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헌

1. 한동헌은 나를 기억하지못했다

 

 

 

내게 한동헌은 그런이름이었다. 누구나 그럴지도 모른다. 아득한 기억 속에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사람을 가진다는 것. 그 이름의 원래 주인이 누구인들 상관없이, 그저 이름으로만 기억되어도 충분한 존재. 내게 한동헌은 그런사람이 아니라 그런이름이었다.

 

 

 

어린 시절 <신개발지구에서>를 들었다. 이건내 노래라고 찜한 채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오랜 시간 품고 다녔다. <그루터기>, <바람 씽씽>, <노래>, <나무>, <쐬주>가 여기저기서 읊조려졌지만 <신개발지구에서>는 내 골방 바깥으로 출시(?)되지 않았다. 자폐아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식은집착과 반복아닌가. 토요일 오후 햇빛이 잘 들지도 않는 골방에서 반복해 듣던 <신개발지구에서>는 자폐아의 언어였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소통 불가능한 언어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이제 그이름을 만나러 간다. 자폐아만의 언어를 만들어준 창조주를 만나러 간다. 내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얼마나 가슴 조렸는지 주위 사람들이 쉽게 눈치채지는 못했으리라. 내가 만나러 가는 존재는 그이름이 아닌 그사람이라고 수없이 되뇌었지만, 첫사랑의 재현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 이 드물지 않은가. 사람이 그이름을 배신한다고 한들, 이름의 강렬한 기억에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다짐도 수없이 했다. 하지만 그 아련한 기억 속의이름은 얇디얇은 막으로 덮여 있을 뿐이었다.   

 

 

 

길또이: 뵈러 오기 전에메아리‘(서울대 노래패) 복각본이나 노래책을 뒤져보았는데, 6∼7곡 정도밖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한동헌: 실제 그렇게 밖에 없어요. 제 노래들이 녹음이 되어서 음반화된 것은 8곡이구요, 그 중에서 좀 알려진 것은 <그루터기>와 김광석이 부른 <나의 노래>입니다.

 

 

 

: 제가 들었던 노래는, 김남주의 <노래2>가 나오면서 <노래1>로 제목이 바뀌었던 그 노래하고, 그 다음에 <신개발 지구에서> <그루터기> <바람 씽씽> <쐬주> <나무> 뭐 이런 정도입니다. 이런 노래들은 78년에서 8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 같은데

 

: 그 노래들은 78, 79년 딱 두 해 사이에 만들어진 것들이에요.

 

 

 

: 그러면 학번이 78?

 

: 77학번

 

 

 

: 그럼 대학 2, 3학년 때 만드신 거군요.

 

 

 

언제나 첫 만남은 그렇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을 탐색하는 과정이 선행하는 법이다. 간단한 수인사를 마치고 대화의 끈이 풀리기는 했지만 노래 제목의 목록을 작성하고 연대기 탐색이 시작이었다. 약간은 아려왔다. 아무런 말없이도 난 당신을 이미 잘 알고 있지요, 라는 가벼운 웃음이 오고갈 것이라는 환상은 목록과 연대기 앞에 금새 사그러들었다. 내가한동헌을 기억하는 만큼 한동헌도 나를 알아볼 것이라는 환각이 깨어지며 탁자 밑으로 흘러내렸다. 빨리 정신을 차려 놓친 끈을 다시 붙잡으려는 내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 ,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이라곤 노래와 관계되는 이야기밖에 없을 텐데, 두서없이 그냥 그와 관계해서 몇 말씀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근데 제가 노래의 가사들을 정확하게 다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어서..

 

 

 

나는 가사가 적힌 노래 책을 꺼내놓았다. 첫사랑을 다시 만나면서, 그 사람과 과거에 주고받던 말을 기억하지 못해 그 시절의 연애편지를 옆에다 펼쳐놓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미안하고 또 내가 한심했다. 하지만 모두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는 다 안다고 자부하는 터라, 노랫말들이 내 가슴에 새겨놓은 흔적을 들추기만 하면 금새 첫사랑은 나를 기억해 내리라 믿었다. 그런데 말이다, 한 번 어긋난 눈길은 다시 만나기 어려웠다.

 

 

 

: 사실 노래 가사를 보면 다 있겠지만, 저는 가사를 잘 못 썼어요. 그래서 남의 노랫말에 했던 거고.. 그리고 어쨌든, 내가 어떤 형태로든 공감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 직접 쓴 경우는 없나요? <비료지기> <그루터기> 같은 곡의 가사는 직접 쓰시지 않았나요?

 

: <비료지기>도 마찬가지지요. 곡은 제가 썼고농촌에 사는 아이들 동시를 모아둔 책이 있었어요. 거기에 있던 동시였지요. <그루터기>도 사실 경제학과 동기(한나라당 김성식)가 하는 야학에서 교가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그 가사를 받아다가 한 거구요. 최근에 복각본 내면서 정확히 누가 쓴 건지 밝혀야 할 것 같아서 물어봤더니, 누구 개인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고, ‘그루터기야학 교사들이 공동으로 만든 것이라고 하더라구요.

 

 

 

: <신개발 지구에서>도 다른 분이?

 

: 당시 대학신문에 실린 시였어요. <바람씽씽>도 다른 친구가 쓴 가사에 제가 곡을 붙였고요. <쐬주>도 마찬가진데요. 가사를 쓰신 분이, 대낮에 경찰한테 잡히는 그러한 광경을 실제로 봤고 어떤 느낌이 있어서 아마 가사를 썼던 모양인데, 그 가사의 느낌이 자기가 곡을 쓰기에는 너무 강해서 곡은 못 붙이고 있으니 노래를 만들려면 만들어봐라 그랬죠.

