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수 김영식 선생

본질적으로 인간의 정신에 가해지는 폭력인 전향 제도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다. 전향을 "공작(工作)"했던 대한민국의 정권들은 이 싸움에서 졌다.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서승 선생이나 작년 9월 북한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들의 경우에서 그러하다. 또한 고문과 강압에 못 이겨 마음에도 없는 전향서에 도장을 찍었다가 '마음 속의 응어리'를 벗기 위해 결국 그것을 철회해버린 김영식 선생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쇠사슬은 사람의 마음에 졌다. 무자비한 살인적 폭력(*주1)과 갖은 회유로도 묶지도 꺾지도 못한 그 "마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1. 28년만의 양심선언

 

관악구 낙성대에 있는 장기수 쉘터 ‘만남의 집’에 가서 김영식 선생을 만났다. 우리가 김 선생을 만나기로 한 것은 지난 1월 29일, 그가 전주에서 한 기자회견 내용을 보고 나서였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962년부터 88년까지 무려 26년간 옥살이를 했던 김영식 선생은 기자회견에서 “이제 나도 인간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70 고개를 눈앞에 둔 노인이 왜 “이제 나도 인간이 되었다”고 선언해야 했던가.

 

국보법 위반 혐의로 26년간 복역했던 장기수 김영식(67, 전주 거주) 씨가 자신의 전향을 철회하는 양심선언을 했다. 김씨의 전향철회는 지난 99년 정순택, 유연철 씨가 공개적으로 전향을 철회한 이후 처음이다. / 김씨는 29일 전주 고백교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의 조직적인 고문과 강압에 못 이겨 전향을 했다”며 “강제전향은 나의 의사가 아닌 고문에 의한 것이기에 전향취소를 명백히 선언한다”고 밝혔다. 덧붙여 김씨는 “세월도 화해의 길로 가는데 나만이 마음속에 응어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게 너무 괴로웠다”며 “이제라도 과거의 잘못을 벗고 안정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밝히고 북송을 요구했다. – 인권운동사랑방 2001년 1월 30일(화)

http://www.sarangbang.or.kr/kr/haru/hrtoday/hr1781.html
http://www.sarangbang.or.kr/kr/haru/hrtoday/hr1783.html

 

기사를 보고 나서 글귀 하나가 머리에 떠올랐다. “사람의 마음은 쇠사슬로 묶을 수 없으리.” 이는 소위 ‘재일교포학생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으로 19년간 비전향 장기수로 복역했던 서승 선생의 <옥중 19년>(역사비평, 1999)의 부제이기도 하다.
도대체 전향이란 무엇인가?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일제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은 전향정책을 대한민국 정부는 정치범들에게 왜 끝없이 강요했던가? 

“사상전향은 국가권력에 대항한 사람이 국가사상에 동조하거나 국가권력에 복종할 것을 서약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의 내면에서 정신적 갈등 끝에 생긴 신조의 변화인 ‘회심’과 달리, 원래 ‘전향’에는 타인이나 사회의 압력을 의식해 외부세계를 향한 태도 표명을 전제로 하는 경향이 있다. 조사기관이나 감옥에서는 당연히 물리적-심리적 폭력으로 사상전향을 강제한다.- 서승, <옥중 19년>, 147면”

본질적으로 인간의 정신에 가해지는 폭력인 전향 제도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다. 전향을 “공작(工作)”했던 대한민국의 정권들은 이 싸움에서 졌다.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서승 선생이나 작년 9월 북한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들의 경우에서 그러하다. 또한 고문과 강압에 못 이겨 마음에도 없는 전향서에 도장을 찍었다가 ‘마음 속의 응어리’를 벗기 위해 결국 그것을 철회해버린 김영식 선생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쇠사슬은 사람의 마음에 졌다. 무자비한 살인적 폭력(*주1)과 갖은 회유로도 묶지도 꺾지도 못한 그 “마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김영식 선생: 그러니깐, 단 한가지는 그래. 이렇게 고생한 것도 그렇고 근본문제는 간단해. 복잡한 게 없어. 응, 정의와 진리. 진리가 있단 말이야, 이 세상에… 정의와 부정의가 있잖아? 그러면 우리는 생각이 정의(正義)의 입장에 서서 언제나 생각을 하거든. 그러니깐 그 정의의 입장이 무엇인가 하면은 1910년에 이완용이 하고 이등박문이 하고 둘이 딱 했잖아. ‘야, 조선을 갖다가 우리 일본하고 합병을 하자’ 도장 딱 찍고… 도장을 딱 찍고, 그때 어떻게 해요. 조선군들을 해산시켰죠. 그래 가지고 일본군대가 편입을 시켰어요… 그러니깐 조선군들이 편입시키니깐 어떤 사람들이 조선군대에서 일본군대로 가고, 어떤 사람들은 조선군대 해산시켜서 일본군대에 편입을 못하겠다고 해가지고 뛰쳐나온 거야. 의병운동이야…
그러니까 나는 어떤 편이냐? 이완용이 편이 아니야. 나는 의로운 사람들 편이여… 시방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깐 나는 그게 정의의 편이라 생각하고.

 

 

김영식 선생은 약속시간보다 약간 늦게 왔다. 토요일 오후의 교통사정 때문이었는데, 김 선생은 수원에서 열린 노동자집회에 다녀온 길이었다. 늦어서 미안하다면서,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큰 목소리로 저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 ‘마음’이란 정/부정을 판별하는 원초적인 양심의 감각 같은 것을 뜻하는가? 정의와 부정의(不正義), 의병과 이완용. 한편으로 우리는 약간 놀랐다. 김 선생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에서 구사된 논리가 단순했고, 그 말투도 설득적이거나 차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장기수”라는 말을 들으면 당신은 어떤 인물을 떠올리는지? 김영식 선생이 가진 면모는 우리의 선입견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장기수가 된 인물들이 원래부터 투철한 사회주의자나 김일성주의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권으로부터 “영원한 격리”를 선고받고 최소 십 수년씩 옥살이를 하면서, 그들의 신념과 양심에 대한 감각은 세계 최강의 것으로 단련되었을 것이다. 내적으로는 허약하고 자신감 없었던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이 단련의 불길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장기수들을 생각하면 “신념, 고문, 투쟁, 학습”과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대부분은 이미 노인네이지만, 그 면모는 여느 평범한 노인들과는 좀 다르다. 속골병이 들었을지는 몰라도 38선을 넘나들고, 시대를 가로지르며 투쟁해온 그 눈빛은 형형하다. 햇볕에 덜 노출된 피부는 맑아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 정치범에게는 노역을 시키지 않고, 운동 시간도 조금밖에 허용하지 않는 한국의 행형정책 덕분이기도 하다.

 

김영식 선생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또다른 장기수 출신 서옥렬 선생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덤으로 얻는 행운을 누렸다. 서옥렬 선생은 송도정치경제대학을 졸업하고, 1960년에 남파되어 61년 5월 북으로 귀환하는 도중에 검거되어 딱 3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고 한다.(*주2) 도저히 나이(74세)대로 보이지 않는 그는 출옥한 이후에 사람들이 빨리 늙는다고, 작년부터는 사람들이 나이대로 자기를 봐서 ‘기분이 무척 나쁘다’고, 농담도 했다. 우리가 쉼터에 도착했을 때, 그는 얼마전 새로 창간된 <민족 21>이라는 잡지를 읽고 있었다. 스탠드를 켜 놓고, 책에 줄을 그어 가면서 말이다. 그가 우리에게 물었다. 그리고 ‘장기수’의 이미지에 대해 스스로 이야기했다.  

 

 

서옥렬 선생: 내가 인텔리로 보여요?
퍼슨웹: 예.

 

서옥렬 선생: 그게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장기수라고 하면은 좁은 공간에 살고 거 안에서도 그냥 억압되고, 학대받고 이렇게 살다보니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지가 형성이 되거든요. 이게 장기수라고 할 때는 현재 대한민국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7년 이상을 치고 있잖아요.
7년 이상을… 7년 이상을 살다 보면은… 버릇이 배는 건데. 내가 봐도 그래요. 한 두 마디 얘기하고 나면은 ‘아~ 저 사람은 장기수 같이 보인다’ 그런 생각이 들지.

