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즈스탄에서 온 자밀랴

자밀랴 마마뜨싸예바(Zamilya Mamatsayeva)는 키르기즈스탄에서 온 스물 여덟살의 여자 유학생이다. 한국 정부(국제교육진흥원) 초청 유학생으로 서울에 온 그녀는 현재 서울대 국제지역원에서 3학기째 '국제협력'을 공부하고 있다. 자밀랴가 한국에 사는 건 이번이 3번째다. 그녀는 키르기즈스탄의 국립 비쉬케크대학 동양학부를 다니다가 경희대와 연세대에 '한국어 연수'를 받으러 서울에 온 적이 있다.

1. 나, 전생에 한국인이었을 거야

자밀랴 마마뜨싸예바(Zamilya Mamatsayeva)는 키르기즈스탄에서 온 스물 여덟살의 여자 유학생이다. 한국 정부(국제교육진흥원) 초청 유학생으로 서울에 온 그녀는 현재 서울대 국제지역원에서 3학기째 ‘국제협력’을 공부하고 있다. 자밀랴가 한국에 사는 건 이번이 3번째다. 그녀는 키르기즈스탄의 국립 비쉬케크대학 동양학부를 다니다가 경희대와 연세대에 ‘한국어 연수’를 받으러 서울에 온 적이 있다.
자밀랴와 함께 대학원을 다니는 한국인 학생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인터뷰 자리에 동석했다. 혹 ‘통역’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해서였다. 그런데, 사실 통역은 거의 필요가 없었다. 자밀랴는 한국어에 그야말로 “능통”했기 때문이다.
자밀랴는 현재 서울대 근처 낙성대의 한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고시원에 살고 계신가요?
> 답골(탑골)! 고시원하고 미니원룸하고 같이 하는데… 

고시원에 살기 불편하지 않나요? 되게 좁을 텐데…
> 거기 오랫동안 안 있으려고요. 거기 오래 있으면 진짜 묘지 안에 있는 거 같더라구요.

그 이전엔요?
> 대학로에서 국제회관 기숙사에서 살았고, 자취도 했어요. 고시원이 좋아서 그런 건지 고시원하고 자취방이 거의 차이가 없어요.

 

멍게 먹는 키르기즈 아가씨

우리는 한 고기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했다. 자밀랴를 소개해 준 이로부터 그녀가 못 먹는 한국 음식이 없으며, 소주나 맥주도 곧잘 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자밀랴는 술을 좀 피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저께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렇다고 하며 웃었다. 인터뷰 자리에 온 대학원생도 같이 참석했던 자리였는데, 이 학생이 먼저 집에 가고 난 뒤에도 자밀랴는 또 다른 동료들과 차수를 변경하여, “멍게를 먹으러 갔다”며 자랑했다.

아니, 한국 사람들 중에도 멍게를 못 먹는 사람들이 있는데-
> 예, 들었어요. 저는 멍게 너무 좋아해요. 굴도 좋아하고…

어떤 외국인과의 대화에서도 먹거리는 가장 중요한 화제일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먹거리야말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매개이기 때문일 것이다.
“너, 그거 먹을 줄 아냐?”, “야, 너 이거 먹어봐라, 냄새는 이래도 맛보면 죽일 거다.”

우리는 ‘그들’에게 냄새나는 된장이나 마늘을 먹여야 하고, 우리도 물 건너 어디 가면 눈 딱 감고 거기 음식을 먹어야 한다. 물론 고추장 한 종지, 신라면 몇 개 싸 가는 건 애교로 봐줄 수 있다. 그러나 거부하면 안 된다. 제 코와 입에 거슬린다고 먹을 거나 마실 거를 무더기로 공수하는 짓 따위는 안 된다. 그건 용산에 있는 “주둔군” 같은 것들이나 하는 짓이다. 
자밀랴가 나고 자란 키르기즈스탄은 바다를 면하고 있지 않은 중앙아시아의 산악지대에 있는 나라이다. 키르기즈 사람의 주식은 양고기·쇠고기 등이며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돼지고기는 별로 먹지 않는다고 들었다. 이 내륙국 출신의 아가씨, 어떻게 멍게나 굴 같은 해산물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 “이론적으로는” 원래 알았어요. 또 우리나라에도 냉동된 거나 깡통에는 있어요. 처음에는 못 먹었지요. 근데 와서 실제로 먹어보니까 진짜 너무 시원한… 그런 맛이 나더라고요.

