년대 후반에 지속된 저유가, 저국제금리, 저달러가치의 이른바 3저 호황은 급격한 수출증가와 높은 경상수지 흑자를 가져왔고 그 기간 동안 우리 나라는 두 자리 수의 엄청난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우리 경제의 자립성을 주장하며 독점 강화/종속 심화 테제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당시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김정진도 이에 유사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자리에서 신식국독자론에 대한 검토를 상세하게 하기는 어렵다. 다만 신식국독자론을 정립한 주역의 한 사람인 윤소영 교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도래한 20세기 말에 이렇게 썼다.
“한국 사회성격 논쟁에 대한 반성은 내가 제출했던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를 특히 아메리카-일본 자본주의의 초민족화,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금융 세계화’로의 통합이라는 개념과 연결하려는 시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른바 ‘3저 호황’ 시기에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에 대한 비판으로 제출되었던 남한 자본주의의 이른바 ‘자립화’ 테제 같은 쟁점들에 대해서도 반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는 ‘재벌의 금융 그룹으로의 전화’ 및 ’재벌의 금융 세계화로의 통합’이라는 테제, 나아가 ‘정책적 달러화’ 테제 등과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전화된 테제를 계속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로 부르는 데 어떤 유효성이 있을지 잘 모르겠다.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가 이미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 했다고 한다면, 새로운 상황 속에서 그것에 어울리는 소멸도 필요할지 모른다.” (<신자유주의적 ’금융 세계화’에 대한 마르크스적 비판의 쟁점들>, 1999)
퍼> 당대의 첨예한 이슈에 아주 민감하셨군요. 술만 마셨다더니, 원래 정치에 관심이 많았나요?
김> 음, 한꺼번에 다 설명하려니 곤혹스러운데요. 개인사적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제 고향이 광주예요. 주 어렸을 때, 세 살에 상경해서 광주에 큰 끈은 없어요. 지역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전라도 사는 전라도 사람이 더 모를지도 몰라요. 서울에 있는 호남 사람이 더 민감하게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 같아요. 87년에 고등학교1학년이었는데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으면서 광주 항쟁을 알게 되었어요. 충격적이었죠. 호남 출신은 지배층이나 자본가조차도 한이 있어요. 이 문제는 쉽게 풀리는 게 아니예요. 아버님이 공무원이셨는데 전두환 정권이 막 들어선 80년에 해직되셨죠. 집안이 늘 우울했어요.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닥쳤고요. 사람 인생 한 순간에 바뀐다는 생각이 들었죠. 뭘 사 본 기억이 없어요. 옷도 늘 같은 걸 입었죠. 제가 여의도에서 살았는데, 아주 가난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어도, 주위 아이들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 같은 게 컸고요. 주로 제 친구들은 가리봉동이나 신길동 사는 애들이었죠. 이러저러한 영향으로 일찍 정치의식화된 것 같아요. 그 때는 열혈 김대중 지지자였죠. 제가 여의도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1987년 대선 유세를 다 봤어요. 하필 김대중 유세 날 너무 추웠어요.
퍼> 아, 기억나네요. 그래서 일부러 추운 날 김대중 유세일을 잡았다는 음모론까지 제기되지 않았나요?
김> 예, 그런 이야기도 돌았죠.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는데, 사람들이 유세 보러 다 마포대교를 건너서 오는 거예요. 다들 잠바 같은 거 입고 허름하게 보이고, 제대로 입은 사람이 없었어요. 김영삼 유세 날에는 날도 풀리고 양복 입은 사람들이 많았고. 노태우 때는 버스 대절해서 동원된 사람들이었죠.
개인사에 대해 입을 열면서 그는 두어 번 “곤란한데”, 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수줍음을 타는 것일까? 술이 필요하냐고 묻자, 그는 술을 달라고 했다. 대화는 술과 더불어 계속 이어졌다.
퍼> 지금 결국 일하시는 것도 그렇고, 진보정당의 필요성에 대하여는 어떤 경로를 통해 지금의 결론이랄까 인식을 갖게 되신 건가요? 사실 변호사님이 대학에 입학하셨을 때 즈음의 운동권을 대체로 비합법 전위당 건설을 목표로 사고했잖아요. 직업적 혁명가 조직을 달라고 한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가 널리 읽혔고요. 그 여파가 워낙 강렬해서 당시 레닌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합법적인 진보정당 건설에 대해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가졌던 것 같아요.
김> 저 개인적으로는 소련 공산당 붕괴에 영향을 받았구요. 제 문제의식의 주된 점은, 한국 자본주의가 정상적 궤도에 들어서고 있었다는 거죠. 1987년의 잘못된 유산은 전민항쟁류의 투쟁만이 변화를 가능하게 할 거라고 생각하게 만든 점이라고 저는 봤어요
그런 식의 변화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즉 대의제가 정착되고 나서는 힘들죠. 자기가 뽑아 놓고 나서 뒤집기는 어렵다는 거죠. 그래서 합법적이고 대중적인 진보정당만이 유의미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학교 다닐 당시 민중당이 있었는데, 민중당 지도부의 역량은 뛰어났다고 봐요. 신철영, 지은희, 김문수, 이재오 등, 역전의 용사들이 왜 흩어졌을까요. 날고 기던 사람들이었는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87년 이후 국민에게 보여준 힘을 정치적 힘으로 결집시키지 못한 거죠. 전위정당론이 당시의 대세였죠. 조선노동당이 있는데 왜 진보정당이 필요한가라는 입장마저 있었고. 저는 민중당에 기대가 많았어요. 친구들과 함께 민중당에 대해 정리해서 글을 쓰기도 했었고요.
민중당은 당시 각각 존재하던 민중의 당과 한겨레민주당의 인사들을 주축으로 하여 장기표, 이우재, 이재오 등 재야 인사들에 의해 약 2천명 당원 및 51개 지구당을 갖고서 1990년 11월에 창당되었다.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 때 민중당은 1991년 12월에 별도로 결성된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와 통합하고서 전국적으로 51명의 후보를 출마시켜 출마 지역 평균 6.5%의 득표율을 기록하였으나,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여 당시 정당법 규정에 따라 정당 등록이 취소되기에 이르고 활동가들이 흩어지는 등 와해된다. 현재 신철영은 경실련 사무총장으로, 지은희(지하은희)는 한국여성단체연합 지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이재오, 김문수는 잘 알다시피 한나라당에 있다.
김> 92년에 한국노동당 사건이 터지고, 백태웅이 검거되고 사노맹이 와해되었고요. 이선실 사건이 나서 민중당 고문인 김낙중이 간첩 혐의 인정해 버리고 장기표 씨가 불고지죄로 구속되죠. 이런 상황이 6개월 내에 다 일어났어요. 많이 안타까웠어요. 그 때 잘 했더라면 지금 진보정당 운동이 훨씬 수월했을 거예요.
국회의원 총선과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1992년은 숨가쁜 정치의 한 해였다. 3월 총선의 결과 여소야대 정국이 조성된다. 그 전 해인 1991년 4월에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중앙위원 박노해가 구속된 데 이어, 1992년 4월에 중앙위원 백태웅 등 39명이 구속됨으로써 안기부가 625전쟁 이후 남한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최대의 비합법 사회주의 혁명 조직이라고 1990년에 발표했던 사노맹은 1992년에 사실상 와해된다. 또한 안기부는 그 해 8월에 민중당 대표였던 김낙중을 구속하고는 그가 30여년간 남한에서 암약해 온 북한의 고정간첩이라고 발표하고, 10월에는 남로당 이래 최대의 지하당 조직이라고 명명한 이른바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을 발표하여 ‘색깔론’ 총공세를 펼친다.
