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스님 – 박헌영의 아들

세상의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를 추억할 의무가 있다. 술김에 내뱉는 원망으로라도 떠올리고 싶은 존재가 아버지이다. 그러니 이는 또 의무이자 배설해야 할 본능인 셈이다. 아무리 악한 아버지라도 아들로부터 추억받을 권리를 가진다. 빛바랜 자신의 사진 한 장을 쓸어내 주기만 해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것을 요동치게 만드는 것이 아들이다. 그러니 이는 또 권리인 동시에 채워져야 할 본능이라고 믿는다.

원경 스님에 대한 인터뷰의 전말을 살피자면 2000년 11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원고가 완성되는 시점으로 따지자면 무려 6개월이나 소요된 인터뷰였다. 아마도 퍼슨웹 인터뷰 중에서 가장 시간을 오래 끈 기사가 아닐까 싶다. 기획 당시는 조봉암 선생의 따님과 더불어 “실패한 혁명가의 후손”이라는 주제로 기획되었다. 기획 초기 단계에의 의도는 “유전은 실패라는 운명까지 동반한다”는 것이었다.

 

인터뷰에도 잠깐 나오지만 조봉암 선생의 따님께서는 “진보당 사건 재심청구” 문제가 걸려있어서 인터뷰를 조심스럽게 사양했다. 원경 스님 역시 처음에는 승낙하지 않았다. 스님께 직접 연락을 취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박헌영 전집』 작업에 참여하고 있던 분들을 통해서 연락을 부탁해야만 했다. 어렵게 어렵게 스님의 인터뷰 승낙을 얻어내고 약속을 잡기까지 석 달이 좀 더 걸렸다.

 

3월 20일에 첫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인터뷰 이후 녹취를 풀고, 몇가지 사항에 대해서 확인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만기사에서 스님을 두 번 더 만났다. 보충인터뷰가 있었지만, 첫 인터뷰 내용에 대한 부연설명이기 때문에 따로 옮기지 않고 부분 부분 보완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원경스님은 퍼슨웹과의 인터뷰 이전에 몇 번 인터뷰를 하신 적이 있었다. 시사저널 창간호 및 사회평론과의 인터뷰는 1989년과 1992년에 있었다. 시사저널 창간호 인터뷰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으며, 사회평론과의 인터뷰는 박비비아나(박헌영-주세죽 사이에서 낳은 딸)씨와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스님의 이야기는 많지 않다. 『역사비평』과 가졌던 1997년 인터뷰는 스님이 본인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풀어놓은 첫 인터뷰였다.

 

퍼슨웹과의 인터뷰를 위해서 그 기사를 많이 참고해야 했다. 3월 20일 이루어진 첫 인터뷰는 다섯 시간 이상 계속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찾아뵈었을때는 사찰(만기사) 공사중임에도 불구하고 흙 묻은 손을 씻지도 않은채, 자세하게 설명해주신 스님께 감사드린다. 『역사비평』 인터뷰와 중복되는 부분은 가능하면 제외했으며, 퍼슨웹의 여느 인터뷰와 마찬가지로 ‘노 컷’, 있는 그대로의 녹취를 올린다. 부분 부분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관한 간략한 해설을 덧붙였으며, 편집자의 시덥쟎은 넋두리도 포함시켰다. 아주 오랜 준비, 제작기간이 걸렸지만 조금의 지루함도 느끼지 못하고 팽팽한 긴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인터뷰였다. 인터뷰를 도와주기 위해 시간을 내 주신 윤해동, 류준범 선생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겠다.

 

때   : 2001년 3월 20일 2시, 2001년 6월 6일 그리고 2001년 6월 18일
장소 : 강남 한 식당(진달래), 경기도 어느 국도변 사찰(만기사)

장면 1: 1956년 7월 19일 동틀 무렵, 평양 인근의 어느 야산 기슭.

방학세 : 박동무, 동무의 죄과를 이제서야 청산할 수 있게 되었소.
박헌영 : . . . . . .

방학세 :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소?
박헌영 : 오랫 동안 태양을 보지 못했어. . . .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는가?

방학세 : 시간도 시간이지만 안개 때문에 그건 포기해야할 거요. 내가 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소.
박헌영 : 시간이라. . . . 멈춰 있을 줄 알았더니 그 사이에도 시간은 흘렀던 모양이군 . . . .

방학세 : 물론이지. 시간이 흐른 만큼 세상도 많이 변해버렸지. 스탈린 동지도 서거했고, 전쟁도 끝났으니까. . .
박헌영 : 그렇군. 전쟁이 끝났단 말이지 . . . .

 

방학세 : 하지만 미제국주의자들과 이승만 괴뢰도당을 몰아내지 못한 반쪽 승리에 불과하오. 눈을 감으시오. 이젠 갈 시간이 됐어.
박헌영 : . . .진정 해는 뜨지 않는군. . . 동지들이 원하는 나머지 반쪽의 승리를 . . . 내가 줄 수 있었으면 좋겠군. (눈을 감으며) 한산! 네게 너무 무거운 짐을 맡기고 가는구나. . .

조선공산당의 당수이자 남조선 노동당 부위원장,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그의 이름 앞에 늘어놓은 긴 수식어 대신, 지난 50년간 우리는 그를 매우 간명한 수식어로 꾸며주었다. ‘빨갱이’ 혹은 ‘미제의 간첩’. 북한의 前職 고위관리였던 강상호씨와 박길룡씨의 증언에 따르자면 박헌영은 1956년 7월 19일 경, 평양 근교에 있는 한 야산에서 북한의 내무상이었던 방학세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한다. 박헌영의 최후에 대한 또 다른 증언은 그가 1955년 12월 15일 재판이 종료된 직후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하기도 하고. 인터뷰는 박헌영의 죽음에 관한 것은 물론 아니다. 박헌영에 대한, 조선공산당 그리고 남조선 노동당(남로당)에 대한 평가를 의도하지도 않는다. 오늘 우리가 만날 사람은 단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애써 되살리고 싶어하는 사람의 아들일 뿐이다. 아들의 이러한 소박한 희망은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무척이나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고, 또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으로 보인다.

 

‘빨갱이’에 대한 선입견은 색깔 논쟁의 화신이다시피 했던 인물이 청와대에 입성해도 여전하고, 금세기이래 최악의 스파이라는 낙인 역시 아직까지 지워질 줄 모른다. 1948년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으로 삼국통일 이래 유지되어 온 단일국가의 역사는 마감되었고, 또한 조선공산당의 역사 역시 상속자임을 자처하는 세력이 나타나지 않은 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지난 50년 간 남한 공산주의 운동이 지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일제 말기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조선공산당 재건’이라는 혹은 그와 유사한 간판을 내걸지는 않았다. 1925년 코민테른의 승인 하에 출발한 조선공산당의 역사는 북로당에 유입된 일부 세력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그 맥이 끊어진 채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수천 수만 개의 블록 조각을 끼워 맞추듯 역사가들의 작업도 일종의 조각 맞추기 놀이 셈이다. 때로는 기발한 상상력이 때로는 지나친 의욕이 기묘한 형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오늘 역사라는 조각 맞추기 놀이가 조합해 낼 수 있는 수백 억 가지의 형상 가운데 하나를 보게 될 것이다. 일관된 신념과 의지를 가진 한 스님이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이 조각그림 맞추기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는 文理가 트여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학자도 아니고 당과 정치노선에 생명을 걸고 있는 정치가도 아니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과학과 이데올로기 같은 ‘매뉴얼’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이성보다는 감성에 매달려야 했고, 냉철함보다는 열정에 휩싸여야 했으며, 분노보다는 동정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 조건으로 따지자면 항균처리된 실험도구를 비롯하여 완벽한 기자재들을 갖춘 실험실에의 전문적 역사학자들에 비해 그의 작업 조건은 열악하기 이를데 없다. 그의 실험실에서 나온 실험결과는 그래서 빈축을 사기도 하고, 때로 측은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쉬지 않고 지치지 않으며 또 멈춰 서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단지 짜맞추기 ‘놀이’가 재미있어서 오랜 동안 만지작거리는 팔자 좋은 사람들과는 다르다. 또 한 바가지의 강물을 퍼담고서는 “내가 저 거대한 강을, 역사라는 강을 이 그릇에 담았노라!”고 고함칠 만큼 배포가 크지도 않다. 때로는 쉰 목소리로, 때로는 육중한 저음으로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내가 길어 온 물은 그저 江에서 퍼 왔을 따름이예요. 돌아 보니 그 江의 이름이 아버지더군요.”

 

1. 초보 인터뷰어와 인터뷰를 꺼리는 스님

스님과의 인터뷰 날짜가 잡혔다는 연락이 류준범씨로부터 왔다. 평일 낮으로 시간을 잡았던 것은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스님의 성격 탓이리라. 하지만 예상밖으로 한식당 안은 무척 시끄러웠다. 칸막이 저쪽 편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 때문에 먼저 도착했던 퍼슨웹 인터뷰어와 류준범씨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강남 계꾼들의 모임인 듯 했다. 긴장한 탓인지 처음 다루어야 하는 녹음기기가 못마땅한 듯 연신 인상을 찌푸리며 만지작거렸다. 인터뷰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를 찬찬히 다시 확인해야 했는데도, 그러지 못했다. 머리 속에는 오로지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제대로 이야기를 해 주시려나. . . .’

 

10분 정도 기다렸을 때,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허름한 점퍼를 입은 거구가 몸을 드러냈다. 스님이었다. 승복 입은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첫 인상은 의외였다. 표정도 약간은 험상궂었기(?) 때문에 적잖이 긴장하고 있던 인터뷰어들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스님이 자리에 앉고, 종업원이 물컵에 물을 채우는 동안에도 퍼슨웹의 인터뷰어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전화로 인사를 드릴걸’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어렵게 어렵게 첫마디를 꺼냈다.

 

퍼슨웹> 안녕하십니까, 스님. 류준범씨(『박헌영 전집』 편집작업 참가, 서울대 강사)한테 전해 들으셨겠지만 저희는 「퍼슨웹」이라고 하는 인터넷 잡지입니다. 인터뷰만 전문으로 하는 곳입니다. 먼저 인터뷰를 허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전집』도 나오고 또 한번 뵙고 싶기도 해서 겸사겸사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인터뷰라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저 스님 살아오신 이야기를 저희에게 들려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 . .
원경> 허허…

 

 

스님은 그저 웃기만 하셨다. 지난번 『역사비평』에서 같이 인터뷰를 하셨던 윤해동 선생께 동석해 주십사고 하는 부탁을 드린 상태였지만 아직 도착하질 않으셨다.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였건만, 늦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인터뷰어의 난처한 표정을 읽었는지 옆에 있는 류준범 씨가 거들고 나선다.

 
류준범> 뭐 그렇게 학술적이거나 딱딱한 내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역비 인터뷰하고는 좀 분위기는 다를꺼 같네요.


원경> 내가 한다고 대답은 했는데. . .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할지 말이야. 허허…. 질문 내용을 조금 알아야겠다고 했는데. . .

 

 

 

퍼슨웹> 장기수 분들을 인터뷰할 때도 느꼈습니다만, 저희가 전후 사정을 모두 안다거나 또 이런 저런 것을 꼬치꼬치 캐묻는 인터뷰라기 보다는, 그저 그 분들이 살아오신 이야기라든지 그런 걸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주시는 게 좋았습니다. 저희들이 스님께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여러 번 부탁을 드렸던 것은 『박헌영 전집』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스님과의 인터뷰가 의미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대학생들 가운데는 박헌영이 누군지도 잘 모르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현대사를 잘 모르는 거지요.
비단 학생들 뿐 아니라, 한때 역사의 한 가운데 있었던 박헌영이란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과연 『박헌영 전집』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그런 내용을 좀 전달해주고 싶었습니다. 또 선친의 활동이, 인생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도 그렇구요. 그런 부분에 대해 담담하게 말씀을 해 주시면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원경> 『전집』은 제가 잘 몰라요. 어떤 자료를 어느 정도를 모았는지 잘 몰라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료라는 것은 한평생 가더라도 다 확보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전집』을 해야 한다는 것은 자료를 내가 찾아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예를 들어 러시아의 대통령궁이나 KGB 문서보관소 등에 있는 박헌영 선생에 대한 파일이라고나 할까요? 혹은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파일 같은 것 말이지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박선생’이 일제시대 때 투쟁을 하시면서 지하에서 계시다가, 南行(대구-광주)을 시도하시고, 해방이 되어서 서울에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이 말하는 ‘8월 테제’말이지요. 이것이 (당시에) 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벌써 지하생활 하면서 구상 속에 있다가 나온거라고 생각하거든요. 해방이 되면서 정리가 되었다고 보거든요. 8월 테제보다 뭐 더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서울 부영사(샤브신)로 와 계시던 분을 통해서 스탈린 원수한테 보낸 「정책입안보고서」라는 것이 있거든요. 내가 자료를 찾고자 한다는 것은 이것을 찾기 위한 작업입니다.

 

샤브신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서울에 있던 러시아 영사관 부영사로서 당시까지는 가장 믿을만한 ‘조선통’이었다. 샤브신의 부인이었던 꿀리꼬프 샤브시나 여사는 박헌영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해서 해방 이후 남한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1945년 남한에서』(한울)라는 글을 남겼다. 스님은 선친에 대한 호칭으로 ‘박선생’이라는 일반명사를 사용했는데, 선친인 박헌영 선생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할지는 스님의 평생 고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원경> 「정책입안보고서」라는 것은 해방 정국에 대한, 남북한에 대한 당신(박헌영)의 구상이랄까 설계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종류의 문건입니다. 이것을 정식으로 그분(샤브신)을 통해서 스탈린 원수한테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걸 현재까지 찾덜 못했어요. 대통령궁에 있는 문서보관소에는 연락이 안되고, KGB도 안되고. 또 한번은 (박헌영 선생이) 북쪽에 가셨을 때, 그 당시 스탈린 측근에서 (박헌영 선생에게) 다시 또 요구했습니다. 「정책입안보고서」를 다시 올리라고 말이지요. 남쪽에 있을 때 생각과 북쪽에 있을 때 생각이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를. 레베데픈가 그 분을 통해서 정식으로 다시 전달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찾는 것만이, 그것으로서 박헌영이라는 선생에 대한, 그분에 대한, 그분이 공산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민족적 공산주의자이든, 사회주의자든, 그분이 생각했던 우리 조국에 대해서 구상해 놓은 것을, 이것을 찾아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 당부를 ‘누구’한테 받았어요.

  

원경 스님 인터뷰 녹취를 가다듬으면서 참으로 인생이란 길다고 느낀다.
특히 우리의 근현대사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 ‘인생’이란 특별히 길고 또 깊은 시간이다. 원경스님에게도 그 시간은 길고도 깊었고 그만큼 많은 사람과 사건이 그 깊은 골 속에 묻혀있었다. 때로는 이름을 밝히기도 했지만, ‘누구’ ‘어떤 사람’ 등등으로 끝내 꺼내놓지 않은 인물들도 꽤 있었다. 스님은 여러번 ‘누구’, ‘어떤 사람’들에 대해 언급했지만 기억에 남은 인물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그런 당부를 ‘누구’한테 받았어요”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스님의 표정에서 뭔가 심상찮음을 느꼈다. 그리고는 곧 영어 단어 하나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Deep Throat’
비록 영화(로버트 레드포드와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대통령의 음모”)였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는 통로를 열어준 ‘익명의 제보자’를 가리키는 단어다. 스님이 인터뷰 시작 이후 처음 사용하신 비인칭 대명사 ‘누구’로써 지목했던 이 신비로운 인물은 원경 스님과의 인터뷰 내내 부침을 거듭한다. 어쩌면 스님과의 인터뷰를 거대한 하나의 ‘수수께끼’로 만들어버릴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적인 한 인물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모아놓은 『全集』이 나오기 위해서는 여러 인사들의 공동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학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때로는 관료들의 도움도 필요하고, 재원을 마련해줄 독지가도 요구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의 『전집』이 나오기 위해서는 『전집』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는 ‘인식의 공동체’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공동체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종친회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러한 단체는 시대적 조건이나 사회적 인식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느낄 경우 언제라도 자원과 인력을 동원하여 족보를 꾸미고 또 선조를 宣揚하는 일들을 추진한다.
인터뷰에서도 언급되지만 원경 스님을 비롯해서 박헌영의 후손은 그리 많지 않다. 오랜 동안 숨겨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남아있는 후손들 사이에도 교류가 많지 않다. 그리고 시대적 조건이나 사회적인 인식도 적대적이다. 통일논의가 활발한 2001년 현재도 상황이 그리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원경 스님은 오랜 시간 동안 사회와 격리되어 혼자 살아왔다. 정식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홀로 재야에서 역사를 탐구한 재야사학자도 아니다. 외견상 스님은 그저 열심히 도를 닦는 수행자일 뿐이다. 하지만 스님이 구상하고 추진했던 그리고 이제 곧 결실을 보게될 『박헌영 전집』이 나오기까지는 많은 조력자들이 참여했한다. 이들과의 인연을 더듬기 위해  이야기는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로페셔날 역사연구자들과의 만남으로. . . .

 

 
퍼슨웹> 『전집』 출간을 위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원경> 『전집』을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 . . 아무튼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은 이래요. 1985년도쯤인가? 박원순 씨가 변호사를 하고 있을 땝니다. 그런데 박원순 변호사가 그때 변호사를 쉬면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때였어요. 그때 우리가 일주일 동안 박원순 부부하고, 지금 국회의원 하는 이호웅 의원(민주당 국회의원)하고 몇몇이 차 두 대로 여행을 갔어요. 한 7-8명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박원순 부부, 천희상(출판사대표)씨, 이호웅 씨, 그리고 음식점 하시던 박모 씨 그리고 저 이렇게 7-8명이 여행을 떠나게 됐던 겁니다. 이 분(박원순)이 옛날. . . 그 ‘오둘둘(5.22)사건’이라고 하죠. 아무튼 그 사건에 연루되어서, 서울학교에서 제적당하고는 감옥엘 가게 됩니다. 시골 소년이 서울에 올라와서 경기중고를 거쳐 서울대학교를 들어갔는데, 그러니까 법학도로써 자기의 장래 꿈을 펼치기 위해 들어갔는데, 그 사건으로 인해서 서울대학교에서 제적을 당한 겁니다. 그러다가 이분이 그냥 쉴 수는 없고 해서 단국대학교를 다시 들어간 걸로 알고 있어요.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근데 사학과를 졸업해서는 세상에 나와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는 등기소 소장이 시험을 봤어야 됐는데, 사법고시는 준비가 아직 안되고 해서 등기소 소장 시험을 봤던 거예요. 그리고는 합격을 해서 영월로 부임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영월로 부임을 해서 가니, 젊은 사람이, 20대가 시골로 가니까 젊은 나이에 시골 유지가 된 겁니다. 또 소장이다 보니까 시간이 그렇게 남아요. 그때 남는 시간을 활용한 것이 고시공부를 한 겁니다. 고시공부를 해서 사법고시에 합격을 했어요.
 

스님이 언급한 ‘오둘둘’ 사건은 1975년 5월22일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김상진열사 추도식」사건에 참여했던 학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조치를 뜻한다. 당시 발령되어 있던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이 사건에 참여했던 박원순 변호사도 제적되었다.
 

원경> 그러다가 연수를 하고 대구에 가서 검사 생활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여기에서 박원순씨한테 공안을 맡으라는 지시를 했답니다. 차마 그럴 수 없다고 했죠. 학생운동을 할 때 자신이 몸소 당해봤으니까. 그래서 차라리 사표를 내는 게 낫겠다고 해서 사표를 제출했는데 . . . 제가 듣기로는 사표도 아마 바로 수리된 게 아니고 8개월 정도 있다가 수리된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고는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죠. 그런데 변호사를 하다보니까, 변론 요지를 작성하는 과정에서도 역사적인 문제가 많이 대두되거든요. 자기는 단국대학교에서 역사 공부를 했지만 그때는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되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거든요. 그래서 내가 좀더 이 분야를 공부해야 하겠다고 해서 변호사를 관두고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을 앞세워서 “그러지 말고 우리가 연구소를 하나 만들자”고 했던 거예요. 그분이 구상했던 연구소라는 것은 그 동안 정부에서 했던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럿이서 같이 공부하는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겁니다. 연구소를 만들 때는 물론 대학원생도 계셨고, 학부생도 있었고, 전문가도 계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분들이 모여서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세미나도 하고 하는 과정에서 옆에서 참관해서 듣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공부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도 수정할 건 수정하고 하는 게 공부 아니냐는 거지요. 그런 상황에서 연구소를 한번 해보자고 서로가 합의가 된 것입니다.

 

합의가 됐을 때, 박원순 변호사 당신이 옥빌딩(세종문화회관 뒷편) 401호를 얻어주고 전화도 놔주고, 월 100만원씩 지원을 했습니다.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도움을 많이 주셨지요. 그리고 연구소를 어떻게 시작할 지에 대해서는 “(해방) 3년사를 한번 해보자!” 그렇게 된거지요. 나는 그때 연구소를 하자고 했던 것은, 연구소를 해야만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연구 성과도 내고, 그 당시만 해도 (연구소는) 대중을 상대로 했거든요. 또 대중에게 숨겨진 역사 잘못된 역사 이러한 것을 우리가 좀더 연구해서 바른 자료로 객관적인 분석을 해서 대중화를 시키자하는 것이었거든요. 또 강연회도 하고 말입니다. 초창기에는 강연회를 많이 했습니다. 대학가에서요. 또 그 당시에는 그러한 연구소가 없다 보니까, 많은 학생들이 참여를 많이 하고, 많은 관심 있는 분야 사람들이 참여를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역사문제연구소가) 비밀단체인지 알고 안기부에서 와서 사물을 뒤지고, 사람을 종로 경찰서로 끌고 가고 치안본부에서 와서 뒤지고 했어요. 그때는 이 연구소가 과연 제대로 될 건가 안될 건가, 그리고 연구소를 하는 것이 이렇게 남들한테 욕먹을 짓인지 아닌지 뭐 그런 생각까지 들었어요. 


 

1986년 창립된 역사문제연구소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대학을 벗어나서 현대사를 다룬다는 것은 약간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은 언제고 어디고 있게 마련이다. 스님은 『전집』 출간에 관한 이야기를 박원순 변호사와 역사문제연구소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만큼 박변호사와 역사문제연구소는 원경 스님에게는 인연이 깊은 사람이고, 단체였다. 역사문제연구소의 간략한 연혁은 연구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
http://www.kistory.or.kr)


 

퍼슨웹> 연구소 출범에는 박원순 변호사의 역할이 컸군요.


