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후
한상권 선생님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작성한 것은 지난 9월 하순이었습니다. 그 때와 지금, 달라진 것이 많아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선, 덕성여대 투쟁은 승리로 기울어졌답니다. 10월 25일이 박원국 전 이사장의 임기만료일이었기 때문에 그 날 이후로 박원국은 덕성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마 다시는 덕성에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10월 26일에 교육부는 덕성여대에 4명의 관선이사 파견 결정을 내렸구요.
이렇게 되기까지는 참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우선 지난 1학기 동안 수업거부를 진행하면서, 2학기 내내 총력투쟁을 하면서 힘들지만 당당히 싸웠던 우리 학생들이 있었구요, 그리고 물러서지 않으시는 우리의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싸워주셨던 많은 선배님들과 우리 사회의 각 민주적 시민 단체, 교육 단체 여러분들이 계셨구요. 국회 교육위 국정감사에서 각 사립학교의 비리와 전횡, 그리고 사립학교법의 부당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교육부의 조치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서까지 발표했던 국회의원들이 있었답니다.
지난 가을 내내 총학생회·교수협의회·직원노조·총동문회 등 학내 각 단체들이 모여 ‘관선이사 파견과 현 재단 퇴진’을 요구하며 ‘백인의 단식단’을 구성해서 정문 앞 천막농성장에서 10월 26일까지 단식투쟁을 벌였었구요. 10월 8일부터 20일까지는 학생들이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24시간 1인 시위를 벌였습니다. 10월 24일에는 교육부 집회에서 학생 18명, 교수 5명, 직원 노조 2명 등 모두 25명이 참여하는 집단 삭발식이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그 자리엔 한상권 선생님도 계셨구요. 그래서 한상권 선생님은 지금 짧은 머리카락으로 학교를 누비고 계십니다. 10월 29일에는 약 3개월간 진행해왔던 조계사 농성을 풀었답니다. 지난 여름부터 학생들과 재임용 탈락하신 선생님들이 굳은 의지로 진행해왔던 농성이었답니다. 재임용 탈락 선생님들은 이제 곧 한상권 선생님의 전례처럼 복직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원했던 것의 절반을 이루었기 때문에 절반의 승리라고들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박원택, 김기주, 인요한 세 이사의 퇴진을 위해 싸우고 있답니다. 이 세 사람은 박원국의 최측근이지요. 저희가 원하는 건 이사 전원이 관선이사로 파견되어서 학교의 운영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덕성이 뿌리인 근화학원의 정신을 이어받아 진정한 민족 민주사학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승리하는 건 단순히 박씨일가를 퇴진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걸 모두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내 구성원 모두의 마음 속 쇠사슬을 풀어낼 수 있는 날이 바로 덕성여대의 민주화 투쟁이 승리하는 날이고, 각 사립학교들의 민주화 투쟁이 승리하는 날입니다.
법률가가 될뻔한 역사학자
대학 입학 원서를 내러 학교에 처음 왔던 1997년 겨울, 방학 중이던 학교에는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그것이 97년 학자투쟁 때 67일간의 수업거부 때문이었다는 걸 안 건 입학한 후였습니다. 원서를 내러 왔을 때에도 입학식 때에도, 그 이후로도 한참동안 행정동은 점거상태에 있었지요. 그래도 한동안은 평온했던 학교였습니다.
그러나 학원자치투쟁은 다시 시작됩니다. 박원국이 돌아온 지난 겨울부터입니다. 30년만의 폭설이 내린 날이던가요? 눈밭에서 박원국 이사장과 마주보고 서 있던 학우들의 비장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기억이 지워지기도 전에 다섯 분의 선생님들이 개강 이틀 전 재임용에서 탈락하셨고 많은 수업이 폐강되었습니다. 한달 보름간 수업거부를 하며 광화문거리로 종로로 안국동으로 신촌으로 집회를 다니던 봄이 지나고, 쇠사슬 묶인 책걸상에서 수업을 받던 여름이 지나고도 학교는 참 추웠습니다. 햇볕이 내리쬐고 구슬땀이 흘러도 마음이 참 춥고, 먹어도 먹어도 이유없이 배가 고팠던 지난 봄과 여름이었습니다.
짧은 방학이 끝나고 다시 돌아온 학교는 5월에 하지 못한 대동제 준비로 소란스럽습니다. 행정동 건물 전체는 여전히 점거 중이고, 그 앞에서는 천막강의와 천막농성이 진행 중입니다. 무궁화꽃이 만발한, 그리고 한 구석에는 행정동에서 빼낸 집기들이 쌓여있는, 그리고 현수막이 여기저기 붙어 있는 민주동산을 가로질러 한상권 선생님을 만나러 갑니다. 벌써 가을이네요.
작년 여름, 학교 자유게시판에 글을 하나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 글에 리플을 달아주신 분이 한상권 선생님이십니다. 격려의 글이었는데 그 후로 선생님은 저를 알아보십니다. 그래서 인터뷰를 하러 가는 길이 그다지 두렵지 않았답니다. 그래도 선생님 얼굴을 뵈니 많이 어색합니다. 우선 신상명세부터 받아쓰기로 했습니다.
1953년 11월 8일 생. 충남 홍성 출신. 서울대 73학번.
이주영(이하 이)> 홍성에서 계속 사시다가 대학 입학 때 서울로 오신 건가요?
한상권 교수(이하 한)> 어렸을 때 서울로 이사 왔지. 계속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는 경기고를나왔어요.
이> 전공을 국사학으로 택하신 계기가 있나요?
한> 사실 나는 법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72년 10월 유신, 어. . . 그러니까 그 때가 고3 때였는데. 10월 유신을 법학자들이 합법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일조를 했다고. 그때 실망을 굉장히 많이 했는데. 법이란 게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구나라는 좌절을 한 거죠. 사회정의 실현이라는면에서 차라리 철학이나 역사를 공부하는 게 낫지 않을까 했죠. 그런데 철학은 너무 사변적인 것 같고, 그래서 국사학과를 가게 됐는데 막상 사학을 공부하게 되니까 많이 다르더라고. 뭐 나는 역사라는 건 굉장히 위대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막상 대학에 입학하니까 그 방법이 굉장히 실증적이고 구체적이고 그렇더라고. 약간 실망을 했죠. 그리고 적응을 못하고 4학년 때까지 공부를 별로 안 하다가 77년도에 학부를 졸업했어요. 그리고 군대로 도피를 한 거죠. 그런데 1년만에 의가사 제대를 하고 대학원에 진학을 했어요, 78학번으로.
이>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사모님을 만나게 된 계기를 여쭤봐도 될까요?
한> 결혼은 81년도에 했는데, 그러니까 대학원 졸업하기 바로 전에. 우리 집 사람은 74학번인데 학부는 성신여대 지리학과를 나왔어요. 내가 대학원에 다닐 때 한문서클이 있었는데 한문 공부 좀 해보려고 갔다가 만났죠. 서울대 대학원에 와서 지리학을 전공하고 있을 땐데, 그때 만나서 사귀게 되었는데… 나는 그때도 대학원을 다니는 게 나하고 별로 안 맞아서 그만 둘까 어쩔까 하던 참인데 우리 집 사람이 이제 공부 좀 해야 되지 않겠냐 충고를 해서 말하자면 타율적으로? 하하… 그때부터 연구를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죠.
이> 사모님은 지금은…?
한> 지금은? 지금은 성신여대 교수로 있어요.
이> 자녀는 어떻게 되세요?
한> 아이들은… 딸이 고2, 아들이 중3. 아직 어리죠.
이> 아, 딸 이름이 예선인가요?
한> 응, 예선이.
한상권 교수 복직 투쟁백서에서 아빠 힘내세요, 라고 쓴 예선이의 편지를 읽은 적이 있다. 그때가 예선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던가. . .
이> 선생님 혹시 술 잘 드세요?
한> 하하… 술 못해요. 맥주 세 잔만 먹으면 얼굴이 빨개지니까, 거의 못 먹는다고 봐야겠지.
이> 술 많이 마시고 그런 사람이… 저는 선생님을 투사라는 이미지로 봐서 그런지… 그런 사람들이 술을 더 못 마시는 것 같더라구요.
한> 하하… 그런가요?
이> 사실 재임용 탈락 전까지는 평탄하다면 평탄한 삶을 사셨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재임용 탈락 전까지의 이야기 좀 해주시겠어요?
한> 82년에 석사를 마치고, 그때 논문은 조선후기의 장시에 관한 것이었어요. 내 전공은 조선시대 후기, 특히 정조시대 연구를 많이 했으니까. 박사과정 중에, 그러니까 83년 가을에 덕성여대에 오게 되었죠. 그러다가 90년도에 성낙돈 교수가 재임용 탈락하고 복직운동이 실패로 끝난 다음에 나는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았는데, 그때 큰 좌절을 하고 덕성여대에는 희망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때부터 학문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었죠. 사실 공부는 그때부터 한 거에요. 그때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거야. 서울대 규장각에서 주로 연구했죠. 정직 3개월이라는 게 방학 두 번 사이에 넣어서 결국은 8개월이었는데 그때부터 97년까지는 계속 강의와 연구 밖엔 안 했죠.
이> 그런데 그때는 박사과정 중에 교수로 임용될 수가 있었나요?
한> 그때는 국사학 박사학위 소지자가 별로 없었어요. 게다가 졸업정원제라서 학생을 많이 뽑고 졸업할 때 기준에 못 미치면 졸업을 못하게 했다고. 학생은 많은데 가르칠 선생이 없었지.
이> 한국역사연구회에서도 활동하시던데…
한> 어, 한국역사연구회는 70,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했던… 그 세력들이 모여서 결성한 단체죠. 소장학자들이 모인 단체인데 과학적이고 실천적인 국사학 연구를 하려고 하죠. 나는 투쟁 때문에 바빠서 요새는 별로 참여를 못하지만.
한상권 교수가 속해있는 한국역사연구회 홈페이지에서는 지금도 덕성여대 남동신 교수의 복직투쟁지지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데모 권하는 사회
이> 학교와의 마찰은 언제부터였나요?