 

 

 

우스웠다. 노래 책에 적힌 그 이름이 다 사실이었던 게다. 때로한동헌 작사라는 표시가 있지만 그것도 사실이 아니라 했다. <그루터기>의 가사에는 약간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2절의 내용인가, 색깔이 푸른색에서 붉은 색으로 바뀌는데, ‘우리의 피가 안타까운 열매를 붉게 익히면, 푸르던 날 어느새 단풍 물든다.’ 이걸 두고 피빛 분노로 읽거나빨갱이로의 전화를 연상했더라니허나, 이게 꼭 나의 치기이기만 한가? 더군다나 <신개발지구에서>조차 가사가 먼저 있던 노래라는 말을 듣고 난 어이없다 못해 현기증마저 일었다. 우스웠다, 나 자신이.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그 사람은 이제 조금씩 실루엣을 벗고서 내 눈앞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문제는 나였는지 모른다. 15년 전 기억 저편에 그렇지만 강렬한 감각으로 실존하던 누군가가 나로부터 이탈해 가기 시작한 것인지도.


2. ‘한동헌을 찾아가는 먼 길 – 1979 ~ 80

 

 

 

몇 차례의 인터뷰 경험을 하면서 나는 좋은 인터뷰란 인터뷰 과정을 거치면서 인터뷰하는 쪽과 당하는 쪽이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 조금씩 변해 가는 과정이 잘 드러나는 인터뷰라 믿게 되었다. 이번 인터뷰 내내 인터뷰를 하는 쪽인 나는 분명히 변한 듯하다. 그렇지만 이 변화는 인터뷰이와폼나는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저 나 혼자 알아서 달라져갔다. 순간순간 인터뷰 과정에서 쉬이 피로감이 찾아왔던 것도 이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신을 수습하는 길은 하나였다. 한동헌이라는 작곡자를 최대한 객관화시키는 것.

 

 

 

: ‘메아리는 창립 멤버신가요?

 


 

: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요. 친구 손에 끌려서 우연히 가게 되었고, 그렇게 하다가 어떻게 음악에 빠진 셈이지요.

 

 

 

: 언제부터 악기와 작곡에 관심이 있었나요?

 

: 저는 노래를 잘하지도, 기타를 잘 치지도 못했어요. 우리 또래가 대개 그렇듯이, 고등학교  시절 기타 좀 배우고 뚱땅거리기는 했죠.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대학에 진학한 이후였어요. 그리고 실제로 메아리 초창기에는, 기독교 단체에서 나온 노래 집에 실린 노래들이 레파토리의 주요부분을 구성했어요. 그리고 김민기, 한대수, 70년대 중반의 통기타 음악들.

 

 

 

: 김민기 영향이 아무래도 컸던 시대지요?

 

: 그래요. 그렇지만 저한테는 한대수의 영향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그건 나의 서구적 감성 혹은 개인적 취향 탓일 거예요. 전 그게 훨씬 잘 와 닿았고요. 자유스러움, 멋스러움, 그리고 정확하게 얘기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정서적인 면이 나하고 더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 그런 분들과 직접 교류도 있었나요?

 

: 한 대수 씨는 한국에 없었지요. 그렇다고 내가 김민기 선배의 노래를 즐겨부르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또 메아리의 음악 성향의 큰 기둥이었지요. 김민기 선배는 이미 그 당시만 해도 신화였어요. 소문으로만 들리는 신화적 존재. 상대적으로 한 대수 씨는 그렇지 않았고, 나중에 보니 개인적으로는 한 대수 씨에 제가 더 가깝게 느껴지더라고요.

 

 

 

: 즐겨 듣던 한대수 씨 곡은 어떤 거였나요?

 

: 한 대수 씨는 <행복의 나라로>가 유명하지만 나는 <하룻밤>이나 <고무신>, <나그네길> 등을 좋아했어요. 사실 <신개발지구에서> <그루터기>가 나를 잘 표현한 음악이라고는 안 봐요. 오히려 <나무> <정원> 같은 노래가 저 자신의 성격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솔직히 난 <노래>보다는 <나무>를 더 선호하는 편이에요. 둘 다 포크락인데, 밥 딜런이나 닐 영 등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컸지요. 사실 김민기 형 노래 스타일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편이라 할 수 있어요.

 

 

 

한동헌의 노래 가운데 비교적 알려진 곡들, 정확히는 내가 기억하는 곡들에 대해선 자기답다는 느낌이 안 든다는 말이다. 이런 자신의 평가가 지금 시점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 애초부터 그랬다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이 서구적 감성에 가깝다는 말에는 다소 놀랐다. 자신은 락적인 요소가 더 친근하다고 한다. 그 시절의 내 기억 속에 아로새겨진 노래들은 그런 노래가 아니었다. 이쯤 되니 나로서는 점점 더 힘겨워진다. 과연 내 부질없는 욕망처럼 한동헌이라는 이름 70년대 끝자락 혹은 80년대 한 구석에 묶어둘 수 있을지 말이다. 어쩌면 한동헌 본인이야말로 그 시절 그곳에 갇힐까봐 힘겨워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난 내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한동헌 자신이 그 시절의 흔적으로 남겨둔 노래가 그 이후에도 불려졌으니 말이다. 난 지금 <신개발지구에서>의 작곡자를 만나고 있다.

 

 

 

: 아까 민기형과의 관계가 어땠느냐고 물었죠? 그러니깐 민기형하고 우리가 처음 만난 거는 79 1월이었어요. 그때는 학교 안에서 집회를 못하고 방학이니깐 밖에서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었어요. “참새를 태운 잠수함이라는 노래 모임에 참가했는데, 거기에 민기형이 찾아오셨어요. 민기형이 그때공장의 불빛반주 부분을 녹음해 놓고, 인제 노래 부분을 녹음할 차례였는데, 그때 참여할 사람이 필요했던 거 같아요.

