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국민경선은 이인제가 사퇴함으로써 초반과 달리 싱겁게 끝났지만, 정권 재창출이 어려울 것 같던 민주당이 이로써 그 가능성을 만들어 내었다는 점에서 분명 성공적이었다. 여론조사에서 매번 한나라당에 뒤지던 것이 지금은 어떤 경우에도 민주당 후보가 최소 10여% 이상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급변의 중심에는 물론 노풍으로 상징되는 노무현 개인이 있다. 그러나 노풍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노사모‘)이라 할 수 있다. 노사모는 노무현이 부산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가 지역감정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안타깝게 떨어진 2000년 4.13 총선 직후, 지지자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모임으로 4월 말 현재 회원수는 3만 5천을 넘는다.
<퍼슨웹>은 노사모에 대한 세간의 무수한 분석과 소문을 뒤로 하고 일단 있는 모습 그대로의 노사모를 만나고자 하였다. 지난 4월 6일 인천에서 치뤄진 민주당 국민경선 현장으로 달려 갔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앞으로 <퍼슨웹>은 노사모 밀착 취재를 시작으로, 12월까지 대선과 관련하여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낮게 깔린 안개
4월 6일(토) 오전 10시 무렵, 신군과 낙성대역에서 만나, 디지탈 카메라와 녹음기 하나 달랑 들고 인천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노사모 밀착 취재지로 인천을 택했던 것은 서울에서 가까워 취재하기가 수월하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수도권 첫 경선지이며, 유동인구가 많은 탓에 지역색이 옅은 곳, 부평 대우자동차가 노동자 탄압의 한 상징이 되었음에도 노동자의 세력은 여전히 미약한 곳, 전체 경선에서뿐만 아니라 대선에서도 결정적인 승부처가 될 서울/경기의 표심(標心)의 향방을 보여줄 곳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서울/경기 경선을 치르기도 전에 이인제가 사퇴함으로써, 서울/경기의 표심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다. 따라서 인천 경선의 결과는, 어느 정도의 억측과 비약을 염두에 두더라도, 2002 대선을 예측하는 데 상당 부분 암시를 줄 것으로 생각한다.
무턱대고 나선 기습 인터뷰인지라, 노사모 회원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할지 ‘당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하철 안에서 몇 분간 고민 끝에 내린 성급한 아니, 최선의 결론 – 되는 대로 부딪쳐 본다!
도화역에 내려 개표소를 지나자마자 노사모와의 첫 만남은 시작되었다. 웬 청년 서넛이 노란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모여 있어, 가투 현장의 전투조인가 했는데, 노사모 인천지역 회원이란다. 길을 안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출구를 나서자, 전날부터 내리던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낮고 우중충한 회색 건물 사이로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봄가뭄을 해갈하는 봄비련만, 스산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춥기는 또 얼마나 춥던지. 경선이 열리는 인천전문대 높은 건물은 안개 속에 휩싸여 그 높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안개는 우리의 들뜬 기분을 뜻모를 우울함으로 일순간 덮었는지도 모른다.
압구정동 아줌마 – 이민을 생각하지 않은 사람 있을까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30분 쯤. 경선은 2시 30분에야 시작하지만, 노사모 일반 회원들이 11시에 모여 선전전(꼭 운동권 용어 같지만)을 한다길래, 미리 왔던 것이다. 그런데 비 때문인지 아직 응원전을 펼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날씨 탓에 아무래도 투표율이 저조할 것 같았다. 장비를 점검하는 한편, 건전지를 사려고 체육관 매점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우리는 첫 인터뷰이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처음은 부드럽게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들과 함께 컵라면을 먹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인터뷰 전문 웹진의 ‘기자‘라고 소개하는 동시에 명함을 내밀며, 한두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느냐며 정중하게 다가섰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고 (대단하죠?) 압구정동 산다는 아주머니는 노사모 회원의 대체적인 성향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남편,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왔다는 아주머니는,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던 남편이 노사모 압구정동 회장을 하며 매주 열성이라고 하였다.(인터뷰 하는 순간에도 남편은 밖에서 홍보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좀더 깨끗한 나라를 만들어 주고 싶어” 노사모에 가입했다며, 이민을 갈까도 생각했었는데 노무현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했다.
이> 해외로 이민 갔던 사람들이 후회하고 있어요. 솔직히 이민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근데 노짱 때문에 희망이 생겼어요.
남편이 사업을 한다는 41살 아줌마의 얼굴에는 안정된 생활에서 오는 편안함과 동시에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묻어 났다. ‘노짱‘이라니, 그 나이에 쑥스럽지는 않느냐고 했더니, “저도 신세댄걸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노사모, 잔치판을 벌이다
김밥과 컵라면으로 아침겸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체육관 앞으로 나서니, 12시 조금 지난 시간. 각 후보들의 운동원들은 본격적으로 선전전 시작을 시작했다. 노란색 옷을 입은 노사모 회원들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열띤 선전전을 펼치고 있었다. 다른 후보들의 운동원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연령대와 엉거주춤한 모습에서 확신하건대, 동원된 사람들임이 분명했다. 50대 이상이 대부분인 이인제 진영은 젊은이 하나가 나서서 응원단장처럼 분위기를 주도하며 “이인제를 믿습니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정작 그 자신도 진정으로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노사모의 젊고 자발적인 분위기와는 확실히 달랐다. 노사모의 한 회원은 그런 분위기를 잔치에 비유했다. 자기가 좋아서 참여하고 함께 즐기는 잔치! 말하자면, 노사모는 잔치판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서너 명을 붙잡고 노사모에 가입하게 된 동기를 물었다. 예쁜 꼬마 둘과 부인과 함께 나온 이영근씨(37, 대한항공 조종사)는 독학(?)으로 노무현을 지지하게 되고 노사모에 가입하게 된 경우.
