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문

핏기 없는 독백

 

나를 두둔하는 악마에 관한 불온한 이야기

 

겨우 존재하는 인간

 

검은 이야기 사슬

 

하품

 

 

 

        “… 내가 소설가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글쎄

 

    서서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쌓여가는, 진폐 같은 거랄까.

 

    그런 게 축적 되다가, 어느 순간

 

    몸에 이상을 일으킨 것과 같다고나 할까.

 

    무에 대한 욕망 같은 게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는 거지.

 

    그런 걸로 오염이 되어 버린,

 

    나의 상태를 내시경으로 들여다 보듯이,

 

    나를 보게 되면서,

 

    소설을 쓰게 된 것 같아.”

 

#1 생계는 번역으로 해결한다

 

 

 

5 25일 해 질 무렵 홍대앞 어느 카페에서, 소설가 정영문을 만났다.

 

최근 장편 『핏기없는 독백』(문학과지성사)과 창작집 『나를 두둔하는 악마에 관한 불온한 이야기』(세계사)가 동시에 출간되면서 화제가 되었지만, 실상 그는 1996년 장편 『겨우 존재하는 인간』으로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한, 꽤 묵은 작가이다. 1965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치면 올해 서른 여섯이다. 그런데도 그는 홍대 앞 반지하 원룸에서 혼자 살고 있다. 게다가 그는 한 번도 취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것도 모자라 이 이상하고 그로테스크한 소설 쓰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떠한 인물일까.  

 

 

 

손정수 : 『겨우 존재하는 인간』(세계사, 1997), 『검은 이야기 사슬』(문학과지성사, 1998), 『하품』(작가정신, 1999) 등의 책을 출간했었으니, 이번 창작집과 장편집이 각각 당신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책이 될 텐데, 어떤가. 독자들의 반응이 좀 있는가.

 

정영문 : 아직 초판도 다 안 나갔지.

 

 

 

손정수 : 초판이면 3000부 가량일 텐데. 이번에는 신문사에서 많이 다뤘는데도 그런가. 안쓰럽다고 해야 하나. 전반적인 출판의 흐름이 상업적으로 흐르니까 당신 작품의 입지가 좁은 것 아닌가.

 

정영문 : 내가 주류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건 맞다.

 

 

 

손정수 : 주류, 비주류를 의식한다는 건가.

 

정영문 : 사실 그런 건 의식하지 않는다. 책이 팔려야 한다는 압박감도 거의 없다. 생계는 번역이 해결해주니까.

 

 

 

정수 : 그러고 보니, 당신이 번역한 리처드 칼슨 책(『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창작시대, 1998)은 오랜 동안 꾸준히, 그것도 꽤 팔렸다. 번역한 지는 오래됐나?

 

정영문 : 95년도부터 해서, 대략 서른 권이 넘는다.

 

 

 

손정수 : 번역 경험이 작품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나. 당신 작품을 보면 쉼표가 상당히 많이 쓰이는 장문인데, 그런 것도 번역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나.

예컨대 영어의 관계대명사를 우리 말로 번역할 때 쉼표가 많이 쓰인다는 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주로 번역한 게 비소설이니까 직접적인 문체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번역하는 과정에서 우리말을 다시 해부하게 됐던 것 같기는 하다. 영향이라면 아무래도 그런 것일 게다.

 

 

 

손정수 : 지금은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니까 번역하기가 힘들 것 같은데?

 

정영문 : 맞다. 지금 두 권 정도 맡았는데,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다.

 

 

 

손정수 : 번역은 앞으로도 계속 할 생각인가.

 

정영문 : 생각은 없지만 사정에 따라 해야될 수도 있다.

 

 

 

손정수 : 소설만 써서 생계나 품위를 유지하는 건 어렵지 않나. 유지할 품위가 있는지는 별도로 하더라도 말이다.

 

정영문 : 하하하. 아주 비루하지는 않을 정도면 돼.