한> 83년도에 덕성여대에 와서 84년도에 학과장을 맡았어요. 거의 오자마자 보직을 맡았고 그런데 학교와, 박원국과 마찰이 몇 번 있었죠. 마음에도 안 들고. 사실 재단의 전횡이 너무 심하니까, 갈등도 하고. 그런데 87년도에 전국적으로 민주화 열기가 뜨겁게 달궈지고… 그래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때 덕성여대 교수들이 전국 최초로 서명운동을 해요. 그것이 덕성여대의 사회 참여의 첫 출발이기도 하고… 교수 10명이 실명으로 서명을 했는데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가 될 뻔한 일이었는데, 그때 김승훈 신부가 고문 경관이 몇 명 더 있다고 폭로를 해서 묻히게 되었지만. 그때 명동성당에서 거의 매일 시국미사 열리고 그랬을 때잖아요. 어쨌든 그것이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고… 그 서명운동이 덕성 민주화의 첫 출발이었죠.
한> 사실 감시와 도청이 참 심했어요. 교수연구실과 강의실조차 도청당할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그때 그 힘으로 자신감을 얻어서 88년 평교수협의회가 만들어졌죠. 내가 89년에 2대 회장을 했는데. 그리고는 90년도에 성낙돈 교수가 재임용 탈락했는데 아마 나를 자르고 싶었겠지요. 그런데 나는 못 자르고 당시 학교에 온지 얼마 안된 성낙돈 교수를 자른 거죠. 90년 3월에 사립학교법이 개악이 되었어요. 박원국의 의도대로 된 거였죠. 그리고 나서 90년 8월에 성 교수를 재임용 탈락시킨 것인데, 그 당시 투쟁이 참 치열했어요. 87학번부터 다 투쟁에 참여했었다고. 그런데도 복직이 안되고, 결과적으로 패배한 거죠. 사실 나도 97년도 재임용 탈락 때까지 온갖 불이익을 받았죠. 승진도 안 되고 징계도 받았고. 이미 나는 징계까지 받았었는데 억울하게 해직된 거죠. 나는 90년 이후에 학교에 정이 떨어져서 연구만 하고 있었거든. 사실 재임용 탈락했을 때 정말 차라리 됐다, 덕성여대 지긋지긋하니까 다른 학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걸 밝히지 못하면 다른 학교에 갈 수가 없겠더라고. 교수 채용하는 데 가서, 당신 왜 학교를 옮기려고 합니까 그러면 해직당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부조리에 맞서 싸우다 그랬습니다, 그럼 끝까지 싸워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소리를 들을 거 같고. 또 여학교니까 혹시 저 사람 스캔들 때문에 잘린 거 아닌가 의심받을 수도 있고. 하하… 이래저래 억울하니까 밝혀야겠다, 그래서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게 되었어요. 전국 사학과 교수들 중심으로 서명을 받고 호응이 높아서 다른 과 교수들까지 2, 3차 서명을 받고 97년 5월 7일날 기자회견을 했죠. 그때부터는 완전히 사회적인 문제가 되버린거죠. 그래서 복직투쟁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5월 26일부터는 출근투쟁을 하고. 그래서 2년 만에, 99년 3월에 복직되었죠. 그리고 99년 11월에 성낙돈 교수도 복직되었고.
이> 전에 차미리사 여사에 대한 연구를 하신다고 그러셨는데 잘 되시나요?
한> 사실 2000년 작년이 개교 80주년이었다고. 그런데 학교에서는 개교 50주년이라고 줄여서 말하고 있죠. 1920년에서부터 차미리사 여사가 여자야학회와 조선여자교육회, 그리고 근화학원을 세운 때부터 따져야 하는데. 작년에 민주동문회에서 뿌리찾기 대토론회를 했는데… 자료가 어딨더라…
그때부터 연구를 하겠다는 결심을 했죠. 독립운동사 연구. 그래서 작년 10월 11일에 80주년 기념으로 차미리사 여사 초상화 봉정식 때 그런 이야길 했지. 사실 한국 사회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친일파였다가 친미파였다가 해방 이후에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지닌 반통일, 친독재 세력이 된다고. 사회의 부조리를 가중시키는 부정적 요인이고 반민주세력이죠. 이건 뭐 한 개인의 양심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집단적 병리현상이에요. 차미리사 여사가 독립운동을 했고 전국 순회 강연을 통해서 모은 돈으로 학교를 세우고 그게 근화여학교가 되죠. 우리나라 최초로 민족자본으로 세운, 민중의 힘으로 세운 민족대학입니다. 그런데 그게 친일파 송금선한테 넘어가고 그게 모자세습되지 않습니까? 박원국은 철저한 수구세력이고 분단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심지어 한상권이는 주사파라고 그랬다고, 빨갱이라고. 빨갱이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고 그랬다고. 심지어 97년 학자투쟁 때는 학생회실에 노동신문을 뿌리기까지 했잖아요? 친일파가 어떻게 변신해 가는가의 과정이 그대로 나타나 있지요. 아마 대한민국 전체의 친일파의 변신과정하고 똑같을 거에요. 사실 연좌제는 말이 안되죠. 어머니가 친일파니까 아들도 친일파다, 그게 아니죠. 물론 친일파의 단죄를 해야죠. 그런데 박원국이가 올바른 교육을 하면 누가 나가라고 합니까? 커리큘럼 확충하고 교수채용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진보적이고 젊은 교수들을 데리고 와야지.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학풍이 민족대학 아니겠어요? 그런데 교수들 학생들 탄압하고 온갖 간섭을 하고. 예를 들면 나한테 교양과목은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고. 많은 수의 학생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아예 차단시켜 버렸죠. 전공만 가르치라고.
이> 선생님 재임용 탈락하시고 나서 월봉저작상 받으셨잖아요. 사실 재임용 탈락한 교수가 상을 받는다는 건… 참 아이러니잖아요. 실력 있는 교수를 학교에서 짤랐다는 반증이니까. 그런데 이번에 남동신 선생님 역시 재임용 탈락하신 후에 올해의 논문상을 받으셨는데… 한상권 선생님 후배고 또 같은 과 교수이기도 하고. 선생님과 똑같이 재임용 탈락한 후에 논문으로 상을 받았는데… 남동신 선생님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무척 복잡하시겠어요.
한> 내가 못할 짓을 했죠. 내가 초빙한 건데… 내가 못할 짓을 했다고 남동신 교수한테 그랬어요. 미안하고… 그래서 덕성에 남지 않을 거면 빨리 짐 싸서 다른 학교 가라, 아니면 끝까지 남아서 싸워라. 참… 이 부조리한 현실에 내던져진 거죠. 받은 것은 불이익뿐이고. 그래도 나는 2년 동안 복직투쟁을 해서 복직되었으니까 이번에는 탈락한 교수도 여러 명이고 하니까 외롭지 않고 기간도 빠를 것 같으니까 남겠다고 하더라구요.
남동신 선생님의 재임용 탈락 사유는 개교 80주년 기념 차미리사 여사 초상화 봉정식에 참여했다는 이유였다.
이> 전에 아이들한테 이야기 들었는데 김경남 선생님은 재임용 탈락 통지서 받자마자 복직 투쟁하겠다고 나서시고 남동신 선생님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셨다고 그러더라구요. 그 이야기 듣곤 저도 어찌 할 바를 몰랐어요.
한> 사실 나에게는 재임용 탈락이 시련의 계기인 동시에 사물을 명징하게 볼 수 있는 훈련을 하는 현장이었어요. 사실 지배층은 승리의 경험을 하게 만들지 않아요. 승리를 왜곡시키는 거죠. 97년 투쟁에서도 열심히 싸웠지만 끝에 이사진들이 사퇴 안 하는 바람에 학생들이 패배감에 젖고, 또 나도 복직되지 않았을 때였으니까. 학교에서 그랬어. 복직시켜 주겠다, 다만 1년을 외국에 나갔다 와라. 말하자면 조건부로 안식년을 준 거지. 내가 거부했어요. 복직하려고 학생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주는 건… 성낙돈 교수 복직투쟁 때도 그랬고 97년 학자 투쟁 때도 그랬고 열심히 싸웠는데 또 교수들 자르고 그러니까 계속 좌절감을 안겨주는 거죠. 따라서 올바른 승리의 경험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투쟁백서도 만든 거고. 어쨌든 희망은 있는 거죠. 97년도에 복직 투쟁해서 결국은 복직했으니까. 이번에 재임용 탈락한 선생들에게도 전망은 있는 거잖아요? 내가 투쟁할 때 학생들한테 말했다고. 불복종의 원칙, 야합 또는 타협 거부의 원칙, 투명성의 원칙, 나는 그것을 지키겠다. <선생님 물러서지 마세요> 두 번째 공연할 때 학생들한테 말했어요. <선생님 물러서지 마세요> 첫 번째 공연은 90년도였죠. 사실 투쟁을 할 때에는 동기 자체에 목적을 두어야 하죠. 결과에 집착하면 안 돼요.
이> 선생님, 책걸상에 쇠사슬 묶인 거 보시면 어떤 생각하세요? 저는 쇠사슬 묶인 거 보면 제가 꼭 노예가 된 기분이 드는데. 기분이 참 나빠요. 그런 교실에서 수업 받기 싫고요.
한> 하하… 그러니까 그게 박원국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단적으로 나타내는 예지요. 인사대 로비 같은 데 있는 의자 보면 알겠지만 다 땅에 붙어있잖아요? 유동적인 거 가변적인 거 움직이는 거 변화하는 거 이런 걸 무지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책상도 불안한 거지. 쇠사슬로 묶어놔야 안심이 되는 거죠.
지금은 더 단단한 고정대로 바꾸고 그 위에 본드까지 칠해놓았지만, 수업 재개한 후부터 방학 때까지 책걸상에는 쇠사슬이 매어져 있었습니다. 눈에 아주 선명하게 보이는 그 쇠사슬,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 저는 제가 아미스타드의 흑인노예가 된 줄 알았습니다. 말도 안 나올 정도로 피가 거꾸로 솟았지요. 학교를 순찰하는 여러 명의 청원경찰까지 있습니다. 우리는 죄수가 아닌데.
이> 그런데 그렇게 눈으로 보이게 억압을 하면 당연히 그 상대방을 더 피가 끓어오르게 만든다는 걸 왜 모를까요?
한> 그러니까 희망적인 거에요. 그만큼 박원국이 궁지에 다다랐다는 거고 그만큼 초조하고 급한 거지. 우리가 이겨 가는 징조인 거에요.