원경> 박변호사는 검사 생활을 하면서, 많은 자료를 모아뒀어요. 예를 들면 좌익문서 같은 거요.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하는 여러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모아두셨어요. 완벽하진 않았지만, 보통 학자들 못지 않게 많은 자료들을 갖고 계셨어요. 우리가 (해방) 3年史를 다뤘던 것도 박변호사가 많은 자료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스갯소립니다만, 나중에 우리가 그 자료를 좀 내놓라고 하니까 “마누라를 내 놓으면 놓았지, 책은 내놓을 수 없다”고 할 정도였어요. 그래도 박변호사가 끝내는 책을 모두 연구소에 희사하셨어요. 몇 천 권 정도 되는 걸로 알아요. 주시는 조건은 관리를 잘하고, 여러 사람이 골고루 필요한 사람이 언제든 볼 수 있게끔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대단한 양반이에요. 지금 현재 역사문제연구소의 많은 책들이 그분한테서 온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들이 바탕이 되어서 시작했던 것이 (해방) 3년사 였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당시 『신동아』에 계시던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현대사 전공) 선생님 같은 분도 참여를 하시게 됐습니다. 근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문제가 생기거든요? 그래서 이러다가는 안되겠다. 서로가 큰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 사회만 해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휩쓸릴 가능성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정식으로 세상에 내놓자, 개소식을 하자해서 개소식을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개소식을 1986년 2월 달에 하게 되는 거지요.

 

원경 스님은 역사학자는 아니었지만 역사자료에 관한 나름의 觀이 뚜렷했다. 역사자료 특히 현대사 관련 자료는 누구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원순 변호사 역시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료란 비밀스럽고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유통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국정원 관리들말고도 그런 사람들이 꽤 있을 터이다. 그들은 자료가 보물이나 천하의 名藥 정도 되는 줄 아나보다. 하긴, 그걸 다려먹으면 섬유질은 넉넉히 보충될지도 모르지. . .
박원순 변호사와 서중석 교수는 인권변호사이자 진보적 역사학자로서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이외 원경스님에게 의미있는 사람이 또 한 분 초기 역사문제연구소에 결합하게 된다. 스님에게는 좀 껄끄러운 질문이었지만, 이후 인터뷰의 핵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약간의 ‘복선’이 필요했다.

 

퍼슨웹> 남로당 연구에 관한 권위자이신 김남식 선생도 이때 참가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 .


원경> 네, 그렇습니다. 초창기 김남식 선생의 자문을 받았지요. . .저는 별로 시각적으로 탐탁하게 생각허들 않았습니다.

 

퍼슨웹> 세미나에 오셔서 연구자들과 같이 세미나도 하고 그러셨다고 하더군요?
원경> 네. 그랬습니다. 초창기 3년사 할 때였지요. 그 분이 당시 현장에 있던 분이니까 많은 자문을 구했지요. 전혀 시각이 달랐죠. 자료 해석도 다르고.

 

퍼슨웹> 김남식 선생은 어떻게 이 모임과 결합이 되셨나요?
원경> 김남식 선생을 아는 분들이 있었지요. 김남식 선생의 시각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디다. 정확하게 어느 분하고 연락이 되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 . 제 생각으로는 아마 서중석 선생님하고 연락이 되지 않았을까 하네요. 또 임헌영 선생이 김남식 선생하고 인연이 좀 있는 것 같더라구요. 김남식 선생뿐 아니라 당시 송남헌(김규식의 비서) 선생도 초청해서 말씀을 듣고 했습니다.

 

퍼슨웹> 김남식 선생이나 송남헌 선생 같은 분들은 모두 그때 첨 뵌 겁니까?
원경> 그렇죠. 처음 봤죠.

 

퍼슨웹> 그때 특별히 선친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던가요?
원경> 그런 건 안 했고요. 근데 이제 선친에 대해서는 차츰 차츰 뭐 사람들한테서 한다리 건너서 알게 되고. 또 어떤 때는 슬쩍 나한테 “그렇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냐?”라고 묻기도 했는데. 난 뭐 “전혀 모르겠다”고 웃으면서 그랬죠. 확실한 대답을 안 했었지요.

 

스님을 처음 대하게 되는, 스님의 내력에 대해 처음 들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는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진짜냐 가짜냐! 우리는 이 실체의 과거나 미래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눈앞의 존재가 호기심을 채워주길 바랄 뿐이다. 이야기는 다시 역사문제연구소 출범으로 돌아간다.

 

원경> (사람들이) 연구소 개소식 날짜를 잡으라고 그래요. 사람들이 내가 스님이고 하니까 날짜도 잘 보고 그런 줄 아나봐요.(웃음) 근데 난 그런 건 못해요. 그렇지만 신채호 선생이 옥사한 날을 잡아야겠다 해서 그분이 옥사한 날을 잡았어요. 그러고 정창렬(한양대 사학과 교수) 선생님이던가. . . 아마 맞을 겁니다. 그 분을 소장으로 모실려고 했는데 이 분이 고사하셨어요. 그래서 이제는 돌아가신 이수인(전 국회의원, 이수성 전 국무총리의 동생, 2000년 6월 10일 작고) 선생께서 다시 정석종(영남대 사학과 교수) 선생님을 추천했습니다. 정석종 선생님은 그 당시 미국으로 일년 동안 교환교수로 떠날 땐데, “내 이름 정도는 언제든 줄 수 있으니까, 뭉쳐서 한번 공부 해보라”고 쾌히 승낙을 하셨어요. “공부성과를 세상에 내놓으면 얼마나 좋으냐”해서 정석종 선생께서 이름을 주셔서 했습니다. 근데 한가지 . . . . 임헌영(문학평론가) 선생님한테는 지금도 참 죄송한 게 있어요. 뭔고 하니, 처음에 정창렬 선생님이 고사하시니까 이 분(임헌영)을 소장으로 (역문연 내에서) 서로 내정을 했던 거예요. 그러고는 얼마 뒤에 박원순 변호사, 천희상 씨, 이호웅 씨, 임헌영 선생 등등이 제가 있던 안성 청룡사로 오셨어요. 임헌영 선생은 조금 늦게 왔는데 . . . 그런데 저는 그 모임(임헌영 선생을 소장으로 내정한 모임)에 저는 참석하지 못했었어요. 그래서 그날 내려오셔서 임헌영 선생을 소장으로 모시자고 하셨어요. 근데 제가 반대했습니다. 

 

초대소장 선임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스님은 무척 죄송스럽다는 표현을 여러 번 사용했고 또 자주 말을 끊었다. 마치 앞에 임헌영씨가 있는 것처럼.

 

원경> 왜 반대를 했냐면 . . . 첫째는 이 분은 문학평론가지 . . . 물론 문학하던 사람이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역사학자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이 분은, 독서량도 상당히 많으시고 또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이지만. . . . 이 분은 지난날 ‘남민전사건’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사람이고. . . . 그래서 서로가 피했으면 좋겠다고 그랬습니다. 전화를 해 보니까 정석종 교수가 승낙을 했다고 하고. 그래서 “그러면 정석종 교수를 소장으로 모시고 이 분을 부소장으로 모시자. 단 연구소 운영체제는 부소장 체제로 하자. 그까짓 감투가 대단한 거냐?”고 그랬었어요. 근데 이제 임헌영 선생이 (청룡사에) 늦게 도착해서 보니까, 서울에서는 당신이 소장을 맡기로 하고 내려갔는데 소장이 바뀌었거든요? 기분이 좋으실 리가 없지요. “이유가 뭐냐?”고 이러는데, 아무도 이유를 대답 않는 거예요. 한 2년 후엔가 제가 얘기를 했어요. 사실은 이러이러했는데 죄송하다고. 자기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스님이 솔직하게 얘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했는데. . . . 사실 임헌영 선생이 하셔도 별 문제가 없는데. . . . 어쨌든 당시에는 . . . . 지금도 당신께 참 미안해요. 나하고 나이도 같고 그런데.

 

퍼슨웹> 말씀하시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중간중간 사진촬영을 좀 하겠습니다.
원경> 내가 옷을 이상하게 입고 와 가지고. 허허. 아무 때나 찍으세요. 허허.

 

원경> 아무튼 그렇게 연구소가 탄생되었습니다. 그때도 저는 항상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였고 하니, 좋은 자료가 나오면 그 자료를 모아야겠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런 세월을 몇 년을 보냈어요. 그렇게 세월을 보냈는데 . . . 쉽지가 않았어요, 자료를 모으는 것이요. 자료란 건 얻지 못하겠습디다. 그러던 중에 제가 1991년도일꺼예요, 기억이 왔다 갔다 하는데. . . 모스크바를 갔다온 적이 있어요. 모스크바를 갔다오면서부터 자료를 (모으기)시작해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다시 느끼게 됐어요. 모스크바에 가 보니까 박길룡 선생이니 강상호 선생이니 레베데프니, 이노겐치 김이니 이런 사람을 만나보니까 이야기가 참 엄청나요. 그래서, ‘아 이래선 안되겠다’ 해서 그때부터 정식으로 자료를 모으자는 생각을 했지요. 자료를 모으려면 경비도 마련해야 되고 . . . 아무튼 그때부터 구체적인 생각을 가지다가 1992년부터 지금 윤해동 선생하고 연구소의 몇 분하고 해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모스크바 유학 가 있는 사람들에게 실비를 주고 자료를 구해달라는 목적으로 첫째는 그냥 실비를 주고 어떤 자료가 나왔을 때는 그 자료를 갖다가 여기서 사는 방법으로 하고. . . . 글을 썼을 때는 그분의 위치에 따라서 원고를 지불하는 방법으로. 실비를 줘 가면서 그런 식으로 해 오다가 . . . 그렇게 해도 뭐가 잘 안되요. 

 

10년에 걸친 작업이었으니, 그 과정에 발생했던 우여곡절이 적지 않을 것이란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움이 많았음을 짐작케 하는 스님의 표정이 잠깐 스쳐지나간다.

 

원경> 아무튼 처음 시작한 후 작업이 잘 안되다가, 다시 1993년부터 몇 사람이 책임을 지고 누가 자료를 가져오면 이걸 번역하고, 또 컴퓨터에 넣고 이런 과정을 진행했어요. 그러다가 『역사비평』 장두환 사장이 “자료를 해서 주면 우리들이 다 정리를 하고, 나중에 『전집』이 나왔을 때 200질이나 300질을 사시오. 그렇게 하면 다 하겠습니다”고 합디다.
뭐 그렇게 하자고 했지요. 그건 어려운 게 아니니까. 그런데 그것도 하다보니 원고료도 나가고 하니까, 그 분들이 계산해 보니까 계산이 안 맞았던 것 같아요. 또 자료가 그냥 한꺼번에 다 왔다면 아마 출판사에서도 했을 거예요. 근데 이게 끝이 없어.(웃음) 언제 끝날지도 모르겠는거야. 근데 무슨 일이든지 서로가 아는 사람일수록 내 욕심 취하지 않고 상대 입장을 취해줘야지. 그 분은 사업하는 사람이고 거기다가 계속 투자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컴퓨터에 넣어두고 그러다 나중에 자료가 어느 정도 모아지면은 다시 (전집을) 해보자 그렇게 할려고 했었죠. 그러다가 지금까지 오게됐는데. . . . .
작년에 선친이 탄신 100주년이었거든요. 그래서 100주년에는 그냥 어느 정도는 묶어야 되겠다 그래서, 작년 1월, 2000년 1월경에 편집하는 분한테 맡겼어요. 맡겨 가지고 4월 경쯤이면 (편집을) 마치고, 5월쯤 출간하자 이렇게 생각했어요. 왜냐면 5월 1일이 박선생의 탄신일이예요. 음력으로요. 양력으로는 5월 28일이 됩니다. 그래서 나는 5월 달에는 그렇게 맞추려다가 . . . 어떤 사정 때문에 이루지 못했어요. 또 12월에 가서 마쳐야되겠구나 했는데 12월에도 이게 또 안됐어요. 그래서 현재까지도 사정으로 인해서 이렇게 오게된 겁니다. (웃음)

 

퍼슨웹> 작업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쉬운 점은 없으셨나요?
원경> 뭐, 근데 제가 생각이 좀 엉뚱해요. 엉뚱하다는 것은 뭐냐면 . . . 쉽게 양보하구요. 본래부터 그 욕심을 져버리는 경향이 좀 많고. 누가 상처를 줬어도 금방 잊어버리는 . . . 불교식으로 말하면 생각을 놔버리는 거지요 . . . 빨리 과거를 잊어버리는 아둔한 것이 좀 있어요. 허허.

 

퍼슨웹> 관련 연구자들도 잘 알지 못하는 비화를 말씀해 주셨네요.
원경> 이 이야기는 (역사문제연구소) 10주년인가 그 뭐 회고집에 잠깐 이야기했지.

 

 

3. 사람들과의 인연

그런 말이 있다. 사람이 없어도 두렵고, 사람이 있어도 두렵긴 마찬가지라고. 첫 인터뷰 이후 두 번 스님이 주지로 있는 만기사를 찾았을 때, 스님을 항상 따라 다니는 개가 세 마리 있었다. 스님 말로는 그 세 마리 모두가 사람으로 치자면 백살을 훨씬 넘었다고 한다. 그중 덩치가 작은 놈은 스님이 기거하던 방안까지 따라와 보충 인터뷰를 하는 내내 쌕쌕거리며 스님의 무릎 위를 차지했다. 짧지만 스님이 보여준 가장 한가로운 그리고 평온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사람들과 속인들과의 거리가 ‘여전히’ 가까울 수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스님은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가지게 된다. 역사문제연구소 창립과 전집출간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스님은 고마운 분들 그리고 미안한 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퍼슨웹> 박원순 변호사하고는 일찍 알게 되셨네요?
원경> 그러니까 이호웅 의원으로부터 통해서 내가 알게됐습니다. 아마 처음에 이호웅씨가 소개를 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박원순) 부부를.

 

퍼슨웹> 이호웅 의원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으셨습니까?
원경> 이호웅 의원은 . . . 1981년돈가? 그 분한테도 죄송한 생각을 했는데.  81년도에 (이호응 의원이) 어디서 저의 얘기를 듣고 찾아온 적이 있어요. 찾아왔는데 . . . 그때 이의원을 경계한 것이 아니라 당시 따라온 기자가 있었습니다. 동아일보 기자였는데. 그 기자한테도 사실은 내가 그 당시 생각을 잘못 했지만은 . . . 얘기가 좀 이상하게 돌아가네. 허허. 


 

기자를 경계한다는 스님의 말에 인터뷰어, 귀가 번쩍(!) 트인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공감대가 이렇게 초반부터 형성되는 것이 ‘냉정한’ 인터뷰를 위해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닌데도 반기는 표정을 피할 수 없다.


 

원경> 아무튼 그 이야기를 하려면 더 옛날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제가 옛날에 1960년대 중반 쯤에 알았던 시인이 하나 있어요. 승려 시인이. 이분이 세상에 나와서 결혼해서 살아요. 잘 살고 있는데. . . 그 집안에 문제가 좀 생겼어요. 집안싸움이 폭력으로 번지고 해서 결국 그 시인이 입원을 하게 됐어요. 병상에 누워서 나더러 ‘억울한 나를 좀 도와달라’고 합디다. 근데 경찰은 이 폭행한 사람을 잡아가지도 않아요. 형이 검사랍디다. 그래서 당시 제가 알던 사람 중에 청와대에 있던 분이 있었는데, 그 양반한테 이야길 했더니 바로 잡아갑디다. 근데 법조계에 있으면 머리가 좋지 않습니까? 합의를 해라고 그래서 본인이 합의서를 써 줬어요. 그러던 사건의 와중에서 . . . 그 부인되는 사람이 동아일보 기자를 데리고 나한테 온 겁니다. 나한테 무언의 협박을 한 거지요. 나의 신상을 가지고 말입니다. 근데 이 사건은 벌써 1970년대 사건이거든요. 사고를 당했던게. 근데 당시 기자하고 왔는데, 이 부인은 내가 아무개 아들이란 걸 알고 있었어요 . . . . 이걸 가지고 자기 부부간을 원상태로 해달라고. . . . 그래도 난 모른다고 했지만. 근데 나는 지금도 여자를 무서워 해요. 괜히 눈길 한번 잘못 줬다가 평생 살자고 하면 어떻해요? 허허.
아무튼 그랬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때 그 기자한테는 좋은 절이 있다고 해서 그냥 따라온 거더라구요. 근데 본디 나는 죄인이다보니까 그렇게 거꾸로 생각한거예요. 근데 그 오해가 풀리지도 않고 2년인가. . . . 3년인가 돼서 바로 그 기자하고 이호웅 의원이 온겁니다. 우연히 왔다가 찾아온 거지요.

 

스님이 사람을 피했던 것은 본능이었다. 어릴 때부터 俗人을 멀리하라는 ‘누군가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어찌보면 이는 박헌영의 모습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해방 직후 남북한에서 활동한 소위 ‘유명인사’ 가운데 박헌영만큼 공개적인 자리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인물도 없다. 그에 대한 인상을 알려주는 증언에서도 그는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고 한다.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지만 스님 역시 쉽게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원경> 그런데 내가 아주 냉정하게 경계를 했죠. 옛날 같으면 밥도 차려 드리고 차나 드리고 했는데. . . . . 이호웅이는 투사기질이 있으면서도 어떻게 보믄 형사랄까 안기부 요원이랄까 그런 인상이 좀 있어요. 그래서 내가 경계를 했지요. 근데 나중에 지나면서 가니까 ‘정말로 스님 무안할 정도로 절 경계할 때, 아, 저게 어린 시절부터 자기 속에 내면에서부터 외부사람을 거부하다 보니까 저렇게 나오는구나’ 하고 자기는 이해를 했다고 하더라구요. 다음에 곡차 한 잔 하면서 얘기를 할 때 그 기자에 대해서 얘기를 했죠. 그래서 아이구 그러냐고. 기자를 불러서 얘기를 했더니, 자기는 그저 정말 농사지으면서 소도 키우면서 마을에 가서 품앗이도 하면서 살던 친군데. 어쨌든 오해가 풀려서 내가 “아이구, 죄송하다”고 말이지. 내가 그때 그 사건 때문에 그랬다고.(당신을 그렇게 냉대했다) 그 사람은 자기는 그 전엔 (내 신원에 대해)전혀 몰랐다고, 그 사건 때문에 기자를 데려와서 나를 갖다가 노출시키려 하는 구나 해서 내가 경계를 했다고 그랬었어요.

정보의 權力化란 이런게 아니겠는가? 진정한 펜파워(pen power)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모두 공개(혹은 보도)하지 않을 때에만 작동한다. 공개(보도)한 정보와 수첩 안에 감추고 있는 정보 사이의 비율에 따라 권력의 강도가 결정된다. 비례관계가 어떻게 되냐고? 상식이다. 안기부를 보라. 감추고 있는 정보(혹은 첩보)가 많을 수록 배기량은 올라간다.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100% 감추고만 있으면? 글쎄, 뭐 바보하고 구분되지 않아서 뭐라 말하기가 그렇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정보를 권력화 하고자 한다면 정보를 항상 ‘어느 정도’ 공개하는 행위(가판 혹은 배달)를 유지해야만 한다. 마이크 혹은 수첩에 적어간 모든 사실이 그대로 보도된다면 그게 무슨 기자고 언론권력이겠는가? 누구 말마따나 나팔수지 나팔수! 이 ‘공개’, ‘비공개’의 관계를 가장 잘 활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하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하나님이다. 어쩌다 한번씩 백년에 한번, 천년에 한번 자신이 가진 정보(전문가들은 이를 ‘의지’ 혹은 ‘뜻’으로 칭한다)를 알릴 뿐이니까. 그것도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선지자나 뭐 예언자 같은 분들을 활용하여 아주 ‘은유적’으로  자신만의 정보를 공개하시니 이 얼마나 기막힌 전략인가! 아무튼 하나님의 이 전략을 어설프게 활용하는 집단에 대해서 스님은 본능적인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이야기는 다시 스님의 과거로 돌아간다.

 

퍼슨웹> 그 당시는 선친에 대해서 잘 모르실 때였습니까?
원경> 아니지. 그건 어려서부터 알고 있죠. 단 그 어른이 그리고 관계가 세상에 노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만 알고 있고. 그 분이 어떤 분이고 정확히 안 것은 23세부터 정확하게 알았을 거예요. 제 머릿속에 있는 그 분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도 그 당시에 알았던 지식이고. 그래서 요즘 와서 간혹 혼란이 오는 것은 학자들이 어떤 방향에서 글을 쓰면은 일단 자료는 못보고, 나는 이러이러한 얘기를 들었는데 얘기가 이러하구나. . . . 참 이야기가 조금 그거 하구나 그러는 거죠.

 

퍼슨웹> 그러면 스님과 선친과의 관계가 공개적으로 알려진 것은 언제쯤인가요?
원경> 그것은 잘은 모르겠어요. 잘은 모르겠는데 일반적으로라면 . . . 그 이야기는 창피한 얘긴데 그건 하지 말지. 허허 . .

 

첫 인터뷰 때는 그냥 넘어갔지만, 세 번째 만났을 때는 이야기 해 주셨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스님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누구’가 과연 누구인지 우리 중생들은 알 길이 없다. 스님의 ‘실존’이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되돌아온 최초의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조금은 어렵게 들리는 한국의 조계종 법맥과 禪師들의 이름이 열거되었다. 원경 스님이 말씀하시는 임제법맥과 교구 등에 관한 이야기는 대한불교조계종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
http://www.buddhism.or.kr)

 

원경> 제가 여주 흥왕사에 있을 때였습니다. 흥왕사 있을 때. . .그 때가 1977년인가 그랬는데. 제가 참 놀랬어요. 당시 어떤 일이 좀 있었는데 그 뒤로 . . .뭐랄까 . . .저에 대해서 자꾸 캐는. . . 정보기관을 통해서 . . . 뭐 이 분은 지금도 대한불교 조계종 최고의 자리에 있는 분인데. 하여튼 나에 대해서는 모든 걸 오랜 동안 알아보고 했어요. 아마 세상에 알려진 것도 그분들을 통해서일 거예요. 세상에 정식으로 알려진 것은 정확하게는 . . . 1982년도쯤. . . 이 문제는 사실 감투하고 관련되어 있습니다. . . (조계종) 제2교구 주지문제죠. 한국에 25개 교구1)가 있는데, 2교구가 경기도 한수 이남을 관리하는 겁니다. 그걸 우리 門中에서 관리하고 있어요.

