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숙영 칼럼] 어떤 시작

정확히 언제부터라고 꼭 집어서 말하긴 어렵지만, 근자에 들어 나는 내가 어떤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는지에 관하여 곰곰 되새겨 보게 되었다. 나 자신의 글쓰기 행위에 대하여 그간 별다른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던 나이니만큼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 자체가 내게는 변화라면 변화가 온 셈이다. 나는 작가나 저술가는 아니나, 따지고 보면 글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이다. 변호사가 하는 모든 일이 쓰기에 귀착되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변호사가 하는 일이란 서면의 준비 및 작성이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법원이나 검찰청에 필요한 서면을 제출하고 고객을 위하여 보고서나 의견서를 쓴다. 당연히 변호사는 법률적으로 의미 있는 사실과 주장만을 배열해야 하고, 그 배열의 형식, 즉 쓰는 방식이란, 엄격한 요건에 맞추어 판결문이나 공소장을 작성해야 하는 판검사에 비할 바는 아니나, 본질적으로 제한적이다.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이러한 제약을 짊어진 글쓰기는 내가 변호사로 사는 한 감당해야 할 '직업적 글쓰기'이다. 만약에 내가 이러한 법률적, 직업적 글쓰기가 아닌 다른 글쓰기를 하고자 한다면, 그렇다면 어떤 글쓰기를 내가 할 수 있을지, 과연 무엇을 어떻게 쓸 수 있을지, 진실로 나는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들이 쓸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마침 나는 요즈음 출퇴근길에 갖고 다니며 지하철 속에서 읽는 얇고 조그마한 책에 [쓰기 이야기]란 제목의 짤막한 에세이가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에세이는 잘 알려진 작가들이 쓰기에 관하여 펼친 단상들을 소개하고 있다. 가령 “솔직히 말해서 한 줄도 더 쓸 수 없어질 때까지 계속 쓸 생각이다.
 
  
저널리즘이고 무엇이고 여기에 길을 양보해야 한다”고 자신의 일기장에 선언한 버지니아 울프는 “사람은 깊은 감정에서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말을 좋아하는 나는 단지 말로 글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라고도 썼다.

또한 생 떽쥐뻬리는 공중 비행 근무를 그만 둔 후 의기소침해져서 “어찌되었건 무언가를 말할 권리는 내게 없다. 나는 이미 참가하고 있는 인간이 아니다.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인간들만이 무엇을 말할 권리가 있다”고 하고는 생환 확률이 3분의 1 밖에 되지 않는 비행 근무에 다시 자원하였다고 한다(알다시피 결국 그는 어느 날 실종되었다).

불현듯 최근에 국내의 모 문학상을 수상한 어느 작가에 관한 신문기사가 떠올랐다. 전업 작가로 변신하기 전에 20년이 넘게 기자로 일했던 그의 이번 수상작은 영웅 혹은 성웅이라 일컬어지는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것으로서 그의 말에 따르면 이순신은 그에게 단지 소설의 소재 정도가 아니라 글쓰기 교사였다. “나는 난중일기가 끝까지 사실에 입각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서정적인 문장보다 더 높은 정신의 힘을 사실의 기록인 난중일기에서 느낍니다. 이순신의 문장을 모방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운 순간에 가장 간단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은 위대한 겁니다. 글쟁이가 글쟁이가 아닌 칼잡이한테서 글쓰기를 배운다는 게 비극적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전쟁에 직접 참가해야만 쓸 권리를 온전히 획득할 수 있다고 믿은 행동주의자 생 떽쥐뻬리와, 글쟁이가 아니라 칼잡이로부터 글쓰기를 배웠다고 하는 그는 얼마나 또 어떻게 다른 인간인가. 글쟁이가 칼잡이를 흠모하게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인가. 그의 말마따나 이것이 비극이라면, 왜 비극인지, 이 비극의 실상과 진상은 무엇인지에 대해 그 자신 얼마나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아울러 시상식에서 그는 “사회적 제스처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겠다” 는 일견 아리송하지만 뼈가 있을 법한 ‘사회적’발언을 했다고도 한다. 그가 빠지지 않겠다는 사회적 제스처의 유혹이 도대체 무엇일지에 대하여 잠깐 헤아려 보지만 짚이는 거라고는 무성한 짐작뿐이다.

 

내가 쓸 수 밖에 없는 이유

소득 없이 배회하던 나의 상념들은 [쓰기 이야기]로부터 수런수런 달아나, 브라질 정부가 요즈음 반 고문 캠페인을 개시하였다는 소식에 도달하였다. 브라질 법무부 산하 인권사무국이 물고문을 보여주는 TV 용 광고까지 하며 반 고문 캠페인을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간 고문이 그곳에서 얼마나 횡행해 왔는가를 반증하는 것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도 브라질의 어느 음침한 곳에서 누군가가 펜치로 이빨을 뽑히고 전기 충격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미국의 주요 언론이 테러 수사에 필요하다면 고문의 허용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는 논지의 글들을 잇달아 내보내고 있다는 외신을 주목하자(뉴스위크의 한 칼럼의 제목은 “고문을 생각할 때”라고 한다). 미국 현지에는 지금 미국 수사기관에 체포당한 아랍인 용의자들이 나체 사진을 찍히고 눈가리개를 당하며 잠을 자지 못한다는 소문이 흘러 다니고 있다고 한다.

브라질이나 미국으로 갈 것 없이 우리 대법원이 최근에 내린 이 판결을 보라. 작년에 경찰이 가두에서 소식지를 배포하던 여성 민주노총 조합원 3명을 연행하여 알몸수색을 하고 심지어 알몸 상태로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게 하는 등의 가혹행위를 하여 이에 피해 당사자들이 국가와 가해 경찰관들을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낸 결과, 1심에서는 피해자들이”국가는 원고들에게 400만원씩 지급하라”는 일부 승소판결을 받아냈으나 2심에서 패소하여 상고하자, 결국 대법원이 “이 사건은 원고들이 흉기 등을 은닉했다고 볼만한 합리적 이유가 없는 만큼 경찰의 알몸수색은 위법”이라고 판시하여 2심 결과를 파기한 것이다.

여전한 폭력의 세기 21세기에 나의 삶은 또 어떤 한갓 제스처인지, 다시 [쓰기 이야기]로 돌아가서, “구멍 안, 구멍 속, 완벽에 가까운 고독 속에 있으면서 쓰는 일만이 구원이 될 것이라고 깨닫”는 족속이었던 마르그리뜨 뒤라스는 “자신이 손을 대어 써 보기 전에 앞으로 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사람은 절대로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어져 버린다”고 하며 무엇을 쓸 것인가에 관하여 고민하는 이들에게 JUST DO IT, 한다. 삶을 사는 것이건 무언가 쓰는 것이건 실행하는 이 지점에서 바로 시작하는 것이니까, 살아보기 전에 써 보기 전에 내가 어떤 인간인지 결코 알 수 없으니까. 시작해 보자고, 이제 여기에서 시작이라고 나는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