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아마도 이 말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수 없이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겪어 나가면서 가슴 속에 그리움으로 또는 순간마다 터져 나오는 피맺힌 절규와 같을 것이다. 어린 시절, 어디선가 길을 잃고 한참을 거리를 헤매이다 가까스로 길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집은 두려움과 공포로 어깨를 더욱 짓누르곤 했다. 항상 돌아가고픈 안식처가 되기도 했으며 성년이 되어서는 어머니를 통해 나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며 반성을 하기도 했었다. 너무나도 따스한 날이 계속되고 있다. 어머니와 마주 앉은 이 자리가 너무나도 따스하고 잘 드는 햇빛 아래 서 있듯이 포근하기만 하다. 마치 처음의 인터뷰를 준비하는 두려움 보다는 어머니와 이런 기회를 만들게 됐다는 기쁨과 벌써부터 치솟아오는 어머니에 대한 궁금함이 손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어디서 여우가 울어 여우가
윤)어머니가 태어나실 적 얘기 좀 해주세요. 어제 어디서 태어나셨는지?
어머니> 나는 너희 외할아버지 11남매의 맞이로 태어났어. 지독한 시골 농사꾼이셨지. 여러 동생들의 본보기로 행동이나 말, 걸음걸이까지도 항상 조심스럽게 해야만 했지.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면 풍암리 385번지에서 니 할아버지 이명훈, 할머니 박공예 사이에 4남 3녀의 장녀로 1948년 11월 8일 저녁에 출생했거든. 태어날 때는 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 작은아버지는 분가하셨고, 고모 한 분도 출가하셨고, 우리 식구는 넷이 고작이었어. 내가 태어날 때부터 별명두 가지고 있었지.
윤) 그 별명이 어떤건지요. 그리고 별명이 생긴 이유는 무언지요.어머니> 별명이 뭐냐믄 바로 “어디서 여우가 울어, 여우가” 였어. 무지하게 길지? 어머니가 나를 임신해 만삭이 되었는데, 어떤 군인들이 시냇물에 물고기 죽으라고 약을 뿌렸드래, 그 물고기들이 하얗게 죽어갈 때, 아버지가 밭에 가시다 그 물고기를 잡아오셔서 식구들이 해 드셨다 한다. 나를 낳으실 때 그 물고기를 드신 어머니가 정신을 잃고 있으니, 할머니와 친척 아주머니가 밤이 깊어 가는 것도 모르고 하룻밤을 민간요법의 약을 구하러 다녔는데 그때 여우가 유난히 울었다는 동네 사람들의 말에 친척아주머니가 하시는 말씀, “어디서 여우가 울어.” 그래 얻어진 별명이지. 친구들이 내가 나타나면 “어디서 여우가 울어.”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만 하지.
윤) 어머니가 태어날 때,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라도 있으면.
어머니> 태어나자마자는 아버지의 품에서 한 달을 컸고, 어머니가 조금씩 회복하시고서야 젖도 먹고 했다드만. 나중에 친척아주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너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신발을 삼아줘도 그 공은 같지 못할 것이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16세 이씨 가문에 시집오셨을 때는 숫가락 3개, 밥그릇 3개, 광에 들어가서 보니 보리쌀 한되나 되게 있는데 그것 가지고 3일을 먹어야 한다고 할머니가 말씀 하시드래. 그렇게 아끼고 가난했다는 것이지. 그래서 열심히 길쌈하고, 소, 돼지 짐승 키우고 아버지는 산에 나무도 해서 장에 갔다 팔고 품팔이도 해서 지금은 11남매를 다 장성시켜 결혼시키고 다 좋은 직장에 열심히 살고 있는 것 아니나.
어디선가 매미 우는 소리가 유난스럽게 들리고 있다. 이제 인터뷰의 첫 시작으로 어머니의 출생을 들으면서 ‘참으로 이상한 별명도 다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세대 같았으면 그런 별명 짧게 줄여 그냥 “여우야“하고 말텐데. 어머니의 친구들은 끝까지 그렇게 불렀단다. 어머니의 고향은 전라도 그리고 시집을 오신 후는 충청도에서 사셨다. 가끔 어머니는 충청도 말씨를 쓰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전라도 말씨를 쓰기도 하신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 역시 충청도 사람이면서, 어느 순간 충청도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사투리를 주절주절 대는 경우도 많았다.
아주 무서운 아버지셨다
이제 할아버지의 등은 가을 들녁의 벼이삭처럼 굽어 있다.
언제나 나를 올려다보시는 할아버지.
그 분이 그리 무서운 분이셨다는 건……
감덕 양반, 감나무가 유난히 많은 우리 외가집 때문에
할아버지는 동네서 그리 불리셨다.
윤) 외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어머니가 태어나시기 이전, 예를 들어 젊은 시절엔?
어머니> 느그 외할아버지는, 어려서 아버지를 일찍 잃고 많은 고생을 혼자서 하셨다고 하드라. 외할아버지는 가끔 “젊은 느그 할머니가 일찍 혼자 되니, 일본시국에 논도 밭도 다 뺏겨 고생이 너무나도 많았다. 어깨너머로 한글을 깨우친 것이 지금 생각해도 다행이다.” 말씀하시더니, 지금은 79세나 되셨다.
윤) 혹시 외할아버지가 항상 하시던 말씀 중에 생각나는 것이 있으시면?
어머니> 외할아버지가 집안에 가훈처럼 하시는 말 중에 ‘항상 정직하고 네 힘으로 네가 살아라. 남의 신세를 지지 말고 하다못해 어딜 가든 차비 한 푼 바라지 말고 네 힘으로 네가 살아야 한다.’ 항상 이 말씀은 하셨다. 뭔 잘못을 해도 멀리 타지에 나갈 때도 아님 자신이 먼 길을 가실 때도 항상 당부처럼 하시는 말씀이었다.
윤) 할아버지, 그러니까 어머니 아버지는 얼마나 무서운 분이신지. 외삼촌들은 두 손을 휘휘 젓던데요.
어머니> 말두 하지 마라. 세상에서 제일 엄격허신 아버지일거다. 느그 삼춘들은 잘 모른다. 아버지는 전주 이씨 양반의 행세를 많이 하셨고, 우리집이 종가집이라 제사도 많았고 손님들이 항상 끊이지 않았다. 행여 부엌에서 칼 소리만 조금 커도 혼내시고, 제사 때 떡방아소리만 담을 넘어가도 혼이 났다. 무로 열 두 가지 반찬을 만들어도 도마 소리를 내지 말라는 아버지였다. 손님들이 오시면 꼭 방에 들어와서 공손하게 인사시키고, 15세 이후에는 외가집이 이웃마을에 사시는데도 가지 못하게 하시며 샘에 물 길러 갈 때도 남동생들을 뒤딸려 보내셨다. 전주 이씨 양반집에서 연애결혼 할까봐 그렇게 자유를 주시지 않았다. 아주 무서운 아버지셨다. 100원을 쓰면 10원이라도 벌어야 한다는 아버지셨다.
할아버지를 이야기하는 어머니는 눈물이 그렁그렁 하시다. 그러시는 분이 우리 손주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좋으시기만 하시다. 예전에 큰삼촌이 조선대학교를 다닐 적에는 할아버지가 쌀만 덩그러니 주시고 용돈이고 밑반찬이고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으셨단다. 사람은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해 봐야 한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말씀이시란다. 그래 삼촌은 소금에도 밥을 먹고 고추장 하나만 놓고 밥을 먹기도 하셨단다. 벌써 오랫동안 천식으로 고생을 하시는 할아버지. 언제나 새벽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굽은 허리에 고무신을 신으시고 항상 온 집안을 휘휘 돌아다니신다. 그런 발소리와 기침소리에 나도 아침 뉴스 시간이 되기 전이면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다. 광주에 나가 사는 삼촌들이 제발 광주 시내로 나오시라 해도 할아버지는 ‘사람은 한 곳에서 지긋허니 살아야 헌다.’ 하시면서 시골집에서 혼자 밥해 드시고 빨래하며 사신다. 내가 보기엔 할아버지는 부지런하시고 항상 너그럽기만 하신 분이시다.
윤) 외할아버지가 그렇게 무셔 우셨다면 어머니 할머니도 그렇게 엄하셨는지요?
어머니> 아니다, 아녀. 아버지를 가르치신 우리 할머니는 이 세상에서 법이 필요 없는 분이셨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우리 할머니가 너무너무 좋으신 분이고 인자하고 항상 자신보다 남이 먼저다 생각하는 분이란다. 길을 가다가도 남에 밭에 풀이 많으면 뽑고 가신 분이라고 하신다.
윤) 그럼 어머니가 사시던 시골 마을은 어떤 곳이었나요?