 

 

그런데 1시간이 되지 않는 짧은 대화의 시간동안, 꼿꼿한 서옥렬 선생께 우리는 자주 핀잔을 들어야 했다.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그런 것도 모르느냐!” 강화와 김포 사이에 있다는 염화강 지명을 몰라서, 또 송도정치경제대학의 성격이나 북한의 교육 체제를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기관지가 안 좋다면서도 선생은 계속 라일락 담배를 피우셨다. 한국의 법정에서 총 6번의 사형 구형과 선고 소리를 들었다는 그는 “이래 봬도 나 실은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예요.”하며 웃었다. 이 말에 나는 “예, 사실 무서우신데요.”라며 따라 웃었다. 비록 웃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작년 여름, 장병락 선생(작년 9월 북한으로 송환되었다.)을 인터뷰하고 온 퍼슨웹의 한 친구는 ‘어땠냐?’는 내 질문에 ‘생각하면 살 떨린다’고 했다. 이유인즉, 장병락 선생은 아직도 자신이 “공화국과 김일성 장군의 붉은 전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신념과 이념적 엄정함은 한편으로는 그 자신의 인간됨을 지키기 위함에서 나온 것일 테지만, 분명 우리 같은 보통의 인간들이 짐작할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남북의 대결이 계속 되고 있는 한, 비록 늙었지만 그들은 ‘무서운’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군사정권이 그들을 죽이지 못해 안달한 것도, <조선일보> 따위들이 그들을 북에 송환하는 데에 있어 온갖 훼방을 놓은 것도, 결국 그들이 무서운 존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인터뷰 자리에 그들을 초대하는 것도 그들이 ‘무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각주 (1) 살인적 폭력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보·법무·교도당국은 전향공작의 과정에서, 실제 살인을 저질렀다. 대통령 직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전향공작에서 적어도 5명 이상의 정치범이 살해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기 어렵고, 고문에 못 이겨 많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각주 (2) 서옥렬 선생은 출옥 이후 『역사의 수레를 끄는 지혜』(한 출판사), 『세계경제 어디로 가나』 등과 같은 책을 펴내기도 했다. 한편 <옥중 19년>에서의 서옥렬 선생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선생에게서 직접 들은 것과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다.
“서옥렬 선생은 고려대 3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나자 의용군으로 인민군에 참가해 북으로 갔다. 김일성대학 정치경제학부를 나와 대학강사를 하다가 1960년에 공작원으로 고향 광주에 내려와 체포되었다. 비전향수로 대전교도소 특사에 있었는데 같은 방에 있던 정치범이 출소해 다시 잡혀 들어오는 바람에 선생도 교사자로 추가형을 받게 되었다. 같은 방에 있던 정치범은 북쪽 대표가 서울에 왔을 때, ‘평화통일 만세!’라고 씌어진 플래카드를 들고 도로변으로 뛰어들었다가 체포되었다. 고문당해 서선생 이름을 분 것이다.” – 서승, 위의 책, 80면. 

2. 강원도 산골로부터 서대문 형무소로

 

김 선생은 1934년 강원도 이천군의 산골에서 태어났다. 일제 때부터 해방될 때까지는 고향 땅에서 계속 농사를 지은 평범한 농민의 아들이었다. 6.25가 나고 그는 17세의 나이로 인민군에 자원 입대했다. 종전후에는 다시 평범한 어민이 되었다. 이력의 면에서도 다른 장기수들과는 좀 달랐다. 

퍼슨웹: 학교는요?
김영식 선생: 학교를 못 다녔어, 안 다닌 게 아니고. 우리 아버지가 아주 반일사상이 아주 철저해 일본놈들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일본 물 못 배우게 저 산골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또 그 뭐라나.. 한문.. 서당을 해 가지고, 선생을 어떻게 불러서 동네 애들 모아가지고 ‘하늘천 따지…’ 그걸 가르쳐서 다 뗐지. 그 당시 크니깐 말이야 어떻게 돼. 일본 시대 때 말이야, 일본 사람들이 여자면 여자, 처녀면 처녀대로 다 끌어가고, 젊은 사람들을 다 끌어가고, 조금 한 40이나 50이나 된 사람들은 징용으로다가 다 끌어가고… 징병, 징용, 위안부… 그때는 많아. 그래 싹 떠나갔어.
그러니 일할 사람이 있어야지, 그러니깐 우리 어머니만 있는데 우리 아버지는 보국대 가고. 일할 사람이 있어? 나보고 일하라는 거야. ‘아이고 나는 학교 가서 공부 좀 해야하는데 이걸 나는 왜 공부도 안 시켜주고 김을 자꾸 메라고 그래요’ 그러니깐 ‘야야~ 봐라 저쪽 집에 누구 봐라… 그 사람은 공부 안 했어도 돈도 다 세고, 숫자도 다 세고…  공부는 해 머 하냐? 돈 그거만 세면 되지’ 그래서 자꾸… 그게 시방 자꾸 서운해… 

해방과 전쟁의 기억

퍼: 해방되었을 때 이천은 분위기가 어땠습니까?
김 선생: 해방되었을 때 처음에는 살기 좋았지. 그런데 우리가 왜 지리산에서 수 없는 사람이 죽고 6.25에서 수 없는 사람이 쓰려졌느냐 하면은, 일제 때 살던 사람들은 모두가 반일 사상을 가지고 있어. 그러기 때문에 해방이 되니깐 막~ 좋아해 가지고 면장집도 가서 부수고, 주재소도 부수고 그랬는데…
얼마 안 있다가 남쪽에는 미군이 들어오고, 북쪽에는 소련군이 들어왔잖아. 소련군은 혁명가 입장을 지지하니까 북에서는 그렇게 불상사가 없었는데, 남쪽에서는 불상사가 많았지. 왜, 미군이 들어와 가지고는 일제 때부터 독립운동을 하던 그런 사람들을 지지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제쳐놓고 우리가 제일 싫어하고 치가 떨리는 친일파들, 매국노들. 이 사람을 미는 거야. 미국사람들이 전부. 조선 총독부고 그 사람들을 전부… 처음엔 우리가 득세했어. 전부다 인민위원회며 건국준비위원회 해 가지고… 여운형 선생님 말이여.

 

퍼: 이천군 말씀하시는 건가요?
김 선생: 그렇지… 거기도 그렇고, 남쪽에. 그런데 미군이 들어와가지고 전부다 해산시키고 암살하고… 나는 그래, 젊은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해방이 되고 그랬으면 말이야, 일제 때 그 어려운 때에 가족도 버리고 고향도 버리고 저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라고 세워 가지고 그 고생하던 김구 선생 같은 그런 분을 모셔야 일이 제대로 되는데, 그런 사람은 못 모시고 말이야 그냥… 아휴~ 제일 못난 이승만이 같은 사람을 모셔 가지고 말이야, 완전히 우리나라 버렸어.. 완전히…

 

일제시기와 해방기에 대한 김 선생의 기억에는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이 섞여 있는 듯했다. 6.25에 관련된 기억도 그러했다. 김영식 선생은 미군과 연합군이 재차 38선 이남으로 후퇴하던 50년 12월 10일에 입대했다. 

 

김 선생: 나는 미국놈 말이야. 와서 비행기 폭격하고, 그 지랄하고 일제 때도 말이야, 일본놈들 군대를 그렇게 미워했는데, 젠장 해방이 됐다고 그러면서 다시 미국 군대가 들어와서 폭격하고 막 그러는데 말이야, 에이~ 살고 싶질 않더라구, 죽고 싶어.. 그냥. 그래서 그때 작고 그래서, 키도 작고해서 못나간다고 사정없이 그랬지. 그래 가지고서 (인민군에) 나왔지. 나와서 쫓아다니느라고 혼났어. 키는 작은데 큰 사람들 쫓아다니느라구. 하하하.

 

김 선생: 그때 이제 고향에서 농사짓다가 그럭저럭 하다가… 또 이 50년도 그때 이제 저 낙동강까지 내려 왔다가 미군이 낙동강에서 원자탄 썼거든. 원자탄 써 가지고 인민군들을 싹 몰살했어. 그러는 바람에 인민군들이 후퇴했지.

 

퍼: 그걸 어디서 들으셨어요? 미군이 원자탄을 썼다는 얘기를…?
김 선생: (소리 높여) 아 그럼.. 거기 직접 가서 취재해야 돼… 젊은이들 고기 직접 가서 취재해야해. 영감들 죽기 전에 가서 빨리빨리. 우리나라의 실제를.. 미국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얼마나 나쁜 사람들인지 알아요? 그 사람들이 영국에서 건너가서 미국에는 인디안이라고 토인들 있었어. 토인들을 말 타고 다니면서 다 잡아 죽이고, 그러기 때문에 미국사람들이 현재까지 총 가지고 다니고 있어. 왜 그러냐면은 인디안들이 치고 들어오면 쏠려고… 아직까지 총 가지고 있어. 그런데 자기네 형제들끼리도 자꾸 쏘아서 죽이잖아요. 학교에서 뭐 쏴 죽였다.. 그러잖아요.

