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각 –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

소설가 교수 최성각에 대한 기억은 학교와 강의실에 머물러 있었다. 맥주 마시고 담배 피우며 강의 듣기, 악수 할 때 손가락이 부서져라 잡는 손, “열심히 해라. 열심히!”를 입에 달고 사는, 검은 뿔테 안경의 지독한 학구파의 모습. 나중에야, 파격적인 강의로 재주 없고 능력도 밑바닥인 우리에게 ‘무릇 소설가란 저런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문학청년의 모범으로 우뚝 서더니 바람처럼 ‘휘리릭’ 히말라야로 사라졌다.

첫 수업시간이었다. 그는 자기소개를 한다며 칠판에 주소와 삐삐번호, PC통신 아이디 ‘ikik’를 적어놓았다. 그리곤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 내가 여기에 갇혀 있구나.”

 

소설가 교수 최성각에 대한 기억은 학교와 강의실에 머물러 있었다. 맥주 마시고 담배 피우며 강의 듣기, 악수 할 때 손가락이 부서져라 잡는 손, “열심히 해라. 열심히!”를 입에 달고 사는, 검은 뿔테 안경의 지독한 학구파의 모습. 나중에야, 파격적인 강의로 재주 없고 능력도 밑바닥인 우리에게 ‘무릇 소설가란 저런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문학청년의 모범으로 우뚝 서더니 바람처럼 ‘휘리릭’ 히말라야로 사라졌다.

 

스승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뭐라고 말을 시작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인터뷰 요청 전화가 아닌 안부전화로 연막을 터트려 놓고 나중에 이 메일로 기습을 했다.

 

홍대 앞에서 넋을 놓다.

 

 

전날 약속을 잡아놓고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이하 ‘풀꽃세상’)이 있는 홍대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풀꽃세상 간사분이 “최선생님은 지금 지방 출장 중인데요.”라고 한다. 분명 전화 통화에선 그런 말이 없었는데, 잊어버리기라도 하신 걸까. 그럴 리 없다고 수 차례 이야기 해보았으나, “오늘은 분명히 오지 않으시고, 오시더라도 새벽에야 도착하신다.”고 한다. 아마 내일 탑골 공원 집회 하는 곳으로 출근할 것이라고…
홍대 앞 교차로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오후 다섯 시가 지났는데 바람은 없고 땀이 비 오듯했다. 역시 스승을 만나 인터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 집으로 와서 메일을 확인했다.

 

“그딴 것 하지 말자. 그냥 만나서 콩국수나 먹자. 되게 오랜만이구나, 그치?”

 

 

 

자연은 대변자가 없다

 

지난 7월 25일 새벽, 북한산 관통터널 저지를 위한 농성장에 130명의 폭력배들이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다음날부터 이 사태를 규탄하기 위해 시민단체 집회가 열렸다. 최성각 선생은 집회 장소로 출근할 것이고, 가서 기다리다보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만나는 곳이 카페든 집회 판이든 어떤가. 만나기로 했으니 날짜가 중요한 건 아닐 것이고.

 

7월 30일 화요일, 집회 준비모임을 열시 전에 한다고 했는데 어째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기자들만 오간다. 최성각 선생은 집회 시작 오 분전에 웃으며 도착했다. 처음에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 하고 어느 신문사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다 곧 나를 알아보고 반가움과 감회가 뒤섞이는 것 같았다. “아니, 너구나! 야, 반갑다. 내가 학교를 떠난 지 몇 해 만이지?”

 

하지만 그는 곧 집회에 참석해야 했고, 집회가 끝나고 만나기로 했다. 북한산을 관통하는 ‘서울 외곽 순환도로 건설 저지’를 위한 농성장에 난입한 폭력배들의 정체를 밝히고 진상을 규명하며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기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대 집회였다. 꽤나 많은 환경단체가 참석했다. 탑골공원의 노인들은 오늘 또 무슨 일인가 하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슬픈 우리 시대,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 최성각, 풀꽃세상 연대사  

 

사회는 언제나 대변자가 있습니다. 경제 또한 대변자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연은 대변자가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환경운동 하는 사람들의 역할과 위치가 정립됩니다. 자연의 대변자는 공생의 가치를 느끼고 스스로 낮아지려는, 바로 여기 모인 환경 운동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들이 깊은 밤, 정체 모를 괴한들에게 기습을 당했습니다. 괴한들은 병원에서 막 퇴원한 스님의 입을 틀어막고, 한 젊은 예술가의 가슴과 머리에 쇠파이프로 무수히 내리쳤으며, 밧줄로 온몸을 포박하는 치욕을 안겨주었습니다. 종파와 교리를 떠나, 존중받아 마땅할 성역을 모욕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폭력 앞에 무대책, 모욕 앞에 무방비의 능력밖에 없는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과연 최선을 다해 운동을 하고 있는지, 혹시 우리의 진정성이 부족하지나 않았는지, 우리가 습관적인 운동에 빠져 있지나 않았는지 자성하게 됩니다. 시민들의 불감증에 혹시 우리들의 책임은 없는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슬픈 우리 시대,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이 되풀이되는 폭력과 무관심에 우리 모두 책임이 있습니다.

 

 

최성각은 용역깡패들에게 습격을 당한 수경스님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평소 폭력에 치를 떨던 사람이었다. 그의 눈매는 더욱 매서웠고 연설 도중에는 음성이 가늘게 떨리기도 했다. 집회가 정리되고 YMCA까지 행진했다. 그는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와 담배를 권했다. 사제간의 맞담배질이다.

 

최> 수경스님 하고는 참 인연이 깊지. 뭐 하루 이틀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지> 언제부터 알게 되셨나요?

최> 그게 2년 전 여섯 번째 풀꽃상을 ‘지리산의 물봉선'(본상)에게 ‘드리고’ 실상사의 세 스님(도법, 수경, 연관 스님)께는 부상을 드렸는데, 그때 만나게 되었어. 어서 일어나셔야 할텐데.

 

집회장에는 그를 알아보고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때문에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최성각은 그저 활짝 웃으며 ‘아, 그래요.’ 하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인사하고 이야기를 한다.