어머니> 우리 마을은 양옆으로 예성산이 있고, 너두 알지만 마을 앞으로 가로질러 철길이 있지. 그 철길을 건너면 시냇물이 아주 맑아 다슬이도 잡고 낚시를 하며 그 자리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들에는 할미꽃, 쑥, 미나리 나물이 많고 몇 분 거리에는 송석정이라는 정각이 있어. 거긴 물이 맑아 광주에서도 기차를 세를 내 여름에는 많은 사람들이 놀러왔었다. 동네 옆으로 간이역이 있는데 지금은 무궁화도 정거를 하지 않지만 우리 어렸을 적에는 하루에 몇 개의 기차는 다 정거 할 만큼 꽤 컸어. 시장가는 거, 학교 통학하는 거, 지금은 집집마다 다 차가 있고 버스가 많이 다니고 교통이 너무 좋아져 옛날을 상상하기가 힘들다.
내가 열 살 적쯤인가 외가에 놀러가 이모들과 냇가로 물놀이를 하러 나간 때가 있었다. 정신없이 놀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당황을 하다 물을 몇 모금이나 먹었는지, 그때 이모들이 구해주지 않았으면 더 이상 햇빛보기 살기 힘들었을 거다. 이모들과 물놀이가 좀 이상하다 생각되겠지만 우리 막내 이모 나이가 나와 동갑이니 친구처럼 지낼 수밖에.
윤) 외할머니가 딸만 셋을 계속 낳으셨는데, 외할아버지나 증조할머니는 어떠셨나요?
어머니> 그래, 우리 어머니는 딸만 셋을 쭈루루 낳고, 또 아들 넷을 쭈루루 나셨다. 딸 둘을 나시고, 이제 고만 낳아라해서 딸막이라 너 작은 이모를 그렇게 불렀다. 셋째로 또 딸을 낳고 울고만 계셨다. 아버지가 남부끄럽다고 삼신상에 물도 떠놓지 못하게 하셨어. 딸 셋을 낳으실 때에는 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죄다 암놈만 낳고, “우리 집에는 왜 이렇게 여자만 흔하냐“며 얼굴이 펴지질 않으셨지.
윤) 어렸을 적, 집안 생활과 어머니의 생활은 어떠셨어요?
어머니) 우리집이 조그마한 초가집 방 2칸, 어머니는 길쌈으로 항상 잠이 부족했고, 할머니는 항상 밭으로, 아버지는 논으로. 우리 딸들은 초등학교에 갔다오면 책 보따리 내던지고서 소꼴 배러가고 들에 매여 놓은 소를 이리저리 풀 많은 곳으로 끌고 가 풀을 뜯어먹게 하고 산에 나무하러 다니고 날마다 학교숙제는 새벽에 일어나서 하고 한시도 쉬는 틈이 없이 일만 해야했다. 그래도 잘못하면 아버지한테 매를 맞고 어렸을 적에 너무 일을 많이 해 나의 결심은 시집가서 현모양처 공무원한테 시집가야지. 일 좀 그만하고 도시로 시집가야지 결심했지. 여섯 살 때부터 동생들 안아주고 업어주고, 남동생들 너무 억세고 항상 동생들 뜻 다 받아주고 밥 먹여주고 애기 업고. 모내기 때나 밭 메러 가시며 동생들 다 맡기시고, 아버지는 항상 소하고 싸우며 일을 많이 한 탓인지 매년 논을 사시고 몇 천 평은 마련하셨을게다. 억척스런 아버지셨지. 양반은 못나도 양반이라고 하시는 어른이다. 정말 큰 어른이지.
윤) 그럼, 어릴 적 엄마의 친구들도 있었을 거 아니예요? 외할아버지께서 친구들과 잘 놀게 하셨는지.
어머니) 열 여섯 때이던가. 친구들이 용돈을 조금씩 모여 학교 운동회를 보러 가자고 했어. 나는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느그 외할아버지가 돈을 주실 리도 없고 해서 달걀을 2개. 그러니까 그때 달걀 하나에 2
원50전이고 2개니까 5원이었지. 그걸 손수건에 몰래 싸서 닭 둥우리 옆에 감춰 두었다가 달걀 장사 오면
팔아서 운동구경 가야지 했는데, 아버지가 양말을 찾다가 그만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는 식구들을 다 모여
놓고 누가 달걀을 손수건에 싸두었느냐며, 손을 보면 안다, 손들을 펴봐라 그러시는 거야.
그런데 도둑놈 제발 저린다는 말대로 내가 겁을 먹고 손을 반만 펴 보이니, 그만 알아차린 아버지,
부지깽이를 미리 준비해 내 팔목을 잡고 얼마나 때리시던지 한쪽 팔을 들 수도 없었다. 한나절을 울고 또
울고 아버지가 너무나도 미웠다. 저녁에 잠을 잘 때도 그냥 눈물이 나온다. 다음날 아침, 조용히 아버지가
부르신다. “너 이리 들어와 앉어라. 어제 운동 귀경 간다면 돈을 줄 것인데, 왜 그런짓을 하느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 앞으로는 다신 그러지마라. 어느 부모가 자식을 때리고 싶것냐. 너희들 버릇을 잡기
위해 내가 때렸다.”라고 조용히 충고하시드라. 그럴 때는 눈물이 더 많이 나오는 것이지.
윤) 정말 외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 알고도 남네요. 그런 일이 더 없었나요?
어머니) 그 할말 다하면 오늘 날밤 새도 모자르다. 그러니까 그게 스물 한 살이 되던 겨울인데, 옆 동네에 그 날 새 색시가 시집을 왔었다. 동네 사람들도 다들 색시 구경을 갔었거든. 나도 친구들과 저녁에 구경을 갔다가 한밤 중 몰래 살금살금 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갑자기 부엌에 숨어 계시던 아버지가 막대기를 들고 오시더니 다 큰 처녀가 어디 색시구경을 다니냐며 너무 때리셨다. 그때는 야속하고 밉기만 하시던 아버지이신데, 지금은 너무너무 인자하시다. 그 성질 꼬부라진 허리만큼 줄어드셨나 보다. 그만큼 기력이 없으신게지. 그래도 우리가 미워서 그랬겠나. 아무 일 없이 잘 키워 시집 잘 보낼려고 그러셨겠지 싶다.
너무나도 우스운 옛날 옛적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 가난과 배고픔에 대한 이야기를 어머니의 입을 통해 듣고 있으면 한없이 우울해지더니만 어머니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삼촌, 이모들의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지금은 다들 불혹의 나이를 넘긴 분들이 했던 일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을 만큼 어울리지가 않으니. 점점 인터뷰는 어머니의 표정에 따라 흘러가고 있다. 나 역시 어머니를 인터뷰하는 삼자의 입장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어머니의 자식으로 묻혀가고 있는 듯 하다.
윤) 그럼 큰 삼춘을 낳은 이후는 어떠셨는지.
어머니> 그래. 그러다 네 번째는 아들. 왠일인가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 보이시고 싱글벙글, 딸 셋인 우리에게도 너무 잘해주셨어. 할머니는 첫 국밥을 하시는데, 산 속에 있는 샘에 가서 물길어다 주시고 불도 때 주시고 딸 낳았을 때와는 아주 딴판이셨단다. 다섯째도 아들, 여섯째도 아들, 일곱째도 아들. 마을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보고 늦복이 터진 사람이라고 하셨어.
그래서 난 참 좋다. 이모들이 나이가 많은 것이 조금 아쉽지는 하지만 삼촌들과의 연배 차이가 얼마 없으니 내가 어릴 적에 삼촌들의 방문은 반가운 사촌형이 놀러 온 것처럼 부담이 없었고 즐겁기만 하였다.
왜 억척스레 공부하지 못했을까
내가 어릴 적에 부모님의 학력을 적어 오는 날이면
언제나 나는 어머님을 속이고
중학교란에 동그라미를 그리곤 했다.
초등학교만 나오고, 공부를 하지 못했다는 것.
하지만, 그만큼 어머니는 세상을 먼저 배우셨다.
윤) 어머니 초등학교 다닐 적에는 어떠셨나요. 공부는 얼마나 하셨는지?
어머니) 그러니까 여덟 살 나면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양북교라는 조그만 학교지. 1학년 때는 결석을 30번을 넘겨 했고, 성적도 우 이상을 찾기 힘들었고 매양 양과 미. 지금 생각하면 소꼴배랴, 나무하랴, 아버지 따라 논매랴, 공부할 시간이 아예 없었다. 4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더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소 풀을 뜯기로 갈 때는 책을 가지고 가서 소가 풀을 뜯어먹을 때 국어 공부하고 산수하고, 들에서도 숙제를 하고 책을 읽고 공부 맛을 알았던 것 같다. 그래 5학년 6학년 때는 미, 우로 성적표가 좋아졌지.
윤) 어머니의 동네 친구는 몇이나 되었고, 학교도 수업료를 내야 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것은 꼬박꼬박 낼 수 있었는지.
