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비하는 년이 국수도 못 밀어?
딸 : 엄마 태몽이 뭐였어?
어머니 : 우리 엄마가 누워 있는데 부처가 창호지문을 뚫고 우리 엄마 품에 안기더란다. 그러구선 나를 낳았대. 나를 낳아 놓고 세월이 흘러 꿈 속에서 낮잠을 자는데 호랑이가 앞마당에서 앞발을 세우고서 앉아 있더래. 옛날에는 호랑이를 산신이라고 하잖아. 우리집이 아들이 귀하거든. 호랑이가 와서 내가 아들이면 데려 갈려고 그랬다고 우리 엄마가 그러더라구 딸이니까 그렇게 앉아 있는 것만 꾼 거래. 호랑이는 어디 갔는지 모른대. 사내자식 같으면 죽었다고 그러더라구. 그리고 어려서 잔병치레를 많이 했거든. 어른들이 그러더라구. 어려서 잔병을 많이 알아서 명이 긴 거라고.
딸 : 엄마 태어나고 난 뒤 집안 분위기는?
어머니 : 우리 아버지가 용산 역에서 근무를 하셨거든. 퇴근해서 집에 와서는, 우리 언니 보고, 그때 우리 언니가 다섯 살 때였어, “엄마 뭐 낳았냐?” 하고 물어보니까 언니가 “엄마 딸 낳았대” 라고 대답했다지. 그 길로 나가셔서 술을 잔뜩 잡숫고 오셔 가지고 엄마한테 “수제비하는 년이 국수는 못 밀어?” 그러더란다. 그러니깐 왜 딸만 낳는냐, 아들도 낳지 하는 말이지.
딸 : 삭막했겠네.
어머니 : 글쎄 우리 엄마가 나를 아랫목에 뉘여 놨는데, 우리 아버지가 나를 보시더니 포대기에 둘둘 말아서 윗목에다 쑥 밀어 놓더래. 숨막히고 배도 고프니까 내가 킥킥거리면서 우니깐 우리 엄마가 데려다가 젖 먹여서 내가 살았댄다.
딸 : 재욱이 삼촌, 그러니깐 동생이 태어날 때의 기분은 어땠어?
어머니 : 재욱이가 태어날 때 내가 세 살이었으니깐 잘 모르지. 그냥 동생이 태어났나 보다 했지 뭐. 근데 우리 아버지가 그때부터 귀여워해 주더라. 나 다음에 줄줄이 남동생이라고. 내 밑으로 재욱이 보고, 재익이 보고, 그랬으니까 아버지가 복덩이라고 손에 쥐어줄 것만 있으면 그렇게 챙겨주고 그랬어.
딸 : 서운했던 적은 없었어?
어머니 : 서운했던 적… 글쎄. 없었어. 내 바로 밑에 동생. 그러니깐 재욱이. 걔가 얼마나 약했는데. 어려서부터 아퍼가지고 우리 엄마가 새벽에 아기 포대기에 싸고 쓰개치마를 씌어 가지고 새벽같이 한의원에 가는 거야. 한의원 문 열면 제일 먼저 진찰 받으려고. 자고 일어나서 새 기분, 맑은 정신에 진료 받으려고. 하여간 용하다고 하는 데나, 좋다고 하는 데는 끼니거리가 없어도 찾아 다녔으니깐. 나중에 알았는데 늑막염이라고 하더라. 마른 늑막염. 갈비뼈 사이 물이 마르는 거래. 항상 한약 데려 먹이느라 나한테는 신경도 안 섰어. 서운해하던 기억은 없어. 내가 기억에도 없지만 우리 엄마도 나보고 그런 소리 없었어. 그냥 동생이 아프니깐 그런가 보다 했지.