관련 구속자가 60명이 넘은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은 북한의 거물급 대남공작원 이선실이 직접 지휘했다고 발표되었다. 게다가 민중당 정책실장 장기표와 부인 조무하가 이선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에 고발하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불고지죄로 구속되고, 김낙중은 재판 과정에서 북한으로부터의 금전지원과 통신 회합을 인정했다. 이 사건은 당시 안기부 수사차장보 정형근이 직접 발표했는데, 월간조선 1992년 11월호를 보면 당시 조갑제 월간조선부 부장은 “국가안전기획부 대공수사국이 지난 7월 이후 넉 달 째 계속하고 있는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 수사는 10월 하순에는 정치권으로 깊숙이 들어감으로써 불과 두 달을 남겨 둔 대통령 선거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며 “김일성의 지령을 따라가는 일부 재야세력의 움직임도 드러나고 있어 이번 대선은 ‘김일성 변수’를 빼고는 제대로 전망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고까지 썼다.
2. 대장부가 사는 법
김> 91년 강경대 치사 사건 이후의 흐름을 보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왔지만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털 끝도 움직이지 못했어요. 이렇게 막 싸우면 바뀌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 난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나름대로 갖추어지고 체계가 서야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1992년에 민중당이 그런 식으로 무너지고 나서 별로 할 일이 없더라구요. 조직이 되면 참여하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막연히 가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고시를 준비했죠. 미래는 불투명하고 두려움이 있었죠. 사시가 되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친구들끼리 모여 6개월 정도 법률 운동에 대해 검토하기도 했었어요. 훌륭한 법률가라는 게 개인적으로 매력적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붙기까지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고… 불안하고 막연했죠.
퍼> 친구들과 모여서 법률운동에 대해 검토했다면, 모임 같은 건가요?
김> ‘목우회’라는 모임이 있었거든요. ‘목욕하는 친구들의 모임’이라고. 때를 잘 미는 사람을 회장으로 한다든지, 사실 코미디였는데, 잘 될 때는 60명까지 되고, 마치 새로운 학생 자치운동이라도 되는 양 법대 학생회 선거에까지 거론되기도 했어요. 선거 유세하러 오기도 하고 상당히 불쾌했죠.(일동 웃음) 지금도 그 사람들의 흐름이 있어요. 일종의 개혁 마인드가 있는 거죠.
퍼> 목우회라, 시니컬하게 들리기도 하네요. 마치 ‘목욕이나 하지, 뭐!’ 이러는 거 같아요. 그 친구들은 지금 무슨 일들을 하고 있나요? 주로 법조인들인가요?
김> 다양한 직종에 있어요. 이상한 짓 많이 했죠.특이한 친구들이 많았고.
퍼> 고시공부를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나요? ‘잃은 건 시간이고 얻은 건 라이센스’인 셈인가요?
김> 맞는 말이죠. 고시공부를 하는 동안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듯한 느낌 속에서 살죠. 다만 되기만 하면 일거에 뒤집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모순된 심리 의식이죠. 술이 낙이었어요.
일주일에 세 번은 마셨어요. 그 때 쓴 일기 보면 우울해요. 고시생들 다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우리는 인터뷰 전에 그가 사법연수생 및 법무관 시절 쓴 글과 민노당 상근 이후 당 홈페이지에 쓴 글들을 가능한 한 다 구해 읽었다. 본 인터뷰 목차 바로 밑에 인용되어 있는 대목들은 그가 쓴 글에 인용된 부분을 재인용한 것이다. 사법연수생 시절 그는 전두환, 노태우 사면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국민들이여! 사람을 죽이지 말지어다. 사람을 죽이면 최고 사형까지 당할 수 있다. 단 죽이려면 수백 명 이상을 죽여라. 그렇다면 사면될 것이다”라고 연수생 게시판에 쓴 적이 있다. 또한 교도소 방문기에는 김구의 백범일지에 나오는 “내 민족끼리의 나라에서감옥을 다스린다 하면 단지 남의 나라를 모방만 하지 말고 우리의 독특한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즉 감옥의 간수부터 대학교수의 자격이 있는 자를 쓰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는 것보다는 국민의 일행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힘쓸 것이요, 일반 사회에서도 입감자를 멸시하는 감정을 버리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한다면 반드시 좋은 효과가 있으리라고 믿는다”라는 대목을 인용해 놓았다.
퍼> 법무관 시절 인상적인 사건이 있었다면 소개해 주시죠.
김> 제가 공익 법무관 생활 첫 해를 전라남도 장흥에서 보냈는데요, 거기서 형사 사건을 주로 하면서 상당 수의 범죄는 사회적 원인에 기인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어요. 대개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부모 중 한 사람이 없거나 하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들이 최소한의 교육과 필요한 것들을 제공받는다면 확률적으로 범죄자가 되지 않았을 사람이 상당히 많을 거예요. 누구나 범죄는 저지를 수 있어요.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죠. 인간이란 욕망의 덩어리죠. 그걸 무시하고 고상한 척해 봐야 소용 없어요. 사실 누구나 잠재적 범죄인들이고 누구나 범죄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재소자 인권은 중요한 거죠. 화이트칼라들은 범죄가 자기와 관계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게 아닌 것 같아요.
김> 특히 기억나는 것으로는 붕어빵 장수 여중생 강간 사건이 있는데요. 저랑 동갑인 사람이 여중 앞에서 붕어빵 장사를 했어요. 되게 남자답고 서글서글한 스타일인데 장사하다가 애들하고 친해지고 어울리게 된 거죠. 연말에 피해자인 여자애랑 자기 집에서 과일도 먹고 술도 먹고 그러구 놀았대요. 피해자를 남자친구 있는 데까지 데려다 주다가 마음이 변해서 그만 강간을 한 거죠. 근데 이 사건 수사가 시작된 거는 피해자가 고소한 게 아니라 자기가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다가 탐문수사하다 걸린 거예요. 왜 사방에 떠들고 다녔냐구, 내가 물어보니까 자기는 한 명한테 밖에 얘기 안 했대요. 그 붕어빵 장수 여자친구도 여중생 또래더라구요. 그 여자친구라는 여자애가 매일 사무실에 와서 오빠 풀어 달라고 부탁하면서, ‘아마 걔(피해자)가 꼬리 쳤을 거’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범죄사실이 자세히 나와 있는 공소장을 여자친구에게 보여 주면서 “봐라, 니네 오빠가 이런 짓을 한 거다.”라고 한 마디 했더니 충격 먹고 한 이틀 안 오다가, 다시 나타나서 “설혹 그렇더라도 오빠만을 사랑해요” 라고 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붕어빵 장수가 나보다 낫다 싶었죠.
인간의 욕망과 범죄 가능성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 뜻하지 않게 화제는 다른 곳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더 나아가 김기덕 감독의 영화와 페미니스트들에 논하기 시작하여 급기야 논쟁이 벌어졌다.
김> 저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해 회의적이거든요.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을 다른 계층의 시각으로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되죠. 김기덕의 작품에 나름의 리얼리티가 있거든요.
퍼>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대해 그런 시각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나름의 리얼리티가 있다는 생각도 일리가 있구요. 하지만 남성 룸펜 프롤레타리아트가 저지르는 폭력의 직접적인 희생물이 되는 여성은 뭐가 되지요? 소위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의 시선을 보여 주는 건 좋지만 그게 철저히 남성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의 시선 아닌가요?
이 때 다른 ‘남성’ 인터뷰어가 이렇게 말했다.
퍼> 김기덕의 문제는 그러한 시선을 사랑이라고 환원한다는 점이죠.
‘여성’인 나는 또 이렇게 말했다.
퍼> 소위 사랑이란 게 표출되는 방식은 지극히 다양하니까 김기덕 영화에 나오는 남성들은 그런 식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도 있겠죠. 그게 사랑하는 남성의 입장에서는 사랑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는 거죠. 이것은 비단 김기덕만의 문제는 아닌데,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나 김기덕 뿐만 아니라, 모든 남성들은 계급을 막론하고 자신의 젠더적 입장에서 여성을 본다는 것이고, 여성의 입장에서는 이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김정진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으나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는 않았다.