그렇지, 멍게·굴, 뒷맛 진짜 시원하다. 물론 싱싱한 거 먹을 때… 우리가 주문한 고기가 나왔다. 자밀랴는 차돌백이를 신기해했다.

> 야, 맛있는 거 많이 나왔다… 고기가 너무 얇아서 투명해 보여요. 이거 고기 자르는 거, 기계로 하지요?


그렇지요.


> 이거 고기 자르는 기계가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근데 이건 뭐죠?

 

그리고 자밀랴는 고기집에서 반찬으로 따라나오곤 하는 고추장 게장을 가리켰다. 게라 했더니,


> 와, 내가 좋아하는 께다.

 

하며, 그녀는 게다리를 들고 능숙한 한국인들이 하듯 살을 아주 잘 발라서 쏙쏙 빼 먹는다. 나만해도 손에 묻는 게 귀찮아서 그냥 대충 젓가락으로 먹고 마는데… 이건 한국사람이잖아?

한국 음식 중에 진짜 못 먹는 건 뭔가요?
> 호호호. 개고기, 짜장면! 짜장면 생긴 게 징그럽더라고요. 먹어는 봤는데요. 만들 때 너무 지저분한 것 같았어요. 만들 때 온갖 걸 다 넣는 거 같아요. 하하하. 루마니아에서 온 라르카라는 친구는 슈퍼에서 파는 즉석 짜장을 너무 좋아해요. 매일 그거 먹더라고요. 

쟈밀라 아닌 누구에게라도 개고기는 어떤 “한계”에 있는 먹거리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개고기”는 한국을 의미하는 한 상징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먹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는데. 쩝! 자장면에 관한 한, 그녀는 그 시커먼 색깔과 만드는 과정을 문제삼으며 좀 ‘약한 모습’을 보였다. 색깔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자밀랴는 아마 별로 깔끔하지 못한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을 먹어 보았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자밀랴는 된장·고추장은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키르기즈스탄에 사는 자기 친척들에게 된장과 고추장을 소개했을 정도로. 처음에 된장 끓이는 냄새에 코를 싸 쥐었던 키르기즈스탄의 친척들도 한 숟갈 떠먹어 본 뒤에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된장·고추장·게장·멍게……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자밀랴는 의외의 답을 말했다.

> 아마 “지난 번”에(약간 더듬대며) 내가 살았을 때… 아마 한국에 살았을 거예요. 

응? 지난 번? 지난 生! 우리는 곧 그 말의 뜻이 자밀랴 자기가 ‘전생에 한국인이었을 것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생에 자기가 한국인이었을 거라는 외국인. 그에게 한국에 대해 무엇을 물을 것인가?

자밀랴의 한국

자밀랴는 비쉬켁 대학 동양학부에서 한국어를 전공했다. 그녀가 그토록 한국어에 능통한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우리에게 소개해준 동료 학생은 부산 출신이었는데, 그와 친하게 지낸 탓인지 자밀랴는 경상도 사투리도 ‘잘’했다. 그 부산 친구가 “무거면서 이야기해라” 했더니 쟈밀라는 

> 그래, 묵자!


고 응수하여 좌중을 즐겁게 했다.
또 경어법을 구사하는 데 있어서도 거의 능란한 수준이었다. 동석한 동료학생들 중 나이가 자기와 비슷한 친구에게는 반말을, 나이가 많은 선배에게는 반말이 섞인 존댓말을, 그리고 초면인 나에게는 전적으로 존댓말을 썼다. 그리고 “제가, 그 때 한국에 처음 왔었다, 이거죠”와 같이 한 문장 안에서 높임말과 반말이 혼용되는 경우도 잘 구별해서 구사했다.