 

퍼: 전쟁통에 그런 소식을 들으셨다고요? 낙동강 주변에서 미군이…
김 선생: 아, 다 알지. 아 그리고 세균을 얼마나 쏜지 알아? 미국이.. 세균을 그렇게 많이 쐈어요. 안 쐈다고 그래요… 국제적십자에서는 다 조사하는데.. ‘아이고~ 미국에서는 우리 그런 거 안 쐈습니다.’ 그러는데, 나는 직접 다 봤어 그냥.. 이 통이 말이야. 이렇게 고구마 마냥 이렇게 되어 있어요.(손으로 통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칸칸이 이렇게 막고 거기다가 쥐도 넣고, 파리도 넣고 해서 그냥 막 떨궈…

 

퍼: 비행기에서…?
김 선생; 고럼. 겨울에도 파리가 그냥 눈에가 하얗게 된 거야. 그러니깐 남쪽 같은 데는 이제 좀 따뜻하니까… 그러니깐 그렇게 따듯한지 알고 거기다가 떨궈… 눈에 파리가 그냥 쌔까맣게…

 

퍼: 그건 직접 보신 겁니까?
김 선생: 그럼.. 야 그거는 사진기가 하나 있었으면 찍었으면 값이 비쌀 거구만…

 

퍼: 그때 그게 세균탄인지 잘 모르셨나요?
김 선생: 이상하다고 느꼈어 그냥… 눈에 파리가 이렇게 참 신기하다고 보니깐 그런데 그걸 후에 알고 보니깐 그게 전부 다 세균이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원폭과 세균전을 증언하는동안 김영식 선생의 음성은 높아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미군이 원자탄을 썼다는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 그러나 세균전에 대해서는 신빙성 있는 많은 증언이 쌓여 있다.(*주1)

 

퍼: 참전하신 전투중에 아직 기억나시는 게 있습니까?
김 선생: 제일 유명한 거는 1211고지. 1211고지가 제일 유명해.

 

퍼: 어디 지역인데요?
김 선생: 국군은 그걸 김일성 고지라고 그러는데. 이게 원래 까칠봉(?)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김일성 고지라 그러고. 고지가 이렇게 두 개가 있는데, 이게 스탈린 고지고 이게 김일성 고지야.(손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점령을 못하고, 그냥 계속… 미군이 올라왔다가 인민군이 쏘면 내려가고…

 

퍼: 격렬한 전투였나요?
김 선생: 아~ 말 못하지.

 

퍼: 부상당하거나 그러시지는 않으셨습니까?
김 선생: 나는 폭탄이 비 오듯이 떨어지고 그래도 어디 웅덩이에 들어가 있었어. 하여튼 나는 맞으면 죽는다고 생각했어요. 조금 다치면 아예 끝나더라구… 그래서 나는 ‘맞으면 죽는다…’ 그랬는데, 이상하게 미군이 수 없는 폭탄 던지고 수 없는 총을 가지고 쐈는데, 그래도 그렇게 맞지를 않고 부상도 안 당하고, 다행히 그러더라구… 그건 내가 생각해도 신기해. 아이, 죽은 사람들 수없이 많아.

 

당의 부름, 그리고 파선.

선생은 1957년에 제대를 하고 원산에서 어부 생활을 하게 된다. 1년 남짓 평범하게 어부생활을 하다가 남쪽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된다. 당의 권고(?)에 의해서였다. 

 

김 선생: 농촌으로 농사지으러 갈라고 그랬는데, 여러 가지 어려운 게 있더라, 그래가지고 원산엘 배 타러 갔지요.

 

퍼: 그러면 어떤 계기로 남쪽으로 내려오는 배를 타게 되었는지?
김 선생: 당에서 이제 일을 하는데, ‘조국통일 사업에 좀 동원되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의견을 주니깐.. 나는 적극적으로 이런 사회라면 나 같은 사람도 목숨을 바쳐도 괜찮고 가족을 버려도 괜찮다는 생각에서, 아 쾌히 승낙해 나왔지요.

 

퍼: 그렇게 나오는 사람들은 자원하는 경우는 많습니까? 그러니깐 당에서 부르지 않더라도 직접 ‘내가 이거를 하겠다…’ 그러는 사람들.
김 선생: 자원… 글쎄 그거는 잘 모르겠어요. 자원은 모르겠는데…

 

퍼: 당에서 부르면, 선생님처럼 그렇게 대부분 OK들 하십니까?
김 선생: 어떤 사람은 무서워 가지고 안 나가는 사람도 있어. 내가 그런 거 봤어. 하하. 머, 사람이 많으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는 거 아녀.

 

김선생은 군대에 있을 때 입당하여 당원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 제안에 흔쾌히 OK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듯 한데, 선생은 ‘이런 사회라면 목숨을 바쳐도 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퍼: 예, 그럼 내려오기 전에 교육도 받으시고, 훈련도 받으시고 했을 거 같은데… 소속은요?
김 선생: 응, 그렇지. 그걸 뭐라 그러더라? 하여튼 방방향(이게 뭔지? 물어볼 데도 없고)이라고 그러는데 거기 가가지고…

 

퍼: 방방향이요?
김 선생: 응, 거기서 훈련도 하고, 무전 훈련도 하고 그랬어.

 

퍼: 훈련은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참, 대단히 죄송한데, 처음에 잡혔을 때 신문 당할 때 이런 질문 많이 받으셨지요?
김 선생: 훈련은 한 2년 받은 거 같아.

 

김영식 선생은 우리가 지난 여름에 만났던 장병락 선생과 같은 공작선을 타고 남에 내려왔다. 장선생은 기관장, 김 선생은 무전수로 함께 남한 당국에 검거된 것이다. 

 

퍼: 그때 이야기를 좀 해주십시오. 오고 잡히신 과정…
김 선생: 그때 배는 고성군 장전항에 있었는데, 한번은 전투지시가 내려와서 배를 이제 준비해 가지고 남쪽으로 나올려고 그러는데, 남쪽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고 그러면서 당장 들어오라고 그러더라구요. 당장 들어왔지요. 군사 쿠데타 일어나가지고 못 나오고 아마 몇 달 대기했을 거요. 그렇게 있다가 또 나왔어요. 나왔는데, 어딜 나왔느냐면 여름에, 방어진…

 

그렇게 선생은 6명의 승무원과 함께 울산 서생면 신선바위 앞으로 왔다. 그런데 약속된 장소에 오자마자 대낮같이 조명탄이 켜지고 총탄이 비오듯 쏟아졌다. 승무원 1사람이 그 자리에서 죽고, 배는 기관 고장을 일으켰다. 그렇게 그들은 “포로”가 되었다. 중앙정보부가 그들이 오는 것을 알고 미리 준비를 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1962년 3월이었다.

 

김영식 선생 일행이 접선하기로 한 사람은 김정기라는 “공작원”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많은 공작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김정기 씨는 원래 남쪽 출신이었다 한다. 서울대를 다니다가 전쟁 때 인민군에 입대하고 김일성대학에 가서 다시 공부했다고 한다. 남으로 파견된 이 사람이 중앙정보부에 가서 “자수”를 한 것이었다.

 

김 선생: 서울이 고향이고, 서울대 나왔으니깐 아는 사람들이 많으니깐 나와서 일 좀 하려고 했는데, 아이 가족들이 사정없이 붙들은 모양이야. 가족들이 정보부 가서 이야기하라고 그러니깐 그 사람이 그랬다고 그래. 너무들 자꾸 그러니깐, “아, 그러면 말이야, 데리러 오는 어부들 말이야. 어부들 그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접선장소를 대 주겠다”는 식으로… 그 후에 얘기 들으니깐… 북에서 접선 나온 우리 일행을 붙들어 죽이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자수했다는 거야.

 

퍼: 근데, 왜 어부라고 말한 거지요?
김 선생: 어부로 가장한 거지… 하하하.
퍼: 하하하. 그렇게 순진했단 말입니까…

‘그 사람들 어부니까 살려주면, 수사에 협조하지’라. 웃을 수밖에 없는 비극이었다. 같은 배를 탔다가 살아남은 다섯 사람의 운명도 제각각 갈렸다. 한 사람은 옥사했고, 한 사람은 출소한 이후에 별세했다. 끝까지 전향하지도, 죽지도 않고 살아남은 장병락·조창순(당시 수부장) 두 사람은 북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김영식 선생이 여기 남은 것이다.  

 

퍼: 조사는 어떻게 받으셨나요…
김 선생: 아마…. 한 부산에서 한 20일 했는가… 잘 모르겠어. 그 정도 하고 그리고 미군   헬리콥터 타고 여기 영등포. 영등포 미합동부 수사본부가 있어. 거기 가 가지고서 서너달 했는가 어쨌는가…

 

‘무서운’ 서옥렬 선생은 우리가 김영식 선생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빵을 잘라준다, 딸기를 씻어다 준다, 하면서 분주하셨다. 아까 대화할 때 ‘무식하다’고 핀잔을 많이 먹여 미안한 마음이 드신 건지? 아무튼 74세가 된 ‘간첩’ 출신 노인이 해 주는 대접이란 몸둘 바 모르게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더니, 출타 준비를 하면서 대화 내용을 잠시 듣고 있던 서 선생이 다시 한 번 핀잔 먹이기를 잊지 않았다.