#2 그의 키워드, 유머와 죽음

 

 

 

손정수 : 당신 소설은 유머로 넘친다. 어떤 평론가는 당신 소설의 키워드가 유머라고도 했다.

 

(정영문 소설의 키워드는 유머다. 이 웃음은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던 해학이나 풍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카타르시스나 현실비판 대신 기괴한 냉소를 겨냥한다.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과 의미의 부재 속에서 마침내 터져나오는 웃음, 우리를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을 향한 허탈한 조롱, 다만 웃지 않을 수 없는 웃음, 그 부조리한 세계. 정영문 소설은 그 가능성의 한가운데를 가리키고 있다.-문학평론가 신수정)

 

당신 유머가 너무 고급스럽지 않나. 일반 독자들이 웃기는 웃을까.

 

정영문 : 글쎄, 견디다 견디다 끝내 터져나오는, 마지막 순간의 못 견딤 같은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손정수 : 죽음은 당신 소설을 꿰뚫고 있는 또 다른 키워드다. 『검은 이야기 사슬』에서는, 나의 생을 유일하게 지켜보고 있던 죽음, 이라고도 했고,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약간의 부자연스러움이 없진 않았지만 그것은 모르는 척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그 동안 나를, 그리고 나의 생을 가까이서 지켜주었던 죽음의 품안에 들게 되는 것뿐이었다.-「처형」, 『검은 이야기 사슬』, p. 188)

 

『핏기없는 독백』에서는 주인공 화자의 입을 빌어 잉여분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 적도 있다. 그토록 죽음에 집착하는 이유가 뭔가.

 

(내 내면의 보잘것없는 것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서열에 위치한 희망은, 무엇보다도 내가 무서워하는 희망은 자신의 눈을 송곳으로 찔러 눈을 멀게 했다. 아무것도 초래하지 않는 이 삶은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나는 내게 남은 시간이 내게 보내는 냉소를, 나의 운명이 짓고 있는 비웃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잉여분의 삶이란 것은 분명하다. 이 생각은 오래 전부터 나를 따라다닌,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의 남겨진 잔유물이라는 느낌과도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 『핏기없는 독백』, pp. 15∼16)

 

정영문 : 실제로는 죽음보다도 무의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같은 거다. 데모크리토스의 이야기던가? 무 이상의 실재는 없다는 말.

 

 

 

손정수 : 그런 식으로 집착을 하게 된 계기라도 있었나.

 

정영문 : 그런 계기는 없었다. 다만 내가지금, 여기의 실재에 집중할 수 없을 뿐이다. 자꾸만 실체 없는 것들에 마음이 간다.

 

 

 

손정수 : 그래서일까? 당신 소설에는 현실이 없고 대화나 심리로 표현된 관념만이 있다.

 

정영문 : 난 구체성을 가진 이야기에 별로 매력을 못 느낀다.

 

 

 

손정수 : , 잠이 작은 죽음이라는 얘기도 있지 않나. 『핏기없는 독백』에서도 서 있을 때를 제외하곤 거의 누워있다는 언급도 나오고. 실제로 잠을 많이 자나.

(아마 나는 누워 있는 것 같다.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몸을 일으키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때가 아니면 주로 누워 지냈으니까, 이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또한 누워 있는 자세, 이것은 나의 생이 마무리된 다음에 내가 돌아가게 될 자세이기도 하니까. 감히 말하건대 누워 있는 자세가 주는 갖가지 느낌에 나만큼 통달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점에 관해서는 나는 거의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면 말이지만. 언젠가 한번은, 단순한 소일거리로, 나는 몸이 수평의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 내 몸의 구석구석에 가해지는 미세한 압박감의 지도를, 등압선의 형태로 그리고자 한 적도 있었다, 그 정도라는 의미이다. – 『핏기없는 독백』, pp. 6∼7)

 

정영문 : 깊이 잠을 못 드니까 사실은 반수면 상태가 아주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손정수 : 그럴 때 꿈을 많이 꾸겠지?

 

정영문 : 많이 꾸지.