어머니는 일어나셔서 싱크대 위에 있는 조미료 통을 가져오시더니 김치에 조미료를 넣으셨다. 그리고 이내 자랑하듯이 배추를 102호 아주머니께서 주셨다고 함박 웃음을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순간 나는 어머니가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씩 어머니의 어린아이와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신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마음 속 어딘가에 어렸을 적 추억을 한 가득 쌓아놓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어머니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딸 : 외할아버지하고 제일 기억에 남는 게 뭐가 있어?
어머니 : 학교 들어가기 전이니깐 여서 일곱 살 때 뜸 되었을까. 그야말로 나는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시키는 대로 그냥 있으라는 자리에 있었어. 말도 안하고. 내가 어쩌다가 말하면 풍년든다고 그랬어. 하여간에 아버지가 “순진아. 순진아.” 그러면서 아침에 나를 불러서는 대야에 물 떠놓고 세수시키고 머리에는 물 발라서 빗으로 싹싹 빗어 주던 기억이 나. 우리 아버지는 생전 그런 거 없는 분이신 데 아직까지 그 기억은 내가 잊을 수가 없어.
딸 : 외할머니하고는?
어머니 : 우리 엄마 하면 나는 냇가에서 빨래하던 기억이 나. 우리 엄마는 피부가 하얀 색이구 머리색은 갈색이어서, 어렸을 때 동네 애들이 양년이라고 놀렸다구. 하여간 우리 엄마는 속눈썹까지 갈색이었으니깐. 어찌나 하얀지 배를 보면 꼭 밀가루 반죽해 놓은 것 같았어. 우리 엄마랑 빨래하는데 어떤 외국인이 와서 사진을 찍더라. 그야말로 치마 저고리 입고 머리는 쪽지고 냇가에 앉아서 빨래하는 모습이 그네들이 보기에는 전형적인 한국여자지. 사진을 찍어 가지고 한 장 주더라. 그 사진이 아마 이모한테 있을 거야. 난 우리 엄마 빨래하던 모습이 그렇게 기억에 남아.
딸 : 이모들하고 싸운 기억은 없어?
어머니 : 왜 없어. 싸웠지. 한 번은 내 위에 언니하고 무지하게 싸웠어. 큰언니한테는 내가 “언니”라고 불렀는데, 내 위에 언니한테는 내가 “경자 언니”라고 불렀거든, 근데 언니는 그게 싫은 거야. 자기가 나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많은 데 왜 언니 앞에 이름을 부르냐는 거야. 근데 나는 그래도 계속 “경자 언니”라고 했거든. 그래서 싸웠더니 아버지가 우리를 불러다 앉혀 놓고 혼냈어. 나보고는 고집세다고 저 고집 꺾어야 된다고 그러시면서 공부 잘하고 말 잘 듣고 하라고 가방 사주고 그랬더니 언니랑 싸운다고 가방을 마당에 내 팽개치고 공부도 할 필요 없다고 나가라고 막 야단치시는 거야. 그날 집에 못 들어가고 작은 아버지 집에서 하룻밤 잤는데 다음날 아침에 언니가 데리러 왔길래 조용히 집에 들어갔지.
딸 : 삼촌들하고는?
어머니 : 우리 아버지는 수원에 자주 가셨거든. 우리 아버지는 생전 뭐 사가지고 오시는 법이 없었어. 어쩌다가 뭐 사오시면 살림살이나 사오시지. 우리들한테 선물이라고 내 놓는 적이 없었어. 근데 언젠가는 처음으로 공책 다섯 권을 사 오셨어. 그 때 나는 5학년이고 재욱이는 2학년이고 하니깐 아버지가 나는 세 권, 재욱이는 두 권을 주셨는데 재욱이 이 놈이 지가 세 권을 갖고 싶은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가 세 권을 가져야겠데. 아버지가 안 된다고 그래도 아주 방바닥을 동동거리고 온 몸으로 기어다니면서 지랄을 떨어서 그냥 줘버렸어. 걔는 아주 욕심이 무지무지 많아서 지가 쪼금이라도 더 가져야 되고, 지가 쪼금이라도 더 먹어야 가만있지 안 그러면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근데 지금 생각하니깐 주길 잘 했다 생각해. 지금까지 같이 지지고 볶고 살면 이런 생각 안 드는데 그렇게 먼저 가서 오히려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 어렸을 때 그렇게 양보한 게 좋더라구.
