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메드 샴술 알람

방글라데시(정식 명칭은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 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는 인도반도의 북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동쪽으로는 미얀마, 남쪽으로는 벵골만에 면하고 있다. 북회귀선이 국토의 중앙을 지나는 아열대이며, 위치는 브라마푸트라강과 갠지스강의 하류에 있어, 두 강이 형성하는 거대한 삼각주 지대가 국토의 대부분의 차지하고 있다. 북동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산이 없는 저습지대이다. 땅 덩어리는 우리나라 남한에다 강원도만큼을 더한 넓이에, 1 3천만의 인구가 살고 있어 인구밀도로는 세계 최고이다. 우기(5월말-9월말)에는 전국토의 2/5가 물에 침수되며 또한 건기가 끝날 무렵에는 사이클론의 피해가 심각할 정도로 자연 조건이 불리하다.

 

알람의 코리안 드림 모하메드 샴술 알람

 

1. 숨막히는 조국을 떠나다

 

지난 봄, 나는 모하메드 샴술 알람을 만나러 충정로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 갔다. 그는 방글라데시 산업연수생으로 이 땅에 왔다, 한국문학도로 변신한, 조금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공부와 함께 조그만 사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차고를 개조한 사무실, 그 한 쪽 방에는 가죽이 가득 쌓여 있었다. 반갑게 맞아주며 자리를 권하는 그의 손은 흰 손톱을 제외하고는 전체에 조금 검은 빛이 돌았다. 피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커다란 눈만은 희고 밝게 빛났다. 얼굴 가득 번지는 웃음처럼, 그는 매우 여리고 순수한 느낌을 주었다.

 

: 한국에 오게 된 계기랄까, , 그런 거 있나요?

 

: 그냥. 친구의 얘기를 듣고 오게 됐죠.

 

그냥이라.. 하긴 뭐, 딱히 한국에 오게된 계기라는 것이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살다 보면, 그저 우연한 일로 낯선 곳에서 낯선 일들을 겪기도 하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우리들은 외국인을 만나게 되면 그계기라는 것을 버릇처럼 묻곤 한다. 한국에 오려면, 마치 무언가 특별한사연이나인연이 있지 않고서는 오기 힘들다는 것처럼

 

: 1971년 방글라데시 페이니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났어요. 거기서 89년 페이니 대학을 입학하고 91년 졸업했어요. 그리고 94년까지는 아버지 사업을 도와주면서 컴퓨터 학원, 영어학원을 다녔구요. 그런데 졸업하고 나서, 아버지 도움 안 받고 혼자 힘으로, 조그맣게 중소기업을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한국에 연수생으로 가면 기술을 가르쳐 준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먼저 기술을 배우려고 한국에 왔어요. 그게 94 7월이죠.

 

아버지가 사업을 하고, 알람 자신은 컴퓨터˙영어 학원을 다닐 정도면, 그 나라에서는 어느 정도의 생활 수준일지 궁금했다. 방글라데시에 있는 가족에 대해 물었다.

 

: 아버지의 사업이라면?

 

: 우리는 대가족인데 아버지가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어요. 사장은 할아버지지만 운영은 우리 아버지하고 삼촌들이 다 하거든요. 아버지는 매니저이고 삼촌들이 생산쪽 일이나 딴 쪽 일 보고. 물론 사원이 있지만 가족들끼리 운영하는, 말하자면, ‘가족사업이예요. 취급하는 일은 방글라데시 전통의학으로 한국에서 말하는 한의학과 비슷하죠. 약초를 캐서 제조도 하고 진단도 하고 약을 팔기도 하고요.

 

: 진료행위를 한다? 그럼 의사라 할 수 있는데, 면허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 있어요. 아버지가 의사예요.

 

그는 가족 전체가 하나의 사업을 이끌어 가는가족사업이 방글라데시에서는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그것은 방글라데시의 대가족제도하고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 방글라데시에는 대가족제도가 일반적이예요. 적어도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까지는요. 돌아가시면 그 다음에는 분가하고. 재산 같은 거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누어 주고, 만일 상속을 안 하고 가시면 가족들끼리, 친척들끼리 모여서 공정하게 누가 얼마나 가질 건지 얘기하구요.

 

알람은 94, 한국에서 연수생 제도가 처음 시작되던 해에 한국에 왔다. 방글라데시에서 그의 집은 상대적이긴 해도, 그런 대로 형편이 나았던 듯하지만, 그 또한 나름대로코리안 드림이라는 것을 품고 이 땅에 왔을 것이다. ‘코리안 드림이라는 것은 실체도 없이, 국내와 현지의 불법 알선 부로커들에 의해 실제보다 엄청나게 부풀려지기 마련이었고, 그 수수료 또한 1인당 5-70만원이 넘어 이만저만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현실앞에서 좌절하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 한국에 와서는 주로 무슨 일을 했는데요?

 

: 프레스로 작업하는 일인데, 제가 있던 곳은 깡통이나 필통, 저금통 같은 스틸로 된 제품을 찍어내는 회사였어요. 구로공단 근처에 있었어요.

 

: 거기서 알람이 원하는 무슨 기술을 배울 수 있었어요?

 

: 아뇨. 그건 단순한 제조업이예요.

 

: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는 얘긴가요?

 

: 전혀 달랐죠. 말이 좋아 산업연수죠. 누가 가르쳐 주는 것도, 배우는 것도 없어요. 남들 따라 단순 작업을 반복하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처음에 연수생으로 왔을 때는 돈보다는 기술을 배우려고 왔는데, 와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구요. 그냥 일반 노동자처럼 회사에서 일하고 돈 번다 그런 식으로. 친구도 돈 번다고 얘기 하지 않았어요. 그냥 한달에 200인지, 300불인지 생활비를 주면서 연수를 한다 그랬거든요.

 

: 어떤 기술을 배우고 싶었는데요?

 

: 중소기업에서 할 수 있는, 전자제품 쪽에 관심 있었어요. 스위치나 전자계통 쪽으로 그런 거. 그런데 와서 하게된 일은 그런 거와는 전혀 다른 단순한 일이고, 그리고 아주 위험한 일이었어요. 자칫하면 그냥 손 잘리고. 프레스란 기계를 쓰니까.

 

뒤에서 다시 얘기 하겠지만, 그 또한 프레스에 손가락을 잘렸다고 했다.

 

: 그러면 그 친구가 잘못 얘기해 준 건가요?

 

: 그때 한국에 산업연수생 제도가 처음 생겼던 때라서 사실 아무도 몰랐어요. 그 친구도 몰랐고. 우리나라에서도 그게 어떤 일인지 몰랐죠. 더군다나 그땐 나도 학생이라서 복잡한 것은 생각지도 않고 왔죠. , 그렇구나, 그랬죠. 다 제 잘못이죠.

 

주로 동남아시아 출신인 이들 이주노동자들은 국내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3D업종에 주로 취업하여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생존권마저 위협받으며 저임금과 강도 높은 노동과 인권 유린에 시달려야 했다. 연수생들은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피교육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에 따른, 노동3권을 인정받을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그들은 초국적 자본의 등장과 그로 인한 고용유연화 정책의 강화에 따른, 고용과 해고가 손쉬운 일종의경기변동의 안전판구실을 하였던 셈이다.

 

: 노동시간이나 월급은 어땠나요?

 

: 일은 매일 8시간, 10시간 이상씩 했구요. 월급은 한국돈으로 60만원? 그렇게 시작해서 끝날 즈음에서는 75만원 정도로 올라갔어요.

 

: 월급은 꼬박꼬박 주던가요?

 

: 가끔 늦기는 해도 3년동안 그런대로 꼬박꼬박 받았어요. 사장님도 좋은 분이었어요. 하지만, 일은 위험하고 또 힘들었어요. 회사에서 일한 거 전에는 해보지도 않았던 일이니까.

 

: 그 일은 몇 년을 했습니까?

 

: 1년 일하고, 다시 계약하고 하는 식으로 해서 3년 동안 계속한다는 조건이었죠. 3년동안 같은 일을 계속 했어요.

 

: 65만원 정도 월급 받으면 방글라데시에서는 어느 정도가 되나요?