 

 

 

손정수 : 일부러 꿈을 꾸려고 하는 건 아닐까.

 

정영문 : 잠을 자면 현실로부터 가장 많이 멀어지는 것 같다. 현실의 무력감 같은 거.

 

 

 

손정수 : 하루에 몇 시간쯤 자는 건가.

 

정영문 : 많을 때는 하루 18시간 정도일 때도 있다. 일단 침대를 안 내려오니까. 그래도 지금은 적게 자는 편이다. 하지만 항상 멍한 건 마찬가지다.

 

 

 

손정수 : 깨어있을 때는 뭐 하나.

 

정영문 : 온갖 나쁜 생각들을 하지.

 

#3 권태도 삶이다

 

 

 

손정수 : 특별히 정기적으로 하는 일이 있나.

 

정영문 : 규칙성? 그런 건, 모르겠어, 내 삶에 아예 도입하기도 힘들어.

 

 

 

손정수 : 일년 단위도 없는가.

 

정영문 : 내일을 기약하지 않으니까.

 

 

 

손정수 : 전화 해 보면, 당신은 항상 잠에서 갓 깨어난, 핏기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누구나 당신을 보면 항상 권태 속에 빠져 있는 듯하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당신은 그 속에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언제더라? 사진 찍을 거라고 몇 백만원 주고 산 사진기를 자랑한 적이 있지? 또 언젠가는 당신 방에 같이 있는데, 홈쇼핑 회사에서 요리기구 세트 배달 온 적도 있다. 당신 방 한 켠에는 멋진 기어가 달린 자전거도 모셔져 있다. 한때는 영화감독 지망생이었고, 크로키를 배우러 다니기도 하지 않았는가? 드럼을 배운다고 한 적도 있고

 

그런데 나는 당신에게 사진을 찍혀 본 적도, 요리한 것을 먹어보라는 소리를 들어 본 적도 없다. 드럼을 치는 것도, 자전거를 타는 것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진짜로 하기는 하는 건가? 

 

정영문 : 하하하. 물론 아침에 일어나면 요리기구들이 배고프지 않냐고 유혹한다. 자전거가 나 좀 한 번 데리고 나가 달라고 떼를 쓴다. 그러나 난, 모르는 척 무시해 버린다.

 

 

 

손정수 : 따지고 보면 당신 소설도 그렇다. 당신이 썼다는 소설을 읽어본 적은 있어도, 당신이 소설을 쓴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 실제로 소설을 쓰고 있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정영문 : 그래도 소설은 상당히 꾸준히 쓰는 편이다. 그나마 소설은 무엇인가를 지독하게 이야기해도 좋은 거니까.

 

 

 

손정수 : 당신 소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게 있나.

 

정영문 : 있다면, 할 말이 없다는 거겠지. 아주 역설적이지만.

 

 

 

손정수 : 권태가 사실은 동력이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긴가.

 

정영문 : 권태도 두 가지 속성을 가진 것 같아.

 

 

 

손정수 : 그게 대체 무슨 얘긴가, 라고 물으면 또 딴 얘기할 테고. 다른 얘기로 빨리 넘어가자. , 당신을 소설가로 만든 결정적인 계기랄까, 그런 게 있나.

 

정영문 : 결정적인 계기는, 글쎄, 서서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쌓여가는 진폐 같은 거랄까, 그런 게 축적 되다가, 어느 순간, 몸에 이상을 일으킨 것과 같다고나 할까. 무에 대한 욕망 같은 게 조금씩, 조금씩 자라난 거지. 그런 걸로 오염이 되어 버린, 나의 상태를 내시경으로 들여다 보듯이, 나를 보게 되면서, 소설을 쓰게 된 것 같아.

(사진 찍느라 잠시 인터뷰 중단) 

 

 

 

손정수 :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정영문 : 내가 그런 걸 기억할 거라고 생각하지마.

 

# 4 텅 빈 무대 위의 배우

 

 

 

손정수 : 대학 다닐 때는 어땠을까.