 

노래 부를 사람이 필요했고, 거기에서 그때 경동교회의빛바람 중창단이라는 노래 팀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도 있었고, 또 다른 사람도 있었고, 저희한테도 찾아오셨더라구요. 그래서이거를 하겠느냐해서 하게 되었죠. 최초의 불법 테잎이라고 할 수 있는 <공장의 불빛>이 나오자 민기형이, 아마 중정(중앙정보부)이었겠죠, 어디에 끌려가서 고초를 당하셨는데, 끝내 저희들 얘기는 안 하셨다고 들었어요. 아마 그것 때문에 송창식 씨도 피해를 보고, 반주 녹음은 송창식 씨 작업실에서 했거든요. 노래 부분은 이대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했어요. 저희들은 가서 주로 코러스를 했고, 솔로를 한 친구들도 좀 있었고, 그랬지요. 어쨌던 그거는 참 별 생각 없이 한 일이에요. 특히 저 같은 경우에는 의식화 수준이 높은 그런 사람도 아니었고, 그냥 별 생각 없이 한 거지요. 그렇지만 그 일이 내게는 하나의 전기(轉機)가 된 것 같아요.

 

 

 

: 전기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 조금 자세하게 말씀해 주신다면?

 

: .. <공장의 불빛>은 노래운동이나 노동운동의 차원에서도 중요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하나의 예술적인 실험이기도 했거든요. 그러니깐 음악에 대해서 또 노래를 가지고 이렇게 접근할 수도 있다는 경험을 한 거지요. 그렇지만 민기형하고 그 음악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나누지는 못했어요. 워낙 어렵고, 나이 차이도 많고, 그 형이 갖는 무게감 등등. 그렇지만 노래를 통해서 펼칠 수 있는 세계의 가능성을 배웠다는 느낌이에요. 민기형이 포부를 크게 가지라고 격려도 했던 기억이 나요.

 

 

 

1978년 제작된공장의 불빛은 서울대 탈춤반 출신들의 모임이었던한두레의 작업의 한 부분으로 기획된 것으로 애초부터 공연물로 구상되었고 그 구성에 있어 상당부분 공동창작이 이루어진 것 같다. 그러나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후원으로 카세트 테이프로 제작, 보급되고 그후 79 2월 제일교회에서 채희완의 안무로 무대에 올려져공장의 불빛은 공연물로서보다는 카세트테이프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70년대 후반의 공연작품들이 대개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나 알레고리적인 상황설정으로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음에 비해, 동일방직사건이라는 70년대 후반 노동운동에 있어서의 중요한 사례에 입각하여 본격적인 노동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이것은 민중현실로 접근하려는 김민기의 70년대 후반 작품 경향의 정절을 이루고 있다. 특히 카세트 테이프라는 대중확산력이 강한 매체를 이용하고 뒷면에 반주음악을 실음으로써 대중적 확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렇게공장의 불빛은 매우 전형적인 사건 전개를 가지고 노동문제에 접근하였다는 점, 악곡과 가사의 강렬함, 그리고 카세트테이프가 가진 놀랄만한 대중적 확산력으로 크게 화제가 되었고 그후의 여러 작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김민기>(김창남 편, 1986, 한울출판사)에서

 

 

 

: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인가요?

 

: 내가 보기에는 예술적인 성취겠지요. 그것을 통해 무엇을 네가 할 수 있는가, 예술의 그 넓디넓은 세계 혹은 가치, 뭐 그런 게 아니었나 싶어요.

 

 

 

: 직접 느끼기도 하셨다는 거지요?

 

: 그렇지요. 그리고 사실 그 당시에 나는 주위에서 만났던 그 많은 시들이나 가사들, 정말 시적이고 지적인 그러한 것들이 왜 노래를 통해서 재현되지 않을까? 그게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건데 왜 안될까? 그런 고민을 했어요. 그러니깐 저는 노래의 가사가 될 만한 시를 골라 곡을 붙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제가 공감할 수 있는 시들을 가지고 만들었단 말이에요. 저의 자평이라 그렇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성공한 거 같아요. 지금 보면 좀더 세련되고 다듬어진 형태면 더 좋았겠지만, 어쨌든 그때 아주 초보적인 사람이 자기의 어떤 감성을 가지고 한 일 치고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봐요. 실제로 전혀 예상하지는 않았지만, 그때 만든 노래들이 어느 정도의 생명력을 가지는 것을 보고

 

 

 

: 그 시기가 79 1월 무렵이었다면 아무래도 이후의 메아리 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듯한데요.

 

: 아아, 맞아요. 그러니깐 소위 진보적인 성격이 강화되었지요. 80년의 봄 한때 짧았던 감격스러운 때에는 광주에 내려가서 메아리 친구들이 노래도 하고. 그래서 진보 진영의 여러 예술가들하고, 그게 어떤 지속적인 만남으로 물론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일단 그분들을 만나고 어울릴 수 있는 그런 기회들이 만들어졌어요. 또 메아리 테이프를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편집해서 나누어주기도 했고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별로 잘 알 수 있는 입장은 아니고, 그 때 메아리 같이했던 78학번 김창남(성공회대 교수)이나, 문승현(<그날이 오면> 작곡자) 같은 친구가 잘 알 거예요. 그 이후로도 그들은 계속 열심히 활동했으니까.

 

 

 

: 80년 이후로는 한동헌 씨의 곡들을 보기가 어려운데요?

 

: 실제로 78, 79년 이후에는 없어요. 대학 마치고 방위 갔다 오고서 바로 미국으로 갔으니까요. 그러니깐 노래에서 멀어진 거지요.

 

 

 

: 노래패에서 가요운동사 정리한 글을 보면 70년대 말은 거의한동헌과 문승현의 시대였다라는 식으로 정리해 놓았던데, 문승현씨 같은 경우는 어쩌면 80년대 중반 이후의 작업이 더 평가받는 것 같기도 한데..

 

: 문승현이는 완전히 노래운동의 핵이었지요. 난 그 이후로 오랜 기간을 미국에서 보냈어요. 

