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철 – 민중미술가

"왜 나같이 한물간 작가를 인터뷰하려고 해요?" 그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비록 목소리뿐인 공명이지만 그 말이 자기우월감에서 나온 과시적 겸손이 아니라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인터뷰요청을 위해 잔뜩 긴장하고 전화기를 들었는데, 정작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오히려 쑥스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우습게도 나는 알 수 없는 안도감으로 한숨을 돌렸다. 사실 내가 그를 만나기로 작정한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단연 우선 순위를 점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라는 것이다. 나는 그의 80년대 작품을 좋아한다. '민중미술'이라는 단어에서 '민중'이라는 말을 떼어낸 상태에서, 내가 일상적으로 접해 온 그 '미술'의 맥락에서, 난 그의 팬이었다.

사실 나는 민중미술을 몸으로 체험해 본 바도 없고 그렇다고 특별히 관심 있게 연구해 보려 달려들어 본 적도 없는 터라, 개개의 인물의 속내나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력의 판도를 단숨에 직감적으로 파악할 자신은 없는 상태였지만, 민중미술가로 알려진 신학철이란 작가, 그를 만나 그의 과거 현재 미래를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인사동 학고재 화랑에서 처음 만났다. 목소리의 인상과 비슷하게 수더분한 아저씨, 첫 인상이 좋았다. 그가 제안한 인터뷰 장소는 창덕궁이었다. 자신은 시골사람이라 야외가 좋다면서. 그리하여 풀빛 푸른 오월 하늘을 이고 우리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1. 새로운 조망 : 옆으로 옆으로

그는 말을 잘 못한다며 인터뷰를 걱정스러워했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인 듯했다. 중견으로 자리잡은 유명 인사의 수줍음을 대면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그건 결코 풀어낼 이야기가 ‘부재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성격적 특성이라는 것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으므로. 왠지 모를 동질감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낯설음을 삭이기 위해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근황에 대한 물음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퍼슨웹(이하 퍼)> 요즘은 어떤 그림을 그리세요?

신학철(이하 신)> 여태까지 내가 그린 한국 현대사 내지 근대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정치사 내지 민중에 대한 생각으로 그렸던 것들은, 아래에서부터 위로 수직으로 올라가는 그런 작업이었죠. 그런데 지금 하는 작업은 서민사예요. 서민사를 하다보니깐 위로 올라가는게 아니고 천상 옆으로 가는게 되더라구요. 나를 포함해서 시골뜨기가 서울에 올라와서 살아가는 과정을 그린거죠… 실은 시골 얘기는 조금 밖에 없고 전부 서울 얘기인데, ‘갑순이와 갑돌이’라는 부제를 달아 주제를 그런 식으로 잡아 봤어요. 내가 봤을 때, 지금 현재의 서울 문화 자체가 갑순이와 갑돌이의 문화라고 말하고 싶어요. 또 그걸 생각하며 그리다가 보니깐 정말 그런 거 같기도 해요.

‘정치사 내지 민중’을 담아내려는 ‘수직’적인 그림으로부터 갑돌이와 갑순이라는 ‘서민’의 이야기를 풀어내려는 ‘수평’적인 그림으로의 전환이라… 흥미로웠다. 

퍼>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갑돌이와 갑순이의 문화라는 걸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신다면?

신> 그러니까 지금 현재 천민자본주의다, 복부인이다, 졸부다, 이런 말들이 나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런 말의 의미는 우리의 현실문화가 다 시골문화라는 거지요. 서울의 양반문화란, 옛날의 양반문화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도떼기시장 같은 그런 거란 말이지요.

80년대를 지나 90년대로 오면서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시위 문화가 가라앉고… 민주정부 비슷한 것이 들어서니깐 재야의 운동권이나 예술단체가 서서히 가라앉듯이, 우리 민미협(민중미술협의회)도 90년대는 그렇게 가라앉지 않았나 생각하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80년대처럼 ‘통일’을 하자던가 ‘독재정권 물러가라’ 던가 이런 이야기는 할 수 없고, 그렇다고 특별한 다른 대안도 없고 해서… 그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85년부터 계획을 잡았다가, 처박아 놨다가, 중간에 또 끄집어내서 그리다가, 잘 안 되가지고 다시 집어넣어 놨다가… 90년대에 와서 시간도 있고 그래서 ‘이왕 해보자’ 하고 천천히 곧바로 그리기 시작한 거예요. 하다보니깐… 내가 정치 쪽 그림을 그려 왔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정치적인 게 또 빠질 수가 없더라구요. 하하하. 그래서 처음 그 작품의 어떤 전체적인 형상, 영감이라는 것이 딱 떠오르는 데 어떤 식이었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어떤 거대한 힘이 존재하고 있고, 일반인들, 보통사람들은 그 힘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거 같은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위에서 엄청난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데 일반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거기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먹고살기 위해서 아둥바둥하고 살아가는… 그래서 전체 구성은 이렇게 되는 거죠. 위에는 무언가 있고, 그 아래는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 뒤에는 정치적인 배경.

 

퍼> 제가 인스워드에 인터뷰하신 동영상을 보니까 사자인지 호랑이인지는 모르지만 짐승 같은 게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그런 장면이 스쳐 지나가는 걸 봤는데, 그것도 그 작품에 지금 들어있는 건가요? 그게 선생님이 말씀하신 뒤편의 거대한 힘에 해당되는 건가요?

신> 죠스, 영화에 나오는 죠스를 써먹은 거예요. 하하… 그게 어떻게 되는가 하면, 길이가 이렇게 쭉 있으면은 한 2미터 높이에 길이가 20미터쯤 되는데 16장이 연결작으로 그려져요.

그는 설명을 하면서 땅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역시 말보다 그림이 빠른 사람인 가보다.

신> 위에는 정치사가 들어가고, 아래로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나오지요. 그래서 이제 이쯤에는 시골의 원형이 존재해 있고, 그 다음 여기서부터 서울로 와 가지고 빈민촌으로 떨어져서 살아가는 촌뜨기의 이야기도 나오고, 여기서부터는 독재정권… 60년대 초쯤에서 잡아도 될거예요. 그 다음 가운데에 이런 센타가 있고, 여기에는 경제적인 면, 재벌들의 얘기가 나오고 그 뒤에 상징적으로 모양이 들어가고 그런 거죠. 그래서 정경유착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둘이 만나는 지점에서 하나의 문화적인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뒤로… 또 무언가 하면, 외세와 관련된 어떤 거… 미국문화 같은 것들이 우리와 어떻게 작용하는지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고…

그는 계속해서 그림 설명을 했지만, 솔직히 아직도 그가 생각하는 갑돌이와 갑순이의 문화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그것이 왜 80년대의 ‘정치사나 민중사’를 위한 수직구도로부터 ‘서민사’를 위한 수평구도로 나아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변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도시빈민으로부터 독재정권이나 재벌들 그리고 외세가 등장하는 그의 그림설명에 따르자면 80년대의 그림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듯이 느껴졌다. 쉽사리 궁금증이 해소되진 않았지만 그가 풀어나가는 대로 따라가 보기로 했다.

퍼> 이 작품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신> 96년인가?

퍼> 96년에 시작하셔서 지금도 그리고 계신 건가요? 아직 발표는 안 하셨죠?

신> 밑그림은 한번 했어요. 밑그림을 만들어 놓고 난 다음에 그려 갔는데, 작년에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 자꾸 내달라고 해서 그림은 없고…그래서 밑그림으로 그려 논걸 출품했어요. 고생했어요. 가보셨어요?