 

정영문 : 지금하고 다를 거 없지.

 

 

 

손정수 : 수업은 착실하게 들었을까.

 

정영문 : 물론 착실하게 빼먹었지.

 

 

 

손정수 : 그럼 뭐했나.

 

정영문 : 그냥 집에 있었지. 대학뿐만 아니라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어릴 때부터 난 그랬다.

 

 

 

손정수 : 고향이 경남 거창 쪽이지? 신기하게도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네?

 

정영문 : 대학 다닐 때 연극을 조금 했거든. 그 덕분이지.

 

 

 

손정수 : 실제로 연기도 했나.

 

정영문 : 주인공이 집에 왔을 때 거실을 안내하고 우아하게 물러가는 역할.

 

 

 

손정수 : 연극이 삶에 영향을 미쳤을까.

 

정영문 :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하여간 잠깐이었지만, 연습이 끝나고 텅 빈 무대에서 그냥 그렇게, 혼자서 방심한 채로 앉아 있었던 게 너무 좋았다.

그렇게 텅 빈 무대 위에 인물들을 올리고 어떻게든 움직이게 만들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다.

 

 

 

손정수 : 그래누군가는 당신 소설이 마치 내면이라는 무대에 상연되는 것 같다고 했다.

지금 당신 말을 들어 보니 적절한 지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전공이었던 심리학의 영향은 아닐까?

 

정영문 : 그럴까? 난 겨우 학교를 졸업할 정도의 학점만 받았다. 

 

 

 

손정수 : 졸업하고서는 뭘 했나.

 

정영문 : 프랑스에 잠시 가 있었다.

 

손정수 : 얼마나?

 

 

 

정영문 : 일 년도 안 되지. 게다가 그 기간 동안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지방도시에 있었다. 거기에 조그맣고 아주 이쁜 공원이 있었다.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노년의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었다. 하루종일 벤치에 거의 부동자세로 가만히 앉아있는 거다. 

어떻게 보면 그냥 사색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사색하지 않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는 거다.

 

 

 

손정수 : 그러고 보니, 당신 소설에 벤치에 앉아 있는 장면이 꽤 많다.

 

정영문 : 고정된 시선,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 그런 게 강렬한 인상을 줬다.

 

 

 

손정수 : 프랑스에 간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정영문 : 처음에는 공부하려고 갔는데 사실 처음부터 공부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여기를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손정수 : 영화를 하려고 갔던 건 아니고?

 

정영문 : 지금도 난, , 정말 갈수록 영화에 대한 욕망 같은 거, 그런 게 새록새록 생긴다. 어쩌면 소설 쓰는 것 보다 더 크다.

 

 

 

손정수 :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

 

정영문 : 우선 시나리오를 써 보고 싶다.

 

 

 

손정수 : 영화 말고 다른 문화적 기호에 대한 취향은 어떤가.

 

정영문 : 사진집 정도?

 

 

 

손정수 : 당신은 요즘 사진을 찍는다기보다 사진을 찍히는 쪽에 가깝지 않나.

 

정영문 : 보그 코리아 패션 잡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거 보고 광고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모 기업 광고의 모델 섭외였는데, 그 사건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손정수 :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모델로도 활동을 할까.

 

정영문 : 재미를 주는 거라면, 그리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니라면 해 보고 싶다.

 

 

 

손정수 :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자기 외모와 체형에 자신이 있나.

 

정영문 : 아버지가 물려준 유일한 거라고 생각한다.

 

# 5 함께 살면 내 삶이 묽어진다

 

 

 

손정수 : 혼자 사는 건 어떤가. 왜 혼자 살며 언제까지 혼자 살 건가.

 

정영문 : 아직까지 누군가와 공간을 공유하는 거, 일시적이 아니라 장기간 공유하는 거 잘 안 된다.

 

 

 

손정수 : 달리 얘기하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힘든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는 얘긴가.

 

정영문 : 누군가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주위가 산만해진다. 나 자신이 묽어지는 느낌이다.