이> 97년에 이회창을 찍은 건 몰라서, 별 대안이 없어서 그랬어요. 그간 5년 동안 직장 생활하면서 고민하며 공부했어요. 이회창과 노무현에 대한 책,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을 읽었지요.
그는 “애기를 낳고 앞으로 어떻게 살까 고민하다, 내가 믿는 후보를 따라다니며 응원하고 돈을 기부하는, 이런 행동적인 면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고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 가운데는 대학 때 학군단(ROTC)이어서 ‘운동‘과는 거리가 있었던 30대 후반의 그도, 또래들과 함께 괴로워했던 부조리한 현실의 문제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퍼> 노사모의 주축이 3-40대라던데요?
이> 그렇죠. 회사 안에서도 젊은 조종사들에게 설문조사 비스무레한 걸 하면 노무현이 90%이상 나옵니다. 많게는 97-8%의 지지를 보일 때도 있었구요.
퍼> 왜 지지율이 높다고 생각하세요?
이> 깨끗하다는 이미지와 올바른 길을 걸어 왔다는 생각 때문이죠. 소신이 굳고 뚜렷한 비리 없고, 게다가 젊고 신뢰성이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해요.
얘기를 나눈 이들은 하나같이 노무현의 깨끗하고 소신 있는 이미지를 들었다. 그들은 노무현의 지난 행적에서 미래 한국 사회에 대한 희망 비슷한 것을 읽어내는 것 같았다. (그러한 독해가 옳으냐, 그르냐를 시비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회원들에게 노란 수건을 나눠 주던, 앞 머리에 노란 물을 들인 ‘젊은 오빠‘(42, 건설 임대업)의 생각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사업과 함께 청소년 소공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의 대답을 들어보면, 노사모의 자발성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아픔들, 좌절들을 다시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노무현을 지지하면 그런 시대를 앞당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름대로 삶을 진지하고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들의 소박한 정치의식, 그 순수함이 노사모를 움직이는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면, 너무 성급한 결론일까? 조종사의 아내는 조금 뒤로 물러서서, 인터뷰하는 남편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할머니 꼭 싸움꾼 같으시네요?
젊은 노사모들과 나란히 어깨를 걸고 응원가를 부르며 춤을 추던 정정순 할머니(68세, 민가협 소속)의 옴푹 들어간 입에서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힘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노무현도 결국 변하지 않겠느냐는, 약간은 ‘거슬릴지도 모르는‘ 말에, 할머니는 깨끗하고 소신 있는 사람,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어도 애초의 정치적 신념을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이라며, 너무도 당연한 대답을 한다는 듯이 힘주어 말씀하셨다.
“그럴 리가 없어. 절대로. 노무현은 믿어.”
오랜 세월을 민주화 투쟁을 위해 싸우셨을 할머니의 얼굴에는 스스로 말씀하셨듯, 투사의 투지와 단호함이, 그러나 자신과 화해한 평온함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그가 그토록 사랑한다는 ‘노무현이가‘ 그의 가슴에 혹여나 아픔을 주진 않을지.. 나는 혼자 불안했다.
외롭네요
선거판에는 온갖 인간들이 다 몰려 들었다. 경선 후보나 그의 지지자 외에도, 인천 시장 경선에 나서거나 민주당 최고 위원 선거에 나선 정치인들과 그의 운동원들이 오히려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들은 마치 자신이 이 날의 주인공인 양, 인사하고 악수하기에 바빴다. 선거운동원들은 읽지도 않을 팜플렛을 나눠 주고, 한 귀로 들어도 다른 귀로 곧 흘려 버릴 후보의 이름을 연신 외치고 있었다. 적어도 ‘종이 쪼가리‘ 나눠 주는 데에는 인심이 후했다.