물론 그녀의 한국어에는 선천적인(?)·후천적인 한계도 있었다. 러시아어로 한 문자로 표기되는 [오]와 [어]음의 구별이 어렵고, 어두에서의 “ㅆ, ㅃ” 등의 발음이 어렵다고 했다. 또한 한국어를 배움에 있어서 한자(어) 때문에 많은 곤란이 있었다고 했다. 실제로 인터뷰 자리에서 공식수교(公式修交), 내외(內外), 타자(他者), 평판(評判) 등의 단어의 뜻은 따로 보충 설명해야 했다.

그럼에도 한국에 산 이력을 고려할 때 그녀는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는 것이 많았다. 비쉬켁 대학 동양학부의 커리큘럼과 교수진이 훌륭하거나 자밀랴가 성실한 학생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앞에서 그녀는 한국인들이 멍게나 굴 같은 것을 먹는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했는데, 이는 책이나 학부의 수업을 통해서 그러한 사실을 배웠다는 뜻이었다.

학부에서 한국(남한) 사람한테 배웠어요?
> 한국 사람한테도 배우고, 제가 있을 때는 북한사람한테도 배웠어요. 북한사람들이 문법을 아주 잘 이해하고 러시아말도 잘 하거든요. 그래서 한국사람보다 더 잘 가르치더라고요. 미안한 말이지만…… 하하하.

뭘 그런 걸 미안해할까? 이건 일종의 “오바”였는데 후술되지만, 자밀랴는 남북의 분단상황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이해가 깊었다.

처음에 어떻게 한국어를 전공하게 됐나요?
> 원래 법과를 들어가고 싶어서 서류를 다 준비하고, 법과 들어갈 시험도 다 준비를 했는데… 여기처럼이 아니고 전공에 대한 과목 시험만 보거든요. 근데, 내일 서류 지원을 해야 되는데 밤에 우리 외할아버지가 신문을 갖고 오시더니, “내일 동양학과 처음으로 열린다, 가볼래?” 하시길래, “음 신기하다, 가볼래!” 그랬어요. 우리 외할아버지는 역사학 박사인데 동양사를 하셨거든요. 동양학부에 중국어, 터키어, 페르시아어, 한국어 등등이 있었는데 한국어가 재밌을 거 같았어요.

한국어가, 왜요?
> 그게 아직도 미스테리예요. 호호호!

고등학교 다닐 때 한국에 대해 알았나요?
> 중학교 때부터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이 있었는데, 불교에 대한 자료를 보니까 한국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이전에 한국을 지도에서만 봤는데 이렇게 올 줄은 몰랐죠.

한국에 처음 와서 보고 가장 놀란 게 뭐지요?
> 거의 놀라지는 않았어요. 집안에서 그냥 다른 방으로 오는 것 같았어요.
근데 나중에는 재밌는 것들을 많이 봤어요. 그런 거는 너무 귀족적인 게 아니었어요. 한국은 인구가 더 많기 때문에 거리에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걸 보고 놀랐지요. 우리나라 거리에서는 퍼레이드나 데모가 아니면 사람들이 그렇게 모인 걸 못 보죠.

한국의 분단 상황에 대해 키르기즈스탄에 있을 때 많은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텐데 실제로 와서 보니 어땠나요?
> 그거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읽어 봤는데, 참 슬프구나,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직접 와서 보니 일상생활에서 그런 걸 느낄 기회는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잊어버리지요. 전쟁중이라는 상황을요… 여기 사는 사람들도 거의 신경 안 쓰는 것 같고요. 그래서 거의 없는 문제처럼 느껴지지만.

> 어떨 때는 느끼죠. 저번에 남한 사람이나 북한 사람들이 몇 십 년만에 가족들이 만나는 것을 보니까 가슴이 너무 아파서 텔레비를 못 보겠더라고요. 또 <쉬리>나 도 봤는데, 그걸 생각해보니… 같이 음악도 듣고 장난치고 놀고 하던 그 군인들이 거의 형제처럼 보였는데 순간에 나도 모르게 같은 피지만, 서로 총을 겨누고 어떻게 될 수 있다, 서로 죽이고 그런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게… 너무 아파서 울 수밖에 없더라고요. 