 

퍼슨웹> 門中이라고 하시면. . .?
원경> 그러니까. . . 부처님에서부터 이어지는 臨濟脈이 고려말에 태고 보우로 해서 한반도로 넘어오게 됩니다. 이 法脈이, 임제법맥이 아직 살아있는데 전강 큰스님이 77대입니다. 만공스님이 76대고, 쓰러져 가는 우리 禪佛敎 중흥을 하신 경허스님이 75대고. 제 스승이신 인천에 계신 松潭 스님이 78대입니다. 그 문중이 인천 용화사를 거점으로 했는데 이것이 바로 전강스님 문중입니다. 송담스님이 전강스님의 법통을 이으신거지요. 그 다음은 아직 법통을 이어간 사람이 없습니다. 법통을 잇는다는 건 불교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저런 (벽에 걸린 송담스님 사진을 가리키면서) 어른들은 수만 수천 제자들 중에 단 한 명 부처님 법통을 이어갈 제자를 찾아 당신 법통을 이어줘야 한시름을 놓는 거지요.
아무튼 그런데, 송담 큰스님께서 (저한테) 2교구를 맡으라고 하셨어요. 근데, 저는 항상 남들이 선망하는 것은 싫어하는 마음이 있어요. 경계를 하는 거지요. (왜냐하면) 항상 나를 음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분명히 내 사생활을 가지고 세상을 시끄럽게 할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아닌게 아니라 어른 (송담스님)의 말씀이라면 불 속에 뛰어들라면 뛰어들 각오도 있지만, 그것만은 못한다고 그랬어요. 그 말씀만은 승낙을 못한다고. 그랬더니 큰스님이 왜 못하냐고 그러시면서 그럼 좀 두고보자고 있었어요. 그러고 있는데, 서울 돌산장 여관이라는 곳에서 정유스님, 도명스님 등 몇몇 스님이 모였는데. 도명스님은 제 친구였어요. 지금은 열반하셨지만. 근데 그 스님이 저한테 대놓고 욕을 하시는 거예요. “이 나쁜 놈아. 몇 십 년을 같이 지내왔는데, 이 놈이 알고 봤더니 근본적으로 빨갱이야. 너 이 녀석아 왜 나를 속였냐”고 하는거야. 내가 아무개 아들이라면서 말이예요. 몇 십 년을 사귀어 왔지만 나에 대해서 아는 게 없거든요? 말을 전혀 안하니까. “이 새끼가 근본적으로 빨갱이 기질을 갖고 있는 놈”이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너 그 소리 어디서 들었냐?”고. 그랬더니 자기도 말 못 하겠대요. 대신에 “문제가 뭐냐면 핵심으로 들어가자. 너 이 상황에서는 (제2교구)본사주지 못한다. 엄청난 음해세력이 있으니까 포기해라”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나는 본사주지 한다고 했던 적도 없고, 큰스님이 명령을 해도 받아들인 적이 없다. 그러니, 너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본사주지를 원하고 있을 거다. 근데 그 사람이 아마 원하는 건 추천서일거다. 그러니 내일 오라고 해라”
이 이야기만 해도 소설 한 권이 넘어요. 허허. 다들 놀래지요. 놀래는 것이. . . 너 자식 아무개 아들이라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와요.

 

 

퍼슨웹>그게 흥왕사에 계시던 1977년도고 그 다음에 인천 용화사로 가신 겁니까?
원경> 네. 아무튼 1977년에 그런 안 좋은 일이 있었지만, 그때 지혜롭게 잘 대처를 했죠. 용화사는 사찰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하는데 아무도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한 5년 동안 지금 있는 용화선원을 짓는 일을 했지요. 5년 정도 일하다가 그때 또 교통사고가 나서 갈비뼈가 아홉 대나 부러진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치료차 거기를 나왔는데, 흥왕사로 안가고 안성에 있는 청룡사로 간겁니다. 흥왕사로 다시 돌아가지 않은 것은, 벌써 여주바닥은 나한테 대해서 알만한 것은 다 알게 되었거든요. 참 희한한 것이, 거기 있는 할머니들이 가끔 와서 나한테 그래요. 어디서 소식 듣고 왔는지 자기 남편생각, 자기 자식생각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가족 중에) 산에서 쓰러져간 사람들(=빨치산)이 많거든요. 내게 와서는 스님이 그런 사람인줄 전혀 몰랐다면서 울고 하는걸 보니까. . .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너무 한 곳에 오래 있었구나’ 그래서 자리를 바꾼거죠.

 

 

퍼슨웹> 그때가 1983년입니까?
원경>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이란 것이 그렇게 빠릅디다. 세상 사람들이 자꾸 알게 되요. 그러니까 월간지 기자들이 자꾸 접근해오고, 아는 사람 통해서 만나자고 하고 . . . 월간지 같은 데는 뭐 여성지 겠지요, 여러 번 (내 이야기가) 나왔다고 하는데, 난 만난 적이 없어요. 멀리서 자기들이 사진 찍고 마음대로 썼겠지요.

 

스님의 신상(박헌영의 아들이라는 점)이 일반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어떤 사건과 시점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 스님의 이야기를 토대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스님의 이야기는 시간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선 가장 먼저 있었던 사건은 1977년경 흥왕사에서 동료 스님이 2교구 주지임명 문제로 스님을 ‘협박’한 사건이다. 이때가 스님이 당시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신상을 동료 스님이 되묻고 또 ‘협박’한 시점이다. 이때 스님은 자신의 신원이 어딘가에서부터 새나갔다고 생각했겠지만, 자신은 아니므로 정보부 쪽으로 추측한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이 폭행사건(1970년대 후반경)이고 그 다음이 이호웅 의원과 기자의 방문(1982년)이다. 따라서 1977년경 동료스님 사이에서부터 알려진 스님의 신상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폭행사건이 있을 무렵에는 스님의 신상을 지상에 공개하겠다고 협박한 한 부인에게 이용되기까지 한다. 이후 흥왕사 주변(여주) 일대에서 스님의 이야기가 알려져 신도들이 그 때문에 찾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퍼슨웹> 그럼 스님께서 공개적으로 언론과 인터뷰를 최초로 하신 것은 1990년대 이후인가요?
원경> 가만있자. . . 인터뷰 한 것은 잘 모르겠네. . . . .

 

 

류준범> 『사회평론』 인터뷰2)가 처음 아닙니까?
원경> 『시사저널』 창간호(1989.10)가 처음일겁니다. 왜 인터뷰를 했냐면 . . . 그 최원영 씬가요? 시사저널 만든 사람이? 아마 최원석 씨 동생일 겁니다. 그 당시에 박권상 씨가 주간인가 대표인가 하셨을 거고. 그렇지만 그때도 제가 『시사저널』하고 인터뷰할 생각은 없었어요. 돌아가신 김기팔(방송작가. MBC 드라마 “제1공화국”, “땅” 집필)씨가 몇 번 왔습니다. 와서 뭐라고 하냐하면은 . . . 이건 공개적으로 얘기하기는 뭐하지만. 『시사저널』 사장이 서울텔레콤을 만들었는데. . . 당시는 잡지 이름도 아직 안정해졌을 때입니다. 아무튼 주간지와 영화사를 하나 만드는데, 영화사 이름은 서울텔레콤이라고 하는데, 영화를 만들어서 방송국에 파는 것이다 그래요. 그런데 여기 첫 작품으로 박헌영 선생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지금 구상하고 있다고 해요. 5부작으로 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그랬어요. 첫째 안은 90년댄가 80년대 말인가. . . 정확하지는 않은데. 내가 박 선생 발자취를 찾아다니면서 자료도 보고 현장도 가고 그렇게 하면서, 그걸 인제 역사를 밑바닥에 깔면서 말이죠. 모스크바까지 갔다올 계획도 세우고 있었으니까. 그걸 하시겠냐고 첫째는 왔던거죠. 그때 그것은 못하겠다고 했어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한평생 공개적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어렵지 않겠냐”고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그렇다면 다큐멘터리를 하는 과정에서 스님이 알고 있는 이야기, 스님이 갖고 있는 사진, 스님의 친척 이러한 관계를 증언해 달라고 해서 같이 다닌 적이 있어요. 그 때 그. . . 아이구 그 분 성함이 뭐더라? 아무튼 기자가 같이 다녔습니다. 『시사저널』 창간호 하는 이분이 같이 다니면서 대강 뭐 했는데. 특집으로 만들었다가 내용이 너무 많아서 나중에 뭐 두서너 장 정도로 줄인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인터뷰를 하고 사진도 찍자고 해서 머 했는데. 잡지도 나온다고. 그래서 인터뷰한 내용을 한 번 보시고 그냥 내면 좋지 않겠냐고 해서 . . . 그 뭐 거절할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 그리고는 또 거기에 관한 글을 박호성 교수가 하나 쓴 걸로 알고 있어요.

 

 

퍼슨웹> 스님이 직접 인터뷰에 응하신 것은 세 번 정도 되는 거군요.
원경> 인터뷰한 것은 아까 말한 이미숙 씨하고 한 거. 월간지 주간지는 사실은 안 했어요. 자기들이 멀리서 사진 찍어서 자신들이 만든 얘기지 제가 하기는 월간지에 나온 것은 인터뷰한 것은 한 번도 없습니다.

 

 

퍼슨웹> 가장 자세한 것은 『역사비평』과의 인터뷰였지요?
원경> 『역사비평』은 우리 윤해동 선생이, 『역사비평』에 싣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고 전집이 마무리 되가고 있으니까, 스님얘기도 참고를 좀 해야 한다고. 그래서 그거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그래서 했는데. 『역사비평』에서 한번 써먹자고 하니 아는 사람인데 않된다고 할 수도 없고. 하하하

 

 

4. 스님이 아니면 아무도 하지 않을 일

이 때 윤해동 선생님께서 오셨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도 오래 활동하셨고 무엇보다 『박헌영 전집』 출간을 위해 스님을 제외하고는 가장 애를 많이 쓰신 분이기 때문에 이제 본격적으로 전집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퍼슨웹> 『전집』에 관해서 몇 가지 더 여쭤보겠습니다. 전집에 포함된 자료들이 많이 있을 텐데요, 기존에 발굴되지 않았다든가 아니면 새로운 자료라고 할만한 것이 있습니까?
원경> 글쎄요 . . .  그런 건 전 잘 몰라요. 그건 또 우리 예를 들어서 윤해동 선생이나 류준범 선생 이러한 분들이 했는데. 어떤 것이 새로운 것이고 . . . 저는 다 새롭죠. 못 본거니까요. 누가 쓴 논문도 나는 안보니까. (전부) 새롭지만 저는 그렇게 얘기해요. 새롭다는 기준은 어디다 둘 것인지. 또 예를 들어서 여기에 내가 찾아내지 못한 것이 어떤 학자들이 이미 봐버렸으면 그건 또 새로운 거 아니고.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이 『전집』 안에 새로운 것이 어떠한 것이 있다고는 말씀드리기가 어렵고요. 그렇지만 그래도 새로운 것이 몇몇 가지는 있지 않겠습니까?(웃음)

 

퍼슨웹> 준비하시면서 어려웠던 점도 많으셨죠?
원경> 어려운 건 뭐. . . . 그건 그냥 한 평생 할 작업으로 생각했는데. . . 작년에 욕심을 냈던 것은 (탄신) 100주년에 맞춰서 여기서 일부 마무리하고 나머지는. . . 또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나머지 새로 발굴하면 증보판으로 묶어야 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도 스님이기 이전에 . . . (아들로서) 아버지라는 분이 세상에 와서 남쪽에서도 버림을 받았고, 북쪽에서도 버림을 받았고. . . . 물론 당신이 . . . 당신의 투쟁방법이 잘못됐을지는 모르겠지만. . . 그 깊이는 내가 말못하지만. . . . 그래도 모든 사람들이 환갑도 하고 뭣도 하고 한다는 데, 그래도 세상에 왔다 가신 지가 100년이 되는데. 이런 분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것을 알리고 싶고. . . 누가 욕을 하던 간에 말이에요 . . . 이 나라를 망쳤다는 사람이라고 비판을 하던 간에. 또 북쪽에서 말하는 미제의 스파이라고 하던 간에. 나는 자식된 도리로써 내가 자료를 모아서 훗날에 학자들이 이 분야에 공부할 수 있는 분들이, 좀 쉽게 할 수 있으면 좋은 것이지 . . . 여기서 무슨 평가를 바라고 한 것은 없어요. 단, 내 평생에 찾아야 할 것은 아까 말씀드린 「정책입안보고서」, 이거예요. 이것이 박헌영 선생이 해방정국에서 이상적인 자기 조국에 대한 미래를 설계해 놓은 거예요. 농민문제는 어떻게 할 것이며, 근로자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이며, 또한 이 조국 남북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하는 . . .

 

이 부분에서 스님은 마치 한 명의 선동가와 같았다. 선전선동의 기본원칙인 운율과 고저장단을 맞춰가며 눈앞에 ‘정책입안보고서’를 보고 읽는 듯 했다.

 

원경> 물론 (박 선생은) 통일문제에 관해서도 남과 북을 가르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은 분명한 것이고. 하여튼 (「정책입안보고서」에 담겨 있는 내용은) 정치고 뭐이고 이러한 등등이 당신의 이상이라고 해야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이것(「정책입안보고서」)은 일생에 찾아내야 한다고, 그런 인연이 오면은 찾으라고 교육을 시켰던 어른들이 옛날에 계셨어요. 거기서 더 욕심 낸다면 박헌영 선생의 파일입니다. 이거 가지고 모든 것을. . . 문책(문서, 서책)을 보더라도 계기(근거)가 있어야 찾아보지 않겠습니까? 어떤 분야를 어떻게 찾아봐야겠다고 참고할 수 있는 . . . 이런 사람의 투쟁방법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는지 이러한 등등이죠.

 

퍼슨웹> 전집 나오는 것만으로는 작업이 다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원경> 그렇습니다. 죽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해야죠. 그렇다고 이걸 내가 어떤 명예로 삼는다든가 어떠한 보람으로 삼는다든가 그런 건 없어요. 이거 제가 아니면 누가 할 사람이 없어요. 내가 죽기 전에 나만이라도 해 놔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거 사장되고 말아.

 

이 말을 하면서도 스님은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인터뷰어에게는 환청이 들렸다. 긴 한숨소리인 듯 했다. . . . .

 

퍼슨웹> 비극적이라면 비극적인 상황이네요. 김남식 선생 같은 분이 이전에 조금 하긴 했지만, 어쨌건 연구자들이 해야 될 일인데 말입니다.
원경> . . . .글쎄요. . . 그분이 성공한 혁명가였다면 . . . 안 그렇겠죠. 그분이 영광된 어떠한 것을 갖고 계신다면 학자가 아니라 별사람들이 다 덤벼서 소설도 쓰고 다 했겠지. 내가 이것을 특별히 조명하기 위해서 하는 건 아니예요. 단 이제는 더 이상, 더 이상 왜곡되어서는 안되겠다는 겁니다. 일단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뒷모습을 얘기하든 앞모습을 얘기하든. . . . 사람을 얘기할 때도 여러 가지 얘기하거든요. 앞모습 본 사람은 뒷모습 얘기 못합니다. 비판을 해도 거기(자료) 바탕 위에서 하고 새로운 자료에 의해서 바라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닙니다.

 

고생은 함께 해도 영화는 함께 누릴 수 없다던가? 박헌영은 정말 실패한 혁명가인가? 그렇다면 원인은 무엇일까? 섣불리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아마 스님이 ‘아직은’ 말을 아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건 많은 사람들은 낙오한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총총히 사라지거나, 가끔 측은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침을 뱉으면서 그의 나약함을 비웃으며 지나쳐갔다. 이 과정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다 보면 “실패한 자는 문제있는 인간이거나 심지어는 罪人”으로까지 비약하게 된다. 이 과정에는 그렇게 어려운 논법이 필요하지 않다. 어떤 경우 역사의 단죄는 사법적 단죄보다 훨씬 잔인한 결과를 낳기 때문에 우리는 더 자세한 사건 심리와 더 많은 증거 제출이 필요하다. 많은 사실들과 정황들을 꼼꼼히 검토하고 또 되새김질 해보아야 한다. 결론을 내리기 이전에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렇게 내린 결론에 대해서도 또 언제든 뒤집어 질 수 있다는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한 사람의 전문가에 의해서 가능한 것은 물론 아니다. 오랜 시간과 거쳐야 할 많은 작업 공정 그리고 조력이 필요한 수많은 전문가들이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스님 말대로 ‘실패했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 텅빈 자리를 원경 스님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변호사 자격 없이 법정 변론(?)에 나선 아마추어처럼 말이다. 스님 자신은 『전집』 작업이 ‘변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심리를 위한 증거의 확보”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자신은 변호하거나 재조명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 .

 

퍼슨웹> 자료를 모으는 과정은 순탄했습니까?
원경> 자료를 구하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게 있었는데, 입수하지 못한 것이 있어요. 책 두 권이에요. 박선생이 직접 쓴 책입니다. 출판은 1947년도에 됐는데, 남쪽에서 출판을 했는데 북쪽에서는 모두 압류되어 없어졌답니다. 불을 질렀답니다. 이것을 박길룡 씨가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건 중앙일보의 김국후 기자가 . . . . 거 기자라는게 참 대단합디다. 저는 시켜줘도 못할거 같아요. 기자들은 먼저 가면, 서재를 싹 뒤져요. 책을 전부 꺼내요. 그래서 그 책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해 나가요. 그러다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 책을 달라고 해. 안준다고 하면 빌려달라고 또 그래요. 허허. . . 그래서 난 그것이 나한테 올 줄 알았는데. . . 그냥 그 분이 갖고 계세요. 지금도 안 내놔요. 그래서 내가 “그럼 책 제목하고 표지만 복사해 주십시요” 그랬어요. 근데 이 분은 자기도 학위를 받아야겠다 이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책 몇 권 갖고 있는 걸로 학위받는 거 아니다. 책 설명 해서 학위 받는 거 아니다. 그러니까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달라고 했는데. 그래도 안주시더라구요. 언젠가는 준다고 하는데.  그 양반이 돈을 원하는 것도 아닐테고. 그 양반 말로는 일본 사람이 그 책을 보고 아파트 한 채를 사준다고 했는데도 안줬데요. 뭐 나는 아파트 사줄 돈은 없으니까. . . . . 언젠가는 책이 나오겠지요. (박전집) 증보판이 나올때요. . . . 책(전집)을 준비하면서 그런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있는데. . .  지금은 기자를 관두고 국회의장 사무실에서 일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의장 공관이죠? 아마. 몇 번 만났는데도 이 분이 영 책을 내놓을 생각을 않하세요. 한번만 보자고 해서 언뜻 보긴 봤는데. . . 그 양반 했던 것처럼 하고픈 생각이 들기까지 했지만 그럴 수 있나요.(웃음)

 

퍼슨웹> 다른 분들을 통해서 한번 부탁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원경> 전혀 안돼요. 네. 신문사 쪽에서도 안돼요. 그래서 내가 편집위원으로 들어오시고 그걸 사용하자고 했는데도, 못하겠다고 하세요. 세상에 한 권밖에 없는 책인데 . . . 허허. 그래서 어떡합니까? 일부는 누가 인용한 적이 있더라구요. ‘좋은날이여 오라’라고 하는 책은 누가 한번 인용한 적이 있어요.

 

퍼슨웹> 고준석 말입니까?
원경> 네. 그런거 같네요. 그 분이 인용한 걸 본적이 있어요.

 

퍼슨웹> 언젠가는 증보판에 꼭 포함시켜야겠군요. 스님이 처음 모스크바 직접 방문하셨을때 누님도 만나 뵙고 하셨는데, 그때 누구한테 도움을 받으시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원경> 그런 거 없지.

 

퍼슨웹> 전집 출간을 위해 경제적으로 도와주시거나 한 분은 안계신가요?
원경> 글쎄요. 없는 거 같아요. 힘들지요. 한데 누가 도와준다고 해도 제가 거부를 했어요. 어떤 돈인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요. (작년에) 동아일보에 (재정문제로 『전집』 출간이 늦어진다는) 기사가 났을 때 그걸 보고 찾아오신 분이 있어요. 경기高도 작년에 백주년 사업을 했는데, 박선생이 경기 15회거든요? 심훈선생도 15회고, 박열선생도 15회고. 그래서 경기고 출신에 박선생 같은 인물도 있다. 유진오 같은 사람만 인물이 아니다고 해서 그분들이 구상한 것이 있더라구요. 연극이나 뭐 그런 사업들요. 그래서 제가 자료가 좀 있으니까 필요하면 드리겠다고 했더니, 그 쪽에서 그럼 우리가 경제적으로 좀 도와드리겠다고 하십디다. 근데 제가 거절했어요. 그 분들은 자료가 박갑동(전 남로당원이자 「해방일보」 기자)씨가 쓴 책밖에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그건 너무 빈약하니까 제가 자료를 드리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미국 들어가시기 전에, (박선생) 연보를 드렸어요. 연보만으로도 대충의 구상은 할 수 있으니까요. . . 그리고 또 인천에 제 동생뻘 되는 분이 한 분 계시는데, 사업을 하셨어요. 그러다 정신병도 생기고 해서 망했는데. 이 사람은 작은 아버님이 정… 뭔가 하는 분인데, 좌익활동을 하신 분이에요. 그래서 작은 아버님 때문에 자기 아버지가 보도연맹에 편입되어서 6·25 전에 돌아가셨어요. 자기도 겨우 살아 남은건데. 그렇게 세상 살다가 어떻게 사업을 하게 되어서 돈을 크게 벌었는데, 또 정신병도 겪고 어쩌고 해서 아무튼 복잡한 일을 많이 당했어요. 5년만에 정신병원을 나왔어요. 겨우. 인천에서도 제일 큰 서점을 하기도 하고 하여튼 그랬어요. 근데 이 사람이 아파트를 저한테 한채 줬어요. 그래서 제가 난 이런 거 팔 줄도 모른다고 하면서 거절을 했었어요. 그분이 짓던 아파트였죠. 거절했던 이유는 나중에 또 그 사람들이 사회에 활동하는 사람들인데 괜히 누가 될 수 없고. . .

 

아무튼 제 힘으로만 하려고 했어요. 근데 뭐 경제적인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어떻게 지금까지 해 왔는데 아직도 원고가 지연되고 있는 점이 . . . 금년 7월 19일에는 출판을 할려고 했는데, 못할꺼 같아요. 금년부터는 7월 19일부터 제사를 모시려고 하거든요. 그 동안 7월 19일로 바꿀까 하다가, 전집 나온 다음에 바꿔야겠다고 맘먹게 됐어요. 작년 100주년이니까, 여지까지 지내온 거니까 12월 15일로 하고, 금년에는. . . . 근데 7월 19일은 못 맞추겠어요. 허허허. 

 

앞서의 설명대로 7월 19일은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했던 소련파(박길룡, 강상호)들이 증언한 박헌영의 처형날짜이다. 이들과 만나기 전까지 스님은 부친의 사망날짜를 12월 15일(재판이 끝난 날)로 정하고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스님이 기대했던 것처럼 7월 19일까지 『전집』이 출간되기는 힘들어 보이지만, 그래도 10년 가까이 끌어온 작업은 이제 거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 탄생 100주년과 기일에 맞추지는 못했지만 곧 출간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스님은 출간되어 나온 『전집』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퍼슨웹> 힘들게 나오는만큼 의미있는 자료집이 될 거라 믿습니다. 그런데 모스크바에 누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그 전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원경> 누님인지 형님인지 누군가는 있다고 나는 믿어왔어요. 그것이 그러니까. . . . 아버지가 1939년 대전감옥에서 나오셨을 때 고향에 오셔서 (스님의) 육촌누님을 만나셔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육촌 누님이 지금도 아주 연로하신데. . . . 첫마디가 그랬다고 해요. “너희 남편 아직도 면에 있냐?” 있다고 하니까, “아직도 마을에 다니면서 공출 같은 거 하고 그러냐”면서, “그런 짓거리 하지 마라. 머지 않아 해방이 온다. 해방이 오는데, 그런 식으로 살면서 동족끼리 인심잃으면 되겠느냐. 차라리 면서기를 관두던가 해라. 될 수 있는 한 인심 잃지 마라”고 하셨다고 해요. 저한테는 육촌누님이 되시는데 현재도 대전에 살고 계세요. 그 분 아들이 숭전대학교 교수로 계세요. 이수민이라고 하는데. 대전에 있는 충남대학굔가, 숭전대학굔가. . . 확실치 않네요. . . .  아무튼 (아버님은) 그 뒤로 사라지셨는데, 저희 할머니, 전 어머니를 자꾸 할머니라고 해요. 아무튼 그때 만나셨을 때가 겨울이라고 해요. 추울 때라고. 머리는 밤송이 같았고. 청주에서 만나신 것이 추울 때니까. . . 11월 그 정도 되었겠네요. 1939년 11월. 그래가지고 청주에서 좀 머무시다가 서울로 오셔 가지고, 거기서부터 콤그룹 활동을 하신거지요. 인천에도 가시고. 그러던 중에 저를 갖게 되셔서, 할머니한테는 애를 놓으라고 했지만, 당신께서는 지하로 들어 가야할 형편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헤어지고는 어머니는 청주에 가셨는데, 할머니하고 아주머니라고 하시는 분이 왔다고 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큰어머니겠지요. 뭘 한참 싸오셔서 어머니 뒷바라지하신 거 같아요. 아버지께서는 잠적하시고. 그 뒤로는 어머니와는 헤어지신거죠. 잠적하셨으니까. 서울생활에서는 어머니께서 필요하셨겠지만, 잠적한 뒤에는 혹이 되는거겠지요. 어머님이. 만삭이 되고 했으니까. (웃음) 샤브시나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 뒤로 아버지는) 제일 먼저 대구로 내려갔다고 하세요.