‘판‘이란 것은 모두가 시끄럽고 뒤죽박죽이며, 그래서 더욱 흥이 있는 것일까. ‘작년에 왔던 각설이‘ 흥얼거리며 춤을 추는 엿장수도 신이 났는지 혼자서 가위를 쩔렁거리고, 뜨거운 커피와 음식을 파는 신판 ‘장돌뱅이‘도 이 날 만큼은 한 몫 챙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노사모의 잔치판을 한결 더 ‘잔치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떠들썩함과 흥겨움 속에 ‘안티조선‘ 운동원들과 공정선거 시민 감시 기구인 ‘옴부즈만‘이 눈에 띄였다. 경선 현장에서 그들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도 달리 구호를 외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조용히 피켓을 들고 있었다. 거기에서 우연히, 옴부즈만 활동을 하고 있는 김태식씨(95년 서울대 학생회장)를 만났다. 그의 말에서 경선에서의 ‘시민 옴부즈만‘의 역할이라는 것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김> 저희가 좀 외로운 게 있어요. 저희를 둘러싸고 지지해 주는, 특히 노사모의 젊은 분들이 많은데, 문제는 오해가 생길까봐, 저희에게 박수 쳐주고 지지해 주는 분들을 멀리 가라고 좇아(?)내야 해요. 저희는 거리감을 둔 유권자 운동을 하는 것이고…
‘외롭다‘는 것은, 겉으로 볼 때, 경선이 역대 어느 선거보다 공정하게 치뤄지고 있어서, 공정선거 감시단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공정한 선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는 유권자들에게 공정한 투표 행위를 설득하는 것 못지 않게, 선거판의 불공정한 담론에 대한 비판에도 적극적이어야 한다. 지역색이다, 색깔론이다, 하면서 폭로와 성토, 고발은 많지만, 정작 후보 자신의 정책과 이념에 대해서는 후보 자신도, 대부분의 국민도 별 관심이 없는 현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진보적인 담론은 커녕, 유권자인 국민들의 관심사는 온데간데 없고, 목소리 큰 기득권 세력들의 ‘말잔치‘만 웅웅거릴 뿐이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공정선거 운동은 수동적인 감시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 같다. 진정 국민들이 원하는 새로운 담론을 찾아내어 선거판에 제기함으로써 판 자체를 쇄신해야 할 것이 아닌가?
내분이라구요?
2시가 되면서 경선대회가 시작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춥기도 해서,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 추미애 의원이 인사를 하고 있었다. 엥~ 특종의 기회를 찾고 있던 하기자! 디지털 카메라에 탄알(건전지)을 새로 장전하고, 추의원에게 다가간다. 역쒸, 하기자의 과감한 대쒸!
퍼> 인터뷰 전문 웹진의 기자 하시진입니다. 한두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퍼슨웹>이 국회의원을 인터뷰 하기는 처음이다. 그런 부류는 웬만해서는 안 한다. 하는 일 없이 말 많고, 거들먹거리는 인간들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해 우리 ‘퍼슨‘들이 갖는 묘한 자신감은 이런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에두르지 않고 곧장 상대의 아픈 곳을 찌른다.
퍼> 추의원님은 이틀 전(4월 4일), 노무현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셨는데, 민주당 내에 내분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음모론, 색깔론까지 동원하며 이인제가 노무현을 공격하고 나선 것은 어찌 보면, 민주당 자체의 존재에 대한 심대한 도전이요, 공격이라 할 수 있다. ‘내분‘이라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인데, 추의원은 그 말에 긴장을 한 듯, “내분은 아니구요.” 하며 극구 부인하였다. 그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약간은 길게, 공개 지지 선언은 ‘이인제의 무책임한 말에 대한 질책의 의미‘라고 하였다. 당내에 약간의 잡음은 있으나 그다지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고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민노당원‘(노무현), ‘한나라당원‘(이인제), ‘민주당원‘(정동영)이 모두 민주당의 이름으로 경선에 출마한 현실은, 그 자체가 ‘웃긴 짜장‘이지만, 머지 않아 분열의 조짐을 보일, 미세한, 그러나 치명적인 균열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려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중도에 경선 사퇴를 결정한 이인제는 경선이 끝난 지금, 김종필, 박근혜와 접촉을 하며 중부권 신당설을 흘리고 있다. 탈당은 시기 문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인제가 노무현을 ‘급진좌파‘로 규정하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은, 노무현의 ‘신민주연합‘론을 빌미로 경선 불복의 부담을 덜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경선을 무효화시키기 위한 사전 포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어쨋거나 추의원은 그러한 내분의 조짐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반면 정동영 의원은 비교적 솔직하게 당의 위기를 털어 놓았다.
정> 조금 한도는 지나치고 있지요. 경쟁을 하더라도 단합 속의 경쟁, 이런 것이 중요한데…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 경선 이후에 후유증이 생길 수는 있죠. 이런 것이 조금 걱정됩니다.
그렇다면, 민주당 안에서 좀더 특단의 조처가 필요한 것 아닐까?
정> 이건 뭐, 당내에서 좌지우지 통제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구요. 국민들이 싸움하는 거 싫어하거든요. 냉정을 되찾을 필요가 있고 이성적인 논쟁과 토론문화를 경성과정에서 정착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의 원칙론적인 대답은, 이인제의 음모론과 색깔론, 그리고 노무현의 ‘언론관‘에 대한 이인제의 집중 공격에 대해 그 자신이 취하고 있는 양비론적 입장과 무관하지 않은 듯했다. 이인제와 노무현을 향해, 둘 중의 어느 하나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니, 어서 진실을 밝히라고 말하지만, 정작 ‘진실‘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진흙탕 싸움‘(이라고 몰고 가서)에서 자신은 비교적 깨끗한 이미지를 고수하려는 전략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중도개혁이라고 하지만 보수에 훨씬 더 가까운, 마치 정동영 진영의 색인 흰색처럼 무취무미한…
기자증이라굽쇼?