 

 

 

내 딴에는 열심히 이 사람을 그 시대의 시간 속으로 회귀시키려고 했다. 그랬다가 난 더 놀라게 된다. 이 사람은 80년대 대부분 아예 이 땅에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8-90년대에 대중문화평론가라는 이상한(?) 직함을 지녔던 김창남 씨나 <그날이 오면>이라는 단 한 곡만으로도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한 문승현 씨와, 또 인터뷰하는 나 자신과, 한동헌 씨는같은 하늘을 이고 살지 않았던 것이다. 솔직히 난 할 말을 잃은 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누구나 경험하겠지만 경우에 따라 노래는 아무런의미도 담고 있지 않는 텅빈 그릇이 되기도 한다. 그 빈 공간에 의미를 채우는 자는 바로 나 자신이고 그 순간 그 노래는 나 자신과 고유한 관계를 맺게 된다. 실제 작곡자의 의도가 무엇이든 거기에 담긴 함의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나에게 고유한 기억과 정서를 환기시키는 그 노래의 주인을 그 노래와 등치시키는, ‘의도의 오류앞에 난 연신 당황해 하고 있다. 다른 것은 다 이해가 되지만, 도대체 80년대를 이 땅에서 함께 보내지 않은 이 사람을 또 내게 아로새겨진 그 노래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꽤나 긴 숨고르기가 필요했다. 차라리 통쾌하게 웃어버릴 수 있었다면 더 나았을 일인데..

 

이제 남은 길이라고는 김광석이나 안치환 같은 대중가수(?)를 통해 90년대 이후에 더 많이 알려진 한동헌씨의 빛나는(?) 노래들에 주석을 다는 것이다. 역자주 혹은 편집자주가 아니라 저자가 직접 다는 주석으로

 

 

 

 

3. 한동헌의노래 – 1990년대

 

 

 

: 80년대 이후에 노래판에서 멀어지셨다고 하니, 그럼 아무래도 한동헌 씨가 남긴 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네요. 김광석이 <나의 노래>를 불렀을 때, 저는, 이건 <노래1>인데하면서 리바이벌된 것임을 알아차렸거든요.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제 기억으로는 <노래>메아리 1에 실렸던 것 같은데 거기서 한동헌 씨가 직접 부를 때, 그 목소리 톤이나 노래 분위기가 사실 김광석 씨의 <나의 노래>와는 무척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 전혀 다르지요.

 

 

 

: , 극단적으로 말하면, 특히 그 <노래>를 부르실 때 목소리를 엄청나게 탁하게 조였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 사실 그 노래는요, 제가 만들었지만 너무 못 불렀어요. 창피할 정도로. 아마 그때에 그 노래는 봉천동의 한 까페를 휴일 하루 빌려가지고 그냥 녹음 한 거거든요. 녹음 상황이 아주 열악했지요.

 

 

 

: 언제 만드신 노랜가요?

 

: 79년 민기형 만나기 얼마 전쯤에 만들었을 거예요. 멜로디를 먼저 만들었는데, 78년 가을에 우연히 써클룸에서 혼자 앉아 있다가 기타치다가 그냥 멜로디 라인을 잡았던 거고요. 그리고 그때 겨울방학 때 가사를 썼는데, 비교적 수월하게 썼어요. “공장의 불빛녹음하면서 쉬는 시간에 한번은 친구들이 바람을 잡아 민기형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어요. 일종의 오디션처럼. 민기형이 그 형 특유의 진지한 태도로 들으시더니만 탁 웃음을 터트리더라구요. 그러더니완전히 밥 딜런이군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사실 좀 고무된 부분이 있었지요. 이런 표현을 쓰기는 뭐하지만, 일단 그렇게 전설과 같은 사람이 호의적으로 봐 주었다는 거, 그건 상당히 용기를 주는 거였지요.

 

 

 

: , 아까 <(나의) 노래>를 정말 못 불렀다고 하셨는데, 그 노래는 어떻게 불러야 했나요?

 

: 그 노래는 락적으로 불렀어야 했어요. 그 노래는 사실 자기 고백적인 노래이고, 자기 밑바닥에 있는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면 된다고 봐요. 테크닉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있는 기운을 그대로 밖으로 토해내는 그런 기분으로 부르고 싶었어요.

                                        

 

 

: 뭐라고 할까요? 하여튼 목에 힘이 엄청나게 들어갔던데요.

 

: 그래서 못 부른 거지요. 그 노래를 제가 듣기에는 힘을 줘야할 때와 안 줘야 할 때를 전혀 거꾸로 했다는 느낌이예요. 그래서 제가 듣기에도 민망스럽다니까요.

 

 

 

: 하하. 근데 그 노래를 어떻게 김광석씨가 리바이벌해서 부르게 되었나요?

 

: 제가 광석이를 알게된 것은, 광석이가노래를 찾는 사람들활동을 하던 때였어요. 85년 여름이었는데, 방학을 이용해서 한국에 와있었어요. 그때 민기형 사무실에서 광석이를 처음 만났지요. 광석이가노래를 찾는 사람들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그 이후로 몇 번 더 만났고요. 89년에 한국에 왔을 때 광석이하고 여러 번 만났어요. 그때 자기 음반에 그 노래를 넣고 싶다고 그러더라구요. 광석이가 솔로로 데뷔했고, “동물원활동 등을 통해서 어느 정도 인지도도 있고, 가수로서 점점 활발하게 활동을 하던 시기였어요.