 

최> 야, 여기선 이야기하기 힘들겠다. 그 얘긴 방에 가서 하자. 오는 길은 알지? 풀꽃 방 사이트 들어가면 거 약도 있거든. 찾아서 와 봐. 좀 있다 보자, 응?

 

피카소 거리라 부르는 곳 근처에 있는 풀꽃 빌딩은 담쟁이가 건물의 반을 덮고 있었다. 그 위에 지렁이에게 상을 드렸다는 문구가 적혀있고 커다란 지렁이 한 마리가 건물을 타고 올라가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단체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싶은데, 근처 건물들도 기이하게 생겼으니 미학적 시각이 부족한 분들, 그 동네 가는 것이 심히 걱정된다.

 

건강해 보이는 분이 생글생글 웃으며 맞아 준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무슨무슨 풀씨라고 부르는데 낮에 집회장에서 봤던 풀씨분이 디지털 카메라에 담은 것들을 부지런히 옮기고 있었다. 주변이 대학 총학생회 사무실 같기도 하고 마감이 임박한 글쟁이 방처럼 주변이 어수선하다. 끊임없이 전화가 오고, 정 대표가 부르고, 일하는 풀씨들이 물으러 오는 통에 녹음기를 들었다 놨다하고 대화는 자꾸만 끊긴다. 인터뷰가 참으로 어수선하다.

 

 

최> 주변이 좀 어수선하지? 이사한 지 얼마 안 돼서 말이야. 정리 할 것도 많고.
지> 아뇨. 생동감 있어 좋아 보이는데요. 학교에 계실 때 보다 더 좋아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최> 그래? 내 얼굴이 좋아졌나? 사람들은 내 인상이 좀 날카로워 보인데. 잠깐만, 사진 찍으려면 안경을 써야 하거든. 가만있자 내가 안경을 어디다 뒀더라.

 

그는 책상에 수북하게 쌓인 자료와 책 속에서 안경을 찾는다. 식물도감, 멸종위기에 놓인 동물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고 한 귀퉁이에 ‘앙성 복숭아’라고 적힌 박스가 차곡차곡 올려져 있다. 분주히 안경을 찾던 그를 정상명 대표가 불렀다. 그는 정 대표와 이야기를 하느라 한참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간한 글쟁이 방처럼 어수선하다.

 

최성각은 1955년 강릉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76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198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 <잠자는 불>, <택시 드라이버>, <부용산>, <사막의 우물 파는 인부>가 있다. 건양대 겸임교수, 중앙대, 명지대 강사. 현재는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의 사무처장이다.

 

 

환경운동을 왜 하냐고?

아름다운 곳에서 자랐기 때문이지.

지> 탑골공원 집회장에서부터 이곳 풀꽃 방에 들어올 때까지 느낀 거지만 상당히 바쁘신 것 같습니다. 만나 뵙기도 좀 힘든 것 같고요.
최> 풀꽃세상이 점점 알려지고 회원이 늘어나면서 할 일은 점점 많아져. 일을 나눠서 해야하는데 일손이 부족하니까 점점 바빠지는 것 같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뭐.

지> 어떻게 풀꽃세상을 만들게 되셨나요?
최> 여기 대표로 계신 정 선생님(정상명 대표)하고는 11년째 알고 지내는 사이야. 후배하고 출판사 열려고 방 구하다 알게 된 사이지. 나중엔 누님처럼, 나이 든 친구처럼 가끔씩 만나오다가 1999년에 함께 일 하게 되었어. 정 선생님께서 따님이신 풀꽃(초영)을 사고로 잃으신 뒤에 “남은 생을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겠다. 최 선생님, 도와달라”고 하셨거든. 그래 내가 “환경운동이 화급한 일입니다.”라고 했지. 그리고는 둘이서 환경단체 풀꽃세상(
www.fulssi.or.kr)을 만들고 지금까지 오게된 거고.

지> 여기서 하시는 일은?
최> 내 이름 앞에 사무처장이라고 붙여놨어.

 

지> 왜 환경운동을 시작하셨어요?
최> 왜냐고? 아름다운 곳에서 자랐기 때문일 거야. 난 강릉에서 태어났어. 뒷도랑에서 미꾸라지며 가물치도 잡고, 큰 개울이었던 남대천에서 꾹저구(?) 하고… 꾹저구 알아? 미꾸라지, 은어, 자라 같은 걸 잡으며 자랐어.
온 세상이 고향처럼 아름다운 줄로만 알았는데, 나중에 커서 이 땅 여기저기 그리고 배낭 매고 다른 나라들을 돌아다녀 보니까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 고향 자연은 특별히 아름다운 곳인 거라. 가끔 누가 나에게 왜 환경운동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아름다운 곳에서 자랐기 때문일 거라는 대답을 하곤 해. 그 아름다운 곳이 망가지는 것을 봤기 때문이지.

 

처음에 ‘꾹저구’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고서야 그것이 몸길이 12cm 가량의, 담수에 사는 망둥어과 민물고기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꾹저구 하다’는 것은 꾹저구를 잡는다는 뜻일까? 아무튼 어린 시절을 촌 동네에서 보냈던 것이 그가 자랐던 주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맑은 바람소리나 아늑한 산, 물 반 고기 반이었던 강까지. 물론 도시에서는 그런 것들 대신 정겨운 골목길이나 사람냄새 나는 것들일 수도 있겠다.