 

콤그룹은 1939년 박헌영이 6년 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감한 뒤, 당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김삼룡, 이주하 등과 결합하여 조직한 좌파의 조공 재건활동 멤버들을 말한다. 김삼룡, 이주하 등은 박헌영을 리더로 영입한 다음 대부분의 활동 좌파들을 조직하여 단일 대오를 형성하였는데, 해방 직전까지는 가장 광범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인 좌파조직이었다. 1941년 이래 여러차례의 검거선풍으로 와해되었는데, 콤그룹이 해체된 이후에 조선에서는 조직적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더 이상 표면화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한다. 따라서 콤그룹 활동은 해방 후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유력한 前歷으로 작용하게 된다.

 

퍼슨웹> 누님에 관한 이야기도 그럼 그때 하셨습니까?
원경> 참, 그 이야기하던 중이었지.(웃음) 아무튼 그때 고향에 와 계실 때, “주세죽(박헌영의 첫 번째 아내) 여사가 어떻게 됐냐”고 물으니까 “아이 낳다가 산후가 잘못돼서 죽었다”고 하는 데 그 아이는 누가 키우고 있다고 하셨답니다. 그 얘기를 저는 들었어요. 그리고 또 언젠가 그 . . . .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쓴 박갑동 선생한테 전화가 온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있었어요.

 

“선생님, 선생님이 쓴 글은 옛날에 읽어봤는데, 거기에 어린 남매가 나오는 데 큰아이가 나이가 몇 살입니까?”하니까 아주 어리다고 그래. “나이가 그 당시 20여세 안됐냐”고 하니까 아니라고 한 서너 살이라고 그래. 그러면 다른 사람이구나, 이거는 작은 어머니(박헌영이 북한에 있을 때 결혼한 여자, 윤레나)한테서 난 아이들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믿어오다가 결정적인 계기는 그 중앙일보죠. 중앙일보에서 갑자기 찾는 거예요. 근데 제가 아까도 얘기했지만 신문사 기자들을 꺼려해요. 권혁룡이라고 중앙일보 기자가 있어요. 강원도 담당하는 지방 기잔데, 형님 동생 하면서 지내는 사람인데 지금은 간암으로 죽었습니다. 아무튼 그 사람이 달려왔어요. 달려와서 지금 특보가 나온다 이거예요. 형제를 찾았다고 하는데. 중앙일보사는 이걸 (나와) 같이 엮어서 할려고 하는데, 일단 나는 못하겠다. 신문이 나와야 알겠다. 신문을 봤으면 좋겠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당시 시사저널에 인터뷰는 했지만은 일간지에 내가 인터뷰할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런 사람도 아니고. 내 생활이 아직도 세상에 알려지는 게 싫고. 그런데 그 이튿날 신문에 나오고, 그런 다음에 혁룡이가 왔어요. 자기가 하나 해야겠다. 같이 모스크바에 가자 했는데, 혁룡이가 갑자기 시무룩하더니 벌써 본사에서 갔습디다. 그래서 난 급히 갈 의사가 있냐고 하길래 간다고 했어요. 당신들이 안하더라도 나는 간다고. 그런데 주소를 가르쳐주지를 않아요. 그래서 일단 그 김국후라는 중앙일보기자 누님을 만났던 이 분하고 이제 모스크바를 갔습니다. 내가 경비를 다 대가지고 모스크바를 갔어요. 가보니까 누님이 여행가고 안계시더라구요. 여행가고 안계신데 일부사람들이 자꾸 빼돌리는 줄 알고. 그래가지고 사실 그 사람한테 싫은 소리를 했어요. “너 만일에 내 문제를 가지고 장사하는 식으로 했다가는 너 그냥 평생 병신을 만들어 논다” 그렇게 까지 기자한테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박길룡(前 북한 외무성 副相) 선생의 집에서 머무르다가 누님이 오셨다고 해서 누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래서 뭐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참 드라마 형식으로 했는데. . . . 사실은 눈물도 안나와요. 안나오고,  누님도 그냥 눈만 말똥말똥하고. 단, 양손을 서로가 잡고 앉았는데, 간혹 생각이 지나갈 때마다 서로가. . . 내가 누님의 손에 힘을 주는 경우도 있고, 누님이 내 손을 . . . .갑자기 뭔 생각을 했는지 말 한마디도 안 통하니까. 그냥 갑자기 내 손에 힘을 꼭 주고 잡는 이런 것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인제 샤브시나 여사를 만나고 레베데프(소련 제25군 정치사령관, 북한점령 소련군의 2인자)씨를 만나고, 박병률(前 강동정치학원 소장)씨를 만나고, 강상호(前 북한 내무성 副相)씨를 만나는 과정에서 . . . 누님하고 같이 큰어머니 묘소를 찾았어요. 거기에는 대부분 화장을 합디다. 그러고는 좀 유명하던가 그래도 힘있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화장해서 비석을 세우고, 그냥 서민들은 화장을 해서 그 위에 계속 뿌리는 거예요. 그래서 몇 년부터 몇 년까지 죽은 사람을 거기다 딱 써놨어요. 그래서 내가 법복을 입고 승복을 입고 큰어머니를 위해서 독경을 하면서 명복을 빌어드렸죠.

 

퍼슨웹> 박비비안나씨가 한국에 오셨을때, 모친(주세죽)과 박헌영 선생의 위패를 스님이 모시고 있는걸 보고 고마워 하셨다는 걸 들었습니다.
원경> 아까 말했던 용화사라는 사찰이 인천에 있어요. 그곳에 가면 윤이상씨의 위패도 모셔져 있는데, 수만명이 모셔져 있어요. 그 번호가 지금은 벌써 3만 몇 단위로 넘어가 있는데, 2828번에 보면 박헌영 선생하고 주세죽 여사 두 분을 모셔 논 것이 있어요. 옛날에. 그건 종교 관계라기 보다도, 내가 절에 있고 또 나한테는 큰어머니이고 하니까. 해마다 음력으로 3월 11일날 자손들이 참석을 하던 아니던 그분들을 천도 해줍니다. 그리고 내가 가는 절마다 영단이 있으면 그 영단에 항상 그분들을 모시지요. 신륵사 같은 곳에서도 내가 위패를 모셔놨고. 또 만기사도 그렇고. 그 다음부터는 그분들만 모셔 논 것이 아니라 신도들도 있고 스님들도 있고, 여러 사람들을 모셔서 계속 이어나가는 겁니다. 누가 없앨 수는 없는 거지요.

 

공사가 한창 중인 만기사의 “명부전”에도 숫자는 용화사보다 적었지만, 역시 박헌영과 주세죽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박헌영은 1921년 상해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던 주세죽과 결혼했다. 1928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스님께서 91년도에 만났다고 하는 첫딸(박비비안나)을 출산했는데, 그들이 언제 헤어지게 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공식 결혼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이혼절차라는 것도 있을 수 없었는데, 1930년대 초반 상해에서 활동할 무렵 주세죽과의 사이는 매우 악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3년 박헌영이 상해주재 일본공사관에 검거된 이후 죽을때까지 박헌영은 주세죽을 다시 보지 못한다. 주세죽은 박헌영과 헤어진 후 박의 절친한 친구였던 김단야와 다시 재혼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김단야 역시 1937년경 당시 위세를 떨치던 대숙청에 휘말려 ‘일본 밀정’ 혐의로 처형되고 주세죽 자신도 모스크바에 있는 딸과 떨어져 중앙아시아 먼 곳으로 유배 가게 된다. 실타래처럼 얽혔던 이 세 명의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꼬여버린 서로의 운명의 매듭을 풀어볼 겨를도 없이 제각기 타향에서 생을 마감한다.

5.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 진리는 자명한가?

 

스님이 현재 주지로 계시는 ‘만기사’에 갔을 때 보통의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재미있는 문구가 적힌 현판(?)을 볼 수 있었다.
“원수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부처님께서도 하셨을 법은 하지만, 아무래도 절간에서 마주치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든 문구였다. 게다가 한글로 적어놓고 있으니, 기독교 신도가 걸어놓은 액자처럼 보여서 아무래도 낯선 느낌이었다.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는 인터뷰어에게도 “절간 붙어있는 글귀로는 좀 이상하지요?”라며 스님은 또 웃으신다. 이 문구는 스님이 만기사에 오시면서 직접 만드신 거라고 했다. 누구를 향해 하고 싶은 이야기일지 궁금했는데 어쩌면 스님 자신일거 같은 생각이 든다. 이야기는 계속해서 『전집』으로 이어진다.

 

퍼슨웹> 작년 (박헌영 탄생) 100주년이었을때 공식적으로나 아니면 스님 개인적으로 행사를 하지는 않으셨나요?
원경> 그런 행사는 없었고. . . 해마다 12월 15일날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를 지내는데 딱 한 분이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는 줄 알고 찾아 왔습디다. 박승옥씨라고. 옛날에 사계절인가. . .  아니 돌베게에서 남로당 연구도 내고 그런 걸로 알고 있어요.

 

퍼슨웹> 스님을 직접 찾아오셨나요?
원경> 예. 그래도 100주년인데. . . 그래도 제사를 지낸다는데 당신이 다른 건 몰라도 . . . 싫어하든 좋아하든 참석하고 싶어서,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김천에서 찾아왔습디다. 저는 해마다 그 12월 15일날 지내는 데 금년부터는 바꾸려고 해요. 왜냐면 돌아가신 날짜가 다르기 때문에. 12월 15일은 내 16살부터 지내온 제사예요. 돌아다니면서도 지내던 제사였어요. 절에서는 행사라는 것이 주로 낮 11시 보통 10시부터 그 시간에 합니다.

 

퍼슨웹> 꼭 12월 15일날로 정한 것은 스님께서 정하신 건가요?
원경> 아니지. 한산스님이 그분이 돌아간걸 확인을 하시고. . . . 그. .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동천리라는 곳에 대련사라는 절이 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기서 선친이 태어나신 곳하고 얼마 안돼요. 바로 앞이에요. 거기서 제사를 지내고. . . . 그 뒷산에, 봉수산에 올라가면 백제의 흑치상지가 있던 성이 있어요 임존성이라고. 그 곳에서 얘기를 들었지요. 그래서, 그때 나도 사춘기고 또 . . . 참 많은 번민이 있고 해서 그냥 나와버렸죠. 밑에는 바지 중 옷 그냥 입고, 위에는 군인들이 입던 옷 물들인 검정옷을 입고. 요즘말로 하면 야전잠바에 모자 하나 쓰고 절에도 안가고 한 1년 간 세상을 돌아다녔죠. 남의 집에 가서 밥도 얻어먹고 하면서, 하여튼 그때가 처음 제사를 지냈던 거예요.

 

이때가 스님 나이 열 여덟이던 1958년의 이야기이다. 원경 스님의 출가 시점을 전후한 이야기는 『역사비평』과의 인터뷰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서 생략한다. 퍼슨웹과의 인터뷰에서는 처음 나왔지만, ‘한산 스님’과 관련한 이야기도 『역사비평』에 수록되어 있다. 지금 현재 원경스님이 찾고자 하는 「정책입안보고서」를 비롯하여, 스님과 부친에 관련한 많은 이야기를 스님께 직접 해주었던 ‘신비로운’ 인물이다. 한산 스님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들을 수 있었다.

 

퍼슨웹> 이후로는 매년 어디에 있든지 제사를 지내시는군요?
원경> 그러니까 또 생각이 나네요. 옛날 일인데. . . 우스개 소리로 하지요. 옛날에 김지하 선생, 이문구(소설가) 선생, 황석영, 또 . . . 송기원(시인), 장선우(영화감독), 임진택(국악인) 등등 사람이 많았어요. 김지하 사단이라고 해가지고. . . . 한 1985년도 쯤 됐나? 1983년인가 . . 겨울에 . . . 실천문학에 책(『사상기행』 1999년 출간)도 아마 나왔을거에요. 아무튼 다니다 보니까 기일이 닥쳤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랑 중간에 헤어졌어요. 근데 미국에서 오신 박성배 교수가 제사자리를 마련했어요. 근데 나는 참석을 못하고 떨어져서 저 무등산에 있는 원효사에 가서 그냥 몇 가지 과일하고 해서 부처님전에 과일 올리고 영단에 올리고 해서 시식을 마치고 내려와서 보니까, 여관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아무도 안 왔어요. (내가) 늦었거든요. 그런데 전화가 여관으로 마침 왔어요. 그래서 무등산 입구에 있는 무슨 가든인가 식당에 계시더라구요. 만나 가지고 같이 들어왔는데 . . . 대체 어디 갔다 왔냐고 따지는 거예요. 사람들이 뭐 여자를 만나고 왔다고 자꾸 억지 소리를 해서 . . . . 그래 가지고 사실을 얘기했죠. 사실은 오늘이 기일이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전부 노발대발하면서 “그러면 같이 가던가 해야지 그럴 수가 있냐”고. 그래서 오징어도, 사과도, 배도 사오고 해서 여관방에서 제사를 다시 지냈어요.(웃음) 사람들이 평생 원경스님 외로우니까 이 날을 잊지 말고, 꼭 멀리 있던 가까이 있던 간에 제사에 꼭 참석하자고. 그러면서 또 뭔 생각을 했는지 울고 그래요. 뭔 생각을 했는가 말이야. 난 그렇게 생각했어요. ‘착각하지 말자. 박선생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다. 다 지(자기) 과거사 때문이다.’ 우는 사람이 있고 그랬어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 . . 하하. 제사 참석한 사람은 한 분밖에 없어요. 송기원 선생님은 그 날을 잊지 않고 참석합니다. 그 외는 한 번도 제사를 지내자는 소리는 안하고(웃음) . . . 처음에는 장선우 감독은 몇 번을 참석을 했는데, 그 때마다 일하고 엉키니까, 촬영하느라고. 고런 경우가 있었어요.(웃음)

 

퍼슨웹> 지인으로 알고 있는 많은 분들하고는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원경> 어려서부터 전 한가지 희한한 것이 있어요. 내가 어려서부텀도 마을에 내려가면 애들하고 싸우거든요. 괜히 기죽은 아이가 있거나 또 뭐해서 그런 아이 하고 친하다보면 게 집안사정이 꼭 문제가 있습디다. 하여튼 어렸을 때 그런거 모르니까, 애들이 때리고 하면, 내가 앞장서서 그 아이들 때리고 하면 그 아이들이 또 형을 앞장세워 나 때리고 그래가지고 뭐 하는 거죠. 또 스님들하고 관계도요, 그러한 분들 한에서만 자연히 이렇게 정감이 간다고 할까요. 이러저러 하다보면 서로가 서로를 숨기지요. 근데 말해보면, 또 어느 날 곡차라도 한잔 하다보면 지나다가 보면은 저는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는데, 그래서 흥왕사에서도 욕 많이 먹었어요. 아주 징그러운 놈이라고. 저는 지 과거를 부모에 관해서도 얘기했는데 한번도 얘기를 않했다고. 그렇게 험난한 얘기도 들어보고 했어요. 또 본래 한산스님, 이 어른이 세인들을 만나는 것을 항상 경계를 하라고 나한테 시켰어요. 세인들하고 인연을 갖지 말라. 나한테 돌아오는 것은 절대 없을 거라고 했어요. 삼가해서 지내야지 세상사람들하고 긴 인연을 맺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근데 70년대부터는 도망 다니는 사람들이 절에 와서 하숙생으로 있는데, 도망 다니는 사람들은 하숙비도 못내요. 조금 있으면 누가 돈 가져온다고 . . . 어떻게 하다보면 내가 하숙비도 주고 그래야 돼. 그래도 나 있는 곳이 안전하지 다른 곳은 못 믿겠더라고. 또 그 산이 참 이뻐요. 꼭대기 올라가 있으면 사람들이 다 보이고 그래요. 그래서 거기서 술 마시고 돈이 없으니까, (내가) 막걸리 통도 갖다 놓고 하지. 그래서 마을에서 소문난 것이 있어요. 스님은 왜 막걸리 통도 한 통씩 갖다 놓고 먹고 하니까, 우리가 장가를 보내줘야 한다고 그런 일도 일어났어요. 허허.. 자꾸 얘기가 나오니까 당신 딸을 주겠냐고 하니까 당신 딸은 안된데요. 그래서 앞으로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아무튼 그렇게 저녁만 되면 학생들 시켜서 막걸리 통이 올라가고 하고 그랬어요. . . (산)밑에 주점이 있었는데, 통으로 사다가 날랐어요. 그게 두말쯤 들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자꾸 뭐 하다가, 이 사람들이 다 체포되어 감옥 가고 또 나오면 누가 찾아오고 . . . 그렇게 인연이 생긴거예요.

 

그래도 그 분들한테 참 고마운 것이 . . . 이게 사람이 죽을 죄를 지었더라도 시대에 따라 또 충신이 되고 하는데, 그래도 뭐랄까 . . . . 체포되고 나면 (경찰이)묻거든요. “너 어디 있었냐? 돈 누가 줬냐? 밥 누가 먹여줬어?” 요런 과정에서 그래도 제가 빠졌다는 거예요. 그게 고맙지요. 또 그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겠지요. ‘나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스님이) 필요하니까’ 또 나를 가만 보면 이 놈 아무 것도 없는 놈이거든. 바보 같고 (웃음). . . 난 또 지게 지고 논에 가서 일하고 그러니까. 그래서 뭐 그분들로서는 (내가)부담이 없었던 것 같아요. . . . 그래서 그 당시 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어요. 일체 징그럽다고. 남들이 다 안 다음에, 신문에 다 난 다음에 인제서야 자기들이 알았다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배신당한 느낌이라고 얘기들은 적도 있어요. 술 먹고 직접 얘기하더라구요. 알겠다 이거야. 지하생활 한 지 아버지랑 똑같다 이거에요. 그런 걸로부터 인연이 된 걸로 보지요.

 

퍼슨웹> 그래도 스님께서 인간적으로 남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지하의 『사상기행』은 김지하를 비롯한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함께 전라남북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기록한 일종의 ‘여행일지’인데, 오랜 동안 실천문학사에 숨어있다 발견되어 최근에야 출간이 되었다. 민들레서도 원경 스님은 정식 인터뷰가 끝난 뒤 식사를 하면서 ‘黨聚’에 관해서 장황하게 이야기 해주었는데, 『사상기행』에서도 원경스님의 관련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스님들의 비밀결사인 ‘당취(=땡추)’에 관한 이야기도 옮기고 싶다.
사상기행은 이미 출간되어 알려졌지만, 『우담바라』의 김성동 스님을 포함한 많은 文人들과의 인연도 흥미로웠다. 이들과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스님의 설명대로 ‘도바리’치던 그들을 숨겨주면서 생긴 것도 있지만, 스님과 유사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집안사정이 꼭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그런 의미인 것 같았다. 그 들에게 스님은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인터뷰 중에는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이문구 그리고 김성동 같은 인물들처럼 부친이 남로당과 관련되어 알게 모르게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이들과 스님은 유사한 고통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이들과는 어찌보면 동병상련의 처지라 할텐데, 스님은 그들과 ‘동류의 아픔’을 느낄 수만은 없었다. 공식적으로 남로당의 수괴 박헌영은 46년 9월 총파업과 대구인민항쟁이라는 ‘좌경적 오류’를 시작으로 남로당의 허다한 극좌적 투쟁을 전개하여 남로당 조직을 붕괴시킨 혐의를 받고 있다. 따라서 그렇게 하여 체포되거나 노출된 남로당원들은 전쟁 이전 보도연맹이라는 이름으로 묶이게 되었고 결국 이 보도연맹원들은 한국전쟁 동안 무참히 학살되었다. 그 수효도 아직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한 추론만으로도 남로당원 및 보도연맹은 결국 남로당 수뇌부, 이는 결국 박헌영일터인데,의 오류에 따른 피해자라는 논법이 성립할 수 있다. 논리의 비약이나 전제의 오류 등등을 따지지도 않은채, 스님은 이 부분에서 많은 번뇌를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십자가를 멘 예수처럼, 스님의 어깨 위를 짓누르는 무거운 원죄덩어리가 보이는 듯 하다.

 

6. 귀재의 불운, 한산 스님

인터뷰 초반부터 인터뷰어의 머리 속에 맴돌고 있던 한산스님이란 인물에 대해서 다시 궁금해졌다. 마치 주술을 걸 듯 원경스님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그 무거운 ‘원죄’를 짊어지도록 만들었던 이 인물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그 자체이다.
우리가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단서는 세 가지에 불과했다.
1910년생, 동경제대 출신, 스님이자 남로당 당원.

 

 

퍼슨웹> 아까 잠깐 이야기 하셨는데, 신비롭기까지한 한산스님을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원경> 에… 9살부터였을 겁니다. 1949년으로 알고 있어요.

 

퍼슨웹> 그때는 큰아버지와 함께 사시던 때인가요?
원경> 그렇죠. 그때 그 역사비평에 얘기 했는데. . .

 

퍼슨웹>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나게 된 겁니까?
원경> 한산 스님은 어머니 말씀을 들어보면, 1939년에도 어머니는 벌써 보셨어요. 콤그룹 활동할 당시 보셨더라구요. 그 말을 왜 하시냐면 옛날(1939년)에 봤던 분이 당신(어머니)을 찾아와서 이 아이(원경)가 있다는 얘기를 해 줬답니다. 근데 내가 (할머니께 한산스님에 대해) 물어보니까 “옛날에 본 사람이다”고 하세요. 자기 젊었을 때 선친하고 만날 때, 그 때 선친한테 들락거리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라구요.

 

윤해동> 1939년 당시는 스님은 아니셨습니까?
원경> 네. 아니었나 봐요. 하지만 그 당시도 머리는 깎았고, 그 당시는 머리 깍은 사람이 많았어요.