이> 그런데 그렇게 쇠사슬 묶인 교실에서 가끔 쇠사슬 묶인 걸 잊어버리고 수업받는 저를 발견할 때면 깜짝 깜짝 놀라거든요? 어느 사이엔가 그걸 받아들이는 제가 되버린 것 같아서. 사실 학우들을 봐도 다들 아무렇지 않게 학교를 다니고 수업을 받고. 사실 교직원들한테 맞아도 그게 항상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금방 잊어버려요. 하하… 저도 모르는 사이에… 참 씁쓸하거든요. 이번에 박원국이 학생들 때린 것도… 제 후배가 맞았는데도 그 당시에는 굉장히 분개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무감각해지더라구요.
한> 폭력이 너무 심하니까 그게 다 체화되어버린 거죠. 구성원 대부분이 그렇게 되어 가고 있지. 내화되서 느끼지 못하는 거죠.
종이 한 장 인생
오르기는 힘들어도 추락하는 것은 금방입니다. 한상권 선생님께서도 재임용탈락 소식을 알게 된건 개강 전날 집으로 배달된 통보서 달랑 한 장뿐이었죠. 그 짧은 한 장의 우편물은 한선생님의 인생을 크게 뒤흔들어 놓게 되고. . .
이> 음… 이제는 재임용 탈락하셔서 복직투쟁 끝날 때까지 그 기간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구요, 그 이후에 박원국 이사장이 다시 들어와서 계속되는 지금까지의 투쟁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거든요.
한> 그 과정? 음…
이> 우리 학교는 재임용탈락 통지서를 꼭 개강 전날 보내잖아요. 학교가 너무 지겨워서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고도 하셨지만… 어쨌든 사람이 그런 걸 갑자기 받게 되면 당연히 놀라잖아요. 하루 아침에 생존권이 박탈당하는 건데… 그때 느낌이 어떠셨어요?
한> 하하… 그렇지, 생존권 박탈당하는 건데… 사실 재임용탈락 통보서를 받은 건 3월 1일이었어요. 2월 28일은 금요일인데 학회에서 발표가 있어서 늦게 집에 들어왔지. 1일날 아침에 우리 부인이 학교에서 편지가 왔다고 하더라고. 속달로, 내용증명으로. 하하… 3월 2일은 일요일이고 이틀 후면 학교 갈텐데 뭘 내용증명으로 우리 집에 보낼 리가 없다고. 그러니까 직감적으로 90년 성낙돈 교수 생각이 딱 든거야. 재임용탈락 통지서구나. 그래서 집사람한테 펴보라고 했는데 귀하는 2월 28일자로 임기가 만료되었습니다, 딱 한 줄이에요. 아, 이게 재임용탈락이구나 이렇게 생각은 들었지. 한마디로 암담한 거지. 암담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하고. 사실 학교를 떠나고 싶어도 내 손으로 나가기는 그렇더라고. 학생들한테 죄송스럽기도 하고. 선생이 다른 대학을 간다는 게 나를 따르는 학생들을 배신하는 건데. 학교가 명분은 만들어줬다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 학교에서 해직했으니까 난 이제 어쩔 수 없지 않냐, 그렇게 변명거리가 되지 않겠나. 희비가 교차한 상태였는데… 해직교수니까 앞길이 암담하다는 생각과 한편으로는 덕성여대와 인연을 끊을 수 있겠구나, 끊어졌구나…
어쨌든 두 생각이 교차를 했는데, 무조건 생각하기 싫었어요, 하여튼. 마침 그날이 우리 딸이 중학교 입학하는 날이었는데 딸아이가 아빠, 교복 맞추러 가자고… 그런데 사지에 힘이 쫙 빠지는 것 같더라고. 하하… 그래서 나는 좀 더 잘테니까 엄마하고 가라. 한숨 더 잤지. 오후에 일어나서 찬찬히 다시 한번 읽어봤는데… 임기가 만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 다음에 든 생각은… 내막은 알아야겠다는 생각… 왜 이렇게 됐는지. 우선 7년 동안 아무 일이 없었는데. 우선 제일 먼저 누구한테 전화를 했냐면, 우리 과 윤정분 교수한테 전화를 했어요. 우리 과 교수고 학장이고 인사위원이니까. 인사위원은 과정을 알테니까. 이게 재임용 탈락이냐, 맞다, 그러면 당신도 여기다 가세를 했냐 그랬더니… 옛날 성 교수 탈락 때는 찬반 투표를 했거든. 그래서 투표를 했냐, 당신도 찬성을 했냐, 아예 그런 게 없었다, 일괄 처리했다 그러더라고. 알았다고 끊고 그 다음엔 총장한테 전화를 했지. 주영숙 교수. 근데 이 사람이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하고 미안해서 어떡하나 미안해서 어떡하나 이 말만 하고 끝내는 거야. 그 다음엔 인사위원장한테 전화를 했지. 정영환 경영학과장. 어떻게 해서 결정된 거냐 그랬더니 뭐 그냥 어쩌구 저쩌구 알아듣지 못하게 횡설수설 횡설수설 끝나고… 임숙자 교수한테 전화를 했어요. 교무처장이니까, 그런 사람이 핵심이니까. 근데 전화통화가 안 됐어요. 그래서 대충 이게 재임용 탈락이 확실히 맞고 학교에서 나를 해직시켰구나, 확신이 든거지.
이> 화도 나고 고민도 많이 하셨겠네요.
한> 고 당시 3월 1일에는 제일 걱정했던 건 뭐냐면… 3월 3일날 개강을 할 때 내가 학교를 가야 되냐 말아야 되나 그게 제일 걱정이었어요. 가는 게 옳은지 한 이틀동안 고민을 하다가 학교를 안 나가기로 결심을 하고 학교를 안 나갔어요. 내가 왜 안 나왔냐면 90년도 싸움에서 졌을 때 학생들이 너무 피해를 많이 받은 거에요. 성 선생 강의듣는 학생들 다 F 받고 그래서… 90년 싸움에서 패배했을 때 그 피해가 다 학생들한테 돌아갔는데. 내가 나가면 학생들이 내 강의를 듣겠다고 그럴텐데 내가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더라고. 싸울 용기도 자신도 없고. 싸워서 이긴다는 전망도 없고. 90년 싸움에서 졌는데 그 이후 7년 동안 덕성여대는 완전히 황폐화되어 있고. 나를 지지하는 교수들도 없을 것 같고. 서너명 있을 것 같긴 한데 서너명 갖고 싸워서 이길 가능성도 없을 것 같고. 내가 책임도 못질 일을 저지를 것 같더라고. 싸우려는 의지도 정확히 있지도 않았고. 내가 학교를 나가면 90년도 같은 일이 되풀이 될 것 같고. 다시 그 죄를 저지르는 것 같고. 개강날 내 첫 강의가 11시였을 거에요. 김용자 선생님한테 내가 재임용 탈락했다고 전화했더니 망연자실하고 말을 못 잇더라고. 나는 학교를 안 나가겠다 말하고 전화를 끊었지.
이> 그 이후로 계속 안 나오신 거군요.
한> 그래서 3월 1일날 알았으니까 뭔가 정리는 해야될 것 같아서… 당시 연구실이 저 도서관 건물에 있었어요. 여기로 옮긴 게 그때에요. 방학동안 옮겨놔 갖고 하나도 정리 안해놨었지. 2일이 일요일이니까 그때 짐은 정리해놨어요. 앞으로는 학교에 못 나올 것 같으니까. 박스 채 있는 상태에서… 개강하고 정리하려고 했는데 못 나올 거 같으니까. 책꽂이 정리해놓고, 그때 학생들 두 명이 도와줬는데 내가 말을 안 했으니까. 선생이 앞으로 안 나올 거란 생각은 못했을 거고.
이> 그러면 사학과 교수들 중심으로 대책위원회 만든 게 언제쯤이죠?
한> 일지를 보면서 얘기합시다. 정확하게 얘기해줄게. 3월 8일이었는데… 3월 7일날 내 문제를 한겨레에서 일면 톱으로 보도를 했는데…
이> 그런데 일지를 보면 3월 7일날 학교에서 밝힌 건 “정직 3개월 중징계 이후 개전의 정이 없다” 라고 했는데 이건 90년 성낙돈 교수 복직투쟁으로 인해서 91년도에 받았던 징계를 가지고, 6년이나 지나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가요?
한> 그렇지 그것 때문에 탈락됐다는 거지. 3월 8일날 한국사 연구자 중심으로 해서 추진위원회를 결성을 했고 11일날 서명을 받기로 했네.
이> 제가 알기로는 여름방학 정도까지는 학생들이나 교수들이나 술렁술렁 하기는 했지만 뚜렷한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2학기 개강하고 나서 결집이 되서 투쟁으로 이어지게 되잖아요. 그 과정 좀 말씀해주세요.
한> 교수가 탈락되었으니까 제일 관심을 갖고 있었던 건 사학과 학생회인데, 이 문제로 심각하게 논의를 했는데 그 결과 4월 17일일거야, 아마. 학생들이 내 복직 문제를 갖고 싸우겠다는 결의를 했어요. 그러니까 학교에서 난리가 난 거 아냐? 과가 움직이게 되니까. 내 해직에 찬성한 교수가 윤 교수였으니까 윤 교수를 통해서 학생들을 회유시키게 한 거야. 4월 17날 회의는 무효다, 정족수가 안 됐다나?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 아무튼 이게 이슈화될 것 같으니까, 19일날 다시 열어라. 이때가 중간고사 기간이라고. 중간고사 안 본다고 결의가 난 거니까. 그래서 19일날 다시 회의를 열었어요. 한표 차인가 두표 차이로 결정이 바뀌었어요. 해당 과가 안 움직이니까 하하… 복직운동이 될 수가 없고 나도 안 나타난 상태니까. 학생들한테 들은 얘기로는… 학교가 이렇게 설득을 했다는데, 한 교수가 다른 대학으로 간다, 가는 선생 복직운동 해봤자 무슨 소용이냐. 무용론, 그리고 윤 교수가 나도 한 교수 해직을 막으려고 노력해봤지만 안 됐다, 나도 안 됐는데 너희가 하면 되겠냐, 패배주의죠, 나도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맞는 것 같지. 과가 완전 움직이지 않기로 결의를 해서 1학기는 조용했죠. 그러다가 내가 5월 26일 출근투쟁을 시작했지. 과 학생회는 안 움직이기로 했으니까. 재학생 대책위를 구성해서 사학과 학생들 몇 명이 방학동안 활동을 했는데 그래도 뭐 전체적으로 몇 명밖에 안 됐으니까. 그리고 6월 8일날 교수들이 비상대책위를 구성했어요. 14명이 한 교수 복직과 이사장 퇴진 성명서를 발표했어요. 우리 학교에서는 획기적인 일이었죠. 교수들이 이사장 퇴진을 요구한다는 건… 더구나 14명이라는 숫자는…
이> 그때 평교수협의회가 있었나요?