 

서옥렬 선생: 대방동에 가면 지금 얘기한, 그게 있었어요. 그저 간판도 안 붙이고, 속칭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더라구, 한미 합동정보 특수대.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네.

 

퍼슨웹: 대방동이라고요?
서옥렬 선생: 서울공업학교(지금의 서울공고) 있는 데… 그때는 허허벌판이었는데, 그런 거 한번 추적해봐, 이 사람아! 현대사 공부한다 말만 하지말고. 그러면 나 갔다 올께요.

 

퍼: 상당히 오랜 기간 조사를 받으셨네요. 특별하게 뭐가 있는 게 아니고 와서 싣고 올라가는 게 임무였는데 말이죠.
김 선생: 그럼, 임무야 특별한 아무 것도 없지.

 

퍼: 주로 어떤 내용들을 조사하던가요?
김 선생: 뭐, ‘북에 가다가 해상에서 충돌한 사건이 있느냐, 없느냐…’ 그런 거 하고 또 ‘몇 번 나왔댔느냐?’ 이런 거. ‘북에 무슨 배급을 어떻게 주느냐…’ 그런 거만 시시콜콜 물어봐. 이렇게 틀이 있어. 틀이 있어 가지고 하나하나씩 그렇게 물어봐…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계속 그러는거야. 한 거 또 하고 한 거 또 하고…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리지.

 

퍼: 잡히시기 전에 남쪽에 몇 번이나 나오셨어요?
김 선생: 그 전에 뭐, 처음 나왔다 그랬지 뭐.

 

퍼: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실제로는 몇 번째였습니까?
김 선생: 처음 나왔어. 하하하.

서대문 형무소에서

김영식 선생은 재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구 현저동 1번지, 즉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26년 감옥살이의 시작이었다. 

 

김 선생: 여기 서대문 형무소. 필동에서 재판을 받았거든. 필동에, 거기서 재판 받고, 잠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자고. 나는 말이야, 젊은이들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그거야, 서대문 형무소에서 우리 혁명가들이 일제 때부터 수 없는 사람이 죽어갔어. 그런 것들을 나는 한번 취재했으면 좋겠어. 무슨 생각을 하다가 왜 죽어가느냐… 응? 우리나라를 일본에다가 팔아먹으려 그러느냐, 미국에 팔아먹으려 그러느냐… 아 그랬으면 그 사람들이 잘 죽었고, 그렇지 않고 우리 민족이 단합해서 서로 돕고 살아가고 같이 살아가자고 이렇게 생각하고 싸웠다면은 그 사람들이 전부 애국자들이 아닌가. 그러니깐 그러면, 몇 사람이나 죽고, 얼마나… 하~ 그런 거를 들춰내야 하는데 말이야. 아~ 시방 말여. 정말 너무도 어두워요. 어두워도 너무 어두워…

 

퍼: 많이 보셨습니까? 형무소에 계시면서 죽는 분들을…
김 선생: 아, 많이 봤지. 서대문 형무소에 그때 황태성(주2*) 선생도 같이 있었어. 황태성 선생 알어?

 

퍼: 예, 황태성 선생이 63년도에 처형됐죠.
김 선생: 그렇지. 근데, 12월달이 되었어. 내일이 크리스마스야. 그런데, 오늘쯤 사람을 줄줄이 갖다가 죽이더라고. 그런데, 하여튼 만세 소리가 깊은 산 속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로… 담이 이렇게 높은데 여기서 만세 소리를 지르니깐 궁궁 울려 나오더라구.. 야아… 그래서 나도 이제 만약 사형 받으면 저런 식으로 해야겠구나. 생각했지 뭐… 사형장이 앞에 있고, 그게 몇 사던가? 6사, 7사인가?

 

퍼: 서대문 형무소서 63년 연말에 사형 당하는 일이 많았는가요?
김 선생: 그런데 다음 날이 크리스마스라 아침에 멀건 돼지고기를 끓여준단 말이야. 사람을 많이 죽이고 돼지고기를 끓여주니깐 사람고기를 끓여 주는 거 같은 기분도 나더라고, 생일이나 되야 돼지고기를 주는데 말이야, 기분이 말이야. 그러게 생각되는 거야.

 

퍼: 그 뒤로 그 날 처형된 사람이 누구누구인지는 모르구요?
김 선생: 모르지. 창문으로 멀리 내다보기만 했으니깐. 황태성 선생, 그 사람은 머리가 하얗고 키가 크고 그랬는데…

 

퍼: 황태성이라는 건 어떻게 알아 보셨습니까?
김 선생: 소지가 얘기를 하더라구… 그 양반이 박정희 형하고 그전에 경북에서 활동했고, 박정희는 그때 자기 박정희 형하고 황태성 선생하고 활동할 때, 술좌석도 하고 할 때, 술이 떨어지면 박정희한테 ‘야 돈 좀 가져와서 술 한 병 사와라’ 그러면 달랑달랑 가서 사오고, 그랬다고 그런 얘기도 하더라구. 아는 사람들이… 그래서 알았지.

 

 

각주 (1) 트루만과 아이젠하워 정부는 종전회담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까지도 핵무기의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했었고, 1952년 당시 원자폭탄은 오키나와까지 이동되었다. 하지만 전쟁기간 동안 핵무기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된 적은 없다. 김영식 선생의 원자탄에 관한 기억은 아마도 한국전쟁 내내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 준 미공군의 폭격이 남긴 ‘과장된 기억’이 아닐까 싶다. 사실 핵무기가 주는 상징성이 있긴 하지만, 피해 규모에 있어서는 재래식 무기도 그에 못지 않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에 희생된 피해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전에 있었던 동경공습에서 희생되었으니까.
한편 세균전과 관련한 유엔과 미국측의 공식입장은 “사용한 적 없음”, “빨갱이들의 터무니없는 모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과 중국은 전쟁당시부터 줄곧 미국이 북한지역에서 세균전을 벌였음을 주장해 오고 있으며, 많은 저널리스트들과 참전군인들의 증언이 있다. 미국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이 문제는 점차 신빙성을 확보해가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일본과 미 CIA가 깊숙히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된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전쟁 기간동안 미국의 전쟁수단에는 거의 제한이 없었으며, 세균전의 가능성도 거의 확실해 보인다. 최근의 한 연구에 따르면 세균무기 뿐 아니라 LSD와 같은 환각제도 실험했다고 한다.
(참고) Endicott, Stephen & Hagerman, Edward(1999), The united States and Biological Warfare, Univ. of Indiana Press.
엔디콧의 책에 관한 간략한 서평.
http://www.zolatimes.com/V3.8/germwar.html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세균전 :
http://www.onekorea.inchon.kr/sekun.htm 

각주 (2) 김 선생의 기억에는 약간의 오차가 있었다. 황태성이 처형된 것은 63년 12월 14일,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였다. “황태성씨는 남로당 선산군 당위원장이었던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선배동지요, 친구였을 뿐 아니라 박상희의 결혼 중매인이었다고 한다. 남로당 경상북도 위원장이었던 황태성 씨는 6.25전에 북으로 가 무역성 부상(副相)을 지냈다. / 1963년 12월 대통령선거가 한창일 때 야당후보 윤보선 씨는 박정희가 황태성 씨를 몰래 숨겨주고 있다고 폭로하자 박정희는 용공의혹을 벗고자 가족의 은인인 그를 사형에 처했다. – 서승, 위의 책, 113면.”
(황태성 사건에 관해서는
http://minjok.or.kr/newhistory/n7.htm 등)

 

 

3. ‘전향’, 전향 공작

앞에 말한대로, 김영식 선생은 1973년에 “고문과 강압에 못 이겨” 전향서에 강제로 날인을 하였다. 그리고 근 30년이 흐른 뒤에 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선언했다.
70년대이래 자행된 전향공작이 상식의 범위를 넘는 범죄적 행위라는 것은, 거기에 상상하기 어려운 폭력이 동원되었다는 점에만 있지 않다. 전향공작반에 절도, 살인 등을 저지른 또다른 재소자들이 포함되었다는 것, 그리고 전향공작반이 1사람을 전향시키는 데 성공하면 건당 10만원씩의 상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 박정희 정권의 놀라운 상상력이여. 