퍼> 네, 갔었어요. 인권전이던가요? 광주비엔날레를 보긴 했지만 그때 너무 빨리 봐서 자세한 건 잘 기억할 수가 없어요. 시간이 없어 두 시간 만에 광주 비엔날레를 다 보고 나왔거든요. 뛰어다녔죠. 분위기만이라도 느끼려고. . . . 이런 작업을 96년도부터 지금까지 하시는데, 사실 과거 우리가 80년대에 느끼던 그 시대하고,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선 시대는 많이 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변화의 물결 속에서 작가로서도 많은 갈등들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80년대에 선생님께서 생각하셨던 것과 2000년대의 현실을 어떤 식으로 연결해 가고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신> 글쎄, 난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어요. 하하하… 나는 내 관심사, 내가 하고싶은 쪽으로만 하니깐. 요즘 포스트모더니즘 작업이 유행이긴 하지만, 그 실상은 내용이 없다고 봐요. 거기에는 커다란.. 세계를 바라보는 방향이라던가 앞으로의 대안이라던가 이런 건 없는 것 같아요. 서구미술의 흐름에 그냥 자기도 모르게 따라가는, 그리고 그것이 모든 흐름인양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고… 요즘에 와서는 그런 확신이 더 생기는 거 같아요. 내 나름대로는… 그렇다고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 특별한 대안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 그 자체, 생각, 봐 왔던 것들, 여태까지 그려왔던 것들… 그런 것들이 그냥 솔직하게 나타내는 거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또 그 외의 것들이 따라오는 게 아닌가…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들에 솔직하게 접근해 들어감으로서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묻어서 그림 속에 나타나는 거 같아요. 이걸 그리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이걸 하면서… 글쎄… 그림도 다 되지 않았는데 이 그림만 얘기해서 문제가 많은데? 하하하..

그는 뜻밖의 답변들을 펼쳐놓는다. 사실 나는 무언가 나름의 시대해석이나 그것을 담아낼 조형이념을 답변으로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너무 솔직하게 자신 내면의 혼란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하다. 그의 어눌함 탓일까, 나의 직관력이 부족한 걸까? 그는 해가 넘어가도록 마냥 울타리를 열어놓고 양들이 알아서 제집을 찾아오도록 기다리는 양치기소년 같이 느껴졌다. 과연 그는 임무을 저버린 게으른 양치기 소년인가, 아니면 양들의 본성을 파악하고 고의적 방목을 선택한 탁월한 양치기일까?

 

신> 처음 밑그림을 그릴 때는 ‘직감적으로 하자’고 생각했지요. 80년대 지나서 90년대 오면서도 80년대의 이념적 정치적인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지만, 여기에서는 모두 잊자. 다 잊고 내가 봤던 대로, 그냥 그대로, 직감적으로, 있는 사실 그대로 그려보자 생각했는데, 밑그림을 다 그리고 나니깐, 내 그림이 원래 그런지는 모르지만… 60년대에서 90년대까지의 한국 현대사가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 속에서… 처음에는 그런걸 모르고 그냥 ‘그려보자’ 했는데, 다 그려놓고 나니깐 60년대에서 지금까지의 한국의 역사 그 자체가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는 거지요. 가만 생각해 보면,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를 그 시간대에서 딱 잘라 가지고 비교해 봐도 우리 나라만큼 에너지가… 그것이 선한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에너지가 존재하는 나라가 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사회보장이 잘되어있는 유럽, 영국 같은 경우 ‘야, 이거 망한 나라 같구나’ 너무 질서를 잘 지키고, 조용하고, 살아있는 거 같지가 않아요. 하하하…  그런 나라와 우리 나라는 비교도 안되지요. 지금 현재도 그런거 같아요.

퍼> 한편으로는 불안한 측면이면서도 역동적이라는 측면 때문에 그것이 가능성일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신> 예, 그런 것이 가능성이라는 거. 충분히… 참 불순한 에너지 일수도 있는데… 글쎄, 그게 없는 거 보다는 있는 게… 너무 지나치니까 문제가 되는 거죠. 부조리한 사회구조에 인간들은 많고, 먹고살기 힘드니깐 그렇게 되지 않았나…

퍼> 일본과도 비교가 가능할 거 같네요. 굉장히 정적이고 질서화 되어 있지만 뭔가 변화할 가능성이 안 보이는 그런 느낌 말이죠.

신> 일본은 마취 당한 사람들 같아요. 국민들이… 진짜로 그들은 전체적으로 보면 에너지가 있어요. 모여있을 때는… 하지만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어떤 개성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힘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 사람들은, 단체적인 힘 자체도…이번에 교과서 문제라던가 우익 단체들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자연스러운 힘은 아닌 거 같아요.

퍼> 갑돌이와 갑순이 얘기를 하시면서 서민성 내지 서민문화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보면 양반문화라는 게 하나의 전통일 수도 있는데, 그 전통의 맥이 끊어지면서 현대사가 상경한 문화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건, 한편으로 보면은 전통이 사라진 측면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민중적인 것들이 도시 전면으로 부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선생님이 작업하시는 초점은 어느 쪽으로 가시는지요?

신> 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뭔가 하면.. 서민문화라는 그 자체를 나쁜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드러내보고 싶은 거지요. 어쩌면 그게 에너지죠. 나는 에너지라고 봐요. 예전에는 동학군이라던가 의병, 노동자 이런 것만 민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갑돌이와 갑순이 그 자체를 민중이라고 봐야 되지 않느냐 하는 거죠.

나쁘다기 보다는 하나의 어떤… 뭐라고 해야하나, 말을 잘 못하겠는데… 생활력이라 할까요? 살아있는…천하기는 하더라도… 그렇지 않고 다 만들어진 상태 같으면은 조용하고, 정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거죠. 예를 들어 금융실명제의 경우 경제상태가 다 드러나죠? 미국 같은 경우 상속세 많이 때리면 외국으로 떠나는 경우도 있고, 투자를 안 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그처럼 금융실명제 같은 것을 원하면서도 세금을 너무 많이 때리면, 어떤 때는 완전히 70, 80%를 세금으로 내는 서구처럼 그런 식의 힘이 없는 사회가 되지 않겠느냐 하는 거죠. 사회민주주의도 어쩌면 그런 면이 있을 거예요. 활력이 없는 사회 말이죠.

그는 ‘서민문화’그 자체를 80년대처럼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전형화시켜 편가르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선입견을 배제한 채 객관화시켜 보려는 듯했다. 천박한 곳에서 샘솟는 생명력… 그는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온 에너지를, 그 ‘천박함 속에 핀 생명력’을 ‘갑돌이와 갑순이’라는 작품을 통해 형상화하고 싶은 것이다.

퍼>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면,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기 어렵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

신> 보쉬의 그림을 보면, 그 사람 실제로 정말 대단해요. 그가 그린 ‘제단화’를 보면 낙원을… 나쁜 짓 한 것을 그린 건데 엄청나게 재미있게 그렸어요. 실은 역으로 봐야 되요. 기독교적 사고에서 보자면 ‘제단화’로서 이 놈들은 ‘죄를 지은 놈들’이라고 그렸지만, 사실상 가만 살펴보면 재미있는 거를 전부 모아서 그린 거예요.

그는 갑자기 뜬금없이 보쉬의 그림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내심 역시 그의 기질이 드러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보쉬는 르네상스기의 작가이나 당시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가 20세기 초, 초현실주의자들이 다시 발굴해낸 작가로,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 꼽히는 사람이다.

퍼> 보쉬 좋아하세요?

신> 예. 좋아하지요.

퍼> 그러실거 같아요. 많은 비평가들이 그런 얘기를 할텐데, 선생님께서는 초현실주의적인 그런 감각이 있으시잖아요. 그리고 보쉬는 초현실주의자들이 대단히 좋아하는 작가이구요…

신> 그렇지요. 실제로 보쉬가 그룹섹스의 원조라는 말도 있어요. 그의 사생활은 일체 알려져 있지 않은데 말이죠… 다빈치 같은 경우는 방향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정신풍수학의 원조라고도 하구요. 모나리자라던가 최후의 만찬 같은 작품을 보면 한사람 한사람의 정신상태를 그린 거란 말이에요. 모나리자도 가만 보면 자기의 이상형의 정신상태를 그린 거란 말이에요. 보쉬 얘기 하다가…

그는 다시 보쉬로 말머리을 돌렸다. 보쉬에 대해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그래서 보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될 줄 알았는데, 처음의 작품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참 오리무중이다.