 

그때 치환이도 같이 어울렸는데, 치환이는 <나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고 싶으면 하라고 그랬지요. 그러고 미국에 갔는데, 아무런 얘기가 없더라구요. 나중에 광석이의 두 번째 솔로 앨범이 나와서 보니깐 <노래>가 없더라고요. 솔직히 기분이 별로 안 좋았죠(후후). 그런데 나중에 어떤 후배가 김광석의 앨범에 내 노래가 실렸다고 하더라고요. 세 번째 앨범이었죠? 거기에 <노래>하고 <나무>가 있더라구요. 한편으로는이제서야 내 노래를 앨범에 담았구나싶었고 또 한편으로는근데 왜 나한테 연락을 안 했을까? <나무>는 치환이가 한다고 했는데…’ 아마 연락을 했으면 하라고 했겠지요. 내가 미국에 있었으니 연락할 길이 막막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연락도 없이 취입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어요.

 

: 김광석 씨가 부른 노래를 들으니까 어떻던가요?

 

: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요. 전혀 다른 노래가 되어 버리고 내가 표현하고자 한 느낌과는 전혀 상관없는 노래가 되어버렸으니까요. 게다가 가사도 내가 분명히 새로 고친 것을 줬는데, 아마 중간에 그것을 잃어 버렸는지, 옛날 노래 책에 나왔던 대로 했더라고요. 솔직히 마음에 안 들었어요. 솔직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근데 역설적으로 보니깐, 그나마 광석이의 지명도도 있고 또 대중에게 다가가기 쉽게 가벼운 컨츄리풍으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려지게 되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만일 내가 생각했던대로 포크락적인 느낌으로 갔다면 일반대중이 받아들이기에는 좀 거리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니까요.

 

 

 

: <(나의) 노래> 가사를 보면, ‘어둠/밝음혹은보임/안 보임처럼 양분된 세계를 표현한 것 같던데요.

 

: 그렇지요. 노래가 울려 퍼진다면, 어둠이라도 밝음이 될 수 있다고. 물론 상당히 개인적인 얘기지만 저의 노래 성향도 결국은 그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겠죠. 그 당시 저는 우울한 상태였어요. 개인적으로 불안감에 시달렸고 우울함이 주조였어요. 그런 개인적 성향과 시대의 분위기가 어우러지면서 노래에 대한 나의 견해랄까 혹은 철학이랄까를 피력해 본 거죠. 내게 노래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노래에 대해서 무얼 기대하고 있는가 등등. 그 당시 나는 주관적으로 그렇게 어둡고 아무 것도 정말 뵈지 않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다는, 어떤 갑갑함을 늘 가지고 있었어요.

 

 

 

: 그런 감성이 아무래도 노래에 반영되었겠죠? 그렇지만 <신개발지구에서> 같은 노래는 무척 세련되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곡의 변화도 크고 박자도 미묘하고.

 

: 하지만 음악적으로는 보면 <신개발지구에서> <나무> <정원>에 비해 전혀 새롭지가 않아요.

 

 

 

: <신개발지구에서>는 황량한 공간에서 오는 고립감 같은 느낌을 주로 표현했다는 생각인데요.

 

: 주위 세계가 정말 황량하게 느껴졌어요. 저의 내면이 황량했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나한테는 별로 아름답지 않고 마음을 밝게 가질 수 있는 삶의 모습들이 아닌 거예요. 소위 근대화되고 있는 그러한 환경에서 우리 삶의 모습, 세상의 모습이라는 것이 참 황량하다, 음울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참 쓸쓸하구나, 밝지가 않네, 기쁘지 않네.. 그렇게 느꼈던 거 같아요.

 

 

 

:  <쐬주>는 어떤가요? ‘대낮의 용기들이 밤이 되자 뉘우침으로 바뀌는 자리에 우리는 이 자리에 모여 쐬주를 들이켜고 있다.’ 근데 분위기 자체는 가슴 속 회한이나 응어리가 그득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고 그냥 소주만 털어내고 있는 광경 같거든요. 그것도 마찬가지로 너무 지식인적(‘쁘띠적‘)이라고 얘기할지도 모르지요. 행동이 아니라 어떤 무력감을 표현한 것이니까요. 어쨌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도움 안 되는 정서겠죠.. 이 두 노래도 안치환씨가 리바이벌 했던데요.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 광석이의 <나의 노래>보단 낫다고 생각해요. <나의 노래>라는 제목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왜 이렇게 붙였는지. 이건 노래에 대한 노래여서 제목을 <노래>라 한 건데, <나의 노래>라고 하니마이 송같은 팝송처럼 느껴지더라고요.

 

 

 

: <그루터기>는 야학의 교가고 <바람씽씽>은요?

 

: 친구의 친구가 만들었던 가사를 허락도 없이 제가 한번 만들어 봤구요. 나중에 역시 허락도 없이노래를 찾는 사람들첫 앨범에 실렸어요. 제가 보기에 작곡자의 의도하고 제일 가깝게 된 것은노찾사 1에 나온 노래였던 거 같아요. 아마 메아리를 같이 하면서 공연도 했던 친구들이 만들었던 음반이라서 그랬는지도 몰라요.

 

 

 

: 양희은 씨가 부른 <정원>은요?

 

: 사실 이거 다 나오는 거지요? 민기형이 편곡을 했는데, 전 과했다는 생각이에요.

 

 

 

: 그 노래는 누가 선택하신 건가요?

 

: 민기형이 선택 했지요. 그 음반은 민기형이 프로듀싱한 거나 다름없으니.

 

 

 

: <비료지기>는 다른 노래에 비해 다소 예외적인 노래라고 생각됩니다. 어린아이의 시선인데 어떻습니까?

 

: 아이가 쓴 거지요. <비료지기>는 가장 초기에 만들었던 노래에요. 노래는 내 대학동기인 여자 친구가 불렀고요. 잘 부른 거 같아요. 전반적으로 제가 만든 노래들이 좀 둔탁하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세련된 멜로디의, 세련되어서 자연스러운 느낌이 좀더 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 이 노래가 예외적이라고 느낀 것은, 그 시절 전후로 김민기의 노래극아빠얼굴 예쁘네요도 나오고 김창완의 동요, ‘시인과 촌장이나 동물원의 노래 등을 통해 어린시절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 같은데, 혹시 공유되던 분위기가 있은 것인지 궁금한데요?

