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지난 8월 9일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가 대통령선거 출마 선언을 했다. 다음날 이 사실은 <동아일보> <중앙일보> 나아가 <한국경제>와 같은 중앙일간지에서도 1면 기사로 다루어졌다. “당선권에서는 멀겠지만, ‘결승전’에서 변수가 될 ‘제3당’의 후보가 나섰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접은 ‘민중후보’가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1987년, 1992년, 1997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은 그 동안 그만큼 컸다.
민주노동당이 ‘제3당’으로 부각된 것은 지난 6.13 지방선거 이후의 일이다. 민주노동당은 지방선거의 정당 지지 투표에서 전체 134여만 표 8.14%를 차지했고, 2명의 구청장(울산)과 11명의 광역의원을 배출했다.
이러한 민주노동당 선전(善戰)의 한 가운데에 김석준 부산시 지부장이 있다. 김석준은 부산 시장 선거에서의 실질적인 승자였다. 조직과 자금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한나라당 소속 현직 시장과 노무현이 YS의 암묵적인 결재를 받아 선택했다는, 민주당 한이헌과의 싸움에서 김석준이 얻은 16.8%는 경이적인 득표였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런데 실제로 ‘부산 시장’에게 요구되는 객관적인 자질을 가진 인물도 그 밖에 없었다. 김석준은 부산대 교수가 된 1983년 이래 부산의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위해 애써온 인물로서 <부산지역 계급구조와 변동> (한울, 1993), <부산지역 현실과 지역운동>(부산대 출판부, 1999), <지역발전과 기업전략>(전남대 출판부, 1998, 공저) 등의 저서를 펴낸 지역 전문가였다.
그리고 선거과정에서, 성폭행 문제가 불거진 현직 시장 안상영과 부산에서 국회의원 한 번 했다는 것 외에 별 경력이 없는 관료 출신의 한이헌은 TV토론에서 김석준에게 망신을 당하기도 하였다. 발전의 비전이나 현안에 대해서나 그들은 김석준에 비할 때 거의 아는 게 없었던 것이다. 김석준은 TV 토론 이후 급속하게 ‘대안’으로 부각되었고, 부산의 많은 시민단체와 종교ㆍ예술인 단체와 지식인들이 ‘김석준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김석준의 성공은 하나의 모범임에 분명했다. 16.8%라는 득표는 상대방이 별 볼일 없거나 약해서 얻은 반사이익 효과 이상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석준은 민주노동당에서 새로 발견된 보석이었다. 그러자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가 거론될 시점에서 ‘권영길 후보’에 만족하지 못하는 민주노동당 평당원의 일부가 그를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인터뷰를 준비하기 시작한 지난 7월말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동지 여러분, 저는 (중략) 이번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에 나설 의사가 전혀 없음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힙니다. 우선 저는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감으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미처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저는 부산에서 생활하면서 부산의 문제에만 골몰해 왔기 때문에, 전국적인 수준에서 문제를 보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능력을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 <김석준 대선후보 추대위원회 동지들께>
그리고 인터뷰를 청하는 메일에 김석준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겸손’한 응낙의 답변을 보내왔다.
“‘백보 미인’이라고 아시는지요? 멀리서 보면 멋있어 보이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일러 하는 말이지요. 그 ‘백보 미인’처럼 사람들을 실망시킬까 두렵습니다.“
이래저래 나는 김석준이 겸손한 인물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부산에 내려가게 되었다.
1. ‘부산시장’ 후보가 되기까지
김석준은 1957년 경북 봉화에서 나서 부산에서 자랐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에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신간회(新幹會) 운동에 대해 석사논문을 썼다. 그리고 불과 27세인 1983년에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가 되었다.
상식의 눈으로 볼 때 ‘27세의 국립대 교수’란 아주 평탄하고도 ‘운 좋은’ 삶의 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찍 그런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후 삶의 행로에 다른 힘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겠다. ‘같이 운동을 한 친구들은 고생을 하는데 일찍 편한 자리를 잡았다’는 부채의식이 교수가 된 이후 그가 올곧게 지역운동ㆍ노동운동에 복무하게끔 하였던 것이다. 부산경남민주화교수협의회,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전노협과 민주노총, 그리고 민주노동당이 그의 주 활동무대였다. 그리고 부채의식은 결국 부산시장 후보 자리를 마다하지 못하게 했다.
“사양할 수만 있다면 사양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다른 대안이 없다는 주위의 설득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시장 후보로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학문적 실천을 통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운동에 동참하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자신의 온 몸을 던져 저항하고 당당하게 감옥으로 끌려가던 친구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온전히 대학을 졸업하였다는 미안함과 빚진 마음이 언제나 가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김석준, <희망으로 가는 길>, 바우디자인, 2002.
부산을 지키겠다
천정환(아래 ‘천’)> 쓰신 글 가운데에서 인상적이었던 게 <금정산에 남으리라>였습니다. 1983년에 발령을 받은 시점부터 학생들에게 서울로 가지 않고 부산대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했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서울에는 일부러라도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는 말씀들인데요. 서울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지방대 교수가 되고 난 뒤에는 서울에 갈 기회만 노리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지방 사람들로부터는 욕을 먹는다던데요. 특히 서울대 출신일수록 그런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김석준(아래 ‘김’)> 부산에 죽 살다가 대학 다니면서 서울에서 살았는데 솔직히 서울에는 별로 정이 안 들더라고요. 정을 잘 못 붙였죠. (웃음) 그리고 저는 학생운동을 하는 이념써클의 구성원이었으면서도 남들 다 감옥 갈 때 용기가 없어서 감옥에는 못 가고 대학원에 진학을 하였습니다. 4학년 1학기 때, 데모를 주도하지는 못하고 공부 쪽에 관심이 있거나, 공부를 통해서 뭔가를 하려는 친구 8명 정도가 모였어요. 감옥 갔다 오고 현장에 가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뭔가 하고 싶어하는 친구들이었는데요. 모여서 그 때 처음으로 <자본론>도 몰래 읽어보고 비교적 체계적으로 사회과학 이론에 대해 학습을 했었어요.
이 때 함께 했던 친구들이 공교롭게도 대부분 시골출신들이었어요. 거기 모인 친구들은 처음부터, 기회가 있으면 지방이나 고향에 내려가서 뭔가 새롭게 공부하는 기풍을 만들어나가고 또 ‘지방에서부터 변화를 일으켜서 서울을 포위해 나가자’는 문제의식을 공유했었어요. 그리고 그 때 마침 졸업정원제가 실시되어서 지방에서 교수가 될 기회가 많았죠. 그래서 8명중 대부분이 지방대 교수가 됐어요. 그 중에서 두 사람은 배신(?)을 해서 (웃음) 나중에 서울대 교수가 됐죠. 철학과 허남진 교수와 국문학과 박희병 교수가 그들입니다. 어쨌든 이 그룹 멤버들이 5공 때 서명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지역에서 학술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여나가면서 결과적으로 지역에서 나름대로 기여했습니다. 저도 애초부터 부산에서 일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부산을 지키는 큰 나무가 되자’는 생각을 했지요.
천> 운동을 조금만 경험하면 ‘전위의식’을 갖게 되는데요.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어도 시야나 관점만은 전국과 전계급을 들었다 놨다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1980년대 초에 ‘지역운동’의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게 특이합니다. 그 때는 ‘지방화’란 생각 자체도 없지 않았습니까?
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중요한 계기 중에 하나는 광주민주화운동의 경험이었다 봅니다. 197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모든 활동가들이 거의 다 서울에 모여 있었지요. 학생운동이건 노동운동이건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지방에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체제 자체에 충격을 준 변화가 체제의 제일 ‘약한 고리’라 할 수 있는 광주에서 터져 나온 거였죠. 그 이전에 있었던 부마(항쟁)의 경우도 마찬가지지요. 광주에서의 항쟁이 광주 지역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한계 내지 아쉬움은 있지만, 여하튼 우리 사회를 바꿔나가는 힘의 원천은, 특히 꽉꽉 막힌 5공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지방에서부터 만들어지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지방이 방치되고 모든 사람이 서울에만 있는 건 잘못된 거 아닌가요? ‘지역에서부터 변화를 일으켜 내기 위한 동력을 만들어내자’ 뭐 이런 소박한 생각들을 공유했던 셈이지요.
5대 종손, 설거지에 나서다
천> 경북 봉화 출신이고 집안의 5대 종손이시라는데, ‘출신 성분’은 대단히 보수적이신 것 아닌가요? (웃음) ‘운동’을 마음껏 하기는 말이죠. 그런데 살아오신 길은 오히려 비교적 ‘자유스럽게’ 이어져 온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 나기는 경북에서 났지만, 아버지가 젊어서부터 성창기업이라는 부산의 유명한 합판 회사에서 일 했기 때문에 우암동과 감만동 등에서 자랐습니다. 부산의 우암동, 감만동은 당시에 굉장히 ‘험한’ 동네였습니다. 5대 종손이고, 경북 출신이라도 보수적인 건 ‘좋은 집안’의 경우 아닐까요? (웃음) 어릴 때 봤던 친구들, 친구 아버지들, 또 성창기업이나 인근 공장에 취직하러 몰려든 ‘공돌이'(?) ‘공순이'(?)들… 저희 어머니가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허름한 양장점을 했어요. 담배도 팔고 하는. 특히 주위에는 경북에서 부산으로 돈 벌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성창기업이 영주에서 시작한 기업인지라 연고를 찾아서 경북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지요. 아버지도 장남이고 어머니도 장녀였기 때문에 저희 집에는 삼촌이나 고모, 이모를 포함한 일가친척들이 늘 함께 생활하곤 했지요. 그러다 보니 시골에서 흘러나와 도시로 정착해 들어가는 바닥 인생들을 많이 보면서 자랐지요. 그런 게 알게 모르게 제 삶에 영향을 미친 거 같습니다.