한> 아예 없었지. 없었는데 비대위가 만들어진 거지. 나중에 밝혀졌는데 당시에 박원국 이사장이 나를 해직시킬 때 과연 한 교수가 해직되면 몇 명이나 한 교수에게 동조하겠냐, 라고 물어봤다는 거야. 해직하기 전에. 그 당시에 많으면 서너명이라고 학교에서 관측을 했는데… 비대위가 14명이 된 거야. 학교도 놀란 거죠. 왜 이렇게 많냐. 나중에 안 바에 의하면 내 해직을 계기로 해서 박원국한테 불만이 있던 세력이 총 결집을 한거야. 한 교수 복직이라는 명분으로. 말하자면 양심세력, 그 이전에 80년대부터 있었던 양심세력이 네다섯명 되고. 더해서 김용래 총장이 덕성여대 와보니까 박원국한테 계속 몰리면서 총장으로 자존심이 꺾였거든. 그러니까 김용래 총장의 추종세력, 그리고 박원국과 대립하는 박원국의 동생 박원영을 지지하는 세력, 이런 여러 세력들이 연합해서 명분은 한 교수 복직, 사회적인 명분은 좋잖아요? 내걸면서 연대를 했기 때문에 인원수가 14명이 된거야. 그러면서 내가 해직이 부당하다고 교육부에 탄원서를 올렸는데 교육부가 감사를 나왔어요, 덕성여대에. 6월 10일부터 18일까지. 감사를 나와서 그 결과를 7월 16일날 발표했어요. 감사 결과 박원국의 각종 비리 가 드러난 거지.
이> 회계 쪽이었나요?
한> 회계도 있지만 중요한 건 박원국의 전횡, 학사행정 간섭 등등 146건이 지적된 거지. 이런 게 지적되니까 결국은 학내 교수들도 움직임의 폭이 넓어진 거 아니에요? 이런 와중에 9월 30일날 결국은 김용래 총장이 사직서를 내지. 박원국의 압력을 못 이겨서. 나는 왜 덕성여대를 떠나는가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사직서를 냈다고. 그러니까 많은 선생들이 위기의식을 느끼는 거지. 김용래 총장이 우산 역할을 해서 막아줬는데 떠나니까. 이제 박원국 체제 속에서 견뎌야 하니까. 와르르 뭉친거죠.
이> 그럼 김용래 총장은 어떻게 총장이 되었나요?
한> 주영숙 교수가 임기 만료가 되서, 김용래 총장은 공채로 뽑았어요. 박원국이 학내에 있는 사람만 총장 되는 게 아니고 학교를 키우기 위해서 외부인사도 채용을 하겠다 그래서 육십 몇 명중에서 공채로 뽑았으니까 상당히 나름대로 자존심이 있는데 간섭이 심하니까 갈등이 생긴 거죠.
이> 그래서 그 10월 1일 날에 비상총회를 열게 된 건가요?
한> 모든 선생들이 방파제 역할을 했던 김용래 총장마저 사퇴할 정도가 되니까 위기의식을 느끼고 각 강의실 가서 학생들한테 학내 사정을 다 이야기하고… 그 이전에 학생들이 못 움직인 이유는 학생회장이 김은희였는데 구속이 되었어요. 2월인가 3월에. 구심점이 없으니까 움직이기 힘든 거지. 2학기 때는 황보 정이라고 예술대 학생회장이 권한 대행이 되면서 9월부터 500명, 600명 정도의 대규모 집회가 열리면서 열기가 달궈지기 시작하는데 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김용래 총장의 사퇴성명서와, 그것을 받은 교수들이 일제히 그것을 학생들한테 알리면서 삼천명 정도의 집회가 10월 1일날 열리게 되었죠, 민주동산에서. 그것이 덕성여대 투쟁의 큰 분수령이 되고… 그 힘을 받아서 학생들이 집회를 끝내고 가두 행진을 하려고 세븐일레븐 앞에서 전경대와 대치하고 있었고 그 시간에 교수들은 교수협의회를 결성했고…
삼천 명이 모였다는 그 날의 집회는 전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오천 덕성인 중에 삼천 명이 모인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때 학교를 다녔던 선배들은 그 일을 참 자랑스러워합니다.
이> 교협이 이날 결성된 건가요, 10월 1일?
한> 그렇지. 평교수 협의회가 결성되었다가 와해된 이후에 처음으로 다시 생긴 거지.
이> 그러면 수업거부는 그때부터 시작된 건가요?
한> 학생들이 한교수 복직과 박원국 퇴진을 내걸고 무기한 수업거부를 그때부터 돌입한 거지. 비상총회가 성립하면서 거의 삼천 몇 명이 찬성을 한거죠. 정확하게…
일지를 뒤진다.
한> 3146명이 참석을 해서 찬성이 3093명, 반대가 46명. 이렇게 해서 무기한 총파업을 결의한 거지.
이> 그때 수업거부와 단식농성을 들어가고 그것이 12월까지 갔잖아요. 학생들하고 선생님들하고 철야농성도 했다고 들었는데 그때의 투쟁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한> 10월 4일날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했어요, 이사장실하고. 그러면서 교육부가 계고장을 박원국한테 10월 2일자로 보냈죠. 빨리 학교를 정상화하라. 안되니까 박원국을 해임시켰어요, 10월 10일날.
이> 그런데 그게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나요? 기간이 너무 빨랐다고 들었는데.
한> 법적으로는 빨리 해임됐다, 원래는 10월 2일자로 보냈으면 계고기간이 15일인데 15일 전에 해임했다, 이것이 박원국이 승소를 한 큰 이유죠. 또 하나는 교육부가 총장과 합의해 서 학내분규를 해결하라, 그랬는데 계속 그거를 못한 거죠. 김용래 총장이 반대했으니까. 9월 30일날 김용래 총장이 사표를 내니까, 총장 권한대행으로 권순경 교수를 앉힌 거야.
이> 지금하고 똑같네요?
한> 지금하고 똑같아. 권순경 교수를 앉히고 권순경 교수와 합의해서 올린 거에요. 그러니까 법원에서 얘기하는 건 총장과 합의해서 학교문제를 해결하라고 했는데 합의해서 올라왔는데 왜 해임시켰냐, 해결의지가 박원국한테 있었다. 박원국한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부가 해임시켰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죠. 눈감고 아웅하는 식이지. 10월 6일인가 7일자로 합의서를 보내줬다고. 그러니까 박원국 복귀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권순경 교수지. 지금도 총장 직무대리로 앉힌 이유가… 대법에서 이긴 건 바로 그거야. 기간을 안 지켰다, 이건 고법판결이고 총장과 합의각서를 제출했는데 왜 해임시켰냐. 이건 대법 판결이야. 사실 교육부 판단이 맞는 거죠.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니까.
권순경 총장 직무대리는 학생들과의 면담에서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학교 폐교시킨다고 말했었는데요, 이런 사람에게 정말 해결의지가 있는 걸까. . .
이〉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때 교육부가 계고기간이 안 지났는데 해임시켰다는 건, 박원국에게 해결의지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교육부의 확신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텐데요. 그런데 지금은 대법원에서도 패소한 이후고 따라서 교육부가 많이 우물쭈물하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한> 지금도 제일 교육부가 신경쓰는 게 박원국한테 패소한 걸, 대법원 신경을 많이 쓰는 거지. 그래서 적극적인 행동보다는 소극적으로 박원국을 밀쳐내는 작전을 쓰고 있는 거지. 이사회 구성이 안 되면 연임을 안 시켜주거나 임원 승인권 행사를 안하려고. 그런 식으로 나갈려고 하는데 이건 문제제기도 안 되는 거지. 그건 교육부의 고유 권한이니까. 해임시키기보다는 승인을 안 시켜주는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교육부 생각이고 그렇게 하다보니까 10월 25일까지가 중요한 싸움 기간이죠.
이> 10월 25일이 박원국 임기만료인가요?
한> 그렇지.
이> 그러면 박원국이 97년 10월 10일날 해임되었는데 수업거부는 12월까지 갔던 건 무슨 이유죠?
한> 이사회가 원래는 이사장과 이사 전원을 공동책임을 물어서 해임시키는데 덕성여대는 특이하게 이사장만 해임시켜 버린거야. 이사들은 그냥 놔두고. 이사라는 게 원래 박원국 시녀들이니까 수족들이니까 이 수족들이 계속 박원국 말을 듣는 거죠. 그래서 권한대행을 누구로 앉혔냐면 박동서라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뭐 맨날 박원국 말만 듣고. 원래는 이사장 해임되면 총장도 해임되어야 하는데 허수아비 권순경 교수 계속 앉혀놓고 이사진은 계속 그렇고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어떤 권력구조가 안 무너진 거죠. 그러니까 학생들이 나머지 이사진 나가라, 이사진 퇴진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죠. 그 집 앞에 가서 시위도 하고 그랬는데 일부는 나갔고 일부는 끝까지 버티고 수업거부가 그래서 길어진 거라고. 그 당시 교육부가 다 해임시켰으면 총장이 새로 와서 정상화시키고 문제가 다 해결됐을 텐데. 교육부가 이왕 칼을 뺐으면 확실히 빼야지, 이상하게 빼서.. 하하… 그래서 하다 마니까… 12월까지 67일간 수업거부가 되니까, 문제가 학생들이 유급되게 생겼으니까 그건 이사들이 책임을 져야 되니까 그때서야 이사 교체가 됐는데 확실한 민주세력으로 교체한 것도 아니고 박원국 말을 듣고 교체했다고.
이> 구성이 어떻게 됐는데요?