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중산층이나 교육 받은 사람 입장에서 이런 사람들의 삶을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삶의 조건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우리 당 어느 간부 분이 옛날에 야학에 계실 때 경험을 들려 주신 적이 있어요. 조직 폭력배 출신이 야학에 나와서는 형님, 형님 했는데, 어느 날은 술 한 잔 하고 오더니 “형님, 분위기가 참 ‘낭망적’이지 않아요?”(일동 박장대소) 하더래요. 그는 ‘형사 나쁜 새끼’ 하다가도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형사 되고 싶다고 대답하는 그런 사람인데, 어느 날은 형님 대접하겠다고, 접대부 나오는 술집에 가자고 하더래요. 가는 걸 거부하니까 우리 형님은 술집 여자는 싫어하나 보다라고 여겼는지 길 가는 여자를 잡아 왔더라는 거예요. 더 질색하니까, “이상하다, 우리 형님은 여자를 싫어하네, 아, 동성애자인가 보다” 하더래요.
결국 그 사람도 노동운동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제 말은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사는 방식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거죠. 인간의 삶에는 통계로 안 잡히는 측면이 있어요. 중산층적 시각으로 봐서는 안 되는 거거든요. 말하자면 위악적 삶인데,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따져 봐야 된다는 거예요.
어린 소녀를 강간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어린 소녀로부터 한결 같은 순정을 받는 붕어빵 장수, 길 가는 여자를 잡아와 존경하는 형님에게 대령하는 조직 폭력배, 그리고 김기덕의 어두운 페르소나들. 김정진의 지적대로 특정 계급, 특히 이 사회에서 ‘저열’하게 취급당하는 계급이 영위하는 삶에 대한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한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더구나 그가 김기덕의 ‘남성’들을 무조건 긍정 또는 옹호하자는 것이 아님을 잘 안다. 그가 말한 이해란 시비를 가리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어쩌면 그와 나의 시점의 차이라면 차이는 강조점의 상이함 때문에 발생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무산계급 남성이 여성(유산계급일 수도 있고 같은 계급일 수도 있다)을 비하하거나 가해,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하려는 일체의 시도들은 아무리 뭐라 해도 내겐 ‘저열’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때 여성은, 남성에게 증오와 울분을 투사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타자, 물리력에서 밀리기 때문에 손쉽게 포획되는 열등물일 뿐인 것은 아닐까. 남성들에게, 남성의 시선에 공감하기 이전에, 혹은 남성의 시선에만 머무르지 말고, 폭력의 직접적인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여성을 주목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까.
퍼> 말이 났으니 말인데 계속 논의가 되고 있는 매매춘 폐지 혹은 공창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갖고 계신가요?
김> 일단 성매매방지법 가안에 대한 의견을 말씀드리겠는데요. 현재는 자발적 매매춘의 경우 둘 다 처벌하는데, 가안에 의하면 매춘 여성의 경우 1회에 한하여 형을 면제하고 있거든요. 이런 식으로 입법하는 건 문제라고 봐요.
2002년 7월, 여야 의원 74명이 발의한 ‘성매매알선등범죄의처벌및방지에관한법률안’, 약칭 성매매방지법은 여성단체연합 등 여성 단체 활동가들이 그 내용을 마련하고 국회에 청원하는 등 여성계의 노력 끝에 나온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 법안은 장애인, 외국인여성, 청소년 등 강제로 성매매를 강요받은 모든 이(‘성매매된 자’)들의 형사처벌을 금지시키고 있고, ‘성을 파는 자’의 경우 초범에 한하여 자수 및 관련 범죄의 신고시 형을 면제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성을 파는 자’ 뿐만 아니라 ‘성을 사는 자’에 대해서도 가정법원에 ‘보호사건’으로 송치하여 보호처분을 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이는 ‘성을 사고 파는 자’ 둘 다 처벌하는 현행 윤락행위등방지법과 다른 점이다. 아울러 이 법안은 성매매 알선을 위한 일체의 광고행위를 금지하고, 성매매 알선, 강요, 광고행위 등으로 인한 불법수익에 대한 몰수추징제도를 신설했으며, 신고자에 대해서는 불법수익의 3~15%에 해당하는 보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김> 또 매춘 여성을 보호처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그런 식의 교육이 실효가 있겠어요? 사회적으로 저열한 사람 취급하는 거예요. 강제로 뭘 어쩌겠단 말이예요. 교도소의 연장이죠. 보나마나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이불 각 잡게 개라, 이럴 텐데… 안 봐도 뻔하죠. 중산층의 시각에서 입법한 게 아닌가 해요. 자기들 남편을 매춘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건지… 매춘에 대해서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매춘 여성 입장에서 문제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매춘은 금지되어야 한다는 말만으론 공허해요. 그래도 뭔가 하자면 매춘 여성의 인권에 대해 뭘 해야 하는데, 매춘을 불법화시켰을 때의 매춘 여성의 지위라던가, 강제로 교육시키는 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불법화시킬 때 더 부작용이 클 수 있고요. 단지 불법화냐 합법화냐 갈 게 아니고…
‘보호처분’은 현행법 상 소년범이나 누범자 또는 심신장애자, 약물중독자, 가정폭력행위자 등에 대해 가하는 처분으로서 형법에 정해진 형벌 대신 특별예방적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보안 처분이다. 성매매방지법을 보면 법원이 판단하여 성매매행위자를 형벌 대신 성매매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에의 연락 및 접근 금지, 보호관찰, 일정 시설에의 교육상담위탁, 의료기관에의 치료위탁 등 보호처분에 처하게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김정진이 지적하는 바는 ‘갱생’이란 미명 하에 자행될 새로운 억압과 폭력의 가능성이다. 안 봐도 뻔하다는 그림, 나도 상상해 본다. 아니 상상 이전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사법연수생 신분으로 방문했던 여자교도소의 풍경. 작은 화분이 놓여 있던 감방, 교도소장은 교도소에 화분을 놓게 허용한 것은 대단한 혁명적 조치라고 자랑해 마지 않았다(화분이 흉기로 이용될 가능성!). 감방문마다 붙어 있는, 재소자의 성명과 죄명이 적힌 표찰, 나는 거기서 살인죄와 절도죄를 보았으며 간통죄와 사기죄도 보았다. 미용 기술을 배우는 재소자들이 있는 교도소 내 작업장에 들렀을 때, 미용 기술을 배우는 이들답게 가지각색의 헤어스타일을 한 그들은 대부분 고개를 숙인 채 자기들 앞에 각각 놓인 두상 모형에 씌워진 가발을 매만지고 있었는데, 그 중 단 한 여성이 고개를 들고 방문단인 우리를 휙 쳐다보았다. 그녀는 매우 젊었고, 아니 어렸고, 볼은 발그레했으며, 눈은, 눈빛은 호기심과 분노와 적의로 복잡하게 반짝이는 것 같았다.
퍼> 하지만 현실에서는 ‘모’ 아니면 ‘도’죠. 합법이냐 불법이냐,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없죠.
김> 현행 윤락행위방지법 하에서도 여전히 매춘을 제대로 단속 안 합니다. 사실상 합법이고 집행력 없는 형벌이죠. 화대 갖고 싸우면 경찰이 나타나 해결해 주고, 사실 국가가 관리하는 거죠. 이미 공창의 징후가 보이고 있어요. 불법으로 했을 때는 집행할 거냐, 그것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당 여성위원회*에서 계속 논의하고는 있는데, 단순히 매춘 불법으로 가 버리는 건… 그리고 과연 비자발적 매춘이 전부라고 볼 수만 있을까요? 물론 근본적으로 사회적, 구조적 원인으로 인한 비자발성이라고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냉정하게 봐야죠. 아니면 부작용만 생길 수도 있고.
퍼> 그 냉정함으로 여성위원회를 좀 도와주시죠. 여성위원회가 있다고 해서 당내 남성들이 여성문제를 남의 일처럼 여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드네요.