 

: 대졸 초봉이 8만원 정도고 잘 받으면 10만원 정도 되죠.

 

: 그럼 방글라데시에서 받는 것에 비하면, 7-8배나 많은 돈을 받은 셈인데, 그럼 처음 3년 정도는 생활이 좀 괜찮았나요?

 

: 그렇죠. 괜찮았죠. 그래서 집에 돈도 보내고 가족들 선물도 사보내고 했어요. 다른 아시아 노동자들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월급도 제 때 받고, 나중에 다쳤다고 쉬기도 하고, 한국어 학원에 다닐 수도 있어서 그런대로 좋았어요. 사장님은 월급 말고도 몰래 제게 돈을 많이 주셨어요. 사장님은 괜찮은 분이었어요. 지금도 연락하고 가끔 술 사달라고 그래요.

 

괜찮은 생활. 적어도 알람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의 말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다행히(?) 그는괜찮은 분을 사장으로 만나 임금체불이나 일상적 폭력에 시달리지 않고도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알람의 기억이 정확한 건가? 1995 7 8일자 신문에 실린 대로경기도내 제조업체에 취업하고 있는 근로자들의 평균 급여는 43만원선이며, 60만원 이상 받는 경우가 3.6%”라고 한다면, 초봉이 60만원이라는 것은 조금 믿기 어렵다.) 어쨋거나 이주노동자들은 확실히 자기 나라에서 받는 임금보다는 더 많은 돈을 한국에서 받는다. 그것도 몇 배나 더 많이. 그렇기에 그들은브로커들에게 웃돈을 주면서, 때로는 그 때문에 사기를 당하면서까지 한국에 오려고 애를 쓰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코리안 드림‘. 그러나 그들의 임금이 높은 것은 결코 아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과 그들의 노동환경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기본적인 착취구조 속에서 여느 자본가에 비해, 월급 이외의 돈을 조금 더 준다고 해서 사장의인정이라는 것을 긍정할 수 있을까

 

그런데 원하던 기술은 배울 수 없고, 게다가 위험하기까지 한 일을 그는 왜 그렇게 오래 했을까. 그리고 3년의 연수생 생활이 끝나고 바로 자기 나라 방글라데시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앞에서 본 것처럼, 본국에서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어서였을까. 그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조국 방글라데시에 대한 그의 생각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 방글라데시 대학에서는 무슨 전공을 했어요?

 

: 우리나라에는 4개의 주요한 유니버시티(university)가 있고, 그 아래에 여러 개의 칼리지(college)가 있어요. 칼리지는 4년제인데, 2년은 학부과정이고, 그거 졸업하면 각자 전공하고 싶은 거 공부하구요. 유니버시티는 칼리지를 나와서 다시 들어가야 해요.

 

: 알람은 학부만 다녔는데,(칼리지를 2년 다녔으니까) 다른 전공할 생각은 없었어요?

 

: 전공은 할 생각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정치현실이 너무 안 좋아서요. 대학은 그 때 계속 문닫혀 있었고 매일 데모하고. 입학해도 졸업을 언제할 수 있을 지 아무도 알 수 없고. 대학을 나와봤자 별로 할 것도 없고, 쓸모 없다, 그래서 중소기업을 할 생각을 했었어요.

 

: 데모라면, 민주화투쟁 같은 거?

 

: 민주화 투쟁은 아니예요. 서로 정권 바꿔치기지. 한국에서는 학생들끼리 지지하는 하나의 정치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학생들이 지향하는 그런 정치가 없고, 야당이든, 여당이든 어느 하나에 속해 있어요. 그래서 소속 정당이 달라, 서로 항상 싸워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매일 파업하고 하니까, 굉장히 숨이 막히더라구요. 자기 생활을 제대로 못해요.

 

: 근데, 정치가 잘못되면 학생들이 데모하고 노동자들이 파업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 우리나라에서요? 우리나라에서 노동자 전체가 파업을 하고 그러면 좋은데, 학생들처럼 노동자들도 갈라져 있어요. 야당과 여당으로. 야당 노동자들이 파업하면 여당 노동자들이 가서 그걸 막아요.

 

: 그러면, 노동자들이 자기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얘긴가요?

 

: 그렇죠. 노동자와 학생들이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는 거죠. 노동자 스스로를 위해 싸워야 하는데. 노동자와 학생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정치인들을 위해서 희생되는 거죠.

 

19세기 초반부터 일어났던반힌두교성격의 회교부흥운동이 20세기에 들어 회교 엘리트들의반영국운동으로 바뀌어 벵갈 전역으로 퍼진다. 그 결과,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 방글라데시와 지금의 파키스탄은 종교적 공통성을 바탕으로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세우고(1947. 8. 24) 그들 각각은 동˙서파키스탄을 형성한다. 그러나 그 둘은 본래 종족, 언어, 역사와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달랐다. 따라서 서파키스탄 정부의 동파키스탄에 대한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차별화 정책이 심화되자, 동파키스탄의 저항운동이 일기 시작, 마침내 동파키스탄은 1971 1

2. 또 다른 꿈꾸기 – 알람, 유학생이 되다

퍼 : 손가락을 다쳤다고 하던데..?

알 : 예, 연수생으로 한국에 온 지, 2년이 좀 더 지나서일 거예요. 공장에서 프레스 작업을 하다가 손가락을 잘렸어요. 그 순간은 잘린 손가락이 아프다는 생각보다는, 굉장히 무서웠어요. 하지만… 지금 ‘국문과’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그 덕분인지도 모르겠어요.

 

‘덕분’이라니… 일하다 기계에 손가락 잘린 것과 한국 문학을 공부하게 된 것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다는 건지, 속으로 의아해 하고 있는데, 샴술 알람은 내게 프레스에 잘려 나간 자신의 오른손 둘째 손가락을 보여 주었다. 손가락 끝 부분이 일부 잘려 나가 뭉툭해져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잘린 손가락은 다시 붙일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 손톱이 다시 생기고 그럭저럭 손가락 원래 모양을 되찾은 것이라 했다. 3년의 이주노동자 생활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그가 한국과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된 데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인연이라는 것이, 아름답기보다는 왠지 ‘섬뜩하고 슬픈’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에게는 고통과 원망, 분노일 수도 있는 그 일이 그의 지극히 순수하고 선량한 마음을 통해 그 자신의 기억 속에서 순화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당연히 자신이 프레스에 손가락을 잘린 일을 그 자신만의 일로, 그리고 자신의 부주의 탓으로만 돌리며, 그래도 팔을 잘리는 것보다는 훨씬 다행한 일이 아닌가,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부끄럽고 가슴 아픈 기억으로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언젠가 주간지에 프레스에 손과 팔이 잘린 이주노동자 여럿이 나온 사진을 보며 소름이 돋았던 적이 있었다. 그 기사에는 ‘개새끼, 코리언!’이라며 욕설을 내뱉는 이주노동자의 분노와 원한을 나타내듯 잘려나간 팔뚝이 커다랗게 클로즈업 되어 있었다.

퍼 : 한국 문학을 하게 된 계기를 말하나요?

알 : 예. 그 일로 한 달 정도는 일 안 하고 쉬고 있었어요. 쉬는 동안에 제가 있던 방에서 영한사전을 하나 발견했어요. 그리고 첨 한국에 올 때, 가이드 북으로 받은 책이 있었는데, 거기에 한글이 있었어요. 간단한 회화도 있었고. 제가 영어는 좀 아니까, 영어를 보고 한국어 뜻을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그 사전에 나온 글자를 익히고. 글자는 제가 하루에 익혔어요.

퍼 : 하루에?

알 : 예. 하루에 익히고 이거 너무 쉽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전에 문장 있는데, 우리 나라 사전엔문장 없어요. 그걸 스스로 연구하고 자음, 모음, 문법 같은 거 이럴거다, 이렇게 혼자 익혔어요. 그리고 나서 나서 서점 가서 혼자서 한국말을 배울 수 있는 책이 없나, 물어서 책과 카세트를 샀구요.

하루만에 한글의 자모를 익힌 것은 한글이 아무리 쉬운 글자임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언어적 감수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한국어를 그런대로 유창하게 구사하였다.

퍼 : 한국어의 어떤 점들이 쉽게 느껴졌나요?