 

‘사상과 양심의 자유’와 원수지간인 전향제도는 한 마디로 국가 폭력의 벌거벗은 형태이다. 전향제도는 대외적 표명을 전제로 한다. “나 이제 니들에게 협조할게. 나 내 생각, 신념 포기했어.”라고 선언하고, 도장 찍어야 한다. 그리고 지배자들은 그것을 공개하여 한껏 이용해 먹어야 한다. 1920년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을 만들었던 박영희는 감방에 다녀온 후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전향서를 동아일보에 게재해야 했고, 1980년대 주사파 운동의 “강철”이었다던 김영환이가 쓴 <반성문>은 월간조선에 대서 특필되고 그것도 모자라 국가정보원의 팜플렛으로 만들어져 대학가에 뿌려지기도 했다. 

 

그리고 전향 제도는 여러가지로 변형, 재생산되어 왔다. 8-90년대 국가보안법, 집시법, 화염병처벌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법무부 신세를 진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반성문”. 그리고 김대중 정권 초기의 그 말 많았던 준법서약서. 

 

살인적인 전향공작에 관해서는 이제까지 상당한 양의 증언이 쌓였다. 그리고 <옥중 19년>과 같은 문헌은 매우 정밀하게 이에 대해 정리하고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전향을 했던 인물의 증언을 듣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살인적 고문과 회유로 구성된 전향공작은 이미 정해진 법정형을 치르고 있는 수인들에게는 이중, 삼중의 징벌이다.

 

김영식 선생: 전향공작은 뭐, 들어가서 징역 살면서 계속 전향공작을 당한 거야. 전향을 안 하면 독방에 그냥 계속 쌀자루 마냥 박혀 있거든. 밖에 쇠 잠그고, 계속 방안에 있어. 전향을 하면 출역이라는 게 있어. 저기 공장이 있거든. 여러 사람들도 있고, 거기 가서 자기 취미에 맞게 목공을 간다든지, 옷 만드는 데나 뭐 벽돌공에를 간다든지. 그렇게 나올 수 있어. 전향을 안 하면은 나올 수가 없어. 그냥 방안에 계속 있어야 돼.
그런데 우리를 자꾸 끌어내려고, 방안에 앉아 있으면 계속 괴롭히지. 어떻게 괴롭히는가 하면은 이불 같은 것도 겨울에 추울 때도 다리도 나오게 하고, 양옆이 들리게 하고, 될 수 있으면 괴롭게끔… 하하하. 어떻게 그렇게 괴롭게 만들까, 그것만 그냥… 연구하는 사람들이야.

 

김 선생: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은 가족이 있어 뭐가 있어? 내의를 가져다줘? 광목 옷 홑껍데기 그걸 입히고… 그 다음에 똑바로 앉아 있지 않고 다리라도 피고 어쩌고 그러면은 ‘왜 다리펴!’ 그러면서 공구리 바닥에다가 맨발 벗어서 추운데도 얹혀 놓고서 구두발로 차면서 ‘왜 말 안 듣고, 쪼그리고 가만히 앉아있지 다리를 폈는지 어쨌는니..’ 막 그러면서 필요 없는 말을 자꾸 하면서 시간 보내기가 추운데도. 괴롭히느라고 그 추운데, 찬 데다가 앉혀 가지고… 그렇게 하고.


(한숨을 쉬며) 아이고 참말로~. 나는 정말 구두가 한이 된다니깐… 구두가… 간수놈들이 툭하면 구두로 정강이를 팍팍 차는데 어떻게 아픈지… 야~ 세상에 구두 만드는 사람한테 가서 구두를 만들지 못하게 해야겠다, 그런 생각 다했어. 그리고 또 세상 어머니한테 호소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 ‘세상의 어머니들이여, 자식들이 이렇게 정말 인정 사정없는 자식들을 낳아서 키웠습니까. 어머니들, 앞으로 좀 자식들 좀 부드럽고 잘 좀 키워주셔…’ 하고 호소하고 싶은 생각도 나고… 그렇게 했어.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에 이어 1969년 벽두 김신조 부대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일어났다. 잡힌 김신조가 북에서 좌익수들이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를 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정부는 서대문과 대전교도소에 있던 정치범들을 부랴부랴 광주, 대구, 전주 등지로 분산 이감했다. 이 때 김영식 선생은 광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전향공작을 당한 것도 이 광주교도소에서였다.

 

김 선생: 광주에 새로운 교도소를 또 지었어. 그래 가지고 걸로 이제 갔지. 새로운 교도소를 지었는데 7층, 0.75평이라나.. 요렇게 요렇게 딱 됐는데, 여기에 변소가 있고, 여기다 자면은 그저 무슨 관 같이 좁은데… 처음에 가 가지고서는 금방 지은 방이라 습기가 차 가지고 막 곰팡이가 피고 그래서 말려 달라고 해도 안 말려 주고 계속 그랬어.

 

퍼슨웹: 그러다가 73년에 전향서를 쓰신 걸로…….
김 선생: 그렇지. 그때 그렇게 살다가 전향서가 나오는 거야. 그런데 얼마정도 있다가 김대중 씨가 말이야. ‘일본 무슨 호텔에서 말이야 납치됐다'(73년 8월의 일이다-편자 주)는 그런 게 알려지더라구. 그런 얘기를 들었어. 그렇게 여름을 지나고, 10월경인데 전방(轉房- 방바꾸기) 준비 소리가 나더라구. 전방… 그전에 독방에 전부 다 있지 않았어. ‘짐 다 놓고 나와’ 그러더라구, 그래가지고 짐 놔두고 놔왔지. 나왔더니 7층 벽방으로 전부다 열 대여섯 명씩 몰아 넣네. 들어가 앉혀놓고는 문을 ‘팍’ 잠그고 그냥 그렇게 하네. 그러니 짐도 하나도 못 가지고 왔지. 아픈 사람은 약도 못 가지고 와서 약도 못 먹지. 그래 가지고는 거기서 잠도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떡보이와 어머니 사랑 뭉둥이

2-3평 규모의 방에 정치범들을 열 댓명씩 몰아 넣은 것, 1973년에 전국의 교도소에서 자행된 전향공작의 전주곡이었다. 잠도, 용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김 선생: 그렇지. 그렇게 해서 얼마쯤 고생을 시키더라구. 잠도 못 자고 그냥… 죽을 형편이지.
퍼: 화장실도?
김 선생: 그럼. 화장실도 사람이 가득하고… 그럼. 서준식이라고 알아?
퍼: 예.
김 선생: 그럼 서준식한테 잘 들었겠구만. 서준식이랑 한방에서 같이 썼는데, 한방에서 같이 있으면서 덕도 많이 봤어. 왜 그런가하면은, 서준식 씨 부모가 동경에서 우리나라에 면회 오면서 멋진 담요를 넣어줬거든. 그래서 추우니까 요렇게 담요를 쭉 펴고 이러고 있었어. 그런데 아이 그 떡보이들이 말이여, 그거를 달라는 거여. 근데 이제 처음부터 알아야돼. 떡보이라는 게 이래. 정무정이하고 원삼식인데, 이 사람들이 특수 무슨 절도단들… 이런 거 하던 사람들인데. 사람들이 장기형을 받고 있는데 교무과에서 포섭한 거지. ‘너희들 이사람 재주껏 저 사람들을 전향을 시키면 가석방 다 내보내준다 그러니깐 너희들 거기 가서 일을 해라’ 그래 가지고 마크를 딱 붙였어. 떡보이라고..

 

퍼: 떡보이가 무슨 뜻입니까?
김 선생: 떡치듯이 막 치라 이거여… 그리고 어머니 사랑 몽둥이라고 야구 방망이 있지. 그거 가지고 다니면서…

 

떡보이, 전향공작에 동원된 일반 재소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심각하고 슬픈 이야기였는데, 김영식 선생은 웃으며 이야기한다. 원래 낙천적인 성격인지, 아니면 아직도 어이가 없다는 뜻인지.

 

퍼: 하하하, 어머니 사랑 몽둥이요?
김 선생: 응, 어머니 사랑 몽둥이… 그거 가지고 다니면서 그냥 누구하고 얘기를 해도 ‘나와’ 그러면서 문 따고서는 엎드려 놓고는 사정없이 때리고 ‘왜 쳐다봐’ 그러면서 또 때려. 붙이면 붙이는 대로 전부 다 되는 거야. 이렇게 붙이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붙이면 저렇게 되고…
근데 거기서 나는, 참 지금 울산에 계시더라구. 아직두… 김재헌 씨라구 있어. 이 양반은 육군 중령인가 이렇게 있었어. 그러다가 이제 포로가 되었거든. 지원군들한테 포로가 되었어.