김> 답이 안 나오는 문제예요. 포기해선 안 되지만, 역량이 한정되어 있다면 해결 안 나는 문제를 잡고 있기보다는 다른 문제를 해결해야죠. 결과가 나오고 대안이 나올 수 있는 문제를. 매춘 문제는 우리 당의 무능력 때문에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문득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건국 초기에 김활란 등 사회지도급 여성들이 매매춘 금지 캠페인을 위해 사창가를 돌아다녔을 때, 매춘 여성들이 몰려 나와 “그럼, 니년들이 우리를 먹여 살릴 거냐? 니들은 팔자가 좋아서 그러고 다니나 본데, 우리는 뭘로 먹고 살란 말이냐?”라고 야유를 퍼붓는 바람에 캠페인에 나선 명사들이 황망히 물러선 적이 있다는. 또한 독일에서는 법원이 매매춘이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위가 아니라고 판결했고 매춘 여성이 서비스산업노조에 가입했으며 노조 대변인이 매춘 여성의 가입을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다는 소식도 생각났다. 그러나, 정육점 고기처럼 불그스름한 조명 아래 인형처럼 과장된 드레스를 입고 도열하여 자신의 육체를 시장에 내 놓고 있는 그들, 누구도 그들에게 함부로 삶의 터전을 빼앗거나 원하지 않는 갱생과 보호를 강요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들이 직업 선택의 자유의 결과로 그 일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내가 매춘을 할 필요가 없는 “팔자 좋은 년”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붕어빵 장수로부터 시작되어 매매춘까지 이른 논쟁이 대강 마무리되고 다시 본래 묻고자 했던 질문으로 돌아왔다.
퍼> 민노당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언제 쯤 하셨나요?
김> 1999년부터 2000년 초까지 공익 법무관 생활을 했는데, 첫 해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전라남도 장흥에 있었고 2000년 4월에 상경을 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많이 만나 뵙고 진로에 대해 의논을 하고 말씀을 많이 들었지요. 금속노련 분들도 뵙고요.
퍼> 금속노련에도 상근 변호사가 계신가요?
김> 2000년 당시 3명이 계셨어요. 주로 노동 사건, 집시법 위반 사건이 많지요. 근데 저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국제연대활동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여러 복합적 흐름이 있지만 아직까지는 명확한 상이 없는 것 같고요. 원래 진보정당에 관심이 많았던 탓도 있었을 텐데, 우리 당이 2000년에 창당되기 전 ‘국민승리 21′ 시절부터 관심을 갖고 쭉 보고 있었거든요. 현실적인 기반이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런저런 사람들과 많이 만났는데 제가 당에 가고 싶다고 하니까 시기상조라는 의견과 가능하다는 의견으로 나뉘었어요.
재미있는 건 운동적 흐름에 계속 동참해 온 분들은 제 의견에 동조하는 편이었는데 운동으로부터 떨어진 사람들은 시기상조 아니냐는 거였어요. 운동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보니 감이 떨어진 게 아닌가 해요.
퍼> 예전 인터뷰 보면 선배 변호사의 권유 및 소개로 민노당에 가게 되었다고 되어 있더군요.
김> 그건 아니예요. 제가 작년 9, 10월 경에 당 정책국에 연락했죠. 당을 지원했던 변호사들이 상근직은 아니었지만 정책위원회 산하 법률팀으로 있긴 했어요.
퍼> 가겠다고 하니까 당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김> 오면 좋지만 대우를 제대로 해 줄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별 개의치 않겠다고 했어요.
퍼> 판검사라든지 공직에는 관심이 없으셨어요?
김> 아버지도 그렇고 우리 집안에 공무원이 많은 편인데, 저는 절대로 공무원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렇게 살려고 태어났나, 로펌 변호사들도 그렇고, 어떻게 저렇게 사나 했어요. 저렇게 살면 저 굴레로부터 못 벗어난다, 나는 다르게 해 봐야지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리고 하면, 전적으로 결합해야지 다른 일 하면서 돕는 것 정도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일이 있으면 돕겠다고 하면서도 잘 못 돕더라고요.
퍼> 가족들의 반응은 어떠셨나요? 한겨레 인터뷰를 보니 어머니와 의절할 뻔 했다고 되어 있던데… 사실 고시공부한 사람들은 음양으로 가족들에게 신세를 지는 경우가 많죠. 그러면 가족들 입장에서는 고시 붙은 자식에게 바라는 게 없을 수 없지요. 바라는 게 없더라도 쉽게 말해 네 혼자 공부해서 그렇게 되었나, 네가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요.
김>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와 의절할 뻔 했지요. 몇 개월 정도 집에서 나와 있었어요. 아버지는 우리 당을 거의 남로당 수준으로 이해하고 계셨거든요. 대화로 해결되지가 않아요. 지금은 소강 상태고요. 대선 끝나고 보자고 하시대요. 첨엔 “지방 선거 끝나고 보자”였는데 우리 당이 예상보다 선전하니까, 아버지 말씀이 바뀌신 게 첨엔 “니네 원내 진출은 안 된다”였는데, 지금은 “니네 절대 1당은 안 된다, 영원한 3당이다” 라고 하셔요.(전원 웃음)
퍼> 지금은 다시 집으로 들어가신 건가요? 집 나오실 때를 좀 설명해 보시죠.
김>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라고 눈물 어린 호소를 하셨죠. 아버지와 다툼이 있었어요. 아버지 연배는 성공과 권력으로 모든 걸 설명하려고 하죠. 어느 날인가 또 그런 식의 말이 나와서 제가 그게 뭐 중요하냐, 그냥 살다 가는 거지 뭐, 이렇게 아버지 말씀에 시니컬하게 반응하니까. 아버지가 제게 “젊은 놈이 그런 소리나 하고 있다”고 심한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당시 이미 당 가는 건 결정한 상태에서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민 중이었는데, 이렇게 있다간 피 말리겠다, 일단 나와서 가능한 안 봐야 내가 살겠다, 싶어 가출을 했어요.
퍼> 가출하니까 아버님이 어떻게 나오시던가요?
김> 일단 가출 직후에 제가 아버지에게 먼저 편지를 보냈어요.
퍼> 그 편지에 당에 가기로 했다고 쓰셨나요?
김> 아뇨, 당 간단 이야기는 안 하고 내 나이 서른이 넘었는데 아버지로부터 그런 소리 듣고 살 수는 없다고 썼죠. 당에 가기로 한 거는 그것도 말로 안 될 것 같아서 따로 편지를 보냈죠. 매주말 집에 불려 가 다섯 시간, 여섯 시간 말 듣고 버티고 그렇게 네 달 정도 갔어요. 그 때 깨달은 게 바로, ‘버티면 이긴다’라는 거죠. 지금은 휴전 상태예요. 다음 기회를 노리시는 것 같아요.
퍼> 동상이몽 하에 동거하고 계신 셈이로군요. 형제 관계가 어떻게 되시죠?
김> 1남1녀 중 막내인데 아버지 당신이 공직에서 물러난 한이 있어 저에게 기대가 사실 크죠.
퍼> 예전에 민노당 사이트 인권위 게시판에 올리신 <결혼에 대하여>란 글이 흥미롭던데요. 조회수도 굉장히 높았죠? 결혼하실 생각이 별로 없으신 것 같던데?
김> (우물쭈물하며) 말 조심해야겠네… 안 되면 대세에 따라야죠. 제 성격 상 대안이 없으면 대세에 따르거든요.
<결혼에 대하여>는 김정진이 2002. 5. 경 민노당 홈페이지 내 인권위원회 게시판에 올린 글이다(애석하게도 사이트 개편 후 인권위원회 게시판이 사라져 현재 이 글을 민노당 홈페이지에서 찾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퍼슨웹 자유게시판의 이전 게시판에 “어느 ‘정신 나간’ 변호사가”라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제목으로 퍼 놓은 게 있으니 지금도 이 글을 독자들이 검색해 읽을 수 있다). “아버지로부터 결혼하지 않는다고 심하게 질책당하고 나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왜 결혼하지 않았는지 연혁적으로 생각”해 보게 되어 이 글을 썼다고 하는데, 그는 “사회에 대한 무책임한 시민, 자신의 이웃의 슬픔을 기초로 하여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쌓는 것이 성공의 지표인 사회, 아마도 나는 철이 들면서 이러한 점들을 극악하게 싫어했던 것 같고, 이러한 억압체계의 근저에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고 고백한다.