대회가 시작되면서 입장을 하려고 하니 진행요원이 가로막는다. 입장권이 있어야 한다고. 이런! 예상치 못했던 난관일세! 진행요원은 인터넷으로 미리 신청을 했어야 했다면서,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기자들은 기자증을 내보이면서 당당히 입장하는데, 메이저 언론사 기자도 아닌, 웹진 기자한테 기자증이 있을 리 만무. 하는 수 없이, 우리의 장기–기자 사칭–를 발휘했다. 혹시 ‘쯩‘을 요구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공격은 최선의 방어! 퍼슨웹 명함을 꺼내 보이면서, 그들이 묻기도 전에 기자라고 당당하게 입장권을 요구했다. 나는 나 자신의 대범함(?)에 지레 놀랐다. 이렇게 취재가 어려워서야… 이러다간 기자증을 사서라도 가지고 다녀야하는 것 아닌가? 나중에 입장을 할 때 보니, 입장하는 사람들에게 빵과 음료수, 귤 등이 든 봉지를 하나씩 나눠주었는데, 혹시 그것 때문에 일일이 입장권을 검사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괜히 “치사한 놈들!” 하고 욕을 하고 싶어졌다.
말의 성찬 : 체육관을 가득 메운 소리
단상의 오른편으로는 세 후보가 자리를 잡고 왼편에는 민주당 주요 인사들이 앉아 있었다. 선관위원장인 김영배 의원은 물론이고, 이번에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된 김민석 의원도 보였다. 그가 인사할 때 많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하기자는 까닭없이 그가 ‘재썹다‘고 느꼈다.)
단상에 앉은 세 후보의 자리 배치는 어쩐지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에는 노무현(2번), 오른쪽에 이인제(5번), 그 가운데 정동영(3번)이 앉아 있어, 마치 그들의 이념 구도와 닯은 듯했다. 물론 그들의 이념이라는 것이 ‘도토리 키재기‘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만, 단지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첫 연설자였던 이인제가 자신의 이름이 인천의 ‘인‘자에, 제물포의 ‘제‘자라고 하며 인천과의 인연을 ‘억지 춘향‘ 식으로 갖다 붙였는데, 하기자는 그것이 국민을 바보로 알지 않는 한, 쉽게 나올 수 없는 ‘썰렁한 유머‘라 하여, 못내 기분이 나빴다.
이날 후보연설의 주된 쟁점(?)은 노무현의 전복적(?) 언론관과 장인의 좌익 경력이었다. 정동영이 양비론으로 일관하였다면, 노무현은 ‘연출된 바보‘인지는 몰라도 자신에 대한 이인제의 공격을 대범하게 받아넘겼다. 이인제가 열을 내면서 자신을 욕해도 단상에서의 그는 그저 뚱한 표정을 짓거나 희멀건하게 웃거나 하였다. 구차한 변명이 싫어서일까, 말을 아끼는 가운데서도 자신을 방어하는 데에는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 어쨋거나 경선 초반에 이념이 의심스럽다며 이인제를 공격하며 대립각을 세우던 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노무현은 이미 공격보다는 수세에 신경을 써야할 형편이 되었던 것이다.
당으로서는 민주노동당이 가장 진보적이지요
투표가 시작되는 것을 조금 지켜보다 다시 체육관 밖으로 나왔다. 선전전을 펼치는 노사모 회원은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로 불어나 있었다. 거의 150여명 이상이나 될까? 비로소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도 눈에 더러 띄었다. 그들의 뜨거운 열기는 경선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비해 결코 식지 않았다. 더 많은 숫자가 결합해선지 ‘잔치판‘은 더욱 신나고 재미있었다. 자기 좋아서 하는 일, 누가 말리랴만, ‘스타‘를 사랑하는 ‘팬‘이 아니고서는, 이 추운 날에 이토록 신명나게 뛰고 굴리고 소리지르고 하지 못할 것이다.
“궁~민 통합! 노무현~ 짱!”
저러다 목이 터지지나 않을까. 노사모 김포지역 짱이라는 임화숙(자유기고가)씨는 노무현 팬클럽의 ‘스타 사랑‘을 이렇게 말했다.
임> 서태지 팬들은 서태지를 무작정 좋아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도 그저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인데요. 왜 사랑하겠어요? 그동안 정치인들이 우리들에게 절망을 많이 주었는데, 그나마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정치인이 나온 거죠. 386을 중심으로 노사모가 생겼는데, 그동안 우리가 열망해 왔던 깨끗한 정치, 정의로운 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정치인이…
열망?! 과장법 같지는 않다. 구태의연한 정치, 낡고 썩은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만한 낱말이 있을까? 정치판을 보고 열 받아 흥분하고 분노하고 하다가 이제는 아예 대꾸할 생각도 않고 등 돌린 지 오래 되었으니까. 그런데 그러한 열망이 왜 하필이면, ‘영웅적 개인‘의 출현에 대한 기대로 모이는 것일까? 정치판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 한 사람이 바꿔낼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협소한데도 말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그러한 기대가 얼마나 덧없었는지를 우리는 적지 않게 경험했다.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한 때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국회의원이다 노동부 장관이다 하면서 안면몰수하는 인간들이 어디 한 둘인가? 당으로서의 민주당의 한계를 모르는 것일까, 애써 외면하겠다는 것인가?
임> 당으로서는 민주노동당(www.kdlp.org)이 가장 진보적이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봐서 어차피 기성정당에서 지도자가 선출될 수밖에 없는 풍토에서 그래도 가장 가까운 게 민주당인데, 민주노동당을 밀어서 이회창이 당선되는 그런 불상사를 일어나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개혁과 진보를 가장 원하면서 그 안에서 정권을 재창출해서 우리의 소망을 분출할 수 있고..