 

신> 갑순이 갑돌이가 한사람만이 아니고 전두환이도 나는 갑돌이라고 보고 싶어요. 전두환이 까지도… 시골에서 촌뜨기가 출세하려고 올라온 거 아니에요? 박정희도 마찬가지구요.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냥 보는 거… 역사 자체도 하나의 자연이듯이, 자연적으로 이루어 졌듯이 내 생각을 꾸며서 하기보다, 있었던 사실들을 늘어놓고 내 생각을 함으로써 꾸며진 그림이 아닌 하나의 자연처럼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한가지 생각만 딱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이 사람이 봤을 때 다를 수도 있고, 저 사람이 봤을 때 다를 수도 있고.. 내가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객관화함으로써 여러가지 방향에서 음미해 볼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거죠. 음미해봤으면 좋겠어요.

그와의 대화는 퍼즐게임 같다. 처음에는 한데 엉겨 도무지 짝이 없을 것 같지만 찬찬히 찾아보면 이가 딱맞아 떨어지는 게임말이다. 나는 이제 그가 갑돌이와 갑순이의 이야기 중에 뜬금없이 보쉬를 잠시 끌어내었던 이유가 그 둘 사이에 모종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그는 보쉬가 기독교적 제단화를 그리면서도 개개의 모티브는 세상의 재미있는 일들을 모두 모아 자신의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늘어놓았고 그렇게 해놓은 것이 결국 거룩한 종교화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였고 지금까지 이야기한 그의 조형관도 바로 그와 유사한 방식의 것이란 점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자유로운 교감…그는 그런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퍼> 예, 제가 처음에 시대가 많이 변했는데, 선생님은 그 시대의 변화를 어떤 식으로 읽고 계시냐는 질문을 처음에 했는데, 그에 대한 답이 지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중에 나오고 있는 거 같아요.

신> 나이도 들고 그런 의미에서… 또 보니깐 요새는 새로운 기자재라던가, 새로운 매체가 많이 등장하는데… 순발력 있게, 아휴, 나는 그런 걸 따라갈 수도 없고, 내가 잘하는 거 그런 거를 하자…그런 생각이죠… 그리고 또 한가지를 덧붙인다면, 꼭 새로운 기자재만이 과학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림 그리는 사람과 화면이 서로 대화하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오묘한 과학이 존재한다고 봐요. 작가와 물감, 그 다음에 대상과 오브제 이런 것 사이의 관계들이 나는 존재한다고 봐요.

내 생각은… 아주 의식적으로 밀고 나가다 보면, 밀고 나가는 과정 중에 무의식적인 요소들이 자연스레 뒤 따라줬으면 좋겠다는 거죠… 아까 얘기했던 에너지 같은 것이 바로 그런 건데, 처음에는 그런 에너지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고 작업했는데 나중에 다 해놓고 보니깐 그런 것이 나왔다는 거지요. 그런데서 나는 쾌감을 느끼고..

퍼> 저는 선생님 작품들을 보면서 어떤 무의식적 ‘욕망’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신> 나도 잘 몰라요. 왜 그런지는… 어쩌면 내가 시골에서 서울에 올라오면서 가진 어떤 욕망 같은 것은 것은 아닌가… 요새 와서 가끔…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나… 실제적으로는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어렸을 때 가졌던 꿈은… 원대한 꿈 그런 것은 아닌가… 하하하. 내게도 그런 욕망이 있었을 거예요… 별로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퍼> 아니예요,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가진 그런 세속적 의미의 욕망을 이야기한 게 아니라,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다른 차원의 욕망을 이야기한 건데…

의도와는 달리 그가 너무 솔직히 그의 세속적 욕망을 인정해 버려 잠시 미안하고 당황스러웠다.

 

신> 아니죠, 그런 것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내 속에 잠재해 있는 그런 세속적인 욕망들… 그런 것들이 다 함께 작용하는 거예요. 하하하…

역시 그는 삶의 고수다. 솔직하고 진정성을 가진 사람. 누가 그 욕망이 ‘세속적’이라고 감히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가슴 한켠에 그런 욕망을 갖지 않은 이가 누가 있단 말인가?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는 위선만이 존재할 뿐….

 

 

2. 그의 현실주의, 타인들의 초현실주의

퍼> 서울에는 언제 올라오시고 미술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신> 대학교 들어오면서죠. 그전에 고등학교 때 올라오기는 했지만.

퍼> 고향이 어디신가요?

신> 고향은 김천인데, 옛날에는 금릉군이라고 했어요. 김천에서 40리 떨어져 있는 곳이죠. 지금은 금릉군이랑 김천이랑 합쳐져 김천시로 되어있지만.

퍼>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다니신 건가요?

신> 그랬지요. 중학교까지는 바로 시골에서 살고, 공부하기가 싫어 가지고 고등학교도 안 가려고 했는데, 이종사촌 형님이 학교에 계신 분이 있어 외동아들 집에서 놔두면 안 된다고 끌고 가서… 고등학교 나오고 보니깐 대학교도 가보고 싶더라구요.

퍼> 그림은 언제 접하게 되신 겁니까?

신> 그림은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그냥, 그림 그린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빠져들었어요. 공부는 안하고, 맨 날 뛰어다니고 그러다가, 공부는 하기 싫고, 하나도 모르고… 미술시간에 그림은 잘 그린다고 그러대요. 어렸을 때부터 깎고 만들고 하는 것은 잘했어요. 만드는 건 다 잘했어요. 나무껍질 가지고도 여러 가지 모양도 만들고, 옛날에는 핫바지에 조끼를 입고 다녔어요. 조끼 단추 구멍에다가 실을 매달아 가지고 칼을… 딱 접는 칼이 있어요. 조끼칼이라고….

퍼> 조끼칼이요?

신> 예, 조끼칼이라고 있어요. 조끼에다 넣는다고 해서… 하하하. 고리가 있어요. 뒤에 끈을 묶어서 맨날 매달고 다니는 거예요. 돌아다니다가 이상한 거 있으면 그 칼로… 이쪽 팔은 다 상처투성이예요. 이것도 뭘 만들다가 칼이 삐져 나가서 갈라진 거예요.

그는 왼손의 상처를 보여준다. 여기저기 상처가 많고 거칠다.

퍼> 이게 어렸을 때 난 상처인가요?

신> 그렇지요. 여기, 저기… 오른손은 없는데, 잡는 쪽이니깐 왼손이 이렇게.. 하하하

퍼> 어떻게 보면은 조각에서 출발을 하셨네요. 하하하.

 

신> 그렇죠. 조각을 하고 싶어요. 실은 내 근대사 그림도 가만 보면 조각적인 요소가 많아요. 회화라고 하기보다는 조각이지요. 사람들이 이렇게 올라가고… 전체적으로… 조각이지요. 회화라고 볼 수 없어요.

별 생각없이 물었는데, 그의 대답이 진지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다. 그 뚜렸한 볼륨과 색채를 절제하는 모노톤적 감각, 확실히 그의 그림은 조각적이다.