퍼> 무조건 대세에 따르기도 쉽지 않을텐데요.
김> 주위를 보면 20대 후반 30대 초반만 넘기면 롱런하는 것 같아요. 심심해도 혼자 잘 살고…
퍼> 부모님은 가만히 안 계실 것 같은데?
김> 괴롭습니다. 이야기해 봤자 답이 없어요.
퍼> 변호사님 글에 나오는 스콧 니어링은 좋은 동반자를 만났으니 운이 좋았지요.
김> 사진 보니까 잘 생겼더라구요. 전기를 읽을 때 저는 냉정해요. 많은 사람들은 위인전 읽으면 자기도 똑같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저는 제가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별하려고 해요.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은 선남선녀가 만난 거죠. 배 나온 인간도 스콧 니어링과 똑같이 될 거라고 안 믿어요. (일동 웃음)
퍼> 참, 독일의 외무장관 요쉬카 피셔처럼 달리기를 열심히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여의도 집에서 시내까지 뛰어다니고 그러셨다면서요? 살도 굉장히 많이 빠졌다고 그러던데요.
김> 장흥에 있을 때 거기서 엄청나게 술을 많이 마셨어요. 이렇게 살면 정말 죽지 싶어서 서울에 올라와서 달리기를 시작했어요. 그 해 4월 1일에는 500미터 뛰었고 그 뒤 꾸준히 뛰어서 8월 12일에는 10킬로미터 통일 마라톤에 나갔죠. 선수들은 20분대에 뛰지만 저는 51분 걸렸죠. 그 뒤 half 마라톤에 나가서 1시간 50분에 완주했어요. 그렇게 뛰니까 신진대사가 빨라지고 소화가 잘 되고 근력이 좋아지더라구요. 육체와 정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꼈는데, runner’s high라는 게 있거든요. 뛰면서 무아지경에 빠지는 거예요. 뇌로부터 엔도르핀이 분비되죠. 여의도에서 달리기를 할 때 옆에서 강이 흘러가는 것을 느끼면서 물아일체를 느꼈죠. 건강도 좋아지고 여유가 생겼어요.
퍼> 지금도 달리기를 하세요?
김> 당에 와서는 못 하고 있습니다. 술도 많이 먹게 되구요.
3. 나의 꿈 나의 길
퍼> 아까 말씀 중에 사회주의로 가는 게 맞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셨는데, 어떻습니까? 지금도 사회주의자신가요?(웃음) 글에 과거에는 자칭 사회주의자였다고 쓰신 부분도 있던데요. 본인의 사상이랄까, 정치적 지향은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김>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진 건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회민주주의에 가깝지요. 오늘 인터뷰하면 분명히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정리를 혼자 해 봤는데, 제 세계관은 세 가지로 요약 가능하겠는데요.
퍼> 앗, 대단하십니다, 세 가지! (일동 웃음)
김> 첫째, 의리적 세계관. 저는 의리 없는 놈 제일 싫어해요. 살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부분은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의리 없는 사람이 어떻게 대중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민중은 의리 없는 사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둘째, 운수적 세계관. 원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니다, 천기와 지기와 인기가 다 맞아야 되죠, 특히 정치에서는… 혁명이건 개혁이건 다 때가 있는 거고, 민노당은 이제 어느 정도 때는 맞는 것 같습니다. 근데 때가 아무리 맞아도 주체가 준비가 안 되면 안 되죠. 이번에 실패하면 앞으로 힘들 거예요. 이렇게 활동할 일군의 사람들이 무슨 수로 또 모이겠어요.
퍼> 실패란 무얼 뜻하는 건가요?
김> 원내 진출이 상당 기간 지연되는 걸 말하죠. 저는 ‘진진보대천명’이라고 생각하는데, 진보를 다 하고 천명을 기다린다는 거죠. 그리고 셋째, 생태적 세계관. 제가 말하는 생태주의란 욕심과 관계 있어요. 욕심을 다 채우려면 개인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유지가 안 됩니다. 모든 걸 지키려고 하면 절대 안 되죠. 버리고 죽어야 삽니다. 우리 당도 그렇게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욕망을 줄여야 해요. 우리가 하는 일은 대부분 개인적 성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예요.
그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라는 말을 반복하였다. 그 말 끝이 약간 잦아들었고 짧지 않은 침묵이 우리 사이에 흘렀다.
퍼> 혹시 채식주의자신가요? 생태주의에 관심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라도?
김> 고기는 먹어요. 사실 당에 오기로 결심한 데 생태주의적 사고가 큰 영향을 끼쳤어요. 달리기했던 것도 그렇고. 한겨레신문사에서 하는 생태주의 강좌를 2000년에 듣고 큰 감명을 받았어요. 스콧 니어링의 책도 그 때 읽었죠. 니어링도 미국의 자본주의에서 도저히 인정되지 않는 사회주의적 가치를 실현하려고 그렇게 살게 된 것이지, 처음부터 그렇게 살려고 한 것은 아닐 거거든요. 경남 산청에서 간디학교*를 하시는 양희주 씨가 강사로 오셔서 그러시는데 혼자 힘으로 뒷산에 집을 지으셨대요. 원래 인간이란 의식주를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된다고, 그것만 할 수 있으면 무서울 게 없다는 거죠. “여러분, 굶는 게 두렵습니까. 여러 번 굶다 보면 조금만 먹어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 분 말씀 들으면서 세상에 참 강호와 인걸도 많다고 느꼈고 내 욕망이 뭐고 두려움이 뭔가, 곰곰 생각하게 되었죠. 인간 본연의 욕망과 두려움이란 실체를 알면 극복할 수 있는 거죠. 두려움이란 남보다 뒤쳐지면 어쩌지, 하는 거고 욕망이란 남들이 보기에 그럴 듯한 거 하고 싶다는 건데, 그걸 알게 되니까 완전히 극복한 건 아니지만 뭔가를 하기가 수월해졌죠. 그러면서 당에 오는 결정을 하게 되었어요. 남보다 뒤쳐지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안 하니까, 남보다 더 뽀대 나는 일 해야지 하는 생각 안 하니까.
약 2년 반 전에 나는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이 쓴 책들을 누군가로부터 선물 받았다. 책을 열자 니어링 부부의 모습과 그들이 손수 지은 집이며 손수 일군 텃밭을 찍은 사진이 나왔다. 그 책들은 가치 있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다 읽지 못한 채 책장을 덮었다.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이것은 좋은 생활 방식이다. 이런 삶의 방식은 그이들에게는 훌륭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가 그 생활을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조화로운 삶>, p.208) 나 역시 그들의 농장을 방문했던 수많은 방문객 열 가운데 아홉이 느꼈다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것 같았다. 그들이 순응을 거부하고 떠난 도시와 시장, 나는 이미 그것들의 일부였고 내가 그것들을 거부할 수 있을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일어나 오라, 서둘러 오라, 우리가 도시를 내주겠다. 상인들에게, 변호사들에게, 중개인들에게, 고리 대금업자들에게, 세리들에게, 공증인들에게, 의사들에게, 향수 상인들에게, 정육점 주인들에게, 요리사들에게, 빵집 주인들에게, 재단사들에게, 연금술사들에게, 연금술사들에게, 화가들에게, 배우들에게, 무용수들에게, 류트 연주자들에게, 야바위꾼들에게, 포주들에게, 도둑들에게, 범죄자들에게, 바람 피우는 남자들에게, 남에게 빌붙어 사는 사람들에게, 이방인들에게, 사기꾼들에게, 어릿광대들에게, 대식가들에게. 이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시장 냄새를 귀신같이 알아챈다. 시장만이 이 사람들의 하나뿐인 즐거움. 시장만 다가오면 입을 쩍 벌린다.”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h, <고독한 삶>, 1356, 위 책 p.13으로부터 재인용)
퍼> 한 달에 월급을 60만원 받는다고 하셨는데, 경제적 자립 혹은 생존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없으십니까? 그리고 남보다 더 뽀대 나는 일 해야지 하는 생각 안 한다고 하셨지만, 이렇게 볼 수 있지도 않나요? 진보정당 상근 변호사직을 택한 것으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충족되었다고 말이죠. 다시 말해서 변호사님의 선택은 나름대로 뽀대 나는 일 아닌가요?