 

김영식 선생은 자신에게 따뜻하게 잘 대해주었다는 김재헌 씨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책 한 권을 우리에게 줬다. 민족예술인 총연합 울산지부가 펴낸 『맥』이라는 잡지의 창간호였다. 여기에는 “솔계의 기구한 인생역정”이라는 김재헌 씨의 회고록이 실려 있다. 김재헌 씨는 일종의 이중간첩이었다. 원래 국군 장교로 전쟁 중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북에서 교육을 받고 모종의 임무를 띠고 남으로 나왔다. 남에 오자마자 기관에 발각되었고, 기관은 김재헌 씨를 붙잡아 역공작을 해서 그를 북으로 파견했다. 북으로 갔던 그는 다시 임무를 띠고 남으로 내려와서 수감된다. 참으로 기구한 생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그가 남의 감옥에서 전향공작의 대상이 되어 김선생과 함께 전향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것이다.

 

김 선생: 그러니깐 이 양반이 그렇게 돼서 들어온 분인데 이 떡보이들이 말이야, ‘육군 중령이 말이야 빨갱이야, 이 개쌔끼.’ 엎어놓고 사정없이 때려 가지고 이 뒤에가 시퍼렇게 됐어. 그래 가지고 나하고 같이 전향해서 나왔다니깐… 나하고 같이…

 

“전향”의 내면

김 선생: 하여튼 괴롭히는 게 문제야. 사람을 이렇게 손을 뒤로 수정(手錠)을 채우거든, 그러고는 밧줄을 끼워가지고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그냥 그러지. 옷을 발가벗기고서 세면장에 가서 물을 팍팍 끼얹지. 그러면은 죽는다고… 그 다음에 조금 잘못하면 식구통이라고 있어. 밥 넣고 내는. 그것을 식구통이라고 하는데, 손 내놓으라고 하지. 손 내놓으면은 어머니 사랑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리고, 그냥, 이렇게 이제 전향공작 하다가… 

 

김 선생 : 그 다음에는 이제는 뭘 하는가 하면은 물 고문을 하는데, 아휴~ 나는 그거 못  견디겠더라구. 물고문에 들어가는데, 물고문 틀이 이렇게 딱 있어. 틀이 요렇게… 물주기 요만큼 해가지고 틀이 이렇게 딱 있어. 그러면 손에 뒷수정 채우고 다리는 밧줄로 묶고, 그 다음에 또 목에는 모꼬채 같은 걸로 탁 끼우는 게 있어.

 

퍼: 모꼬채요?
김 선생: 응, 나무로 돼 가지고 끼우는 게 있다니깐, 움직이지 못하게. 그 다음에 입에는 얇은 수건을 덮고, 꼭대기에 한 놈이 올라가서 붙들고, 한 놈은 물을 붓고. 그 지랄을 하지… 근데 몸이 오랫동안 징역살고 먹지 못하고 고생한 몸이라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어. 몇 번 물이 콧구멍으로 들어가고 하면 ‘?Z’ 하면은 정말 죽을 맛이야. 정말, 아주 맛이 없어. 그러면 그때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게 무언가 하면은 ‘교무과장 만날래 안 만날래? 교무과장 만난다고 얘기해. 얘기해’ ‘아, 만난다, 만난다.’ 그러면 바로 그게 전향이야.

 

김영식 씨가 전향서에 날인을 한 것은 결정적으로는 물고문 때문이었던 듯했다. 김 선생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져있다. 동시에 질문자들도 무척 조심스러워졌다.

 

퍼: 그러면, 그때 심정이 어떠셨는지…? 당장 살기 위해 전향서를 쓰신 거라 할 수 있겠는데, 쓰고 났을 때 심경이… 복잡하셨을 거 같습니다.
김 선생: 아, 그러지… 나는 그래. 아유 참, 나의 생명 하나는 전향서를 안 쓰는 것이 나는 생명이다 하고 끝까지 나는 버틸라고 그랬어. 나는 말야. 전향서를 쓰면은… 거저리(검은 갈색의 딱정벌레의 일종- 편집자) 딱지라고 알아?

 

퍼: 잘 모르겠습니다.
김 선생: 그러니까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야이, 거저리 딱지 같은 놈아…’ 그런 말한다고. 농촌의 초가집에 가게 되면 그런 벌레가 있어. 벌레가 허물을 벗어. 허물을 벗으면 껍데기는 아무 필요가 없어지는 거야. 허허… 그래서 거저리 딱지야.

 

강제로 도장을 찍은 전향서가 거저리 딱지 같이 필요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말인지, 아니면 전향서를 씀으로써 자신이 “거저리 딱지 같은 놈”이 되었다는 말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았다.

 

김영식 : 사실, 이게 나는 정말 옳은 생각, 또 우리 선배들이 그런 생각하는 거를 전통을 이어서 지킬라고 했는데, 아~ 정말 강제적으로… 지난 기간에 고생을 그렇게 하면서 지켜왔는데, 떡보이들한테 꽤끼고 나니깐 하~ 죽겠더라구. 눈물도 나오고, 너무도 화가 나고… 그래도 내가 살기 위해서, 참 억제하고 완화되게 살았죠. 거기서 하라면 하라는 대로하고 이제 “야, 이북을 북괴라 그래”. 그러면 그대로 써주고, 맘대로 다하라고 그래. 그게 쓰는 게 문제인가 내 생각이 문제지.

 

퍼: 전향서의 내용이 기억나십니까?
김 선생: 전향서를 그때 썼던가 안 썼던가 기억도 안나. 그때 문승호라는 사람이 있어. 책임진 사람. 그 사람이 전부 다 했기 때문에… 교회사라고 그러지. 그 양반이 다 했지 뭐. 글을 쓸 줄도 모른다고 그러고…

 

퍼: 아~ 직접 쓰신 것도 아니고…
김 선생: 그럼.

 

퍼: 날인은 직접 하셨나요?
김 선생: 날인을 찍었는가 안 찍었는가, 아~ 모르겠어.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어려웠다. 그 마음을 우리가 짐작하기는 도무지 어려웠다. 전향서를 쓰던 당시의 기억은, 조심스러운 것인지, 고통스러운 것인지 김 선생의 말은 마구 흔들렸다.

 

전향, 그후

퍼: 전향서를 쓰고 난 뒤에는 감방에서 살기가 어땠습니까? 그 전에 비해서…
김 선생: 물론 나아졌지. 독방에 혼자 계속 있다가, 여러 사람이랑 얘기도 할 수 있고 합방도 시켜주니깐 많이 낫지. 처음에는 병원으로 갔어. 병원에를 가서 병원 감방에 이렇게 있다가 거기서 몸이 조금 나아진 다음에 공장으로 가서 일 했지.

 

퍼: 73년 이후에 일반수들하고 같이 지내시면서, 사상범이나 북에서 오신 분들하고는 접촉이 없었나요?
김 선생: 그런데, 공장 같은 데 나가면 일반수도 있고, 그 다음에 우리 같이 전향해서 나와서 거기서 일하는 사람, 그렇게. 막 섞여 있어.

 

퍼: 전향서를 쓰고 난 뒤에 선생님 생각이나 또는 행동하시는 데 어떤 변화 같은 게 있었습니까? 아니면 그냥 똑같았습니까?
김 선생: 음… 변화가 그렇게… 모르겠어요. 변화가 없었어… 그런데 우리가 쇠가 쇠를 먹는다고 그러지. 같은 죄를 짓고, 같이 고생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이 과에 충성하는 사람이 있어. 교도소 입장에 서서 일하는 사람…

 

퍼: 아~ 떡보이 같은 사람이요?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중에서도…
김 선생: 우리를 전향시키려고 교무과하고 같이 나와서 자꾸 얘기하고 그러던 사람이 있었어. 그 특사 안에 있을 때 그 사람을 상당히 밉게 봤거든. 그런데, 이제 공장에 나와서 운동하러 나왔는데, 그 사람이 다가와서 말을 걸더라고. 그래서 고개를 돌리고, 딴 데로 피하고, 그런 적이 있어요.

 

퍼: 그런 분들도 마찬가지로 사상범. 북쪽에서… 온 사람이었는데요? 
김 선생: 그럼.

 

퍼: 어떻게 보면 선생님 같은 분은 죄인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포로(捕虜)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향서를 쓰고 난 뒤에는 일반수와 비슷하게 대접을 받았을 때는 느낌이 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일반수들이나 잡범들하고 생활을 한다는 게 어떠셨나요?
김 선생: 잡범들? 그렇지, 많이 봤어. 아니 근데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도 싫고… 거리가 너무 멀더라구. 그런데 어떤 사람은 월남전쟁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도 들어오고 그랬는데 “후장 해 봤어, 해 봤어?” 그런 얘기나 하고 그러는데, 도저히 나는 맞지가 않아. 시방 여기 영감들한테 가도 전혀 말이 맞지 않아요. 완전히. 그런 사람들은 술이나 먹고 무슨 놀이나 할려고 그러고. 애국심에 대한 얘기라던가, 우리 조국을 살리는 길이 어떤 길인가, 이런 거 신선한 얘기하는 사람은 없고, 전부 그냥… 맞지를 않아요.