천> 딸 둘을 두신 후에 한참 있다 막내(아들)를 낳게 된 과정에 집안의 ‘압력’이 있었다면서요?
김> 그래도 장남이고 종손이라는 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거 같아요. 그래도 버틸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버티려 했죠. 아버지가 나중에는 성창기업이 만든 성지학원의 서무과에서 근무를 하셨는데, 제가 대학 다니면서 ‘데모’ 때문에 경찰서에 불려 다니고 그러면 친척들이 “장남 때문에 아버지 직장 잘린다”는 식으로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딸 둘을 낳고 난 뒤에 “이제 그만이다”라고 선언을 했죠. 그런데 제 고집이 센 걸 아니까 부모님들이 저한테는 말을 안 하시고 제 집사람한테 압력을 넣어서 아이 하나를 더 낳게 한 거죠.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는 더 낳고 보자’고 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천> 사모님도 교수직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만큼 바쁘시기 때문에 가사노동을 분담하려 한다고 쓰신 걸 봤는데, 정말로 가사노동 하십니까?
김> 실제로 일찍부터 반 정도는 분담해 왔습니다.
천> 그게 경상도 남자들한테 가능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웃음)
김> 불가능한 것이기도 한데, 실제로 집사람 몸이 좀 약한 편인데, 제가 안 도와줘서 몸이라도 탈나면 제가 더 고생을 하게 되지요. 병이라도 얻게 되면 정말 심각하지 않습니까? (웃음) 그런데 집안어른들 기준으로 보면 그런 게 못마땅하기도 했겠죠. 큰 애 낳고 난 뒤에 애가 잘못되어 결핵에 걸리기도 했는데, 집사람이 대학원 공부를 계속한다는 게 경상도 어른 기준으로 보면 말이 안 되는 거였거든요. 집사람도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제가 편을 들어 주었지요. 그 때부터 찍힌 거지요.
제가 종손이니까 제사가 굉장히 많습니다. 요즘은 좀 줄긴 했는데 한번 모이면 친지들이 4-50명이나 됩니다. 아버님 형제가 8남 4녀, 열둘이나 되거든요. 한번 씩 모이면 대단하지요. 그럴 때 일은 모두 며느리 몫 아닙니까? 남자들은 ‘고스톱’ 치고 말이죠. 보다보다 도저히 안 되어 한 번은 제가 팔을 걷고 설거지를 딱 시작했죠.
천> 명절 때요? 야아!
김> 예, 제사를 지내고 나서요. 그러니까 완전히 ‘경천동지(驚天動地)’였지요. 종손이 설거지를 하다니! 그런데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종손이라도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고, 일은 나누어 해야 한다.”고 설득 작업을 좀 했죠.(웃음) 물론 어른들도 겉으로는 동의를 하면서도 속으로야 많이 서운하시거나 불편 하셨겠지요. 그런데 지금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완고하시던 저희 부친도 설거지를 하고 그러십니다.
천> 대단하시네요. 남성 독자들을 위해서는 이 부분은 내보내면 안 될 거 같습니다.(웃음) 저는 부인께서 대단하신 거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직업 갖고 애들 세 명 키우시면서 연구활동도 하시고요.
김> 예, 자기 할 일을 확실하게 하는 스타일입니다. 철저한 면도 있고요. 집사람이 서울 사람인데 석사 마치고 부산에 내려왔는데, 부산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었거든요. 만약 집사람이 자기 할 일이 없으면 저만 쳐다보고 있을 것이고, 그러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웃음) 그래서 제가 적극적으로 시간 강의 자리도 알아 봐주고 일자리를 찾으려고 뛰어다니고 그랬습니다. 특별히 제가 페미니스트라서가 아니라, 집사람이 자기 일을 해야 제가 편해진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웃음)
천> 시장 출마하실 때 부인께 직접 말씀을 안 드리고, 나중에 신문에 난 걸 보고 알게 되어서 곤란하셨다면서요.
김> 집사람은 아주 보수적인 집안의 고명딸입니다. 저랑 연애를 하다 보니까 달라지기는 했지만요. 제가 서명운동 이후 민교협이나 전교조 후원 활동, 전노협 후원 활동 등을 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을 하면서도 원칙적으로는 동의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창당 과정에 참여하는 데 대해서는 심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노동운동을 지원하거나 시민운동을 하는 건 좋지만, ‘정치’를 하거나 정당 활동을 하는 건 교수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굳이 정당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려면 이혼하자”고 할 정도였지요. 그래서 “내가 이제까지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 진보정당이 필요하고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해왔는데 실제로 그런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안 맞지 않느냐? 정당 활동은 하더라도 출마를 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니 걱정하지 마라”고 하면서 겨우 설득을 했죠.
출마 문제도 사실은 사전에 얘기를 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밤’에 분위기를 잡고 이야기를 해야겠다 마음먹고, 마침 일이 있어서 늦게 귀가하는 집사람을 집 앞 맥주집으로 불러냈습니다. 그랬더니 집사람이 “어, 이상하네, 결혼 20년 넘게 이런 일은 처음이야” 그러면서 왔지요. 막상 이야기를 하려는데 입이 딸막딸막 하면서도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결국 엉뚱한 이야기만 한참 했어요. 집사람 학교에 문제가 있어서 그 이야기 들어주고, 평소에 하듯이 조언도 해주고 그러다가 시간이 다 흘러가 버렸지요. 결국 말을 못 꺼내고 말았어요.
그랬는데 11월 초 들어가면서 신문에서 출마 사실이 보도되고 그 기사를 본 집사람의 동료들이 “너거 신랑 시장 출마한다메?”, “무슨 소리야? 모르겠는데” 그렇게 된 거죠. 그러니 더 기분이 나빴겠죠. 더군다나 집사람 동료들 중에는 저를 잘 알고 또 평소에는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지지를 하는 분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런 사람들조차 하나 같이 “이번에는 잘못 판단한 것 같다. 부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나와서 도대체 어쩌자는 거냐?”며 걱정 겸 비판들을 해대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상황이니까 집사람도 “그 동안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그나마 쌓아왔던 것들을 한 참에 몽땅 다 까먹는 게 아니냐”며 걱정을 했습니다. 여하튼 선거 결과가 그런 대로 괜찮았기 때문에 우려했던 문제들이 심각하게 벌어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민주노동당 후보? 그건 아니다”
천> ‘출마’에 대해서 부산대 동료 교수분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김> 비슷했습니다. 특히 우리 대학 교수님들의 경우 ‘하일민 교수 학습효과’가 크게 남아 있었지요. 제2기 지방선거에서 우리 대학의 하일민 교수님이 여당인 국민회의의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를 하셨는데, 선거 이후에 여러 가지 점에서 부정적인 효과가 많았었지요. 교수님 개인적으로도 잃은 게 많았구요. 그래서 저의 출마에 대해서도 그 동안 민교협 활동 등을 함께 해온 교수님들조차 노골적으로 말리지는 않으셨지만 걱정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지요.
실제로 지난 1월 1일 지방 신문의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은 1%에 불과했습니다. 초반에 계속 분위기가 안 뜨니까 집사람은 “선거 끝나고 나면 외국에 교환교수를 가든지 하는 게 좋지 않겠냐”며 불안해 했습니다. 결과가 나쁘면 당분간 아예 눈에 안 띄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지요.(웃음)
여하튼 결과가 기대 이상으로 나오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다 덮여버린 감이 있습니다. 사실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선거과정에서 문제점이나 한계가 많았는데, 그런 건 잘 안 보이고 겉으로 드러난 16.8%의 지지도만 보고 “선전했다, 그것도 부산에서…” 이런 평가만 남은 거죠.
사실 저는 선거 결과에 대한 과도한 평가가 오히려 우려되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 선거 후에 또 시지부장도 맡게 되셨는데요?
김> 시지부장 맡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히 우려와 반대를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만약 선거에서 참패를 했더라면 오히려 어느 정도 홀가분하게 거리를 둘 수 있겠지만, 지금은 누군가가 선거 이후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수습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현실적으로 다른 누구도 나서지 않는 상황이라 내가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고 설득했지요.
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시는 거에 대해선 뭐라 그러시던가요? 놀라셨겠는데요.
김> 안 그래도 그 일이 있고 난 뒤에서부터는 집사람이 매일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 들어가봐요.(웃음) ‘저건 아니다, 부산의 상황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일인 거 같다’ 고 하면서 “이번 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고 윽박지르곤 했지요.