김> 음… 사실 제가 그런 점들에게 대해 많이 생각해 봤거든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는데, 경제적 자립이나 생존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히 없을 수 없죠. 영원히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다른 방식의 삶이 가능할 거라는 생각은 중요하죠. 내가 도저히 어쩔 수 없겠다고 하는 것과 어떻게든 다른 방식으로 실제 살 수 있다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죠. 그러려면 자기의 욕망 체계를 재편해야 하는데, 도시에서 누리는 것을 그대로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죠. 욕망은 사회적인 거고 강제된 측면이 있는 거고 이를 재편해야죠. 인간에게 최소한 필요한 것이란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고 얼마를 벌어야 충분한 수입인가 사실 끝이 없는 거 아닙니까. 뭐 하나 얻으면 뭐 하나 버려라, 물질적으로 편안해지려면 자유는 없는 거고 그 반대면 고단하겠죠. 옷을 오래 입으면 남루해지죠. 초라해지죠. 그거 감수하고 살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인데, 술을 먹어도 좋은 거 못 먹고 밥도 좋은 거 못 먹고. 이걸 감수할 수 있느냐는 간단하고도 복잡한 문제죠. 그걸 용인할 수 있느냐, 나는 그게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고 판단했어요. 밥은 많이 먹지만 (웃음) 거의 쓰는 거 없고 옷도 거의 없고. 제가 가진 옷이라고는 양복 단벌과 츄리닝 말고는 거의 없어요.
“나는 계속 프리랜서 교사로 활동하며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강연하고 글을 쓰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좋은데, 어떻게 먹고 산단 말인가? 죽어가는 사회질서로부터 추방당한 사람이 소박하게나마 품위를 잃지 않고 살면서, 동시에 낡은 사회질서의 급속한 소멸과 좀 더 실현 가능한 사회체계로 낡은 사회질서를 대체하는 일을 돕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친구와 지인들 가운데는 생계를 위해 화물차를 몰거나 우유배달, 신문배달을 하고, 식당 종업원이나 하역인부로, 또는 택시기사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1930년대 미국 우익의 압력 아래서 살아가는 삶의 수단으로 택한 것은 자급농이었다.”(스콧 니어링 자서전, pp.373~374)
김> 우리 당도 이젠 3당이 되었지만 아직 내부를 보면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많이 있죠. 당의 성공은 앞으로의 몇 년에 달렸다고 봐요. 원내진출하느냐 마느냐는 시민권을 따느냐 마느냐죠. 결과를 얻는 사람과 투여한 사람은 같으리란 보장이 없어요. 불특정 다수의 희생이 필요하고, 자발적 착취죠. 자기가 뭐가 되느냐보다는 진보정당의 성공으로 사회적으로 혜택이 돌아가면 좋은 거고요. 내가 여기 와서 정치적으로 출세한다 뭐 이런 게 아니죠. 내 임무는 한시적이라고 생각해요.
2004년에 원내 진출을 하게 되면 내가 하는 일도 달라지게 될 거고 외부 조직과의 관계도 정상화될 거예요. 지금 제가 뭐 그리 대단한 역할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 때는 제 역할도 많이 달라질 거구요. 그 때까지 그걸 누가 하느냐가 문젠데, 그 때가 되면 당의 외곽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1진이 나올 거고, 아직 그들은 눈치만 보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나와 줘야 해요. 진보정당 변호사가 뽀대 나는 일일 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별로 뽀대 나는 일이라고 생각 안 해요.
김정진과 인터뷰를 마친 후 나는 니어링 부부의 저작들을, 대강 펼쳐 보고 덮었던 과거와 달리, 비교적 상세히 읽어 보았다. 그들이 산 방법을 선뜻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여전히 어렵고 또 어렵다. 이렇게 질문해 볼 수도 있다. 과연 그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 외엔 ‘대안’ 이 없는가. 그러나 김정진이 지적한 것처럼, “내가 도저히 어쩔 수 없겠다고 하는 것과 어떻게든 다른 방식으로 실제 살 수 있다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낸 이들이 있기에 그들의 삶이 작은 별처럼 떠올라 컴컴한 밤하늘을 대책 없이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준다는 점도.
퍼> 의리적 세계관, 운수적 세계관이라고 본인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것도 그렇고, 쓰신 글이나 말씀하시는 것을 봐도 그렇고, 굳이 표현하자면 동양적 정서에 가까운 면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낭만주의나 민족주의,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면도 갖고 계신 것 같고요. 본인도 이러한 점을 의식하고 계신가요?
김> 제가 갖는 여러 가지 기질이 있어요. 사실 당에 맞을 수도 안 맞을 수도 있고, 조직은 어느 정도는 인간의 사고를 제약하는 측면이 있는 거고… 우리 나라에서 아나키스트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권위를 부정하는 건데 규율이 전혀 없다는 건 아니고… 어떤 부분은 정치 운동에서 풀리지 않으면 안 되는데 개인적으로 주장하는 건 의미 없죠. 우리 나라 같은 정치 구도에서는 그런 움직임들은 비정치적이죠. 전략전술이 없는 건 정치가 아니죠.
퍼> 좀 더 말씀해 보신다면, 예를 들어 쓰신 글들에 김구, 신채호, 맹자가 자주 인용되는데요. 수호지도 있고요.
김> 동양 고전을 좋아해요. 동양 고전은 사람을 조급하게 하지 않고 거시적 안목 가지게 해 주는 것 같아요. 수호지 좋아하죠. 깡패 비슷한 집단인데… 제일 좋아하는 건 사기열전이예요. 아주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죠. 학자나 정치가 뿐만 아니라 자객, 도둑까지, 수천 년 이야기인데도 내 상황에 맞는 것 같고 이런 경우 어떻게 될까 고민할 때 하나의 근거가 되어요. 김구를 인용한 것은, 김구를 존경한다기보다는 부정적으로 보지만, 인용의 목적은 김구도 이런 말을 했다는 거죠. 우리 나라의 우파 정치인들이 다 존경한다고 하는 이도 이런 말을 했다는 것, 걸출한 테러리스트이자 우파, 아마 살았다면 쿠데타로 이승만 정권을 엎지 않았을까, 김일성과도 그런 이야기를 했을 거라는 추측도 있고 김구는 풍운아적 면모가 있죠. 젊었을 때 동학하다가 국모가 시해한 것에 분개하여 술 마시다가 일본 군인을 죽이고 임시정부에서도 밀정 잡고 그런 일 하고 윤봉길, 이봉창 다 시키고, 풍운아죠. 신채호도 마찬가지고, 민족주의에 이런 측면이 있는데, 일제가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던 거고. 제가 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거예요.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통념이라는 게 사실은 우습게 형성된 거라는 거죠. 폭력주의자라는 그들도 역사책에 다 나오는데. 김구가 그런 말한 거 사람들이 잘 모르거든요. 고등학생들도 다 읽는 백범일지에 나오는 건데 사실 교수를 뽑아다가 간수 시키고 하는 생각, 사실 유치할 수 있고 유격대 국가 같고 그렇죠. 하지만 이상을 갖고 있었다는 거죠. 이런 게 좋아요. 정치적 오류는 별개로. 내가 인용한 이유는 내가 민족주의자라기보다는 멀리 갈 것도 없이 가까이에서만 봐도 우리의 통념이라는 게 얼마나 우습게 형성되었는가, 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거였어요.