 

: 아니요, 그런 거는 전혀 없어요. 제 노래에 유독 G키가 많은데 그 당시에는 G키가 좀 우아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죠. 당시 내가 듣던 통기타 음악들의 우아한 느낌하고 선이 닿아있는 거 같아요. 그리고 그냥 말 그대로 내가 공감하는 가사를 보고 내 식대로 음을 실은 거지요. 솔직히 <비료지기>가 어디 시골에서 자라는 아이가 부르는 그런 종류의 감성인가요? 팝송 좀 듣고, 동요 풍으로 만들었다 뿐이지.

4. 2 <노래>를 찾아서 – 2000년대

 

 

 

독자 들도 느끼겠지만 한동헌 씨는 자신이 만든 노래와 그 시절의 삶에 대해 다소간 거 리를 두려는 인상이 강했다. 스무 살 청춘의 시절로 돌아가 그때의 느낌을 되살려내려는 의도는 물론 억지라면 억지에 가 까울 터이다. 지금 이곳에서의 시각의 개입 없이 그때를 되살리는 일은 무모한 짓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주조는 이랬다. 너무 관념적이었다, 쁘띠부르조아 취향이었지, 행동보다는 관조 풍이었다는 게 한동헌 씨의 자술서 표면에 박힌 글자들이다. 하지만 역시 독자들도 눈치챘겠지만, 중간중간 한동헌 씨는 자기 나름의 개인적 진정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혹시 80년대를 한국에서 보내지 않았다는 게 커다란 부채로 작용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솔직히 나 또한 그 점에서는 인정하기 어렵다. 어 쨌거나 나이 40이 넘은 자가 자신의 허리를 접어 다시 스무 살 시절의 분위기를 반추하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가? 그 속에 서 한동헌 자신이 깨친 바가 지금의 삶에 작용하는 지점이 없다면 오늘의 인터뷰란 기껏해야 호사 취미에 그치고 말 것 이다. 나는 조금씩 절박해지기 시작했다. 

 

 

 

: 벌써 20여 년 전 대학생 시절을 지금 돌이켜시와 노래가 내 인생의 힘이고 양식일수 있다는 스무 살 시절을 지금 마흔이 넘으신 상태에서, 돌이켜 봤을 때 감회라고나 할까?

 

: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가장 충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직접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라 믿어요. 여전히 노래를 만들고 싶은,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있어요. 그건 상당히 오래됐어요. 제 인생에 몇 번의 위기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가 79년부터 80년 동안의 상황이었고, 그리고 미국에 있던 87년에 또 한번의 위 기가 왔었어요. 앞이 잘 안보이고 그럴 때 노래가 다시 그리워지더라구요. 그리고 그런 마음이 들 때 다시 음악을 많 이 찾게 되더라구요. 87년 겨울에 한국에 왔었는데, 그때가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하던 때였어요. “노찾사하는 친구들을 만나서 음악얘기도 하고, 또 한번 데모 테이프도 만들었어요. 그러 다가 미국에 다시 들어가 버려 흐지부지 되었지요.

 

 

 

: 그러면 직접 곡을 만들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거의 없는 건가요?

 

: 제가 음반을 낼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곡은 쓰고 싶어요. 제 능력 부족 탓이 기는 하겠지만 아직 정리를 못하고 있어요. 오랜 동안 하고 싶었던 작업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노래>의 후속편을 만드는 거예요. <노래> 가사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다지 주목해 주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진리와 양 심의 금문자(金文字) 찬란한 그 빛에 눈멀지 않으리라는 내용을 담았어요.

 

 

 

한동헌 씨는 개인적으로 특히 <노래>라는 자신의 작품에 집착하는 듯하다. 아 마 자신이 직접 가사와 곡을 다 쓴 유일한 작품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대목에서 김광석의 < 나의 노래> 가사가 원래의 가사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문제의 구절은 거의 끝 부분에 있다. 김광석은 <나의 노래>에서 그 부분을수많은 진리와 양심의 금문자, 찬란한 그 빛에는 멀지 않으리라 고 불렀다. 한동헌 씨는 1979년에 그 대목을수많은 진리와 양심의 금문자, 찬란한 그 빛에 눈멀지 않으 리라고 불렀다.

 

 

 

: 원래 가사는내가 현혹당하지 않겠다라는 얘기였거든요. 거창한 진리나찬란하고 화려한 빛보다는 오히려 주변 일상과의 사소한 만남을 통해서 나는 무엇을 찾겠다, 내가 마치 노래나 시에 서 찾는 무엇을 사람들 사이의 연결, 관계에서 찾겠다는 그런 얘기였어요.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나는 부르리 나의 노래를 , 나는 부르리 가난한 마음을, 그러나 그대 모두 귀기울일 때 노래는 멀리멀리 날아가리라고 했어요. 예술이라는 것도 상당히 추상적인 한 형태로 있는 거잖아요. 우리에게 추상적인 그 무엇. 무상하고 사라져버리는 것인지도 몰라요. 그런 안타까움을 표현한 거예요. 또 그게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은 아닌 듯하다는 느낌을 전하고 싶었고.

 

 

 

: 온다고 하더라도 순간순간 아닐까요?