미술사에서 조각과 회화는 상당히 다른 원천을 가진 것으로 인식된다. 윤곽선이 뚜렷하고 형상이 돌출되는 그의 그림들. 마치 어떤 형태가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실체로 부각되는 느낌… 쉽게 말하면 그런 것이 조각적인 것이다. 이건 미술사에서는 매우 오래된 이론적 틀거리다. 회화적인 것과 조각적인 것의 대비, 장르간의 우열논쟁, 그것은 르네상스이래 미술사에서 대단히 고전적이고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가진 것으로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림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미켈란젤로가 조각상을 만들어 그 속에 집어넣은 것처럼 입체감이 있는 형상으로, 당장이라도 그 속에서 개개의 인물들이 뛰어나올 것 같다. 미켈란젤로는 조각가이다. 조각가가 그린 위대한 그림 역시 조각적인 것이다. 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보라. 그 그림은 대단히 회화적이다. 신비스럽게 흐려지는 불분명한 윤곽선, 미묘한 명암효과에 의한 외곽처리, 그로 인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는 신비스런 미소….조각이라면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심리묘사. 다 빈치의 이런 기법을 ‘키아로스쿠로’라고 하는데, 평면 위에 그런 미묘한 명암의 흔적을 사용하여 흐릿함 속에서 전체를 통합시키는 표현법은 그것이 회화가 아니라 조각이라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는 이런 미술사적인 맥락을 의식하고, 자신의 그림을 조각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역시 어릴 때부터 조각을 좋아했던 조각가적 기질을 타고난 작가였다고, 조각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퍼> 선생님의 한국근대사 시리즈의 경우 꿈틀거리면서 원기둥처럼 위로 올라가는 데, 인물의 시선도 사방으로 다 퍼져 있더라구요. 선생님이 일부러 그걸 의도하시고 그리신 건지…  그러니깐 앞으로 보고 옆으로 보고 돌아가는 게 완전히… 원 기둥이 올라가 있는 거 같은, 그런 꿈틀거리는 기둥이 있잖아요. 그런 느낌으로 다가오더라구요.

 

신> 그런 건 작업을 하다보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감각적으로 형상이 나와야 되니깐, 사람들이 이쪽 측면에 있는데, 여기서 얼굴이 이쪽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넣을 수는 없는 거예요. 하하하 그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된 거예요.

퍼> 고등학교 때도 미술반이나 그런 활동을 하셨습니까?

신> 고등학교에 가서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했지요. 그때부터… 옛날에는 아무거나 그렸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미술반 같은 게 있어서 현대적인 미술, 공식적인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보면 되지요.

퍼> 미술 대학으로 진학하신 건?

신> 그때도 하여튼 특별한 게 없어요. 석고 하나 사와 가지고 골방에서 그렸어요… 시골에는 전기가 없으니깐 촛불 켜 놓고 하니깐 코 그림자가 이만큼 가 있는 거예요. 목탄도 구워 가지고 그리고. 목탄은 목탄지에다 그린다는 걸 몰라 가지고 캔트지에다 그리고 그랬어요.

퍼> 선생님 작품에서 풍기는 뭔지 모를 그로테스크함이 촛불 켜놓고 그린 데서 나온 건가요? 하하하…

신> 그런 것 같아요. 내 작품은 뭔가 리얼리티, 사실주의, 이런 것 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지요. 그러나 실제로 저는 그 ‘리얼한’ 거를 찾고 싶단 말이에요. 그런데, 나는… 한국 근대사 같은 우리 나라의 역사를 보고있으면 이런 식의 덩어리로 나타나는 거예요. 또렷하게 한사람 한사람 나타나는 게 아니고 큰 괴물같이 보이고. 실제로 한국 역사를 영상으로 나타났을 때는 그렇단 말이에요. 나는 그런 걸 그렸는데, 사람들은 ‘초현실주의’라는 거예요.

실제로 내 머릿속에 있는 한국 현대사라는 게, 사실적으로, 쿠르베 같은 사실주의로 해 가지고는 안 나타난단 말이에요. 그 외의 느낌 부분까지는… 나는 그 느낌을 나타내려 하다 보니깐, 초현실주의라고… 문학에서도 그런 분위기 같은 것이 있을 거 아니에요. 동일하게 ‘리얼한 것’을 추구해도, 카메라 같은 시선으로 찾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그 외의 느낌까지도 끌어안는 방법도 있는 거죠. 나는 현대사의 추악한 면, 이런 것을 나타내다보니깐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거 같은데 내 나름대로는 대단히 현실적인 거란 말이예요…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그는 실제의 추악한 현실들을 펼쳐 놓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주는 느낌까지를 모두 화면 속에 리얼하게 표현하려 했는데, 그것이 초현실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것이 신학철 방식의 리얼리즘이었는데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문제 역시 과연 ‘실재(reality)’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실재를 의미하는가, 이념적 실재를 의미하는가? 과연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얼마만큼 믿을 수 있는가? (이미 과학적으로 그것도 허상임이 증명되지 않았는가?) 등등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오랜 철학적 미학적 논쟁을 담보한 것이니 그냥 그렇게 바라볼 밖에.

퍼> 그 말씀에 공감하는 게 우리 나라 또는 현대사가 투명하게 보이지 않고 쉽게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들이 너무나도 많다라고 할 때 이것을 투명하게 있는 그대로만 그린다는 것이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말씀인가요?

신> 시각적으로도 안 나타나는 거죠. 또 문학적으로도 나타낼 수가 없는 것도 있을 테고… 물론 문학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하여간 그림으로 다 나타낼 수는 없을 테니깐. 그런 것들이지요. 어떤 암울함 속에서 내리 누르는 것들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그 느낌을 나타내려고 보니깐 초현실주의 비슷하게 되어버리는 거지요. 내가 볼 때는 갑순이와 갑돌이 같은 경우에는 군부독재라던가 알 수 없는 경제구조 그런 것들이 짓누르고 있는 거 같단 말이예요. 이런 거는 사진에는 없는 거 아니예요?

초현실주의가 되어버린 그의 리얼리즘이 참 매력적이다. ‘신학철의 현실 바라보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초현실주의로 이해되는 것은, 기질적으로 그가 사물의 이면이나 내면까지 통찰하려는 진지한 욕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는 민중미술가였다. 하지만 그는 주류 미술계(이젠, 이런 용어자체도 참 어색하지만)의 여느 미술가들과 다름없는, 어쩌면 그보다 훨씬 치열하게 느껴지는 조형적 고민을 하고 있었고, 그 고민 속에서 태어난 작품은 ‘민중미술’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그는 운동가가 아니라 치열한 작가였던 것이다. 점점 그가 작가로서 보여주는 내면을 향한 진지한 탐색과 인간적 밀도에 애정이 느껴진다.

퍼> 그러니까 선생님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의식과 욕망이 마찰하면서 생기는 그런 것이 느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말씀하신 내용과 맥락이 닿는 것 같네요.

신> 아까 그 얘기 하다가 나왔는데 서울에 올라와 보니까, 서울의 문화란 게 번쩍번쩍하고, 아주 정신없이 휘황찬란하고, 그런데 대한 소외감도 들고..

퍼> 서울에 올라오신 게 몇 년도가 되는 거지요?

신> 살게 된 건 64년도부터니깐, 대학교 들어가면서… 지금도 나는 촌놈인 거 같아요. 서울에서 생활을 하면서도 세련되어 있지 않아요. 아주 촌놈이에요. 전화하는 것도 겁나고 아직도… 전화를 잘 안 해요. 그리고 자판기에서 캔 같은 거 빼는 것도 잘 못해요. 하찮은데 한번도 안 빼봤어요. 하하하… 엘리베이터도 타는 것도 아직 서툴고, 아직도 큰 건물에 들어가는데 거부감이 나고, 사람 만나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하고 힘들어요. 그래서 잘 안 만나려고 그러고, 모르는 사람하고 만나면 편하지가 않으니깐… 제 그림을 보면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더 많이 들어가 있어요. 그런 것이 그게 아닌가… 아까 욕망이라던가 이런 것들이… 그렇게 보이는 거지요.

서울생활 38년에 전화도 두렵고 자판기 캔을 뽑아 본 적이 없다는 이 사람, 이런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정말일까? 신기하게도 나는 그 말을 금방 믿었다. 사실 어떤 사실에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신경세포들 사이의 심각한 투쟁을 딛고 선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 믿는 척 하는 것, 자기 자신이 받을 상처가 두려워 그냥 믿고 싶은 것, 따지는 것이 지겨워서 그냥 믿어버리는 것 등 믿음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런데 이 순간 나는 그냥 믿어버렸다. 사실 그랬다, 우리가 자판기에서 캔을 뽑을 때도 그는 저 멀찍이 서서 쳐다보았다. 그가 그의 그림 속에 꼴라쥬 해 놓는 사진을 바라보는 듯한 그런 표정으로…그렇게 우리도 그에게 대상화되고 있었음이 순간 떠올랐다.