그가 당 상근 이후에 쓴 글들은 주로 당 정책 및 현안에 대한 것들이지만, 그 전의 글들에는 그의 개인적 체취가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가령 그는 법무관 시절 본인을 ‘한량’이라 칭하며 이런 식으로 썼다(그는 자주 자신을 한량이라고 부르곤 했다).
“한국식 디오니소스에 대한 공상. 소주 대병(유리로 된 것이어야)을 옆구리에 끼고 다른 한 손에 낚시대를 들고 주유하며 주하고, 시원한 곳에서 자고. 소주는 열이 많으니 시원한 맥주도 좋겠다. 흑선풍 이규에 대한 공상. 수호지의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인 이규. 쌍도끼가 주무기이다. 한 번 열받으면 일가족 몰살은 보통이고, 수백명을 죽여 마을을 몰살시키기도 한다. 탈속의 공상. 속세를 벗어나 자연과 하나 되어 조화로운 삶을 사는 공상. 생필품은 자급자족하거나 아니면 걸식하고, 필요최소한의 소비만 한다. 하지만, 공상은 공상일 뿐이다. 여전히 현실은 공상을 낳게 할 뿐이다.”
퍼> 시대와 국가를 불문하고 특별히 좋아하거나 주목하는 인물이 있나요?
김> 정치가로는 아무래도 레닌이죠. 여러 가지 전기를 다 읽어 봤어요. 그가 혁명을 해서 꼭 그렇다기보다는 혁명 이후의 여러 정치적 결단을 보면, 과연 누가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잘 하고 당내 설득을 할 수 있을까 싶어요. 첫째, 4월 테제*는 기존 맑스주의 교의에 반한다면 반하는 건데, 심지어 볼셰비키도 반대했었죠. 하지만 그 상황에서 권력을 잡지 않고 어쩌겠어요. 남은 건 반동 밖에 없는데… 둘째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강화 조약** 우크라이나를 독일에 떼어 준 거잖아요. 나중에 회복하긴 했지만 우리로 치면 경상도나 전라도 떼어주는 건데 그러고도 정권이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요. 셋째, 네프.*** 만약 그거 안 되었으면 소비에트 러시아는 농민반란 때문에 망했을 거라고 하잖아요. 이런 중대한 결정들을 레닌 말고 누가 할 수 있었을까 싶거든요.
1917년 2월 혁명 이후 레닌은 망명지인 스위스로부터 귀국하자마자 이른바 4월 테제를 발표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당시, 그는 “조국에 패배를”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 즉 혁명으로 전환시킬 것을 주장한다. 이후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라는 기치를 내걸고 혁명의 방향을 분명히 하는데, 이러한 레닌의 일련의 주장은 처음에는 레닌의 지도 및 영향 하에 있던 볼셰비키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정도로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부르주아 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직접적 성장, 전화를 주창하는 레닌의 주장이 당시 원칙으로 받아들여졌던 2단계 혁명론(고전적인 맑스주의의 교의 상 부르주아 혁명의 단계가 지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및 자본주의가 숙성한 연후에야 프롤레타리아 혁명 즉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사고되었다)에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날로 발전하는 혁명적 정세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단결 및 정치적 각성을 목도하면서 당장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이란 1917년 10월 혁명 후 성립된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8. 3. 교전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과 체결한 단독 강화조약으로서 이 조약에 의해 러시아는 폴란드, 발트, 그루지야, 핀란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의 주권을 포기하였다. 당시 당 내에서 혁명전쟁을 결행하자는 부하린, 전쟁도 평화도 아니다라는 중간적 입장의 트로츠키 등 격렬한 사상투쟁이 벌어졌으나, 신생 소비에트 정권의 존속을 최우선 과제라 여긴 레닌은 러시아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각종 강화조건을 받아들이고 전쟁을 끝냈다(1919년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되찾았다).
퍼>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라고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사회주의자라고 공개하는 게 의미 있는 면은 있겠죠. 그러나, 저는 하여간 추상적인 이야기는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라고만 하면 이게 뭔지 아무도 모릅니다. 말하는 건 좋은데 선거에서는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는 거죠. 대중이 멍청하다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됩니다. 닳고 닳아서 문제지, 얼마나 냉정하고 영악한데… 문맹률도 낮고. 맞는 말 한다고 찍어주는 게 아니라, 저 놈이 실제 할 수 있느냐 보고 찍습니다. 상가임대차보호법 성공한 거는 일반 상인을 조직해서 성공한 거예요. 일반 상인들을 모아서 이러이러한 거 바꾸어야 하고 국회에 가서 바뀌어야 한다고 설명했어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 방법까지 다 설명했어요. 명도소송 들어오면 어떻게 할지 이런 것까지. 위법하지 않은 한도에서 항의하는 방법도 설명했죠. 피케팅이나 1인 시위 같은 거. 악덕 누구누구 물러가라가 아니라, 상가임대차보호법 제정하라고 하면 딱히 문제될 것도 없거든요. 실력을 보여 주는 게 큽니다. 그런 거 보여 주어야 성공할 거예요. 대중이 무지몽매하고 우리가 설득하고 계몽해야 하고, 이런 사고방식은 1910년대 러시아에서나 통할 겁니다. 거창한 추상적인 구호로 계도한다고 나서도 전혀 안 먹힙니다. 아저씨들 술 먹으면서 ‘말은 좋네, 그런데 뭐 어쩌자는 거야‘ 이럴 거예요. 사람들은 분명한 걸 바래요.
2001년 12월에 제정된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의 입안 및 시행은 민노당을 중심으로 하여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의 노력과 수많은 영세상인들의 성원에 의해 가능했던 결실이다. 주택 전세를 살아 본 사람이라면 등기를 하지 않아도 명도를 받자마자 동 사무소에 가서 전입신고를 하고 임대차 계약서에 확정일자 인을 받으면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는 경우에도 일정 정도 우선적인 보호를 법적으로 받게 됨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택이 아닌 상가건물의 경우에는 주택임대차보호법 같은 법률에 의한 별도의 보호가 없었기 때문에, 상가건물을 임차하여 사용하는 영세상인들은 일방적인 계약 해지나 임대료 인상 등 건물주의 횡포에 대해 그간 속수무책이었다. 민노당은 지난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를 통하여 상가임대차보호법 제정을 위한 캠페인을 맹렬히 전개했고, 2000. 9. 참여연대 등 여러 시민단체 등과 함께 상가임대차보호공동운동본부를 발족하였다. 그 후 동 운동본부가 공청회, 상담, 여론조사, 캠페인, 입법로비, 국회앞1인시위 등 각종 다양한 방법을 통해 운동을 조직한 결과, 마침내 2001. 10. 10. 입법청원을 하여 같은 해 말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퍼> 세무개혁에 관심이 많다고 하셨는데, 당에서 추진하는 업무상 계획과 관련하여 한 말씀 해 주시면?
김> 조세는 수단입니다. 돈을 강제로 빼앗는 거라고 볼 수도 있는데 사회보장, 사회복지를 위해 필요합니다. 사회가 이 정도는 책임진다는 합의가 필요하죠. 조세개혁의 핵심은 두 가지인데, 세금을 지금보다 더 걷어야 한다는 것과 공평하게 걷어야 한다는 거죠. 우리 나라는 GDP 대 23% 정도 세금으로 내고 있다. 27~8%인 미국보다 낮고, 복지국가는 40% 이상입니다. 스웨덴은 60%까지 내죠. 세금을 걷지 않으면 사회복지가 불가능하죠. 효율적으로 잘 써야 하는 문제는 있지만. 이에 대한 공감대가 필요한데, 쉽지는 않습니다. 세금에 대해 국가의 강제수탈과 다르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세금 징수 전후를 비교해 볼 때 소득 격차가 줄지 않습니다. 세금 징수를 통해 부의 재분배가 되어야 하는데 안 되고 있죠. 직접세의 비중이 낮고 자영업자 소득 파악이 안 되고요. 당이 개발하고 있는 거로는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을 2000만원 이상으로 낮추자는 것과 지금은 일부 대주주에 대해서만 과세하는 주식양도차익에 대해 과세하자는 게 있고, 부유세 신설이 있죠. 종토세 확대한 것과 마찬가지인데, 쉽지 않죠. 과세에 대하여는 부자만 반대하는 게 아니예요. 중산층이나 근로자들도 과세가 느는 거 안 좋아합니다. 사회복지를 확대해 피부에 와 닿는 게 있어야 되죠. 이게 안 되면 다른 당과 차별성이 없어요.