알 : 글자가 아주 반듯하게 되어 있어서 쉽게 느껴졌어요. 방글라데시 글자는 그림 같아요. 그리고 한국어의 어순이 우리말과 똑같아요. 그래서 이게 더 흥미롭고. 그래서 어느 단계까지는 더 쉬웠어요.

방글라데시아의 언어인 벵갈(Bengal)어는 마치 그림처럼 휘날려 써야하지만 우리나라 말과 어순이 같고, 존대법이 있으며, 간혹 흡사한 단어들도 있다. 또한 서로의 정서가 비슷하여 그런지, 우리나라 말과 전혀 관계 없는 말인데도, 머리에 쉽게 각인되는 낱말들이 꽤 된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샴술 알람의 언어적 감수성은 한국어와 벵갈어의 언어 구조의 상동성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퍼 : 그때까지는 한국어 잘 몰랐습니까?

알 : 네. 그때까지는 잘 몰랐어요. 간단한 인사 정도? 그래서 그 회사에 전에 있던 불법체류자들에게 물어보고 했는데, 근데 나중에 제가 배우고 보니, 그 사람들 다 틀렸어요. 잘못 가르쳐 주었어요. 한 달 정도 배우고 나서 방글라데시 음식을 사러 갔던 회사에서 한국인한테서 같은 민족인, 인도 학생을 소개 받았어요. 그는 당시 서울대 종교학과에 다니고 있었어요. 나중에 그 인도 학생의 이사를 도와 주었는데, 이사짐을 실은 트럭에서 그와 이야기 하다가 제 현실을 얘기하게 되었어요. 손가락을 다친 이후로, 연수생으로서는 앞이 깜깜한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 나갈 수 있나, 이야기를 했더니 그가 이화여대 저녁반에 한국어를 배울 수 있다고 얘기해 줬어요. 그래서 회사에 와서 사장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그러라고 하면서 저녁 시간을 빼줬어요. 한국을 나가기 전 6-7개월 전쯤 일이었어요. 그러니까 97년 초쯤에 이화여대에 다녔던 거죠. 그 전까지는 혼자서 나름대로 한국어를 공부 했어요. 학교 가기 전까지는 문장을 다 읽고 쓰고 했어요.

알람은 97년 7월까지 3년 동안의 연수생 생활을 마치고 방글라데시로 귀국, 한달 뒤 유학비자를 받아 한국에 다시 왔다. 그리고 1998년 3월에 서울대 국문과 입학하여 현재는 4학년이다.

퍼 : 우연하게 한국어를 접하게 되고 유학을 결심? 첨에는 기업을 하고 싶었다더니 어떻게 국문과로 오게 되었나?

알 : 첨에는 기업을 하고 싶었는데, 기술을 못 배웠잖아요, 그리고 실망했기 때문에 다른 길을 택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된 거구요. 전 원래 페이니 칼리지에서 문과를 했기 때문에 언어와 문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퍼 : 방글라데시에서는 문학 쪽으로 관련 있었나?

알 : 여러 가지 복합적인 걸 공부했기에, 조금씩 조금씩 했죠. 정치, 사회학. 깊이는 안 들어가고. 개론 정도? 우리 문학에서는 시 쪽이 발달되어 있는 거 같아요. 한국에서 말하자면, 고전시가 쪽인데. 우리나라 시는 아직도 형식이 지켜지죠.

근대 벵갈어는 영국 지배 아래에 있던 시대에서부터 시작하며, 벵갈 지역의 회교도들이 영국과 힌두교도의 이중적 지배를 받던 18세기 후반에 벵갈지역에 수용되어, 19세기는 벵갈어 문학의 전성기를 이룬다. 벵갈인, 그래서 방글라데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의 타고르(R. Tagore)가 1913년, 벵갈어로 쓴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탈 정도로, 방글라데시는 우수한 언어와 문자, 그리고 아름다운 시와 철학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특히 방글라데시인들은 시를 심각하게 발아들여 시에 대해 민감하며 깊은 열정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방글라데시의 국민시인으로는 카디 나즈둘을 들 수 있다. 특히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을 위한 투쟁을 벌일 때, 파키스탄의 차별 정책에 맞선 방글라데시의 저항운동이 1952년 뱅갈어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생각할 때, 벵갈어에 대한 방글라데시인들의 애정은 남다른 면이 있다.

퍼 : 막상 한국 문학 공부를 해 보니까 어떻던가요?

알 : 재미는 있는데, 좀 어려워요. 특히 한자 때문에. 한자라도 없었으면 할 만한데…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처음엔 국어학 쪽으로 관심이 있어, 국어학 개론을 듣고는 국어와 관련된 다른 과목을 들으려고 했어요. 우선 수업을 들어 보고 수강하겠다, 그런 생각으로 교실에 들어갔는데 교수님께서 저보고 “이 과목이 어떤 과목인지는 알고 왔냐”고 하셨어요. 그래서 전 “잘 모르지만, 들어보고 하겠습니다.” 했더니, 교재를 보여 주시며 이런 내용이다, 설명해 주시는데, 아유… 안되겠더라고요. 그래 “죄송합니다.” 하고는 바로 나와버렸죠. 고대 한국어를 공부하는 수업이었어요.

퍼 : 한국 문학이 뭐가 좋아요?

알 : 어, 아직 깊이 공부는 안했지만 고전문학도 재밌고, 뭐, 근대문학도 재밌어요. 인상에 남는 작품은 김열조의 「도로 눈을 감고 가서」라는 책인데, 소설은 아니구. 저자는 사상가인데, 그 책은 수준도 높고 비유를 많이 썼어요. 전… 소설을 좋아하는데 소설 책이 너무 많아요. 작가도 많고. 읽는 사람이 많아서 책이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서… 우리나라는 그렇게 소설이 많지 않아요.

그는 아직 한국문학에 대해서 잘 아는 바도 없고 읽은 작품도 별로 없다고 했다. 고작해야 염상섭이나 최인훈의 소설 같은, 수업 시간에 과제로 읽어야 했던 몇몇 작품들만 생각난다고 했다. 그러나 책을 얼마나 읽었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 무엇을 읽었느냐가 중요할 뿐…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문학을 사랑한다’는 것이 당장에 먹고 사는 생활이 급한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제 3세계 사람에게, 역시 제 3세계일 수 밖에 없는 한국의 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의 의미는…

퍼 : 혹시 방글라데시에서 한국 문학을 공부한 사람은 있어요?

알 : 아마, 없을 거예요. 제가 처음일 거예요.

퍼 : 잘하면 방글라데시 최초의 한국문학 전공자가 되는 건가요?

알 : 그렇죠. 잘하면. 여기서 박사까지 할 수 있으면.. 그런데 지금처럼 공부와 사업을 병행하면서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걱정이예요.

그러고 보니, 공부하겠다는 사람이 ‘사업’은 또 무슨 까닭에 하는 것일까.

알 : 사업을 하는 것은 공부하기 위해 하는 것인데, 한국문학을 공부하고 나서 실직자가 되더라도 인간은 어쨋든 돈은 벌어야 되니까, 현실이잖아요? 한국사람도 놀고 있는데.. 공부를 다 마치고도 취직을 못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고. 공부와 사업을 병행하고 있는 것이죠. 한국 문학을 평생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현실적으로는 너무 힘들고요.

‘인간은 어쨋든 돈은 벌어야 한다’는 말은, 사람이면 누구나 제 밥벌이를 해야한다는 뜻일텐데, 그도 한국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생계와는 무관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일까.

알 : 저야 뭐, 외국 가서 교수 자리를 얻는다 해도, 그것도 모르는 일이죠. 일단 우리나라에는 한국어학과가 없고. 인도 같은 데는 한국어학과는 있었지만, 한국 경제가 불안해지니까 없어졌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경제가 불안한 편인데, 앞으론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학과도 폐지될 수도 있고.. 하여튼 앞으로 좀 어려울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 준비중인 사업마저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학생이며 외국인이라는 신분 때문이다.