퍼> 어떻게 보면은 낯설은 이질감 같은 것을 그 안에 그대로 넣으신 거네요.

신> 사진은 대상을 오브제로만 파악하잖아요. 그런 것들에는 이질감, 나하고의 거리감이 있어요. 어떻게 보면 욕하는 거지만… 하하하  뭐, 그 정도면 되겠어요. 아까 욕망 얘기했잖아요. 글쎄, 확실한 거는 몰라요…

그는 정말 푹 고아야 맛 깔진 진국이 나오는 곰탕 같은 사람이다. 처음 내가 느낀 ‘욕망’에 관한 답변도 이제 다시 다른 얼굴로 등장한다. 그러나 처음 그 자신 속에 내재한 욕망이라고 말했던 것과는 약간 다른 차원의 욕망들, 그가 아주 싫어하는 것들, 그를 소외시키는 세상의 욕망들… 이제사 그 ‘욕망’의 다양한 얼굴들이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퍼> 예, 그 정도만 말씀 하셔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신>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르지만, 생각해 보니깐 그렇다는 거지요.

퍼> 그건 맞고 안 맞고의 문제가 아니라, 선생님께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는 게 중요한 거니까요. 그 부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 모심듯, 통일을 심을 수 있다면…

                                                      

퍼> ‘모내기’를 그리시던 과정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신> 그것도 87년 박종철 사건 있고 난 뒤 87년도에 그린 건데… 처음 구상은 반 통일세력을 몰아내고 통일을 하자면 어떻게 할까하는 거였어요. 주제가 통일인 <통일전>에 출품하려고 그린 작품이니까.

퍼> 87년도 <통일전>이요?

신> 예, 해마다 하는 전람회인데, 통일을 어떻게 해야되나 이건데… 우선 반통일세력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루는 그런 과정인데, 처음에는 칼춤 추는 형상을 가지고 하려 했지요. 그런데 내가 시골에 아버님 성묘 가면서 찍어 놓은 사진이 있어요. 우리 동네 사람으로 형뻘인데…그 사진을 가만 보다보니 ‘아~ 이걸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모내기’라는 주제로서 한 거지요. 모 심는 과정을 통해서 통일되는 과정을 보여주자는 쪽으로…

퍼> 아~ 통일의 모를 심는 다는 거죠?

신> 처음에는 모를 심고 추수했을 때가 통일이 됐을 때로… 즐거움으로 추수하는 장면을 잡아서 그린 거구요. 그렇게 하다 보니깐 어릴 때 생각도 나고…

그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신 > 내가 어릴 때 우리 마을에서  한 집이 살지 못하고 쫓겨났어요. 자기 스스로 못살아서 쫓겨났는데, 어떻게 쫓겨 났냐면… 마을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어릴 때 아침에 나오니깐 거기서 사촌끼리 싸우는 거예요. 김씨네인데… 재미있어서 한참을 구경했죠. 근데 하도 오래 싸우니깐, 놀다가 또 와 봐도 오후까지 싸우는 거예요. 왜 싸웠는가 하면, 우물 앞에 논이 있는데 우물물이 나오니깐 거기에다 미나리를 심는데 잘 되는 거예요. 그게 커다란 논인데 경계 때문에 싸우는 거예요. 그 경계에 돌을 놔뒀는데, 돌을 옮겼다 이거야. 그래가지고 치고 박고 싸우는데 대단해요. 땅에 대해서는… 그리고 한달 후엔 가 한사람이 죽었어요…. 그리고 또 신씨네 집안에서 사건이 있었는데, 우리 바로 옆집인데, 그 아저씨가 형 땅을 빼앗으려고 산에 데리고 가 가지고 바위로 찍으려고 하는 거를 지나가는 사람이 본 거야. 그래서 동네에서 이 사람들은 ‘인간도 아니다’해서 상종을 안 하니깐, 못살아 가지고 떠나는 거야…. 다른 동네 같으면 멍석말이도 하고 그러는데 우리 동네는 그렇지는 않았어요. 상종을 안 하니깐 못사는 거예요. 그래서 쫓겨난 거야. 실제적으로 법이 없어도 그런 식의 재판 비슷한 것이 이루어지는.. 법 없이도 사는 마을. 이런 것이 모내기에서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통일되었을 때의 하나의 사회 형태예요.

신> 그리고 또 통일을 멋있게 보이도록 그려보려고 우리 시골을 그렸는데, 내가 어릴 때, 대학교 다니다가 봄에 내려와 보면, 보리를 다 심어 놨어요. 보리밭이 파란 데다가 초가지붕마다 살구나무가 온 동네를 뒤덮는 거예요. 통일되었을 때의 무릉도원 같은 것이 어렸을 때 본 그 마을 풍경인 거죠. 내가 모내기에서 가장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아~ 통일은 좋은 거구나’하는 느낌, 바로 그거였어요, 그걸 나타내려고 그린거구요.

그가 왜 장황한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나 의아했었는데, ‘법 없이도 사는 마을’,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가 바라는 사회형태라고… 이 시대에 그것이 과연 가능하냐, 그것이 얼마나 유아기적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의문 따위는 잠시 보류하자. 그건 그야말로 시골촌놈 출신의 그가 꾸어볼 수 있는 ‘꿈’이고 ‘상상’이며 그렇게 동원된 상상력이 ‘예술’의 바탕인 것이다. 유치한 ‘전형화’가 특정한 미학적 목표 하에서는 대단히 세련된 구도가 될 수도 있으니까… 여하간 그의 말은 모두 그런 식이다. 그가 추구하는 ‘이념적 유토피아’까지도 ‘논리’가 아니라 ‘체험’이다. 두서없이 늘어선 듯한 하찮은 이야기들이 결국 한 지점을 향해 나아가 논리가 만들어진다. 근데 그게 참 재밌다.

퍼> 북쪽에 사람들 모여 앉아 있고…

신> 꼭 검찰처럼 얘기를 하네요. 하하하.

나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아무 생각없이 그림의 ‘윗쪽’에 있는 것을 ‘북쪽’이라고 말해버렸다. 그리고 그는 ‘북쪽’이란 말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 당황스러움… 그 순간, 나는 반쪽 땅 남한에서 살아가는 그와 나, 우리 모두의 상처를 보았다. 알게 모르게 스며든 이데올로기의 상처가 피 터져 찢어진 이데올로기의 상처를 건드린 것이다. 우린 그렇게 서로를 찔렀다.

퍼> 하하하.. 정정하겠습니다.

난 곧바로 겸연쩍은 웃음으로 수습했다. 그 웃음은 별 생각 없이 내뱉은 그 말에 당혹스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그의 지내온 시간들에 대한 막연한 공감과 미안함과 안스러움 같은 것이었다.  

신> 이게 어떻게 되냐면… 여기에 반통일 세력들이 있고, 소가 쓸어내고 모를 심고. 모심기 위해서는 쓰레질을 하잖아요. 돌멩이 같은 걸 걷어내야 되니까. 나는 그걸 반통일세력을 걷어 내는 과정으로 생각을 했고, 그 다음에 모를 찢고 심는 것은 통일의 정지작업이고, 농사를 잘 지어 풍년이 된 것이 통일된 즐거움인 거죠. 그것이 바로 마을 공동체, 아까 말했던 법 없이 사는 마을이구요… 예네들이 자꾸 북쪽을 풍요롭게 그렸다고 하는데, 나는 진짜로 풍요로운 세상은 통일이 되었을 때 법 없이 살 수 있는 마을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그런 통일된 대한민국의 형상을 나타낸 거예요. 그런데 예네들은 이쪽에는 남쪽, 이쪽은 북쪽이기를 원하니깐…예네들은 다 그렇게 봐요. 그게 더 인상이 깊은 모양이에요. 하하하.