민노당 정책부장인 김정진은 대학원에서 세법을 전공했다. 현재 임박한 대통령 선거에서 민노당이 주된 공약의 하나로 내세우고 있는 부유세 신설을 위해 그가 쏟은 노력이 적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그는 당 월간지 [이론과 실천] 2002년 3월호에 <부유세 도입의 의의와 쟁점>*이란 제목의 글을 쓴 바 있고, 2002년 10월, 하니리포터와 부유세 설명을 위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간 권영길 민노당 대통령 후보가 각종 매체 토론 시 부유세에 대해 수 차례 설명하는 등 민노당이 부유세 선전을 위해 전력을 기울여온 결과, 이제 부유세가 일반에 전혀 낯선 개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민노당 홈페이지의 [부유세 10문 10답]은 “1. 부유세는 부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감 때문에 나온 세금이 아닌지? 2.소득세도 있고 재산세도 있는데 부유세까지 부과하면 이중과세가 아닌지? 3. 부유세 과세 최저 요건을 10억원으로 했는데, 이는 적은 재산에 과세하는 것 아닌가? 서울 거주 중산층들은 집 한 채 있으면 10억 원이 된다. 4. 부유세로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가? 5.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대로 종합토지세, 재산세를 강화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가?” 등 국민들이 의문을 가질 만한 사항에 대해 문답식 설명을 하고 있다. 간단히 살펴 보자면, 부유세란 프랑스, 스위스, 노르웨이 등 복지국가에 속하는 유럽연합 8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세금으로서 10억 원 이상의 자산을 과세대상으로 하는데, 여기서 10억원은 과세표준(공시지가)를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시가보다는 훨씬 적다고 한다. 또한, 민노당에서 추산한 바에 의하면, 10억 원 이상 재산 소유자는 2만 명에서 5만 명 정도로서 전 국민의 0.04%에서 0.1% 정도 밖에 안 되고, 참고로 우리 나라보다 훨씬 부국인 프랑스에서는 8억 원 이상 상당액에 부유세를 부과하고 있다고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민노당 홈페이지를 직접 찾아 보길 권한다.
퍼> 아까 말씀하시기를, 본인의 당에서의 역할이 한시적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렇다면 변호사님이 중요한 마지노선으로 설정하고 계신 2004년 총선 이후에 변호사님의 역할이나 거취에 어떤 변화가 올까요? 그리고 만약 그 때 당이 원내 진출에 실패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김> 글쎄요. 만약 실패한다면… 안 되면 할 수 없지만, 그 때 안 되면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뭐, 몇 년 후를 미리 계획하고 사는 사람도 아니고, 아주 나중에는, 변호사를 하기는 하겠지만 변호사 생활은 한 10년만 하다가 근력이 남아 있을 때 농사를 지으며 살아 보고 싶어요.
4. 후일담 – 민주노동당이 처한 어려움,
그리고 대통령 선거
김정진과 인터뷰를 한 때로부터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12월이 되었고 대통령 선거는 얼마 남지 않았다. 노무현과 정몽준 간에 단일화 합의가 이루어진 날의 바로 다음 날, 인터뷰를 정리하던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근황을 물었다. 주위가 시끄러웠다. 바쁜 와중에 갖는 술자리라고 했다. 그는 자신을 5분 대기조라고 표현했다. 노무현으로 단일화가 되는 바람에 민노당으로서는 불리해지지 않겠느냐고 묻자, “안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우리가 가는 대로 가는 겁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2002년 3월에 이미 그는 내가 방금 한 질문과 같은 질문을 예상하고 답변을 준비해 놓기라도 한 듯 당 게시판에 <당이 처한 어려움>이란 글(지금도 남아 있으므로 자유게시판에서 찾아 읽을 수 있다)을 썼다. 그 글은 “아마도 노무현 지지자들은, 마치 97년 김대중 지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민노당에게 후보사퇴 압력을 가하면서 온갖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로 시작하여 다음과 같이 끝난다;
노무현 지지자들로부터는 우리의 정체성이 노무현과 다른 것이 무어냐고 끊임 없이 공격당할 것이고(조금 억울한 일이다. 당은 그 강령이 공개되어 있고, 상당한 분야의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밝혀왔다. 이만큼 자신의 입장을 많이 밝힌 정당이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이 빈약한 몇몇 정치인을 지지하는 자들이 우리 당에 대해서 정체성 운운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흔들리는 당원들은 노무현 쪽으로 자꾸 쏠리게 될 것이다.
어려워질수록 중요한 것은 미래이다. 우리 당이 당답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원내진출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노무현 지지자들이 우리 당을 무시하는 것 또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마음껏 비웃게 하라. 총선에서 2%도 못 얻고, 온갖 구박을 당하는 당이지만, 그 속에서 계속 단련되어 왔다. 2년 남은 총선, 그 때까지 당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그 때까지 당직자들과 당원들은,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대장정을 하는 심정으로 임해야 한다.
어찌 보면 우리 당원 모두는 일정 정도 소모품일지도 모른다. 진보정당의 기초를 닦는 데에 자신의 노력을 투자하지만, 그 결과는 자신에게 돌아오지도 않고, 성공보다는 끊임없는 실패로 점철되어 실망 속에서 포기하기도 하고, 그 자리를 누군가 다시 메꾸어 자신의 노력을 또 투여한다. 그 열매는 후세들이 취할 것이다. 오랫동안 산길을 가다보면 신짐승, 들짐승, 잡짐승들이 출몰하기 마련이다. 일일이 신경 쓰다가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다.
민노당이 “당답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원내진출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 때문에 노무현 지지자들이 민노당을 “무시”한다는 김정진의 분석에 논란의 여지는 있다. 합법적인 정당 활동만이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의미 있는 정치 활동이라는 그의 기본적인 입장에도. 민노당의 원내 진출이 – 그는 이를 “시민권을 얻는 것”에 비유했다 – 이 세상을 또한 민노당 자신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변화와 성과는 기대와 노력에 비해 실망스러울 정도로 눈에 뜨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당 상근자가 되기로 결단했을 때 결심한 바대로 민노당이 2004년 총선이란 시험대에 오르기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다짐한 것 같다. 맑스가 남들이 뭐라건 제 갈 길을 가라고 한 것처럼,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당이 처한 어려움과 동시에 그라는 개인에게 쏟아질 고초들을 돌파해 나갈 작정인 듯하다. 대통령 선거 끝나고 보자는 그의 아버지는 민노당은 영원히 3당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했다지만, 어떤 3당이 될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김정진, 그가 그의 바람대로, 먼 길을 가야 하는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의 행군에서 한 알의 밀알로, 미래의 농사를 위한 종자로 남김 없이 쓰이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그의 남다른 선택에 경의를 보내는 바이다.
“농부는 굶어 죽을지언정 내년 농사에 쓸 종자는 먹지 않는다고 한다. 종자를 먹는다면 농사꾼은 아무런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굶어 죽을지언정 한국 사회 비젼을 위한 종자를 쌓아둘 각오를 하고 있는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정당의 배부른 사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를 재조직할 수 있는 헤게모니를 쥔다는 꿈 없이 올바른 성인이 될 수 없다. 그 꿈을 위하여 굶더라도 투자하지 않으면 고난의 행군은 종착점 없는 고통스러운 과정일 뿐이다.” – 김정진, <민주노동당과 대선>, [이론과 실천] 200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