재욱이 삼촌은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왜 돌아가셨는지 구체적으로 얘기는 안 해 주시지만 아마도 자살을 하신 것 같다. 어머니는 항상 재욱이 삼촌 얘기만 나오면 코끝이 빨개지신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였다. 재욱이 삼촌 얘기가 끝나자마자 어머니는 분주하게 배추를 버무리셨다. 그리고 통에 김치를 담으시면서 크게 한숨을 내 쉬셨다. 나는 빨리 어머니의 학창시절 얘기로 넘어갔다.
빛 바랜 사진첩
딸 : 학교 다닐 때 엄마 모습은 어땠어?
어머니 : 그냥 평범했어. 그렇게 공부 잘하지도 않았고. 그냥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고 하지 말라는 거 않하고. 튀지도 않고, 그냥 평범했어.
딸 : 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어?
어머니 : 되고 싶었던 거는… 글쎄. 나는 그렇게 미술이 좋아서 미술 쪽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잘 안 됐지. 우리 아버지가 “그림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그림” 그러면서 물감을 마당에 쫙 던진 다음부터는 그림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지. 그림 그리는 게 그렇게 좋더라구. 근데 우리 아버지는 나를 꼭 국민학교 선생님으로 만들고 싶어했어. 저 놈은 국민학교 선생하면 제격이다, 하고 속으로 생각하셨나봐.
딸 : 닮고 싶은 사람은?
어머니 : 닮고 싶은 사람은 없었고 그저 남한테 피해 안주고 싫은 소리 안 듣고 살아야겠다 생각은 했었지. 그리고 나는 남들이 나를 쉽게 보는 게 싫더라. 남한테 쉽게 보이지 말고, 떳떳하게 사는 게 좋더라.
딸 : 엄마는 대학을 포기했잖아. 왜 포기했어?
어머니 : 우리 아버지가 나를 국민학교 선생님을 시키려고 해서 교육대학교에 시험을 봤어. 붙었더라. 근데 내가 대학에 간다는 게 맘에 걸리는 거야. 언니는 고등학교 중퇴했는데 난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도 간다는 게 미안하더라구. 언니도 아버지한테 가서 재교는 고등학교 졸업 시켜주고 대학도 보내 주냐고, 나는 고등학교 졸업도 못했는데, 그러는거야. 내가 대학에 가면 밑에 재욱이랑 재익이랑 대학 가기 어렵고. 내가 3학년 되면 재욱이가 1학년에 입학한단 말이지. 재익이도 고등학생이고. 그러면 집에서는 세 명을 학교를 보내야 하는데 우리 집이 부유하지도 않고 그래서 포기했어. 내가 아버지한테 가서 나 대학 안 가겠다고 그랬어. 내가 대학에 가면 재욱이도 재익이도 학교 가기 어렵다고 안 간다고 했어. 그때 진짜 그야말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 내 입으로 안 간다고는 그랬지만. 근데 지금은 후회해. 그때 내 욕심 차리고 대학에 갈 걸하고 하고 후회한다.
딸 : 만약 지금 대학에 보내 준다면 갈 거야?
어머니 : 당연히 가지. 나는 내가 학교에 갈 여건이 되면 대학에 간다.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갈 수 있으면 간다.
대학 이야기가 나오자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내 괜히 물어봤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만약 지금이라도 대학에 갈 수 있다면 가겠다는 말씀을 듣자 역시 우리 어머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당연히 간다는 말씀을 하실 때는 주저함이 없으셨다. 그 명료한 대답 속에서 나는, 의례적인 답변이 아니라 언젠가 꼭 이루고 말거라는 확신 같은 걸 느꼈다.
