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격 입니다,
불~ 합격 입니다.
D시에 살고 있던 여고생 소현이는 당시 사귀고 있던 남자 친구와 손을 꼭 잡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자고 다짐을 했더랍니다. 소현이는 처음부터 생물학과에 가고 싶었지만(이것은 모든 생물들의 재생산 과정–생식 과정에 대한 어렸을 때부터의 비상한 관심 때문입니다), 선생님과 부모님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는 여학생을 Y대나 K대에 보낼 수 없다고 했고 부모님은 소현이가 약대에 가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결국 소현이의 바램과는 다르게 D시에 있는 대학의 약대에 원서를 내게 되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시험 날이 다가오자 몸이 아프기 시작했고, 시험 전날에는 손바닥이 하얗게 되도록 설사를 했습니다.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을 소현이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혈압이신 어머니는 당장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우셨고, 밤에 잠이 들면 전화기 속의 여자가 “불–합격입니다, 불–합격입니다“를 외치며 소현이를 따라다녔습니다. 그 후로 이 주일간 소현이는 쓰러지신 어머니를 대신해서 밥이며 빨래, 청소와 같은 온갖 집안 일을 다 해야 했지만 소현이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래도 너를 시골로 보내야겠다, 농촌 총각들이 결혼을 못 해서 문제라던데, 그렇게 해서라도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어머니의 차가운 말 뿐이었습니다.
어린 소현이는 이제 끝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디가 시작이었고, 끝이 나면 뭐가 어떻게 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수학 문제를 풀거나 영어 단어를 외우며 고이 품었던 모든 환상이 사라진 너머에는 남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함께 떨어진 남자 친구는 ‘종로 대학‘도 어쨌든 서울에 있다며 서울로 바삐 떠나고 D시의 재수 학원의 마감일이 다 될 때까지 어머니는 시골로 시집가라는 얘기만 반복하실 뿐이었습니다. 재수 학원 마감일 전날, 비로소 어머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돈을 주시며 학원에 등록을 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가 지겹도록 똑같던, D시의 “일신 학원“(들어가자 마자 “日新 又日新“이라는 원훈이 쓰여있는)에서의 재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햇빛 잘 드는 화장실
“그 때 제일 생각 나는 건 화장실이야. 나는 그 때 ‘서울대‘ 반에 있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여학생들이 별로 없었거든. 우리 반에 4명 있었나. 그래서 우리 층 여학생 화장실은 언제나 텅텅 비어있었어. 남학생들 화장실과 같은 넓인데, 두칸 밖에 없고, 나머지 공간에는 책상들이나 그런 게 쌓여 있고.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화장실에 가서 책상을 내려놓고 거기서 공부했어. 거기 굉장히 좋았어. 햇빛도 환하게 들어오고, 조용하고. 남자애들, 알잖아… 교실에 빽빽히 앉은 남자애들이랑 공부하면, 냄새도 나고…응?”
“응, 알만해, 그러니까 교실에 있으면 냄새가 나서 화장실에서 공부했다는 거지?”
“부분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거기서 여자애들끼리 책상 붙이고 앉아서 영어 단어 같은 거 외우고, 속닥거리고 그러면 좋았어. 우리가 거기 있는 줄 알면서도 다들 모른 척 해줬어.”
“…밥도 거기서 먹었냐? -_-;;;”
“아니. 밥 먹으러는 꼭 교실에 갔어.”
“제일 화가 났을 때는, 대학생들이 길거리에서 데모하는 거 볼 때. 우리 학원은 시내 D 백화점 근처에 있었는데, 거기는 서울 종로처럼 학생들이 데모하는 데였거든. 우리는 맨날 그리로 지나다녔어. 공원에 앉아서 데모하는 거 보고 있으면, 전경들이 그리로 와서 옷도 갈아입고(“아니, 도대체 어디까지 벗고 갈아입는 거야?” “몰라, 안에 무슨 내복같은 거를 입었는데, 거기까지 벗어.”)