 

윤해동> 감옥에서 출소한 건가요, 그럼?
원경>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윤해동> 성명을 알면은 참 좋을텐데..
원경> 근데 내가. . . 한가지가. . . 뭐한 것이. . . . 내가 남궁이라는 姓을 한때 썼거든? 근데 그때가 67년인가 68년인가 그 무렵에 한산스님이 그래요. 이제는 주민등록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전에는 도민증 시민증 이런 거는 금방금방 만들거든요- 저도 잘 만들어요, 허허. 근데 도민증 만들때 성을 왜 남궁으로 하라 했는지. . . . 그래 내가 가호적을 만들 때 ‘남궁’이라 했어요. 성은 남궁, 이름은 ‘혁’이라고 하고. 해서 이름은 한산스님이 아니라 내가 했지만, 한산스님이 왜 성을 남궁이라고 하라고 했는가, 그게 하여튼 좀 의아해요.

 

스님의 가명에 관한 이야기와 1967년 무렵의 이야기 등은 『역사비평』 인터뷰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아마도 원경 스님은 한산스님께서 주신 ‘남궁’이라는 姓을 한산 스님의 姓으로 추정하시는 듯 했다. 단서가 한가지 더 생긴 것 같다.

 

퍼슨웹> 한산스님께선 출생년도가 1910년도가 맞습니까?
원경> 1910년도로 확실하게 알고 있어요.

 

퍼슨웹> 그렇다면 1939년도 이후면 스물 아홉 서른 정돈데. . .그 당시에 선친과 함께 꼼그룹 활동을 같이 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원경> 글쎄. 같이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그 양반도 참 징그러운 양반이에요. 워낙 말이 없어요. 예를 들어서 지리산에서 내려왔을 때도 박선생이야기라면 아유. . . 내가 혹시라도 그 비슷한 이야기를 하려면 (못하게) 아유~~. . . 그런 것이 몸에 배어 있어요.

 

퍼슨웹> 한산스님께서 동경유학을 했다고 하셨지요?
원경> 그것은 1961년도일 꺼예요. 재선스님하고 보리암에서 지낼땐데. 그 재선스님께서 “저 어른이 참 귀재”라고 그래요. (한산스님이) 동경제국대학교 출신이라고. . . . 그래서 “세상을, 세상 인연을 잘 못 만나서, 또 주인을 잘 못 만나서. . .”  그래서 동경제대 출신이라는 것을 내가 알게 됐지. 내가 거기서 나와 가지고 (한산스님한테)  “그(재선) 스님은 어떤 스님입니까”라고 하니까, 훌륭한 스님이지라면서 말야. 일본 명치대학교 출신이라고. 명치대학교 나와서 제주도 출신인데. 학교 졸업하고 나와서 결혼을 했는데 아들을 낳았어요. 그런데 어린 아들이 갑자기 죽었어요. 죽어 가지고, 말하자면 여행 나왔다가 중이 된 사람이라고 내가 그렇게 들었어요. 여행 나왔다가 매일 안고 다니던 자기 아들 죽어서, 상심되 가지고. . .  그것 때문에 상심해서 일도 못하고. 참 야무진 사람이라고. 재선 스님은 한산스님한테 귀재면서 하도 훌륭한 칭호를 많이 했는데, 한산스님은 제선 스님을 ‘참 야무진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해요. 그런데 도닦게 되었다고. 세상에 있어야 되는 사람인데.

 

퍼슨웹> 재선스님 연배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원경> 고런 것은 확실히 모르겠어요. 재선스님이 깍듯하게 하시는 걸로 봐서는, 아무튼 한산스님이 한 두 살 위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퍼슨웹> 한산 스님께서는 선친에 관한 얘기 말고, 당시 꼼그룹 활동했던 다른 활동가들에 대해서 이야기가 있으셨나요?
원경> 글쎄, 그런 것이 없다니까! 그런 분들에 대해서. 일체 이런 저런 이야기가 없어요..

 

퍼슨웹> 참 구름같은 분이네요.

 

정말 구름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전집』과 관련한, 그리고 박헌영과 관련한 이야기의 발단은 모두 이 한산 스님으로부터 비롯된다. 뒤에 다시 나오겠지만, 박헌영의 지근 거리에서 그를 보좌하고 또 남로당의 활동에도 깊숙히 개입했던 것으로 보이는 이 인물은 아직 어떤 기록에도 ‘실명’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역사라는 것은 그래서 또 흥미롭다. 수면 아래에서 조용히 물의 흐름을 인도하고 있는 이 수많은 존재들을 찾아 나서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퍼슨웹> 큰아버님하고 같이 계시던 곳은 김상룡-이주하의 남로당 아지트로 쓰던 집으로 보이던데요?
원경> 아지트라고 해야겠죠. 지하로 잠적했으니까. 그런데 아지트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전부터 . . . . 그러니까 1945년도부터 만들어 놓은 자리라고 봐요. 왜냐면 큰아버지하고 큰어머니가 거기서 뭘 했는데… 지금도 조금 생각나는 것은 분명히 큰아버지 집은 따로 있고, 김삼룡 선생님 집은 바로 붙어 있고. 여기에 하나 건너서 집이 또 있어요. 여기에는 … 뭐라고 해야 할까… 젊은 사람이 큰아버지가 쌀가마니나 이런 걸 옮기거나 하면 이 사람들이 와서 거들어준 기억이 나거든요. 그러니까 이 세 개가 난 같은 집이라고 봐요. 또 이순금 여사는 다른데 있었어요. 그분한테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젖먹이 아이였어요. 거기 가서 있다가 그 집에 나를 놔두고 오는 경우도 있고 . . . 요런 것(아지트)이 그 부근에 몇 개가 있었다고 봐요. 그런데 김삼룡 선생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밤에도 오고 어쩌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기억에는 여기에 그 이주하 선생하고 한산스님하고 그 몇 사람이 안되. 한 두 서너 사람.

퍼슨웹> 그 장소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한산스님이 김상룡, 이주하 등 당시 남로당 지도부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경> 심정적으로는 한산스님은 박헌영 선생의 분신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정치를 하다 보면은 여러 갈래 힘을 쓰는 사람이 있죠. 그 중에 한 사람이 아닐까. 지금처럼 예를 들어서 전화를 통화하고 하는 것은 아닌데, 한산스님의 역할은 해주를 주로 많이 왔다 갔다 한 거 같아요. 박선생이 최종 결정을 할 때 한산스님을 통해서만 왕래가 된 걸로 믿어요. 한산스님이 와서 노선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이쪽에서도 그 어떠한 최고지도부에서 어떠한 문의사항이나 결정사항을 한산스님을 통한 것으로 나는 봐요.

 

퍼슨웹> 김상룡과 이주하가 잡혔던 현장은 큰 아버님 하고 같이 살던 그 집인가요?
원경> 아니, 그 집에서 잡혔던 것은 아니구요.

 

퍼슨웹> 그럼, 그 근처인가요?
원경> 아니, 난 경찰서에서 밖에 못봤어. 경찰서는 종로경찰서가 아니고 그 당시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중부경찰서 같아요. 의자가 저렇게 길어요, 길고. . . 나무로 된 의잔데 두 개가 있어요. 안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 김삼룡 선생이 바지가 찢어져 가지고 피가 막 엉켜 있고, 의자에 수갑을 차고 있었어요. 긴 의잔데 여기에 수갑을 채워 가지고 있는데, 그 얘기를 해 주러 나왔을 때 이주하 선생도 거기서 체포되었어요. 거기서 그냥 사람들이 덮쳐서 끌고 가는 것을 봤거든요. 그러니까 놀래 가지고. 이주하 선생은 김삼룡 선생의 상황파악을 하러 오셨다가, 당신 모습이 누구한테 들킨 것 같아요. 그렇게 봐야 정확한 것 같아요. 그 체포된 과정을 어디 있으면 별로 안 틀릴거예요. 두 분이 그냥 여기서 . . . 아주 허망하게 . . . 당시는 그런 생각도 못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허망하게 잡힌거지. 이주하 선생은 그 상황에서 어떠한 조치를 하려고 하다가 누군가 당신을 알아본 겁니다. 근데. . . 갑자기 또 생각이 나는데. 당시 김삼룡, 이주하 선생에 대해서 경찰은 몰랐어요. 이때 누가 왔는데, 확실치는 않지만 한산스님께서는 당신이 . . . 단정을 하는데. . .홍모씨라고 했어요.

 

퍼슨웹> 홍모라는 사람이 밀고를 했다는 건가요?
원경> 홍뭣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전향한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그 사람이 이 사람들 얼굴을 알고 밀고를 했다는 거지요. 하여튼 홍뭐라고 하는 사람이었어요. 지금 막 머리에 반짝하고 지나가네요. 한산스님께서는 단정을 하셨어요. 홍 누구라고. 그래서 아주 우습게 그 분이 그 사람을 통해서 잡히게 되셨죠. 왜냐면 이주하 선생은 김삼룡 선생이 잡혔는지를 확인하려고 그러다가 당신이 직접 위장을 하고 갔다가, 이 위장한 모습을 알아본 사람이 홍모씨라는 거지요.

 

증언만으로 역사를 구성할 수는 없지만, 사실 기록이 명확하지 않은 사건일 경우 증언이 유일한 단서가 될 수밖에 없다. ‘김삼룡과 이주하’ 남로당의 이 두 기둥이 경찰에 체포되는 경위는 기록과 증언에 따라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한산스님께서 말했다는 ‘홍모’는 남로당 간부였다가 전향해서 서울시경의 경위로 특채되어 남로당 토벌에 앞장섰던 洪珉杓로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김삼룡, 이주하 체포의 일등 공신은 남한 경찰에 포섭된 안영달(남로당원)로 알려져 있다.
박헌영이 월북한 이후 서울 남로당 중앙을 책임지고 있던 김삼룡, 이주하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후퇴하는 국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퍼슨웹> 당시 그러니까 스님께서 큰아버님과 함께 서울에 올라온 1945년부터 한산스님과 함께 산행을 하시게 되는 1950년 초반까지 선친과 가까운 곳에 살고 계신 셈인데, 아버님과 관련해서 떠올릴 수 있는 장면이 있으신가요?
원경> 네. 한 두장면 정도가 기억에 남아 있어요. 선친이 앉아 계시는 책상이 있었고. 방은 상당히 컸어요. 책상 위에는 항상 책도 있지만, 원고지 같은 게 잔뜩 쌓여 있었어요. 선친께선 뭐 방안을 돌아다니고 다른 건 어떻게 해도 그 책상 위에 있는 것만은 절대 못 만지게 하셨어요. 같이 살았던 기억은 없어요. 한산스님께서도 같이 살지는 않았다고 하시더라구요. 또 다른 하나는, 46년 2월 달에 어떤 행사가 있었는데. . . 그 집이, 박갑동 선생말로는 김해균씨 집이라고 하는데, 뭐 그 집인지는 확실치 않죠. 아무튼 어떤 집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선친이 당시 기거하던 곳이지요. 여럿이서 찍었는데, 그 마당이 기억나요. 추웠을 땐데. 제 기억에는 추웠을 때만 만났던 기억이 나요. 사진 찍었을 때나 사무실에 갔을 때나. 근데 그 사진을 1979년에 분실하게됩니다. 그 사진에는 박헌영 선생, 이현상 선생, 김삼룡 선생, 이주하 선생, 이순금 여사 등 몇 사람이 간단하게 찍은 사진이었어요. 이 사진은 한산 스님께서 산을 다니실 때 여러 번 활용하셨어요. 그러다가 제게 주신거지요. 날 산에 데리고 다녔던 것은 신표고 증표인거 같아요. 이현상 선생은 산에 갔을 때 보니까 서울에서 봤던 그 아저씨거든. 상당히 이뻐해주고 했어요 그때.

 

퍼슨웹> 스님도 같이 있는 사진이었습니까?
원경> 네. 같이 찍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진을 잃어버린 게 참 그래요. 아까 말씀드렸지만, 인천에서 5년간 집을 지을 때였는데. 제 방이 아주 작았어요. 이 방의 한 반정도 되려나. 그보다 더 적어요. 부엌을 개조해서 다락도 하나 만들었는데. 당시 돈이 얼마 없었지만, 얼마 안되는 비상금도 은행에 넣거나 하지 않거든요. 선황당 같은데 기름종이에 싸서 돌 밑에 숨기곤 했지요. 아무튼 당시 어떤 날에 방에 들어와 봤더니, 벽장에 있는 모든 물건이 방바닥에 나와있어요. 다 뒤져놨는데, 도둑은 아니었어요. 분명히 바깥에서 잠근대로 문은 잠겨있는데 말이지요. 하여튼 물건을 하나하나 다 뒤져놨어요.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돈은 그대로 있었고. 참 별일이 다 있더라구요.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보니 없어진 게 없다 싶어서 그냥 넣어뒀어요.

 

퍼슨웹> 사진만 없어진거네요?
원경> 아니, 그건 몰랐지. 그 당시에는 몰랐어. 난 사진을 항상 책 뒷장에 밥풀 하나 붙여서 보관하거든요. 절대 안 떨어지게. 근데, 그 사건 뒤로는 사진을 찾질 못했어요. 뭔 일인가 계기가 있어서, 사진을 복사해야겠다고 해서 사진을 뒤졌어요. 사진이 커다란 건 아니었고, 손바닥만한 거였지요. 아무튼 선친 때문에 사진을 몸에 지니고 다니지 못하고, 책에다 뒀는데. 그 뒤로는 찾질 못했어요. 그때 내 짧은 생각으로는. . . 이 사진때문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걸 다 뒤집어서 털었는데. . . 돈은 그대로 두고. 꼭 사진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 . . 뭘 찾다가 그걸 찾아서 들고 갔는지는 모르겠는데. . . .

 

퍼슨웹> 그 사진에 한산스님도 있었습니까?
원경> 그럼요. 나와 계세요.

 

퍼슨웹> 당시도 삭발을 하셨다고 했죠?
원경> 네, 좀 전에 말씀 드린 대로 1939년 당시에도 삭발을 하셨으니까요. 단, 옷은 . . . . . 음. . .옷도 승복을 입고 계셨어요. 첨에 만났을 때도. 김삼룡 선생하고 이주하 선생이 체포된 이후에 한산스님이 나타나셔 가지고 날 데리고 다시 경찰서로 갔어요. 그때 하여튼 사방을 다 뒤졌어요. 경찰서고 뭐고. 한산스님이 시키는대로 했지요 나는. 경찰서에서 너 누구냐 그러면, 아저씨 만나러 왔다고 내가 그래요. 아저씨 이름이 뭐냐고 하면 얼굴봐야 안다. 이런 식으로 비집고 다니면서 알아보러 다녔죠. . . . 그러다 명월관인지. . . 하여튼 요정이었는데. 한산스님께서 절 데리고 가서, 누굴 만나라고 하시더라구요. 이야기를 전해주라고. 하니까 대번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요. 거긴 참 이쁜 누나들이 많았는데(허허). 그 사람(날 알아보는 사람)이 김소산입니다. 그 양반하고 만나서 서오릉에 가서. . .저기 구파발 그쪽요. 거기 가서 좀 지냈어요. 그러다 다시 과천에서 지내다가. 그러다 누나(김소산)는 가고.

 

퍼슨웹> 김소산, 한산스님, 그리고 스님 이렇게 세명이 서오릉에서 생활하신건가요?
원경> 아니, 또 여러명이 더 있었어요. 나이 많은 할머니도 계셨고.

 

퍼슨웹> 그럼 시기로는 1950년 초반경쯤 되었겠군요?
원경> 1950년. . . . 아무튼 그때도 추울때였어요. 아무튼 그러다(서오릉에서 함께 살다가) 한산스님이 누구하고 날 데리고 화엄사에 가서 맡겨두고, 한산 스님께서는 지리산으로 들어가셨죠. 들어가서 이현상 선생을 만나셨죠. 그런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다 다시 나와서 날 데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갔죠. 그때가 육이오 직전이에요. 그때 철쭉인가 영산홍인가가 참 많이 피어 있었어요. 화엄사 갔을 때는 아직 동백이 남아있었고. 근데 육이오가 난 이후에 과천까지 다시 왔어요. 과천까지 오니까 그때 김소산을 다시 만나요. 그때는 인민군복을 입고, 권총도 차고 채찍인가 지휘봉인지도 들고. 장화도 신고요. 상당히 당당한 모습이었어요.

 

퍼슨웹> 그 여자분이 김소산이란 것은 뒤에 한산스님을 통해 들으신 이야기지요?
원경> 예… 김소산도 한산스님과 헤어진 뒤에 아마 체포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육이오 직후에 풀려서 인민군에 합세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꾸 김수임 아니냐고 하는데. 김소산이에요. 이 사람도 남로의 핵심인물이었어요.

 

퍼슨웹> 아까도 말씀하셨는데 본인(박헌영)께서 곧 해방이 될테니 몸조심하라고도 하셨었고. . . 사촌 형님께서도 모스크바에 유학을 하셨죠?
원경> 예. 해방 이후에 선친께서 동지들한테 그러한 얘기를 했다고 해요. 조카가 지금 모스크바에 있는데, 앞으로 지켜보면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한산스님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사촌이 있다는 걸 압니다.

 

퍼슨웹> 서울에 스님하고 큰아버지하고 사시는데 큰아버님이 다른 일을 하셨나요?
원경> 그냥 미곡상만 했어요. 다른 것은. . .

 

퍼슨웹> 혹시 또 남로당 관계가 있으신가 해서 여쭙는 겁니다. . . .
원경> 아니. 그것도 큰아버지가 난 몰랐다고 생각해. 전혀 몰랐다고. 단 아는 것은 이순금 여사 하나. 그러니까 따로 살았어요. 옆에서 김삼룡 선생하고는 부부간인데도 따로 살았어요. 그 정도로 조직적으로 무서운 사람들이지. 노출을 안시킨거라. 단 형이라고 하니까 한 쪽으로 생각하면 혹스럽기도 하고 그러니까, 설치지 못하게끔 고향도 못 내려가게 하고 그렇게 해서 감금 아닌 감금을. . .

 

퍼슨웹> 큰아버님하고 있을 때는 선친에 대한 다른 말씀을 듣지는 못하셨나요?
원경> 큰아버님하곤 생각나는 건 뭐 쥐어박기나 하지 . . . 허허. 내가 조금 그래. 지금도 이렇게 보면 개구쟁이 기질이 있는데, 어릴 때 좀 개구쟁이었어.

 

 

퍼슨웹> 그 뒤로는,그러니까 1950년 이후로는 쭉 빨치산하고 생활을 하신거죠?

원경> 빨치산이라고 하면, 그 당시에는 산사람이라고 했는데. 뭐랄까. . . 그냥 산에 가서 그냥 한 거야. 혹독하게 한산스님은 그냥 생활한거야. 근데 나는 어디 가든 간에 사람들이 이뻐하고. . . 예를 들어 어른들이 뭐 요즘말로 회의를 하면 다른 사람들은 얼씬도 못하는데 (나는) 들락날락 하고. . . 그렇게 산에서 있었지…

 

 

7. 위기에 대한 인수분해
: “danger+chance”

 

2001년 현재 박헌영 간첩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애써 떠올려주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그저 그런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 박헌영 간첩사건은 아직도 뜨거운 감자다. 입안에 넣기는커녕 손으로 잡을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뜨겁다. 하지만 퍼슨웹과의 인터뷰에서 빠트릴 수 없는 주제였다. 가벼운 화상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왔지만 그래도 목 뒤를 타고 내리는 긴장감은 피할 수 없다. 이제 인터뷰는 서서히 뜨거워질테다. 

 

퍼슨웹>『역사비평』과의 인터뷰 내용을 보니까 스님의 목소리하고 이런게 선친과 비슷하다고 하셨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원경> 소련에 갔을 때. . .  샤브시나 여사가 누님을 같이 만나거든요. 그러니까 40몇 년만에 만나는 거에요. 그 동안 관계가 없었답니다. 나는 누님하고 그분들이 만나고 하는 줄 알았는데, 전혀 없었다고 해요. 그때 샤브시나 여사가 (나를) 자꾸 관찰을 하더라고 해요. 덩치는 너무 크고. . .허허. 웃는 모습하고 목소리가 박선생을 닮았다고 하세요. 제가 보기엔 누님은 선친을 많이 닮았더라구요. 또 한가지 말하면. . . 박선생의 해방 이후 사진을 육촌 누님이니 이렇게 보시면 전부 못 알아봐요. 얼굴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디다. 1930년대 (국제)레닌대학교때 찍은 사진하고 해방 이후 사진을 보면 얼굴이 바뀌었더라구요. 육촌 누님이 두 분계셨는데, 그 분께서는 제가 할머니(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해요. 나도 그런 거 같아요. (웃음)

 

퍼슨웹> 모스크바에서는 북한에서 망명했던 박길룡씨 같은 분과 따로 인터뷰를 하셨나요?
원경> 90분짜리 19개를 했는데 하나도 (녹취가) 안되어 있어요.

윤해동> 녹음 음질이 아주 나빠서. . .
원경> 이 기찬 기계(디지탈 녹음기)가 그 당시 있었으면. . . 그때 선물 같은 건 안 사가고 카메라하고 소형카메라하고 테이프 이렇게 갖구 갔는데 . . . 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녹음을 했지요. 처음에 박길룡씨 같은 분들은 거부를 하더라구요. 말을 하다가 딱 안하더라구요. 그래서 나중에 기자를 . . . 기자가 있으니까 얘기를 안하더라구. 기자 있을 때 얘기를 안하려 하더라고 자꾸 쓰니까.

 

퍼슨웹> 이노겐지 김이란 사람도 직접 만나셨나요?
원경> 한국에서 일부러 만났죠. 한국에 왔다 갔어요.

 

퍼슨웹> 그분에 대해서 좀 말씀 좀 해 주시죠.
원경> 진도 모피 사장이 북쪽에서 탈출할 때 이노겐지 김이 탈출시켜 줬답니다. 그 인연으로 해서 그 진도 사장이 그 은혜를 한번 갚을려고 해서 . . .

 

퍼슨웹> 한국전쟁 중에요?
원경> 네. 한국 전쟁 당시 이노겐지 김이 KGB 총책이예요 북쪽에 파견된. 그런데 1951년도에 이 양반이 그러니까 1951년도란 건 진도 사장얘기를 들어봐야 알겠죠. 몇 년도에 나왔는지. 아무튼 51년도에 이노겐지 김이 그 소련으로 들어가고 다른 사람이 나와요. 근데 이노겐치 김이 박헌영 선생을 찾아갔더니 “그 동안 참 정이 많이 들었는데 나라 형편도 이렇고 내가 가진 것도 없고. . . 선물을 줄게 없다”고 하면서 당신(박헌영) 앞에 있는 오동나무로 짠 담배갑을 주더랍니다. 그래서 그걸 나한테 돌려줬어요. 그걸 내가 가지고 왔지요. 

 

토테미즘에 빠진 원시인처럼 인터뷰어는 소박하다 못해 유치할 정도로 평범해보이는 담배갑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손을 내밀어 두껑을 열어보고 요모조모 살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퍼슨웹> 이노겐지 김하고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습니까?
원경> 이노겐치 김은 중앙일보 기자하고 또 한사람 있었던가? 사직동팀 바로 앞 식당에서 만났어요. 그래서 만나서 얘기를 참 많이 했어요. 얘기를 많이 했는데..