딸 : 엄마 첫사랑 얘기 해줘.
어머니 : 첫사랑? 나는 그런 거 없었어.
딸 : 거짓말 하지마. 첫사랑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빨리 얘기 해줘.
어머니 : 그게 첫사랑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때 교생 선생님이 그렇게 좋더라. 키도 크고, 눈매도 서글서글하고. 모든 다 컸어. 다른 애들처럼 꽃 갖다 놓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그러진 않았는데. 그냥 보면 그 선생님이 그렇게 좋더라고.
딸 : 엄마를 좋아했던 사람은?
어머니 : 누가 나를 좋아하냐? 없었어.
딸 : 또 거짓말. 나한테 접수된 얘기가 있는데. 숨기지 말고 얼른 얘기 해줘.
어머니 : 기억나는 사람이 있긴 한데. 같은 동네 사는 사람이었어. 이름이 광섭인가. 얼굴은 하얀 게 기집애처럼 생겼어. 동네에서 나만 만나면 그렇게 쫓아와서는 “재교 왔어. 우리 재교 왔어.” 하고 그랬어. 그때 내가 6학년인가 그랬고, 광섭이는 중학생이였을거야. 교복입고 모자 쓰고 다녔으니까. 내가 중학교에 가서는 가방도 들어주고 그랬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땐가 아마 미국으로 이민 갔지. 그리고는 없었어.
딸 : 엄마의 이상형이 뭐였어?
어머니 : 나는 키도 크고 덩치도 좀 있는 사람이 좋아. 사람이 좀 큼직큼직 해야지. 그리고 나중에 뭐라고 그러는 사람은 딱 질색이다. 남자나 여자나 뒤끝이 없어야 돼. 겉은 부드럽고 속은 강한 사람이면 좋지.
딸 : 아버지말고 다른 남자는 없었어?
어머니 : 없었어. 선은 많이 봤지. 근데 다들 그저 그렇더라. 그 중에서 두 명 정도 괜찮아서 결혼했으면 했는데 일이 틀어져 버렸지.
어머니는 이제 고만 물어 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더 이상 말씀을 하지 않으시려는 듯이 입을 닫으셨다. 뭔가 애틋한 이야기 있을 것 같은데 어머니는 좀처럼 얘기를 해 주지시 않으셨다. 그리고 나도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나이가 50이 넘으신 우리 어머니의 가슴 속에 잇는 혼자만 알고 있고 싶은 이야기를 굳이 들추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아무도 모르게 어머니 혼자만 갖고 있는 추억으로 남겨놓는 것이 더 좋을 듯 싶었다.
사랑의 선물
딸 : 언니 낳을 때 태몽은 뭐였어?
어머니 : 언니 태몽은 모르겠어. 동네 사람이 꿔 줬는데. 잊어 버렸네.
딸 : 언니 낳고 어땠어?
어머니 : 시흥에서 낳았는데. 내가 은정이를 하루를 꼬박 진통하고 낳았거든. 낳고 보니깐 무지무지 못 생겼더라. 간호사가 안겨 주는데. 어휴∼ 벌개가지고 여기 뿔뚝 저기 뿔뚝 왜 그렇게 못 생겼는지. 내 아인가 싶더라. 그리고 걱정부터 되더라구. 어떻게 키우나 하고.
딸 : 오빠 태몽은 뭐였어?
어머니 : 민호는 맑은 냇물에 색색이 조약돌하고, 조개 껍데기가 가득 있었어. 그거 꾸고 낳았지.
딸 : 오빤 아들이니깐 낳고 좀 달랐겠네.
어머니 : 다르긴 다 똑같지. 민호는 마산 제일병원에서 6시간 진통하고 낳았는데. 민호도 여기 저기 뿔뚝거리고 못 생겼어. 걔 낳고 걱정거리 하나 더 늘었다 생각했지.