 

지> 저도 강원도가 고향인데 선생님만큼은 아니더라도 제가 태어난 고향이 정말 아름다운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요즘 들어 더 드는 것 같습니다. 객지 생활하니까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최> 그래. 네 고향이 영월이지. 맞아.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지> 선생님 어렸을 적 이야기 좀 해주세요.
최>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돼지를 스무 마리 정도 키웠어.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으니까 1966년인가. 시내 옥천동 남대천 가에 있었던 돼지막에 꾸정물을 퍼 날라 돼지 밥 주고 그랬지. 어느 날 아버님이 갓 태어난 새끼 돼지 한 마리를 강에 버리는 거야. 어미돼지 젖은 열 두개인데, 돼지는 열 세 마리가 태어나 그 중에서 가장 약한 돼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그런데 어린 내게는 그 모습이 아주 충격적이었어.
아버님이 새끼 돼지를 버리던 날 밤에 내가 몰래 나가 아직 떠내려가지 않은 새끼 돼지를 구해서 돼지 막사에 도로 갖다 놨어. 그런데 다음날 아버님은 그 돼지를 다시 버리시더라고. 그런 아버님의 모습을 보니까 분하기도 하고 돼지가 불쌍하기도 해. 그래 소년조선일보에 우리 아버님을 고발하는 글을 써서 응모했는데 이게 입선이 된 거야.

지> 돼지도 충격이겠지만 글이 입선된 것 때문에 난감 하셨겠어요. 선생님께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최> 그땐 어려서 아버님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아. 그래도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생이 될 때까지 아버님의 돼지 키우는 일을 도왔어. 서양 애들처럼 말한다면, 나이 드신 아버님은 내 친구이기도 했으니까. 무학이셨던 아버님은 순전히 그분의 생활과 인격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셨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책을 쓰고 박사는 아니었지만, 스콧 니어링 같으신 분이셨지. 자신에게 남몰래 엄격했고, 타인들에게 관대하고 그런…
나중에야 내가 변변찮은 글쟁이가 되었는데, 이청준 선생님이나 박완서 선생님처럼 어머니가 아니라 그렇게 된 건 순전히 아버님 때문이라고 생각해. 만약에 전쟁이 나서 전선에서 총알받이로 허벅지에 재수 없이 총이라도 맞게 되면 ‘어머님’ 하고 부르짖을 게 아니라 ‘아버지’, 하고 부르짖을 게야. 틀림없이.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일생 동안 흘릴 눈물의 80%는 다 흘렸기 때문에 이제 남은 눈물은 얼마 안 될 것 같아. 6월항쟁 때, 한열이 죽었을 때 연세대에서 시청광장까지 걸어가며 펑펑 운 것이 3%였다면, 유신시절 때없이 찔끔찔끔 흘린 눈물이 5%, 떠난 여자들 때문에 흘린 눈물이 또 몇 퍼센트, 그래서 흘릴 눈물이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지.

지> 삶의 밑바탕이 되셨던 거네요.
최> 그런 것 같아. 아버지 콤플렉스 같은 게 내 밑에 깔려 있는 것 같기도 해.

지> 환경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때는 언제부터인가요?
최> 잠깐 얘기했지만 고향이 망가지는 걸 보면서부터 일거야. 그때는 고향에서 횡단보도 없이도 느릿느릿 고무신 꺾어 신고 걸어가도 되었거든. 차가 사람을 기다렸고 마을에 몇 발자국 걸으면 다 아는 사람이었는데, 원시공동체까지는 아니지만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살 수 있었던 ‘느림의 가치’가 존재했어. 조금 자라서 대관령이 뚫리고 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 공사가 벌어지는 걸 봤어. 그때는 그 일이 아주 큰 사건이었어. 눈 덮인 대관령의 신비가 끝장나는 순간이기도 했고. 느릿느릿 걷던 고향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빨라지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에서는 이상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해. 고속도로가 나면서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고,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입에 자주 올리는 이야기들은 죄다 ‘발전’ ‘개발’이고 어른들의 얼굴에 흥분이 감도는 것 같았거든. 소비가 부추겨지고, ‘잘 산다’는 게 ‘돈을 많이 가진 것’ 하고 같은 말로 쓰이기 시작하더라고. 그 즈음, 고향을 떠났어.

지> 그럼 본격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해서 글을 쓰신 건 그때부터네요.
최> 확실하게 ‘이때다’ 라고 말하긴 그렇고 쓰게 된 건 훨씬 나중이라고 봐야겠지. 81년에 낙동강 발원에서 부산 구포까지 뗏목으로 노를 저어 내려가 본 적이 있었어. 그때 강은 심하게 오염되어서 있어서 허리가 휘어진 기형어, 죽은 철새들을 목격했지. 당시만 해도 환경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니까. 나중에 그걸 강원일보에 연재했고.

그의 글이 ‘생태소설’이라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1989년, ‘작가세계’ 두 번째 권에 <약사여래는 오지 않는다>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1992년에 상계 소각장 건설 반대 운동을 하고 ‘녹색평론’과 여러 환경 매체에 글을 기고하면서 이 소설가의 환경운동은 시작한다.

지> 대학 때는 어떠셨어요?
최> 아주 나쁜 시절이었어. 맨날 밤에 가위눌린 듯한 꿈을 꾸었어. 키 작은 ‘가짜 사무라이’ 한 분이 평생 이 땅 대통령을 차지하겠다는 게 너무나 이상스럽고 해괴한 일이었거든. 할 수 있는 가능한 방식은 술집에서 그 어이없음에 기염을 토하는 것뿐이었어. 80년대 애들이야 거리로 뛰쳐나갈 수 있었지만, 70년대 유신시절에는 그게 가능하지 않았거든. 어줍잖은 글을 써서 허락되는 대로 학교 이런저런 지면에 은유적으로 썼어. 나중에 내가 무슨무슨 시꺼먼 리스트에 올랐더라고. 대학 다닐 때 기관원들이 우리 집을 들락거리면서 책상서랍을 뒤졌고, 내가 지닌 책의 목록을 적어가곤 했어. 갖고 있는 책이 곧 그 사람의 생각이라고 성급하게 간주한 그 애들이 제일 두려워한 게 반(反) 박정희였잖아.
70년대 중 후반에 내가 다닌 학교 블랙 리스트에는 나하고 2명 더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 약대생 이었던 한 사람은 나중에 건강사회약사회를 만들더라고. 다른 한 학생의 소식은 모르겠고.