 

퍼슨웹> 그게 몇 연도입니까? 러시아 가시기 전인가요?
원경> 네. 1991년도일꺼에요. 나는 만나서 이 사람정도면 누님을 알까 했는데. 당신도 모른데요. 누님 관계를 자기도 신문에서 처음 봤데요. 그 동안 관계가 없었고. 그런데 당신이 1955년도에 케이지비에서 박헌영 진상조사단을 구성해서 정식으로 왔답니다. 와서는 1미터가 넘는 서류를 차근차근 검토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판정했답니다. 왜냐면 그 당시 상당히 소비에트도 시끄러웠데요. 그냥 둘 수는 없는 것이고 해서 이노겐치 김이 단장이 되어 각계를 망라해서 . . . 케이지비 요원만 온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아무튼 여러 사람이 와 가지고 했는데. 증거불충분으로 자기들이 판정해지고, 이걸 김주석한테 제시했는데, 이노겐지 김 말에 따르면 김주석이 “이 에미나이래 내정 간섭하러 왔다”고 하더랍니다. 내정간섭하러 왔다 하면서 방학세한테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박선생은) 내무성 지하 감옥에다가 감금을 했다는 거예요. 그 양반(이노겐치 김) 증언에 의해서도 바로 12월 15일 이후에 사람들이 들어 온거 거든요. 그렇지만 12월 15일 당일 처형되었다는 것은 잘못된 거고.

 

퍼슨웹> 그러니까 이노겐치 김은 박헌영 공판이 끝난 뒤에 들어왔다는 말씀이네요?
원경> 네. 그러니까 공판 이후에 들어온 거죠. 공판 이후에 파견관이 전부 (조사) 했는데, 이 사람들이 들어와서 이 상황을 갔다가 볼 때 조사관들이 와가지고 서류를 찬찬히 몇일을 걸려서 했을 때, 증거불충분으로 자기들이 내렸답니다. 하니까 저쪽 주석께서 “에미나이레 내정간섭하러 들어 왔다”고 하면서 방학세한테 확고한 증거를 확보하라면서, 그렇게 해서 지하 감옥에 내팽겨쳤던 거지요. 이 양반의 증언이 그런 내용으로 이루어졌어요. 그것을 내가 분명히 녹음했는데 녹취를 하니까 그게 안나온다고 하니까 내가 환장할 일이죠.

 

윤해동> 그 내용도 있습니까?
원경> 다들 있어 거기에. 그 녹취는 서울에서도 하고 자기집에 찾아가서 녹음 한 게 또 있거든요.

 

퍼슨웹> 상당히 중요한 내용인데요. . .
원경> 증언하고, 박길룡 씨가 금방금방 통역을 하거던. 다 들어 있죠. 다 있어요.

 

퍼슨웹>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수록된 박길룡씨 증언에 따르면 이노겐치 김이 아마 1954년 경에 진상조사단이 들어왔을 거라고 증언하더군요. 1954년이면 선친의 공판(1955년 12월)이 있기 전입니다.
원경> 그것이 . . . . 그때 소련에서도 그 이야기를 했어요. 그 이야기를 제가 그 뒤에 다시 물어봤는데. 서울에서 이 양반(이노겐치)을 만났을 때는 재판 이후라고 했던거 같아요. 박길룡씨도 아마 그 시기에 대해서는 확신을 못한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되요.

 

퍼슨웹> 이노겐치 김의 말은 혹시 이승엽 재판(1953년 8월)을 말하는 건 아닐까요?
원경> 글쎄요. 기억이 정확하면 좋은데. 아무튼 저 녹음테이프를 빨리 손봐야겠어요. 저걸 찬찬히 듣고 다시 정리를 해야겠어요. 증언이란 것이 그렇듯이 이야기가 정리되어서 쭉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렇게 저렇게 겹치고 또 뒤죽박죽 되면서 말을 하는데. . . 그런 와중에 나보고 중간 중간 이렇게 말해요. “박선생, 이건 잘 들어야 되요. 기억하셔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말을 해줘요. 기자하고 말하면서 불현듯 뭔가 떠오르면 또 날 보고 “박선생, 요 이야기 잘 들어야 합니다”고 강조를 해요. 박길룡씨하고 강상호씨는 나를 항상 박선생이라고 했어요. 이노겐치 김하고는 기자하고 주로 말을 했고, 또 나도 가끔 질문을 했고.

 

퍼슨웹> 그 사건과 관련해서 진상조사단을 파견했다는 것은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 없는 얘기죠?
원경> 아니 지금도 (이노겐치 김이) 살아 있으니까 . . .

 

퍼슨웹> 이노겐치 김은 연세가 얼마나 되십니까?
원경> 말하자면 소련(파) 1세대인데, 이 양반은 젊어요. 한국말도 잘하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통역을 한다고 하면 말 끝나기도 전에 다 알아요.

 

윤해동> 이 사람은 또 인터뷰해도 재밌겠네요.
원경> 근데 이런걸 그 당시 그 기자도 그걸 다 받아썼다고. 당시 같이 있던 기자가 말야.

 

퍼슨웹> 이노겐치 김이 현재 특별한 활동을 하는게 있나요?
원경> 그냥, 거기에서는 연금을 타는 걸로 알아요.

 

퍼슨웹> 1955년 말로 진상조사한 다음에 (소련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말씀을 못들었습니까?
원경> 그런 얘기는 못 물어봤습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즈음, 그러니까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한다. 우연일지 모르지만,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핵심이 관련된 ‘공화국 전복 음모 사건’으로 알려진 남로당 숙청이 개시된 것은 그 직후였다. 박헌영의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사실상 1953년 봄부터 박헌영은 모든 공직활동에서 물러나 감금 혹은 연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권 수립 이후 최대의 위기(?)가 북한정권에 동시에 들이닥친 셈이다. 강력한 후원인이었던 스탈린은 죽었고 크레믈린의 후계구도는 안개 속에 빠져들었다. 안개를 걷어내고 길을 찾기 위해서는 돌뿌리, 나무가지에 얼마나 몸이 상해야할지 모를 일이었다. 또한 한국전쟁은 남북한 어느 정권에게도 결정적인 승리를 허용하지 않은채 봉합되어야만 했다. 상처를 찢었으나 고름을 다 짜내지 못했으니 이 역시 봉합을 위한 고통과 그 뒤에도 한동안 고열에 시달릴 것임은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북한정권의 중요한 한 축을 구성하고 있던 남로당 세력의 정권전복 음모가 알려졌다. 우연일지 필연일지 몰라도 한꺼번에 닥쳐온 이 태풍은 신생 북한정권의 운명을 좌우할 메가톤급 위력을 갖고 있었다. 위기에 빠진 신생 북한정권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삼면에서 몰려온 태풍은 절묘하게도 서로가 서로의 위력을 상쇄하면서 위기에 몰렸던 북한정부를 구원해 주었다. 천우신조는 역시 영웅의 편일 수밖에 없으리!

 

 

퍼슨웹> 당시 그러니까 1953년도에 동아일보에는 이승엽 간첩단 사건이 신문지상에 알려지고 다시 1955년에 (박헌영) 간첩단 사건이 보도됩니다. 당시 기사는 부친께서 일본에 갔다는 설도 있고. . . 1958년도에 돌아가셨다는 설도 있고 설왕설래 했습니다.
원경> 돌아가신 날짜는 1956년 7월 19일이라고 봐요.

 

퍼슨웹> 정확하게 이 날이 맞는 겁니까?
원경> 그것이 아주 중요한 건데 . . . . 소련과 중국 측에서 김일성 제거 작전이 나옵니다. 1956년 스탈린 비판이 터지면서. 당시 (김)주석은 동구권에 시찰 나갔을땐데. . . 김일성을 제거하기로 이루어졌답니다. 누구누구라고는 이름은 서너 사람 나오는 데 내가 기억을 못해요. 그래서 … 당시 동구권에 있는 현지에서 암살을 할건가 중간에서 암살을 할건가 … 이 논의가 이루어졌을 때, 국내파(북한에 있는 반김일성 세력)들이 이 그걸 만류한 거예요. 만류해서 이쪽 국내 절차에 의해서 축출하기로. 그래서 전원회의에서 축출하기로 각본을 짠 겁니다. 전원회의에서 그 날 발표를 한 사람이 . . . 학자들은 이 사람을 알텐데. . . . 아무튼 그래서 전원회의가 열리죠. 이 회의에서 주석비판이 터지는 거죠. 터지는데 이걸 누가 받침을 해줘야지. 받쳐주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석비판을) 발표하는 사람이 잠깐 회의하고 내가 속이 안 좋아서 화장실 간다고 하더니 그 길로 사라졌어요. 중국으로 갔어요. 전원회의를 이끌어서 발표하던 사람이. 벌써 이게 (회의 이전에) 기밀이 누설되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전원회의에서 김주석을 (북한에) 들어오지 못하게 모든 것을 장악하기로 했는데, 이 장악이 실패로 끝난 거예요. 김 주석은 비행기 안에서 생각할 때, ‘잔당들이 서로 연합해서 에미나이들이 또 이런 짓거리를 하는구나. 아예 종자를 없애버려야겠다’고 결정을 하신거 거든요.

 

그래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방학세에게 명령을 하는거지요. “멱줄을 따버려라” 그렇게 말했답니다. 방학세가 “증거 확보가 안됐습니다”고 하니까, “증거고 나발이고 없애버려라” 그런 거지요. 김주석은 박선생을 이름을 안불렀다고 해요. ‘리론가’라고 불렀데요. 이론가라고. “리론가 어떻게 됐어?” 그러니까 방학세가 아무 것도 없다고, 증거가 없다 이거야. “증거고 뭐고 오늘 저녁 멱을 따버리라”고. “이 에미나이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 이거야. 이 사건이 바로 8월 종파 사건이예요. 그 당시 문제가 있는 사람들 이때 다 쓸려 나가요. 그래서 쉽게 말하자면, 이 남로당 잔당들 하고 연합해가지고 뭐가 이루어졌는가 그런 걸로 오해를 하셨다고 봐야 옳다고 강상호씨는 그래요. 벌써 이러한 상황이 있을 때, 상황이 이루어졌으면 박선생 같은 사람을 구출해 놓고 했어야 했는데 그게 연계가 안된 것은, 강상호씨는 박선생하고 그런 사람들하고 연계가 안됐던 것은 이게 이치가 안맞다고 봐야한단 거야. 강상호씨는 주석은 오면서부터 비행기 안에서 별 고민을 다 했으니까, 그니까 여기에서 감옥에다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살려놨더니 이러한 엄청난 일이 벌어진거 거든요. 주석은 당신 자리가 위태로우니까 동구권에 나간거거든. 소련에서 스탈린 비판이 터지지하니까 자기 자리를 확고히 하기 위해 순방을 나간거거든. 근데 계획적으로 이런 사건이 터진거예요. (강상호씨는) 날짜는 7월 19일 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모르는데, 단 가서 학자들한테 물어봐서 8월 종파사건이 난 날짜를 알면 주석이 귀국한 날을 알면 박선생이 죽은 날짜를 알꺼다 이거예요. 당시 방학세를 따라간 사람이 박길룡씨 운전수예요. 그래가지고 숲 속에까지 가서 처형을 밤중에 . . . 처형을 하는데 박선생이 부탁을 하는 거예요.

 

“내가 오늘 죽을 준비를 했으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를 해주고. 단 주석이 나한테 했던 약속, 어린아이와 부인은 외국으로 보내준다 했는데 지금까지 난 안 간 걸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 약속을 지켜라.”
그 약속을 언제 어디서 했는지 그건 나도 모르겠어요. 아이들하고 부인은 외국을 보내준다고 주석이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퍼슨웹> 1948년에 북한에서 재혼을 했는데,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해선 혹시 모르시나요?
원경> 저쪽(북한)에 있던 작은어머니는 . . . 그 당시 박선생보다 먼저 돌아가시지 않았나 싶어요. 무슨 이야기가 있었냐 하면. 미필적 고의로 죽었다고 하거든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여러사람이 헹가래를 하다가 고의로 떨어뜨려 뇌진탕으로 죽었다고 하더라구요. 증언인데. 물론 직접 본 것은 아닌데 그렇게 들었다고 그래요. 윤레나라고 하는데. 선친이 사형언도를 받은 이후 . . . 그러니까 56년 봄쯤이 아닌가 하는데. 아무튼 뭣 때문에 행가레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했다고 해요.

 

퍼슨웹> 이 부분은 누가 증언하신 건가요?
원경> 박길룡씨지요. 김국후씨가 먼저 물었어요. 첨에 소련갔을 때 그 이야기를 누구한테 들었다고 했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돌아가시지 않았냐고 말을 던졌어요. 아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박길룡씨가 자기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다 다음에 누님이 왔을 때 또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샤브시나 여사가 있을 때 또 그렇게 말하더라구요.

 

퍼슨웹> 아까 말씀하셨던 김일성 제거계획에 대해 다시 말씀해 주십시요.
원경> 연안파죠. 여기에 연안파 뿐 아니라 일부 소비에트 핵심, 중국의 핵심 어떠한 사람이. 소련 정부에서 제거를 하려고.

 

퍼슨웹> 이 부분은 어느 분이 증언하신 거죠?
원경> 강상호, 박길룡씨가 다 증언한 거예요.

 

윤해동> 이 이야기는 처음이네요.
원경> 누차 얘기 했는데?

 

윤해동> 소련 정부에서 직접 관여했다는 것은 처음인거 같습니다.
원경> 소련 정부하고 중국 정부에서 주석을 동구권에서 암살을 할려고 했다니까, 그런데 국내에서 국내법으로 해도 충분하다고 한거야. 전원회의에서 절차를 밟아서 해야 소련 정부 너네도 탈이 안나고, 이쪽도 탈이 안나고 합법적으로 하자 한거지.

 

류준범> 강상호씨 중앙일보 연재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이)오는 날 바로 처형을 지시했다’ ‘숲으로 갔다’고 한 건 같은 내용인데. 앞부분에 나온 김일성의 제거계획이나 소련관련 부분에 대해서는 증언이 안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윤해동> 그건 국가간의 문제니까 . . .할 수가 없겠지.

 

강상호, 박길룡 등 러시아에 생존해 있는 소련파와 레베제프 등,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던 인물들의 증언을 직접 채록해서 출판한 것은 중앙일보의 특별취재반이었다. 이 취재반의 리더는 스님의 이야기 속에 여러 번 등장한 김국후라는 기자였다. 현재 중앙일보사를 퇴사한 이 사람의 손에서, 동행했던 원경스님의 말에 따르면 아직 많은 내용이 잠자고 있음이 분명했다. 김기자가 신뢰도 때문에 몇몇 증언들을 출판 과정에서 삭제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다. 증언의 가치(신뢰도) 문제는 기자들에게 그다지 중요한 고려 사항이 아니다. 한참을 침튀기면서 늘어놓은 뒤 “. . . . 라고 관계자가 말했다”고 하면 그만이다. 취사선택을 결정하는 것은 ‘파괴력’이다. 독자의 이목을 끌만한 화염과 굉음을 얼마나 낼 수 있냐고 하는 점이다. 이노겐치 김이 대표였다고 하는 KGB의 조사와 소련 및 중국 정부까지 관련되었다고 하는 ‘김일성 제거 작전’은 이런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쏘스였음은 뻔하다. 이 뿌리치기 힘든 유혹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의 증언이 이루어지고 책이 출간되는 것은 1991-1992년이다. 노태우 정권이 이룩한 몇 안되는 업적이라고 선전되는 소련 및 중국과의 수교는 1990년 9월과 1992년 8월에 각각 이루어졌다. 즉, 모스크바에 대한 취재는 노태우의 북방외교의 결실에 따라 가능했고, 이들의 취재를 당시 남한 정보당국이 일정하게 피드백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추측’은 퍼슨웹 인터뷰가 가장 피하고 싶은 단어이긴 하지만, 기자라는 집단이 ‘추측’을 빼고서는 도무지 운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따라서 가공 공정에서 몇몇 쏘스들은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 가운데 일부를 오늘 스님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중국-소련-북한’의 삼각관계는 매우 복잡했다. 연안파 및 소련파는 각기 중국과 소련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실질적인 움직임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중국과 소련 내부에서 반김일성 세력분파를 지원하는 ‘외교적 노력’을 취한다는 것은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강상호씨 말고도 몇몇 소련학자들은 소련파들을 비롯한 소련군정 관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실제 1956년 종파사건을 전후해서 ‘중국측에서 김일성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신중히 논의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는 전문가들이 좀 더 객관적으로 밝혀야 할 점일 것이다. 아무튼 인터뷰는 서서히 임계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원경> 그 . . . . 내가 여기서 뭘 말하려냐 하면. 이 사람들은 죽을 때 가지 말 안할려고 하는 것이 있어요. 누가 얘기했어도 첨엔 안할라고 그랬어요. 근데 레베데프가 이야기를 했다니까 이야기를 했어요.

 

퍼슨웹> 아, 박길룡씨나 강상호씨가요?
원경> 네. 박길룡, 강상호씨. 그 사람들 얘기 안할 것은 죽어도 안해요. 뭐냐면 박길룡씨가 . . . 박선생하고 김주석이 1946년 봄에 소비에트로 왔다는 거 말했을 때 . . . 모른다고 하는거야. 딱 잡아떼는 거야. 근데 레베데프하고 만나서 이야길 하고 사진도 줬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얘기를 했으면은 나도 얘기를 할 수 있다 이거야. 그러면서 그 말을 긍정을 하는 거야.

 

퍼슨웹> 분단정권 수립 이전에 선친께서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사실과 월북 시점 등에 대해서는 레베데프의 증언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월북과 관련해서는 혹시 다른 이야기를 들으신 건 없습니까?
원경> 그 당시(1946년 8-9월경) 에… 뭐랄까 … 박선생이 양쪽에서 외압을 느끼기 시작하신거예요. 뭐냐면, 1946년 당시는 국내에서는 그 기반이 미군정청에 의해서 자꾸 압박이 되고, 소비에트에서는 스탈린 원수가 앉혀놓고 공산주의 식이 아니라 세습관계 형식으로 명령을 내려버리니까, 박선생이 그 이야기를 남한테는 털어놓지 못하고 계속 고민했지요. 상층부에서는 김삼룡 선생 정도는 알고 계셨겠죠. 한산스님도 알고 계셨으니까요.
아무튼 그런 게 무척 고민이 되셨던 거 같아요.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정판사 사건으로 해 가지고…  정판사 사건도 강조합니다만, 분명히 밝혀야 할 문제예요. 이건 상당히 심각한 사건인데… 돈 찍어 내는 원판을 총독부에서 미군정청으로 이양을 했거든요? 다른 곳이 아니라. 근데 이게 흘러나왔다는 것이 벌써 첩보작전임을 알 수 있게 해요. 그리고 가지고 가서 찍어냈다면 모르겠는데, 갖고 들어가는 것을 덮쳤다는 거거든요? 그래가지고 이 사건이 터진 거예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 . 돈을 당시에 찍어낼 필요가 없었어요. 저쪽(북한)에서는 조선은행권이 남아돌아가요. 군표를 유통했거든요. 벌써 군표로 조선은행권을 바꿔줄때에요. 그걸 북로자금으로 쓰기도 했지만 남로에도 흘러왔거든요. 그걸 썼지 위폐를 만들어서 그렇게 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거에요. 그 당시 일하는 분이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을거에요.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미군정이 보관하던 원본이 어떻게 흘러나왔겠어요? 사건 조작은 조선은행권을 찍던 원판을 해방이 되니까, 주머니에 넣고 나왔다고 하는데 그건 말이 안되는 거거든요. 해방이 되서도 총독부에서 할 일은 다 했습니다. 문서한장이라도 이 사람들이 다 챙겼거든요? 그런 상황인데 그 중요한 것을 주머니에 넣고 나왔을리 있겠습니까? 아무튼 저는 그 당시 돈을 찍어서 썼다면 몰라도, 원판을 들고 들어가는 것을 덮쳐서 뒤집어 씌우는 것은 좀 납득이 안가요. 어쨌든 그걸로 박선생 체포의 명분이 생긴거거든요. 그 사람들이 다른 명분이 없었거든요.

 

정판사 사건에 관해서 원경 스님은 여러차례 강조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이 임대해 있던 근택빌딩 지하에는 ‘조선정판사’라는 인쇄공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판사에서는 조공의 기관지였던 해방일보를 인쇄하는 곳이기도 했다. 1946년 5월 8일, 조선임시정부 수립 협의를 위해 열리고 있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음을 알리는 호외가 요란하게 뿌려지고 있을 즈음, 해방일보 사장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당원 14명에 대한 은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 체포령은 일주일 뒤인 5월 15일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과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을 비롯한 14명이 ‘정판사위조지폐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내용으로 신문지상에 대서특필되었다. 그 유명한 ‘정판사 사건’이다. 한데, 스님이 왜 이 사건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바로 이 사건이 당시 남한을 점령하고 있던 주한미군정청이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적으로 간주했다는 선전포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실제에도 박헌영은 이 사건을 계기로 주한미군정청에 협조적이던 노선을 전환하여 소위 ‘좌경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강경투쟁으로 돌아선 것이다. 1946년 7월에는 여운형을 비롯한 좌우합작세력에 대해 강경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9월에는 조선공산당 산하의 전평 주도로 철도노동자를 비롯한 ‘총파업’이 발생한다. 그리고 10월에는 그 유명한 대구인민항쟁 혹은 10월 폭동으로 알려진 대규모 저항운동이 발생하였고.

 

박헌영은 그냥 간첩이 아니고 ‘미제의 간첩’이라고 한다. 박헌영과 미군정 간의 대립은 그렇기 때문에 원경 스님에게 중요한 단서가 된다. 물론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황계의 고육지책처럼 적을 속이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연극은 필요하다고 말이다. 삼국지를 열심히 통독했는지 어떤 사람들은 실제 그러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당시 미군정 내부에서도 실제 박헌영을 체포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진지하게 검토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증거가 있다고 해서 쉽게 반대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적을 속이기 위해서는 나도 속여야 하는” 스파이戰의 냉혹한 전략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지만 이 부분에서 진실은 그다지 명쾌하지 않다. 정말 역사는 주께서 하셔야 할까. . . 인터뷰는 본격적인 간첩 사건 관련 이야기로 다시 되돌아간다.

 

퍼슨웹> 좀 전에 말씀하신 내용(소련-중국 내의 김일성 제거계획)은 레베데프나 다른 인물이 어디선가 증언했을 가능성이 있겠네요?
원경> 이런 얘기는 그 당시에 따라갔던 김국후라는 그 사람도 다 메모해 놨어.

 

퍼슨웹> 공개된 적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부친이 처형당한 위치에 대해서는 혹시 못 알아 보셨습니까?
원경> 모른다 그래. 그냥 그 자리에다가 사람들 시켜가지고 자기는 짚차 타고 오고 뒤에 트럭이 따라왔는데, 그 사람들이 다 묻었다고 그래.

 

퍼슨웹> 돌아가실 때까지 내무성 지하였지요?
원경> 예. 내무성 지하 감옥에 있었다고 해요.