퍼> 선생님, 그런데 다른 작업들도 다 그렇잖아요. 이렇게 위로 올라가면서…

신> 예, 아래에서 순서대로 시간대별로 올라가지요.

퍼> 그렇죠? 그렇게 시간적 추이에 따라 위로 올라가는 건데… 그러니까 이 작품도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어떤 형상의 완성을 꾀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적 습관으로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가신 건데 말이죠 .우리는 워낙 대한민국 지도처럼 ‘남쪽은 아래, 북쪽은 위’라는 경직된 사고에 빠져 살다보니…

나는 아까 나까지 “예네들”과 마찬가지로 ‘북쪽’이라 발언한 데 대한 쑥스러움을 감추어볼 요량으로 그의 작품들의 전반적 특성들까지 들먹이며 그가 그린 게 북쪽이 아니라는 사실 증명에 가담하는 얄팍한 보상심리를 발동시켜보았다. 그런데 그 낯뜨거움에 대한 보상이 쉽진 않다. 나 자신에게 말이다.

신> 통일되어 가는 과정을, 단계를 그린 건데, 이 사람들은 여기는 남한, 여기는 북한. 북한은 아주 풍요롭게  잘 그려놓고, 문제가 없는 사회고, 여기는 문제가 많아 가지고 다 쫓아 내야되고, 개혁을 해야하고, 혁명을 해야되는 그런 거로 나타냈다는 거지요.

퍼> 제가 자료를 보니깐 1심, 2심에서는 무죄 판결이 났다가 다시 대법원에서는 유죄판결을 내렸다고 되어있던데요?

신> 사실 상고를 해 가지고 대법원에서 원심 파기를 했어요. ‘지방법원에서 다시 재판을 해서 올라와라’ 고등법원에서 했던 재판이 잘못됐다 이거죠. ‘유죄가 있는데 왜 그런 재판을 했느냐. 다시 하라’는 거지요. 그래서 지방법원은 대법원에서 내린 판결을 뒤엎지는 못하니깐 최고로 낮은 거를 선택해 선고유예를 준거예요. ‘죄는 있으되 선고는 안 한다’는 거죠. 선고유예는 일정한 기간만 집행유예인가, 뭐 그런 거래요. 그 기간만 지나가면 기록에도 남지 않는 대요. 그런 거였는데… UN에다가 제소해서 끝까지 가보자, 다른 사람도 많이 싸우다가 죽고 그랬는데, 이건 나 혼자만의 문제도 아닌 거 같고 해서, 힘들지만 UN위원회에다가 제소를 해놨어요.

4. 모더니스트에서 현실주의자로의 전향

퍼> 선생님께서는 초기에 아방가르드협회 같은 모더니즘 계열에서 활동을 하시다가 민중미술계열로 전향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 카달로그를 보면서 연대기를 대충 정리를 해보니, 선생님이 사회의식이 드러나는 작품을 처음 하시기 시작한 게 77년도에서 78년도 정도 되는 것 같은데요?

신> 그때는 사회성이 드러났다고 할 수는 없지요. 당시 모더니스트 그룹이라고 하는 A.G.(아방가르드협회)에서 ‘오브제’ 작업을 했어요. 요즘은 그런 걸 ‘설치’라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입체작품’이라고 했어요. 그러다가 아방가르드협회가 없어지고, 한 74년부터…실제로는 A.G. 마지막전인데 ‘서울비엔날레’라고 했어요. 그때부터 ‘이미지’작업을 조금 했었어요. 실로 묶고 하는 것들이예요.

퍼> 이미지 작업이라는게 무슨 말씀이세요?

신> 그 당시에는 ‘무이미지’라는 것들이 있어서, 그렇게 작업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모노크롬’화 같은 거지요. 자기 생각을 그림 속에서 정화시켜 회화성만을 존재하게 하는 그런 작업 말입니다.

퍼> 그런 무이미지 작업에서 이미지가 들어가는 작업으로 바꾸셨다는 말씀인가요?

신> 그렇죠. 나도 처음엔 무 이미지 쪽으로 갔었죠. 실로 매는 작업 속에서 무 이미지로 가다가 ‘이게 아닌 것 같다’ 싶어서, 자꾸 이미지 쪽으로 마음이 끌렸어요. 그러다 보니까 나의 생각을 담게 되고, 점점 현실 문제 쪽으로 방향이 돌려지고 그런 거죠. 그러다 보니 오브제 작업들도 자연스레 문명적인 비판적인 시각이 나오더라구요. 근데, 점점 이야기 거리가 많이 떠오르는데, 실을 가지고 여러 가지 물건들을 붙이고 연결하고 하는 것들로는 도무지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표현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다보니까 사진으로 간 거지요. 잡지에 실린 사진들을 붙여서 하는 작업이죠. 그러다가 보니깐, 이야기가 더 많이 풀어지고 할 얘기가 점점 더 많아지고 그랬어요. 사진들이 가지는 하나 하나의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런 사진 이미지들이 모이면서, 그렇게 모으다보니까… ‘역사’로 오게되었지요. 사실상 그렇게 된 거예요. 난 그 당시에는 운동권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었단 말이예요.

퍼> 선생님께서는 82년도에 개인전을 하시면서 혜성처럼 나타나 민중미술 계열의 비평가들을 사로잡으신 걸로 알고있는데요?

신> 난 그때 현발(현실과 발언)계열 사람들하고 알지도 못했고,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현실 비판적인 문화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어요. 그냥 교과서적인 역사의식, 반일감정, 이런 것밖에 없었어요. 조선일보에서 나온 ‘사진으로 본 한국 100년사’인가 하는 책이 있는데 그걸 보니깐 너무 억울한 거 같고, 정말 엄청나더라구요. 그러고 관동대지진 자료를 보면서 떠오른 반일감정 같은 것, 뭐 그런 거였죠.

그는 자신이 소위 ‘의식’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참 솔직하지 않은가? 나는 그런 솔직함에서 자신을 남과 동등하게 놓아볼 줄 아는 인품을 발견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주변 사물들, 사건들, 그를 통한 느낌들을 객관화 시켜 늘어놓아 보는 것처럼, 자기 자신도 객관화시키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그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퍼> 혼자서 책을 보다가 받은 느낌과 감정 때문에 작품을 하셨다는 거지요?

신> 그때는 아방가르드 협회가 없어지고 방법전이라는 것이 있어요. ‘서울방법전’이라고 했는데, 주로 거기에 출품했어요. 그 당시 꼴라쥬 작품을 한번 낸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동료들이, 아방가르드의 김구림씨 같은 사람들이 ‘야, 이야기가 너무 많다’ 그러는 거예요. 그 당시에 내 나름대로는 ‘무이미지’라는 게 싫어졌고, 나는 그렇게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다’고 말했지요. 그 이듬해에 여기 나오는(그는 책을 뒤적였다) 이 그림을 그렸어요. 60호 인데…

퍼> 예, 돼지머리 그림이요?

신> 네. 이 그림을 방법전에 냈어요.

퍼> 몇 년도였나요?

신> 80년인가? 모르겠어요.

퍼> 도록을 찾아보니 81년도 작품이네요.

신> 아~ 그럼 81년도 작품인가 보다. 나는 학교 교편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수업이 다 끝나고 나서 오프닝 파티 중간쯤에 들어갔어요.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나한테 말을 안 해요. 하하하.

퍼> 하하하

신> 그런 그림을 아무도 본 적이 없으니, 그냥 사람들이 입이 닫혀 버리는 거예요. 기껏 말을 걸어왔던 사람이 박수근씨의 아들이었는데, 이 양반이 왔느냐고 인사말을 걸더라구요. 그날 이야기를 들어보니깐… 일본 사람인 모양이예요. 그림 앞에서 1시간 정도를 앉아서 보았다더군요.