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이네요. 참, 광산촌에도 잠시 계셨단 이야기는 예전 우찬제 선생님께 들은 적이 있거든요?
최> 대학공부 마치고 그곳에서 교사생활을 했었어. 서울에서 다니던 대학 전에 먼저 나온 학교 요구가, 하사 계급장 주고 소집해제로 병역을 필하려면 5년 동안 교직복무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거기서 박정희가 죽었다는 걸 들었지. 세수를 하다가 들었는데 갑자기 찬물에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는거야. 가위눌리고 신음하고 어둡던 20대가 그렇게 마감되더라고. 우찬제 선생님은 좀 나중에 알게 됐어. 그때 그분이 대학 신문 기자 하실 때였을거야. 광산촌 취재를 하러왔는데 그때 만나서 밤새 소주도 마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면서 지금까지 알고 지내게 된 거지.

지>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최> 오랫동안 연애를 했었는데 내가 광산촌에 있다는 이유로 끝장이 났어. 그리고 한참 뒤에 참하고 착한 여 선생님과 결혼을 하고, 딸애를 낳았지. 그리고 좀 있다가 대학 때 가깝게 지내던 선배가 잡지 창간하자는 전화를 하더라고. 그 전화 받고 나서 아내랑 함께 사표를 내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 84년께에. 그땐 그야말로 잡지 춘추전국 시대였어. 잡지사는 보기 좋게 허물어졌고 난 6개월 정도 일했나? 그러다가 곧 사표 냈어.

지> 생활도 생활이지만, 주변에서 바라보는 눈도 있었을 텐데.
최> 하하, 그랬지. 하루는 시골에서 장모님이 서울에 올라셨는데 셋째 사위가 추리닝 바람으로 책만 가득한 집에서 타자기나 톡톡, 치고 있는 게 영 불안했는지, 가실 때 찔끔찔끔 우시더라고. 당신 셋째 딸 때문이었었나 봐. 그래 “내가 어머님, 전 지금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시려면 우리 집에 다시 오지 마십시오.” 라고 했어. 그땐 참…

지> 글쓰는 사람들 재택 ‘근무’하는 건 남들 눈엔 맨날 노는 걸로 밖에 안 보이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나중에 작가가 되셨잖아요.
최> 한 번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긴 했지만 중앙 일간지 통해서 한 사람의 작가로 등단한 건 86년이었어.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이었고. 그 내용이 76년에 실제로 일어났던 광산촌 집단히스테리 현상인데 내가 살면서 체험한 것에다가 살을 붙여썼지.
당선 알리는 전화를 받았던 날에 어머님께 그 소식 알리고 어려울 때 걱정해 주신 분들하고 점심 먹으려고 했더니만 집에 쌀이 떨어진 거야. 13평 연탁 화덕 아파트 구들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냉기가 쫘악 흐르고 방엔 둘째 딸애 기저귀가 펄럭이더라고. 그때…

지> 나중엔 형편이 좀 나아지셨나요?
최> 무슨, 나중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아무나 만나고 그러면서 직장생활에는 적응을 못했어. 길고도 긴 보람찬 ‘날건달’ 생활이 시작 된 거지. 아휴, 다시 떠올리기도 끔찍하다. 생략하자.

 

그 보람찬 ‘날건달’ 생활의 잔재가 우리에게 전달 된 것 같다. 강의 하다가 빙 둘러앉은 학생들이랑 맥주 한 캔씩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웃고 그랬다. 유난히 깨끗함을 강조하는 학교에서 그는 그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히말라야로 떠난 것이 아닐까.

 

풀꽃세상

 

지> 들어오는데 풀꽃빌딩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렁이에게 풀꽃상을 드렸습니다.” 라고 써 있고 지렁이도 한 마리 달려 있던데요.
최> 지렁이에게 환경상을 ‘드린’ 단체의 사무국이 있는 건물이니까, 사람들이 ‘지렁이빌딩’이라 부르는 것이야.

 

지>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에서 하는 일이 뭐죠?
최> 새, 돌, 풀, 지렁이 등에게 풀꽃상을 `드리는’ 방식으로 운동을 하는 환경단체지.

 

지> 상을 주는 게 아니라 ‘드리다’니요?
최> 식물이라는 게 그냥 살아서 숨만 쉬는 게 아니라, 자기들끼리 다른 생명체하고 서로 교감도 나누고 하는, 사생활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해. 자기네들의 혼과 개성을 부여받은 창조물 인 거지. 그래서 우리가 풀꽃상을 준다고 하지 않고 ‘드린다’라고 한 건 마땅한 일인 거고.

 

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동등한 관계회복이란 말이지요?
최> 대등한 관계라기보다 서로 의존하는 관계라는 말이 옳겠지. 사람은 자연의 일부일 뿐인데 산업화사회를 맞이하면서 인간의 오만이 극에 다달아 자연의 주인인양 뻐기며 온갖 어리석은 파괴를 일삼고 있잖아. 이런 무례한 태도는 우리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무례하고 난폭한 태도라 할 수 있어. 그래서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하자.” 라고 말하게 된 것이지. 가장 중요한 말이 아닐까 싶어.

 

지>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은 주로 온라인 내에서 운영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온라인 공동체인데 여느 곳하고 다르게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최> 온라인으로 만난 회원들이 결국에는 오프라인에서 만나지. 회원들끼리 서로 형제애 같은 걸 느끼는 시민단체는 우리나라에 풀꽃세상밖에 없을 거야. 우리 일꾼들은 회원을 섬겼고, 회원들은 그 섬김의 진정성을 믿자, 폭발적인 에너지를 표출하신 셈이지. 그래서 풀꽃세상은 한국 시민단체들 모두 도달하려고 하는 ‘시민있는 시민단체’를 모범적으로 실현한 셈이야. 회원(시민)들이 바로 단체의 주인이고 참여자라는 의식을 우리 회원들은 지니고 있지. 참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어.

 

지> 이장님 하고 부녀회장도 있던데요.
최> 온라인 상에 ‘풀씨마을’ 이란 게 있는데, 마을이 있으니 당연히 이장님과 부녀회장님이 계신 셈이지.