 

: 그렇죠. 그렇다고 해서 허무한 것이라 보지는 않아요. 물론 솔직히 다소의 무 상감이나 고통과 절망감이 어느 정도 담겨 있기도 해요. 근데 이제 보니까, 그렇게까지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다, 순간적 인 아름다움이건 불완전함이건 간에 그것을 추구해나가는 행위 자체가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게 돼요. 노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지는 것 같아요. 물론 독단일 수도 있지요. 지금은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 내가 과연 노래에 대해 과연 무얼 바라는가, 이게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보는가. 이런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 싶어요. 그래서 <노 래>의 후속곡을 하나 만들고 싶고요. 그런데 그게 아직도

 

 

 

문단에 떠도는 재미있는 속설 하나. ‘사람들은 다들 뛰어난 작가가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작가의 길을 포기하면 대학에 남아 비평가 노릇을 한다. 그것도 못하면 문학잡지를 한다.’ 소위예술동네에서 는 아무래도 직접 만들어내는 자들이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머지 일들은 다 작품에 기생하는 일처럼 느 껴지니까 말이다. 개인적으로 난 가수들이 부럽다. 그들은 자신의 삶 자체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통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뭐가 그리 잘 났다고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 떠들어대는지 뻔뻔스럽다는 생각도 들지만, 부럽다는 게 솔 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요구할 게 많다. 

 

우연한 기회에 케이블 TV에서 어느 가수가 인터뷰한 내용을 보게 되었다. 민중가수에 서 대중가수로 변모하는 과정을 회상하면서, 자신은 90년대를 참으로 힘들게 보냈다고 했다. 어둠의 터널을 거쳐 고투한 결과가 지금의 자기 모습이라고 했다. 난 순간 흥분했다. 그래 당신이 힘들었다는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힘드니 힘들 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넌 힘들다고 어둠에서 헤맨다고, 그냥노래해도 되는 곳에 있지 않았느냐! 그래도 넌 괜찮지 않냐고. 같은 시대를 산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힘들어도 힘들다고 비명 지를 수 있는 통로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더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얼마나 큰 혜택을 누리는지 아느냐. 그게 자신이 살아온 시대에 대한, 아울러 그 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가 아니겠는가! 치기 어린 투정이었음을 내 모르 는 바 아니다. ‘그들에 대한 부러움이 그만큼 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 ,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이해가 되는데 그게 지금 무슨 의의가 있다고 생각 하시나요?

 

: 저는 이제부터인 거 같아요. 전 이제 음악을 업으로서 하고 있거든요.(인터뷰 당시 한동헌 씨는 음악 관련 제작·기획 일을 하고 있었다) 음악이라는 제한된 분야에서이기는 하지만 전 한국이라는 세상을 바꾸고 싶거든요. 음악이 세상을 바꿀 리는 없지만 세상이 바뀌는 자리엔 반드시 음악이 큰 역할을 한다고 믿지 요.

 

 

 

: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요? 세상을 바꾼다 하니 떠오르는 생각인데, 함께 메아 리 활동을 했던 많은 사람들이 80년대의 한동헌 씨와는 다른 삶을 살았잖아요? 노래운동을 한 분들이 많고요. 문승현 씨 같은 경우가 대표적일 텐데. 그런 분들과 적잖은 이질성을 경험하실 수도 있을 듯한데 그것에 대한 부담감 불편함은 없 으신가요?

 

: , 당연히 있었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지금까지 제가 그다지 헌 신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지는 못했다고 해도 이제부터라도 내 위치에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을 창출하겠다고 마 음을 먹었고, 다른 분들의 희생과 헌신을 내가 제대로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그래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해요. 그렇 지만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면 된다고 마음을 먹고 있지요. 그러니깐 가벼워지더라구 요.

 

 

 

: 대학 시절 썼던 곡들에 대해서 80년대 이후에 노래운동 내부에서 다양한 비판 이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 정당하다 정당하지 않았다 라는 문제가 아니라, 있었던 것을 없어져야 할 것이라 부정하고 그래서 억압함으로써, 90년대 이후에 우리가 뭔가 많은 것을 모색해야 했을 때, 우리가 우리 경험 속에서 그만큼 풍부하게 정말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이거든요. 그럴 때 스스로 배제한 쪽에서 그 배제와 부정 의 과정을 반성하는 장면을 보여줘야 한다고 봅니다. 전 거기서 새로운 사상과 전통이 형성된다고 봅니다. 적잖이 풍부한 계기를 내포하고 있는 우리의 역사적 경험을 우리 스스로가 옹색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나 하는 우려가 듭니다. 이게 제가 오늘 한동헌 씨를 뵈러 온 동기이기도 하고요.

 

: 저는 그만큼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지난 100년 간의 우리 역사라는 것은 참으 로 스스로를 파괴시켜온 역사 같아요. 물론 일본이라는 아주 직접적인 가해자가 있고, 서구열강이라는 가해자가 있 었고, 미국이라는 존재도 그렇고, 남북 분단의 문제도 있지만, 그 와중에서 무언가 너무 쉽게 버리고 너무 당위에 매몰되고 말았던 듯해요. 특히 문화적 생산물들은 정면에 나섰다가 뒷골목으로, 또 뒷 구석으로 처박힐지언정 하나의 무엇으로 남아서 어떤 흐름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런 면에서 참 파괴적이었던 거 같아요. 그냥 버리고 마니까요. 그러니까 뭐 가 축적되고, 축적되는 와중에서 진화하고 어떤 새로운 것이 생성될 수 있는 그런 풍토가 전혀 아닌 것이 너무 안타깝구 요.

 

 

 

: 지금 음반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을 하시는 것으로 아는데, 지금 하시는 일 이 지금 하신 말씀과 관련이 있나요?

 

: 저는 음반사를 하고 싶어요. 음반사업을 한다면, 하나의 비즈니스로서, 하나 의 조직화된 형태로서 하는 거고, 결국 기획, 제작부터 유통까지 다 아우르는 일이 되겠지요.

 

 

                                                                                   

: 한국에서 기획사가 한둘이 아닌데요? 뭘 하시고 싶은 건가요?

: 저는 정석대로 기본에 충실하게 하고 싶지요. 죽이면서 장사하고 싶지는 않아 요. 음악을 살리는 식으로 사업을 하고 싶다구요. 요즈음 행태는 문화적 생산물이라고 하기가 참 어려워요. 어떤 역사성을 가지 고 지속력, 지속적 생명력을 가지기에는 어렵다고 봐요.