지네끼리 밥도 먹고 그래. 우리는 거의 안중에도 없어. 누가 물어보면, “재수생인데요…”, 그러면 어디든지 그냥 통과야. 이건 무슨 투명인간 같은 거지. 학생들도 우리한테 관심없고, 전경들도 우리한테 관심없고, 다들 자기들이 하는 일에 바빠서, “재수생은 좀 비키라“는 분위기. 고등학교 때만 해도 소속이 있었으니까, 뭘 할래도 할 수가 있었는데. 대학만 가면 나도 당장 데모를 해줄텐데, 입맛만 다시면서 멀찍이서 구경하고 그랬지.”
“이런 일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하고 맞짱을 뜨던 진짜 깡패같은 여자애가 있었는데, 걔는 학교 안 짤리고 졸업한게 신기할 정도였거든. 근데 어느 날 길에서 걔를 만났어. 와, 이건 너무 예뻐진거야. 학교 다닐 때는 각이 확 나오고 우락부락하고 좀 무서운 편이었거든. 대학에 가더니 이건 정말 ‘이쁜 아가씨‘야. 사근사근하고 눈웃음치고. 나를 보더니, ‘소현아, 너는 재수생이니까 술은 안 되겠고, 내가 차나 한잔 살께‘. 말투도 너무 달라. ‘내가 차나 한 잔 살께?’ 누가 상상이나 했겠니, 걔가 나한테 ‘차나 한잔 살께‘ 그럴 줄은…
나야 뭐, 재수생이니까 달라진 게 있니. 두꺼운 안경쓰고, 무거운 가방 메고, 말도 더듬으면서, ‘그래, 그럴까?’ 그랬지, 뭐. 걔는 어디 전문대 사진과인가에 갔던 거 같은데 차 마시면서 그러더라. ‘나 같은 애도 대학에 가는데 소현이 너 같이 공부 잘 하는 애가 대학에 못 가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 ‘괜찮아, 괜찮아‘ 나는 이러는데, 그래도 얘는 계속 ‘어떡하니, 공부하느라 힘들지?’ 자꾸 그러는 거야. ‘아냐, 나 정말 괜찮거든. 나도 대학 갈 거야!’ 내가 아무리 큰 소리를 쳐봐야, 목소리가 떨리는 건 할 수 없지. 걔 얼굴에 비치는 나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불쌍한지 알았다니까.”
드림랜드로 가는 길
소현이는 이듬해 S대 생물학과에 원서를 넣었습니다. 본고사를 볼 즈음에는 눈이 많이 왔고 D시에서 올라와 눈구경을 못 해본 소현이는 아마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2차로 원서를 넣은 외대 영어과에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거기 넣은 사람은 나랑 우리 반 여자애 둘 뿐이었어. 본고사를 보고는 다들 포항공대로 시험보러 갔으니까. 뭣하러 본고사를 두 번이나 본담, 하고 생각했지 어쨌거나 나는 서울로 오고 싶었으니까.”
외대 영어과에서 시험을 보는 사람들은 몇 백명이나 되었답니다. 그래서 수험생들은 몇 개나 되는 건물에 나뉘어져 면접을 봐야 했습니다.
“면접‘이 어땠냐면, OMR카드에 뭔가를 채워넣는 거였어. 주관식도 있었는데, 외대를 졸업한 사람 중에 유명한 사람 이름 쓰기, 이런 거였어.”
“와, 어렵다. 그런 걸 어떻게 썼어? 나는 하나도 모르겠다.”
“그야 간단하지, 뭐. 안성기랑 이승환. 그런 것쯤은 잘 알고 있다고.”
면접은 빨리 끝났습니다. 소현이와 소현이 친구는 외대 운동장에 앉아서 사람들이 축구를 하는 걸 보다가 외대 앞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무엇을 할까? 이젠 모든 것이 끝났는데.