알 : 제가 학생 신분이니까, 제 이름으로 사업자로 등록할 수 없기 때문에 제가 아는 분의 명의로 등록을 했어요. 그리고 사무실 마련과 비품들은 제 파트너, 같이 사업하는 사람이 다 댔죠. 아직은 제가 투자할 형편이 아니니까. 대신에 일은 제가 다 봐주기로 하구요. 실제로 회사를 꾸려 가고 하는 일은 제가 다 해요.

퍼 : 여기서 주로 하는 일은 뭡니까?

알 : 피혁쪽 일이죠. 가죽을 수입해서 금강제화, 에스콰이어 같은 대기업에 공급하는 거죠. 제 파트너가 공급권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리고 한국에서 기계하고 산업용 물건 같은 거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로 수출하고 할 계획이예요. 아직 시작은 못했어요.

  

 

퍼 : 공부를 하노라면 경제적으로 힘들텐데?

알 : 우리나라에서 장학금을 못받고 왔어요. 학비는 첨에 집에서 갖고 왔어요. 생활비는 한 1년 정도 집에서 도움 받았구요. 그리고 그 전에 한국에서 일할 때 모아둔 돈도 좀 있고 해서. 그래서 입학하고 나서 지금까지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감동을 받은 일이 있어요. 서울대 정식으로 입학하기 전에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같이 있던 대만 스님이 있었는데, 조계사에 와 있는 스님들이 옷이 좀 거지 같잖아요? (웃음) 그래서 전 불쌍하게 생각했어요. 당신은 어떻게 생활하냐, 학비는 누가 대주냐. 그러면 그는 웃으면서 어머니가 주셔서 문제 없다, 그랬죠. 그래도 저는 스님을 늘 불쌍하게 생각했어요. 근데 그 스님은 제게 알람씨는 학비 어떻게 마련하느냐고 물었죠. 그래서 난 어렵다, 그랬는데, 한국어 과정이 끝나고 헤어지는 날, 파티가 있었는데, 그 스님이 날 불러서 편지를 하나 주었어요. 그러면서 집에 가서 보라고 했죠. 난 그때 진짜 편진줄 알았어요. 그래 나중에 편지를 뜯어보니, 편지와 수표가 있었어요. 10만원짜리 8장… 근데 주소가 없어요. 돈을 돌려줘야 하는데, 그리고 그가 돈을 안 받으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는데… 내가 연락할까봐 일부러 주소를 안 쓴거예요. 나중에 연락처를 알아 연락을 했는데… 성함이 임경민 스님이래요, 그런데 아직도 연락이 없어요. (하하)

그는 서울대에서 장학금을 딱 한 번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외국인이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기가 어렵지만, 장학금을 받는다고 해서 별로 나아지는 것도 없다. 생활에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장학금을 받으면 학비는 되는데, 생활비가 안되니 생활을 할려고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고 그러다보니까 공부는 잘 안되고 그래서 학점은 떨어지고 그리고 장학금은 짤리고…”

이제는 화제를 돌려, 한국 대학생들에 대해 몇 가지 묻기로 했다.

퍼 : 한국 대학생들에게 주된 관심은 뭔 거 같애요?

알 : 공부를 마치고 취직? 도서관에 가보면 공부는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교과서 공부요,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서 그러는 거 같아요.

퍼 : 그럼 방글라데시 젊은이들한테는 뭐가 제일 관심이 많아요?

알 : 우리 젊은이들한테도 취칙한다는 건데, 그것도 주로 세관쪽에요. 공항 세관. 거긴 뇌물을 많이 받을 수 있고. 그리고 공무원이 젤 많이 되고 싶어해요. 왜냐면 뇌물을 젤 많이 받을 수 있으니까. 공식적인 월급만으로는 살기 어렵고, 모두들 비공식적으로 뇌물 주고 받고…

퍼 : 뇌물이라는 점은 어느 나라나 있는데, 그래도 외국에 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자기 나라에 대해 좋게 얘기 하려고 하지 않나요? (웃음)

알 : 그건 현실인데… 숨길 수도 없고 숨겨서도 안되죠. 그리고 한국에서는 부패가 더 심하니까. (웃음) 여기서는 얘기를 해도 되고, 미국 같은 데 가서는 이런 얘기 못하지만…

‘한국의 부패가 더 심하다’는 말이 객관적이냐 아니냐 하고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은 자기 나라의 부끄러운 부분을 자기 자신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외국인 앞에서는 선뜻 시인하고 싶지 않은 묘한 자존심이 순간적으로 발동한 것이겠다.

알 : 우리나라 정치인 부패는 한국과 비슷해요. 정치인들 부패가 가장 많고 다음이 공무원. 정치인들이 부패를 하니까 공무원들이 부패를 하게 되요. 예를 들면, 외국에서 원조가 들어 오면, 자기가 반 이상 먹어 버리고, 기업에 특혜를 주면서 리베이트 같은 것을 챙기는 거죠.

 

3. 익숙한 것과 낯선 것 – 차별과 편견의 벽

가난하고 우울한 조국을 뛰쳐나온, 감수성이 유달리 강한 한 젊은이가 몸으로 부딪쳐 가는 한국의 현실. 연수생에서 문학도에 이르기까지 그는 조금씩 자신의 길을 찾아가며 그런대로 이 땅에 정을 붙이고 살고 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그를, 그리고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퍼 : 98학번이라고 들었는데, 친한 사람들 많아요?

알 : 친한 사람은 있지만… 대개는 그냥 알고 지내는 정도죠.

퍼 : 술은 좀 마셔요? 한국에는 친한 친구면 보통 술친구라고 하잖아요?

알 : 술이라면… 종교적으로 안 마시는데 술자리에 가면 할 수 없이 맥주 한 잔 정도는 마실 때도 있어요. 상대방이 내가 술을 안 마시면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맥주 한 잔 정도는 마셔요. 술친구 같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많지 않은 이유가 그런 거예요. 한국 사람들이 술을 좋아하고 술자리 가면 친할 수 있다는 건 아는데, 술자리도 많으니까, 그런데 저는 술자리 잘 안 가고 술 안 마시니까 선배나 동료들이 부르지도 않고. 저도 가봤자 재미없어요. 술자리에서 어울리지를 못하고, 그러다 보니까 친한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게 한국 사람과 친하기 어려운 이유지요.

퍼 : 그럼, 한국의 술 자리 문화에 대해 별로 안 좋게 생각한다는 건가요?

알 : 물론 좋은 점도 있죠. 술 한 잔 마심으로써 서로 친해지고 자기가 평소에 못했던 얘기들을 하고 그럼으로써 용서하고 용서받고. 그게 젤 좋은 점이고. 나쁜 점은 술문화가 서양과 달라요. 서양사람들은 천천히 마시고 많이 안 마시고 취하지도 않고. 한국사람은 빨리빨리 많이 마시고 원샷하고 술잔 돌리고 그 소주 한 병을 십오 분이나 삼십 분에 다 마시고 취하고. 취하면 안 해야할 말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고..

그는 한국 사람들의 술주정에 대해 이미 불쾌한 경험을 가진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퍼 : 그런 사람 있었어요?

알 : 예, 있었어요. 제가 다니던 직장에서 술자리가 있었는데, 전 안 갔어요. 그런데 볼 일이 있어, 우연히 그 근처를 가다가 회사 사람 누군가가 저를 보고 와라, 술을 안마셔도 여기 앉아라, 그래서 앉았어요. 그 때 그 사람들이 술 취하고 회사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요. 그 중에 회사 일이었는데, 제가 어떤 일을, 제가 책임지고 다 했는데, 실무자는 저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 얘기를 꺼냈어요. 그 사람들 중에 하나가 “당신이 왜 그걸 사장한테 결재를 받고 했느냐?” “나는 그거 모른다 그에 대해서.” “이걸 지금 당신이 왜 피할려고 하냐. 당신이 해놓고 모른다 하느냐. 니가 한국사람 무시하나? 나는 지금 마흔 몇 살이다. 나는 니 나이 같은 딸이 하나 있다. 난 외국놈들이 싫다. 외국놈들한테 밟히는 거 싫다.”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구요. 저는 사실 평소에 화 안내고 얌전한데, 화나면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제 자신도 모를 정도로 화를 내게 되는데, 그 때는 꾹 참고 있었어요. 상대편이 술을 마시고 취해 있는 상태였으니까요. 나중에 사장이 나보고 이해하라, 술자리였기 때문에 술 취했기 때문에 이해하라, 그래서 한 번 정도 이해하기로 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남에게는 전혀 낯선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게 익숙한 것이 남을 소외시키는 주된 요인이 될 수 있다. 한국의 술자리 문화는 그에게는 또 다른 의미에서 차별과 편견을 심화시키는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한국 대학생들의 술문화가 좀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방글라데시 젊은이들은 어떤지 궁금했다.