천> 주변의 교수나 지식인들이 “민주노동당 후보로 나서는 것은 잘못 됐다”고 말했다 하셨는데요, 그리고 또 어떤 글에서는 “특히 부산에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는 게 어렵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김> 부산 지역의 지식인 운동은 원래 일정한 틀이 없었습니다. 1986년에 개헌 서명을 계기로 서로 다른 대학의 교수들 사이에 교류와 연계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서명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1988년 들어서 민주화교수협의회나 지역사회연구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이 두 조직의 결성 초기에 실무적인 일을 맡으면서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제가 부산지역 교수운동에서 제일 발품을 많이 판 사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서서 문민정권이 들어서고 사회주의권의 붕괴 같은 일들을 경험하면서 민교협 내에서도 약간의 동요가 일어납니다. 민간정부로 넘어가면서 민주화되었으니까 ‘더 이상 민교협이 할 일이 있나’ 이런 말을 하면서 이탈하는 회원도 생기고, 또 교수운동의 성격과 방향을 둘러싸고 의견의 차이가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하게는 총장 직선 문제를 둘러싸고 교수들 사이에 견해차가 커지면서 민교협의 동력이 크게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그나마 조금 적극적인 교수들은 1990년대 이후 활발하게 전개된 시민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요.
저는 1994년에 뜻을 같이하는 교수들과 변호사 및 연구자들 그리고 현장 활동가들과 함께 ‘영남노동운동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이 연구소에 참여한 교수들은 민교협 회원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가장 활동적인 사람들이 모인 셈입니다. 정치적인 입장으로 보면 전노협과 노동계급의 중심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고, 학술운동도 노동운동의 발전에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전공별로는 사회학을 전공하시는 분과 경제학 전공자가 중심이었습니다.
여하튼 1997년 총파업을 거치면서 산별노조 건설이나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요구가 엄청 증대되었지만, 정작 민교협 교수들 중에서 영남노동운동연구소에 참여하는 분들 외에는 이 문제에 별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대다수 교수들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수평적 정권교체와 그를 위한 ‘비판적 지지’에 더 많이 무게를 두고 있었던 셈입니다. 1997년 대선 이후 진보정당 창당을 위한 활동에 관심을 가진 교수들도 그리 흔치 않았고, 실제로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을 때 당에 가입한 사람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천> 부산 민교협 내에서요? 이건 지식인과 노동운동의 관계 문제인데요.
김> 교수들 사이에서는 민주 “노동당”이라는 데에 거리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건 노동자 정당 아이가? 내가 가서 할 일이 뭐 있노? 이름 안 바꾸면 내가 가서 일하기 어렵다” 이런 반응 보이는 분이 많았죠. 그래서 “교수노조도 만들어지는 판인데 교수가 ‘노동당’에 대해 거부감을 보일 필요가 뭐 있습니까?” 이렇게 반문하면 “교수노조는 교수노조고, 노동당은 노동당이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지요.
서울과는 달라서 지역에서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책임감을 갖는 교수들은 별로 없습니다. 관심이 있는 경우에도 심정적으로 지지ㆍ지원하는 정도로 선을 그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잘 알고 같이 활동했던 김석준이가 하라고 하니까 돈 내라고 하면 돈 좀 내고 이름 빌려달라고 하면 이름 빌려주는 식이지요. 이런 현상은 제가 역할이나 활동을 잘 못해서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이 지역 교수들의 일반적인 정서나 상황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2. 민주노동당,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민노당 지지자이다. 97년 대선에서 김대중과 권영길 사이에서 고민하다 권영길을 찍었다. 돌아보면 아주 잘한 결정이라 생각된다. 올 12월에는 노무현과 권영길을 놓고 고민할 것이다. 한 방에 모든 것을 결정해버리는 한국 대선의 특징을 차치하고, 그리고 훌륭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듯하지만 ‘답답한’ 권영길 후보의 면모도 차치할 때, 선거에서 민노당에 투표하는 일이 좀 더 먼 미래를 위한 확실한 투자라는 생각은 확고부동한 편이다. 그러나 민노당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 온전한 ‘대안’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래서 ‘김석준’이라는 개인에 대해 말하는 것 외에 이 인터뷰글의 내용은 하나로 수렴된다. 민노당의 현실과 진로에 대한 물음과 답변이다. 나는 민노당에 관심이 있는 상식적인 시민의 입장에서, ‘합법활동’을 수단으로 ‘수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으로서의 민노당이 제대로 된 조직으로 바뀔 수 있는가 하는 점, 또는 ‘심정적’ㆍ‘잠재적’ 지지자들인 많은 사람들이 민노당을 자신의 진정한 대안으로 인정하게끔 하는 데 필요한 요인들에 관한 것을 물었다. 나는 ‘진정한 대안’에 관한 이러한 질문을 우선적으로, 만들어질지 모르는 ‘노무현당’이나 사회당이 아니라, 민노당에게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김석준 부산시지부장은 이런 질문에 답할만한 자격을 가진 ‘개인’이라 생각한다.
천> 말씀하신 것처럼 교수들이 민주노동당 활동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는 게 부산 지역에만 한정된 현상일까요?
김> 다른 지역까지 포함해서 일반론을 말하기는 어렵겠죠. 그런데 전국적으로 보더라도 우리 당에 참여하는 교수들이 적지 않지만, 진보적인 교수들 중에 1990년대 이후에는 시민운동 영역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고 보는 게 옳을 것입니다. 민주노총의 활동과 관련해서는 정책 지원 등으로 꽤 많은 교수들이 관계를 맺고 있겠지만, 실제로 민주노동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경우는 더 드물 겁니다.
천> 제가 항상 묻고 싶은 부분이 바로 그겁니다. 주변엘 봐도 저번 지방선거 때 민주노동당에 정당지지 투표한 사람이 꽤 많은데요. 그런데 당에 가입하겠냐고 물어보면 어렵습니다. 그냥 후원하거나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차원을 넘어서야 할 때는 머뭇거리는 거죠. 여러 가지 문제가 여기 걸려 있다고 보입니다만, 우선 민노당의 성격 문제인데, 민노당이 대중정당을 표방하면서도 계급정당의 성격도 분명히 가지고 있고요. 거기다 중요한 건 민노당이 민주노총과 특수한 관계에 놓여 있거든요. 그리고 생태주의, 페미니즘 등의 다양한 진보적인 생각도 상당히 영향력을 갖고 있는데, 그런 진보적인 정치적 경향을 모아내고 문턱을 낮추는 데 있어서 민주노동당은 늘 아쉬운 점이 많거든요. ‘노동당’이라는 당명에 대해서, 민노당내에서조차 “편협한 계급주의가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김> 실제로 그렇습니다. 차라리 ‘진보’당이나 ‘사회’당이라면 주체를 명확히 하는 게 아니라서 오히려 부담이 덜할 것 같은데, ‘노동’당은 노동자 정당이기 때문에 지식인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또 말씀하신 것처럼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당으로 인식되는 측면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냉정히 보자면 이러한 이야기들이 변명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심리적 장벽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보다 본질적으로는 우리 사회에는 아직까지 진보정당의 당원이 된다는 데 대한 두려움이나 피해의식이 상당히 큰 거 같습니다.
민주노총당?
천> 한국노총이 당을 만들려 한다는 보도를 봤는데요. 민주노총과 민노당의 ‘특수관계’가 때로 민노당에 한계로 작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민주노총은 가끔 ‘대기업 남성 정규직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뿐’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당명’ 문제라면 ‘사회’당이나 ‘진보’당이 실제로 더 운신의 폭을 넓게 할 것 같고요.
김> 당명 문제는 창당 과정부터 제기되어 왔지요. 더 올라가면 1997년부터 당의 방향과 관련하여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진보정당이냐, 아니면 보다 다양한 계층의 연합정당이냐”가 토론되어 왔고요. 그런데 현재까지도 민주노총이 반 이상의 지분을 갖고 있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가 더 폭넓게 확산되면 당의 정체성에 변화가 초래될 것으로 봅니다.
천> 현시점에서는 “민주노총 또는 노동자 중심의 정당”이라는 것이 분명히 노동자주의적 경향을 띤다 해도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인 건가요?
김> ‘노동자’라 하면 생산직 육체노동자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공무원노조나 교수노조가 그런 의식을 바꾸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작 더 중요한 문제는 민주노총이 갖는 한계라 봅니다. 민주노총이 대기업 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따라서 현재 대두되고 있는 비정규직ㆍ미조직 노동자 대중의 문제까지 포괄하는 실천을 담보하지 못하면, 노동자 대중 중 일부 밖에 대표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릴 수밖에 없죠. 민노당 뿐 아니라, 민주노총의 자기 정립을 위해서라도 기존의 활동방식과는 다른 획기적인 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천> ‘조합조직’으로서 민주노총이 가진 기본적인 한계가 분명히 있을 텐데, 그런 일이 가능할까 라는 회의가 들기도 하거든요. 민주노총이 조합주의적인 마인드를 바꿔나가고 그럼으로써 민주노동당이 바뀌어간다는 것은 더 어려워 보입니다. 민노당이 제대로 된 정당으로서 조합주의적인 정치 마인드를 바꿀 수 있을 때 민주노총도 제대로 노동조합운동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냐 하는 겁니다.