이번 노사모 취재에서 주목할 점은 인터뷰를 했던 노사모 회원 가운데 대부분은 민노당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떻게 보면, 잠재적인 민노당 지지자로 보였다. 그들 모두는 국보법 철폐를 주장하며, 이인제의 색깔론을 배척하는 등 나름대로 진보적인 면을 보였다. 그런데, 왜? 결국 ‘이상‘보다는 ‘현실‘을 택하겠다는 얘긴가? 머리로는 설혹 민노당을 지지해도, 현실 정치에서 민노당의 영향력이 아직은 극히 미미한 것을 생각하고 선뜻 지지할 마음은 먹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야말로 한국 정치를 한 치 진보도 없이, 제자리에 묶어두는 족쇄가 아닌가?
퍼> 제 개인적으로는 노무현은 실패할 거란 생각이 드는데요? 설사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말이죠.
임> 아, 그렇습니까?
노무현이 한창 뜨고 있는 마당에, 더구나 대통령이 될 가능성도 매우 높은데, ‘노짱‘이 실패한다니, 이 의외의 공격에 그는 미처 대응할 생각도 못하고 떨떠름한 목소리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어중간한 물음으로 대꾸했다.
내가 노무현이 실패한다고 생각하는 것(물론 나의 오산일 수 있다.)은 그가 대통령이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 ‘실패‘란, 노무현이 그간 보여주었던 깨끗함과 소신을 갖춘 개혁적인 이미지를 그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일정한 형태의 변질 과정을 겪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물론 여기에는 늘 그렇듯이 ‘배신‘의 음울한 그림자가 함정처럼 드리워져 있다.
노무현의 ‘말바꾸기‘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일례로 지난 1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경제와 관련하여 “사회연대의 정신을 강조하는 독일 모델에 호감이 간다.”던 그가 지난 충남 경선 TV토론에서는 “나는 강력한 시장경제주의자“라고 하며, 자신의 경제철학이 철저히 미국식 시장경제원리에 있음을 밝혔다. 그 또한 김대중처럼 ‘친재벌 반노동자‘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한때 김영삼의 3당야합을 강력 비난하며 “김영삼 등 구세력과의 원칙 없는 연대는 곤란하다.”고 말하던 그가 이제는 제 발로 김영삼을 찾아가 부산 시장 공천을 위임하였다. F-15K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벌써부터 주한미군 주둔을 운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퍼> 김대중도 처음에는 80퍼센트 이상의 높은 지지율을 보이다가 몇 달만에 급락했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실패한 대통령이라고도 하는데요?
김대중 대통령의 지지도는 98년 2월 취임 직후에는 80%가 넘던 것이 석 달이 채 되지도 않아서 60%대로 떨어졌고, 옷로비 파동 등을 거치면서 급기야 1년 반이 지난 99년 9월에는 31%로 떨어졌다.
임> 김대중씨랑 노무현씨랑 출발부터 다릅니다. 김대중은 기득권세력들과 손을 잡고 대통령이 된 것 아닙니까? 노무현씨는 아무 조직도, 당내 기반도 없습니다.
그저 노무현이 좋다는 ‘팬‘들에게 논리에 철저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 조직이 없다‘는 것과 ‘개혁성이 변치 않을 것‘이라는 확신 사이에는 별다른 논리적 연관성을 찾을 수 없어보였다. 도리어 조직이 없고 당내 기반이 없으니, 기득권 세력과 타협할 가능성은 더욱 크지 않을까.
기자양반, 아직도 학습이 덜 되어 있구만?
은근히 시비를 걸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퍼> 팬클럽이 감정적인 요소가 많잖아요? 그게 얼마나 갈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런데 그 순간, 바로 태클이 들어왔다. 옆에서 그 전부터 우리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촬영감독(김병천, 40)이라는 사람이 ‘감정‘이라는 말에 대뜸 ‘감정이 아니라, 감성‘이라며 정정하고 나선다. ‘이성‘에 대립되는 ‘감성적‘ 접근이 요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정서적 혹은 감정적(emotional) 반응이니, ‘감성‘이나 ‘감정‘이나 달리 의미 차이를 두지 않고 썼던 말인데, 그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따지고 보면, “노무현은 인천 시민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듣기 에 좋은 말이긴 하나, 유권자들에게 전달하는 정보는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하나마나한 소리이며, 이 점에서 그것은 감정적인, 또는 표피적인 구호일 뿐이다.) 일단, ‘감성‘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는 내가 임화숙씨의 말을 이어 받아, 노사모에 대해 ‘조직‘이라고 지칭한 것에 대해, ‘모임‘이라며 약간은 신경질적인 어투로 또 다시 정정을 요구한다. 그러다가 끝내는 “가만 보니까 기자가 학습이 좀 안 됐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무언가 내게 못마땅한 것이 있었던가 보다.
김> 제가 생각하기에 기본 학습이 아직 좀 덜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퍼> 노사모에 대해 제가 학습할 필요는 없죠?
퍼> 저도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공부하고 있고요. 다만 노풍의 실체가…
역사에 대한 기본 인식이 없다? 듣기에 따라서는 심히 모욕적인 말일 수도 있는데, 모욕을 받았거나 기분이 언짢다는 생각보다는,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나 싶어 ‘허허‘ 웃으며 대꾸했다. ‘박사과정‘ 운운한 것은 나도 남들이 아는 만큼은 안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참으로 유치한 멘트였다. 으~ 창피해!