 

 

 

: 가능성이 있습니까?

 

: 저는 있다고 봅니다. 문승현 같은 친구나 현실을 잘 아는 사람들은 아주 비관 적으로 보는 거 같지만요. 항상 어느 때에나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어요. 주류와 비주류가 함께 가는 시스템이 갖추어 져야 한다고 봐요. 그러니깐 주류가 언제까지나 주류가 아니고 항상 주류와 비주류는 서로 교체해 가면서 이렇게 나왔던 거니 까. 새로운 세대가 늘 나오고, 그들이 갖는 체험은 과거의 연속선상에 있으면서 또 새로운 거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 리가 지금 없어요. 그렇게 될 수 있는 어떤 구조를 만든다, 이게 중요한 거 같아요.

 

 

 

: 얼마나 걸릴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 근데, 거기에는 사실 사람과 돈이 필요하지요. 그리고 지금 현재 어쨌든 주류 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힘은 만만치 않아요. 그 사람들도 피땀을 흘려서 이룩한 거지요. 그게 그렇게 쉽게 바뀌지 는 않겠죠. 다만 이런 생각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여럿 있고, 또 단초로 보이는 앨범들이 있어요. 저는 5년 이내에는 어떤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수 있다고 봐요.

 

 

 

: 갈 길은 멀고 힘들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 희망이 있으니깐 하지요. 제일 부족한 것이 자본이지요. 그러니깐, 몇 년의 시행착오를 그들과 함께 무료 봉사도 할 수 있는, 그러한 물적 토대가 필요해요.

 

 

 

: 이미 시작하신 상태십니까? 아니면 곧 시작하실 건가요?

 

: 아직은 제대로 못하고 있구요. 주류 쪽은 그렇고, 비주류 쪽은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다시 살려서 음반사 형태로 다시 하려고 그래요. 비주류라고 해서 영원한 비주류는 아닐 꺼고, 한때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음악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던 때가 있었잖아요. 80년대 말 90 년대 초예요. 그러니깐 그러한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은 없지요. 저는 사실 그때 음악은 정치나 사회운동과 같은 더 높은 명분을 위해서 잠시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고 봐요.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때문에 연속성을 못 갖고 그냥 10년 가까이 죽어 있었던 거 같고.

 

 

 

: 오히려 그 때문에 자기 재생산의 시스템 구축에 실패했다는 뜻인가?

 

: 찬스가 있었는데 못했어요.

 

 

 

: 그걸 지금 하시겠다?

 

: , 저는 재생산 구조를 만들고 싶은 거죠.

 

 

                                                   

: 가수를 중심으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음악의 종류를 중심으로 생각하시나요?

 

: 둘 다 접근해야지요. 사실 더 어려운 부분은 창작자의 존재지요.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사람요. 또 그걸 제대로 연주, 노래할 사람이 있을까 다 의문이지요. 심지어 사운드 엔지니어링도 마찬가지 예요. 그 구체적 수준에서 볼 때 쿠바, 멕시코, 인도, 브라질, 아프리카 등등의 곡 자체나 사운드나 연주 수준은 세계적 수준 이에요. 한국은 그 수준에서 보면 많이 부족하지요. 그나마 성취했던 사람이 김민기 선배였던 거 같아요. 솔직히 사 운드나 연주, 노래에서는 미흡하지만 곡은 당당히 겨룰 수 있는 수준이라고 봐요.

 

 

 

: 손상되었고 외면당한 그 전통을 되살리고 지금 조건에 맞게 부활시켜, 그것을 바탕으로해서 승부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 과거의 여러 작업들을 다시 정리하고 자료화하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왜냐하 면 그게 우리가 가장 약한 측면인 듯해요. 우리의 지난날을 되돌아 봐서 다시 이룰 수 있는 무엇, 그것에 너무 사람들의 시선이 안 가 있어요. 우리 자신이 바로 과거의 산물인데도.

 

 

 

: 큰 일을 하시려는군요. 제가 문외한이라 뭐라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아무쪼록 성과 있기를 바랍니다.

 

 

 

한동헌 씨에게 나는 7-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이들이 지금 현재 어떤 삶의 경로를 걷 고 있으며 그런 삶을 살아가는 데에 젊은 시절의 경험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보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한동헌 씨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격려했다. 얼마간의 대화가 더 오고갔고 그렇게 인터뷰 자체는페이드 아웃되었다. 잔상으로 처리하듯 난 한동헌 씨가 하고 싶어한다는 일을 되새김질했다. 한동헌 씨가 구상하는 일의 규모는 꽤나 커 보였다.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는 할 만한 일을 찾았다는 인상이 강했다. 그 일의 성취여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당연히 쉬운 길이 아닌 듯 보였다.

 

한동헌 씨는 내가 혼자 상상했던 외모와는 판이했다. 지방 출신 사람들이 흔히 써먹 는 사람 분류법 가운데 하나가서울놈/촌놈의 이분법인데, 이걸 가져다 대면 한동헌 씨는 확실히서울쪽이었다. 인터뷰 기사를 정리하는 동안에 나는 한동헌 씨에 대한 소식을 하나 들었다. 다니던 회사를 나왔다는 것이다. 무슨 이유로 그렇 게 된 것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자신이 꿈꾸는 일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 그랬는지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 다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동헌 씨의 인상이 결코촌놈은 아니었다는 사실만은 뚜렷하게 반복되었다. 한국 음악 의 장래에 대해서는 내가 짐작할 도리가 없지만 <노래> 후속편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은 비교적 간절한 편이다. 그나마 내가 아는한동헌 <노래>의 한동헌인 탓이다. 난 여전히 그 사람을 80년 대에 묶어 두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나야말로 정말 변하기 싫어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한 동헌 씨와 헤어지면서 내가 만나고 싶어한 사람이 정말한동헌이었는지 그 시절의였는지 혼란스러웠다. 사람들 속에서 난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