김> 그렇죠, 당이 그런 지도력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민주노동당 활동 자체가 노동자계급에 한정된 것이 아니어야 하고, 노동자계급이라 하더라도 민주노총에 포괄된 대기업 노동자들뿐 아니라 비정규직이나 미조직 노동자들의 이해도 제대로 대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민주노총을 압박할 수도 있어야 하고, 민주노총 안에서도 산별(産別)적 실천을 제대로 축적해 나가야만 함께 발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어제 제가 외국인노동자 집회에 갔는데, 거기서 민주노총ㆍ한국노총 부산 본부장이 참석해서 외국인노동자 문제에 대해 모두 “같이 하겠다” 말은 했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 동안 양대 노총이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대해 한 일이 별로 없거든요. 그런 것부터 냉정하게 반성을 해야되는 거죠. 외국인노동자가 노동자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역으로 우리 노동운동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인 노동자를 차별하고 중소기업 노동자와 대기업 노동자를 차별하는 구조가 고착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면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단결하기보다는 서로 경쟁하거나 이질적인 집단으로 분열되고 분절화되는 것입니다. 민주노총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외국인노동자를 같은 노동자로서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노동조합 운동의 발전 전망이 잘 나오지 않는 거죠.
사실 부산의 경우는 노동자들 사이의 분절 정도는 그리 심하지 않다고 봅니다. 대기업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큰 사업장이라고 해 보아야 한진중공업이나 대우정밀 정도이고 나머지는 거의 영세사업장이라 노동조건이 예외 없이 아주 열악한 편이죠. 울산의 대기업 노조들이 대승적인 관점에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구체적으로는 다소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노동자계급의 대의에 입각해서 산별노조 건설에 적극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민주노총의 발전 전망이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민주노동당의 지향과 대선의 목표
천> 12월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목표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이라 보십니까?
김> 10% 이상 득표해서 진보정당의 정치적 기반을 확충하는 것은 모두가 생각하는 목표겠죠.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정말 차별성 있는 정책을 펴서 대중들에게 진보정당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다른지를 알려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점치는 수준이 되겠지만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 대결 구도가 되고 거기에 우리 당 후보가 끼어드는 구조가 되면 우리의 차별성을 알려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대선에서 “신자유주의 반대”와 같은 추상적인 구호를 들고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거든요. 오히려 핵심적인 공약 몇 가지를 선명하게 제시하여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군복무기간 단축’이라든지 복지ㆍ환경?교육 문제 등과 관련한 획기적인 공약을 제시하고, 그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한 ‘부유세 신설’ 등을 약속함으로써, 저 사람들이 맡으면 확실히 달라지겠구나 하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대선에서 우리 당이 명확히 구별되는 정책 공약을 제시하여야만 지역차원에서도 제대로 된 선거 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대선에서 제시된 정책 공약이나 사회개혁을 위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지역에서 정치 선전전을 조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분회 활성화를 위해서 1주일에 한번씩 분회 모임을 갖는다고 할 때 뭘 가지고 모일 수 있겠습니까? 민주노동당의 차별적이고 구체적인 정책 공약이 있으면 분회원들이 정기적으로 만나 공부도 하고, 그 성과를 토대로 시민들이나 주변의 이웃 주민들을 만나고 설득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상가임대차보호법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 당의 정책 정당으로서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줬듯이 말이죠.
지난 9월 8일 권영길 대표는 민주노동당의 후보로 정식 ‘당선’되었고 출마 선언을 하면서, 김석준 지부장이 강조점을 두어 말한 ‘부유세 신설’ㆍ‘군 복무 기간 18개월로 단축’과 더불어 ‘주한미군 철수’ㆍ‘주 5일 근무제 전면실시’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알다시피 민노당은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운동세력이 결집하여 만들어진 정당이기 때문에 ‘노선 갈등’의 소지를 늘 안고 있다. 특히 지난 봄 이후에는 사회당과의 연합 문제, 서해교전 사태, 범진보진영 단일 대통령후보 추진위원회 문제 등으로 일부 평당원들간의 논란은 치열했다고 한다. 내부의 ‘민족주의적 경향’, 즉 ‘NL’과 그에 정반대되는 ‘좌파적’ 경향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 갈 것인가. 그리고 이질적인 정치적 지향을 어떻게 수렴하여 민노당의 통일된 힘으로 모아낼 것인가. 우리가 김석준 지부장에게 들은 견해는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천> 계속 민노당은 이념ㆍ노선 문제로 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보이는데요. 책임 있는 자리에 계시는 분들이 이에 대한 견해를 요구받을 거라 보입니다. 민노당의 지향에 대한 김석준 지부장님 견해가 궁금합니다.
김> 글쎄 저는 공부가 짧아서…
천> 아니,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웃음)
김> 아뇨. 실제로 저희는 1970년대 골방에서 ?자본론?을 몰래 읽은 정도이고, 1980년대에는 대학 선생으로 있었지만 실제로는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는 사회과학의 새로운 경향들을 학생들과 함께 공부한 셈이지요. 아무튼 80년대 세대들처럼 치열하게 노선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해보지는 못한 셈입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저희 같은 70년대 중후반 세대는 전반적으로 이런 이념 내지 노선 논쟁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밑천이 짧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론적 쟁점보다는 구체적인 사실과 경험적인 자료를 통해서 현실에 접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격렬한 논쟁에서 나오는 정치한 논리에 대해서는 보통 “잘 모른다”하고 넘어가는 편입니다.
아무튼 ‘반미자주’나 ‘신자유주의 반대’가 전혀 별개의 과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함께 연동되어 있는 문제이고 따라서 그 해결 방안도 함께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우리 당이 다양한 정치 지향성과 계급?계층의 연합정당이라고 하면 어느 한 쪽을 선택하기보다는 다소 절충적으로 보이더라도 함께 풀어나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봅니다.
천> (웃음) 그러면 약간 다르게 질문해보겠습니다. 한국의 진보정당이 북한 문제 또는 북한식 사회주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는 대중적으로도 질문을 받을 내용인 듯합니다. 국민들 중에는 심심찮게 민주노동당이 북한 노동당과 무슨 관계냐는 질문을 하시는 분들도 있거든요.
김> 북한이 최근 들어 시장경제적 요소를 도입하는 등 경제체제의 기본 틀을 다소 변화시키고 있다고 하던데, 그 추이는 계속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의 시도 자체는 지금까지의 주체적 사회주의 체제의 한계 때문에 불가피하게 제기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북한이 추진해온 주체식 사회주의는 상황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사회주의’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주체를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민중들의 자주적 참여와 민주적 의사결정 메카니즘을 보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경제 봉쇄라는 외부적인 요인의 탓도 크겠지만 내부적으로도 자력 갱생을 통한 생산성 향상이 원천적으로 벽에 부닥친 것으로 봅니다. 자기 사회 내의 수많은 대중들의 의식주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내지 못하는 주체식 사회주의는 이미 실패한 체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민주노동당 강령에도 다소 모호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시장을 매개로 하는 사회적 조절과 계획’ㆍ‘시장과 계획의 적절한 조화ㆍ조절’ 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북한과 같은 체제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상태인데, 문제는 이 상태에서 어떻게 자본주의의 모순을 최소화하면서 새로운 더 진보적인 사회 질서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범진보진영 단일후보, 재창당 문제와 관련하여
천> 김 선생님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들었는데, 그런 일도 소급해서 올라가면 민노당 당원들 중에서 당지도부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재창당 문제’를 포함한 ‘범진보진영 단일 대통령후보 추진위(범추)’ 문제를 둘러싼 논란도 결국 민주노동당이 농민계층이나 호남지역까지 포함해서 아직 민중운동 전체를 ‘대표’ㆍ‘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민노당이 아직 포괄하지 못하는 다른 단체나 세력들과 함께 하려 하느냐, 아니면 이니셔티브를 발휘하면서 스스로 책임감 있게 이끌어 나가려 하느냐ㅡ 양자가 대립되지는 않지만 어디에다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 미묘하게 길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김> 실제로 민주노동당의 이념적 정체성이 모호한 편이고, 강령에서도 당의 계급적 기반이 모호한 상태로 정의되어 있죠. ‘노동자계급 중심성’이 ‘노동자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노동운동의 기반 위에서 다른 사회운동을 큰 틀에서 끌어 안고 나간다는 기조는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국면에서 진보세력이 다 대동단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서 강령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도 없이 외연만 확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범추’와 관련해서도 다소 우려되는 점은, 민주노동당이 지향하는 방향성과 진보세력이 합의해야 할 최소한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제대로 확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현실에 존재하는 운동세력을 모두 물리적으로 합쳐나가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통합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운동의 전진으로 보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진보정당으로서 견지해야 할 원칙, 예컨대 민중적 기반과 민주노동당 강령에 나타나 있는 ‘민주ㆍ평등ㆍ해방’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을 기본적으로 함께 하면서 나아가야지, 외연을 확대하는 데 강조점을 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범추’와 같은 틀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제기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중앙위원회의 결정(‘당내 후보를 먼저 선출하고 그 후보가 ‘범추’의 단일후보 선출을 위한 예비경선에 나선다’)에 기본적으로 공감합니다.