김> 노풍을 바람이라고 하고 이미지, 감정이라고 하는데, 인식이 그건 굉장히 잘못된 거라고.
아하! 역사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은 노풍에 대한 평가가 잘못되었다, 정확하게는 자기네들과 다르다는 것을 두고 한 말인가? 나도 짐짓 그가 듣기 싫어할 소리를 내뱉는다.
퍼> 글쎄요. 다들 노무현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노무현의 정책에 대해 별로 아는 것도 없고, 제가 보기에 노무현을 지지하는 근거가 별로 없어 보이던데요?
이때 옆에서 다른 청년이 거들고 나선다. 안우진씨(29, 프리랜서)는 약간 상기된 듯, 높은 톤으로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도 바로 옆에서 우리 대화를 죽 듣고 있었던 것이다.
안> 노?V이 이미지가 아니냐 그러셨는데, 그 말속에는 노무현의 이미지와 실제가 다르지 않느냐 하는 인상이 전제된 것 같은데. 노무현 후보가 걸어오신 길 그 자체가 원칙이 있었고, 따라서 그분의 이미지가 실제와 일치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메이저 언론의 보도 또는 공격은, 메이저 언론을 통해 검증하는 과정은 바로 실제와 이미지가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죠. 노무현에 대해 색깔론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노무현이 깨끗한 것이 실제라는 거죠.
김병천씨는 작년엔가, 노무현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이란 책을 읽고, 위인이라는 사람이 역사 속에, 저 멀리에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 눈 앞에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다고 하였다.
나는 그들의 소박함과 순수함을 시비 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럴 자격도 내겐 없다. 오히려 그들의 자발성과 헌신성은 감동적이다. 다만 노무현이란 ‘상징‘이 앞으로 그 신비로움을 벗게될 때, 지금의 ‘칭송‘보다 더 큰 ‘환멸‘이 찾아오지는 않을까, 적이 우려하는 것일 뿐이다.
절박한 소리 하나 – 파시즘이 온다!
오후 5시까지 노사모 회원들의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아직 개표를 남겨두고는 있었지만, 투표를 마친 선거인단이 하나 둘 자리를 뜨는 폐장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응원 열기는 결코 식지 않았다.
5시가 넘어 투표 결과가 발표될 즈음이 되자, 노사모 회원들은 모두들 체육관 안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대열의 맨 뒤에서, 전태민씨의 ‘절박한‘ 목소리와 만났다.
내가 정치 시스템의 문제를 제기하며 “깨끗한 정치, 노동자 서민을 위한 정치를 위한다면 민노당을 지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민노당이 나와서 노무현의 표를 깍아 먹고, 결과적으로 또 다시 파시즘이 대두한다면, 우리 사회는 엄청나게 후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지금은 파시즘이 대두하기에 적당한 시기인데, 이러한 위기의식에서 민노당을 좋아하면서도 노무현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차분하면서도 확신에 찬 모습은 매우 진지했다. 그러나 지금이 과연 파시즘이 대두할 만큼 그렇게 절박한 시기인가, 하는 점에서는 회의가 들었다. 그러한 위기의식은 과장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면, 마치 민노당의 존재가 파시즘의 부활에 빌미를 주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불안심리, 일종의 위기 위식을 내세워 ‘진보정치 시기상조‘를 얘기하는 것은 이미 허구로 드러난 비판적 지지의 주된 수사법이 아닌가?
민주당이 민주노동당이 아니고, 더구나 좌파 정당이 아니라면, 민주당과 상관없이 진보정치가 가야할 길은 따로 있다. 민주당이 근소한 표차로 대선에 패배한다면, 그것은 민노당 때문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보수 우익의 표를 가져오지 못한 잘못이 더 크다. 이 때까지 기득권은 민주당이 다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그들을 이길 기회는 충분히 많았다.
만일 민노당에 투표하는 행위가 파시즘의 재등장에 기회를 줄 정도로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접전이 치열하다면, 또 그것이 위기의식으로 이어진다면, 당연히 민주당은 민노당을, JP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캐스팅 보트‘로 적극 인정해 주어야 한다. (여론 조사에서 자민련은 민노당보다 못하거나 기껏해야 비슷한 수준의 지지를 얻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민노당은 꼴통 우익과 보수 사이에서 캐스팅 보트로서 당당한 역할을 하도록 힘을 길러야지, ‘노풍‘이 지나가는 이 좋은 기회를 타고 상승할 생각은 하지 않고, 스스로 항복해 버리는 것은 잘 해봐야 ‘빙신 같은‘ 짓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음 속으로는 민노당을 지지하지만, 찍어봐야 되겠나‘ 하는 생각에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사람들은 또 한 번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장비는 아마추어, 근성은 프로!!