한> 박원국 세력이 넷. 박원국 쪽은 삼대삼이라고 얘기하는데. 이쪽 민주세력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김용준, 이태수, 박승서, 저쪽은 최영철, 지금 고문변호사로 있는 사람, 계속 내 복직을 반대한 사람이죠. 그리고 이행원이라고 보수언론인 있어요, 한국일보 논설위원, 박원택, 그렇게 하면 여섯인데 결국 캐스팅보드를 쥐는 게 이사장 아니야. 이사장을 누구로 시켰냐면 김계수라는 사람.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박원국 중학교 선배래나 뭐래나, 결국 박원국 조종을 계속 받았으니까 또 문제가 안 풀리는 거지. 그래서 새 이사진이 들어오고 새 총장을 뽑아서 정상화시키려고. 권순경은 직무대리니까. 그런데 자기가 총장하려고 입후보 담합에서 질질 끄는 거죠. 오래 끌수록 좋으니까. 그렇게 되니까 수업 복귀를 한 후에 총장이 문제를 잘 해결했으면 학생들이 피해를 안 받았을텐데 총장은 안 뽑힌 상태고. 그러니까 겨울방학이 되고 너네 수업 안 받았으니까, 그러면서 보복성 차원에서 학생들을 괴롭히고 그게 2월 말까지 가다가 총장을 누구 뽑았냐면 이강혁 씨. 박원국이 추천한 사람이 총장이 된 거고 이사회 그 모양이고, 학생들 입장에서 볼 때는 얻은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지. 박원국은 나갔지만 직접통치에서 간접통치로 바뀐 것 뿐이지. 한 교수는 복직 안 됐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거지. 그 다음부터 98년부터는 학생들이 투쟁동력에서 많이 떨어져 나갔죠.
이> 어느 정도는 이사진도 나가고 총장도 새로 뽑혔는데도 불구하고 복직이 계속 안 되니까 많이 암담하셨겠네요.
한> 암담하지. 그래서 원래는 97년 5월 달에 출근투쟁을 했다가 97년 12월 4일날 이사진까지 교체되었으니까 나는 민주총장 뽑히고 복직도 되리라고 생각하고 출근투쟁을 멈추고 규장각으로 다시 나갔다고. 그런데 삼개월 사이에 이사진은 엉망인데다가 총장은 이강혁씨니까 복직은 완전 물 건너간 거 아냐, 그래서 다시 98년 3월 2일부터 출근투쟁을 시작하면서 그냥 출근투쟁만 해서는 안될 거 같아서 지금 천막강의와 비슷한 걸 전국에서 최초로 한 거죠.
이> 장외수업…
한> 똑같은 시간에 맞춰서 합법적인 수업은 저쪽 수업이고 나는 장외수업이니까 내 강의 듣고 싶은 사람은 들어라. 그러니까 대부분 학생들이 여기로 온 거에요. 한 단계 높은 투쟁을 한 거고, 그러니까 이사회나 이런데서 상당히 당황을 하고 한 교수를 복직시켜야 한다. 이런 논의가 일기 시작한 거죠. 복직시킬테니까 장외수업을 중단하라, 나는 복직시키면 중단하겠다. 갈등이 생기는 가운데 김계수 이사장이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이사회가 완전 그렇게 되면서 1년은 직무대행체제로 또 간 거야. 99년에 가서야 이사장 체제를 완전 바꾼 거지.
이> 어떻게 바꾼 거죠? 박원택이 장악한 건가요?
한> 98년의 이사회는 박원택이 아니라 박원영이다. 그때 가서는 교육부가 이해찬씨가 장관하면서 김대중 정부 출범할 때니까 힘을 받았죠. 이사들이 이사장을 안 뽑고 질질 끄니까.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서 이사진을 해임시키겠다고 교육부가 계고장을 보냈죠. 그러니까 이사진들이 불명예스럽게 해임되느니 자진해서 나가겠다. 그래서 새 이사진들을 승인해주고 나간거야. 그래서 그 당시에 이문영 이사장이 새로 들어오고. 이문영 이사장이 들어올 때 조건이 뭐였냐면 일을 하려면 힘을 얻어야 되니까 네 표를 달라. 이사회에서 가결을 하려면… 같이 온 분이 이상신, 정경모, 그리고 김유배, 그 사람은 얼마 있다가 청와대로 들어가고 함세웅 신부가 그 후임으로 온 거에요. 끝까지 안 나간 사람은 최영철 변호사, 박원택 여섯이죠? 여섯으로 이사회가 출범한 거에요. 박원택은 한표, 최영철 한표. 어찌 보면 박원택은 아무 세력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부각됐냐면… 한 자리가 남는 거 아니에요. 이문영 이사장이 누구를 줬냐면 박상진을 준 거에요, 박원택 아들. 민주세력으로 충원하지 않고 그러니까 박원택이 두 표가 된거죠. 박상진, 박원택이 서서히 힘을 얻기 시작한 거죠.
박씨 일가의 문제는 자기들끼리도 싸운다는 겁니다. 박원국은 구박, 박원택은 신박. 그래서 구박파와 신박파가 있다는 우스갯소린지 진실인지도 떠돌아 다닙니다.
복직 그러나 끝나지 않은 싸움
이> 그러면 선생님이 복직되신 게 언제죠?
한> 요 이사진이 오자마자 99년 이사회에서 복직문제를 결의했지.
이> 교수협의회가 97년에 결성이 되었고 그 후에 복직되셨으니 열심히 활동하셨겠네요.
한> 막 복직되었으니까 운영위원으로 활동했죠. 총장은 엉터리지만 교수협의회 교수들이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했죠.
이> 사실 제가 못 겪어봤으니까… 그다지 와닿지 않지만 학사행정 간섭하는 부분에서 박원국이 얼마나 전횡이 심했었나요?
한> 146건이 감사결과 나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예를 들면, 한문 담당교수한테 “당신은 한자만 가르치고 한문은 가르치지 마라”. 또 국문과에도 “카프문학은 가르치지 마라”라든지. 모든 걸 다 지시를 해버리는 거지. 교수한테 제일 중요한 건 가르칠 과목이란 말이에요. 그 과목을 통제해버리고 교양과목만 가르쳐라. 교양 중심으로 하니까 전공을 가르치고 싶어도 개설을 할 수가 없는 거야.
이> 저희 과도 커리큘럼 신청을 했더니 78학점 이상 개설하지 못한다고 그러더라구요.
한> 개설하지 말라. 왜 그렇게 정해 놨냐면 선생을 안 뽑을 명분이 있는 거지. 전공과목이 있으면 그 과목에 맞는 선생을 뽑아야 하는데 선생을 세 명 정도로 줄이려면 교수가 강의하는 게 책임시간이 1년에 18학점이란 말이에요. 세 명이면 54학점이면 된단 말이야. 78학점도 많이 늘어난 거고, 이문영 이사장 체제와서 바뀐 거고. 그 전엔 60학점 이상 못 하게 만들어 놨다고. 옛날엔 강의를 새로 개설할 수가 없었고 그러니까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칠래두 가르칠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해놓으니까. 또 거기에 저항하면 해직된다는 얘기고. 학생들이 교수를 뽑아달라고 그래도 학교측에서 맨날 하는 얘기가 그거라고. “가르칠 과목이 없는데 맨날 교수 뽑냐.”
이> 그러니까 그게… 학교가 맨날 하는 말이 교수충원 해달라고 하면 가르칠 과목이 없는데 교수를 어떻게 뽑냐고 그러고, 그래서 가르칠 과목을 늘리면 되지 않느냐고 하면 가르칠 과목을 늘리면 가르칠 교수가 없다고 항상 그러잖아요. 말도 안 되게.
한> 하하 그 얘기라고… 과에 교수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게, 그렇게 원천 봉쇄를 해버리는 거야.
이> 그리고 한 과당 교수 세 명 이상 안된다고 박원국이 못을 박아놓잖아요.
한> 그것도 세 명도 많다는 얘기고, 나를 해직시킬 때는 학부제가 되니까 더 줄일 수 있는 거지. 대단위 학부제로 계속, 그 추세로 갔으면… 우리 과 이번 졸업생이 한 명인데 말하자면 사학과는 폐과되는 거지. 한 두 명만 올테니까. 더 줄일려고 했던 거지. 학부제를 통해서.
이> 학교가 그런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것 같아요, 폐과, 폐교라는 말을…
한> 그렇지, 자기들 맘대로. 그러니까 선생들이 자기 직장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데 정말 확실한 학문적인 자신감과 양심에 대한 소신이 있으면 저항을 하겠지만, 교수들이 그런 사람이 몇 있겠어요? 대부분… 그러니까 생존 밖에 남는 게 없는 게… 비굴해지는 거죠. 사실 교수가 비굴해지면 그 다음에 강단에 서봤자 맥아리 없는 얘기를 하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적당히 때워서 도망가는 게 상책이다라고 생각할테고. 그러니까 학교는 점점 황폐화되는 거에요.
이> 제가 알기로는 옛날에는 좋은 선생님들 많이 계셨다고 들었는데 성낙돈 선생님 탈락하신 이후로 다 나가시고 97년도에도 싸움을 아주 오래 했으니까 그때 다 다른 학교로 가셨다고 들었거든요?
한> 국문과 같은 경우도 아마 크게 피해를 받은 과 중 하나일 거에요. 사회학과가 제일 피해를 받았다고 하지만, 사실 국문과가 더 피해가 컸던 과일텐데… 왜냐면 그 당시 국문과는 교수진이 6명인가 그래서 상당히 단단했다고.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은 고대로 가고 두 분이 정년퇴임 하시고 한분은 견디지 못해서 사표를 냈고 또 한사람은 성대로 갔고 마지막으로 한 사람은 카톨릭대로 갔다고. 교수가 웬만하면 직장 안 옮기거든요. 교수들이란 게 상당히 보수적인 사람들이고 또 웬만하면 있지, 옮긴다는 건 드문 케이스인데 완전히 다 나갔다고. 완전히 다 바뀌었잖아요. 남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얘기니까. 예를 들면 이렇게 생각을 해봐요. 선배가, 졸업생이 학교 오고 싶은 생각이 들겠냔 말이에요. 와도 자기를 가르친 선생이 있으면은 옛날 얘기라도 하겠지만 지금 이 구조 속에서 누가 오겠어요. 아무도 모르는데 와봤자… 결국은 단순히 선생이 옮긴다는 게 학교를 황폐화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선후배 관계도 완전히 단절시키는 거죠. 그거 박원국은 좋지.