우리는 뭔가 하고 싶었어. 근데 외대 정문 앞에 도로 표지판이 있더라. ‘드림 랜드‘하고 화살표 쭉. 그래, 이거다, 싶었지.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가기로 했어. D시에도 ‘앞산 공원‘에 놀이 동산이 있긴 한데, 거기는 하도 조그매서 롤러 코스터같은 것도 없거든. 경주에는 ‘도투락 월드‘가 있지. 그래서 대학생들이 그리로 롤러 코스터 타러 가고 그랬어.
시험도 끝났겠다,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제일 처음으로 드림 랜드에 가서 롤러 코스터를 탄다, 그런대로 괜찮은 생각 같지 않아? 곧바로 내려가는 것 보다야 낫지. 그래서 우리는 그리로 걸어 가기 시작했어. 날씨도 풀렸고, 햇살이 좋아서 눈도 다 녹았고. 그런데 아무리 걸어도 드림 랜드는 안 나오고, 드림 랜드 쪽으로 가는 화살표만 계속 되는 거야. 이거 왜 안 나오지, 그러다가도 화살표를 보면, 쫌만 더 가면 있나보다, 쫌만 더 가 보자, 이렇게 희망을 갖고 계속 갔지. 한 시간쯤 걸었나?
처음엔 힘차게 출발했는데 그때는 좀 지쳐서 버스라도 탈까 했어. 그런데 뭐 어떤 버스가 가는지 알 수가 있나. ‘드림 랜드‘라고 써 있으면 냉큼 타겠는데 그런 건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다시 걸었어. 여기까지 온 건 아까우니까. 한참 갔더니, 그제서야 드림랜드 1.5km 표지판이 나오더라, 세상에. 서울은 이런 곳이구나. 깜짝 놀랐지, 뭐. D시에서는 표지판에 뭐 써 있으면 금방 나오는데.”
“외대에서 드림 랜드로 가는 길은 굉장히 좁았어. 거의 2차선 분위기였어. 가는 길 옆에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보였는데 굉장히 좁고 지저분했어. 서울 사람들은 참 지저분하게도 산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갔던 거 같애.”
“드림 랜드는 너무 썰렁했어. 드림 랜드가 딱 나오자, 애개 이거야, 싶더라고. 그래도 신나게 놀았지. 그럴려고 간 거니까. 롤러코스터도 타고. 우리가 처음에 탄 롤러코스터는 확 올라갔다가 뒤로 몇 바퀴 도는 거였거든. 그런 건 줄은 몰라서 진짜 무서웠다고. 우리는 웬 중학생들이랑 같이 탔어. 자리가 4자리 밖에 안 남았는데, 남자 중학생 2명이 자기들은 절대로 한 자리에 탈 수 없다고 우기는 바람에 걔네랑 둘씩둘씩 앉았다니까. 나도 무서워 죽겠는데, 옆에서 중학생이 울고 소리지르고 하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기억이 나.”
“그래서 걔랑은 그 후에 연락도 하고 그냈어?”
“아니, 전혀.”
“그리고는 벤치에 앉아서 아이스크림 같은 거 먹으면서 친구랑 얘기를 많이 했어. 시험 잘 봤냐, 붙을 거 같냐, 포항에 간 애들은 아직도 시험치고 있겠지, 그런 얘기. 걔는 나중에 들어온 데다 좀 공주가 아닌가, 라는 평판이어서 별로 친하지 않았었거든. 얘길 하다 보니 꽤 괜찮은 애 같더라고. 그러고 보니 그동안 공주라고 생각했던 게 미안하기도 하고.”
아메리칸 드림 같은 재수쟁의 서울 드림
“왜 그렇게 서울로 오고 싶었어?”
“그건 그냥 아메리칸 드림 같은 거야. 여기서 살기 싫고, 어딘가로 가고 싶고, 인생이 확 달라졌으면 좋겠고, 무엇보다도 집을 나가고 싶고, 그런 거.”
“대학에 가서 뭘 하고 싶었는데?”