자밀랴 때문에 다시 의 장면들을 떠올려본다. 한국인이 아닌데, 영화에서와 같은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원래부터 또는 심정적으로 남북은 형제일 수 있지만, 현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현실은 사실 온통 공포다. 그래서 자밀랴가 잘 본 것처럼 한 순간 총을 꺼내어 상대방을 쏠 수 있다. 의 남북 병사들이 결국 서로 총알을 날린 건 공포 때문이었을 것이다. “잠입·수수”나 “고무·찬양” 금지 등의 법조항은 우리 상상력과 행위에 한계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한계선은 분단과 관련된 나쁜 경험들 때문에 확실해져 왔다. 우리는 머리 속에 그어져 있는 넘을 수 없는 굵은 금을 볼 때 공포를 느낀다. 머리가 복잡해지려 했다. 이런 생각들이 머리 속에 어지럽게 올라오는 걸 누르면서 질문했다.

그런 정도로 느꼈다면 거의 한국 사람인 건데요.
> 인간이라면 다들 알 거예요. 얼마나 아픈지… 

자밀랴는 너무 쉽게, 선선히 답했다. “다들 알 거예요. 얼마나 아픈지…”. 그 ‘아픔’이 앞서 말한 공포의 차원을 포함한 것인지 어떤지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여기서 세 가지가 추론된다. 세 가지 다 맞을 수도 있고 어느 하나만 맞을 수도 있다. 1) 남북의 분단과 대결이야말로 인간 보편의 심성을 거스르는 못된 일이다. 2) 는 남북 분단의 상황을 인류 보편의 비극으로 승화시킨 대단한 작품이다. 3) 는 분단 문제의 비극성을 낭만적이며 심경적인 차원에서 다룬 비현실적인 영화다.

2. 키르키즈스탄, 러시아 그리고 한국

낯선 땅, 키르기즈

인터뷰 자리에 가기 전에 키르기즈스탄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웹 서핑을 했다. 대부분의 독자들도 그러시리라 믿지만, 키르기즈스탄이라는 나라, 정말 생소하지 않은가! 그런데 웹에서 정말 이 나라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조차 찾기가 쉽기 않았다. Yahoo US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면적 19만 8500㎢. 인구 476만 1000명(1999). 인구밀도 24명/㎢(1999). 정식명칭은 키르기즈스탄 공화국(Republic of Kyrgyzstan)이다. 수도는 비슈케크이고 공용어로 키르기즈어를 사용하고 있다. 북쪽으로 카자흐스탄, 동, 남쪽으로 타지키스탄, 서쪽으로 우즈베키스탄에 접한다. 소비에트 투르키스탄의 일부였다가 독립국가로 주권을 선언했고, 독립국가연합국 중 하나이다…… (야후 백과사전)

결국 자밀랴의 고국에 대해서는 이런 백과사전적인 지식 외에는 별로 아는 게 없이 인터뷰 자리에 갈 수밖에 없었다. 키르기즈스탄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자밀랴에게 고백하고, 동시에 91-2년에 소련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중앙아시아의 신생 공화국들(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등)에 대해서 나 아닌 평범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거의 잘 모를 것이라 둘러대어 보았다. 자밀랴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이트들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 그렇죠.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이라 하면 좀 아는데, 정말 키르기즈스탄은 모르죠. 어떻게… 모욕 같애… 그 한 중간에 있는데… 뭐, 파키스탄? 그렇게 말하고… 호호호.

“-스탄”은 터키어로 누구누구네 땅이라는 뜻이라 한다. 키르기즈스탄은 키르기즈인의 땅, 카자흐스탄은 카자흐인 땅이다. 자밀랴가 나에게 되물었다. 우리는 잠시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역할을 바꿨다.  

> 키르기즈스탄에 대해서 어떤 게 제일 궁금하세요? 


이전에 사회주의국가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사회주의가 망하고 난 뒤의 사회변화가 가장 궁금하다고 했다.