퍼 : 방글라데시 학생들도 술 많이 마십니까?

알 : 법적으로 금지되진 않았으나 종교적으로 금지되어 있고, 사회적으로 안 좋게 보는 분위기니까 거의 안 마시죠.

방글라데시의 종교를 보면, 이슬람교도가 87%, 힌두교도 12%로 사회적인 분위기 전체가 알콜에 대해 몹시 엄격함을 알 수 있다.

퍼 : 그럼, 젊은 사람들이 모이면 뭐하고 놀아요?

알 : 모이면 이야기하고 게임이나 스포츠 하고 식당 같은데 가서 음식 먹거나 하죠. 술은 없어요. 공원 가서 만나서 얘기하고 땅콩 같은 거 먹고. 우리나라에서는 공원에서 꼭 땅콩 먹어요. 공원에서 차도 마시고. 그렇지만 술 없는 거 아니예요. 몰래 팔고 몰래 마셔요. 술을 마시는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지만 술보다도 더 위험한 마약 같은 거 더 잘 팔리고. 주로 그 상대자는 젊은 사람들,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죠.

퍼 : 마약은 불법 아닌가요?

알 : 마약은 더 불법이예요. 환각제? 마약은 아니지만 환각 성분이 있는 것. 그거 인도에서 오는 데, 그것은 원래 감기 몸살약이예요. 박카스하고 똑같아요. 생긴 것도 박카스 병이에요. 그것을 일주일 정도에 한 병 먹어야 하는데 한꺼번에 먹으면 자기가 뭐, 왕이 됐다 그래요. 그거를 애들이 많이 마셔요. 그건 술이 아니고. 마약처럼, 한 번 마시면 계속 마시게 되요.

퍼 : 그거 먹으면 안 잡힙니까?

알 : 먹으면 안 잡히는데, 파는 사람이 잡히고, 먹고 누가 뭐 해를 끼치고 그런 경우에 잡혀가요

잠깐 얘기가 옆길로 샜다. 다시 그의 한국 생활에 대해 물었다.

퍼 : 한국에서의 생활은 어떻게 해요?

알 : 생활이라고 하니까 딱 꼬집어 말하면, 너무 비싸요. 비싼 나라예요. 물론 GNP 대비하면 괜찮은 편이지만. 근데 한국인들도 비싸다고 그래요. 서민들에게. 가진 자가 자꾸 배부르게 되고 없는 자는 더 가난하게 되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죠. IMF도 술 집 같은 게 잘 되더라고요. 제가 한 번은 새벽에 신촌에 갈 일이 있었는데, 밤새도록 젊은이들이 술 먹고 놀면서 돈을 잘 쓰더라고요. 그 때는 IMF 막 터져서 돈이 없다고 전국민이 금모으기를 하는 시점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사람들이 상층인가봐, 그랬어요.

퍼 : 그밖에는?

알 : 불편해요. 종교 때문에 안 먹는 음식이 많아서요. 물론 좋아하는 한국 음식도 있지요. 김치와 불고기… 어쨋든 돼지고기가 젤 문제예요. 돼지고기로 만든 햄 같은 거. 한국음식은 거의 돼지 고기나 햄 같은 거 들어가고 하기 때문에 좀 식생활이 불편해요. 학교에서 밥 먹을 때에도 일일이 물어보죠. 이거 돼지고기 들었느냐, 아니냐. 바깥에서도 물어보구요.

퍼 : 그럼 식당 주인들이 이상하게 생각지 않나요?

알 : 물어봐요. 왜 그러냐고. 그러면 거의 사실대로 얘기해요.

 

그에게 음식은 종교적인 측면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인 이유로 돼지고기를 안 먹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도 ‘못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종교는 한 민족의 식생활을 포함한 문화 전반의 특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점이다.

퍼 : 종교적인 생활은 어떻게?

알 : 여기서 하려고만 하면 모든 것 할 수 있어요.

퍼 : 예를 들면, 하루에 세 번씩 꼭꼭 기도하는 거?

알 : 하루에 다섯 번이죠, 정식은. 아침은 새벽 5시 반, 오전엔 12시 이후. 그 담에 네 시, 다섯 시, 그리고 자기 전에 또 한 번. 금요일 정오 예배는 꼭 성원(聖院)에서 해야 하구요. 여기서 학교 다닐 때 문제는, 학교에 예배 볼 장소가 없다는 건데요. 지금 학교에서 외국인 동아리를 만들어서 얘기를 하고는 있는데도 학교측에서는 안 해주고 있어요. 전에는 장소가 있었는데…

퍼 : 서울대에 회교 학생이 얼마 정도 되는데요?

알 : 한 50명 정도? 주로 말레이지아, 터어키 학생들이죠. 그런데 50명 정도면 작더라도 방 하나는 얻을 수 있는데 학교에서 안 주고 있어요. 전에는 국제교류센터에 모임 장소가 있었는데… 몇 년 전에 짤렸어요. 어느 날 가보니까 문이 닫혔어요. 회의실로 바뀌었더라구요. 모르겠어요. 서울대에 무슨 회의가 많길래, 회의실이 그렇게 많아야 하는지. 회교 학생들이 카펫 같은 것으로 깔고 좀 꾸며 예배실로 썼던 곳인데. 그런데 폐지되니까 학교에서 예배 보는 사람들이 없어요. 집에 오면 볼 수 있지만 시간이 안 맞고…

서울대가 왜, 회교 학생들에게 방을 내주지 않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너무나 이질적인(?) 종교에 대한 거부감은 아닌지…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회교에 대한 편견일 수도 있다. 2년 전인가, 남산에 있는 이슬람 성원을 우연히 들렀다, 경건하게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엄숙하면서 그 이국적인 풍경 알에서 왠지 도취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었다.

알 : 그렇다고 그 다섯 번의 기도시간을 반드시 다 지켜야 한다, 그런 건 아니예요. 이슬람교를 잘 모르면 너무 엄격하고 융통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상당히 융통성이 있어요.

‘융통성’ 얘기를 하면서 그는 이슬람교에서의 여성문제를 거론하였다. 이슬람교가 여성을 억압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하였다. 이슬람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이슬람교를 자주 비판하기 때문인 듯했다.

알 : 나 시간 있는데, 기도할 장소 있는데, 기도 안 했다, 그러면 안 되죠. 그러나 여행자는 특혜가, 그러니까 융통성이 있어요. 여행을 할 때는 횟수가 적어도 되고, 두세 번에 할 것을 한 번에 몰아서 할 수 있고, 그거를 짧게 할 수도 있고…

퍼 : 그럼, 알람은 일종의 여행자인가요?

알 : 여행은 시간이 정해져 있어요. 3일 정도가 여행이예요. 전 여행자 아니예요.

퍼 : 그럼 다 지켜야 하나요?

알 : 다 지켜야 하는데, 다 지켜야 하는 사람들 중에도 경우에 따라, 예배 볼 자리가 없다거나 어떤 경우에 못 봤다 그러면 집에 와서 한 번에 몰아서 봐야 해요. 물론 지키면 더 좋죠.

퍼 : 남산 이슬람 성원엔 자주 가요?

알 : 하루 다섯 번 예배 보는 걸 거기서 보면 좋아요. 이슬람에선 더 먼 곳에 있는 사원에 갈수록, 차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걸어서 가면, 더 복을 받아요. 내 마음이 좋아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렇게 멀리 갔다 그렇게 생각되는 거죠. 그래서 근처에 사원이 있어도 더 멀리 가면 좋아요. 걸어서. 할 수 없으면 집에서 봐도 좋아요. 그렇지만 금요일 점심 때 보는 예배는 사원에서만 볼 수 있고 집에서는 볼 수 없어요. 공동예배라고 해서.