 

퍼슨웹> 그러면 내무성 건물 주변에 야산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겠네요?
원경> 뭐, 멀리 나갔겠지요. 근데 박갑동 선생이 여우 처사골에서 고문을 했다고 하는데. . . 그 말도 강상호씨는 뭐라고 하셨냐면은 그 사람이 이렇게 가정을 해. “내가 적인데 날 외지에 산꼴짜기에 끌고가서 고문하고 할 수 있겠냐?” 이거야. 그냥 도망가면 어쩔라고. 제일 안전한 곳이 어디냐고. 내무성이라. 처음부터 내무성 지하감옥에 있었고 내무성 지하감옥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고문도. 그것만 믿지. 그 다음에 그냥 . . . 김일성이가 어떤 사람인데 어디 딴데로 데려가서 신사적으로 고문하고 그러냐고? 연루된 사람을 찾아 가지고 외지에서 족칠지는 모르지만, 박선생은 초창기부터 내무성 지하 감옥이었단 거예요. 죽는 시각까지!

 

퍼슨웹> 처사골 말씀을 하셨는데 또 다른 증언은 선친께서는 내무성 지하감옥이 아니라 외딴 곳에 따로 독립가옥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보호되고 있었다고도 합니다만. . .
원경> 내무성 지하감옥 이야기는 박길룡, 강상호씨, 특히 강상호씨 증언인데. 강상호씨는 비유를 여러번 들어가면서 이야기를 해요. 선생하고 나하고 대립했을 때, 내가 적이라고 하면, 손발들은 어디서 무얼 하든간에 (우두머리는) 어디다가 둬야 안전하겠느냐? 내무성밖에 없다 이거야. 왜냐면 소련자체도 자기들(북한정권)을 옹호하는 것 같지만, 얼마든지 박선생을 빼돌리고 탈출시킬 수 있다 이거야. 해서 소련 군부에서도 터치하지 못하는 곳이 내무성밖에 없다 이거야. 그걸 강조하면서, 내무성 지하감옥이 확실하다는 거야. 그러면서 뭐라는가 하면, 내가 한국에 나가서 학자들과 대화하고 싶은 것은 이런거다 이거야. 난 논리적으로, 내 이야기를 교환하고 토의하면서 정의를 내리고 싶다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때는 스탈린은 이미 죽은 뒤고. 해서 주석도 불안했을거에요. 그래서 손발을 이미 짤라버리고. 그리고 갑자기 또 생각이 나는건데, 박길룡씨 이야기 가운데 “박선생, 요건 기억하시요!”라면서 한 이야기가 있었어요. 재판하는 걸 봤다고 합니다. 재판을 봤는데, 말끔하게 양복을 입고 나오셨다고 합니다. 딱 했는데, 일체 뭐 답변은 않다가. 사형언도를 내리니까 안경을 벗어서 그냥 재판장한테다 박살을 내버리더라 그래요.

 

퍼슨웹> 북한에서 나온 공판관련 기록과는 전혀 다르군요.
원경> (강상호씨는) 이 부분을 몇 번이고 강조했어요. 그 말고도 주석께서 김일성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37년이라고 했다고 그래요. 소련에 와 가지고 사용했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인터뷰 내용에도 나왔듯이 관련 테이프를 아직 복원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박길룡, 강상호, 레베제프, 그리고 샤브시나 등 여러 인물들이 증언한 내용은 거의가 당시 스님의 기억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중앙일보사가 발행한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용에도 스님의 이야기와 중복되는 부분이 상당부분 실려있는데, 인터뷰어가 놀랐던 점은 스님이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아직 녹취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증언에 목말랐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만남이 스님에게는 몇 십년을 기다려온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는 점을 의미할 것이다. 인터뷰어가 계속해서 중앙일보사에서 펴낸 책과 비교하면서 확인을 요구했기 때문에 인터뷰 막바지 스님은 그 책을 꼭 한번 봐야겠다고 넋두리처럼 말했다. 아마 중앙일보사에서 스님께 그 책을 보내지 않았었던 모양이다.

 

 

8. 부자유친

사실 박헌영 간첩사건과 관련한 내용이라면 다른 사람들, 1차 증언자들을 만나는 것이 훨씬 더 빠른 길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 ‘역사’를 위한 자료수집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퍼슨웹은 그 작업과정에서 몸부림 치고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원경스님을 찾아간 것은 스님 자신의 역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스님이 바라보는 혁명가 박헌영, 스님이 이해하고 있는 현대사, 이런 것도 의미 있겠지만 한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그의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자신의 이야기를. 
이제 정말 스님에게 물어야 할 질문들을 풀어놓아야 할 시점이 왔다. 비웠던 물컵을 채우고 단숨에 들이켰다.

 

퍼슨웹> 스님. . .언젠가는 부친께서 처형당한 곳을 한번 찾아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경> 뭐. . . 그 시신이야. 살과 뼈는 흙으로 돌아가는 거고. 부처님 말씀처럼 말이야. 바람결에.  . . . 예산에 가면 선영이 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는. 근데 난 거기도 않가요. 뭐 난 정감도 없고 추억도 없고. . . 단, 나는 부처님 전에 아버지 제사만 지냈지만, 철든 후부터는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도 같이 지내요. 항상. . . 큰아버지까지. 그저 영령들이 그저 이승에 연연하지, 집착하지 마시고 좋은 국토에서 태어나 가지고 좋은 몸 받아 가지고 . . .  좋은 세상에 봉사나 하시라고 추도나 할뿐이지. 근데 그때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큰할머니 할아버지는 합장을 하고, 작은 할머니 그러니까 내 친할머니는 따로 있거든. 이걸 우리 박대희라는 조카가 있는데, 이 집안도 아들이 없어. 대가 자꾸 끊겨. 그래서 좀 가까운 곳에 합장을 하고 세 분 합장을 하고. 그 옆에 가묘를. . . 우리 풍습은 객지에 가서 돌아가시면 가묘를 하나 만듭니다. 돌에 이름 약력이라든지 써서. 훗날에 시신이라도 찾으면 그렇게 할려고 했는데. . .  그래서 땅마지기라도 준비해서. . . 나도 자손이 없으니까. 죽은 이후에 이거라도 북쪽에 있는 아들이 하나 있으니까, 그 아이가 언제라도 통일이 돼서 혹시 뿌리라도 찾아 온다면 . . . 그러한 거라도 하나 남기고 싶은 생각은 있었어요. 근데 언제부턴가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전집. . . 이거는 아무리 생각해도 할 사람이 없어요. 자손이 있어서 그 자손이 학문을 해서 그 분야를 밝힐 거 같지도 않고. 지금까지 뭐 여러 가지 오류도 많고 . . . 그분을 가지고 어떻게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시대에 따라서 자꾸 오류가 생겨서. . . 그래서 자료가 우선이다. 우선 자료라도 묶어놔야겠다. 묶어놔야지 나중에 누가 비판을 하든 말이지. 자료가 있는 걸 놓고 해야지. 아무리 뭐한 학자라도 자료가 있는데 함부로 자기 이름을 더럽히겠는가? 근데 어디서 누가 엉뚱한 이야기를 한 걸 듣고 자기 나름대로 필력만 믿고 휘두른다면 . . . 이건 아무리 자식으로 내가 학문이 없고 무식하지만 이건 안되겠다. 그래서 전집을 . . . 전집이라고 생각도 안 했고 자료를 모아서 한데 묶어놔야겠다. 그런거예요.

 

퍼슨웹> 시대에 따라서 여러 가지 오류가 있었다는 것은 연구자들이 새겨들어야할 거 같네요. . . . 선친과도 애증관계가 좀 있는데 . . . 조봉암  선생님 따님도 진보당 사건과 관련해서 재심청구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요. 제 느낌입니다만, 스님께서 자료를 모으시는 것은, 당장이 되었건 훗날이 되었건 아무튼 객관적으로 연구자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자료를 토대로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대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예컨데 ‘역사적인 재평가’ 같은 것을 기대하시는 것으로 느껴집니다만. . .

 

박헌영이 상해에서 활동할 때부터 조봉암과 박헌영은 밀접한 관계였다. 활동 초기부터 알게되었던 이 두 인물은 이후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박헌영이 줄곧 공산주의 운동의 한 가운데 서있었던 반면, 조봉암은 해방 후 인천에 칩거하면서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1946년 5월 정판사 사건이 있을 즈음, 미군 CIC(방첩대) 공작으로 조봉암이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비판하는 편지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둘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이후 조봉암은 ‘전향’하게 되었고, 결국 초대 이승만 정권의 농림부장관으로 입각하였다. 그렇다고 조봉암이 염치불구한 우파정치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승만 정부의 유일한 치적(?)인 농지개혁의 디딤돌을 놓았으며, 이후 진보당을 토대로 남한 진보정치세력의 구심으로 다시 한번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때가 박헌영이 처형되었던 1956년을 전후한 시점이었다. 최근 진보당 관련 희생자들에 대한 재심 청구 움직임이 조봉암의 유족을 중심으로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사법적 再考노력 뿐 아니라 진보당은 이미 학계에서는 많은 부분 복권되어 있다. 따라서 인터뷰어는 이 두 인물을 나란히 언급하면서 스님에게도 『전집』작업이 재심 청구까지는 아니겠지만, 그와 유사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냐고 하는 ‘섣부른’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런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저널리스틱한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짧지만 날카로운 죽비소리가 인터뷰어의 목뒤를 가로지른다.

 

원경> 아니죠. 그렇게는 생각 안하시는게. 그렇게까지 생각 안하시는 게 좋을 거 같고요. 조봉암 선생같은 분은 국내에 남아가지고 남과 북이 갈라진 이후에도 남아서 그렇게 (활동을) 했다가, 그 당시 시류에 의해서 가셨지만. 나는 아까도 말씀 드렸는데 잘못 이해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분(박헌영)을 복권을 한다든가, 재조명한다든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세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들이 한가지 말을 듣고는 다른 곳에 가서 그 말을 다른 말로 바꿀 수는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또, 학자들한테 뭐가 나오면 내가 내 나름대로 . . . 내 지식대로 상식선에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유가 아닙니까. . . . 지금도 그런 학자분들이 교수님들이 몇 분 계세요 . . .

 

그렇지만 그런 것은 내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거든요. 그 분이 다시 그걸(자료) 보고 더 험난하게(비판적으로) 질책을 하던가 하는 것은 제가 관여할 부분이 아닙니다. 이걸(자료집편찬을) 내가 그런 목적을 두고 하는 것은 아니예요. 시대에 따라서 한다는 것은 자료가 없으니까 그래요. 학자들한테 이런 말씀을 드려서 그분들한테 누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 . . . 어떤 분이 그 분도 교통사고로 죽었지만, 그 분도 김철수를 만나서 뭘 했어요. 근데 김철수 이 양반도 내가 옛날부터 찾아가서 만나고 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양반도 뻔한건데 이걸 가지고 소설적인 이야기로 논문을 썼는데 . . . 이게 소설인지 논문인지 . . . 그런 경우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래도 내가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이렇게 자료가 버젓이 묶어져 있을 경우에는 엉터리로 쓸 수 없으니까 이런걸 내가 방지하자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자료를 가지고 감히 그 . . . 뭐했을 때 내가 ‘아’를 ‘어’로 고치고 그랬을 때. . . . 자료를 본 사람들은 뻔히 다 아는데. 자기가 뭐가 필요해서 어떻게 바꿀 수는 있겠지만, 그건 자료가 없을 때 그렇게 써놓고 나중에 자료가 발견되면 그때는 내가 자료가 없어서, 증거가 없어서 오류를 범했다고 할 수 있지요. 요런걸 난 방지하고자 하는 거지요. 다른 건 없어요. 

 

이 즈음에 와서는 스님의 말이 자주 끊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소리도 가늘게 떨렸고… 

 

퍼슨웹> 제가 속인의 시선으로 봐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스님께서도 작년에 정상회담이 진행되는 것을 보셨텐데,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특별한 감상이 있으셨습니까?
원경> 다 똑같죠 뭐. 국민이라면. 저는 . . . 분명한 건 있어요. 제가 매일 부처님한테 올라가면 모든 것을 절차를 끝내고 마지막 축원을 올리는 것이 있습니다. 제일 첫 구절이 그래요 ‘유아조국, 나의 조국, 남북통일, 자주독립’ 이걸 전 항상 부처님한테 축원합니다. 요즘은 경제가 안좋아서 ‘경제성장, 국태민안’ 나라가 좀 안정됐으면, 또 경제가 발전되서 여러 사람이 걱정을 덜 했으면 해서 첫 구절에 축원을 합니다. 그러고 죽기 전에 제가 원하는 것은 ‘통일’이죠.
비유를 든다면 여러분들이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면은 먼저 와있던 분들이 세상 소식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죽은 후에도 선현들을 뵙게 된다면 통일된걸 다 봤다고 혹시 전해준다면 좋겠고. 단 통일 과정도 정상회담이 어떻게 이루어졌든 똑같은 마음이에요. 국민들이 느꼈던 마음하고 여러 선생님들이 느꼈던 마음하고 저도 별다를 수는 없지요. 그렇지만 서로가 좀더 진솔하게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이렇게 . . . 뉴스로 보니까 미국이니 일본이니 중국이니 소련이니 이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남북이 두 동강이가 된 것이지 . . . 우리 민족이 서로가 마음이 뭐하고 내 것 찾고 저것 찾고 해서 두 동강이가 된 것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국민끼리 자주적으로 통일의 날까지 제대로 간다면 그건 더 할 수 없이 좋은 것이고. 이 생각은 다른 분들도 공직에 있든 사업을 하든 모든 사람들이 같은 마음일꺼예요.

 

퍼슨웹> 통일되면 혹시 북한에 있을지도 모를 다른 형제들을 볼지도 모르는데, 그 희망을 갖고 계시는 거구요?
원경> 그런 희망은 … 그 … 가족들이 사촌형수 되는 사람이, 어린 시절에 여기서 결혼했던 사람이 있는데. . . 이 사람도 지금 스님이예요. 여승이 되가지고 이제 노인이 됐는데 … 혹시라도 남북이산가족이 되서 서신이라도 연결될까 하고 뭐했다 그래서, 내가’ 뭐 그딴 짓거리하지 말라’고 했죠. 왜냐면 모든 사람이 만날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고한데. . . 제가 만일 형제를 만난다면 정치적으로 이상하게 남의 이바구꺼리밖에 안되요. 그래서 저는 지금은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마음 속에야 어떤 보상을 치르더라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만나고 싶은 거야 인간인데 왜 없겠습니까? 허지만은 . . .
나는 그래도 지금까지 남한에서 … 부처님 품안에서 잘 지냈습니다. 허지만 저짝은 어떤 세계인지 나는 아직도 상상이 제대로 않되요. 근데 그 사람들이 지금까지 나름대로 어떤 상황 하에서 자기들이 충성을 다하고 살았을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불거져 가지고 또 다시 뭐 한다면, 아무래도 좋은 거 보다는 나쁜 것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우리 친척들한테도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했어요. 무슨 짓거리냐고? 죽어서 만나면 되는 거고,  언젠가는 통일이 돼서 아무관계가 없이 서로가 찾아서 수소문해서 그 정도의 자유가 이루어진다면 그땐 만나도 좋다. 한 다리 건너서 만나야 되고 두 다리 건너서 만나야 되고, 정치적으로다 상황을 앞세워 만나야 되는데, 이건 난 저쪽에 있는 아이들한테도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퍼슨웹> 혹시 있을 지도 모를 . . .
원경> 분명히 큰 아이가 여자 아이고 밑에 아이가 아들이예요. 아들 이름은 세르게이. 큰 아이는 나타샤.

 

퍼슨웹> 생존해 있을 거라는 건 확신하시는 거지요?
원경> 그렇습니다. 누누이 들었기 때문에요. 아버지한테 (북한에 남겨놓은 이복동생들이 있다는) 이런 얘기를 . . .  자식이 살아 있을 거라는 얘기를 부정한 적이 있어요. 김남식 선생 같은 분들은 고개를 흔들고 그런 적도 있지만은.

 

퍼슨웹> 스님께서는 지금까지 선친에 관한 연구나 남로당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자들도 많이 만나보셨겠지요?
원경> 저는 그런 거 때문에 사람을 일부러 만나지는 않아요. 또 누가 그런 문제 가지고 이렇게 찾아오는 것도 좀 꺼려요. 전에 누가 한번 논문을 쓰는데 문제가 좀 있어서 자료도 없고 뭐도 없고 하다고 어려운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런 문제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고. 난 뭐 아무 것도 모른다고 보냈지. 지금도 그런 사람 많아요. 아는 사람 몇 분들이나 신문에 흘러간 이야기라도 기억에 남아 있나봐요. 지금도 ‘내가 누구 아들이다’ 이런 것도 별로 . . . 왜냐면 그렇게 하면 나에 대해서 그 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남아있는 그 박헌영이란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위에 수없는 사람이 쓰러졌는데, 이 사람들 . . . 나쁜 짓만 한 걸로 사람들은 알거든요. 더러 또 혹자는 다른 각도에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은. 그래서 그런 것은 아예 상기를 안시키는 것이 좋아요. 제가 인터뷰같은 것도 꺼려하는 것이 그런 겁니다. . . .

 

퍼슨웹> 여러모로 오늘 저희가 행운이라는 생각이 생각듭니다. 스님의 말씀 도중에 약간 비추셨는데 …  아무래도 스님께서 선친을 의식하고 남로당 당수였던 인물의 후손으로써 살아가는데 불편하셨을테고 … 어려웠던 것도 많았을텐데 … 또 속인이 아니라서 욕심도 안가지고 양보도 많이 한다고 하셨는데, 그게 선친과 관련된 스님의 살아가시는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이 2001년인데요, 지금 상황에서도 외람되지만 … 남한에서 혁명가 박헌영의 아들이라는 것이 부담스러우신가요?

 

인터뷰어의 질문도 쉽게 나오지 못한다. 이 질문은 스님의 잔인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할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인터뷰어 스스로는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조금은 있다고 생각했다.

 

원경> . . .예 … 부담스럽죠… 부담스러운데… 제 자신으로서는 부담스러울 건 없어요. 그런데 세상사람들이 안다는 그 자체가 부담스러워요… 그 어른처럼 제가 어떠한 분야에 절에서 그저 열심히 도만 닦아서 성취를 했다거나, 아니면 사회 한 구석에서 사회활동이라도 봉사활동이라도 해서 한길로 갔다 뭐 이런 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또 학문을 해서 이룬 것도 없고. 또 사업을 해 가지고 사회에 환원 시킬만한 뭐가 있는 것도 없고… 제가 참 많이 괴로워했던 적이 많아요… 탁하면 ‘저 새끼 빨갱이 새끼. 아무 게 자식’ 그런 식으로 절 괴롭혔던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저는 봅니다. 그런데 그런가하면 또 ‘저 자식 가짜래요. 박 선생 아들 아니래’ 그러기도 해요. 기든 아니든? 그것도 또 이게 다 절친한 사람들한테 다 나온 말이예요. 가까운 사람들한테 …

 

여기서 스님은 오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목을 여러 번 축이고 나서 힘들게 입을 열었지만, 한번 잠긴 목은 잘 풀어지지 않았다.

 

원경> 옛날에 어떤 사람, 가까운 지인인데… ‘박선생 아들 아니다’라고 해서. 그 사람이 그렇게 얘길 할 수가 있냐고. 내가 그래서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지금 와서 그런 얘기를 했다면 몰라요. 벌써 한 20년 전에 … 20년도 넘었지. 그 사람 표현은 … 그 사람 아들이라고 해서 세상에 누가 알아 줄 것도 아니고 뭐 좋은 것도 아니고. 그 사람 욕을 하면서요 …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하고 욕을 하는거에요. 다른 사람이 그 사람보고 욕을 하는 거지요. 이름을 밝히면 그러니까… 이 사람이 자기가 망신을 당한 적이 있어요. 근데 난 개입한 적이 없어요. 자기가 뭐 독립군 자식이라고 하면서, 지금도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말 하다가 나중에 들통났어요 … 자기가 그런 거짓말 해 놓고 왜 … 요게 인간관계란 것이 참 … 묘해. 근데 그 양반도 … 내가 노골적으로 그랬어요. 아 지금도 만나면은 끌어안고 그냥 그래요. 나한테는 몇 년 선밴데. 

 

기획단계에서 퍼슨웹 기획팀은 인터뷰의 컨셉을 분명히 하자고 했다. ‘비극과 영광의 대물림’ 이 선정적인 컨셉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전적으로 인터뷰어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퍼슨웹> 지금 드릴 질문은 퍼슨웹에서 애초 스님과의 인터뷰를 기획할때에 나왔던 궁금증인데 … 말씀을 꺼내기가 좀 뭣합니다만… 김일성 주석과 박헌영 선생은 1945년 이후 남북을 대표하는 좌파였습니다. 라이벌 관계 뭐 이런 표현이 어울릴진 모르겠지만요. 이젠 김주석도 죽었고 선친께서도 이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속인들은 이 두 인물을 비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스님께서는 혹시 그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스님의 감회는 남다를 거 같습니다만.
원경> 거 참, 어려운 얘긴데요… 잘못 하면 정치적 얘기가 되고… 근데 김일성 주석과 학자들은 그렇게 보고 있거든요. 김일성 주석과 박헌영 선생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박헌영 선생이 …

 

원경> 제가 이런 말씀 드리면 뭐하지만 …  지금 시점에서 이루어 놓은 것이나, 인물 면으로 본다면 박선생과 김일성 주석은 어울리지 않지요. 택도 안될 정도로 주석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주석은 대단한 사람입니다만…

 

뱉어놓은 질문을 다시 주어담고 싶을 정도로 스님은 말을 자주 끊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속마음을 내비칠 수 없는, 사랑의 열병을 앓는 사춘기 소년처럼 스님의 표정은 고통스럽고 또 순박해 보였다. 마이크 전원을 꺼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누를 수밖에 없었다.

 

원경> … 그 당시는 박헌영 선생은 김일성 주석 같은 분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안중에 없고. 지금 다들 김일성 주석하고 박헌영 선생하고 싸움해서 뭐 했다고 하는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박헌영 선생하고 스탈린하고의 싸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전부 다 잘 모르고 있어요. 

 

여기서 다시 스님은 말씀을 놓으셨다. 

 

원경> … 한산스님이 늘 하신 말씀이 있어요. 박선생께서는 당신의 펜대 하나면 모든 걸 끝낼 수 있다고 하셨답니다. 당신의 「정책입안보고서」를 수정하기만 하면 . . . 그래서 이것을 저는 꼭 찾을려고 하는 것입니다.