이> 저희 과도 96학번 정도의 선배들만 봐도 선후배 사이가 튼튼하게 연결이 되는데… 그 이후로는…
한> 그렇지. 선생이 없으니까. 우리 과만 예로 들어도 민주동문회에서 총동창회 개혁한다고 할 때 내가 다 전화를 돌려서 나를 보러라도 와라, 겸사겸사 선생한테 인사도 드릴 겸. 우리 사학과보다 국문과가 더 조직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전화할 사람이 없는 거야. 자체적인 조직을 완전 파괴한다고 그럴까. 공동체적인 삶을 파괴하는 역할을 하는 거지.
이> 학생들에 대한 탄압도 심했잖아요. 예를 들면 학생회관을 지어달라고 했는데 제적시키거나… 또 그때는 강의실, 연구실, 조교실, 동아리방이 다 도서관 건물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그렇게 있을 때 동아리 방이 거기 있으니까 꽹과리쳤다고 혼나고…
한> 혼나는 거지. 교수들은 교수들대로 연구해야 하는데 옥상에서 꽹과리 치면 신경쓰이지.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갈 데가 없으니까 그러는 거고, 그게 구조적 문젠데. 그걸 어느 누구도 나서서 왜 학생회관 안 지어주냐 말할 수가 없는 거지. 자체적으로 서로 갈등과 앙금만 양산하는 거죠, 구조적으로. 그게 박원국 씨가 교육자로서 뿌린 가장 큰 잘못이죠. 구성원 간에 화합해도 될까말까한데 끊임없이 반목하고 갈등하고 분열하게끔 만든 거. 덕성여대가 공동체 의식이 참 강한 대학인데 그 공동체 의식은 박원국한테 불리한 거지. 철저히 학교에 대한 기억을 없애게끔 만들고 집단 기억 이런 걸 생기지 못하게… 너는 공부만 하고 나가라 이거야. 전에 학생들이 투쟁할 때 어떤 교직원이 말한 것처럼 학생들은 이용료만 내는 거다, 그게 박원국 생각일거야. 박원국 생각은 4년동안 이용료만 내고 공부하고 나가지 왜 자꾸만 또 오냐. 하하… 교육자가 아닌 거죠.
이> 박씨일가 퇴진운동을 하는데 박원국하고 박원택, 그리고 박원영이란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요?
한> 박원국이 첫째고 박원영이 둘째, 박원택이 셋째, 그리고 박원경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덕성여대에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박원영 그 사람은 아까 말한 것처럼 97년 10월에 김용래 총장이 사표내고 이렇게 되니까… 원래 박원영이랑 김용래 총장이 연대해서 박원국하고 싸운 거죠. 그런데 김용래 총장 사표를 낸 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어요. 지금 식물인간 상태로 있어요. 식물인간 상태로 1년 동안 이사회에 참석 못하니까 99년에 해임됐어요.
이> 박원택, 박원국 둘이 남았는데 이번에 다 나가게 해야 되잖아요. 어떤 방법으로 싸워야할까요?
한> 이사진 교체? 현재 사립학교 법 상이나 사회적인 정서로 볼 때는 일반적으로 학교 설립한 데 사회에 기여를 했는데 그 정도 권한도 없으면 뭐 어떡하냐, 이런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한단 말이에요. 실질적으로 박씨 일가가 자기네들이 학교 설립자다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해왔어요. 심지어 박원국은 자기가 교주다 하고 다녔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박원국을 오너라고 불렀다고. 근데 지금 덕성여대 같은 경우에는 박씨일가가 설립자가 아니다, 자기들부터도 차미리사 여사한테 송금선 씨가 인수받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설립자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 시인하는 거니까 결국은 그렇다면 박씨일가가 학교에 대해서 갖고 있는 여태까지의 환상, 우리 꺼다라고 마치 사유물처럼 생각하는 것 그것 자체는 우리가 더 이상 용납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자기네들이 여태껏 학교를 유지해오는데 공로가 있었다, 이렇게는 확실히 얘기할 수 있겠죠 차미리사 여사가 돌아가신 후에 어느 누구도 학교를 보살필 사람이 없었는데 우리가 학교를 보살펴줬다 이렇게는, 만약에 적극적으로 변명하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학교를 세웠고 우리 어머니가 학교를 세웠다, 이런 얘기 자기네들도 못하게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대학교라는 게… 설립자가… 우리학교가 민족대학에서 출발했는데. 대학교라는 건 중요한 게 건학 이념이란 말이에요. 건학이념 갖고 학교가 운영되는 거지. 세습이란 게 있을 수 없는 거거든. 이사장이 누굴 이사장으로 지목한다 이게 불가능한 거라고. 우리가 내 재산을 상속한다, 법적으로 가능하지만 학교는 그게 불가능하니까. 결국은 설립이념을 갖고 학교는 끊임없이 승계되는 거라고 하면, 인적 맥이 연결이 안 된다면 이념적 맥을 우리가 찾아나가야 된다는 거지. 그렇다면 차미리사가 학교를 세울 때 어떤 정신을 가졌는가 그걸 밝히는 작업, 그게 중요하고 그래서 나는 차미리사 여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된 건데 덕성여대가 어떤 이념적 정신을 갖고 앞으로 계승 발전해야 하느냐 이걸 밝혀내야 한다는 거지.
차미리 여사의 이념적 정신 중에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예속이라던지 식민지에 맞서 싸우는 민족적인 정신, 또 하나가 여자도 남자와 똑같다는 평등의식, 민주적인 의식, 또 하나가 외국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학교를 운영하는 자주적인 정신, 또 하나가 차미리사 여사가 해방이후에 통일운동을 한다고. 김구선생과 함께. 분단체제를 극복하려고. 통일정신 이 네 가지 이념에 입각해서 그런 이념에 맞는 사람들이 학교를 운영하고 경영해야 한다는 거지. 이념적 계승으로. 지금은 박씨일가라고 해서 꼭 자격이 있다 없다 할 수 없는 거에요. 어머니가 친일파니까 너도 친일파다 이런 식으로 연좌제를 적용할 수 없는 거 아니에요? 아버지 사상 때문에 아들 사상까지… 그건 안 되는 것처럼 어머니가 친일파니까 박원국도 친일파다 그렇게 규정하는 건 난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박원국도 자격이 없다고 할 수는 없죠. 그렇지만 건학이념, 설립정신에 충실해야 한다는 거죠. 충실하지 않으면 자격이 없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그러려면 학생들한테 민족정신 교육을 시켜야지. 통일 교육, 그런 이념에 맞는 선생도 뽑아야지. 우리 학교는 이런 이런 이념을 가지니까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와라. 그런데 박원국은 그게 아니라 반대 생각을 가진 사람들, 극우 수구 보수… 그런 식으로 만든 거에요. 그런 생각 가진 사람은 빨갱이다, 학생들도 빨갱이다, 무조건 제적시키고 교수는 해직시킨단 말이에요. 어떻게 보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거죠. 정통성이 없다는 거야. 우리 학교는 민족대학이에요. 교수도 그런 이념에 충실해야 되고 총장도 그런 이념에 충실해야 되고 학생도 그런 이념에 충실하고 그런 대학이 되면 되는 거죠.
이> 고소 여러번 당하셨잖아요? 요새 조사 받으러 불려다니시느라 바쁘시죠?
한> 내가 고소당한 건 거의 한… 97년부터 따지면 6건 정도 고소당했어요.
이> 요새 조사받는 건…
한> 요새 조사 받는 건 박원택이 고소했죠. 박원국은 고소를 안 했고 박원택, 김기주, 이강혁, 강명희, 권순경, 다섯 건이네. 작년부터 시작해서 작년 올해 합쳐서 다섯 건이네요. 박원택, 김기주, 이강혁, 강명희가 고소한 건 작년이고 권순경이 고소한 건 올해니까 작년 올해 합쳐서 총 다섯 건을 고소한 거죠. 강명희 교수는 나를 두 번 고소했고… 내가 그 당시에 복직 될 거 같으니까 복직을 막기 위해서. 하하… 강명희 교수는 나하고 악연이 많은 사람이지. 고소를 두 번씩이나 한다는 게 쉽지가 않은데 두 번이나 고소당한 악연이죠.
이> 오늘 국회에 가시잖아요. 국정감사 준비는 어떻게 하시는지 얘기 좀 해주시겠어요?
한> 국정감사를 다음주 월요일부터 하는데… 그 전에는 증인을 출석시켜서 감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식의 국정감사가 아니라 교육부를 상대로 국정감사를 하는 거에요. 우리도 교육부가 덕성여대에 대해서 지도감독을 철저하게 못했다, 그렇게 교육부를 질책하게 될텐데. 요구 사항이 크게 몇 개에요. 하나는 원래 작년 국정 감사장에서 덕성여대는 이사회가 문제이기 때문에 이사진을 중립적인 인사들로 뽑겠다 그렇게 지도하겠다 그랬는데 지도 전혀 안 한 거죠. 방관한 거 아냐? 그걸 우리가 제일 먼저 지적을 할거고 두번째는 교육부가 감사결과를 냈잖아요. 그런데도 박원국이 학내분규 해소대책을 마련 안 한다면 어떻게 할거냐 박원국한테 구체적으로 어떤 제재를 할 것인지 어떻게 강제해낼 것이냐 하는 문제하고 박원국이 연임 안 됐을 경우 이후 이사진 체제를 어떻게 구축할 거냐 이런 문제. 이번에 교수초빙과정도 내규도 안 지키고. 그런 거에 대해서 감사해서 인사위원회에 문제가 있었다 이렇게 했는데 그거에 대해서 교육부가 어떤 지도감독을 할 것인지 그런 거 따지려고.