>왜요?


그 때만 해도 한국의 젊은 사람들이 러시아에 관심이 많았지요…

 

> 그럼 이전에 우리나라에 가보고 싶었어요?


아뇨… 이전엔 키르기즈스탄이 있는 줄도 몰랐죠.

 

> 아, 그럼 소련에는 가보고 싶었어요?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가 소련 영화로는 처음 공식 개봉된 게 89년이었고, 그 때 일부러 여럿이 어울려 영화를 보러 간 적도 있다고 답했다.

 

> 요즘 한국은 소련(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점점 많이 줄어든 것 같아요. 

그렇다. 소련(러시아)에 대한 이전의 이념적이며 문화적인 면의 관심은 없어졌다. 대신 분노와 안타까움을 가끔 느끼게된다. 실상 자체야 내 눈으로 확인한 적이 없다. 하지만, 가끔 접할 수 있는 러시아의 정치-경제적 혼란상과 한국에 진출한 인터걸 등에 관한 보도는 단지 소련이라는 한 나라가 “망했다”는 의미만은 아닌 것으로 다가온다. 그 “망함”은 그 체제가 설사 혹자의 말처럼 변형된 국가자본주의체제에 불과했다고 해도,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이성과 진보의 이름으로 행해진 대실험의 실패를 말하기 때문이다.

망하고 난 뒷꼴도 그렇다. 실험이 실패하고 난 자리를 메운 것은 평화롭고 자연스러운 ‘이행’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만 이룰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진보를 다 무화한 채, 시간의 바퀴를 완전히 거꾸로 돌리는 듯한, 가장 극악한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을 연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바람이나 금강산 관광 같은 일이 유쾌하지 않은 것도 이런 문제와 관계 있다.

키르기즈의 러시아

그런데 왜 러시아 이야기냐고요? 키르기즈스탄이라는 나라가 러시아와 공유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문화-역사적 긴밀성 때문이겠는데, 우리가 파악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그러한 긴밀성이 자밀랴와 같은 키르기즈인의 귀속감에 문제를 이 글 전체의 뒷부분에 나온다. 

중앙아시아의 자치공화국들은 구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러시아어와 그 민족어를 함께 사용하는 이중언어정책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난 뒤에 불었던 민족주의 바람 탓에 키르기즈어만 가르쳤는데 작년에 다시 대통령령으로 러시아어를 공용어의 하나로 채택했다. 자밀랴는 자기 경험을 들려 주었는데 우리로서는 잘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 러시아어는 태어나면서부터 썼거든요. 그런데 어릴 때 러시아어를 많이 안 써다가 유치원에 갈 때쯤에는 잊어버리고 헷갈렸어요. 유치원에 갔더니 선생님들이 우리는 러시아 사람들이라서 러시아말을 못하면 러시아 다니기가 힘들다, 그래서 다시 러시아말을 좀 공부했지요.

사람들에 따라서 러시아말을 자주 사용하는 상황에 있지 않은 경우라면 러시아말을 잊어버리고 반대로 키르기즈어를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 잠꼬대는 어느 나라 말로 하죠?


> 러시아말일 거예요. 러시아말을 더 많이 하거든요. 어떤 때는 꿈에서 한국말도 해요. 하하하.

 

러시아 사람들을 키르기즈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지요?

 
> 그냥 한 가지의 민족이라 생각하고요, 옛날에 러시아와 강한 유대가 있어서 존경하기도 하고 좋아하고…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동유럽인들은 굉장히 러시아 사람들을 싫어하지 않나요?

 
> 독립되면서, 나타난 극단적인 민족(주의)적인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대로만 살야 한다고 주장해서,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죠. 그런데 대부분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에서도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독립 후 대통령이 된 카리모프가 우즈벡 민족주의를 강하게 표방하고 그것을 정치적 상징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뿐 아니라 실현가능성은 낮지만, 아랍 민족의 그것과 유사한 보다 큰 규모의 중앙아시아 민족주의를 꾀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말을 더 편하게 생각하고, 러시아 민족과 “하나의 민족”이라는 자밀랴의 정체성 의식은 키르기즈인으로서 보편적인 것인지 알 수 없다.