퍼> 그러니까, 다들 감탄해서 말을 못한 거지요?

신> 하하하. 몰라요. 다른 사람은 뭐라고 할지 몰라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어요.

퍼> 여러 가지 충격이 있었겠지요. 그분들도 자기네 분위기하고 많이 달랐을 테니까요.

신> 그 전람회 때, 오늘 출판기념회하는 김윤수 선생, 이 양반이 와서 봤던 것 같아요. 당시 서울미술관 관장이었는데, 그가 서울미술관에서 전람회를 하자고 제안을 해서, 그래서 그렇게 한 거예요. ‘현발’ 사람들하고도 거기서 만나고…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쪽으로 와 버린 거예요. 하하하.

퍼> 그러니깐 어떤 이론으로 무장한 의식을 갖고 다가온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작가적 성향에 따라 민중미술 계열로 이끌려오신 거네요.

 

신> 글쎄, 자연스러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어요. 당시 개념미술이라던가 이런 것도 있었고, 나도 실제적으로는 개념미술을 했거든요. 그런 작업을 했을 때, 그 당시 착상이 떠올랐을 때는 쾌감을 느끼고 작품을 할 때까지도 괜찮아요. 그런데 지나놓고 나면 아무 것도 없어지더라구요. 허무한 거죠… 내 체질이 힘들게 일을 하는 거, 그림 그리며 애먹는 거, 땀흘리는 거, 이런 걸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그림 자체에 대해 나 자신이 감동하고 그래서 내 독자가 감동하는 그런 거를 하고 싶었어요. 사명감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것이 싫었고, 극복하고 싶었죠. 홍대의 아방가르드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혼자 ‘이건 아니다’ 라고 저항하는, 나 나름대로의 투쟁이 있었지요. 하하하.

그는 70년대 미술계의 모더니즘운동에 참여했던 작가였다. 그런 작가가 전혀 이질적인 민중미술가로 변모해 버린 것이다. 그의 느낌을 쫓아서… 작가로서는 정말 특이한 이력의 작가인 것이다. 나는 그 변모를 충분한 공감으로 이해했다. 그건 모종의 감동이었다. (그가 아방가르드운동으로부터 빠져 나오던 과정에 관해서는 그가 쓴 글<자율적인 조형에서 자연적인 조형으로>(공간, 1979, 11)가 있다.)

신> 저는 그래요. 뭐를 봤을 때 느낌이 팍 온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말로도 표현을 할 수가 없고, ‘왜 그렇게 느꼈을까?’ 이런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나는 그것은 진실이라고 봐요. 느낀다는 거… 한 순간에 팍 다가오는 설명할 수 없는 느낌… 그게 중요하다고 봐요…

 

5. 콤플렉스와 관조

퍼> 여기 1979년작 <달밤>이란 작품이 있죠? 저는 이 작품이 참 좋아요. 멜랑꼬리와 그로테스크가 함께 존재하는 묘한 느낌이 있어요. 선생님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초현실적 분위기가 이 작품 속에도 깔려있는 듯 하구요.

신> 이 그림은 주로 아방가르드 쪽 그림을 그릴 때 그린 거예요. 고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린 거예요. 그건 내 마음의 안식처, 속살 같은 겁니다. 여긴 우리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인데, 갱변이라는 곳이예요. 강변의 사투리죠. 거기 울 아버지 친구가 살았는데 무척 가난했어요. 쌀도 퍼주고, 술도 사주고. 여기 나와 있는 길이 예전에 과거보러 가던 길이예요. 이 불빛은 주막집에서 나오는 거죠. 이 산을 넘어가면 안실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는데 거기에 역마가 있어요. 옛 상궁이었다고 하던데 늙어서 먹고 살려고 역마를 줬대요. 왜, 말 갈아타는 곳 있잖아요. 우리 어릴 때도, 길가다 날 저물면 사람들이 동네로 들어와서 잠을 청해요. 남자들은 우리집 사랑방에서 자고 여자들은 안방에서 잤죠. 내 머리맡에서… 낯선 손님들이 하루 밤 묶어가려 하면 안방에서 재우고 그러는 거에요. 참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예요. 글을 좀 쓸 줄 알면 그때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이 그림 속 고향의 추억이 ‘마음의 안식처’ ‘속살’이라고 했던가? 그 순간 그의 모습은 작가로서의 조형적 고민이라든가 시대에 대한 사명감이라든가 하는 사회적 인간으로서 입지를 위해 발버둥치는 모든 짐들을 벗어버린 듯 했다. 아니, 어쩌면 이 순간 그 모두를 벗어버리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마음의 안식처를 만나 속살을 드러내면서 말이다. 그래, 그에게도 고향, 그렇게 편안히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의 고향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말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그는 묻지도 않은 말을 계속해서 열심히 늘어놓는다.

신> 이 불빛은 봉창을 통해 비치는 거예요. 봉창이라고 나무 십자로 된 조그만 창 있죠? 호롱불을 갖다 놓으면 한밤중에도 먼데서 잘 보였어요. 우리 집 내 방에도 봉창이 있었는데… 바로 앞집에 석류나무가 있고 말이죠. 아침에 일어나면 봉창에 참새가 그 나무에 앉아 있는 게 그림자로 커다랗게 비치곤 했어요. 요즘도 가끔씩 그려요. 이태리 포플러, 난 그게 그렇게 멋있어. 그건 자주 그려요. 외국 나무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신나게 자라는 것, 그것도 참 좋아요. 그런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요. 그래서 그리기도 해요. 요즘은 서정적인 작품을 벽안시 하는 풍조는 많이 없어요. 개인적인 체험을 중요시하는 쪽으로 가는 것 같아요.

그는 요즘 이런 서정적인 작품을 그리기도 하나보다. 그가 확연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작품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야하는 전업작가로서의 삶에 이런 작품들이 도움을 주기도 할거란 생각을 했다.

신> 여기 <대지>란 작품 있죠? 이 작품은 박경리씨가 김지하씨 아들을 업고 가는 사진을 봤는데 뭔가 끌고 나가고 있는 느낌을 주더라구요. 토지 이미지도 떠올랐고, 김지하 생각도 나고 해서…여기 대지에서 손이 올라오는 걸 그린 작품(<타는 목마름으로>)이 있죠? 그게 김지하의 손이야. 70년대 운동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진짜야. 그때는 목숨 내놓고 했지. 80년대는 그래도 죽지는 않았으니까…

퍼>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작품 창작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 같으신가요?

신> 글쎄 콤플렉스인 거 같기도 해요. 나를 쥐어짜고… 그래야 내가 후련하거든. 그로테스크 한 것도 들어가야지 맘에 들고, 그런 불쾌하고 지저분한 것들을 그리다 보면 쾌감을 느껴요. 아름답게 그리지는 않지만 왠지 나는 자꾸 그쪽으로 끌려요. 사실 말이지, 그런 것을 그리거나 그런데 집착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겁 많고 순하거든. 내가 그렇단 말이지.

신> 그렇지만 나도 힘쓰는 건 좋아해요. 어릴 때 애들하고 맨 날 풀밭에서 씨름하고 그랬으니까. 씨름대회 나가서도 유도, 보디빌더 하는 사람들 다 자빠뜨렸어요. 고등학교 시절엔 패기만만했어요. 그러면서도 부끄럼이 많아서, 여자들한테 말도 쉽게 못 걸었어요. 너무 좋아하면 그러나봐. 하하. 대학 4학년 때까지 여자랑 제대로 이야기도 못했어요.