캠퍼스를 넘어, 투쟁은 계속된다
이> 지금까지 복직투쟁하셔서 교수 재임용제나 사학비리에 대해서도 잘 아시잖아요. 사립학교법 개정이 왜 필요한지도 많이 느끼셨을텐데, 선생님도 많이 말씀하셨지만 그것이 대한민국 전체의 부조리와도 연결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요새 벌어지고 있는 언론개혁도 그렇고 지금껏 쌓였던 것들이 보수와 진보의 대결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거든요. 사학을 하시는 분이니까 잘 설명해주실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보수와 진보… 우리 사회에 보수와 진보 이렇게 구분한다는 건 좀 안 맞다고 생각해요. 진보라는 개념은 우리 사회에서 뿌리를 내릴 수가 없어요. 국가보안법도 아직 남아있고. 예를 들면 오히려 수구와… 보수라는 건 어떤 의미에서 좋은 거죠. 지킬 건 지키고 바꿀 건 바꾼다는 얘긴데 우리 사회에선 수구와 개혁세력 이 정도지 진보 세력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 못 되죠. 그런 이념을 표방하면 아예 범죄자가 되니까 수구와 개혁세력의 전선이 그렇게 형성된거죠. 민주세력은 이 체제를 개혁을 해야 된다는 얘기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 체제가 좋다 바꿀게 뭐가 있냐는 건데 그런 것이 여러 방면에서 법 개정으로 나타나는 거죠. 사회적 모든 힘의 최종압축, 최종결집은 법이니까. 교육현장에 오면 사립학교법이죠. 사립학교법은 개악의 역사란 말이에요, 개선의 역사가 아니라. 그 얘기는 사립학교에서는 수구세력의 승리의 과정이다. 법으로 볼 때. 이렇게 얘기할 수 있죠. 80년대보다 90년대 더 개악됐고 90년대 초 보다 97년 이후에 더 개악됐으니까. 대학은 피폐해지고 민주세력이 힘을 잃고 발언을 못하고 대학 사회가 힘을 못 받고 생기가 안 도는 게 그것 때문에 그런 거라고. 이러한 것을 가진 자들은 대학도 시장경제의 논리에 또다시 편입시킬려고 그런단 말이에요. 시장경제논리. 신자유주의라고. 그렇게 그야말로 가진 자의 시장이란 건 가진 자가 조종하는 거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장 조종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잖아. 사실은 그게 아니죠. 가진 자는 형식적인 평등으로 시장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네들이 교육 현장을 왜곡시키는 거 아냐. 이거에 맞서서는 두 가지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하나는 각각의 현장에서의 싸움, 그 싸움이 상당히 중요한 거거든요. 현장에서 문제를 느끼는 주체들이 결단을 하는 거고. 그래서 싸운다는 건 국지전이고 지엽적이긴 하지만 상당히 중요한 모순을 드러내는 싸움을 하는 거죠. 또 하나는 제도적 차원에서 법개정 싸움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국지전에서 이겨봤자 우리 덕성여대도 그렇지만 법 전체가 개정이 안되면 비리 이사장이 다시 들어온단 말이죠. 법 전체로 싸우는 싸움을 해야 하는데 현장에서의 싸움과 법을 바꾸는 싸움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어느 싸움을 하던 간에 연대를 해야지. 현장에서 싸워도 민주세력 간에 연대를 해야되고 법 개정도 연대를 해야죠.
이> 지금 우리 학교에서 말하면 공투위…
한> 공투위 같은 조직을 가지고 싸움을 하니까 각종 탄압에 맞서면서도 민주세력의 엄호를 받잖아요. 약 30여 개의 교육단체, 시민단체들로 구성된다고. 그렇지 않은 대학은 다 그만 뒀다고. 한세대 같은 경우 교육부 감사받고도 오히려 교수들 해직시키고 학생들 제적시켰단 말야. 범 민주세력의 엄호를 받지 못하니까 연대를 하지 못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현장과 제도 법 개정 두가지 싸움을 하되 민주세력이 고립분산적으로 싸우면 백전백패다. 상대편은 모든 걸 다 갖고 있단 말이에요. 자본도 갖고 있지 권력도 갖고 있지 여론 조작하는 힘도 갖고 있지 막강한 힘에 맞서서 양심 하나만 갖고 싸운다고 되겠냔 말이지.
민교협을 비롯한 각종 시민사회단체들이 함께 참여한 “덕성여대민주화와 사학비리척결을 위한 공동투쟁위원회”는 2000년 8월 28일 출범 결의문을 발표하면서 결성되었다.
이> 동아일보 사주와 조선일보 사주 역시 사립학교 재단 이사장이라서 그런지 두 신문 모두 사립학교법개정에 심하게 반대하는 것 같은데 사실 이번에 투쟁하면서 동아일보의 덕성여대사태에 대한 왜곡 보도에 굉장히 화가 났었거든요. 사실 친일지였고 권력에 빌붙어 지금껏 성장해온 신문들이잖아요. 여론몰이, 여론조작하는 것도 너무 심하고요. 96년 연대사태도 그렇고 학생운동을 하면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버리잖아요. 그런 게 70년대, 80년대보다 90년대 들어와서 아주 심해진 것 같아요.
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민족지라고 그러지만 역사적으로 친일지였죠. 다른 말로 하면 반 민족지인데해방이후에는 반공세력으로 변신하면서 자기네들이 그야말로 민족지였다, 그러면서 통일세력을 모두 좌익으로 몰아붙인단 말이죠. 그러면서 이 사람들이 70년대 되면 친독재 세력이 되는 거죠. 친일세력, 분단세력, 독재세력 이것들을 유지하게 만든 결정적인 힘을 가진 건 언론이고 영향력이 큰 신문일수록 더 큰 기여를 했다고 볼 때 조선 중앙 동아의 반민족성 반민주성 반통일성,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입증이 됐는데 다만 그 거대한 권력에 맞서 싸울만큼 그들의 추악한 정체를 폭로할만한 힘이 없었던 거죠. 모든 게 다 거기 가서 굴종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게 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요새 나타나는 조선 중앙 동아의 추악상을 시민운동 차원에서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은 좋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장악하거든요. 여태까지 이 사람들은 과거에 대해 그릇된 조작을 해놓은 거죠. 그것 때문에 미래를 장악할 수 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조작된 과거를 폭로함으로 인해서 과거에 대한 지배력을 떨어뜨리게 되는 거죠. 따라서 미래에 대한 장악력도 떨어지는 거죠. 박원국이랑 똑같은 거에요. 과거에 대한 장악력은 떨어지면서 그런 것을 폭로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민주역량이 성장했다는 것의 하나의 징조로 볼 수 있는 거죠.
나한테 현대사 강의를 왜 하냐, 늘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비유를 들자면, 우리 인체로 비유를 들자면 학생 하나 하나는 세포다. 이 세포 하나 하나가 건강해야 하는데 이 세포가 암에 걸리면 퍼지는 거 아니에요? 세포 하나 하나가 건강해야 하는데 특히 신선한 세포들, 젊은 사람들의 생각이 건강해야지. 근데 계속 그릇된 정보를 주는데 중독이 되면 세포가 병든다는 거지. 독소를 발산시키지 않게 차단하는 작업, 예를 들면 불매운동 벌이는 것 뿐만아니라 기고를 안 한다든지 입사를 안 한다는지 그런 운동들 적극 계승했으면 좋겠어요. 자꾸만 봐준다는 얘기는 독소를 발산시키게 만드는 거니까.
이> 작년 국정감사 때 한나라당의 현승일 의원이 투쟁의 시대는 끝났다, 덕성여대는 왜 이런가, 교수는 연구나 하고 학생은 공부나 하라고 했다는데 잘 모르지만 현승일 의원도 옛날에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들었거든요?
한> 60년대 6·3 세대라고 그러는데 그런 사람 많잖아요. 나도 한 때 했다는 둥 그러면서 변절한 사람 많은데 그런 사람이 끼치는 해독이 더 많은 거죠. 자기들은 변절이 아니라 변신했다고 애기하겠지만 사실 변절인데. 그게 가능할까 생각을 했지만… 여러 가지 운동이라는 걸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죠. 자기의 입신을 위한. 근데 우리가 운동을 할 때는 수단이 아니라 정말 애정으로부터 출발해야겠지요. 이걸 해서 뭘 얻겠다 여기서 얻은 프리미엄을 통해서 뭘 하겠다. 386세대가 욕먹는 게 그거 아니에요? 프리미엄으로 자기가 다른 것을 쟁취하는 도구로 사용한단 말이죠. 그런 식의 행동은 버리고 지식인이면 참으로 지식인적인 양심, 학생에 대한 애정, 그것만 있어야 된단 말이지. 내가 몇 년도에 민주화운동 했으니까 그걸 보상을 받으려고 그러면 그릇된 시장 논리가 개입되는 거죠.
이> 투쟁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하는데요.
한> 그건 뭐 매일 우익 수구 세력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이> 역사라는 게 투쟁의 기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보수와 진보가 싸워서 또는 어떤 어떤 세력이 싸워서 그 결과 사회가 바뀌고 또다시 뒤집히고 사회변동이 일어나는 거잖아요. 우리 사회를 봐도 그렇잖아요. 그런데 투쟁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말은 사실은 끝나지 않았는데 기득권층, 지배층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교묘히 무력화시키려는 전략이 아닐까요?
한> 그렇죠. 그런 논리죠. 투쟁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은 뒤집어서 말하면 나는 이제 기득권층이 됐다, 이걸 표현한 것 뿐이죠. 자기가 끝난 거지 사회가 끝난 건 아니죠. 아직도 무수히 많은 빈민이 있고 무수히 많은 철거민이 있고 무수히 많은 양심수가 있는데… 투쟁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말은 자기 개인이 기득권층이 됐다는 고백일 뿐이지 사회에 대한 진단은 아니지. 사실 영향력도 별로 없는 사람이고.
선생님과 인터뷰 약속을 잡을 때 선생님은 자신의 투쟁 백서를 읽고 오라고 하시면서 백서다섯권을 주셨습니다. 97년 재임용 탈락 때부터 99년 복직 때까지의 모든 기록이 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렇게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정말 놀랐지요. 인터뷰하시는 중에도 계속 백서나 자료들을 보시면서 정확하게 설명해주시려고 애쓰시고.
이> 다른 학문을 하는 것보다 文史哲을 하면 다른 학문을 하는 것보다는 뭔가 있어 보이고… 있을 거 같고 그렇잖아요? 하하… 사실 저는 투쟁 백서 읽고 놀랐거든요. 저렇게 기록할 수 있다는 것, 놀라웠거든요. 역시 사학을 하는 사람은 다르구나… 투쟁의 과정들이 곧 역사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덕성여대의 투쟁의 역사가 한국현대사와 참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해요.