퍼 : 지금 한국에서는 이슬람 사원이 몇 개나 되나요?

알 : 전국에 여섯 군데 있어요. 서울에는 이태원, 한남동 밖에 없고. 성수동 쪽에는 노동자들이 이태원까지 가기 너무 멀어서 자기네들이 돈을 모아서 방을 얻었대요.

퍼 : 거기는 주로 어느 나라 사람들이 오나요?

알 : 주로 우리 방글라데시 사람하고 파키스탄, 말레이지아 사람. 한국사람들도 와요.

퍼 : 거기 가면 예배 드리고 다른 행사는 없어요?
알 : 행사는 일년에 몇 번, 정해진 날에 있는데. 매일 행사는 예배 드리는 거 밖에 없어요. 예배 뒤에는 시간 있는 사람들이 앉아서 기도하고. 기도는 예배하고 달라요. 주로 코란 낭송하고 서로서로 들려주고. 하비시라고, 모하메드가 해냈던 일을 서로 읽어주며,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며 격려하죠.

외국에 있는 한인교회의 한국인들처럼, 이 땅에 온 많은 이슬람권 사람들에게도 일 주일에 한 번 있는 정기 예배모임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낯선 나라에서 느끼는 오로움을 서로 달래며 격려하는 한편으로, 이국 생활을 해나가는 데 필요한 실질적인 정보들을 교환하는 자리이기도 할 것이다.

퍼 : 한국사람들은 흔히, 힘센 나라 사람들한테는 잘하고 가난하고 약한 듯한 나라 사람들한테는 잘 못한다, 그런 비판들이 있는데?

알 : 그런 거 느꼈죠. 그건 어느 나라나 다 있는 것 같아요. 다만 여기가 좀 더 심한 거 같고. 물론 제 앞에서 미국인과 나한테 어떻게 다르게 하는지, 시험해 본 적은 없는데, 주로 보면, 방글라데시나 파키스탄 같은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며칠 전에도, 그 사람이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쁜 말은 안 했어요. 제가 버스 타고 가고 있는데, 바로 옆에 어떤 아주머니가 애를 데리고 탔기에 자리를 양보하고 섰어요. 어떤 사람이 술을 마셨는데, 영어는 잘 못하고, 저한테 콩글리시 같은 거 말하려고 했어요. “일 없어, 일 없어?” 그 때 내가 일이 없어 지금 떠돌아다니는 것 같아서 일이 없느냐고 그렇게 말한 거 같아요. 저를 노동자처럼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하고 얘기를 하면 얘기가 길어지고 난 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하나, 그래서 난 한국말 안하고 영어로 했어요. 영어로 하라고. 그러자 그 사람은 “한국말 못한다? 웨 아유 프롬, 칸츄리? 칸츄리?” 하면서 물었어요. 나는 방글라데시라고 하면, 이 사람이 나를 더 나쁘게 생각할까봐 거짓말을 했어요. 말레이지아에서 왔다. 그랬더니 이 사람들은 “오, 그래, 말레이지아, 옛날에 풋볼 잘했어. 풋볼, 알아?” 하지만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하고는 무시하고 피했어요.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은 나를 불법 체류자로 일한다, 이런 식으로 따지는 거 같아요.

남의 나라를 자기 나라로 둘러댈 정도로 그의 자의식은 뒤틀린 것일까, 아니면 그에 못지 않는 우리의 우월의식이 그에 앞서 뒤틀린 것일까.. 길에서 만나는 동남아시아 사람이면 누구든, 우리는 그를 다짜고짜 불법체류자로 인식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일방적인 동정의 대상으로 삼거나 요즘 같이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경쟁자로 인식하는 것은 아닌지…

알 : 그리고 시장 같은 데 가면 친절한 사람도 있고 불친절한 사람도 있어요. 제가 한 번은 시장에 갔는데, 한국사람이든 외국사람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저는 손님인데, 주인은 처음부터 제게 반말을 하는 거예요. 처음 보는 사람이면 누구든, 함부로 반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퍼 : 그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죠.

알 :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한테는 그 사람이 누구든 반말 안해요. 우리도 존대말 있는데 굉장히 엄해요. 옛날부터 내려오는 건데. 상대방이 말을 낮추라고 하면, 그제서야 말을 낮춰요. 그런데 시장에 가면, 처음부터 반말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저는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하는데 “천원이야, 천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만인 그 자리에 제가 아니라, 한국 사람이 갔더라면 “천원입니다”, 아니면 “천원이예요” 그랬을텐데.

퍼 : 굉장히 배타적인 면이 있지요, 한국 사람들이?

알 : 다는 아니지만, 일부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 일부 때문에 전 국민이 욕을 먹게 되잖아요. 저야 물론 여기서 몇 년 있었고, 또 국문학을 공부 하니까, 이 문화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는 사람, 한국에서 얼마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이거를 이해를 못할 거예요. 그러면 한국 사람은 다 그렇다,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 나라에 가서 한국에 갔었는데 한국 사람들 다 그렇다, 그렇게 얘기하기 쉽죠. 올해를 뭐, ‘한국 방문의 해’라고 선전하고, 2002년에는 월드컵이 열리텐데, 이거 말고도, 경기장 문화, 화장실 문화, 외국인 접하는 문화도 있는데, 그런 거를 잘 고치지 않으면 이거는 최악일 수도 있고, 오히려 욕 먹을 수도 있죠.

한국사람들의 편협하고 배타적인 모습에 대해 생각보다 그는 강경하게 말했다. 그 점을 그도 인식했던지, “제가 여태까지 너무 나쁘게만 말했나요? 친절한 사람들도 굉장히 많이 만났어요. 지금도 그런 사람들 만나고…” 하면서 미안해했다. 그의 순진한 면이다.
얼마 전, 그는 지난 1년 동안 일한 회사를 그만 두려고 하자 사장으로부터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장은 자신에게 부정한 방법으로 일할 것을 강요하며, 이중 장부는 기본이고, 거짓말을 하도록 시키고 해서 도저히 그 직장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사장은 알럼이 유학비자로 취업을 했기 때문에 당국에 고발해서 가진 돈도 다 빼앗고 강제로 출국시켜 버리겠다고 을렀다는 것이다. 그가 처음 그 회사에 들어갈 때, 그는 회사에 5년 동안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고 중간에 그만 두면 회사에 2억 5천만원을 물어 주기로 하는 근로계약서를 억지로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한 근로계약서 자체가 위법인데, 더구나 터무니 없는 조건으로 계약을 하자고 하니, 그도 당할 수만은 없어, 서명란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Disagree’라고 영어로 서명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장은 무식하게 눈치도 못채고 그냥 넘어 갔는데, 이번에 그 계약서를 내밀면서 그런 협박을 했던 것이다.

알 : 사업에서는 양심적으로 해야하는 데 거기서는 남을 속이고 그러니까. 그 사장은 “이제 일년이나 되었는데, 왜 나를 아직 모르냐, 도둑질을 해도 손발을 맞추어야 하는데, 네가 왜 아직 나하고 박자를 못맞추느냐?” 그러고 해요. 한두 번은 거짓말을 할 수 있어도, 숱한 거짓말로는 더 이상 지탱 못하겠더라구요.”

4. 알람의 이중생활

 

올해로 알람이 한국에 온 지, 7년째가 된다. 이제 한국의 쓴 맛과 단 맛을 어느 정도 알고, 싫증도 날만 한데, 엉뚱하게도 그가 자신이 한국에 ‘귀화’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질문을 던진다.

 

퍼 : 귀화라구요? 이유가 있나요?

알 : 귀화하게 되면 비자 문제가 해결되구요. 공부나 사업이나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이 젤 좋죠. 학생 신분으로 있으면 사업을 못해요. 귀화하면 일단 더 편리해지니까.

퍼 : 한국에서 귀화하지 않고는 비자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없나?

알 : 없어요. 귀화 밖에는 없어요.

그가 말하는 ‘편리함’이란, 무엇일까?

퍼 : 그럼, 편리함 때문에 귀화한다는 건가요?