 

이전부터 전향공작은 계속되어 왔지만, 1973년의 정치정세는 살인테러 수준에 이른 대규모 전향공작을 부추켰다. 72년 유신체제가 출범했고, 월남의 패망은 확정적이었다. 한편 정권은 뒤로는 7.4 남북공동성명을 준비하는 회담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7.4공동성명으로 남한에 있는 정치범을 북한에 송환하거나 특별 사면해야 할 것에 대비해 전향공작을 본격적으로 실시했습니다. (중략) 그리고 박정희 정권은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직후에 사형이 확정된 정치범들을 일시에 50여 명이나 사형시켜 버렸습니다.” – <이일재 선생과의 대담>, 김금수 선생 강의록, <간부활동론>, 재판 : 한국노동사회연구소, 173면.  

 

그리고 전향공작의 강도에 비례하여, 상당수의 비전향수가 전향했다. <옥중 19년>에 따르면 1973년 12월부터 1974년 4월경까지 계속된 테러로 말미암아 비전향수중 3분의 2가 전향했다고 한다. 또한 테러에 의한 희생자도 속출했다. 김영식 선생은 자기 눈으로 목격한 자살 사례를 2건 언급했다. 동경제국대학 출신으로 뛰어난 지식인이었다는 김기호, 서울 출신인 신춘봉 등이 고문의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광주교도소에서 자살했다고 한다.

 

4. “우리” 나라에서

김영식 선생이 전향서를 쓴 건 73년이지만, 가석방으로 출옥을 한 것은 그로부터 15년이나 더 흐른 88년이었다. 이 또한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데, 군사정권은 전향공작을 할 때는 석방을 미끼로 내걸었지만, 실제로 석방시키지는 않았다. 석방시킬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군사정권 스스로, 정치범들이 일단 목숨을 구하기 위해 위장 전향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퍼슨웹: 왜 88년에야 석방을 시켜 준거죠? 그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김영식 선생: 그런데 그 사람들은 말은 전향서 쓰면 다 내준다고 말은 해. 그런데 전향서를 써도 그 사람들이 믿질 못할 꺼야. 내주지를 못해. 그래서 그래. 그러니까 더 부애(부아)가 나지. 내가 그때 부아가 나 가지고 법무장관이고 어디고 글을 써서 올리려고 다 준비를 하고 있었어.

 

퍼: 어떤 글을 쓰셨습니까?
김 선생: 전향 해 가지고 인차 내보내 준다 놓고는 안 내보내주고 이게 뭐냐구? 인생은… 순간을 사는 게 인간인데 말이야. 이렇게 오랫동안 가둬놓고, 이렇게 가둬 놓으면 무엇이 생기는가? 하고 말이야. 하여튼 별 생각이 다 드는 거야. 잘 써가지고 법무장관하고 대통령한테 싹 보낼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노태우가 내 주더만.

 

퍼: 그 뒤로 보호감호나 보호관찰 조치는요?
김 선생: 보호관찰은 시방, 현재도 있지요. 내놓고도 계속 감시를 한다니깐.

 

퍼: 지금도요?
김 선생: 지금도 있어요.

 

과연 김 선생과 같은 사람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 그렇게 위험한 인물일까? 아직도 보호관찰을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다.

 

퍼: 지금도 있습니까?
김 선생: 응, 어떤 사람은 (보호관찰이) 떨어졌다데. 나는 안 떨어진 거 같애. 아직.

 

퍼: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보고를…
김 선생: 그럼. 아, 그런데 지금은 많이 완화됐어. 그 전에는 딱 글을 써서 올리라는 거야 나보고. 처음엔 순진하게 멋도 모르고 딱딱 써서 지서에 갖다 줬다니깐, 글을 써서… 누구 만나고 어디 갔다오고 어떤 일을 했고… 써서 보고를 하는 거야. 그러니, 아 내 참, 기가 막혀.

 

막노동판에서, 홀로. 
 

퍼: 선생님한테 제일 궁금한 게, 88년부터 지금까지 남쪽에서 어떻게 사셨는지인데요. 남쪽은 낯선 동네고, 88년 이전에는 25년간이나 감옥에 계셨는데요.
김 선생: 고럼. 맞아. 내가 88년에 나왔는데, 그 교도소에 댕기는 목사가 있었어. 정의정이라고, 이 양반이 아는 빗 공장이라고 있더만, 쬐끄만 빗 공장에 가서 살게 됐어.

 

전북 완주군 구의면에 있는 영세 공장에서부터 김 선생의 순탄치 않은 남쪽 생활은 시작된다. 

 

김 선생: 머리 빗는 푸라스틱 빗을 만들더라구. 거기 가서 있는데, 아이고 못 있겠어. 한 달에 한 10만원씩 주는데 그냥 백그라이트를 계속 굽는데, 삭지도 않은 백그라이트를 계속 먹고 죙일 계속 앉아 있고, 활동도 못하고 하니까…
그래 가만히 생각하니깐 부애가 나더라고. 살릴래면 말이야, 큰 공장이라던가 어디 살만한데 보내지 이런 데를 뼈빠지게… 하하. 그러고 또 교도소 안에 오래도록 앉아 있다보니깐 장이 나쁘고 속이 전부다 나빠서 죽겠는데 그렇더라구.

 

그래서 김영식 선생은 완주군 소양면의 수양관엘 가서 약도 먹고 몸을 치료했다. 거기서 만난 한 목수가 김영식 선생의 사연을 듣고 일자리 하나를 소개했다. 채석장이었다.

 

김 선생: 그 사람이 소개해 준 것이 저기 화순. 그쪽으로 신촌이라는 데가 있어 영등포 가는데 신촌이 있듯이 거기도 신촌이 있어. 거기 돌 공장이 있어. 돌을 캐 가지고 기계로 바셔서 건설현장으로 보내. 보따리 싸 가지고 거기를 갔지. 거기 가서 끓여 먹고 자고 일을 했지. 좋더구만. 산골짜기에서…

 

퍼: 직접 돌 캐는 일을 하셨습니까?
김 선생: 응. 산골짜기인데 아주 산골짜기라서, 딴 사람들은 밤에 무서워서 있지도 못해. 어떤 사람은 처음에 거기에 무엇이 있다고 별 얘기를 다하지. 나야 뭐 그런 거, 초월한 사람이니까 무서운 것도 없었고… 그렇게 있으면서… 하아 돌을 깨면은 돌이 또 막 때리고 튀고 그냥 그러더라구. 그런 일을 얼마쯤 하다가 이제 이거 돈도 적고 도저히 안되겠어.
그래서 시내 건설장으로 나왔죠. 근데 뭐 집이 있어, 돈이 있어, 건설 현장에서 스티로폴같은 거 깔고, 건설현장 빈집 아무데나 새로 짓는 집 같은 데서 자면서 일을 했죠. 그렇게 일을 하다가 이게 안되겠어. 정착을 해야겠는데 안되겠어. 그래서 수소문을 하니깐 아줌마가 ‘아저씨 어디메 먹고자는 데 있는데 안 갈래요?’ 그래. 아 좋다고, 가겠다고 그랬지. 그래서 거기 가가지고 거기도 건설현장이여. 거기 가서 이제 자고, 일하고, 먹고…

 

그렇게 김영식 선생은 노동일을 하며, 집도, 가족도 없이, 홀로 13년을 세월을 견뎌왔다. 이미 쉰을 훌쩍 넘긴 이북 출신이 다른 일을 구하기란 어려웠다. 그의 손은, 농사나 막노동으로 세월을 보낸 여느 다른 노인들의 그것처럼 투박했고 마디가 무척 굵었다. 아직 질문을 꺼내지 않았는데, 김 선생은 10여 년을 살며 느낀 ‘한국의 나쁜 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김 선생: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내가 사회에 나와서 느낀 거는… 내가 느낀 거를 얘기할게, 제일 중요한 거여. 나는 정말 놀랬어. 이 사회를 나와서, 세상에 이런 세상이 있는가? 하고 말이야. 뭘 보고 놀랬는가 하면은 도구고 자재고 이런 게 일제 때 부르던 그대로 부르고, 영어로 하는 것도 더러 있고, 우리가 해방이 되고 50년이 되고 그랬으면 쉬운 거는 전부 우리말로 고치고 특별한 거는 외국말로 할거는 있지만서도, 대충 우리나라면 우리나라 말이 많아야 될 거 아니야. 그런데 이게 전부다 일제 말이야.