자밀랴 당신은 러시안입니까? 키르기즈입니까?


> 키르기즈지요.  

 

자밀랴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 혹 러시아에 속해 있으면서도 품기 쉬운 종족의식 같은 것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는데, 별로 심각할 게 없었던 것이다. 예컨대 퍼슨웹의 <위구르 족 인터뷰>를 보면, 그들은 중국 속에서 한족과 어울려 살면서도 한족에 대한 적개심과 강한 민족 정체성을 가진, 이른바 “내부의 외부”이다. 이런 “내부의 외부”는 세계의 국민국가(Nation State) 국경 속에 심각하게 많이 있고, 때로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스페인의 바스크 분리주의자, 캐나다의 퀴벡 자치주의자, 티벳족을 위시한 중국 내 일부 소수민족들, 영국과 아일랜드, 러시아와 체첸…
러시아와 키르기즈스탄 사이의 관계가 혹 그런 것과 유사성이 있는지를 묻고자 했던 건데, 적어도 자밀랴는 아닌가 보다. 그냥 편하게, “말은 그게 편하고 역사적 경험도 공유했지만, 나는 당연히 키르기즈인이다. 그러나 러시아도 좋다. 나름대로 훌륭하다… 이런 공존이 그냥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약간 우회해보자.

자밀랴는 고국에서 인종적으로 다수파에 속하는지요? 머리 색이나 눈 색깔이 주류에 속하는지? 자밀랴의 답은 이번에도 명쾌했다. 자밀랴는 서울에서 모스크바에 갔다가 비쉬케크(키르기즈스탄의 수도)에 간 한국인의 경험을 예로 들었다. 그 사람은 모스크바에 갔을 때 러시아 사람들을 보며 정말 외국에 왔구나고 느꼈는데, 그 사람이 키르기즈스탄에 내려서는 “오, 웬 한국 사람들이 나를 마중을 나왔네”라고 느낄 정도였다는 것이다. 키르기즈인의 다수는 인종적으로 용모가 한국 사람과 그만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 어떨 때는 내 아는 키르기즈 사람을 여기 한국에서 지나가다 봐요! 호호호. 키르기즈 말로 말 걸기도 했는데요.

그러나 정작 키르기즈 친구들은 자밀랴를 키르기즈인 같이 생기지 않았다고 놀린다고 한다. 그녀의 금발 머리는 염색한 거였다. 이런 이런! 원래는 까만 머리였다고. 별 생각 없이 자주 머리 색깔 바꾼다고.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자밀랴는 심각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독립하고 난 뒤에, 키르기즈스탄은 어떻게 변했을까?
화제를 다시 돌렸다.

 
> 많이 바뀌었어요. 이전에 키르기즈스탄이 어땠는지 아시면 한 눈에 그 변화가 어떤지 알 수 있을 텐데.

키르기즈스탄의 생활 수준은 어떤 편인가요? 한국이나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와 비교할 때…


 

 

> 한국과는 비교하기가 어렵지요. 전혀 다른 나라니까요. 소련 연방일 때는 그냥 그 수준과 같았던 것 같고, 독립하고 자본주의화되면서는 어려워졌는데 다른 중앙아시아 나라들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지요. 정치적으로 제일 상당히 스테이블(stable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하고 있고요.  그래서 우즈베키스탄은 좀 독재적인 면이 있는데, 독재주의? 투르크메니스탄이나 타지키스탄도 그렇고…

한국과의 비교 문제는 그야말로 우문현답이었던 것 같다. “비교하지 말라. 그런 <1인당 GNP 몇 불>식 사고로”라는 답이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어진 말은 중앙아시아의 공화국이 다 대통령제를 택하였지만, 대통령의 권한이 과해서 ‘독재’스러운 다른 나라에 비하면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즈스탄이 새 정치체제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국토의 90%가 산악지대인 키르기즈스탄은 비교적 자연이 풍요롭고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지만, 최근 많은 기업들이 생기면서 자연 오염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로 외국 자본이 들어와서 개발하고 있겠죠? 어떤 나라 자본이 주로…?