 

지> 그것 말고도 고물상, 장터 같은 것은 어떤 의미로 만들어진 거죠?
최> 고물상은 잘못 구매한 물건들, 지금은 안 쓰지만 누군가 더 쓸 수 있는 물건들을 온라인상에서 거래하고, 실물을 주고받는 재활용운동인 셈이지. 장터는 오염되지 않은 먹을거리, 혹은 귀농해서 유기농 짓는 회원들의 땀의 결과물(농산물들)들을 다른 회원들이 아주 비싼 값으로 고마워하면서 나누는 장이고. 그 밖에 독서토론방도 있고, 채식방도 있지. 모두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야.

 

 

풀씨마을이라는 공동체(http://www.fulssi.or.kr/fultn/profile1.htm) 안을 들여다보면 마을회관도 있고 주책바가지 이장 갈풀, 부녀회장 푼수풀, 작명소장 풀 등의 체계도 잡혀있다.

 

지> 홈페이지 운영은 직접 하고 계시나요? 카테고리가 많아서 운영하는데 손이 많이 갈텐데요.
최> 처음엔 아무 것도 모르고 순전히 배워서 만든거야. 보기에 좀 그렇지? 아직은 내가 운영자인 셈이야. 하지만 우리 홈페이지는 2,500여 회원들과 같이 만들어 가는 모두살이(공동체)이지. 어떻게 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겠어?

 

지> 여긴 각자 이름 대신에 무슨 ‘풀씨’라고 하는 별명을 불러 주는 것 같습니다. 아까 보니까 선생님을 ‘그래풀’이라고 부르던데 어떻게 생긴 이름이죠?
최> 내가 평소 입버릇이 “그래, 그래, 잘 될 거야!” .그런 말을 자주 쓴 모양이야.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고, 그게 아이디가 된 셈이지. 정상명 대표는 손도 크고 발도 크다고 ‘왕풀‘이라는 이름을 젊은 회원들이 붙여주었어. 나중에 회원들 모두 풀 이름, 꽃 이름, 나무 이름을 하나씩 지니게 되었는데, 이 세상에 없는 꽃이나 나무 풀이름도 많아.

 

지> 그러고 보면 이곳은 여느 환경단체하고는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환경 단체라고 생각되지만 알면 알수록 다른 무언가가, 뭐랄까 ‘철학적 사유를 통한 행위 과정’에 있는 단체라고나 할까요. 일단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자체가 단순한 환경정의 내지 정책 비판 구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최> 환경정의 실현, 정부나 기업비판도 당연히 일어나. 다만 우리는 풀꽃상을 드리는 우리 단체의 방식으로 현실에 접근할 뿐이지. 자칫 연성으로 보이지만, 환경운동 판에서 나는 아주 과격한 발언을 하는 강성의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다나 봐.
그리고 풀꽃세상은 평범한 단체는 아니야. 우리가 모시고 섬기는 회원들이 평범한 시민들이지만, 자연물에 환경상을 드리면서 겸손함을 되찾자는 우리의 운동방식은 전 세계에서 풀꽃세상밖에 없을 거야. ‘공해 추방하자’는 1세대 환경운동에서 ‘사회의 변화’와 ‘개인의 성장’을 동시에 밀고 가야 한다는 우리 운동방식을 세상에서는 21세기형 환경운동의 전범이라고 말하기도 하지. (풀꽃방 식구들은 그를 쌈쟁이 작가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나 동질감이 사라지게 된 근본적 이유는 근대화에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가 근대화되면서 서구의 천민자본주의 논리와 근대 민족주의 개념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했고 정신보다 물질이 강조되고 자연과의 공생보다 이익을 위한 개발이 그 자리를 차지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낡은 사유들 즉 공동체, 자연과의 공생 등은 철저히 근대적 제도화 교육 속에서 철저한 ‘타자’가 된 것이 아닐까요?
최> 그건 뭐, 잘 알고 있구만. 왜 물어봐?
균> ……

 

지> 일부 환경운동 단체들이 정부 지원금으로 운영비용을 보조하고 있는데 이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 풀꽃세상은 기업이나 정부 지원금 없이, 회원만의 힘(회비와 수익사업)으로 자립에 이르고자 애쓰고 있지. 월 500만원 가량의 이월금도 남기고 있고, 일꾼들의 대우는 우리나라 환경단체 중에서 가장 좋은 편이야. 기업이나 여느 이익집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열악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아태재단보다 재정이 튼튼하고, 외부 자본의 도움이 없이도 굴러가니까 비록 가난하지만 누구보다 당당하고 의연할 수 있겠지. 자본(기업이나 정부)의 힘에 예속된 NGO가 어떻게 기업이나 정부를 비판하겠어. 우린 다르지. 우리 힘의 원천은 회원에서 비롯되니까, 우리는 비록 작은 단체일지는 모르지만 누구도 비판할 수 있지.

 

풀꽃세상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녹색평론’에 소개 된 네팔 여성 ‘찬드라 꾸마리 구릉’ 사건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이 문제를 확대해석하고 그 여인에게 사죄 해야한다며 모금운동을 전개하는 과정 중심에 선 사람이 환경운동가 최성각이 있었다.

 

지> 풀꽃세상이 풀꽃상으로도 많이 알려졌지만 또 찬드라 구릉 문제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최> 처음엔 이 믿어지지 않는 일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상당히 놀랐어. 멀쩡했던 사람이 정신병자로 오인되어서는 자그마치 6년 4개월 동안이나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었다는 게 말이 되기나 해? 자그마치 6년 4개월. 찬드라는 한국에 돈을 벌러 온 외국인노동자였지, 걸리지도 않은 정신병을 고치려 온 정신병자가 아니었잖아. 흔히 말하는 불법체류자도 아니었고. 단지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노동자라는 이유 때문이었어.

 

균> 감금 된 거였네요. ‘광기의 역사’에서 나오는 한 대목 같이.
최> 감금이라고 표현하면 의사선생님들 비위가 상하겠지만 푸코가 병원이나 학교나 감옥이 사실 상당히 비슷하다고 말한 적도 있잖아. 그런데 찬드라의 경우에는 감금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거지.