 

 

 

손정수 : 다른 직업을 생각해 본 적은 있는가.

 

정영문 : 프랑스 갔다가, 막연한 상태에서 돌아와서, 어쨌든 벌이는 해야 되니까,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 살아가는 생활방식을 시도해 보기는 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디서도 날 받아주지 않았다. 꽤 많은 곳에 응시를 했었는데.

 

 

 

손정수 : 기업체 같은 데?

 

정영문 : 대기업 쪽.

 

 

 

손정수 : 실제로 당신이 직업을 가져본 적은 없지 않은가.

 

정영문 : 그렇다.

 

손정수 : 그때도 머리가 길었나.

 

정영문 : 그 때는 거기서 요구하는 대로 잘랐었지.

 

손정수 : 머리 안 긴 당신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손정수 : 소설은 보통 언제 쓰나.

 

 

 

정영문 : 시간을 정해놓고 쓰지는 않는다. 주로 가만히 있다가 생각이 떠오르면 끄적여 놓는다.

 

 

 

손정수 : , 이건 소설로 써야지, 하는 상황이 있을까.

 

정영문 : 소설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게 있다. 이야기가 거기서 싹 터 나올 수 있는 한 장면. 방심한 상태에서 그런 걸 많이 얻는다. 그래서 다분히 시각적이다. 우선 무언의 어떤 장면이 떠오른다. 방 안이라든가 공원이라든가, 그런 것이 떠오르면, 그 다음에 그 공간을 배경으로 인물들이 배치된다.

 

 

 

손정수 :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라.

 

정영문 : 글쎄, 가끔 폐부를 움켜질 정도로 강렬한 이미지들을 만난다

태국에 갔을 때인데, 패키지 여행이었다.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는 패키지 여행이 편리하다. 아침에 깨워가지고 차에다 실어서 다 옮겨다 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조그만 소도시 식당에서 먼저 나와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는데, 길거리가 죽어 있는 듯했다. 움직이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큰 도로가 있고 조그마한 사잇길 같은 게 있는데, 그런데 거기에서 개들이 무리를 지어서 나오는 거야.

다 주인한테 버림받은 개들이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하는. 피부가 거의 헐고, 네 다리를 사용하고 있는 개들이 거의 없었어. 무슨 패잔병들처럼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도로를 지나는 거야. 일사의 열기, 거의 서 있기도 힘든 그 상태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데, 백주의 대낮에, 그 옆을 지나가는데, 모르겠어, 하여간 그게 어떤

 

 

 

손정수 : 그러고 보니까 당신 소설에 개 이야기가 나오지? 심지어 내장이 꺼내진 개마저.

 

정영문 : 내 소설에서는 동물들이 좀 나오는데, 타조도 있고 낙타도 있고.

 

 

 

손정수 : 앞으로는 어떤 소설을 쓸 작정인가?

 

정영문 : 지금까지 해 왔던 방향을 보다 완전하고 철저하게 하고 싶다. 당신은 나 보고 실험적이라고 하는데, 나 자신은 별로 내 작품이 실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하도 많은 실험들을 해 왔기 때문에 이제 할 수 있는 실험도 별로 없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외에 다른 방향은 잘 안 보인다.

 

 

 

 

 

나의 마지막 질문은지금의 삶의 방식은 당신 스스로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그냥 그렇게 흘러온 것인가였다. 그는내 의지로 선택한 건 아닌 듯 하다. 수동적으로 선택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한…”이라고 희미하게 대답했다. 누군들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흘러갔고, 흘러가고 있는 자신의 삶 또한 자신이 선택한 것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아둔한 질문을 했다. 그 잘못의 부피만큼 후회가 일었다.

 

※ 덧붙임: 인터뷰를 마치고 내용을 정리하던 중, 정영문 씨로부터 6 25일 시내 모처에서 동성동본인 소설가 정정희 씨와 결혼한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이 사건이 과연 운명인지 선택인지 궁금했으나, 끝내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축하한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새로운 생활 앞에 놓인 그와의 만남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