그는 이제 묻지 않아도 계속 이야기를 한다. 뭔가 풀어놓고 싶은가 보다. 어떤 회한 같기도 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나는 이런 분위기 속으로 들어온 것이 좋았다. 나는 이번 인터뷰를 통해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 속에 꽁꽁 감추어 두었던 것, 아무데서나 내놓을 수 없는 내밀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는 지금 그런 이야기들을 계속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신> 그렇게 부끄럼이 많은데, 사실은 여자를 때린 사건도 있었어요. 실기실 복도가 좁았는데 어떤 여자가 문 앞에 서서 비키질 않는 거야. 그때는 세상의 고민은 다 짊어진 것처럼 인상쓰고 살 때예요. 그래서 그냥 무시하고 퍽 열었지. 그랬더니 여자가 좀 휘청했나봐요. 날 따라와서 들고 있던 붓으로 내 등에 먹칠을 해대는 거야. 그래서 다리를 찼지. 그 사건으로 학장한테까지 올라가고. 남자가 여자를 때렸다고 패가 갈려서 좀 시끄러웠지.

신> 내가 박서보 선생 반이었는데, 3학년 때 실기실에서 거의 살았어요. 모델 다이에서 자는 거야. 상주하는 사람들이 자리도 항상 좋은 델 차지하는 거지. 그러다 어떤 4학년 여학생이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어요. 군복 같은 옷을 입고 다니고 웃는 것도 남자 같던 여학생인데, 여자로 보이지도 않았지… 하루는 아무도 없고 나 혼자 잤는데 자다 일어나 자화상을 그렸지. 나이프로 마티에르까지 내면서. 그러나 날이 새서 박서보 선생이 옆 작업실에 있다 올라왔는데 내 그림을 본 거야. ‘윌슨 같네’ 그러는 거야. 좀 기분이 나빴지. 그런 차에 내 옆자리의 여학생이 보더니 또 ‘폴 뉴먼 같네’ 하는 거야. 갑자기 화가 팍 치밀더라고. 그래서 그림을 내 던지니까, 이젤들이 파바박~ 연달아 넘어지는 거야. 학과장인 김정숙 선생이 그 현장을 목격해서 난리가 나고 그랬지…

퍼> 폴뉴먼이라면 잘 생긴 배우인데 왜 화를 내셨나요?

신> 난 난봉꾼이 아니란 말이지. 남은 밤새 열심히 그렸는데 말야…(일동 웃음)

사실 그 옆의 여학생도 작품이 좋았어요. 벌레처럼 되게 징그러운 것들을 잘 그렸어요. 목탄으로 스케치하고 파스텔을 썼는데, 단순하면서도 작품이 좋았어요. 나중에 그 양반이 대학원생이고 우리가 4학년일 때 WHAT전을 했어요.

그는 물어보지 않은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그 풋풋했던 학창시절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 났나보다. 그리고 그는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그녀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중견 여류화가 모씨였다. 참 재밌는 일이다. 그런 품위 있는  중견화가들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니…

퍼> 오랫동안 교사를 하셨는데, 교사 생활은 어떠셨나요?

신> 교사는 내게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말을 조리 있게 잘 못하니까, 내가 힘들어요. 매일 나가고 싶었어요. 먹고살려고 다닌 거지. 교사할 때는 평일에는 작품하기가 힘들더라구요. 방학 때 그렸던 거로 1년 지내고 그랬죠. 방학 아닐 때는 못 그렸어요. 목공실에 가서 조각이나 좀 하고… 그러다 90년에 학교 그만두고 전업작가가 되었어요.

그는 교사보다는 훨씬 작가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의 어눌함 때문에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어지간히 고민을 하셨나보다. 생각이 깊고 말은 어눌한 작가가 우리의 교육현실 속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예술’을 가르친 다는 게 얼마나 힘겨웠을까?

퍼> 전업작가 생활하시면 경제적인 면이 가장 부담이 되실텐데, 작품은 잘 팔리셨나요?

신> 80년대는 의외로 잘 팔렸어요. 교사 생활하면서 그렇게 살았죠. 그리고 학교 그만두고는 학교 퇴직금도 좀 있고 집은 원래 있던 거고 해서 그냥 그렇게 먹고살아요. 미술관이나 개인 수집가들이 가끔 작품을 사기도 해요. 당시에는 안 팔려고 생각했던 작품들을 학고재에서 사겠다고 해서 팔기도 했어요. 국립현대미술관에 <금강>이란 작품을 2000만원에 팔았어요. 난 별로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주더라구요.

퍼> 자신의 작품에 관한 작품론 같은 건 안 쓰시나요?

신> 내가 쓴 글이 하나 있는데. 거기 도록에 실려있어요. 그 글은 내가 아방가르드에서 빠져 나오던 이야기인데, 그 글을 쓰느라 고생 많이 했어요. 정말 글을 쓴다는 건 어려워요. 다시는 안 쓰기로 했어요.

퍼> 장식미술이나 이발소 그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실제 민중들은 꽃그림이나 이발소 그림 같은 것을 더 좋아할 것 같은데요. 형식주의적 모더니즘을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 하듯이 민중미술도 민중을 위한 예술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신 적은 없는지요?

신> 장식미술도 좋아요. 사람들에게 사물에 대해 깨닫게 하는 것, 사물 자체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는 것, 그것이 좋은 거죠. 깨달음을 주니까. 자기가 넓어질 수록 남과 만날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지죠. ‘우리 미술'(민중미술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도 자기 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이죠.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요즘은 민중미술이라고 하지도 않아요. 그리고 민중미술이란 말 그 자체도 언론에서 붙인 이름이예요. 섬짓한 느낌을 주려고. 당시 우리는 ‘민족미술’이라고 했어요. 유준상씨가 어떤 책에서 자기 스스로 민중미술이라고 부르는 게 어디 있냐고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우리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니예요.

예술은 예술가 자신의 철학이 담길 때 좋은 예술이지요. 민중미술이라면 민중의 욕망이 그대로 담겨야 할 수도 있죠. 날카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그런 문제로 대립은 없어요. 초창기에는 그런 문제로 논쟁이 많았어요… 오윤, 이철수 그런 사람들. 이철수는 장식성도 있지만 민족형식을 창조하려고 했던 사람들이죠. 현실주의적인 나 역시 하나의 민족형식을 추구한 거라 생각해요. 지금도 내가 잘 한 게 아닌가 생각해요. 모내기도 이발소 그림 식의 민족형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모두 우리가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는 단계라고 봐요. 일제 식민지가 아니라면 서양문화가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오지 않았을까 생각하지요. 이발소 그림 같은 그런 식으로 동서양이 접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수원의 어느 절에 김홍도의 탱화가 걸려있는데 거기도 음영이 들어있어요. 요철감 말이죠. 서양화를 언듯 본 느낌들이 그렇게 나타나는 거죠. 한국 근대사의 단절만 없었다면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접목되어 민족형식이 만들어져 나갔을 거예요.

그렇게 우리는 인터뷰를 마쳤다. ‘모내기’로 공안사건에 연루되기까지 했던 민중미술가 신학철의 인터뷰를 마치면서 내게 남은 인상은 예술가를 만난 즐거움이었다. 그건 어쩌면 처음 내가 그의 작품들을 보며 가졌던 느낌과 한가닥 연이 닿아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가끔 내 정체성이 뭔가 하고 물어봐요. 맨날 남의 얘기나 하고, 내 실제 생활과는 거리가 있다는 느낌도 들 때가 있으니까.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런 게 내 정체성이 아닌가 싶어요. 현실에 대해서 분노하면서 사는 게…하하하. 가끔씩은 촌놈이 서울 올라와서 커다란 그림 그리고 이름 좀 날리려고 지랄하고 있는 것, 그것 자체가 내 정체성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하하하. 이런 삶 자체가, 실제 삶과 약간 떨어져 작가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내 정체성인 것 같아…” “사람들이 나를 처음 만나면 좀 실망하나 봐. 날카롭고 무시무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인상이 부드럽다는 거야. 다들 그래요, 실망들을 많이 하죠. 어눌하고, 바보스럽고… 가끔씩은 남들이 날 바보로 보는 거 같아서 기분 나빠요. 하하하. 맨 날 사기 당하는 거 같아서 말야…”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 순간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그 소박한 웃음과 오버랩되면서… 행복한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