어머니) 그때 아마 우리 마을에서 5명의 여학생이 우리 동창이었지. 나랑 별반 차이두 없었지. 공부하는 것두 비슷하구.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수업료가 아니라 육성회비라고 있었지. 그거 늦게 내면 공부도 안 시키고 집으로 돌려보낸다. 그래 집에 와서 “아버지, 선생님이 육성회비 가지고 오란다.”하면 아버지가 막대기를 들고 “이 자식아, 다음 장날 준다고 선생님한테 이야기해라 안 하드나.”하고는 다시 학교로 ?i으신다. 그럼 조금 가는 척 하다가 마당 싸리문에 쭈그려 앉아 있는다. 그러면 아버지는 이웃집에서 빌려주고 장날 곡식을 내서 장에 팔아 갚고는 했지. 그때는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한번은 6학년 때 모내기를 해야되는데 비가 오지 않아 몇 일을 아버지가 밤잠을 들에서 주무시며 물이 닿기를 기다리셨다. “우리 순서가 왔다. 오늘은 너 학교 가지 말고 저수지에서 물이 오니 모심자.”하셨다. 그래, 학교를 가고 싶어 몰래 빠져나갔지. 2교시 때, 우리 반 애가 “너 할머니가 오셨어. 빨리 나가봐.”그러더라. 역시 할머니가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나를 데리려 오신 것이다. “얼른 가자, 빨리 가서 모심자.” 그 더러운 옷을 입고 오신 할머니를 친구들이 볼까봐 선생님께 말도 없이 논으로 가는 적도 많았다.
윤) 그러면 학교에 입고 다닐만한 이쁜 옷도 없었겠네요. 외할아버지가 옷은 자주 사주셨나요?
어머니) 그걸 말이라구. 명절 때뿐이지. 그나마 명절이 되면, 왜 그렇게 좋은지. 구정, 추석 그때는 무명치마, 삼베옷 설빔을 해주셨어. 언니인 내가 새 옷을 입으면 밑에, 딸막이가 그렇게 울면서 옷을 벗어 달란다. 딸막이가 2학년이 되는 구정 때인가, 할머니가 언니인 나만 새로 옷 해주고 적은 것은 동생을 물려주었는데 하루 내내 울면서 학교까지 치마 벗어달라고 쫓아 온 적도 있었다. 그렇게 옷 때문에도 많이 싸우며 컸다. 그때는 무명치마 하나만으로도 1년은 거뜬히 지나가거든. 키가 많이 크면 동생 주고, 또 그 동생이 작으면 다음 동생 물려주고. 아버지가 영리하셨지. 그 덕에 나는 가끔 새 옷을 사 주셨거든.
어머니의 오래 된 사진첩에는 어머니의 국민학교, 지금으로는 초등학교 사진이 몇 장 있다. 그 속의 어머니는 바가지를 엎어놓은 듯한 머리 모양에, 일제시대 때의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보아왔던 무명치마를 입고 있다. 그 모습, 어머니와 그 친구분들의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불쌍해 보이던지. 아마도 어머니 역시 그 사진을 한 번씩 들여다보시며 미소를 지을지도 모른다.
윤) 어머니는 국민학교 졸업하고 중학교를 안 가셨잖아요. 외할아버지가 얼마나 반대를 하셨길래… 아님, 돈이 없어서였는지요?
어머니) 그거 둘다가 맞을 거다. 우리 마을에서 그때 여자만 다섯 명이 졸업했는데, 당시 건국대학교에 다니는 이장훈이라는 당숙이 “형님 지금은 다 가르쳐야 합니다. 현순이도 중핵교를 보내야지요.”라고 말씀을 하시자, “우리보다 형편이 더 좋은 사람도 안 보내는데 우리 형편에 무신 중핵굔가.”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란다. 그때는 나도 배워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아버지 말씀을 거역 못해 할 수 없이 중학교는 그만 두기로 하였지. 친구 다섯 명중에 한 명은 광주 수피아 여중, 두 명은 지방에 춘양 중학교에, 그때는 시험을 봐야 학교를 갔다. 광주로 갈 애들은 남아서 공부를 더 하고선 가고 중학교 안가는 우리는 먼저 집에 보내줬다. 선지원 후시험이었지. 밭에를 가나 논에를 가나 어디서건 하얀 가방, 스커트 치마, 운동화, 손가방을 들고 통근차를 타고, 학교 교복 입고, 학교 갔다오는 것들을 보면 화가 나고 일하기가 싫어지고 부럽고 부모가 원망스러웠다.
윤) 그런데 작은 이모부터는 중학교에 갔잖아요. 그때는 형편이 나아진 거예요?
어머니) 그런게 아니구 니 이모가 억척스러웠지. 그리구, 내가 배우지 못한 공부, 내 밑에 동생 딸막이는 보내자 그런 욕심으로 그 애는 아버지를 이기고 서류도 아버지 몰래 해서 중학교에 보냈다. 내가 용돈도 모여서 주기도 했는데, 이 애가 말을 듣지 않을 땐 “네가 내 말을 안 들어? 돈 있어도 주나봐라.”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중학교를 졸업시켰다.
딸막이 동생이 중학교 2학년 때에는 학교 중퇴하라고 아버지가 돼지 마굿간에 가방을 집어넣기도 하고, 배추밭에다 갔다 감추고, 그래도 이 애는 억척스럽게 그냥 가방 없이 학교에 갔다. 나는 너무 아버지 말씀을 잘 듣고,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바보같이 공부를 안 하고 억척스럽지 못했을까. 내 자신이 원망스러워 내가 못한 공부 자식들은 내 힘 닫는 데까지 다 가르치고 싶었다. 그때 그 당숙이 중학교에 가야한다고 할 때 갔으면 내가 이렇게 고생 안 할텐데. 그 당숙은 지금 중학교 교감 선생님까지 하고 계시는데 그분 말씀 진작 들었다면.
지금 청주에 사는 작은 이모는 나이가 우리 어머니보다도 십년은 젊어 보인다. 실제로는 4년 차이밖에는 나지를 않는데. 어린 시절, 청주에 살고 있는 이모가 오시는 날은 항상 우리 형제들을 설레게 했다. 그나마 부유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손에 듣도 보도 못한 과일이나 먹을 것들을 항상 들고 오셨기 때문이다.
지금 시각이 낮 두 시가 조금 넘었다. 테이프를 갈아 끼우고 화장실을 잠시 다녀오는 사이 어머니는 그새 베개 너머로 꾸벅꾸벅 졸고 계신다. 그리고, 그 머리 위에 알지 못하는 사이 흰머리가 듬성듬성 많이도 자리를 잡으셨다. 오늘 중으로 어머니 흰머리를 뽑아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 많던 친구들 어디서 무얼하는지
아직까지 어머니의 고향 친구
누구도 만나 뵌 적이 없다.
사진 속에서만 보았던 흐릿한 흑백 사진의
어머니의 친구들과 고향 마을.
가끔 어머니는 사진첩을 꼭 끌어 안고 잠이 드신다.
윤) 어머니 자라시면서 특히 몸이 아프셨던 때가 있었는지요.
어머니) 몸이 큰 병으로 아팠던 적은 글쎄, 아마도 없는가 싶다. 열 여섯엔가 여름 감기가 와서 몇 일을 몸살 겸해 밥도 못 먹고 있으니 어지럽고 일어 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여름 사람은 누워 있으면 계속 깔아지니 일어나서 활동하라고 하시길래 요강을 안고 마루를 내려가다 넘어져 사기요강이 박살이 났지. 그러면서 내 옆 가슴의 옷을 세 겹이나 뚫고 몸을 브이자로 다쳐 수건으로 싸고 시골병원으로가 마취도 안하고 꿰메었을 때 너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하였다. 큰 동생 원구는 다섯 살쯤 가을, 소 풀을 써는 작두가 마당 한쪽에 있었는데 손을 넣고 잡아당겨 다행이 뼈는 괜찮았지만 살이 벗겨져 집에서 다섯 명이 붙잡고 꿰멘 적도 있었다. 남의 지붕 꼭대기에 담을 타고 올라가 내려오지 못하고 울면서 욕한 적도 있고, 굉장히 말썽을 피고 나를 힘들게 했었다. 그런 거 빼놓고는 특히 아픈 것은 없었다. 오히려 더 괴로운 것이 배고픈 거랑 공부 못하는 것이지.
윤) 어머니 사진 중에 양장학원을 다닌 사진이 있는데.
어머니) 내가 열 아홉 살 가을, 동네에 한복과 양장을 겸한 학원이 들어왔다. 우리 동네는 나 또래 두 살 위아래 아가씨들이 이삼 십 명이 되었는데, 우리 학원 다니는 사람은 불과 5명, 바깥에서 배우러오는 사람이 몇 명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못간 것이 안 됐던지 다니라고 해서 다녔다. 한복 한달, 양장 두달 그렇게 봄 일철이 날 때까지 간단히 배우고 졸업했다. 지금은 얼마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그냥 너희들 뚫어진 옷이나 허리춤 줄이는 정도밖에.