 

 

그는 만약 그녀가 백인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고 했다. 단지 영어를 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학원가에서 상상할 수 없는 대접을 받고 있는 이 나라에서 찬드라가 만약 영어권의 백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상황은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을 내게 한다.

 

지> 아마..

 

나는 무언가를 물어보려다가 멈추고 다시금 주변을 되돌아본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근대의 뿌리와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고 조종하고 있는 모습을 찬드라 사건을 통해 좀더 생각해 보았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이 관습과 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인간이라는 동물은 그가 살아온 토양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가. 그것을 인식하고 벗어나는 방법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지> 찬드라 구릉 사건이 보여준 건 무엇일까요. 이번 일에 대한 의미랄까 뭐 그런 것을 평가해 보신다면?
최> 우리 사회의 난폭성과 야만적 인종주의를 극명하게 보여 줬다고 생각해. 이민족에 대해서 굴종적 사대주의 아니면, 멸시와 학대밖에 선택할 줄 모르는 ‘못난 한국인’들은 수치감을 느끼고 자성을 좀 해야 해. 우리 내부의 인종주의를 비판하고 반성해야 하는 거지. 서열화 된 국가의식에 바탕을 둔 외국인 대하기 말이야. 백인한테는 비굴할 정도로 친절하고, 유색인종에겐 잔혹하리만큼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모습은 비판하고 반성해야만 해.

 

지> 이번 월드컵 기간에 벌어진 외국인 노동자들 집회에 대한 무관심에도 이방인에 대한 편견과 이중적 잣대가 그대로 작용한 것이네요.
최> 그렇지. 우리가 이웃(타자)과 같이 살 수 있는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그것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고쳐야해.

 

지> 풀꽃세상이 이 문제에 대해 굉장한 시간을 보냈고 모금운동도 하셨죠.
최> 모금운동은 나중에 ‘녹색평론’ 10주년 즈음되어서 김종철 선생님(녹색평론 발행인)하고 나하고 이야기 하다가 찬드라 이야기를 다시 하면서 나온 거야. 그리고 나서 김 선생님이 ?녹색평론?에 ‘찬드라 사건’에 대해서 원고를 한번 기고하는 게 어떻겠냐 하시더라고. 그렇게 찬드라 사건을 다시 세상에 환기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참회모금운동’을 제안했고, 참회모금 운동을 하게 된 거지. 아마 찬드라씨와 전생에 인연이 있나 봐.

 

다시 인연을 강조한다. 그리고 한 번 맺어진 인연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한다. 얼마 전에 찬드라 꾸마리 구릉이 네팔에 돌아간 뒤에 히말라야를 직접 찾아가서 재판소식을 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재판진행과 관계없이 찬드라 구릉 사건은 두고두고, 커다란 죄책감으로 남아 있었다고…

 

지> 일각에서는 환경운동 하는 단체가 인권운동에까지 신경 쓰고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 일면에는 찬드라 참회 모금운동이 인권운동으로 비출 수도 있지만, 환경문제를 야기한 물질만능주의, GNP지상주의 등이 바로 찬드라 사건이라는 비극의 핵심인데, 그런 가치관이 환경문제를 일으킨 가치관과 같은 뿌리라고 생각해. 그렇기 때문에 찬드라 사건에 대한 풀꽃세상(환경단체)의 개입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 절대.

 

 

오래된 현재,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것

히말라야를 꿈꾸다.

 

지> 예전 학교에 계실 때 가끔 인도 여행 이야기를 하셨는데 요즘도 그쪽으로 여행 다니세요?
최> 기회만 있으면 가려고 해. 내 관심은 오로지 인도든 네팔이든 히말라야거든. 히말라야의 설산이라기보다는 그곳 소수민족이 내 관심사야.
지>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세요? 

 

최> 티베탄, 라다키, 네팔리, 구릉족, 셀파족 등… 히말라야의 소수민족들은 우리(시대)가 잃어버린 것들을 지니고 있지. 그나마 산업화 이전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그들로부터 배우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더욱 실감하고 하는 것이 결국 내 문학의 화두가 될 거야.
지> 거기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만나셨죠?
최> 그래, 그때 난 산업사회가 유일한 삶의 모델인가, 라는 회의와 고민이 있었거든. 그러던 차에 라다크에 갔고 마침 헬레나 여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한국에서 온 작가라고 만남을 요청했어. 헬레나가 만난 첫 한국인인 셈이지. 그때 <오래된 미래>에 대한 이야기, 점점 붕괴되는 라다크에 관한 이야기, 산업사회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어. 나중에 헬레나를 만난 이야기를 ‘녹색평론’에 기고했지. 한 번 찾아서 읽어봐.

 

지> 그곳에서 선생님께서 고민하시던 대안을 찾으셨나요?
최> 아직 문명화가 덜 된 네팔과 라다크인들을 보면서 어쩌면 그들에게서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어. 그때부터 환경과 생태에 대한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을 거야.

지> 여행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입니까?
최> 신발 끈 메고 현관을 나설 때 아주 행복해. 국내든 외국이든. 외국은 주로 히말라야를 많이 갔지만 배낭 매고 돌아다닐 때 살아있는 것을 실감하는 거지. 하지만 ‘풀꽃세상’ 시작하곤 많이 못 돌아다녀. 바쁘니까.
지>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이나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요.
최> <녹색평론선집1>을 보면 환경 문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문제에 눈을 뜰 수 있다고 생각해.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고, 또 꾸준히 소개하고 있지. 왜 쇠고기를 비롯한 육식문화에 문제가 있고, 왜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필요한지, 우리 삶의 모습이 얼마나 문제인지 그 책을 보면 잘 알 수 있거든. 

 

지> 이번 풀꽃상을 ‘자전거’가 받은 이유도 거기에 있는 거네요.
최> 그래. 이번에 자전거가 풀꽃상을 받은 이유도 엄밀히 따지자면 그런 걸꺼야. 이젠 자전거를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나 찾아봐야겠지.