천> 그런데요. 그런 말씀은 입장을 바꿔서 다른 단체가 민주노동당을 바라볼 때, 그대로 적용되는 거 아닌가 합니다. 민주노동당의 강령이 타협과 모호함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을 ‘한 지붕 세 가족’ 또는 ‘네 가족’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공개적인 치열한 토론과 갈등도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어쩌면 저는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비판을 받았던 이유의 하나가 역으로, ‘한 지붕’ 아래 다 아우르려고만 하기 때문에 책임 있는 평가와 ‘판단’을 하지 않았던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임 있는 ‘판단’이 있어야만 ‘지도력’을 인정받을 수도 있고 틀리더라도 수정하면서 정체성을 확보해나갈 수 있는데 ‘세 가족’, ‘네 가족’을 두루 만족시키려 하다 보니까 아무 의미도 없는 결정이나 사후적인 판단만 있었던 게 아닌가…
김> 저는 그 문제에 대해 답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당의 전체적 진로에 대한 고민도 부족한 편이고요. 저로서는 부산지역의 당 활동의 한계와 그것을 극복하는 방안 등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는 전업적인 활동가가 아니라 ‘방과 후 활동’ 수준에서 당 활동에 참여해 온 셈입니다. 물론 시지부장을 맡으면서 책임과 역할이 더 늘어나겠지만, 그렇다고 아직까지는 교수직을 그만 둘 생각은 없거든요. 이런 사정이기 때문에 당의 문제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검토한 평가와 답변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부산지역의 경우 지역의 특성상 지금까지 그런 주요한 노선 문제 등에 대해 치열하게 논의하고 고민하지 못한 채 두루뭉실 넘어온 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다른 지부와 달리 내부적으로 큰 갈등이나 마찰 없이 그런대로 잘 유지되어 왔지만, 이런 현상 자체가 어쩌면 운동 수준이 별로 높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여하튼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몰라도 중앙에서 치열하게 대립되어 쟁점이 되는 문제들도 우리 부산지역의 경우에는 그리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은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현실 자체는 그렇게 각을 세우고 대립하고 갈등할 만큼 진전되지 않고 있는데, 논의와 토론만 지나치게 과열되어 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실제로는 두루뭉술하게 그냥 넘어온 문제들도 많은데요,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대중적 기반을 가진 여러 집단이 말 그대로 ‘동거’를 해나가는 우리 당의 현실상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의 발전 단계나 역량에 따라서 노선의 차이에 따른 긴장이나 갈등을 푸는 방식도 달라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분간은 지금처럼 다소 어정쩡한 상태로 갈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이번 대선 이후에는 당의 이념과 노선 등을 둘러싸고 보다 명료한 선택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2004년 총선에서는 더욱 명확해질 것으로 봅니다.
저희 부산지역의 경우에도 눈 앞의 대선도 대선이지만, 2004년 총선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를 둘러싸고 ‘연합’의 문제가 제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이번 지방선거에도 ‘연합군(?)’이 대거 입당하여 남구에서 구청장, 시의원, 구의원을 출마시켰습니다. 이들이 입당하는 과정에서 시지부 일각에서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지만, 저는 가능한 한 폭넓게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 선거 과정에서도 남구의 후보자들은 자신들의 역량에 기초해서 나름대로 헌신적으로 선거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에 대해서 시지부 차원에서 특별히 지원할 수 있는 역량도 없었고 그렇다고 통제를 하기도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일단 현실적인 조건을 인정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함께 해야 한다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가 이루어져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활동의 과정에서 동지적인 신뢰와 유대감들도 새롭게 생겨났다고 믿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당 활동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차이를 드러내고 확인하기보다는 차이를 전제하고 인정하는 위에서 같이 할 수 있는 부분을 더욱 적극적으로 확대해 나가려는 노력이라고 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신뢰와 유대감을 형성하고 더 나아가 화학적인 결합가지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 속에서 공동의 규범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공존과 규율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요컨대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생각하고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기풍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3. 지방선거 ‘승리’의 교훈
12월 대선에서 과연 민노당과 권영길 후보는 ‘변수’가 될 수 있을까? 겨울의 선거에서 민노당이 6월달에 얻은 8%를 넘는 지지율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지역주의와 소위 ‘사표 방지 심리’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대선에서는 비상(非常)한 수단으로 독자성과 차별성을 부각하지 않으면 명함을 내밀기 힘들 것이다.
진보 후보 출마의 독자적 의의를 알리고 차별성을 부각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권영길 대표가 그런 일을 감당하는 데 적절한 인물인지에까지 생각이 미치지만, ?이회창-노무현-정몽준-권영길?의 구도는 ‘현실’로서 주어지고 있다. 따라서 뱀처럼 유연하고 여우처럼 날렵한 적응력이 필요하다.
지방선거와 대선은 본질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김석준이 들려준 지방선거 이야기는 미디어와 돈ㆍ조직에 관한 문제에서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다른 부르주아 정당에 비할 때 돈과 조직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민노당으로서는 미디어 활용은 사활이 달린 문제이다. 그리고 돈과 조직은 ‘다르게’ 활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나는 민노당 부산지부가 다른 어떤 기성정당보다 먼저 지방선거를 준비했다는 점에 ‘감명’을 받았다. 일상적인 노동자 민중 투쟁에 결합하는 일 외에도, 선거를 통해 수권(手權)에 접근해야 하는 합법정당으로서 ‘선거준비’는 일상활동이어야 한다. 당이라면 늘 대선, 총선, 지방선거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당’은 논쟁하는 일로 밤낮을 다 보내고 집회에 몇 번 참석하는 일로 만족하는 ‘운동권’이어서는 곤란하다. 지금 당장 민노당의 중앙과 현장 조직은 대선 준비에, 나아가 2004년 총선 준비에 돌입해야 한다. 당장 지구당의 주민들과 만나고 있어야 하고, 꾸리는 조직을 일상적이며 실제적인 민중정치의 단위로 바꿀 방도를 계획하여야한다. 이런 거 하기 싫다면 그냥 만년 ‘군소정당’이나 ‘이빨만 까며’ 자족하는 ‘운동권 정치 조직’에 머물러 있으면 된다.
선거지형과 지역언론의 태도
천> 다시 선거 이야기 좀 묻겠습니다. 민노당 정도의 조직력과 자금으로 대단한 승리 아닌가요. 지방선거 승리의 1등 공신이 뭡니까? 저는 ‘한이헌 공천’이라는 노무현의 악수(惡手)만은 아니라 생각되는데요. 어떤 사람들은 “김석준이라는 상품”이 가진 메리트를 제1의 요인으로 들기도 하던데 저는 전혀 틀린 생각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김> 우선 무엇보다 선거 지형(地形)이 유리하게 짜였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한나라당의 경우 안상영이라는 낡은 인물이 내부 경선과정에서도 도덕적으로 큰 손상을 입으면서 권철현 의원에게 신승을 했습니다. 권철현 의원이 후보로 됐으면 저와 경력이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훨씬 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민주당 후보가 문재인 변호사가 아니라 한이헌 씨로 정해졌다는 점도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노창동이라는 무소속 후보가 출마를 포기했다는 것도 도움이 됐지요.
네 사람을 두고 여론조사를 노창동 씨가 저보다 3, 4월까지 앞서는 걸로 나왔습니다. 저보다 나이도 젊고 인물도 잘 생겼고(웃음) 학력도 서울대 법대 출신이라 그 분이 나왔더라면 표가 갈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 다음으로 지방언론의 보도가 크게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민주노동당 후보라고 차별하지 않고 다른 두 사람과 똑같은 시간과 지면을 할애해서 다루어 주었습니다.
천> 도대체 왜 그랬던 겁니까? 부산 언론이.
김> 솔직히 돈도 없고 조직도 변변치 못한 저희 민노당으로서는 기댈 수 있는 게 언론밖에 없잖습니까. 그런데 지역언론이 제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지역언론의 젊은 기자들은 언노련 조합원들이고 그러다 보니 민주노총의 후보이기도 한 저를 심정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또 지역 신문이나 방송사의 경우 실무를 책임진 간부들 중에는 저와 학연이나 지연으로 비교적 가까운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인연들이 내놓고 도와주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차별을 하지는 않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동안 지역에서 종종 방송 프로그램의 사회를 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지난 지방선거에서는 시장후보 초청 토론의 진행자를 맡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라디오 방송에서는 시사진단 프로그램의 사회자를 1년 정도 맡기도 했습니다. 지역 신문사에도 제가 가르친 제자들이 중견 간부로 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개인적인 관계가 보이지 않게 작용한 거 같습니다.