윤) 그렇게 시골에 처녀들이 많았으면 친구들과 재미있던 일도 많았겠네요.
어머니) 그럼 친구들도 많았지. 재미있던 것도 많았고. 우리집이 너 둘째 삼춘 낳고 이사를 했는데 마당도 넓고, 텃밭도 있고, 고모부님이 목수여서 집을 고쳐가며 살았다. 그때는 나도 처녀여서 저녁에는 등잔 밑에서 친구들이랑 십자수 놓고 낮에는 들에 나가서 일을 하고 비가 오는 날이면 다시 친구들과 모여 쌀을 조금씩 걷어 계피떡을 해서 집안 식구들을 갔다 드리고, 낮이면 친구들과 보리밭을 메고 서로 품앗이를 하면서 수건을 쓰고 호미를 들고. 들길을 신나게 지나갈 때는 동네 총각들이 휘파람을 어디선가 불고. 그때가 그리워진다. 한번은 떡을 하다보니 캄캄한 밤이 되었다. 내가 등불을 들고 떡에 고물을 넣고 친구들이 맛있게 하고 있을 때, 들고 있던 등불을 손에서 놓쳐 석유가 떡에 튀는 바람에 먹지 못했던 그 떡, 정말 미안한 생각이 들었었지.
여름에는 길쌈 삼을 삼는 품앗이 처녀들이 방 두세 개를 차지하고 노래 부르며 남의 익지도 않은 감 따다가 주먹으로 깨서 된장 찍어 먹고, 동네 장사꾼이 들어와 보고는 놀란다. 왠 아가씨들이 동네에 이렇게 많으냐며 중신한다고 했다. 그러다 추석이면 마당이 넓은 친구 집에서 진도아리랑도 부르고 화투도 하며 신나게 논다. 그 많은 친구들이 어디서 다 살고 있는지. 얼마나 변했는지 보고 싶지만 생활이 허락치 않는 것이 아쉽네.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어머니의 친구들, 아까 그 사진에서 보았던 친구들이 처녀 적에도 친구이셨다 한다. 30년이 훨씬 지난 그 시절에는 무엇을 하며 친구들과 놀까, 무척이나 궁금하게 생각했었다. 지금의 세대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나이트에서 춤을 추고, 근사한 커피숍에서 분위기 있는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시고, 여기저기 쇼핑을 다니고. 언젠가 어머니가 그런 아이들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시다 “내가 저랬으면 느그 할아버지 몽둥이에 다리가 부러졌다. 다리가 부러져.” 하시던 말이 생각난다. 나도 한번 돌아가 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동네 처녀들이 새참을 가지고 논길을 휘휘 걸어가면 멀리서 휘파람으로 웃음을 흘려 보고도 싶다.
전라남도 화순군 화림리 총각
어머니가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면,
그런 생각을 억지로 지어보지만 잘 그려지지 않는다.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게,
결혼이라는 인연으로 엮인 다는 것이
참, 운명적이란 생각이 든다.
만나고 사랑하고 아껴주고 감싸주고
지독한 가난보다도 끈질긴 건, 사랑인데.
윤) 어머니 몇 살이나 되어서부터 선 자리가 들어 왔어요? 그 당시 재미 있었던 추억이라도?
어머니) 그게, 열 아홉 때부터 중신 애비들이 몇 일이 멀게 드나들었다. 스무 살 너머에는 너무너무 귀찮게 찾아와 시집보내라며 어머니, 아버지를 졸랐대는 것이었어. 농사꾼, 철도공무원, 태권도사범, 탄광에 사무직원, 공무원, 서울의자 만든 사장 아들 등등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선이 잡혀도 증명사진을 기다리다 늦어 딴사람과 혼사를 했느니 했었다. 그때는 주로 사진을 서로 주고받고선 선을 보고 혼사가 이루어졌으니까. 지금처럼 사진 찍으면 금방 그 자리에서 찾는 것도 아니고. 몇 일은 걸려, 몇 일은. 그래 그때 찍은 사진이 어머니와 찍은 사진이었다. 한번은 청풍에서 이모할아버지가 말씀한 사람이 선을 본다고 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람이었단다. 외아들 누나 하나에 어머니 한 분이었단다. 외아들은 싫다며 어머니가 반대하셨다. 이모할아버지 제발 싫다며 우리집 오시지 말라는 말씀을 드린 적도 있었을 정도이니. 아버지 승낙없이 선보자고 오면 보여주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하두 시집 보내라고 할 때 그 사람이 얄미울 정도였다.
윤) 그럼 아버지는 언제나 만나셨고, 어떻게 선을 보셨는지.
어머니) 그래 쑥스런 얘기를 꼭 해야하나. 그러니까 스물 다섯에나 시집가야지 했는데, 스물 둘 1969년 12월 22일 음력 11월 21일에 결혼하였다. 니 아버지 처음 만난게 그해 음력 10월초에 우리 집안에서 출가하신 집안 고모 할머니뻘께서 집에 오셔서 나를 보더니 좋은 자리 있으니 딸 시집 보내라며 중신하겠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하두 가품 좋고 큰동서 될 사람이 좋다고 졸으니 선보이겠다는 승낙을 하셨지. 몇 일 내로 맛선을 보는데 시어머니, 중신애비총각 그렇게 세 사람이 왔다. 시어머니 되실 분에게 인사를 하고, 총각을 보니 상커풀의 눈, 큰코, 큰귀 괜찮은데 카가 너무 적어 마음이 썩 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총각이 어렸을 적에 고생을 많이 해서 잘 살 거라며 자꾸 나를 설득시킨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딸을 벌써 시집보낼려고 그러냐며 반대도 하셨다.
총각은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화림리, 2남 5녀의 차남이고 이름이 윤광식이란다. 그 양반이 너 아부지다. 그때 당시 온양에 있다가 고향에 순회교육 받으러 왔다 선을 본 것이다. 42년생 당시 27세에 직업은 노동이었다. 시멘트 제품 공장에 근무하며 벽돌을 찍어내는 사람이었단다. 시멘트로 연통을 만들 때도 있었고, 물건 딸리는대로 했단다. 아버지가 벽돌 기술자면 딸을 주지 않는다고 하자, 집을 짓는 업자라고 해서 결혼을 했지.
정말, 약혼 사진에서의 아버지를 보면 마치 오래된 흑백영화의 주인공이 생각날 만큼 잘 생긴 얼굴을 가지고 계셨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반질한 얼굴이 맘에 안 드셨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그 얼굴과 지금의 얼굴 모습이 닮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다.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맞선 이야기를 하시는 동안 눈을 어디에도 두지 못하신다. 몇 번을 “이건 고만하자, 고만하자.” 하시던지…
윤) 그 얘기 말고 맞선을 보는 모습에 대해서 조금만 자세하게 얘기를 해줘요.
어머니) 별걸 다 알려고 그려. 이거 다른 사람이 알면 느그 아부지 가만 안 있는다. (사이) 그게 맞선을 보는 날, 점심을 해서 먹고 설거지를 하는데, 중신할머니가 부엌으로 오셔서 “얘, 너 이리 좀 나와봐라.” 하시더니 소마굿간으로 들어오라 하시는 거다. 가보니 선보러온 니 아부지가 말을 해보고 싶어 부탁했던 것이다. 큰 황소를 옆에 두고 우리는 주소를 적어주고 받고 했었다. 주소에는 서울 을지로 6가라고 적혀 있었다. 혼사 이룰 때 서울이라고 하더니 그 주소를 쓴 것이다. 그날 선보러 왔는데, 네 살이었던 넷째 영구가 “매형, 매형, 우리 누나 때리지 말고, 잘 데리고 놀아야돼.”하면서 조잘거리더라.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우스운지. 지금도 내 아부지는 영구오면 그거 말씀하신다.
까짓거 얘기 나온 거 다 해버리자. 그래 나랑 니 아부지랑 결혼 날짜를 잡고, 광주시 충장로 4가에서 양복을 맞추고 코트도 맞추고 나도 한복을 맞추고 약혼 사진이라 해서 사진관에서 사진 찍고 점심을 먹고 기차역으로 오는데 자꾸 영화 한 편만 보고 가겠다고 니 아빠가 충신할머니한테 승낙을 얻어달라고 보채는 것이야. 우리아버지 말씀,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셨다. 결혼식 올리기 전에는 내 딸이니 결혼식하고 맞겨 주신다며 끝까지 반대하셨다. 그렇게 해서 맞선 한번보고 광주가서 옷 맞추고 결혼을 했더니 신혼여행은 온양 가서 하자고 하더라. 여행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결혼식 날 받아놓고 서울직장 간다더니 편지가 왔다. 그래서 보니 주소는 서울 을지로 6가이고 속 주소는 온양읍 실옥리로 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속은 것이다.