인터뷰가 어느 정도 정리될 무렵인 2002년 8월15일에 풀꽃세상 사람들이 ‘새만금 독립군 전차(자전차)부대’의 대원들을 이끌고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는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 회원과 전북 부안군 지역 주민들이 공동으로 17일부터 이틀간 새만금 살리기 전국 자전거 잔치 행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萬物同根 – 모든 문제의 본질은 같은 뿌리에 있다.

 

지> 오전 집회 때 수경스님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잠깐 끊겼거든요. <오마이뉴스> 사진 통해서 보니까 선생님이 스님께서 절을 올리실 때 머리에 물 부어 주시고 계시던데 참 인상 깊었습니다.
최> 당시 수자원공사가 낙동강 하구의 오염된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리산에 댐을 지으려고 소동을 피웠고, 풀꽃세상은 그 어이없는 부당성에 항의하기 위해 풀꽃상을 그곳 계곡의 물봉선이라는 꽃에게 드리는 방식으로 대응했었어. 그때 역시 실상사의 세 스님들께서도 지리산 댐 건설을 반대하셨고, 우리는 그분들에게 인사를 드린 것이야. 풀꽃상을 받으신 이후에 수경스님은 본격적으로 환경운동 판에 뛰어드셨지.
스님은 새만금이든 댐 소동이든 북한산 파괴에 대해서든 그 본질이 같은 뿌리라는 인식을 하고 계셨고, ‘만물동근'(萬物同根)이라는 스님 생각은 우리 풀꽃세상의 그것과 다르지 않지. 작년의 삼보일배(三步一拜) 참회운동도 스님과 풀꽃세상이 같이 만든 작품이었기 때문에 땅바닥에 몸을 던지신 스님을 옆에서 모셨고, 이번 삼보일배 참회운동도 역시 모시게 된거야. 아마 스님과 전생에 육친(肉親)의 인연이 있는 것 같아. 나는 스님을 존경하고, 스님은 나를 믿으시는 눈치이고. 기자들이 많이 와서 취재하지만 나오는 건 <오마이뉴스> 하나 뿐이야.

 

지> 삼보일배에 대해서 좀 자세하게 말씀해주세요.
최> ‘三步’ 세 걸음마다 ‘一拜’ 한 차례 절하기. 그 몸짓으로는 한 번에 2미터도 채 못 나가는데 적어도 3천 번 이상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무릎을 꿇고 팔꿈치를 대고 이마를 갖다대는 거야. 2001년 새만금 살리기 운동 일환으로 벌였던 참회운동이 바로 수경스님하고 풀꽃세상)의 합 작품이었어. 스님이 발상(發想) 하시고, 풀꽃세상이 그 의미를 확대했고, 진행도 했어.
그러니 내가 작년이나 올해나 삼보일배 하시는 스님을 옆에서 도운 일은 자연스러운 일인거야. 이번 북한산 살리기 삼보일배는 조계사(불교계) 차원에서 벌어졌지만, 역시 스님은 안 모실 수가 없었어. 스님은 삼보일배 하실 때 내가 모시면 편안해 하시고 그래.

 

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의미가 전달되었다고 봅니다. 이번 삼배일보 기도도 정말 힘드셨지요?
최> 비가 온다고 했었는데 내리지 않았어. 기온이 30도가 넘었을 거야. 풀 한 포기 허락하지 않는 아스팔트의 지열, 매연 내뿜는 자동차,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악취, 그런걸 맡으면서 이 세계가 거대한 오물덩어리 그 자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기에 충분해. 삼보일배 행렬은 부드럽고 연약한 초식동물이 사나운 육식동물 등허리를 타넘는 것 같아 바라보기에도 고통스럽고 처절하더라고.
그런데 그 순간에도 서울 한복판 일상은 여느 때와 하나도 다름없이 굴러가는 거라.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고, 어떤 운전자는 짜증을 내면서 교통체증을 불만스러워하기도 했지. 간혹 시민들 중에 박수를 보내는 이도 있었고, 그냥 조용하게 그늘 아래 서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어. 세상의 반응이란 게 본래 다양한 법이라 자발적인 집단고행이 오히려 닫힌 가슴들에게 역설적인 설득력을 지녔던 것 같아.

 

 

삼보일배 기도가 진행되기 전날인 7월 16일, 법원은 북한산관통도로 일부 구간에 대한 공사중지 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그날 삼보일배의 행렬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서울 시내를 관통하는 그 행렬이 비단 ‘북한산 개발반대’ 만을 위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근원의 뿌리가 같으니 그 뿌리를 캐내려는 몸짓이 아니었겠는가.
삼배일보 기도가 진행되던 중 조계사를 40미터쯤 앞두고 수경스님이 실신했다.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셨는데 이때도 조직적인 ‘풀꽃세상 회원들’의 활약이 돋보였다고 한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회원의 도움으로 입원 수속을 마쳤고 수경스님의 소식을 각 언론사에 타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7월 25일 새벽. LG건설이 고용한 용역이 스님들의 농성장을 습격했다. 이때 수경스님을 비롯한 설치미술가 최병수 씨 등이 폭행을 당해 다시 병원으로 실려갔다.

 

지> 가장 힘드셨을 때가 언제였나요?
최> 작년 지구의 날 행사 때, 모든 환경단체들이 전세계적으로 벌어지는 그 행사에 불참하자고 (내가) 제안했어. 새만금 살리기라는 단일목적으로 한국의 환경단체들이 2001년 행사에 불참하면 그것만으로도 큰 뉴스가 되고, 그런 여론이 결국 정부가 망국적인 새만금 사업을 포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거든. 하지만 환경단체 대표자회의에서 내 의견이 묵살되었지. 그리고 난 뒤 수경스님과 전화통화를 하다가 울음을 터뜨렸지. 스님과는 같은 코드이니까, 그분 앞에서는 흐느낄 수 있었겠지.