그리고 시장후보로 선출되자마자 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언론사 사장들을 예방한 것입니다. 언론사 사장들에게 비록 국회 의석 하나 없는 정당의 후보지만 그래도 전국적인 정당의 후보니까 다른 후보들과 차별하지 말 것을 요청하여 반승락을 얻어내었습니다. 실제로 차별 조치가 있으면 언론노조를 통해서나 민주노총을 통해서나 강력히 문제제기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송사 내부규정이었습니다. TV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5%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선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TV 토론이 시작되기 직전에 KBS 조사에서는 5%를 겨우 넘는 것으로 나왔고 MBC 조사에서는 5%가 채 안 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어쨌든 지역언론의 데스크나 일선 기자들이 보기에도 안상영은 ‘아니다’는 분위기가 있었고, ‘노풍’이 드세게 불기는 했지만 YS를 찾아가고 시장 후보로 한이헌 씨가 결정되면서 ‘별 재미 없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후보간 토론에서 제가 상대적으로 부각되고 또 저희들이 선거기간 내내 진행한 ‘정책 유세 투어’ 등이 참신하게 보임으로써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유세 도중 짜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지하철 유세를 벌였습니다. 별 달리 할 일도 많지 않고 해서 지하철을 타고 매일 1-2시간씩 다리 품을 파는 선거운동이었습니다. 다른 후보들은 지하철을 타더라도 잠시 폼만 잡고 사진만 찍고 말았던데 반해서 우리는 1-2 시간씩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유권자들을 일일이 만나 나갔는데, 그런 점들이 부각되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돈 없고 조직 없는 우리로서는 달리 할 수 없는 일도 별로 없지 않습니까? (웃음)
천> 특히 TV 토론에서의 활약이 전국적으로 알려졌었는데요.
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제가 TV 토론을 특별히 잘한 것도 아닌데 너무 띄우는 것 같아 부담스럽습니다. 사실 상대 후보들이 워낙 헤매고 더듬거려서 제가 돋보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상대 후보들은 5, 60대의 낡은 인물이고 워낙 흠이 많은 데 반해서 저는 한 일이 별로 없으니까 흠도 적었던 것이지요 (웃음)
천> 부산지역의 표심이랄까요? 상당히 유동적인 것 같습니다. ‘노풍’이 불었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고. 한나라당을 지지하지만 꼭 마음에 들어서는 아닌 거 아닌가요? 민주노동당이 약진한 것도 마찬가지고요. 12월에도 예측하기 힘든 거 같은데요. 지향성이 없는 거 아닌가요?
김> 아닙니다. 지향성이 명확하죠. 맹목적인 한나라당 지지입니다. 사람 보고 찍는 게 아니라 무조건 그냥 1번 찍는 구조로 고착된 거죠. 거기에 우리가 어떻게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서 파열구를 내는가 하는 게 문제지요. 지향성이 없는 게 아니라 무비판적으로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굳어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노풍이 불 때도 일부가 잠시 흔들린 것이지, 대다수는 맹목적인 한나라당 지지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고민입니다.
100억이 필요하다?
천> 선거에 참여한다는 것이 운동가로서 활동한다는 것과는 다르게 그야말로 부르주아 정치판에 같이 발을 담그게 된다는 것, 달리 이야기하면 ‘똥물’을 묻힌다는 의미도 갖는데, 그 점에서 민주노동당의 선거 활동은 어떻게 다른 건지, 궁금합니다. 심지어 ‘선거공학’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돈과 미디어를 얼마나 어떻게 쓰면 그에 비례해서 표가 얼마 나온다 하는… 이런 점은 어땠습니까?
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지난 연말에 <환경운동연합> 송년모임에 인사차 들렀는데, 거기서 누가 명함을 하나 주더라고요. 해가 바뀌고 나서 얼마 안 되어서 그 사람한테서 전화가 와서 만나자는 겁니다. 만나 보니까 바로 ‘선거브로커’였습니다. 자기가 문정수 시장 선거 때도 핵심 참모로 일을 했고 또 누구 선거 때도 참모 역할을 했다면서 한참 경력을 자랑하더니, 대뜸 돈을 얼마나 준비하고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래서 “돈은 아직 전혀 없다. 앞으로 모금을 통해서 최소한만 모을 것이다”라고 했더니, 당신은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데, 당선 되자면 ‘100억’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천> (웃음) 당선에 필요한 견적이 ‘100억’ 이라고요?
김> 그랬습니다. 하하하. 그래서 “알겠다. 우리는 우리 식으로 할 것이다”라고 했더니 머쓱해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 이외에도 간혹 연락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 같이 시지부나 선거캠프로 찾아오겠다고 그럽니다. 자기가 가서 척 보면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식으로도 잘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 다음부터는 연락이 오지 않지요.
천> 예. 재밌군요. 선거 비용 관련해서 좀 이야길 더 해주시죠.
김> 다른 지부에서는 저희가 15%를 넘게 득표해서 기탁금과 선거비용을 돌려 받아서 엄청 ‘부자’가 되었을 거라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웃음) 계산을 해보니까 저희가 실제로 쓴 게 별로 없었습니다. 시장후보 기탁금 5천만원 냈고요. 돈이 없어서 시장 후보 법정 홍보물도 4쪽짜리만 인쇄하고 8쪽 짜리는 아예 포기했습니다. 그 대신에 정당명부식 비례대표 시의원 홍보물을 8쪽 인쇄해서 배포했습니다. 이 두 종류 홍보물 인쇄 비용으로 1억5천만 원 정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드는 비용 2억원에다가 선거 유세차를 빌리고 유세단을 꾸리는 비용 등 제반 활동비용으로 3천만 원 정도 들었습니다. 선거이후에 선거비용 보전 신청을 해서 선관위에서 나온 돈이 기탁금 반환액까지 포함해서 2억6백만 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별달리 돈 쓴 게 없는 셈이지요. 전화홍보도 못 했고요. 막판에 인쇄비를 먼저 지불하고 나서는 후보 기탁금이 모자라서 이리저리 빌려서 채웠습니다. 보전을 못 받았다면 그런 게 다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겠지요. 여하튼 선거 과정에서 이리저리 빌린 돈이 6천5백만 원 정도 되었는데, 선거비용을 되돌려 받음으로써 다행히 빚을 갚을 수 있게 된 거죠.
천> (웃음) 참 놀라운 일이네요. 선거로 ‘남는 장사’하신 거니까 말입니다. 남은 돈은 어떻게…?
김> 예. 2000년 4.13 총선 이후 갚지 못하고 남은 빚이 상당했습니다. 우선 그 빚과 이번 선거 과정에서 진 빚을 갚았습니다. 그리고 시의원으로 출마했다가 기탁금과 기본적인 선거비용을 보전 받지 못한 지역에 대해 부분적으로 재정 지원을 했습니다. 그러고도 돈이 조금 남아 있는데, 우선 시지부 상근 활동가를 보충할 생각입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시의원 1명과 구의원 2명을 당선시켰는데, 그 분들의 의정활동을 지원하는 활동가를 우선 충원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시지부 운영 과정에서 매월 5백만 원 이상 적자를 내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지원도 시급합니다. 이럭저럭하다 보면 어디 갖다 붙일 데도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준비를 더 오래 했다
천> 선거 승리 요인에서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요인 외에 들 수 있는 건 없나요?
김> 사실은 우리가 준비를 오래 했습니다. 갑자기 민주노동당 후보가 선거판에 끼어든 식은 아니라는 거죠. 2000년 1월 30일에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뒤 바로 4.13 총선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전교조 출신 박순보 선생님이 부산 연제구에서 출마를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3번째 출마였습니다. 이 때 한나라당에서는 권태망이라는 시의원 출신의 젊은 후보를 공천했고, 민국당 후보로는 이기택 씨가 출마했습니다. 이런 선거 지형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번에는 박순보 후보가 당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전 두 번의 선거에서 25% 가까이를 득표했기 때문이지요.
선거 판세 분석을 두고 논란이 적지 않았는데, 당선 가능성이 있으니까 오히려 “민주노동당 간판을 달고 출마하면 더 불리한 것 아니냐”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혼선이 있었고, 운동과정에서도 ‘당선’에 집착하다 보니까 선거비용은 비용대로 많이 쓰고 아줌마들을 선거운동원으로 고용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민주노총에서 결합한 운동원들이 와서 아줌마 운동원들을 보고는 황당해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한마디로 어수선했지요. 결국 8.9% 밖에 득표하지 못하고 낙선하면서 부산시지부는 심각한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무소속으로 나가서 25%를 받았던 분이 민주노동당 간판을 달고 나가서 8.9%밖에 못 받았으니, 후보는 후보대로 낙담하고, 당원들로부터는 선거 운동 과정에서 원칙과 책임의 문제가 제기되고, 선거 비용은 엄청 들어 갔고, 부채는 부채대로 남고.
천> 거 참 ‘교훈적인’ 상황이네요.
김> 예… 당시 저는 시지부 정책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자칫 잘못 하다가는 당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총선 평가는 평가대로 엄정하게 해야 하지만, 앞을 보고 미리미리 준비를 해 나가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2000년 6월 ‘2002년 지방선거의 전망과 과제’를 발제하면서 지방선거 준비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4.13 총선에서의 패배와 같은 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찌감치 지방선거 특위를 구성하여 미리 선거에 대비한 준비를 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 2000년 8월부터 지방선거 특위에 정책팀과 조직팀을 만들어 체계적인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조직팀은 기대만큼 진전시키지 못했지만, 정책팀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여하튼 지방선거 준비를 서둘러 공식화함으로써 총선 후유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죠.