윤) 어머니가 얼마나 맘에 드시면 거짓말까지 하며 결혼을 했겠어요. 결혼식 날은 어떻던가요. 어머니도 그렇게 떨리시던지.
어머니) 밸 소리를 다하네. 지금은 예식장에서 결혼을 하지만 그때는 시골이라 우리 집에서 구식 결혼을 했어. 신랑이 처녀 집 마당에서 혼례하고, 첫 날 밤을 신부집에서 보내는 거지. 우리 결혼식 날 날씨도 좋고 아버지 어머니사이에 첫 자식 결혼인지라 우리 친구들에 비해 아주 행복한 결혼식을 했다. 그때는 동네에 자전거가 세대면 사무소 다니는 사람만 있을 뿐 택시도 화순, 광주 시내에서 불러야만 했다. 그런데 결혼식 때 택시가 몇 대 오고 사진사도 불러 아주 많은 사진을 찍고, 축사 답사까지 있었다. 신랑 친구 측에서 함진애비가 짖굿은 장난을 치기도 했지. 그 사람, 같은 집안의 신랑 동생뻘이었으니까. 그 당시 내 바로 밑에 여동생 딸막이 중학교 담임선생이기도 했지. 얼굴에 검은 숯을 바르고 장난이 심했다. 축사, 답사를 할 때는 딸막이가 중학교 교복을 입고 읽었고, 선물교환은 신랑 양복, 코트, 시계. 신부는 시계, 반지, 코트, 여러 오빠 친척들이 많은 액자를 선물해 주었고 사진도 너무 많이 찍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금까지 구식 결혼이 아니라 예식장에서 신식 결혼을 할 줄로만 알고 있었다. 우리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 사진이 없다. 조금 밑에서도 나오겠지만 신혼 초, 살림이 너무 가난하다보니 사진을 사진관에 맡기고도 찾을 돈이 없어 찾을 수가 없었다 하신다. 지금은 그 사진관도 없어졌고, 있다해도 30년이 넘은 필름을 가지고 있을리도 만무하고.
윤) 저기, 첫날 밤 아버지랑 서먹해서 어떻게 같이 주무셨어요?
어머니) 첫날 밤, 그거는 첫날 밤 두 아니다. 니 아부지는 술이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잠이 들어 버리더라. 그 다음날, 그리구 신랑집으로 택시로 시집을 갔지. 어머니가 울고 계시고,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어. 혼수는 소 수레에 싣고, 나랑 니 아빠는 택시를 타고 갔지.
윤) 그럼 거기서부터가 시집살이란게 시작이군요. 그때는 어떻던가요?
어머니) 시집을 가보니까 조그만 방 3개, 시댁 식구들이 친척들이 너무 많아 보였다. 시누이가 두 명, 큰동서 식구가 여섯 명, 시어머니, 신랑, 나 이렇게 식구가 11명이었다. 다시, 이틀 밤을 자고 우리 집으로 제양을 왔어. 제양이라고 시집에 갔다가 다시 한번 외가 부모님께 시댁에서 보고들은 거 얘기하고 신랑은 딸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하러 가는 거지. 집에 오니 새 사위 왔다고 상이 꺼져라 음식을 차려 내셨다. 하루 저녁만 자고 와라, 시어머니 말씀에 따르지 못하고서 이틀 밤을 자고 왔더니, 시어머니가 술을 잡수시고 기다리고 있었던게다.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부모정은 마누라 주고, 동기간 정은 쟁인, 장모 준다더니, 네가 벌써부터 그러는게냐.”하시며 큰소리로 혼내시더라. 이게 정말 시집살인가 싶었다.
우리 어머니가 새 사위 왔으니 토끼 잡아 주신다고 “하룻밤 더 자고 가소” 해서 이틀 밤을 자고 온 것인데. 그날부터 시집살이가 시작이었다. 하지만 일은 고되었어도, 하도 엄한 아버지 밑에 있다가 시집을 가니, 묶여 있던 새, 풀어놓은 기분이었어.
타관살이라는 것이, 가난뿐이었다
나의 어린시절은 무척 가난했다.
흙먼지 일어나는 신작로 바닥, 흙으로 담을 댄 부서지는 집
누우런 때국이 흐르는 아이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공장 굴뚝의 검은 연기
어머니는 그 곳에서 우리 넷을 낳아 기르셨다.
아무도 반겨 주지 않는 타향에서……
윤) 그럼 언제 전라도 시댁에서 온양으로 올라온 거예요? 올라올 때 어떠했는지.
어머니) 그러니까, 시댁의 대식구 밥을 형님과 같이 하고 물을 길러오고 그렇게 살다가 음력 정월 보름 지나고, 온양으로 분가를 한거지. 그때부터 고생은 시작이었다. 분가해 온양으로 올라간다는 연락을 받고서 어머니, 아버지가 큰 덩어리의 짐을 가지고 시댁으로 아침 일찍 오신 것이다. 어머니 하시는 말씀, “온양 가서 솥이나 걸고 밥 한끼라도 해 먹은 걸 보고와야 허것습니다.” 시어머니한테 말씀드리니 우리 어머니보고 하시는 말씀. “사둔 양반, 좀 더 있다 따뜻하면 같이 올라가입시다.” 하시더란다. 눈치 빠른 우리 엄마, 지금가면 부족한 것이 많아 걸릴까봐 그러시나보다 하시며 나한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번에 온양 온천물로 목욕도 좀 하고, 피부가 알레르기성이니 좀 낳아 오고 잡앗는데, 할 수 없게 데부럿다.” 시어머니가 다음에 가자 신다며 내 손을 꼭 잡고 그렇게 우시는 것이었어.
윤) 그러면 외할머니하곤 올라오지 못하신건가요?
어머니)그래. 그밤 11시, 기차역에 나가서 얼마나 우시는지 어머니의 눈이 팅팅 부으셨다. 나는 그래도 “엄마, 왜 울어, 다음에 와” 그러면서 헤어졌는데. 내가 자식을 키워보니 어머니 마음을 이해 할 수가 있었다. 그래 어머니를 뒤로하고 광주에서 여섯 시 기차를 타고 온양에 출발했지.
윤) 막 온양에 올라와서는 고생을 참 많이 하셨겠네요.
어머니) 그때만큼 힘든 적이 없었어. 그날 아침에 기차에서 내려 둘째 시누이를 찾아갔다. 대충 아침을 먹고 우리 살림을 가보니 흙집 한 칸에, 한 달에 천 원씩 사글세방이었고, 넷째 시누이가 미용사 시다로 있으면서 세 달치를 내주었어. 시댁에서 나올 때는 쌀 2말, 차비는 내 돈으로 사고 그때부터 가난이 보이기 시작했고, 말만 듣던 온양이란 걸 처음 알고 연탄불을 처음 보았다. 화물로 미리 보내온 이부자리, 살림살이를 찾아와 우리 보금자리를 온천동에서 시작했고, 대식구에서 두 식구 소꼽장난하는 것처럼 살았지. 처음인 연탄불을 갈고 엄마에게 잘 지내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고 그때는 겨울이 너무 추워서 시장에 나다니기도 어려웠다. 온양 올 때 세 번째 시누이 남편도 같이 왔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가 싸주신 짐을 풀어보니 참깨 볶고, 콩 볶아서 주시고 모든 양념 다 준비해 주셨다. 날씨가 풀릴 때까지 아무 것도 안하고 놀고 있자니 주머니에는 어머니 아버지가 주신 비상금까지 다 용돈으로 쓰고 말았다. 반찬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참고 일때가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한 삼월 중순이 넘어야만 일자리가 생겼으니… 그때는 참 많이 싸웠다. 어른들 말로는 사랑싸움이라고 했지만 어디 돈이 없어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어야지.
윤) 신혼초에 온양에서 살림을 하시면서 가장 힘든 때가 있었다면 언제인가요?
어머니) 그러니까 온천동에서 살림을 시작한지 두 달째인가, 집주인은 놀고 있는 우리한테 전세로 집을 들라고 하더라. 그것도 겨울 어디서, 더군다나 이 눈 속에 돈도 없고 사글세 갈 집도 없었다. 삼일 안으로 전세 값 2만원을 내라하시더라. 당신 아들을 약혼시켜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전세로 돌린다면서 아침, 저녁으로 재촉을 했었다. 삼일간을 둘이서 울다가 생각한 것이 결혼반지를 팔기로 한 것이다. 사랑 땜도 못한 반지, 나는 울면서 객지에 나와 비상금이던 반지를 끼지도 못하고 판다고 생각하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래, 너 아빠랑 두 번째 고모가 근처 금방에서 팔아 사글세 열 달치 만원을 만들어 주었지. 열 달만 더 살게 해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했다. 그때는 금 한 돈에 삼 천 원이었는데 우리가 판다니까 2800원씩 계산해 주더란다. 시집온 지 몇 달 사이, 방 한 칸 없어 그렇게 슬퍼해야만 했는지, 왜 이렇게 없는 집에 시집을 왔는지 후회스러웠다. 그런지 한달 후 남편은 다른 집에서 돈을 더 준다하여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우리가 이사를 해야하니 방을 빼 주시요.” 했더니 집주인은 돈을 다 썼다며 방이 다시 나가면 나머지를 계산해 주겠다고 하더라. 할 수 없이 남편이 일할 집에 사정 이야기를 하고 선불로 만원을 가져다 일 년에 칠 천 원짜리 방을 실옥동에다 구하게 되었지.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였다. 그 동안 온양에서 일자리를 구해 일을 하고 계셨다면 그래도 집 한 칸이라도 준비를 좀 해두시지. 그래서 외가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속았다는 말들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윤) 외할머니가 어머니 신혼 초쯤에 돌아가신 걸로 아는데 거기에 대해서 좀?