 

지> 수경스님만이 아니라 선생님은 여러 분야에 계신 분들을 잘 알고 지내신다고 들었습니다.
최> 환경운동 판에는 글패(문단)들보다 더 아름다운 분들이 많이 계셔. 글패들의 골목은 이 세상의 많은 골목들 중의 하나일 뿐인데, 그게 온 세상인 줄 알아. 하지만 이쪽 생명운동 판에는 정말 아름답고 깊은 분들이 많이 계시지. 그런 분들을 만나 같이 고민하고 부축하는 것은 이번 생에서 드물게 경험할 수 있는 큰 축복이라고 생각해.

 

이 사람이 사는 법

문학 행사가 끝난 날 저녁. 학생들과 교수 세 명은 운동장 구석에 앉아 두런거리며 술잔을 주고받았다. 두부, 김치와 대꾸리(됫병) 소주를 먹고 마실 때 시커먼 뿔테 안경을 쓴 교수 한 명이 학생들의 손을 바스라질 정도로 잡으면서 이야기한다. “열심히 해라, 열심히.”

지> 소설가로 또 환경운동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역할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최> 작가의 가장 큰 책무는 좋은 글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고,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어. 하지만 좋은 글이라는 게 당대의 현실문제에 무관심해야 가능하다고는 생각지 않아. 얼마나 당대 현실에 치열하게 정면 대응하면서 고민했는가, 그런 삶이 결국은 좋은 글이라는 결과로 드러나게 된다고 생각해.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일은 상업주의, 천민자본주의의 인간성 황폐, 비열해지는 시대정신 같은 표면적인 일이 먼저 떠오르지만, 무엇보다도 사물 혹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무례함이라고 생각해. 생명가치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그래. 파고들면, 결국 환경문제, 생태계 위기보다 더 심각한 당대문제는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 거. 작가는 태생적으로 언제나 먼저 신음하는 사람, 혹은 약자에 대한 연민, 폭력과 부정에 대한 분노가 그 감수성의 기반이라 생각하고 있어. 우리 시대의 약자는 여성, 자연, 노약자, 가난한 자들이겠지. 그 중에서 자연이 우리 시대만큼 무참하게 모욕을 당하고 모욕을 당한 적이 없어. 당연히 무관심할 수 없게 되었지. 보고야 말았고, 알게 되었으니까.

지> 환경운동 하면서 글쓰는 일을 병행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최> 어렵기로는 어떤 삶이든 한평생 살아내기가 쉬운 일은 아니잖아. 다행히 환경운동 하는 글쟁이로서의 삶이 나의 내부에서 자연스레 통합되고 연결되어서 내 경우에는 다행이라고 생각해. 삶과 글이 일치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

삶과 글이 일치하는 삶이라.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괜한 질문을 했다.

지> 대학 때 문학 공부하는 학생이나 문단에서 직접 창작활동을 하시는 분들 중엔 직접 현장에서 뛰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잖아요. 작가란 현실 문제에 맞대응하기보다 양자간의 거리를 두는 사람이 아니냐, 이런 얘기인데 선생님은 이것을 어떻게 보세요?
최> 책상머리에서 생산되는 관념의 문학, 설익은 감상주의, 혹은 천박한 욕망이 바탕에 깔린 상업주의문학은 문학과 삶에 대한 모독이지. 삶과 글이 일치하는 문학이 감동을 주지 않겠는가 싶어.

지> 선생님 소설을 환경문제를 다룬 본격 생태문학이라고 해야하나요?
최> 뭐라고 부르든 그것은 내 일이 아니지. 나는 아직 한편도 쓴 것이 없어. 이런저런 인연으로 책을 펴내면서도 내 문학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는 오만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지. 대중성, 상업주의하고는 무관한, 내 ‘꼴리는 대로’ 쓴 작품들인데, 그렇지만 왠지 만족스럽지 않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작품들이라, 정말 없던 일로 하고 싶을 뿐이야. 내 책을 돈주고 사서 읽은 사람들 때문에 이건 ‘연습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성이 안 차는 것은 사실이거든.

지> 이제 어떤 글을 쓰실 계획이세요?
최> 이런 말이 있어. “만약에 그것이 나한테만 중요하다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앙드레 말로의 말인데 젊었을 때 이 한마디 말이 나를 흔들었어. 난 작가의 책무란 일단 좋은 글을 쓰는 것이라 생각해. 하지만 좋은 글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생명이 존중되는 세상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보거든. 생명에 대한 감수성 없이 어떻게 좋은 글이 가능하겠어.

지> 선생님 글의 근원은 생명에서 비롯되는 거군요.
최> 그래, 그리고 그걸 알기 위해선 먼저 공부, 책읽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풀꽃세상은 환경운동 판에선 처음으로 책읽기 운동을 하고 있어. 환경 문제는 개인이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잖아. 그래서 세상의 변화와 개인의 성장이 함께 밀고 나가야 할 일이 되는 것이지. 개개인이 조금 더 성숙해지는 데 책읽기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

지>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요 최근에 녹색 평론이나 환경관련 소설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초기의 진지함과 긴장감이 많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 녹색평론은 귀한 잡지이지. 반공과 지역감정에 의존해 장사하는 거대언론사보다 녹색평론이 우리 시대에 백 배는 더 소중하다고 생각해.

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질문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선 풀꽃세상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고 하셨는데 그 근원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최> 풀꽃세상이라는 환경단체는 ‘아름다운 삶’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해.

그와의 대화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뭔가를 주섬주섬 집어준다. 풀꽃세상에서 발간하는 ‘풀씨’하고 그것보다 작은 책 ‘풀밭’이었다.

지> 이것들은 여기서 발간하는 책들인가 보내요.
최> 맞아. 회원들에게 정기적으로 보내지는 책이지. 좀 여유가 되고 나아지면 출판사도 해볼 생각이야.

풀꽃세상을 나오는데 풀씨들이 모두 일어나 인사를 한다. 왕풀님은 자주 와서 무거운 것도 들어 달라고 하시고 최성각 그래풀은 활짝 웃으며 배웅을 했다. 나는 부끄러워서 도망치듯 빠져 나왔는데 그들은 먼저 사람을 존중하고 존경할 줄 아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이다. 전철 안에서도 종로 바닥을 걸어나오는 동안에도 그 풀씨들의 향기가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