알 : 그렇지는 않죠. 그만큼 한국에 애정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애정이 없이, 단순히 사업만을 위해, 귀화할 수는 없잖아요. 여기 제가 만났던 사람 몇 명만 빼고는 나머지는 다 좋은 사람이었고, 여기서는 뭐, 생활비가 좀 많이 들더라도, 우리나라에 비교하면, 편리한 부분이 좀 많아요. 물론 요즘 한국에는 외국으로 이민 가는 경우가 좀 많은데, 제가 외국인으로서 여기에 있기에는 편리해요. 정치환경이 그리 나쁘지 않아요. 우리나라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게 되면 그 분야만 파업을 해야 하는데, 예를 들면, 대우사태로 일단은 대우에서만 파업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만약에 국철 노동자들이 파업한다고 하면, 그들만 파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파업을 해서 그 날은 전국이 마비되는 거예요. 출근버스나 교통 끊어지고, 사무실, 은행, 가게 문 못 열고.. 그 날은 전국민이 집에 앉아 있어야 해요. 아무 일도 못해요. 그러면 외국과 거래가 안되요. 만일, 미국과 거래를 한다, 그런데 오늘 물건을 수출해야 하는데, 파업 때문에 수출을 못했어요. 그러면, 국가는 손해를 보는 거예요.

그 편리함이란, 어쩌면 기업가의 입장에서 고려되는 그 무엇이 아닐까? 물론, 그 노동자들의 파업이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한 것보다는 여.야정권 다툼에 이용되는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파업 때문에 수출을 못하고 국가가 손해를 본다’는 식의 공식은 어딘가 모르게 한국의 군사 독재자와 자본가들이 파업을 규정하던 논리와 닮은 듯했다.
사실 그는 스스로를 노동자와는 구별하고자 하는 의식이 없지 않았다. 그는 이주노동자들, 예를 들어, 같은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해 그다지 잘 알고 있지도 않고, 별다른 관심도 갖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그는 ‘노동자’를 단순히 남의 밑에서 ‘부림을 받는 사람’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듯 하였다. 그래선지 그는 자신이 독립된 나라에서 태어났는데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고 해서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겉으로 말하는 것과는 달리, 적지 않은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알 : 저는 개인적으로는 나쁜 점일 수도 있지만, 일을, 신분을 엄격히 따져요. 누가 어떤 일을 하는지, 누가 노동잔지, 누가 사무실에서 앉아서 일을 하고 누가 장관이 되어 일이 있고, 그 일을 엄격하게 따져요. 나는 학생신분인데, 노동자라고 그러면 화가 나죠. 기분이 나빠요.

앞에서 말했던, 알람이 버스 안에서 만났던 취객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일 없어?” 하는 취객의 말이 그는 영 기분이 언짢았던가 보다.

퍼 : 아까, 방글라데시의 정치 또는 노동현실에 대해 잠깐 얘기를 했는데, 한국 정치에 관심 있는지요?

알 : 예. 제가 티비를 보면 주로 뉴스를 많이 봐요. 그런데 제가 볼 때, (한국의) 정치는 아주 ‘개판’이예요. (웃음)

퍼 : 어떤 거요? 알람이 말하는 한국 정치인들의 부패는?

알 : 재벌들한테들에게 잘 해주는 거. 규칙에 맞게, 법적으로 잘해주면 되는데, 불법적으로 그걸 해준다든지 하는 거요. 또 하나는 당선 되기 전에 국민들에게 많은 약속해 놓고 당선되면 국민들에게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정치인들은 여당하고 야당이 있지만, 실지로는 다 같아요.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은 국민들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것 같아요. 우리 나라에 그런 말 있어요. “마늘이 마늘 뿌리와 같다.”

퍼 : 귀화한다고 하면 고향에서 반대하지 않아요? 한국 같으면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그런지, 외국 가서 살 수는 있지만, 예를 들어, 미국 시민이 될 수는 있어도 국적을 바꾼다는 것은 쉽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알 : 물론, 부모님들도 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에는 반대하죠. 근데 몇 년 살다가 오겠다, 그러면 괜찮은 거죠.

퍼 : 그럼, 영구 귀화는 아닌가요?

알 : 그렇죠. 우리나라는 복수국적이라, 한국 국적과 함께 방글라데시 국적을 가질 수 있어요. 다. 다만 귀화하게 되면, 17년인가, 그 안에 방글라데시 국적을 포기할지 말지를 결정해야죠.

퍼 : 귀화하게 되면, 한국 여자와 결혼할 생각은 있어요?

알 : 저는 방글라데시 여자와만 결혼을 해야 한다, 그런 것은 없어요. 마음에 들기만 하면 어디 사람이든지 괜찮다고 생각하죠. 물론 집에서는 오로지 방글라데시 여자만 된다 그러죠. 그런데  아무리 사랑에 빠져서 한국 여자랑 결혼하게 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문화 때문에 불편할지도 모르겠어요.

퍼 : 이를테면, 종교 때문에?

알 : 그 여자가 이슬람교로 개종한다면, 그 문제는 반 이상 해결되죠. 종교의식과 음식 때문에 불편한 점은 반 이상 해결되요. 그러나 그 나머지 반은 해결 안 되요.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해도, 그 사람이 어릴 때부터 받아 왔던 여러 가지 교육이나 습관… 그거는 없어지지 않잖아요?

유난히 수줍음이 많은 그도 한 번은 한국 여자를 짝사랑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전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여학생이 그는 썩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좋아한다는 말도 한 마디 못했는데, 여자는 복학한다고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때문에 그는 너무나 슬퍼서 밥도 못 먹고 그만 드러눕고 말았다. 이를 보다 못한 친구가 그 대신 여자에게 알람의 사랑 고백을 전해서, 간신히 둘은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여자는 애인은 커녕, 좋은 친구로라도 지낼 수 없냐는 알람의 말에, 불가능한 일이라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연락처도 주지 않고 가버렸다고 한다. 그 아픈 기억을 알람은 사뭇 비통하게, 그러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떠올렸다.

퍼 : 결혼 계획은 없어요?

알 :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결혼을 해야하는데, 더 나이가 들면, 한국이든 우리나라든 결혼하기가 곤란하죠. 아니, 곤란하다기보다는 불리한 점이 많죠. 요즘 공부라든지 여러 가지에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머리카락이 좀 빠져서 대머리가 되지 않을까, 대머리가 되면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어요? 걱정이예요. (웃음)

퍼 : 방글라데시는 대개 몇 살 때 결혼하죠?

알 : 여자는 한 열 여섯 살에서 스물 대여섯 살에서 하고. 그러니까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어릴 때, 일찍 결혼하고, 경제적 능력 있으면 좀 늦게 하고. 또 대학 가면 더 늦게 하고. 남자는 스물 대여섯에서 일여덟까지. 제 아버지도 서른 살때 결혼 하셨어요. 서른 전에는 거의 해요.

퍼 : 알람은, 이제 노총각이네요?

알 : 노총각인 셈이죠. (웃음) 며칠 전에도 아버지가 결혼하라고 편지를 했어요. 집에서는 빨리 해라, 하는데… 그런데 나 지금 아버지 돈으로 결혼할 수도 없고, 자존심 있기 때문에. 그래서 경제력이 있을 때까지 좀 기다려야 되요. 며칠 전에 동생한테 편지가 왔어요. 동생 말로는, 네 군데 여자를 보았는데, 그 쪽에서는 형이 오면 형을 보고 결정을 하겠다는 거예요. 남자를 못 보고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난 동생에게 농담으로, 남자 안 보고 그냥 딸 줄 수는 없느냐고 물어보라고 했죠. 그랬더니, 동생이 형 같으면 여동생을 주겠냐, 그러잖아요… 맞는 말이죠. 근데 난 돈이 없는데 어쩌겠어요?

 

퍼 : 방글라데시에서는 결혼할 때 지참금이 필요한가요? 남자가?

알 : 양쪽에서 필요하지만 남자가 더 많이 필요해요. 일단 대가족이니까 집은 따로 구할 필요가 없고, 남자 쪽으로 여자가 오니까. 근데 결혼식에 돈이 많이 필요해요. 손님 접대하는 데. 하객이 200명 이상 와요. 한국하고는 달라요. 한국은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양쪽이 모이잖아요. 우리는 첫날은 남자 쪽에서 하객들이 여자 쪽으로 가고 두 번째 날은 여자 쪽에서 남자 쪽으로 가고, 세 번째 날은 남자 쪽이 다시 여자 쪽으로 가고.