어머니) 결혼하고 다음해 2월쯤엔가 고향 외할머니한테 안부편지를 했다. 답장이 오기를 어머니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어. 당뇨병의 시초란다. 자꾸 목이 타서 물을 드신다고 하더구나.
그러다 양력 4월, 고향 친정에서는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편지 전보 한번이 왔다. 왕래를 요망하는 아버지 편지였지. 그래도 돈이 없으니 얼른 가보지도 못하고 몇 일을 울다가 겨우 차비를 마련하여 화순 엄마를 향해 달려갔다. 집으로 가니 전남대 병원 응급실에 계시다가 조금 낳은 것 같아 퇴원하셨다더라. 몇 일 있으면 한식이 있어 아버지 두루마기를 꿰메고 이불 빨래를 하고 동생들 빨래, 집안 청소 바쁘게 해 놓고 일주일만에 온양으로 와야했다. 남편 밥 때문이다. 어머니랑 헤어질 때 “엄마, 얼른 낳아야 해. 나 갈께“할 때, “오냐, 네가 와서 이불 빨래하고 집을 깨끗이 치워주니 정신이 조금 난다“하시면서 지팡이를 집고 잘가라 마루 끝에 앉아 바라보시던 어머니.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광주에서 밤차를 타고 천안에 새벽에 도착했다. 온양에 와 있어도 친정 생각, 어린 동생들 6남매,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농촌이라 일은 많고 아픈 어머니 계시고 항상 걱정이었다.
화순에 갔다 온지 약 20일도 지나지 않아 또 위급 전보가 왔다. 어머니가 전남대 병원에서 나만 기다린다는 전보. 그런지 몇 일만, 사망전보 아침 9시경. 그걸 받아보니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엄마, 엄마……” 전보를 받아 껴안고 얼마를 울었나. 문을 잠그고 방에 앉아 울고 있을 때, 안집 할머니가 “새댁 문 좀 따줘.”하며 나를 부르더라. 그렇게 슬펐다. 돈이 있으면 빨리 갔을 텐데. 완행열차 낮에는 다 놓치고 돈을 구해 밤차로 남편과 같이 갔다. 그 다음날 아침 10시 반에 역에 도착하니 비가 부슬부슬 종일토록 왔다. 마당에 들어서니 꽃상여는 마당 한 쪽에 놓여 있고 출상을 하려 장의차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큰 딸이니 얼굴이라도 보여야 한다하니 안 된다고 하시더라. 못질을 다 해서 안 된다는 어른들 말씀이지. “큰딸이 왔다. 큰누나 왔다.” 울어대는 동생들. 온 동네 사람들의 초상이었다.
42세의 연세, 칠 남매의 막내가 이제 다섯 살인데…… 그 영구가 숨진 엄마를 잡아당기며 “엄마, 비와. 일어나봐. 그만 자.”하더란다. 아무것도 모르는 열살 남짓의 동생들, “누나, 저기 사과 좀 집어줘라.”제사상을 가르키며 나에게 말하더라. 그 어린 것들. 그 생각만 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동생들이 이제는 막내 영구가 36살. 모두들 가정을 갖고 그 때의 이야기를 하며 살고 있지. 장례를 치루고 십일만에 온양에 올려고 동네 입교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친척 오빠가 군대에 갔다와 사진기를 들고서 딸막이 동생과 찍어주더라. 사진에 얼굴이 얼마나 슬퍼 보이던지. 광주역에서 밤차를 탔는데 너무너무 잠이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내릴 막에 남편이 날 깨워주고는 다시 잠이 들었나보다. 나도 또 잠이 들어 천안에서 내려야 하는데 눈을 떠보니 오산역까지 왔더라. 오산역에 허겁지겁 내려, 돈이 없으니 사정 이야기를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남편은 그때 결혼 예물이었던 시계를 맞기고 장항선을 기다려 온양으로 왔다.
차마 어머니에게 더 궁금한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볼 수 없었다. 외할머니 돌아가신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내 어머니는 코맹맹이 소리를 내고 계셨다. 그러시다 굵은 눈물 방울이 어머니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셨다. 무어라 어머니에게 위로의 말이나 분위기를 바꿀 어떤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은데, 어머니와 단 둘이 이런 서먹한 자리가 처음이다 보니 어색함만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온양에서는 또 어떻게 사셨는지.
어머니) 온양에 와서 집을 치우고, 또 열심히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친정 생각과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혼자 눈물을 지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멀어 얼른 갈 수도 없고, 그러던 중 가을 시월 달에, 내 아빠가 갑자기 배가 아파 일을 나갈 수가 없었다. 약국에서 이약 저약을 써도 효험이 없어 한약방으로 가니 만성맹장인 것이다. 돈이 없으니 병원 못 가겠다는 것을 억지로 온양 공립병원에 입원시켜 맹장수술을 했다. 나는 그때 네 누나인 수련이 임신 8개월이었다. 병원 의사 말씀이 복막 직전이라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다는 것이다. 그래 바로 수술하고 그 속에 심을 넣었다는 것이다. 원장 말이 입원실 방이 없으니 빨리 퇴원하라는데 돈이 없는 거다. 또 울면서 빚을 얻으러 다녔다.
객지에 나와 연고 없는 사람이어선지 아무도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공장 사장님께 부탁해서 23일만에 퇴원했다. 이제는 정말 돈도 없고 배는 불러오고.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하였다. 큰집으로 들어가 음력 12월 11일날 우리 큰딸 수련이를 출생하니 시어머니 말씀 “네가 무슨 복이냐. 자식 복 없는 것이 손자 복은 무어냐.” 큰집에서 순산하니 온 집안 식구가 다 서운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네 큰아버지도 그때까지 줄줄이 딸 넷을 낳았으니 말이다. 모두들 아들인줄 알았단다. 나는 첫딸 하나인데 왜들 서운해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큰집에서 삼칠일을 쇠는데 금줄도 치지 말라고 했을 때 남편이 그렇게 미웠다. 막 울었다.
윤) 그럼 누나를 낳고 언제까지 큰댁에 계신 건지요.
어머니) 한 달도 안 있었어. 수련이 낳고 한달 가까이 젖이 나오지를 않았어. 한달 내내 배가 고파 아이가 우는 것이었다. 울 때는 보리밥 물에 사카린을 타서 떠 먹이니 한 달포 되기도 전에 다리에 살이 없어 꼬이기 시작하더구나. 우유도 사줄 형편도 안 되어서 그냥 밥물만 먹일 때 너무 마음이 아파, 구정이 지나고 온양으로 와서 서울연유를 사서 먹이며 젖을 빨아 보이니 다시 한 달이 지나 애기가 몰라보게 예뻐졌다. 어린 수련이 연유와 젖을 배불리 먹이면서 옆에 있는 과수원에 다녔다. 오전 참에 와서 젖먹이고 오후 참에 와서 보면 애기는 힘이 나는지 포대기를 차고 올라가 알몸으로 방을 돌아다니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백일이 되었을 때 잔치도 하고 사진도 찍고 친정으로 보냈더니 모두들 깜짝 놀랐다더라.
어머니가 그리 말씀을 하시니 달리 할 말은 없지만, 큰누나 어릴 적 사진을 보면 정말 이 애가 남자인지 여자애인지 구분 할 수 없을 정도로 한마디로 무식하게 생겼었다. 그런 얘기를 누나에게 한 번 했다가 된통 혼이 나기도 했지만, 그래서 누나의 키가 유난히 작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살며, 살아가며, 생각하며
윤) 그때부터 우리 벽돌 공장을 가지게 된 거예요. 그때 얘기를 좀 해주시길.
어머니) 그 얘기하기 전에 70년 가을, 직장 때문에 수원 밑 병점으로 이사해서 가을일 좀 하다가 조립식 담장일을 맡아하게 되었지. 그해 겨울 먹을 것이 없어 한끼는 국수, 한끼는 수제비. 수련이 돌을 간소하게 보냈다. 다음해 봄, 온양 벽돌공장 주인 사장님이 찾아와 선불을 주시면서 자기 집으로 다시 와 달라며 서울을 올라가면서 들리셨다. 그래 그 봄에 다시 온양으로 이사. 공장에 딸린 방도 주시고 허술하지만 그 집에서 열심히 일을 하게 되었지. 실질적으로 주인은 아니였어. 그냥 사장이 여기 사람이 아닌 거라 아버지가 공장을 잠깐 맡아서 운영을 한 것 뿐이지.