“글쎄, 뭘 하고 싶었을까? 로맨스? 고등학교 때 부터 남자친구를 사귀긴 했지만 진짜 로맨스는 대학에 가서야 시작된다고 생각했어. 남자 친구랑 손잡고 대학 정문에 들어서면 ‘환영, 로맨스의 시작‘ 뭐 그런 걸 꿈꿨던 거 같애. 그리고 데모도 하고.”
“아 참, 남자 친구는 어떻게 됐어?”
“또 떨어졌어. 삼수하느라 힘들었지. 삼수하는 동안 헤어졌어. 그냥 그렇게 됐어.”
“결국 생각대로 된 건 하나도 없네. 서울은 이렇게 후졌고, 로맨스의 시대는 지난지 오래고, 데모하는 것도 생각같지 않았을테고…”
“그렇지 뭐. 그렇지만 뭐, 나도 이제 깍쟁이 같은 서울 사람이 다 된 셈이지. 로맨스에 대한 환상같은 것도 없고. 그때는 어딜 가든 집을 떠나고 싶었으니까.”
나는 그냥 이게 궁금했습니다. 교복 같은 여학생용 겨울 코트를 입고 시험을 보러 집을 나서던 소현이는, 지금 떠나면 다시는 여기에 살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당연하지. 나는 그러고 싶었어. 정말 그러고 싶었어. 그리고 정말 다시는 거기서 살게 되는 일은 없을 거 같애.”
끝없이 멀어지기만 하는 오, 꿈의 나라
나는 드림 랜드에 찾아가는 소현이의 이야기가 좋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고 말했습니다. 어차피 나중에 깨질 꿈이라도 시작은 좀 더 그럴싸했으면 좋았을 걸.
“아니야, 너, 생각해 봐. D시에서 막 올라온 촌년 둘이서 서울에 있는 드림 랜드에 가겠다고 걸어가는 거야. 조금 지나면 나올 거다, 조금만 더 가면 나올 거다, 기대에 부풀어서 우리는 두 시간 동안 내내 흥분해 있었다구.
나는 그 때를 생각할 때마다 재밌기도 하고 의미심장한 거 같기도 한게, 딱 그게 우리 재수 생활 같은 거야. 드림 랜드 방향의 화살표를 계속 따라가는 거, 뭐가 나올 지는 모르지만 가라는 대로 가기만 하면 좋은 것이 나올 거라고 믿고, 그것이 계속 연기되고 연기되고 연기되는 동안 지치기도 하고 실망도 하면서, 그렇지만 끈질긴 희망을 가지고 계속 가는 거. 정말이야, 그 때는 그런대로 괜찮았어. 적어도 뭔가 나올 거라는 희망을 버린 적이 없으니까.” “재수할 때는 시간이 참 많았어. 아무리 문제집을 풀어도 시간이 남았거든. 특별히 다른 할 일도 없고. 인생에 그런 시기가 정말 드문 거 같애. 그래서 지금도 힘들면 확 쉬어주거든. 그 맛을 아니까. 실패에 대담해지고, 자신의 한계를 잴 줄 알고. 그게 재수 시절의 교훈이지.” – (보세요, 제 말이 맞죠? 꽤나 거들먹거리는 재수생 출신이라니까요.)
에필로그
그래서 소현이는 결국 서울에 있는 변변찮은 S대를 졸업하여, 전공인 생물학과 전혀 관련없는 변변찮은 회사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친구가 전공을 잘 살리고 있지 못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가 없는 것이, 생물과 관련된 이야기-특히 생식 부분-만 나오면 핏대를 올리며 아는 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혹시 소현이를 만나게 되면 개구리나 진달래, 계수나무, 물벼룩 등 그 어떤 생물학적 주제도 꺼내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안 그러면 그녀의 끝도 없는 생물학 강의에 지쳐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생물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다 맞는 것이며, 올바른 지식을 남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어쨌든 저희는 모두 그렇게 조심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