딸 : 내 태몽은 뭐였어?
어머니 : 너는 폭포 속에 아주 먹음직스러운 파란 고추가 한 바구니 가득 있더라. 민호에서 끝내고 그만 낳으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생겨서 땔 수 없어서 낳았어.
딸 : 그래도 내가 제일 좋지?
어머니 : 어이구… 제일 속 썩였지. 너는 생각하기도 싫어. 어쩜 그렇게 뱃속에서부터 나를 힘들게 하는지. 언니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입덧은 별로 몰랐는데 너 가졌을 때는 먹기만 하면 토하고. 말로 다 못하지. 넌 창원 정산부과에서 낳거든. 분만실 들어가자마자 나왔어. 입원도 안하고 낳고 그 날로 집에 왔어. 병원에서 가라고 하더라.
딸 : 우리 키울 때 힘들었지?
어머니 : 그럼. 언니는 셋방 살 때 주인집 꼬마한테 얼마나 꼬집혔는데. 그래서 얼굴에 손톱자국 생겼잖아. 얼마나 속상한지. 그 놈이 마당으로 들어오면 나는 은정이 데리고 밖으로 나가고 걔가 밖으로 나가면 나는 은정이랑 들어오고 그랬어. 민호는 순했어. 혼자서도 잘 놀고. 민호는 키우는데 수월했지. 너는 어휴∼ 힘들다 힘들다 어찌나 힘든지. 젖 먹여 놓고 돌아서면 토하고. 하여간 너는 내 등에서 떨어질 날이 없었어. 오죽하면 내가 너 엎고 오줌 싸고, 똥 싸고 했겠냐.
어머니는 언니와 오빠, 나를 키우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시면서 얼굴에는 연신 웃음이 가시지 않으셨다. 다 외고 있는 이 얘기를 하실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에서 묻어나는 웃음이 나는 좋다. 어머니의 웃음을 보고 있으면 내가 꼭 어머니의 품안에 안긴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얘기하시고 또 하시는 우리 삼남매의 어렸을 때의 모습들. 그건 우리 어머니의 행복한 웃음의 이유일 것이다.
행복의 조건
딸 : 아빠랑 결혼하고 최대의 위기는?
어머니 : 위기? 다 잊어버렸지. 지금 생각나는 거는. 니 아빠가 보증 서 가지고 그 빚 다 갚느라고 힘들었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보증 잘못 서서 한동안 힘들었지. 그리고 사업한다고 여기저기에서 돈 끌어다 쓰고 그래서 그거 막느라고 애먹었지. 그것 말고는 없었어.
딸 : 있을 것 같은데?
어머니 : 그런 거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으면 어떻게 살어. 나쁜 건 빨리 잊고 좋은 건 쥐고 살아야지. 난 다 잊어버렸어.
딸 : 엄마. 지금 엄마가 살고 있는 게 행복해?
어머니 : 그럼. 행복하지.
딸 : 뭐가 그렇게 행복해?
어머니 : 행복이 별거냐. 아무 일 없이 다들 밤새 안녕하면 행복한 거지. 니들 잘 있구, 공부시키는데 별문제 없고, 니 아빠 건강하고, 나도 건강하고. 그러니 행복한 거지.
짧은 어머니의 행복론을 들으니 마음속에 차분히 가라앉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행복하다니 다행이었다. 행복하냐는 질문을 준비하면서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 질문을 빼지 않았다. 어쩌면 난 어머니의 입에서 직접 행복하다는 말을 꼭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태어난다면 풀이 되고 싶어
딸 : 10년 후의 엄마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으면 좋겠어?
어머니 : 뭐. 꼬부랑 할머니 돼있겠지. 으이구… 늙어도 남한테 피해는 안 줘야 할 텐데. 곱게 늙는 것도 복이라는데 그 복이 나한테까지 올까 모르겄다.
딸 : 만약에 엄마가 여자로 다시 태어났어. 그럼 아빠랑 다시 결혼 할거야?