윤) 그럼, 그때부터 어머니랑 아버지랑 공장 일에 매달리신 거네요.
어머니) 아니야. 공장 일은 아버지가 끌어나가고, 나는 어린 수련이 데리고 봉지를 만들어 팔았다. 그 집에 살면서 시장 옆이니 장날이면 쌀장사도 하고 과일도 받아 팔고 열심히 살아야지 하면서 71년 음력 12월에 너 작은누나 수정이를 낳았지. 3일간의 고생 끝에 또 딸을 낳았다. 너무 서운했다. 어렵게 낳았는데 또 딸이야. 그래 딸딸이 엄마로써 뭐든 열심히 다했다. 틈나는 대로 과일, 옥수수, 참외, 포도, 쌀장사. 애기 업고 사과 20kg을 이고 염티, 인주, 평택 근방까지 다니면서 장사도 했다. 수정이 두 살이 되면서부터는 풀빵 장사도 했다. 애기를 하루종일 업고 다니니 땅에 내려놓으면 애기가 다리가 부어 잘 서지도 못했다. 겨울에는 손을 내놓고 다니다가 손에 동상이 들어 해마다 겨울만 되면 손이 가렵다고 했다. 그래 돈을 벌어 열심히 살자. 항상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했다. 아버지가 가훈처럼 하시던 말씀을 한시도 잊지 않고 그렇게 살았다.
윤) 이제 큰누나도 세상에 나왔고, 작은누나도 나왔고, 제가 태어난 얘기를 좀 해주세요.
어머니) 그러니까 너를 임신하고 낳은 게 75년 양력 10월 8일 새벽 4시 20분 경이었다. 드디어 네가 태어난 게지. 그렇지만 이 전에 너를 임신하고 9개월 만삭일 때 음력 8월초, 네 아빠가 또 일을 벌렸다. 이웃사람과 싸워 흉기로 사람을 찌르고 만 것이지. 합의 본 결과 정형 수술비까지 해 주었다. 그 때는 꼭 죽고만 싶었다. 배는 부르고 공장에서 돈을 얻어 합의해주니 당장 먹고살게 없는 거야. 우리 큰아들을 낳는데 내의 하나, 미역 한 가닥 사먹을 돈이 없어. 아기를 기저귀로 싸서 키우며 시어머니가 산후조리를 해주셨다. “우리손자 옷 하나 사 줘야지.”하시면서 배냇저고리 하나 사오셨다. 그때 당시 250원이었고 그게 처음 입혀준 옷이었다. 아들을 낳았다는 기쁨보다도 먹고살게 없어 큰 걱정이었다. 너를 낳고서 한달, 모유를 먹이니 젖꼭지가 갈라져 더 먹일 수가 없어 우유를 먹여 키웠다. 돈이 없어 미음도 많이 먹였다. 정말 너 어려서는 고생 많이 했다. 기억도 나지는 않겠지만.
윤) 그 어머니, 풀빵 장사했던 이야기 좀 더 해주시면.
어머니) 너를 낳고도 그해 겨울 도로가에서 풀빵 장사를 해야 만이 먹고 살수 있었다. 봄이 되면 장날에는 싸전, 남편은 공장일, 나는 봉투를 만들어 팔며 겨울에 또 국화빵. 하나에 십원, 백원에 열개 장사를 하고 오면, 연탄불은 꺼지고 수련이, 수정이 보고 애기 잘 데리고 놀아라하면 신철이 혼자 두고 놀러나갔다. 그러다 나 장사하는 곳에서 풀빵 몰래 숨겨가지고 동에 얘들에게 나눠주던 게 너희 누나들이다. 동네 오빠들이 니네 엄마한테 가서 풀빵 좀 훔쳐와라 그러면 득달 같이 달려와서 어느 사이 두세 개를 주머니에 쏙 감춰서는 갔다주고 갔다주고 했었지. 추운 방에서 네 아버지 돈 벌어봤자 선불로 빌려 썼기 때문에 달달이 까나가기만 할뿐 모이지를 않았다.
윤) 막내 여환이가 태어날 때는 어땠나요. 그 때도 저 낳을 때만큼 힘이 드셨는지?
어머니) 우리집 막내, 여환이가 태어난 게 77년 봄, 양력 4월 27일이었다. 할머니가 애 낳으면 산관하실려고 오셨지. 그때가 4월 28일은 이충무공 탄신일 축제인데 산관하시느라 구경도 못 나가셨다. 아침에 일어나니 배가 아프기 시작, 열무사서 김치담아 놓고 12시 20분경에 낳았으니까. 우리 여환이 태어나서는 돈도 불고 아빠가 공장을 직접 운영하게 되었다. 참 물건이 잘 나갔다. 돈 20만원 가지고 시작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부지런히 애기를 업고 일을 하고 차에 물건 싣고 저녁에는 팔이 옆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너희들 빨래는 저녁 일 끝나고서 빨았다. 너랑 누나들은 모래밭이 놀이터였다. 낮에는 큰 대야에다 포대기 깔고 않혀 놓고 리어카에다 놀라고 두고 열심히 담장, 포도지주, 구들, 보도블럭, 다른 시멘트제품 다 주문 받아서 매일같이 예금도 하고, 돈계도 하고 억척스럽게 모았다. 돈 없어 설움도 많이 받고, 울기도 많이 울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집 올 때, 재봉틀을 가져와 남의 옷도 꿰메어 주고, 우리 아이들도 한 옷을 몇 번을 기워 주기도 하였다.
나의 어린 시절, 가장 든든한 빽은 우리 공장 구석에 집채만큼이나 쌓아져 있는 모래더미였다. 우리집 것이기 때문에 나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거기에서 놀 수도 없었다. 키도 작고 몸도 빼빼 마른 내가 거기서만은 아이들에게 큰소리치면서 놀 수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에게 걸리면 아들인 나고, 뭐고 상관없이 무작정 뛰어 도망가는 거다. 모래를 흩어 놓으면 퍼 나르기가 힘이 드니까 아버지는 아무도 모래더미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셨다. 가끔 기분이 아주 좋으시면 모를까.
우리집, 우리 가족, 나의 집 앞에 서서…
우리 사남매의 어릴 적 소원은 영화에서나 드라마 속에서처럼
아무도 들어 올수 없는 나만의 방을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이 많은 새 집을 사게 되어
더 이상 한 방에 여섯 식구가 아우다웅
자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즐거웠는지.
윤) 그리 억척스럽게 사시면서 특별히 지켜왔던 생활 신조가 있었을 거 같아요?
어머니) 당연히 있지. 내 생각은 집사기전 계획으로 10년간 화장품 안 사 쓰기, 파마하지 않기, 친목계 안 하기 등등 10계명을 만들어 지켰다. 시장 갈 때는 500원에서 2,300원만 가지고 시장 가고, 시장 갈 돈에서 절반은 떼 놓고 아예 처음에 출발하였다. 그렇게 열심히 한 결과 81년도에 내 집을 마련하였다. 10년 계획이 13년만에 내 집 마련으로 이루어진 게다.
윤) 집을 사신 게 그렇게 즐거우셨나봐요. 그때의 느낌이 어땠나요.
어머니) 그 기쁨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단칸방에서 여섯 식구가 물 길러다 먹으며 오밀조밀 살았는데, 이런 날을 위해서 그렇게 서럽고 힘들었나보다. 하지만 막상 돈이 적어 이사를 갈 돈이 없으니 일년간 다시 세를 놓고, 여환이 초등학교 일 학년 때 이사했다. 그렇게 큰집으로 이사한 후, 방자리를 새로 깔고서 이 집이 내 집인가. 정말 좋구나. 방이 4개에 대청 마루도 넓다. 행복함을 느꼈다. 남들은 어떻게 단칸방에 살면서 그 큰돈을 모았느냐면서 대견해 했다. 이제는 성공했다고 다들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러다, 얼마 후 네 아버지 위궤양으로 강동성심병원 열흘씩 두 번이나 입원하고 95년에 단대 병원에서 한달 만에 퇴원을 하셨다. 다 그것이 배를 움켜쥐고 먹을 것 참고, 끼니 참고 얻어진 병이시다. 그래 몸 버려가면서까지 마련한 집이 어떠하겠냐.