다시 체육관 안. 개표 결과를 보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탤런트 서인석씨를 만났다. 그는 오전부터 나와 친구 이인제의 선거 운동을 도와 지지를 부탁하며 인사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연예인들의 정치 참여에 대해 물었으나, “그냥 친구를 돕는 거지, 정치 참여는 절대 아니“라면서 부담스러운지 자리를 피하였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개표 결과가 발표되기 전에 스탠드에서 체육관 바닥으로 내려가야 했다. 다른 수많은 기자들처럼 단상과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그런데 아래층에는 ‘보도‘라는 명찰을 단, ‘기자증‘을 지닌 사람들이 이미 크고 화려한 장비를 배치하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반면 우리는 손바닥만한 디지탈 카메라에 디지탈 녹음기… 이 보잘 것 없는 무기(?)를 들고, 저 아래 기자 ‘양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인가. 신군과 나는 장비의 소박함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어쩌랴? 유능한 장인은 연장을 탓하지 않는 법. 장비는 비록 아마추어일망정, 근성과 배포만은 프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메이저 기자들의 무리 속에 과감히 끼어들었다. 커다란 카메라들 사이에, 신군이 손에든 조그만 디지탈 카메라. 아무리 배짱 좋은 사내라 할지라도, 아.. 어쩔 수 없이 움츠려드는 이 새가슴이여. 더구나 우리 앞에는 건장한 청년들이 열을 지어 막고 서있었다. 스스로의 핸디캡을 숨기려는 의도에서였는지 몰라도 수첩을 꺼내 열심히 적는 척을 하였다.
저 사람, 정말 행복하겠네
예상대로 투표율은 낮았다. 56%라면, 대구(54%)보다야 낫지만, 인천까지의 10번째 경선 가운데 두 번째로 낮은 투표율이었다. 어쨋거나 노무현은 노무현 1022표(51.9%)를 얻어 1위를 하였다.
노무현의 투표수가 발표되자, 스탠드에 모여있던 수백 명의 노사모 회원들은 일제히 일어나 환호하며 난리도 아니었다. 1위 후보의 짧은 소감 발표가 끝나고서도 박수와 환호는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뒤, 그들은 천천히 체육관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덩달아 그들을 좇아가 보았다.
밖으로 나온 노사모는 명계남 짱의 주도 아래, 체육관 계단에 질서 있게 모여 앉았다. 정리 모임을 갖는 모양이었다. 서로들 축하하며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떴다 떴다 노무현, 날아라, 날아라, 떴다 떴다 노무현..”
개사한 노래를 부르는데, 어른 이이 할 것 없이 마냥 즐거웠다. 노무현의 승리는 바로 자신들의 승리였던 것. 30분 정도 지났을까, 드디어 노무현이 나타나 자신의 ‘든든한 빽‘인 노사모의 노고를 치하하는 인사말을 했다. 정치인이 자신의 지지자들 가운데서 이렇게 스스럼 없이, 편하게 말을 건네는 모습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기자들도 완전히 노무현에게 돌아섰는데, 연신 사진을 찍느라 도무지 정신이 없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시민 한 사람은 노사모의 열광에 무언가 느끼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저 사람 정말 행복하겠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서도 지지자들을 모았으니…”
지역감정의 벽이 흐물어지는 소리
정리 모임마저 끝나자, 마지막에 남은 한 사람을 붙들고 승리의 소감을 물었다.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배기석씨(41, VJ 프리랜서)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배> 광주에서 한 번 느끼고 난 뒤로 지금은 솔직히 그냥 담담합니다. 대세라고 믿고 있구요. 앞으로 나올 기대치도 거의 예상이 되구요. 담담합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기쁩니다. (하하)
그는 제주, 울산 빼고 경선 현장을 모두 돌았다고 했다.
배> 같이 온 사람들 모두 부산인데, 부산서 대구로 와서 응원하고, 거기서 바로 인천으로 넘어왔구요. 오늘 저녁에 포항으로 갈 겁니다.
퍼> 대구, 인천, 포항 이렇게 전국을 누비면 시간, 차비, 정력이 장난 아니게 많이 들텐데요?
배> 그게 저희들보다는 내가 키우는 애들을 위하는 거죠. 지금 내가 몸이 조금 피곤하고 힘들더라도 우리 애들이 자라났을 때 좀더 편안하고 밝은 사회가 되도록 노력하는 거니까, 힘든지 모르고 있습니다.
부산 사람들이 여럿 왔다길래, 노무현이 과연 지역감정 해소에 보탬이 될지를 물었다. 그는 “당연합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배> 광주 가서 개표 결과를 듣고 일어나서 환호하는 데, 눈에서 무언가가 흘러 내렸습니다. 그건 눈물은 아니었습니다. 이때까지 경상도와 전라도로 지역을 나눠가지고 벽을 쌓아왔던, 그 벽이 허물어 내리는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는 전라도와 경상도 노사모가 모이면, 노래부를 때 조영남의 <화개장터>를 많이 부른다고 했다. 부를 때는 꼭 옆에 전라도 친구들과 어깨 동무를 하고서.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있는 ‘화개장터‘가 노무현처럼 동서화합의 상징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배> 그때 우리가 잡았던 손은 경상도 전라도의 손이 아니라, 우리 나라의 손입니다.
그는 노무현이 움직이면 세상이 바뀐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그 지랄같은 지역감정만이라도 없어졌으면 좋겠다.
희망을 읽고 불안을 느끼다
6시 30분이 지나서야 모든 일정이 끝나고 노사모 회원들은 약속된 뒷풀이 자리로 이동했다. 이왕 노사모 밀착 취재에 나선 이상, 따라갈까 하다가, 몸도 피곤하고 해서 포기했다. 날씨는 여전히 꾸물꾸물하고, 춥기까지 했다. 돌아오는 길은, 기대감으로 단일했던 아침의 마음과는 다르게 조금은 복잡해진 생각 탓에 유난히 피로감을 느꼈다.