어머니 : 나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도 싫지만 하나님이 다시 여자로 태어나게 해 주신다면 나는 니 아빠하고 결혼 안 한다. 나는 결혼 안하고 혼자서 살란다. 결혼은 해 봤으니깐 혼자서 조용히 살아도 봐야지. 난 한번도 다시 니 아빠하고 결혼하겠다는 생각 안 봤다. 니 아빠한테도 물어 보면 나랑 결혼 안 한다고 할 걸. 암튼 난 싫어.
딸 : 그럼 엄마는 다시 태어나면 뭐로 태어나고 싶어?
어머니 : 나는 다시 태어나면 사람으로 태어나기 싫다. 꼭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그냥 풀로 태어나서 조용히 자리 지키고 있다가 때가 되면 없어졌으면 좋겠다.
딸 : 앞으로 우리한테 당부할 말이라도.
어머니 : 당부할 말은 뭐. 건강하라는 거지. 아무리 똑똑하고 돈 많고 그래도 몸 약하면 다 부질 없는 거야.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일 잘하기보다는 그저 열심히 하라는 거.
“다 끝났냐?” 인터뷰하느라고 치우지 못한 김치통이랑 고춧가루통이랑 소금통을 정리하기 위해 어머니는 일어나셨다. 싱크대에서 위생장갑에 묻은 뻘건 고춧가루를 씻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늘 하던 것처럼 엄마의 등에 기댔다. 좁아진 어머니의 등에 기대고 있는 나, 어머니는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내 키와 늘지 않는 내 몸무게를 걱정하셨다.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머니의 등 가운데에 코를 깊숙이 묻었다. 냄새가난다, 어머니라는 이름의. 약간의 땀내가 섞인 그 냄새는 여전하다. 변함 없는 온기, 그 안에 서린 냄새는 언제쯤 내 몸에서도 묻어날까. 영원히, 내 몸에서는 그런 냄새가 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난 어머니의 모든 것을 닮고 싶다. 어머니의 흰머리까지도.
취재, 정리 :
김은경 (건양대 문학영상창작과 3학년· [email protected])
엄마가 살아온 날들
이름 최재교
1947년 12월 15일(음력) 평택에서 아버지 최원섭 어머니 정용 사이에서 4남 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남. (삼촌 중 한 붐은 갓난 아기였을 때 돌아 가셨고, 다른 한 분은 유산되었단다. 재욱이 삼촌은 자살을 하신 것 같다. 이모 두 분은 모두 사고로 돌아가셨단다. 그래서 현재는 삼촌 한 분과 이모와 어머니, 이렇게 세 분만이 계신다.)
1950년 재욱이 삼촌 태어남
1954년 3월 평택 성동 초등학교 입학
1955년 재익이 삼촌 태어남
1960년 3월 평택여자 중학교 입학
1963년 3월 평택여자 고등학교 입학
1966년 2월 평택여자 고등학교 졸업
1973년 5월 27일 김기종과 결혼
1975년 1월 23일 시흥에서 큰 딸 김은정 출생
1977년 10월 29일 마산에 있는 제일병원에서 아들 김민호 출생
1980년 3월 29일 창원에 있는 정산부인과에서 막내 딸 김은경 출생
2001년 현재, 경기도 평택시 비전2동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음.
그리고 나
이름 김은경
1980년 3월 29일(양력) 창원에 있는 정산부인과에서 아버지 김기종과 어머니 최재교 사이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남
1987년 3월 평일 초등학교 입학
1988년 4월 성동 초등학교로 전학
1993년 3월 평택여자 중학교 입학
1996년 3월 평택여자 고등학교 입학
1999년 건양 대학교 문학영상정보 학부 입학
2000년 건양 대학교 문학영상창작 학과로 나뉘어짐
2001년 현재, 학기 중에는 건양 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방학에는 평택에 있는 집에서 살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