 
> 캐나다, 미국, 터키, 중국, 그리고 최근에 일본에서. 한국도 있지만, 거의 큰 기업은 없고 개인투자자들인 것 같아요.

중국과의 교역이 크게 늘고 있고, 중국재 소비재가 키르기즈스탄에 많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중국과 키르기즈스탄을 연결하는 도로를 삼성건설에서 만들고 있다고 한다.

한국과 키르기즈스탄, 짧은 만남

한국과 키르기즈스탄이 정식수교를 한 건 92년이다. 남북한과 동시에 수교했다. 그러나 아직 한국에 키르키스즈탄 대사관이 따로 없다. 카자흐스탄 대사관에서 카자흐스탄 대사가 키르기즈스탄 관련 업무를 같이 본다. 똑같이 키르기즈스탄에도 대사는 없고 카자흐스탄 한국 대사가 키르기즈스탄까지 관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국에 키르기즈스탄 유학생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서울에는 20명 정도가 있다 한다.  

키르기즈스탄에 고려인은 약 5만 명이 산다.
고려인들은 이전에 대부분 농사를 지었는데 요새는 보따리 중개 무역을 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한국어 구사의 유리함 때문인데, 근래 한국어 교육에 종사하는 고려인들도 늘었다고 한다.

> 요새 우리나라에도 한국어 유행이 생겼어요. 처음에 학교가 생길 때는 고려인들만 많이 갈 줄 알았는데 키르기즈인, 러시안들도 한국어를 많이 배워요.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다 있더라고요.

기업 진출이나 교역량 증가의 영향이겠지만, 정작 삼성이 중국과 연결 도로를 건설하고 있는 것 외에 한국 대기업의 진출 사례는 두드러진 것이 없다고 한다. 대우가 원래 자동차 공장을 키르기즈스탄에 건설하려 하다 우즈벡으로 옮겼고, 한화나 신동아 등의 기업도 진출을 계획했다가 중도포기했다고 한다.
한국어 바람은 독립 이후에 동양권 나라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에 동반된 것이다. 키르기즈 사람들은 한국어뿐 아니라 일본, 터키, 아랍, 중국말을 활발하게 배우고 있다고 한다. 동양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분명해도, 영어가 역시 그 나라에서도 가장 중요한 교과목이라 한다.

자밀랴의 말에 따르면, 한국과 키르기즈스탄의 관계는 현재, 오히려 초기보다 부진하다. 대사급 외교관계가 곧 열릴 것 같았으나, 계속 연기되어 왔고 교역규모도 별로 확대되지 않고 있다. 아시아나 항공과 키르기즈스탄 항공사가 처음에 직항로를 열 정도로 오가는 사람이 많았지만, 적자를 견디다 못해 현재 직항로는 폐쇄된 상태이다. 지금 키르기즈스탄으로 가려면 모스크바를 거쳐야만 한다. 아니면, 우즈베키스탄까지 가서 다시 이동하는 방법뿐이다.  

IMF 전후한 시기가 고비가 된 듯하다고 자밀랴는 말한다. 한국 상품의 국제가격이 낮아지면서 교역은 일시적으로 활발해졌으나, 러시아에 닥친 경제위기 때문에 키르기즈스탄의 경기가 침체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러시아와 키르기즈스탄은 긴밀한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는데, 러시아에서 석유를 수입하고 수력 에너지를 공급한다고 한다. 전력 외에 목화, 양고기, 양모, 호두 등의 농산물이 키르기즈스탄의 주된 수출품이다.

한국과 키르기즈스탄의 교역과 왕래는 이처럼 부진해졌지만, 키르기즈스탄에는 한국 선교사가 차린 교회가 무려 10개나 있고, 절이 하나 있다고 한다. 키르기즈스탄 관련 사이트를 검색했을 때 엔진에 걸려든 것도 대부분 기독교 선교 사이트여서 짜증이 났다. 
이슬람교가 키르기즈스탄의 국교는 아니지만, 인구의 60%가 무슬림이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심지어 일본 절도 있다고 한다.