퍼 : 그래서 사흘을 해요?

알 : 그렇죠. 한 사흘 정도. 결혼식은 사흘 정도 아주 재밌죠.

퍼 : 그럼,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자기가 벌어서 해요?

알 : 그렇죠. 그런데 요즘은 실직자들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 돈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퍼 : 그 경우도 대가족이면,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많은 돈 줄 수 있나요?

알 : 좀 어렵더라도 줄 수 밖에 없어요.

퍼 : 그럼 알람도 달라고 하면 주겠네요?

알 : 달라고 하면 주지만, 자존심도 있고, 지금은 그래서는 안된다 생각해요. 제가 아버지에게 돈을 받는다, 그러면 제 아내가 항상 자기가 심리적으로 나는 남편의 돈 아니고, 시아버지든 누구든 남의 돈으로 산다, 항상 자기를 낮추고 살게 되니까..

퍼 : 사기가 꺽여서?

알 : 그렇죠. 만약 결혼한 제 동생이, 와이프도 임신 했다고 들었어요, 돈을 버는데 그럴 경우에는 동서와의 관계에서 아내는 항상 자기가 약하다고 생각할 거 아니예요? 자기 남편이 돈 못번다고 무시 당할 수도 있고?

그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것 같았다. 그는 결혼할 아내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꼭 돈을 벌어서 결혼할 생각이라고 했다. 어쨋거나 이제 그는 귀화를 생각할 만큼 한국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그는 TV드라마도 좋아한다고 했다.

알 : 영화는 제가 원래 잘 안 봐요. 하지만, TV는 많이 봐요. 집에서. 요즘은 시간 때문에 연속적으로 보는 드라마는 없고. 즐겨보는 거는 가족들이 나오는 거 좋아하구요. 얼마 전에 끝났지만, <덕이>는 재미있었어요. 우리나라하고 좀 비슷해서요. 역사극은 처음에는 안 좋았는데, 며칠 보게 되면 호기심이 생겨서 재미있어져요.

 

퍼 : TV 드라마 <덕이>가 방글라데시와 비슷하다고 했는데… 정서적인 면이 한국사람들과 비슷한가요? 어때요?

알 :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은 더 풍부한 것 같아요. 우리나라도 점점 상태가 좀 나빠지고는 있지만… 사람들 사이의 인정은 경제적으로 발전할수록 점점 사라지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바빠지고 남들 배려하지 않고… 그건 현실이니까, 그럴 수 밖에 없고. 그러나 아직 방글라데시는 아직 그런 정도는 아니예요.

알 :그래도 정서적인 면에서 방글라데시는 한국과 비슷한 점이 있어요. 예를 들어, 손님 대접하는 게 그런데요. 대접은 우리나라가 한국보다 더 잘 하는 거 같아요. 어떤 때는 그거 부담스럽기도 하고. 어떤 집에 놀러 갔다, 식사 시간이 되면 상이 나오는데, 많이 나오고… 원래는 먹을 만큼 먹어야 하는데 집주인이 자꾸 자기가 떠 주면서 먹어라, 더 먹어라 그러고. 주인 쪽에서는 그렇게 해야 자기가 맘이 편하죠.

예전에는 한국에서도 그랬다. 밥 때에 오는 손님은 결코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손님이 오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가난한 나라의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2시간 가량 얘기를 했더니 서서히 머리가 아프다. 이제 얘기를 끝내야 할 때다. 그의 눈에 비치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알 : 교통문화를 먼저 지적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지하철 타게 되면 거의 매일 보는데, 그 중에는 젊은이들보다 나이드신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은데, 내리는 사람 내리기도 전에 사람을 막 밀면서 들어가요. 앉아야 되는데 아마 젊은이들이 양보 안 할까봐 그러는 건지.. 버스를 탈 때도 마찬가지예요. 질서의식이 부족하다는 거죠. 하긴 뭐, 우리나라는 더 심하죠. 아예 줄도 서지 않으니까요.

퍼 : 방글라데시에서는 어른에 대해서 효도라고 해야 하나, 공경하나요?

알 : 한국과 비슷해요. 어른이 왔으면 자리를 양보해 주고. 이슬람에서는 어른을 존경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나도 존경한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사람을 나도 사랑한다. 뭐, 그런 말이 있어요.

퍼 : 또 다른 것은? 교통 말고?

알 : 한국 사람들이 먼 미래를 내다보고 계획을 짜든지 해야하는데, 대충대충 일을 해치우는 것 같아요. 정부대책 자주 바뀌고… 얼마 전에 신문에서 언뜻 봤는데… 한국이 10년 내에 한국 축구를 선진국 수준으로 올린다, 그러는데, 일본은 50년 아니고, 100년이면 올릴 수 있다, 그랬어요. 일본은 그거 현실적인 말이잖아요. 그런데 한국은 아주 성급하고 모든 것을 빨리빨리 할려고 해요. 근데 100년을 계획해서 일을 하면 그건 오래 갈  것 같은데… 아파트를 짓는다, 예를 들면, 오늘은 여기 아무 것도 없었는데, 내일 가보니까 아파트가 생겨 버려요. 우리나라나 인도에서 보면, 그거 일 년 걸려요. 천천히 해야 건물 같은 거 딱짝해지고 그러는데.. 그게아니고, 하루 아침에 10층 15층 해 버리고, 그리고 몇 달 후에 보면 부실공사 신문에 나고 금가고 물 새고 주민 사람들이 불안해지고 그런 일들이 많아져요. 전에 성수 대굔가, 그런 사건이 있었고.

알 : 그리고 또 하나는 국제화도 해야할 것 같아요. 말로만 아니고. 외국인에 대한 정책, 학생에 대한 정책, 전에도 얘기를 했지만. 한국에서는 외국학생이 지금 취업 못하게 되어 있잖아요. 한국 학생이 미국가면 능력이 없는 사람만 집에서 돈 받고 공부 하지만, 능력 있는 사람은 아르바이트 하고 학비하고 다 마련해요. 그처럼 한국에서도 외국 학생들에게도 아르바이트 할 수 있게 해야하는데…

퍼 : 어쨋든 알람은 한국이나 한국 사람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데, 방글라데시와 한국 사이에 연결하는,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알 : 그런 부분에서 만약 제가 박사까지 따서 공부 좀 제대로 잘하고 남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배울 수 있으면 그럴 수도 있죠. 우리나라에 가서 교수 생활할 수 있고. 우리나라는 아직 한국학과가 없으나 생길 지도 모르고, 딴 나라에서도 그거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건 보장되지 않아서 당장의 필요를 위해 사업을 하는 것이고. 방글라데시 문학을 한국에 소개하거나 한국문학을 방글라데시에 소개하거나, 그런 일은 하고 싶어요. 비교 문학 같은 것도요. 공부하는 일만 해결되면 지금 하는 사업 같은 거는 딴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구요. 

샴술 알람! 언어와 문학을 좋아한다는, 예민한 감수성과 날카로운 자존심을 지닌 사람. 그에게 ‘왜, 조국 방글라데시의 어려운 현실을 내버려두고 뛰쳐 나왔느냐’고 힐난하기는 어렵다. 그 또하 쉽지 않은 삶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가 귀화를 생각하게 된 것도, 한국에 대한 애정보다는 조국의 ‘불편한 환경’이 더 괴로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순간에 ‘애국’이란 말은 그다지 쓸모있는 단어가 아니다. 산업연수생-이주노동자에서 한국의 국립대 유학생이 된 알람, 그는 이제 더 큰 가능성과 기회를 가졌고 자신이 꿈꾸는 세계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과연 그는 어떤 모습의 한국인이 될까? 그리고 그의 조국에서 온 다른 이주노동자들은 알람의 말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할까?

알 : 저는 이제 지금은 국제화 시대니까. 우리나라에 살아야한다, 또는 한국에 살아야 한다, 그런 것은 없어요. 제가 필요한 나라, 제가 돈을 벌고 정당하게, 여건도 좋고 그런 나라에서 그 나라면 어디든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