 

퍼: 원래 건설 현장이 그런 게 심하지요.
김 선생: 전부 다 일본말이여… 우리나라말은 없어… 그래가지고 이 나라에도 대학 교수들도 있고, 정신 있는 사람들도 있겠는데, 나라가 이게 무언가? 나는 진짜로 놀랬어. 진짜로.. 그럴 수가 없어요. 아니 선생님들! 한번 현장에 나와서 도구 이름 다 적어봐… (흥분)자기정신이 있어야지. 이 나라가 젠장 이러고 되겠어? 이거… 자기 정신이 없으니깐 우리나가 뭐야. 통일도 못하고. 참 기가 막혀요 진짜로… 이거 안되요. 대학 교수고 머 이런 사람들 하나도 부러운 게 없어. 배우지 못했지만. 머 애국성이 있고 있어야지. 전부 남만 섬기고, 남의 것만 쓰려고 그러고. 우리나라는 앞으로 어떻게돼. 우리나라는 아주 없어지는 것이지. 우리나라가 있고 민족이 있으려면 나라의 글이 있고 문화가 있어야 돼. 그게 제일 중요한 거를 보전해야 돼. 그런데 머 아이구, 기가 막히더라구.

 

덧붙여 김선생은 젊은 사람들이 상용하는 옷과 가방 등의 물건들에 적혀 있는 영어를 거론하며, 이 또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퍼: 또 놀란 게 뭐가 있습니까? 한국 사회에서… 남한 사회에서…
김 선생: 그 다음에 또 놀랜 거는… 농촌에 가가지고 말이야. 일을 했는데 농촌에 말이야, 알곡만 그냥 빼먹으면 돼. 땅이 산성이 되던지, 썩던지, 이런 거는 생각을 안해. 그냥 뭐 비료같은 거 팍 줘 가지고 알맹이만 딱 빼먹고 이제는 땅이 썩고 산성화 되가지고, 식물을 심어도 식물이 커지를 않아. 말라죽어. 시방 농촌이 그래. 기가 막혀.. 인간이 하루밖에 사는 게 아니야. 나 살고 우리 후손도 살고 다 살아야돼. 그런데 이렇게 해 가지고는 절대로.
이게 전부 공해야. 이거, 우리나라 이게 참 정신이 있는 나라인가 없는 나라인가. 젊은이들, 내가 얘기하는 거 잘 듣고 언제 기회 있으면은 북에 가서 한번 봐. 만약 북에 가서 그런 게 있으면 북을 갖다 되게 욕을 해. ‘당신네들 나라를 사랑하는 거여? 어떤 거여?’ 당 지도원을 하나 불러서 닦달을 해. 이렇게 해 가지고는 안된다구.

 

우리나라가 나만 살면… 나는 나 죽을 거를 시방 생각하고 살아. 나는 내 죽을 거를 생각해요. 나는 밤에 자다가 죽을지도 몰라요. 그전에 보니깐 내 나이만큼 되면은 밤에 자다가도 죽더라구. 나는 내일 죽을 거를 생각하고 사는데. 후대들도 살고 손자도 살고 다 살아야 될 거 아니야. 나만 편안히 살고 손자들은 어떻게 살라는 거야. 그래서 참 그런 게 가슴 아프고 그랬어.

 

“우리” 나라

김영식 선생은 대화 중에 “우리나라”라는 말을 썼는데, 이 말은 남한을 가리키거나 남북한 양쪽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또 김대중대통령을 가리켜 “우리 대통령”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선생은 어느 쪽에 소속감을 갖고 있는 걸까? 작년 여름에 만난 장병락 선생의 경우,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검거된 이후 시간은 정지해있었고, 스스로 생각하는 그의 신분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장교였다. 그러나 김영식 선생은 좀 달랐다.

 

퍼: 저… 선생님은 ‘우리나라’라는 표현을 쓰시는데, 어느 쪽을 가리키는 건지요?
김 선생 : 우리나라? 남한도 우리나라고, 북한도 우리나라야… 통일돼야 할 우리나라.

 

퍼: 말씀 중에 ‘우리 대통령’이란 표현도 쓰셨는데요…
김 선생 : 김대중 대통령이 그래도 말야, 다른 사람들보다는 통일에 힘을 많이 썼지.  

 

퍼: 그러면 저번 대선 때 김대중 대통령 찍었습니까?
김 선생 : 아녀. 저기 뭐여, 뭔 노동당이여? 그거. 기호 4번. 그거 찍었어. 그래도 그 당이 가난하고 없는 사람들을 위한다고 그러데.

 

퍼 : 하하하. 북한에서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대답대신 김영식 선생은 호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쪽지 하나를 꺼내서 보여 주었다. 그것은 김 선생이 쓴 남북한 체제 조견표였다. 쪽지에는 약간 비뚤비뚤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주체인데 사대적 /
혁명 반혁명 /
인민적 반인민적/
북은 적이 미제, 남은 적이 자기 민족 /
북은 통일할여는데 / 남은 반통일적
북은 항일투사 남은 친일파”
 

김영식 선생 : 내가 말이야, 하도 헷갈리기도 하고 그래서 이렇게 적어 놓고 다니면서 본다고. 어쩐가? 이렇게만 보면 어떤 사회가 더 제대로 된 사회냐고. 물론 더 비교해봐야 할 게 있겠지만 말이야.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

퍼: 북에 계신 가족은요? 당시 내려오실 때 어머님도 계셨지요?
김 선생: 그렇지, 가족들이 살아 계셨는데 모르겠구요. 처 있고 애들 둘 있고…

 

김영식 선생은 53년 12월에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았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소식을 알지 못한다.

 

퍼: 지금은 전혀 소식이..?
김 선생: 그럼, 소식 몰라요.

 

퍼: 혹시 알아보지는 않았습니까? 관계 당국이나… 알아보는 통로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김 선생: 그런데, 내가 노력을 하면은 알아 볼 수도 있는데, 미국, 과천에서 누가 저기 스리랑카로 나온다고… 주소라도 적어줘서 알아 달라고 그러면은, 미국에 가서 편지라도 해서 알아보라고 하면 되는데.
하하하, 그런 거 하기 싫어. 되는 대로 살아야지. 세월이 오래 되가지고 아이… 참, 애들도 이제 다 커서 사십이 다 되었고, 처도 이제 살았으면 이 다 빠지고 쭈그렁 할머니가 되었을 텐데… 그런 거 머… 아이~ 기가 막혀, 막혀… 인생은 순간에 사는 것인데 이렇게…

 

그러나 나는 이제 너무 “늙었다”, 또는 너무 “늦었다”는 말이 감춰진 것 같았다. 그의 눈가가 약간 젖는 듯도 했고, 이 대목에서는 실로 자주 한숨을 쉬었다.

 

퍼: 그래도 안에 계실 때는 북에 계신 가족들 생각도 많이 하셨을 거 같은데요. 또 힘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거…
김 선생: 그랬지요…… 그런데 시간이 너무 오래되니깐, 다 귀찮더라구…

 

퍼: 작년에 북으로 가신 분들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김 선생 : 뭐… 살다보니, 저런 날도 오는구나…

 

퍼 :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김 선생: 그렇지요. 돌아가고 싶지요. 그런데…

 

말끝이 자꾸 흐려졌다. 근 27년만에 양심선언을 하여 강제전향을 취소하고, 북으로의 송환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대로 살다 죽고 싶다”는 요지의 말도 했다. 이제 와서 취소했고, 또한 어디까지나 당장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전향서에 날인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마음에 드리우고 있을지도 모를 그늘을, 나는 보는 것 같았다. 깨끗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언제나 문제되는 것이 “한 점 부끄럼”이기 때문이다. 그가 덜 소박하고, 덜 곧다면, 폭력에 의해 마지못해 도장 찍은 종이 한 장 따위가 문제가 될 리 없다.

 

“종이 한 장이 때로는 인간의 정신을 옭아매는 부적이 된다. 인간에게 자기를 묶은 정신적 금줄이 쇠창살보다 더 단단한 경우도 있다. – 서승, 위의 책, 161면.”

 

서승의 <옥중 19년>은 “사람의 마음은 쇠사슬로 묶을 수 없으리”라는 부제를 달아놓고도 책 중간에는 저런 구절을 써 놓았다. 마음(정신, 사상, 양심, 신념) 때문에 처벌받아서는 안 된다. 강요되는 전향서, 준법서약서, 반성문 따위들은 ‘한 점 부끄럼’을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제도이다. 

 

이제 통일이나 못 가진 사람들을 위한 일에 남은 힘을 써 보겠다는 포부를 김영식 선생은 말한다. 그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그가 더 늙거나 병들기 전에 꼭 북의 고향땅을 밟고 가족을 상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