한> 그렇죠. 90년 성낙돈 교수 복직투쟁과 97년 학자투쟁을 80년 광주민주화 운동과 87년 6월 항쟁에 비유할 수 있죠. 실패하긴 했지만 90년도의 그 싸움이 97년 싸움의 원동력이 됐던 거죠. 그리고 그때 학교를 다녔던 80년대 학번들이 민주동문회를 만들었고 그것이 이번 총동창회 개혁까지 이루게 된 거죠. 그리고 덕성여대가 가야할 목표라던가 정신, 원형을 발견한 거고. 앞으로는 덕성여대가 발전할 겁니다. 출발이 민족대학이었고 사학민주화를 이뤄냈다는 자부심, 그 프리미엄이 붙으면 질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죠. 거기에는 동문들의 힘이 매우 필요합니다.
이> 어디 가면 너네 학교 아직도 수업거부 하냐, 아직도 시끄럽냐 그런 얘기 많이 듣고 마음도 상하거든요. 그런데 이미 덕성여대라는 이름은 분규사학으로뿐만 아니라 사학민주화의 한 상징으로 굳어져 버린 것 같아요. 덕성여대건 박원국이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그 자체가 희망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이 시대에 사회의 부조리함에 맞서 싸우는 학생들이 없다고들 이야기 하잖아요. 물론 한총련이라는 조직이 있지만 최종목표는 통일이니까요. 그런데 덕성여대는 그걸 한다, 그런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투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투쟁의 의미를 분석하고 그 전망을 제시할 때에 그 투쟁은 승리의 투쟁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맹목적인 반복이 되서 지쳐버려요. 우리가 투쟁을 하는데 그 투쟁의 의미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그것이 나하고 무슨 관련이 있는지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알아야죠. 나하고는 관련이 없지만 불쌍해서 한다든지 동정해서 한다든지 그러면 안 되죠. 그 투쟁은 우리가 지나가는 거지한테 적선하는 정도의 의미지 자기는 빠진 거죠.
이>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수업거부 투쟁할 때도 그랬지만 학교 자유게시판에 그런 글이 많이 올라오잖아요. 투쟁할 때 많이 도와드릴께요, 하는 류의 글들.
한> 자기 문제로 생각을 해야죠. 내가 강의 투쟁할 때도 학생들한테 그랬어요. 선생님을 참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들을 거면 듣지 말라고 그랬어요. 나는 내 권리를 찾는 거고 학생들은 수업권을 찾는 거다. 듣고 싶은 선생 강의를 듣는 게 당연한 권리인데 그 권리를 빼앗고 이 사람 수업 들어라라고 하는 건 수업권을 박탈당한 거라구요. 나는 강의할 권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해직시켰으니까 교수권을 찾는 거다. 두 가지 각 주체가 연대하는 거고 최종으로 교육환경이라는 교육권이라는 우리 둘을 연결시킬 수 있다. 절대 나를 불쌍하게 여겨서 하지 말라, 나는 그런 동정 받기 싫다. 해직교수니까 복직시켜야지 그런 생각하지 마라. 난 내 권리를 찾고 너희는 너희 권리를 찾는 거다, 그 이해관계가 맞으니까 하는 거고. 내 강의를 듣는 사람이 나중에 학교에서 틀림없이 학점 안 줄텐데 학점 안 줘도 말지 그런 생각하지 말라고. 반드시 학점 쟁취해라. 그런 무기력하고 패배적인 생각은 하지 말라. 각오와 결심이 있는 사람만 강의를 들어라.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덕성여대 문제를 해결할 때 학생들은 늘 학교의 주인이다 라는 말하는데 주인이면 주인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거죠. 박원국이란 사람이 환경을 파괴하는데도 가만히 놔두면서 주인이라고 하면 안되죠. 그런 주인은 무의미한 주인이죠. 그런 주인론을 펴려면 확실히 해야죠. 교수도 마찬가지에요 여기 와서 월급이나 받는 객이다 생각하는 한 뭐가 해결되겠어요? 나도 덕성여대의 한 주체다, 교수로서. 각 주인들 여러 주인들 학생은 학생으로서의 주인권, 교수는 교수로서의 주인권, 그 권리를 확실히 행사할 때 투쟁을 하더라도 주인이 되는 과정, 자아가 성숙되는 과정, 자기 주체성이 발현되는 과정으로 투쟁을 해야 하고. 그것이 단순 반복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기록을 남겼어요. 이를테면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장악한다고 했는데 나는 과거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긴 거에요.
이> 80년대의 이념성이라는 것은 90년대 들어와서 다 빠졌고 학생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와해되어 버린 상태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사회 전체적인 부조리는 많고. 특히 대학이라는 현장에서는 사학비리로 나타나는데요, 다른 학교도 문제가 많은데 왜 저 아이들은 싸우지 않을까 그런 생각 많이 하거든요.
한> 내가 덕성여대에 한 20년 있었잖아요? 내가 덕성여대 학생들에 대해서 갖고 있는 생각은 공동체 의식이 참 강하다는 것. 공동체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결집할 수 있고 다른 어느 학교보다도 문제의식이 생기면 공감대가 금방 확산되는 거죠. 지난번에 홍대에서 있었던 연대 집회를 예로 들면 덕성여대 학생들은 사백명이 모였는데 당사자 홍대는 우리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열댓명 모였단 말이에요. 결국은 우리 덕성여대 학생들이 갖고 있는 공동체 의식에 기초한 끈끈한 유대, 이것이 힘인 건데 이런 건강성이 나는 덕성여대를 부패의 나락으로부터 막아주는 중요한 저항벨트라고 생각해요. 그 정신의 원류는 차미리사 여사에 있다고 생각하고 덕성여대 학생들이 알게 모르게 차미리사의 이념을 체득했다고 생각하죠. 졸업생들한테 차미리사 여사 강연을 하면 무릎을 친다고. 이런 기질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는데 이게 있었구나 그런 얘기 많이 한다고. 그러한 소박한 데서 나오는 건강한 공동체 의식, 그것이 덕성여대의 힘이라고 생각하고 사실 이런 것들이 자본주의와 시장의 세례를 받으면 점점 흐릿해지는 거죠. 자본주의 자본주의라는 게 상품화되는 게 좋은 게 아니죠. 우리의 싸움이 개인적인 싸움이 아니라 그 모든 염원을 대변하는 그래서 책임감을 갖고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덕성여대 학생도 개인의 학교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학문제를 대변해서 싸우고 있는 거에요. 덕성여대 학생들처럼 저렇게 열심히 싸웠는데도 안 돼 이런 걸 심어주면 안 되죠. 덕성여대 학생들처럼 저렇게 열심히 싸웠더니 이기더라 이걸 심어줘야지, 뭐 덕성여대도 안 됐는데 우리가 어떻게… 뭐 사백 명 모이는 대학도 안 되는데 열댓 명 모이는 대학이 싸우려고 하겠어요? 이 싸움이 단순히 개인 싸움이 아니라 사학민주화 전체를 대변하고 있다는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죠.
이>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드릴께요. 덕성여대에 20년 계셨잖아요. 다른 학교에서 선생님을 초빙한다고 하면 가시겠어요?
질문을 하면서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는 걸 저도 알고 있었거든요.
한> 사실 딜레마인데… 왜 그러냐면 내 개인의 생각으로는 내가 학자니까, 내가 투사라고 했는데 나는 투사는 아니고 하하… 지사적인 성향은 있어요. 투사라면 사람을 모으고 선동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난 그런 성향은 없고. 하하… 내가 옳다고 하는 걸 지키는 힘은 있지요. 근데 난 학자로서의 좋은 연구를 하고싶고 좋은 논문을 내고 싶은 욕망이 있죠. 따라서 연구환경이 보장되는 대학이 나에게 유혹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사실이고. 그런데 97년 투쟁을 하면서 나는 하나의 상징이 돼버렸어요. 덕성여대뿐 아니라 대학 자체, 그리고 사학민주화의 모범적인 승리의 사례, 이렇게 됐기 때문에 이미 사회적인 존재가 된 거죠.
이> 사실 탈락했다가 복직하신 선생님들이 거의 없잖아요.
한> 거의 없죠. 없고, 그리고 복직한다고 하더라도 생각을 바꾸죠. 괜히 그런 생각을 했다가 불이익 당했으니까 조용히 있는다든지 복직을 한 다음에 또다시 그 조직을 개혁하고 민주화하려고 피해를 보상하고 싶은 심리에도 또 하면 또 피해가 오는데 안 하려고 하죠. 그런 면에서 내 개인이 상당히 사회적인 존재가 돼버렸어요. 그래서 어떤 문제를 결정할 때 개인적인 욕구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놓고 결정하기에는 어려워진 단계죠. 마치 비유를 들자면 덕성여대 떠나고 싶다라고 생각했을 때 그때 전국대학 삼천여 명의 교수가 서명을 함으로서 당신은 현장가서 싸워라,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 그런 논리 속에서 출근투쟁을 시작했는데 그런 문제가 생긴다면 여러 사람하고 상의를… 개인적으로 결정 못하고. 졸업생들 동창들 학생들 사회 민주세력들과 상의해서 이것이 옳은 일이냐, 문제가 안된다는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결정을 안 내릴거에요.
저도 한때는 학교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싸우는 내가 있어 존재하는 덕성이라고 생각하면 그 무엇보다 소중해지는 공간입니다. 97년 겨울이 생각납니다. 그때 제가 다른 학교에 갔더라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상권 선생님 역시 다른 학교에 가셨더라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상권 선생님을 에워싼 투사라는 이미지는 참 강합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만나본 선생님은 참 자상하시고 부드러운 분이셨습니다. 누가이 분을 투사라는 이미지로 만들었던 걸까요? 인터뷰는 두 번에 걸쳐 했는데 두 번째 날은선생님께서 국회에 국정감사 준비하러 가시는 날이었습니다. 제출 자료를 챙기시느라 바쁘신 와중에도 참 친절하게 응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을 봅니다. 천막강의를 하시는 선생님들, 그 강의를 정말 열심히 듣고 있는 학우들, 지나는 학우들 얼굴 하나 하나, 지난 봄 함께 투쟁했던 선배들, 동기들, 후배들. 그얼굴들 하나 하나가 희망인 것을 알아서 이제 마지막 학기인데도 떠나기가 아쉬워지나 봅니다. 어쨌든 어서 박씨일가 퇴진하고 덕성민주화 이뤄야 할텐데요. 그리고 사립학교법도 개정하고요. 그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