그 뒤로 선거방침(안)에 대한 토론을 당원 수준으로 확산시켜 가면서, “어차피 부산은 한나라당 1당 지배 구조이기 때문에 제2당을 목표로 설정하자”는 합의를 도출했습니다. 민주당을 제친다는 게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방 선거의 현실적인 목표는 비례대표로 시의원을 확보하는 것이고, 득표면에서는 부산의 민주당 고정 지지표 12-3%를 넘어서는 걸 목표로 삼자는 거였습니다.
이처럼 지방선거 준비를 미리부터 해 왔는데, 인지도와 지지도가 올라가지 않아서 고전을 했습니다. 제일 심각했던 때는 노풍이 거세게 불던 3-4월이었습니다. 노풍이 불면서 우리가 처음에 상정했던 구도가 다 깨졌거든요. 만약 노무현이 문재인 변호사를 시장 후보로 정했으면 치명적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약 문재인 변호사가 민주당의 후보로 확정되면 우리는 민주당 측에 시민 예비경선을 제안할 생각이었습니다. 문재인 변호사 측이 시민 예비경선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민주노총 조합원을 최대한 조직해서 총력 대응을 하고 만약 지게 되면 문재인 변호사를 지지하는 운동을 하겠다는 각오까지 했던 거지요. 그런데 문 변호사가 고사를 하고 한이헌 씨가 후보로 결정되면서 노풍도 차츰 시들해져 버렸지요.
천> 오~, 선거연합을요? 그런 일이 있었던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노무현으로서는 ‘한이헌’이 ‘똥수’ 중에 똥수였던 거네요.
김> 딱히 선거연합을 하기로 했다기보다는, 문재인 변호사가 출마하는 경우 최악의 상황에서 그런 방안도 미리 구상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여튼 한이헌 씨가 후보로 나오면서 우리로서는 한결 선거운동 하기가 쉬워졌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인지도가 낮아서 고전했지만, 선거 막바지에는 분위기가 뜨면서 우리가 2등하는 줄 알았습니다. TV 토론을 한 번 한 뒤에는 언론에서 세 후보를 똑같이 다루어주고, 또 나중에는 오히려 저희한테 편파적(?)이라 할 만큼 보도태도가 우호적으로 변했습니다. 민주당과 한나라당 후보는 매일 센텀시티 문제, 여자 문제 등을 가지고 치고 받는 데 반해서, 우리는 정책 중심의 깨끗한 이미지를 부각시켜 차별화했던 거죠.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시민들을 만나면 하루하루 반응이 달라지는 게 느껴지는 거예요. 지지도가 높아지는 게 유세 현장에서 실제로 느껴졌고 또 “야, 내가 니 선배 아이가, 니 찍어주께”하면서 연락이 계속 오고 “나는 한나라당 당원인데 실제로 임마들은 영 아이다 아이가, 찍기는 니 찍는다” 이런 반응이 계속 오는 거예요.
사실 우리는 돈이 없어서 자체 여론조사를 한 번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안상영 캠프나 한이헌 캠프에서 조사한 자료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우리에게 넘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보다 선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선거 막바지에 가면서 각 당의 여론조사에서도 우리가 2등을 간발의 차로 추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다가 거리에서 만나는 시민들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저는 선거운동 마지막 날 부산역 유세에서는 “드디어 우리가 은메달을 확보했습니다.”라고 장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막판에 뒷심이 좀 부족해서 동메달에 그쳤지요. 결국 공개적으로 뻥(?)을 친 셈이 되고 말았지요. (웃음)
천> (웃음) 주로 어떤 계층이 많이 찍었습니까?
김> 글쎄요. 제가 만나보니까 반응이 많이 온 계층은 4-50대 아저씨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상하던 것과는 딴판이었지요. 우리는 주로 30대를 표적집단으로 삼았거든요. 그런데 만나봐도 30대는 별 반응이 없는데 반해서 4-50대들이 먼저 알아보고 반가와 하고 그랬습니다. 즐거운 혼란이었습니다. 4-50대 한나라당 지지표에서 이탈표가 많이 넘어 왔고 다음으로는 3-40대 주부였던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젊고 잘 생겨서 그런지… (웃음)
천> 그러면 목표를 결국 달성한 겁니까?
김> 우리가 설정한 것은 지역에서 제2당이 되는 것, 제도권 진입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 등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선거를 통해서 당 조직을 활성화하고 당원을 확대하는 것, 그리고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계급투표를 이끌어내는 것 등이었습니다. 12월에 있을 대선을 위해서라도 조직 활성화와 계급 투표의 조직은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실제 득표는 공탁금을 되찾을 수 있는 한도인 15%를 넘게 얻었지만, 냉정하게 평가하면 내부적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건 여담이지만 저는 며칠 뒤에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한진중공업에서 45세 이상 노동자 140명을 일방적으로 해고하거나 인사조치하는 일에 대한 규탄집회가 지난 4월 26일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민주노총 지도위원으로서 요청 받은 연대사를 하다가 말미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5년전 대선 때 권영길 대표가 100만표만 모아주면 정리해고 막아낸다 했는데 50만 민주노총 조합원조차 표를 주지 않아서 30만표 받는데 그쳤다. 그러니 자본과 권력이 노동자들을 우습게 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지난 4년 내내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당하고 구조조정을 당해 왔다. 당신들이 이렇게 쫓겨나는 것도 노동자들이 정치적인 힘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정치적으로 힘을 모아내야만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을 막아낼 수 있다. 이번에 내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후보로 부산시장 선거에 나섰는데 힘을 모아줄 수 있느냐?” …그랬죠.
딱 한마디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한진중공업 노무팀에서 몰래 비디오로 찍어서 경찰에 사전 선거운동 혐의로 고발을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진중공업 노조는 이런 사실도 모르고 또 안다고 해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
어쨌든 부산의 경우 선거기간 중에 당원이 약 1천명 정도였는데, 당원들은 10만원 이상의 특별 당비를 내기로 대의원대회에서 결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진보돼지 키우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의 경우 대의원대회가 무산되는 바람에 조직적으로 결의를 한 것은 아니지만 운영위 차원에서 조합원 1인당 1만원 정도의 정치 자금을 모금하기로 정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별당비는 당원수로는 약 30%, 금액으로는 약 4천만 원 이상이 모아졌습니다. 그리고 선거운동 기간 중에 실제로 선거운동에 결합하여 활동한 당원은 약 10% 정도 되었습니다. 민주노총의 경우 조합원이 3만명인데, 실제로 모금이 되어 저희 시지부로 넘어온 정치자금이 2천만원 정도였습니다. 물론 정치자금으로 모은 돈 중에서 다른 꼭 필요한 곳에 지출한 부분도 있다고는 합니다만, 2000년 4.13 총선 때 연제구에 출마한 박순보 선생님의 선거캠프에 민주노총에서 모아준 돈이 5천만 원 정도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기대에 상당히 못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6.8%는 뜬 표다
천> 그럼 돈 낸 사람은 30%, 몸으로까지 움직인 당원은 10%…
김> 그렇죠. 민주노총은 약 15% 정도가 선거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보면 조직의 확대 강화, 계급 투표의 조직이라는 원래 목표는 그다지 충실하게 집행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번 시장선거에서 19만표 이상을 얻었지만, 이 표들은 사실상은 ‘뜬 표’라는 거죠. 이 표가 다음 선거에서 우리의 지지표로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떠 있는 표들을 다음 선거에서 어떻게 확실하게 우리 표로 만들어낼 것인가가 아주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요컨대 지난 지방선거에서 우리의 조직적 대오들은 실제로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다, 그래서 거품이 굉장히 많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하고 올바로 챙겨내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라도 참패를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 그 19만표를 ‘뜬 표’가 아니게끔, 부산시지부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김> 특별한 처방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저희 부산시지부에는 제대로 돌아가는 분회(分會) 조직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분회를 만들어 챙기고 그것을 기반으로 지구당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과제지요. 부산시지부에는 공식적으로는 지구당 조직이 2개가 있고 지구당 준비위가 3개 있습니다. 나머지 3개는 지회고요. 그런데 지구당이나 지구당 준비위마다 들여다 보면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습니다. 저는 시지부장에 취임하면서 조직강화특위를 구성하여 조직을 확대 강화하는 사업에 가장 중점을 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쨌든 시의원을 한 사람 당선시켰습니다. 우리끼리는 우리 당의 시의원을 농담 삼아 ‘의장급’ 초선의원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부산 시의회에서 우리 당 의원은 거의 의장단만큼 지역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런 부분을 활용해서 시정(市政)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 비판하고 개입하려고 합니다. 저희들은 벌서부터 지방자치위원회를 만들어서 세미나, 전문가 간담회, 정책 공청회 등의 프로그램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환경, 복지 등 관련 현안에 대해서 시민단체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 조례를 제정하거나 사회적 쟁점화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벌여 나갈 생각입니다.