많은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노사모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회원 하나하나의 소박하고 순수한 참여 동기와 헌신적이고 열성적인 실천은 부럽기까지 했다.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일이다. 지난 2000년 시민단체의 낙선운동보다 어떤 면에서는 진일보한 형태가 아닐 수 없다. 노사모의 출현은 한국의 정치 지형에 분명 커다란 흔적을 남기고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라 믿는다. 노사모 밀착 취재에서 읽은 것은 분명 희망이다. 적어도 조/중/동과 같은 꼴보수 언론에게 더 이상 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희망. 나아가 정치적 패배의식으로 꺾인 무릎을 세우고, 선거철만 되면 으례 등장하는 망국적인 지역감정과 색깔론의 망령을 몰아낼 수 있다는 희망. 노풍은 결코 한갓 바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동시에 어떤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한 불안감은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노사모의 대단함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노무현 개인의 한계(민주당의 한계이기도 하다.) 때문이며, 노사모 자체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노풍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노동자 서민의 바람이 아니다. 그것은 노사모의 중심이, 또는 노무현의 주된 지지층이 3-40대/중산층/지식층이라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민가지 마세요! 노짱이 있잖아요.”라고 했을 때, 이민을 꿈꿀 수 있는 계층은 누구인가?
노무현에 대한 기대는 그의 지난 행적에서 간취할 수 있는, 대략 1) 서민 2) 깨끗하고 소신 있으며 3) 개혁적 4) 지역감정을 극복할 수 있는 통합형 리더라는 이미지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이지, ‘현재진행형‘으로 보기는 어렵다.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고 난 이후, 그가 보여주는 일련의 행보들은 구체적인 대선 과정에서 그가 어느 정도까지 굴절될 수 있을지를 예감하게 한다.
“문제의 핵심은 그의 개혁성 유무가 아니다. 그가 속한 정당과 세력이 그의 개혁을 ‘지지 엄호‘ 할 수 있느냐이다. 다시 말해, 지금 그가 주장하는 정책과 지향이 선거는 물론 집권 이후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문성근은 전남대 강연회에서 김대중 정권의 원죄로 지역감정을 거론하였는데, 물론 정확한 지적이지만, 김대중 정권의 실패가 전적으로 지역감정 탓이라고 하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에 따르면, 지역감정 때문에 아무리 좋은 정책도 국민들에게 전혀 ‘어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없애는 것이 급선무인데, 그 극복은 오직 노무현만이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물론 이 대목은 여전히 회의적인데, 무엇보다 지역감정 극복만으로 더 나은 세상, 노동자 서민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김대중 정권의 실패는 ‘우매한‘ 국민들이 지역감정의 망령에 사로잡혀 김대중 정권의 정책에 제대로 호응하지 못한 측면보다는 IMF 극복과정에서 보여주었듯,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이 노동자 서민들의 고통만 강요하고 결과적으로 이들로부터 배척받은 데 있는 것이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노사모의 근본적인 한계는, 물론 동시에 최대의 장점이며 그래서 신선한 것이데, ‘팬클럽‘이라는 점이다. 일정한 정치적 조직이 아닌, 개인이 좋아(물론 무조건 좋아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열성적으로 따라다니는 팬클럽. 그들에게 일차적인 관심은 노무현 개인에게 있지, 민주당이나 또는 한국 정치 전반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한국정치의 구태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이나 제도적 개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예를 들어, 진정으로 깨끗한 정치를 원한다면, 정언유착 뿐 아니라, 재벌과 정치인들의 밀월 관계를 청산하도록 요구해야 하며, 정당명부제와 같이 진보정당이 원내에 진입할 문턱을 낮춤으로써 정치판 자체가 새롭게 환골탈태하도록 적극 주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면에 대해 노사모 내부에 어떤 논의들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또 하나, 노사모가 정치판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유일한 예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에 앞서 민주노동당이 있다. 지난 2000년 4.13 총선에서 민노당은 다른 어떤 보수 정당들에 앞서 당비를 내는 당원들의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당대표를 뽑고, 국회의원 후보까지 뽑았다. 선거운동은 당원들의 결의를 통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유세기간 내내 동네 구석구석 다니며, 즐겁게 시민들을 만났다. 그 결과 안타깝게도 의석 하나 차지하지 못했지만, 평균 10% 이상의 유의미한 득표를 이끌어 내었다.
노무현은 인천 경선 당일, 정리 모임 자리에서 노사모 앞에서 행한 연설에서 “(노사모가) 너무 광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여러분의 얼굴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고 말했는데, 그 말 속에는 일정하게 노사모에 대한 노무현의 미덥지 못한 심정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당장은 노사모로 인한 이득이 손실보다는 크지만, 지난 번 유종필 특보의 경고처럼, 앞으로는 노사모에 대한 노무현측의 거리두기가 가시화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 사이의 관계 지금처럼 밀월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사실 단 하루의 관찰만으로 노사모에 대해 무어라고 판단내리는 것은 성급하다. 따라서 노사모로 촉발된 신선한 바람이 한국 정치에 어떤 바람을 몰고 올지, 계속해서 지켜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어쨋거나 가슴 벅찬, 흥미진진한 하루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