 

9. 끝나지 않은 역사

원경스님과의 인터뷰는 크게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왔다. 첫 번째 축은 ‘사람’으로서 한산스님이었고 두 번째 축은 ‘자료’로서 「정책입안보고서」였다. 원경스님이 인터뷰 첫머리에 꺼내놓았던 「정책입안보고서」는 인터뷰의 마무리를 위해서 다시 등장하였다. 내키지 않은 질문을 던진 터였고, 그 때문에 다시 이 문제로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퍼슨웹> 어찌보면 스님께서 10년 가까이 『전집』 출간 작업에도 지치지 않고 추진할 수 있게 했던 신비로운 힘과 같은데, ‘김일성이 아닌 스탈린과의 투쟁’, 그리고 「정책입안보고서」와 선친께서 말씀하신 “펜대 하나면 끝난다”는 말의 의미를 좀 더 설명해 주시죠. 그 말씀은 결국 선친에게 내려진 ‘간첩, 내란음모 혐의’와 무관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
원경> 네. 이 이야기도 제가 옛날에 한산스님한테 들었던 건데… “옛날에 김주석 정도는 박헌영 선생 당신은, 펜대 하나면 끝난다”고 하셨답니다… 뭐랄까, 내란 음모라는 것은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내란음모에 대한… 모의라고 할까…  이런 것이 있었던 거 같아요. 이 말이 나온 것이죠. 제가 지금 정리해서 생각해 본다면 , 왜 이 말이 나왔냐고 하면, 이때 개입한 사람이 남로당 사람들이 음모한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들이 뒤집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을 때 거기에 이강국 선생이 아마 관여가… 관여라기 보다는 이강국 선생을 끌어들였던 거 같아요. 그 모의를 주도했던 사람들이. 그러니까 소련파도 있었을 거고, 연안파도 있었을 건데. 이게 참 엄청난 이야기거든요. 이 이야기를 이강국 선생은 그래도 박헌영 선생에게 보고를 안할 수 없었던가 봅니다. 해주에 계실땐데. 그때 한산스님이 같이 계셨답니다.

 

퍼슨웹> 이 말씀은 박길룡이나 소련에 계신 분들의 증언이 아니라 한산스님께 직접 들은 이야깁니까?
원경> 그렇습니다. ‘펜대’라는 언급이 나와서 제가 다시 확인하는 겁니다. 그때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 “나는 그런 식은 싫다. 그런 생각이 나한테 있다면, 난 펜대 하나면 끝난다.” 그래서 한산 스님은 “박헌영 선생은 자리 하나를 두고 정권을 잡기 위해서 김주석과 뭐(대립)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하고 줄다리기에서 (선생의) 고집 때문에 망한 사람이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당시 박헌영 선생이 고집을 꺾어도 스탈린이 (정권을) 당신한테 주지 않는다는 것을 박헌영 선생은 벌써 아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자기 고집을 . . . . 남북을 갈라서는 안된다는 것을 끝까지 스탈린에게 강조하신 겁니다.
 “나는 북쪽만 원하지 않는다!”
저쪽에서는 제일 급한 사람이 베리야에요. 스탈린이 김주석을 심어놓은 게 아닙니다. 베리야 작품이거든요. 스탈린 원수는 그래도 세계를, 대국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스케일이 작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자기 고집대로 밀고 나가는 그런 건 있지만, 안목은 큰 사람이거든요. 스탈린은 계속해서 KGB, 군부, 외교 쪽 등등에서 들어오는 보고서를 보거든요. 그래서 그런걸 보다보면, 박(헌영)의 생각이 어떤 건지 알 수 있거든요. 남쪽에서는 활동을 못하고 북쪽에서는 더부살이 하고…  자기 뜻대로 갈 수 있나 없나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던져 본거지요. 지금 정리된 너의 생각을, 보고서를 올려라. 이것이 북쪽에서(북쪽에 있을때) 보낸 「정책입안보고서」입니다.

 

스님은 결국 남북 분할에 이은 김일성 정권의 수립 계획이 베리야에 의해서 처음부터 구상된 것이라고 추측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박헌영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은 인물이 베리야라는 뜻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스님에게 더 자세하게 묻지 못한 점이 아쉽다. 누구의 증언이었는지. 어쨌건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스님이 ‘음모의 주도자’라고 간주했던 베리야 자신도 박헌영과 유사한 죄명으로 처형당했다는 점이다. 스탈린이 죽은 직후 ‘삼두체제’의 일원으로까지 간주되었던 베리야의 권력은 채 넉달을 넘기지 못했다. 정권전복, 제국주의의 스파이, 러시아를 자본주의화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소비에트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소환되어 심판받게 된다. 당시 그는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내무상이자 KGB의 전신인 내무인민위원회의 총수였으며, 숙청을 주도했던 인물은 스탈린의 후계자로 유력시되던 말렌코프와 후르시쵸프였다. 

 

퍼슨웹> 그게 스님이 찾고 계시는 두 번째 「정책입안보고서」군요.
원경> 그렇습니다. 근데 거기서도 크게 변한 것은 없는거 같아요. 분명히 미국을 우방이라고 표현을 했고. 우리를 해방시켜준 똑같은 동등한 우방이다. 이런 표현은 (해방 직후의) 초창기 활동에서도 계속 나오거든요.

 

퍼슨웹> 확인을 위해섭니다만, 분명히 그건 남북 분단 정권이 수립되기 이전 그러니까 1948년 8월 이전이겠네요?
원경> 그럼요.

 

퍼슨웹> 아마 1947년 하반기 어느 시점에서 작성되었겠군요.
원경> 왜냐면 (스탈린이 김주석과 박헌영을) 앉혀놓고서도 명령을 할 때, 우리가 지원해주는 것은 . . . 일단 김주석에게 이양권을 준거에요. 그러다 오류나 시행착오가 있을때는 박헌영 선생이 준비하고 있다가 바로 넘겨받는 것을 생각했답니다.

 

퍼슨웹> 지금 말씀은 레베데프의 증언이지요?
원경> 그렇습니다.

 

퍼슨웹> 이 부분 역시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록하고 있는 레베데프 증언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중앙일보에서는 스탈린이 박헌영과 김일성을 면접했다는 사실만 나와있습니다. 김일성을 북한정권의 책임자로 지목했다라고만 나와있거든요.
원경> 그건 자기들(중앙일보)이 어떻게 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북쪽을 의식하고 쓴 거예요. 김국후씨가 논문을 쓸려고 하는 것도 아마 그런 거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말씀 드린 내용을 김국후도 전부 메모해뒀어요. 아까 말씀드린 그 자료를 안 내놓는 것도, 자기 나름대로 하나를 써야겠다 이거지요.

 

퍼슨웹> 이 부분에 대한 증언은 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무튼 더 자세합니다.
원경> 그 증언도, 레베데프란 사람이. . . 사진이고 뭐고 대부분 그분한테서 나왔어요. 많았죠. 자료가.

 

퍼슨웹> 박선생께서 김주석은 펜대하나면 가능하니까 내란음모니 뭐니 신경 안쓴다고 하신건 . . . 스탈린에게 보고를 한다는 뜻인가요?
원경> 그 뜻이죠. 내가 당신 뜻에 순종하겠노라고 하는… 그겁니다. 그러니까 스탈린 생각, 순종하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다 알고 있는데도. 욕심이 과하다면 과한건데 … (박선생은) 남북을 전부 공산주의로 만들겠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전쟁을 일으킨 근본원인을 박선생한테 있다고 하는데, 박선생은 그건 또 아니라고 그래요. 뭐랄까, 가오마담 형식으로 참가를 한 것 뿐이지. 근데 남로의 20만명 어쩌고 (하면서 開戰을 앞장서서 주장했다고) 하는 문제는 … 그런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해요. 말하자면 전쟁이 났다고 하면 와해됐던 사람들이 다시 뭉칠 수 있다. 뭐 그런 건 당시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그럽니다.

 

퍼슨웹> 이 부분은 한산 스님께서 말씀해 주신 건가요?
원경> 네. 그래서 자꾸 내란음모를 준비했다고 하는데, 박선생은 끝까지 내란음모 혐의를 부인한 것이 그러한 뜻일 겁니다. 근데 그 이야기가 왜 나왔냐고 하면, 이쪽 보고를 가지고 가서 보고할 때였는지 어떤 때인지는 잘 몰라도 아무튼 그 자리에 한산스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비밀스러운 이야기라고 해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산스님은 꼭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피하게 하더라도 말이지요. 아무리 비밀스런 보고가 있을 때라도 한산스님은 같이 동석했고, 그 문제에 대해 상의하고 했다고 그럽니다. 그 과정에서 박선생이 정리를 해서 결과를 주면 한산 스님이 갖고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아무튼 최종적인 것은 한산스님이 전달했다고 합니다. 한산스님 말로는 김소산도 그 당시에는 상당한 핵심부분에 있었다고 합니다. 한때는 박선생 딸이니 뭐니 했다고 하는데… 제가 누구한텐가 들은 기억이 있는데. 근데 나이를 봐서는 딸일 수는 없지요…
중앙일보에서 나온 걸 한번 봐야겠는데요. 김국후가 분명히 … 제가 아마 (중앙일보 책을) 보면 누구하고 어디에서 나눈 이야기란 걸 분명히 떠올릴 수 있을거에요. 그때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데, 안한 부분은 어떤건지… 근데 그 책은 아마 북쪽을 의식하고 쓴걸겁니다.

 

퍼슨웹> 1991년도에 나왔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북쪽보다는 아마 안기부쪽 때문이겠지요. 안기부와도 출판 전에 벌써 협의를 했겠지요. 어느 선, 어느 수준으로 정리할지에 대해서는요. 아무튼 스님이 들었던 증언을 바탕으로 하자면 내란음모에 관한한 소비에트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봐야겠군요?
원경> 좀전에 말했다시피, 1946년 스탈린 원수가 김주석하고 박헌영 선생을 소련으로 불러 들였을 때, 앉혀 놓고 명령을 내려요. “김주석은 일단 살림을 맡아라. 그리고 만약 오류가 생겼을 때는 바로 박선생에게 살림을 이양한다.” 그게 스탈린 말이지!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말도 않되는 소리지! 왕조 국가도 아니고. 소련에서 그렇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박선생은 거기서 동분서주했던 겁니다!

 

이 대목에 이르러 스님은 인터뷰 초반과는 확연히 달랐다. 스님이 상당히 ‘흥분’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상기된 표정도 그랬지만 스님 앞에 놓인 물컵에 물을 따르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방안에는 마치 스님 혼자 존재하는 것 같았다. 녹음기도, 사진기도 인터뷰어들도 모두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다.

 

원경> 김주석을 치려면 소련군부하고 마찰은 물론 . . . 당신도 목숨을 걸고 했으면 뭐 했겠지만은 . . . . 소비에트는 벌써 해방 前, 해방 전에 벌써 김주석을 만들고 있었어요. 뭐냐면 김주석이 그 소련군들이 진주를 할 때, 해방 전에 참전을 해야만 입지가 서기 때문에 이 양반은 참전을 해요. 소비에트에선 못하게 하는 데도. 그래 참전하러 가요. 소비에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줄 아십니까? 명령을 해요. 체포해 오라고! 너는 딴데 써먹을 데가 있다는 거야! 그때부터 벌써 소비에트에서는 설계를 했었어요. 남북한 갈라놓을려는 작정을 다 해놓은 것이고 . . . 그래서 체포되서 가요! 김주석이! 체포되서 소비에트에 들어가서 소비에트가 진군했을 때 원산으로 해서 다시 들어와요. 이게 베리야의 작품입니다. 스탈린 원수가 . . . 그 많은 사람을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얼마나 죽였습니까? 우리 나라의 그 유명한 김단야 같은 선생님도 그 당시 쓰러져 가요. 한국인을 죽일 때 일본인하고 구분하기 힘들다고 죽였던 사건이예요. 37년도, 38년도 대숙청 사건. 따지고 보면 (그들은) 모두 코민테른 식구들이예요.  물론 코민테른 식구들을 다 죽인 것은 아니지만 코민테른과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간첩죄로 몰아서 다 죽인거예요. 당시 박선생도 소비에트에 있었다면 죽었을 꺼예요!
그래서 이 어른은 당신 동지들한테도 얘기를 못한 것이 있어요. 내가 지금 어떻게 하겠다는 이 구상을 당시 정책위반보고서를 수정만 하면 북쪽 하나 처리하는 것은 끝난다는 말씀을 오죽이면 했겠습니까? 그래서 한산스님은 세월이 지나서 스탈린이 원했던 정책입안보고서를 찾아라. 북쪽에서 또한번 스탈린이 원했어요. 그래서 이걸 보냈어요. 이게 소련 대통령 문서보관소에 있을 거다 말이야!

 

1930년대 중후반 소련에는 광범한 영역에서 대규모의 숙청이 일어난다. 1934년 12월 레닌그라드 당 지도자인 키로프의 암살을 계기로 1936년과 38년에 절정에 올랐던 이 광풍으로 지노비예프와 카메니프, 부하린 등, 우리 귀에도 익숙한 볼세비키들이 희생당하게 된다. 기이하게도 당시 재판에 회부된 대부분의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유죄를 순순히 인정하고 사형언도를 받았다고 한다. 그 혐의는 반역자 트로츠기와의 관계, 반혁명음모 그리고 해외에 있는 쏘비에트 적과의 반역적 동맹이었다고 한다.

 

얼마 되지 않지만 몇몇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느끼는 점이 있다. 인터뷰어는 결코 인터뷰이를 격앙시켜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걸 노리는 사람들은 많다. 그래야만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측은한 사람들이다. 어떻게 하든 상대를 격앙시키고 고조시켜 의도하지 않은 이야기를 토해 내게 만들어야만 하는 직업이 꽤 있다. 그런 상태로 몰아넣기 위해 때로는 협박하고 때로는 동정하고 또 마치 스스로가 인터뷰이에게 동화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과장된 몸짓과 표정을 곁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의도한 ‘대답’을 듣게 되는 순간, 이 ‘연출의 귀재들’ 얼굴에 스치는 짧지만 차가운 미소를 보게된다. 장담하지만 그것은 분명 사람의 표정은 아니다. 스님의 목소리와 표정이 고조될수록 불안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퍼슨웹의 인터뷰어는 사람의 얼굴을 가져야 한다. 거울이 있었다면 인터뷰어의 얼굴을 비추어보고 싶은 순간이었다. 준비해간 질문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지만 이젠 정말 인터뷰를 끝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퍼슨웹> 사회주의 북한을 건설해 나갔던 김일성 주석의 활동에 대한 평가와 선친과의 경쟁 관계에 있던 김일성에 대한 평가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 하십니까?
원경> 저짝 김정일 위원장은 . . . 그때 우리 김대중 대통령께서 가던 전날, 아마 초상집인데. . . 아, 이수인! 초상집에 오기 전에 우리 연구소 사람들이 술을 몇 잔 먹다가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서 얘기 하길래 내가 웃기는 소리들 하지 말라고 했지. 당신들이 아무리 학자라도 그런 눈으로 사람봐서는 안된다. 그날 이수인 초상집에서도 교수들 하고 얘기를 하다 보니까, 참 허무맹랑해. 그 양반은 준비된 사람입니다. 우리 왕조 시절에 세자 승계하듯이 그렇게 준비된 사람이예요. 여러분들도 똑같이 그런 위치에서 준비되면 그렇게 됩니다. 옛날에 왕조시절에 세자교육 어떻게 시켰습니까?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서 준비과정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쉽게 외신으로 들어 온 것 몇 가지 정도 가지고 평해요? 앞으로 봐요. 얼마나 놀랄 일이 많은가. 대단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에요. 그치만 자기 모습을 다 안보일 거라고 내가 했어요. 그 체제가 우리체제하고 다르니까. 보일건 보이고 안보일건 안보이고. 그렇게 준비된 사람을 내가 감히 뭐라고 평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우리 대통령이 우리 체제에서 준비된 사람이라고 꼽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모든 운동하는 사람들한테 제가 옛날에 그랬거든요. 학생운동 할 때 운동을 하더래도 왜 서울에서만 하냐? 너네 고장으로 가서 느 고장을 장악해라! 거기 가서 해라! 나 그랬던 사람이예요. 어떤 때는 (고향에 가서) 모도 심어주고, 할 일이 많단 말이지. 모든 것을 하루 아침에 이룰려고 하지 마라. 그러고, 또 전국민이 연계를 할 때는 연계를 하고 말이지. 난 그랬었어요. 한데, 우리 대통령은 준비는 됐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그걸 따라갈만한 준비를 못했고 양심, 도덕성이 결핍되 있고 해서. . . 뭐 할려고 하면 잘 안되고. . . 저쪽은 그래도 우리 보단 좀 나은 것이, 일단 명령계통이 우리처럼 자유가 많지 않으니까. 그래서 두 분다 준비된 사람이 만나서 하니까. . . 우리가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통일의 날까지 모두가 협력해서 갔으면 그런 생각입니다.

 

퍼슨웹> 자연인 원경으로써 못다 이룬 꿈이나 계획이 있으시면 마지막으로 해 주십시요.
원경> 지금 제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다 푸념이고, 다 푸념이에요. 허. . .

 

오랜 동안 숨 쉬는 것을 참은 사람처럼 스님은 길게 숨을 한번 들이키고, 천지가 꺼질 것 같은 한숨을 또 뱉는다. 방안에 있는 사람들의 숨통을 틔워주는 듯 했다.

 

원경> 제가 하고 싶은 건 일단은 『전집』이고. 거듭 거듭 나오는 이야기가 『전집』입니다. 『전집』이 제대로 나와서. . .사람들이 “박헌영 전집이 이 정도면 자료집이 되겠구나”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에 또다시 좋은 인연이 온다면 그때 다시 자료를 모아서 학자들에게나 세상에 내놨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위로는 깨달음을 얻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 정신으로 남은 생을 보냈으면 하고. 그래도 지금까지 부처님의 은혜로 살아왔는데, 부처님의 제자된 입장에서 마지막으로 생에 남은 것은 도닦는 것밖에 없겠지요. ‘하화중생’이라는 것이 중생 교화하는 건데, 저는 정말 나하고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도 이제는 그 인연을 다 끊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할 이야기는 많겠지만, 제가 여태까지 부처님 품안에서 시주밥을 먹고 여태까지 살아왔는데, 남은 시간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한 길, 내가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까, 도닦는 일밖에 없잔아요? (미소를 띄며) 그래서 도를 닦았으면 하는 생각이에요.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못했지만, 지금까지 한 이야기도 푸념정도로 들어줬으면 고맙게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여적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정말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항상 생각을 했었어요. 또 한산 스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나의 스승님(송담 스님)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오로지 도만 닦아라”고 말씀하셨고. 또 한산 스님도 다른 것, 세인들 만나는 것을 거부했어요. “이 세상 사람들과 인연 지어서 자꾸 만나지 말고 도닦는 일에만 전념을 해라” 그렇게 살다가 좋은 세상이 오면, 그때 가서 니가 할 일은 선친에 대한 자료 같은 것을, 자료집을 만들란 뜻이 아니시고, 자료를 그저 모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당부를 하신거지요. 그래서 제가 철이 들면서 이건 내가 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더러는 선친에 대한 논문이나 글을 쓰는 것을 봤을 때도 내가 여적까지 듣고 봤던 것은 그게 아닌데… 전부 사람들이 빨간 안경을 쓰면 빨간 색깔이고 파란 안경을 쓰면 파란색깔이고 노란 안경을 쓰면 노란 색깔로 보이듯이, 자기들 생각으로만 계속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해서 마땅히 자료집을 만들어 가지고… 또 (그 자료집을) 세상에 내놓으면, 누가 욕을 하건 말건, 박선생을 비판하건, 또 어떤 분야에서 인정을 하건 말건… 그런 생각을 제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글을 보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고 또 그 분야(박헌영에 관한 모든 학적, 일상적 영역)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여러 사람인데, 나름대로 자료집을 바탕으로 모두 글을 썼을 때는, 서로가 서로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저는 그것을 원한거예요. 자료집을 내놓는 이유는 그겁니다. 제가 자료집을 내서 박선생에 대한 좋은 점을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런 것도 없고. 저는 자식된 도리로서 그런 건 해야겠지만, 자료집이란 것이 있는데 몇 백질이나 되는 게 도서관에도 있고, 개인소장한 사람도 있고 한데, 그러면 함부로 ‘아’를 ‘어’로 고쳐 쓸 수는 없거든요. 그럼 욕먹는거지요. 시대에 따라서 혹은 자기의 취향에 따라 함부로 쓰면… 그런 것이 좀 아쉬워서 그런거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첫째는… 인연이지요. 이 세상에 그 분의 피한점을 물려받아서 왔다는 인연이고. 생각하면 억울한 거도 많고… 다 지나간 건데 어떻게 하겠어요. 다 잊어버려야지요. 할 얘기가 어떤 때는 많아요. 아직도 하고싶은 이야기는 다 못한 것 같아요. 푸념 들어준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스님의 마지막 이야기가 끝나면서 난생 처음 겪었던 해방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 . . 수만미터 해저에서 갑자기 수면 위로 솟구치는 고래처럼 인터뷰어도 긴 숨을 들이 마셨다. 다섯 시간 이상 인터뷰어의 머리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실체가 뭐였는지 아직도 알 수 없다. 듣는 이의 고통이 그 정도일진데 . . . 평생 그 짐을 이고 살아야 했던 스님을 생각해 본다. 언제 헤어날 수 있을지 모를, 칠흙같은 그의 앞길을 짐작해본다. 정말 과거란 질긴 것인가 보다. 비극적인 과거는 더더욱 그런 것 같다. 그저 평범하기만 한 우리들에게 과거란 하찮은 것일 뿐이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오로지 미래다. 하지만 오늘, 수만미터 해저처럼 어둡고 존재를 터트릴 것 같은 압력 속에서 살아온 한 인간에게서 장미빛 미래가 아니라 피빛 과거를 보았다. 불과 몇 시간이었지만 듣는 것조차 숨막히게 하는 이 무거운 과거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어딘가에 또 있을 것이다. 앞으로만 내닫는 우리의 시선을 잠시만 뒤로 돌려보아도 그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원경 스님은 그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누군가 그랬다. 부정한 사회에서는 정직하게 사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없다고. 否認된 과거를 추억하는 것도 그와 비슷하다. 과거에 대한 否認이 교조로 통하는 사회에서건, 아니면 비공식적으로 그리고 암묵적으로 합의된 사회에서이건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최악의 과거라고 할지라도, 누구나 부정하고 있고 또 부인하는 것이 당연하게 보여지는 과거라도 단 한 사람에 있어서는 예외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세상의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를 추억할 의무가 있다. 술김에 내뱉는 원망으로라도 떠올리고 싶은 존재가 아버지이다. 그러니 이는 또 의무이자 배설해야 할 본능인 셈이다. 아무리 악한 아버지라도 아들로부터 추억받을 권리를 가진다. 빛바랜 자신의 사진 한 장을 쓸어내 주기만 해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것을 요동치게 만드는 것이 아들이다. 그러니 이는 또 권리인 동시에 채워져야 할 본능이라고 믿는다.

스님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본 것은 무엇일까? 좌파운동의 비극? 냉혹한 분단 정치사의 결말? 한 인간의 불우한 일생? 이 장황한 텍스트 속에서 인터뷰어가 보았던 것은 단 하나의 뚜렷한 이미지였다. 아버지를 추억하고픈 아들. 세상의 모든 생기를 집어삼키고도 남을 그 갈증 앞에서, 남로당도 간첩죄도 한국전쟁도 또 정책입안보고서도 모두 사라졌다.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따뜻한 ‘피의 온기’였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이 질서로 인해 상처받고 또 희망하는 스님이 행복해 보인다. 버거운 짐을 지고도 행복한 미소를 떠올릴 수 있는 아들의 모습을 모처럼 볼 수 있어서 또 행복했다. 언젠가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스님의 발걸음을 무겁게 잡아끄는 짐이 아니라, 상처투성이인 스님을 부축하여 일어날 수 있게 될 날이 오기를 바란다. 아버지란, 정말 아버지란, 언제나 그렇게 아들을 보듬어 주는 존재였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