어릴 적, 새로 이사를 했을 때에는 우리집이 대궐 같기만 했다. 단칸방에서 여섯 식구가 살다가 50평이 넘는 집에 들어서니 온 집안을 구석구석 큰 대궐을 둘러보듯이 마냥 신기해하던 기억이 난다. 마당은 얼마나 넓은지, 대청마루도 너무나도 넓고 집안에 화장실도 있고. 그 전에 살던 집은 화장실이 없어서 소변은 요강이나 아무데서나 누었고, 큰 볼일은 한참이나 걸어가야 나오는 공중화장실을 이용해야만 했었으니까. 그 때를 생각하면 나 역시 이렇게 기쁜데, 어머니 마음이야.……
윤) 그러면, 저 스무살에 새로 지은 우리 집을 보았을 때는 더욱 좋았겠네요.
어머니) 그걸 말이라고. 그때에는 지하 24평, 1층 22평, 2층 20평 시청에서 구역정리 해 집 평수가 작아지는 했지만 너무나도 멋있는 우리 집 건물을 보고 있으니 눈물이 왈칵 했다.
윤) 저희들은 어땠나요. 공부 가르치시면서 특히 좋았던 때나 특히 슬펐던 기억은?
어머니) 그런거야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지. 너희들 몸 건강히 잘 준 것도 고맙고 공부 열심히 해 주어서 지금은 4년제 졸업시키게 되어 내 소원은 조금 해결된 것도 기쁘고. 나는 고생했어도 자식들은 잘 가르쳐 고생시키지 말아야지. 그게 나의 결심이었거든. 너 작은누나 수정이를 사년제 보내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된다. 너희들을 가르칠 때 너무 힘들었던 것은 일은 많고, 돈은 모아야 하기 때문에 남들과 같이 못 먹이고, 못 입히고 했던 것들이지. 잘 커줘서 너무 고마워. 그러면서도 도시락 다섯 개 여섯 개 싸야 할 때, 돈 벌어 가면서 할려니, 그때는 너무나도 힘들었다. 나는 항상 거짓이 없이 예비대책에 여유 있는 사람으로, 서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누구든지 나를 속이고 무시할 때는 용납이 안 되고 속상하다. 그런 날이면 밤새 잠을 못 이뤄 가면서 그일 만을 생각한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가. 그리고 나서 아침이 되면 아예 까맣게 잊어버리든가. 아님 달려가서 일을 해결하고야 돌아온다.
가장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네가 천안 공전 다닐 적, 운동권 학생들과 어울리고, 학교 안에서 데모를 하다 퇴학을 당하였을 때, 이런 나의 인생 기대감은 깨지고 남들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게 가르치고 싶었는데 무너져버린 듯 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더 잘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하고 싶었다던 글쓰는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윤) 어머니 대학 등록금이 장난이 아니게 많을 텐데. 그걸 어떻게 꼬박꼬박, 생활비는 모자라지 않아요?
어머니) 왜 아니야. 96년도에 너, 여환이, 수정이 셋이 대학교 합격을 해 너무나도 좋았는데, 그때 입학금 수업료가 700만원이 넘게 나왔다. 하지만 자식이 잘 되어 나간 돈이라 생각하니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다. 부모는 자식들이 먹고 입고 쓰는 것, 아깝지가 않나 보다.
윤) 지금 큰누나가 호주에 떨어져 가 있는데, 누나와 손주들 보고 싶지 않으신지.
어머니) 니 큰누나 시집 보낼 때는 섭섭하면서도 잘 했다 싶었는데, 귀한 돈에 혼수 해주니, 여기서의 생활 접고 멀리 타국, 호주에서 고생하는 거 생각만 해도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작년에 수련이랑 호주에 들어갈 때 따라 갔다가 왔잖아. 외국이라는 것이 낯설기만 하지 편한 것이 없더라. 다행히 가까이에 한국 사람들이 모여 살아 정이라도 느낄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지. 너 큰누나만 문제가 아니야. 수정이도 사회교육원만 나오고 대학을 보내지 못해서 이렇게 속상하고 안타까울 수가 없다. 나는 수정이는 공무원에게 시집 보내려고 했는데. 남자 직업에 따라 여자가 출세한다던데, 그렇지만 수정이 열심히 살려고 하니 고맙기만 하다. 사위가 배우고 부자고 돈 많은 사위를 원했는데 그것도 수정이의 연분이자 복인가 싶다. 열심히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니 앞으로 잘 살거라 생각해 지금은.
윤) 어머니 새로 건물 짓고, 1층에서 오리탕집을 하셨는데. 그 일은 어떠셨는지.
어머니) 그래, 건물을 세우고 나서는 1층에다 조그마한 오리탕 전문 식당을 시작했지. 장사는 별로 안 됐어. 매일 당골 손님 몇 만들어 끊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지. 그로 해서 조그만 빚은 갚아가고 많이 팔리던 것은 아니지만 내 집이니 생각하며 오래오래 장사를 하려고 했는데, 99년 8월 순천향병원에서 자궁근종 수술을 하고, 우측 난소를 제거 수술 때문에 가게를 쉬게 되어 세를 준 것이 끝이 된 거지. 이 집이 우리 집이라고 하면 남들은 부자라 하지만 나는 속상하다.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집에 금이 가고, 여기저기 허술한 곳이 많다. 역시나 집 지을 때는 자격증 있는 전문 기술자가 꼭 필요한가 보다.
윤) 마지막으로 어머니 더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어머니) 지금도 건강하지는 않지만 놀면 주머니 사정이 말이 아니다. 식품회사에 다니는데 무거운 것 들고 하루종일 서 있을 때 몸이 좋지 않다. 남들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느라고 한다. 그래도 남편도 건강해지고 자식들 속 썩이지 않고… 하지만 그래도 욕심이 있다면 우리 신철이는 훌륭한 작가가 되고 여환이는 똑소리나는 판검사가 되었으면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열심히,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말고 공부해서 건강 지키면서 노력해보아야 할 거야.
내가 살아온 인생은 아름답지 못했다.
어쩌면 너희들에게는 차마 창피해 이야기 할 수도 조차 없는 것들도 많았다. 50이 넘는 세월, 언제까지나 이 한 세상 더 살게 될 지 알 수는 없지만, 너희들 결혼하고, 손주들 생기고, 다시 너희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때까지 멀리서 지켜 볼 수 있었으면 너무나도 좋겠다.
무려 세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 인터뷰를 하고 끝이 났다. 어머니는 고단하셨는지 어느 새 배게 머리 높이 하시고 잠이 드셨다. 한 가족의 어머니로 아내로 그리고 나 자신으로 많은 삶을 사셨고, 많은 이야기들을 가슴에 남기셨다. 그런 우리 어머니, 노래가 생각난다. “창살 저편 멀리 아침해가 따스한 얼굴로 어루만지는 곳에 떠오르는 그리운 이름, 흐린 불빛아래 뜬눈 밝힌 고통의 나날, 붉은 눈동자 속에 반짝이던 그리운 이름 어머니.”
이 시대의 어머니이든 아님 더 오래 전 어머니이든, 모든 어머니들은 참으로 아름다움의 대명사가 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정리가 되지 않은 듯한 인터뷰 글을 끝까지 읽어 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 본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우리 어머니에 대해 알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많은데.
취재,정리 : 윤여철 ( 건양대 문학영상창작과4)
어머니 이현순 약력
본적은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면 화림리
1948년 11월 8일, 외할아버지 이명훈, 외할머니 박공예 사이의 장녀로 출생.
1955년 이양초등학교 입학. 60년 졸업.
1966년 매화 양재 학원에서 잠깐동안 양장·한복 기술을 배움.
1968년 화림리 옆 마을 석정의 아버지 윤광식과 결혼. 그해 겨울, 남편을 따라 충남 온양으로 이사. 가난으로 사글세방을 전전하며 지냄.
1969년 가을, 외할머니 박공예 사망.
1970년 첫아이. 수련 출생.
1970년 10월 남편 직장을 따라 경기도 오산으로 이사.
1971년 봄에 다시 온양으로 이사.
1971년 음력 12월 둘째딸 수정 출생.
1973년 아버지가 온양 실옥리에서 벽돌 공장을 시작함
1975년 큰아들 신철(여철) 출생. 같은 해 아버지는 상해죄로 구치소 수감 중 보석으로 풀려남.
1977년 넷째 여환 출생.
1982년 온양시 온천동에 새집을 마련. 돈이 없어 다시 세를 줌.
1983년 새집으로 이사.
1995년 아버지의 위궤양으로 서울 병원을 전전긍긍.
1999년 8월에 자궁근종. 다시말해 자궁암 진단.
몇일 후 자궁제거수술 후 보름만에 회복.
2001년 6월 현재. 2남 2녀의 어머니.
인터뷰어 윤여철 약력
1975년 충남 아산시 실옥동 출생.
1982년 온양 천도 초등학교 입학.
1998년 온양 중학교 입학.
1991년 천안 북일 고등학교 입학.
1994년 천안 공업 대학 입학.
1995년 학생회 활동으로 제적.
1996년 건양대학교 문예창작과 입학.
1996년 12월에 군입대. 강원도 인제군 서화에서 근무.
1999년 군 제대 후 건양대학교 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