당원들 면면을 따져보니까 당비 내는 정도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듯합니다. 다른 한편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제대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해서 휴지(休止) 상태에 있는 당원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9월부터는 정책팀을 중심으로 ‘진보아카데미’를 개설해서 진보정당 운동이나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징, 또는 부산 지역 현안 문제 등에 관한 전문가 강의를 시작할 계획입니다. 이 강의를 듣고 학점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할 생각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당원이 당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기회를 대폭 늘여나갈 구상입니다.
4.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
인터뷰를 통하여 나는 이 인물이 매우 의식적인 운동가이며 정치력 있는 활동가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지방’의 ‘교수’라는 위치를 갖고 있다. 특히 그가 현직 ‘교수’라는 점은 여러 가지 물음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은 ‘지식인과 사회운동, 또는 정치참여’라는 원론적인 문제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교수’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과 말에만 능한 경우가 많은 백면서생의 대표격인 존재이며, 적극적으로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나서는 것보다 소극적으로 자기 이해를 지키는 데 골몰하며 사는 데 능숙한 존재들인 것이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래서 ‘정치’나 ‘현장’이 아니라 한 발 떨어진 자리를 선호한다. 능력이 안 되는 경우가 많기도 하지만, 현실의 ‘똥물’에 발을 담그느니보다 한 발 물러서서 ‘이빨로만’ 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폼도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그런데 김석준 교수가 ‘시장 후보’가 아니라 시지부장직을 흔쾌히 맡은 것에 대해서 민노당의 일각에서는 높이 평가한다는 말을 들었다. 시장 후보로 나서는 것은 ‘폼 나는’ 일일 수 있지만 시지부장 같은 일은 그야말로 ‘박박 기는’ ‘현장’이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된 일련의 물음에 대한 김석준의 답은 간명했다.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 이건 욕심 있는 사람들의 답변이다.
김> 시지부장직도 흔쾌히 맡은 거 아닙니다. (웃음) 처음에는 사양을 했었습니다. 솔직히 국립대 교수를 하면서 정당 그것도 진보정당의 시지부장을 겸임한 사례는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거를 통해서 획득한 성과를 어떻게 해서든 조직적인 성과로 챙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한번 더 떠맡기로 한 것입니다.
천> 지방선거를 계기로 ‘김석준’에 대한 주변의 ‘기대’가 높아져서 앞으로 지방선거가 있으면 부산시장 후보로, 또 총선이 있으면 국회의원 후보로, 나아가서 저번처럼 대통령후보로도 거론되실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인생의 행보가 지방선거를 계기로 달라졌다고나 할까요? 계속 현재의 포지션과 부산을 지키실 겁니까? 포부가 있으시다면요?
김> 포부랄 것은 특별히 없습니다. 이제까지는 떠밀려서 일을 해 온 상황이 많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진보적인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무를 수행하는 방법의 하나로 진보정당 운동에 참여했던 것이고, 그러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모르죠 뭐, 학교에서 쫓겨나거나 하는 변화가 있으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웃음) 개인적인 희망은 진보적인 지식인으로서 학교에서 공부하고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생활 정치ㆍ진보 정치 영역에 참여하고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의 요구와 역할이 요구된다면 지금가지 그랬던 것처럼 고민 고민하다가 상황에 맞게 결정할 수밖에 없겠지요. 정치적 포부나 욕심 같은 건 별로 갖고 있지 않습니다. 부산시지부 내부적으로도 2004년 총선에는 절대로 ‘떠밀려서 출마를 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을 해 놓았는데, 그 때 가서 또 어떻게 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지부장을 맡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정치가’나 ‘정당 활동가’라는 자기 정체성을 명확히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 지역당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천>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교수님들은 자기 정체성과 역할을 굳이 스스로 ‘한정’하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또 현실의 ‘때’나 ‘물’을 묻히지 않으려 하고요. 그런 면에서 보면 선생님께서는 이미 ‘현실’ 쪽으로 좀 명확하게 한 발 담그셨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지식인들은 ‘학자로서의 삶’이나 ‘공부’에 대해서 욕심을 갖는 경우도 많지요. 선생님은 제가 볼 때 부산시장으로서도 매우 ‘적임’이신 것 같은데요.
김> 솔직히 저는 공부는 잘하지는 못하는 편입니다. (웃음) 그래서 대단한 학문적인 성취를 이루려는 욕심은 별로 없습니다. 솔직히 저는 연구 성과를 많이 내는 교수보다는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강의를 잘 하는 교수를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지역 현안문제에 개입하고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치는데 필요한 자료나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부산시장으로서의 역할은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웃음)
천> 역할을 ‘진보적 지식인의 자리’로 다시 한정하시려 한다는 뉘앙스도 없지 않은데요. 민주노동당도 많은 좋은 분들을 ‘발굴’해내고 그 분들의 ‘등을 떠미는’ 일을 해나가야 할텐데, 선생님의 경우에는 이제 ‘발굴’ 당할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되었다고 느껴집니다.
김> 시지부장 맡으면서 ‘토끼 두 마리를 잡으려다 둘 다 못 잡고 마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두 배로 노력하겠다’는 글을 썼습니다. 다른 걸 떠나서 앞으로 무엇을 하든 끝까지 부산 사람으로 살면서 부산을 위해서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부산을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잘 사는 도시로 만드는 데 개입하고 기여하고 싶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조직과 활동을 통해서 한나라당에 맞서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키워내는 게 제가 맡아야 할 중요한 과제라 생각합니다. 대선을 잘 치르고 나서, 2004년 총선에서 부산의 17개 선거구 중 최소한 10개 이상의 선거구에 경쟁력 있는 후보를 출마시켜 명실상부한 제2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 지부장으로서 현실적인 목표입니다.
천> 마지막으로 원론적인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국제화시대이면서 지방화시대라 그러는데요. ‘지역운동’이 갖는 ‘진보적’ 의의는 무엇인가요? ‘지역 발전’이나 ‘지역 문제’에 대한 다양한 계급적 관점이 있을 수 있을 듯합니다만, 사실 한국 사회에서 중앙집중화를 막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데요.
김> 맞습니다. 한국사회는 날이 갈수록 중앙 집중화가 심해지고 중앙과 지방의 격차는 더욱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사회를 전체적으로 개혁하고 변화시키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지역간 격차와 지역 불균형이 확대되는 조건에서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주체적인 역량이 지역에서 만들어지지 않으면, 중앙 집중 구조를 바꾸어내기 어렵습니다. 이건 상식적인 이야깁니다.
문제는 지역 주체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입니다. 기득권층들은 자신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관변적 논리를 만들어낼 겁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지역의 기층민중들이 지역을 변화시킬 주체로 서지 않으면 정말 우리가 바라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기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히 민중에 근거하는 또는 밑으로부터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나가겠다는 결의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밑에서부터 지역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 것인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브라질과 같은 사례는 아주 중요하다고 봅니다.
한편에서는 노동조합이나 생산현장에서 조직된 힘이 지역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생활공간에서의 주민 조직화가 시급합니다. 그리고 생산현장과 생활공간에서의 주민 정치를 매개할 수 있는 게 정당조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민주노동당의 분회조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는 겁니다. 현실적으로는 주민조직도 기득권 세력에 의해 강고하게 포섭ㆍ장악되어 있습니다. 그걸 뚫어내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애초에 제 친구들이 생각했듯이 ‘연합해서’ 지역에서부터 ‘서울을 포위 공략해간다’는 문제의식과 통하는 것 같습니다. 민주노동당의 경우 울산이 중요한 거점인데, 울산으로부터 부산 경남을 포함하는 영남권 벨트를 만들어내고, 다른 한편으로 인천을 중심으로 경인지역 벨트를 만들어내고, 이런 흐름들이 결집되고 확산되면 중요한 힘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서울은 워낙 ‘저들의 진지’가 공고하기 때문에 오히려 지역에서부터 우리의 진지를 하나씩 만들어나가자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울산에서의 승리가 엄청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서울 외곽의 소도시에서도 민주노동당이 어떤 모델을 만들어내느냐가 큰 의미를 가질 듯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제2도시 부산이 갖는 정치적 의미도 아주 중요하지요.
천> 장시간 정말 감사합니다.
‘수권을 목표로 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민노당과 그 성원들이 수권의 능력을 가졌다거나 가까운 미래에 그것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비전과 이상에 걸맞는 능력을 전혀 보유하지 못한 것이 현재의 민노당이라 생각한다. 민노당의 고통은 이상과 원칙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상과 원칙은 과잉되어 있고 ‘현실’과 실제적 능력은 결핍해 있기 때문에 초래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뇌와 입은 늘 비대하고, 손과 발은 가늘고도 둔하다.
그러나 ‘지방자치’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 듯하다. 부산과 김석준, 그리고 울산의 예들은 지방의 권력을 잡고 ‘행정’할 수 있는 현실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경험이 확산되고 축적될 수 있기 위한 계획을 지금 당장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이 인터뷰에 도움을 준 정종권 민주노동당 구로을지구당위원장께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