 

자밀랴 자신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지? 혹 무슬림이면 이렇게 술을 잘 마셔도 되는지?


> 저는 무신론자예요. 근데 불교에 관심 많아요. 종교로서는 아니고, 그냥 철학으로서요. 동양철학의 아주 많은 것들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 선불교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에게 중앙아시아란 무엇인가? 1930년대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수십 만(?)의 고려인이 카자흐스탄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에 거주하게 되었고, 그 3-4세들이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소련 연방의 해체 이후 자본주의화 되어간 이 지역에 대우를 비롯한 한국 대기업과 보따리 장사들이 진출하기 시작했다는 것…… 물론 역사 문화적으로 따져보면 이곳의 선사시대 문화가 한반도의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교류가 작지만 지속적으로 있어왔다는 것은 돈황의 유적들의 벽화에 나오는 한국인 사신의 모습을 통해서도 증명이 된다. 하지만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거리는 아직도 내 머리 속에서 잘 짐작이 되지 않는다. 

유목민의 딸

자밀랴 당신은 내가 처음 만나는 키르기즈인인데, 당신 때문에 나는 키르기즈인은 성격이 활발하고 명랑하고 솔직하다 – 는 “착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네요.


> 아마 대부분 그럴 거예요. 하하하.  

 

혹 그게 유목민의 기질? 그런 게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는데, 그것과도 관련이 있는 건지…

 
> 음… 그거라면… 우리는 손님이라는 개념이 최고죠. 모든 에티켓에서. 일단 손님이 오면 내 집에서 최고로 좋은 걸로 잘 대접해야 되고, 그런 게 있지요.

<몽골리안 루트>라는 프로에서 우리 한국인도 예전에 기마민족이었고, 우리는 유목민의 후예다라고 떠들어댄다지만 그냥 재미로 한번 해 보는 소리가 아니라면,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설사 우리 먼 조상이 그렇다는 게 사실이라 해도 이데올로기적 의도가 없는데 이런 소리를 크게 떠들어댄다는 건 “잠꼬대” 이상이 아니라 생각된다. 우리 같이 철저한 정주민, 농경민이 어디 있냐 말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적 의도가 있다면, 뭔가? “칭제건원이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다, 고선지가 어쨌다, 만주가 우리 땅이다…” – 이런 말들은 20세기 초의 신채호처럼 하도 답답해서 한번 해보는 소리면 모르되, 자칫 그건 월간조선 조갑제류로 흐를 가능성이 많아 위험하기 그지없어 뵌다. 조갑제의 이멜 아이디가 mongol이라든가? 꿈꾸는 건 자유지만, 꿈과 과거를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잘못 하면 일본 애들처럼 비석 조작하고, 없던 돌칼 갖다 지가 묻어 놓고, 새로 파낸 척 하면서 “드디어 찾았다!” 하게 될 수도 있다. 

유목민이라는 소리 때문에 옆길로 샜다. 우리가 죽었다 깨나도 이해하기 어려울 이 유목민 문화(기질)이라는 것에 대해 잠깐 대화를 나눴다. 자밀랴의 설명에 의하면, 키르기즈스탄은 이슬람 전통과 유목민 문화가 어울려 있는 곳이다. 여기다 러시아적이며 사회주의적인 게 첨가되고, 근래는 자본주의적인 무엇인가가 더해진 것이 키르기즈스탄일 텐데, 아무튼 이슬람 문화권답지 않은 몇가지 사례를 들어주었다. 돼지고기는 잘 안 먹지만 술은 좋아한다는 거나 여권(女權) 문제였는데, 갑자기 자밀랴가 이런 질문을 했다.

3. 눈치 – 자밀랴가 본 한국 특산물(1)

자밀랴는 이번 2월에 이번에 키르기즈스탄 고향에 갔다 왔다고 한다.

고향에 가보시니까 어때요? 고향을 다시 보니 한국도 살만한 나라이던가요?
> 고향이 좋죠! 고향에 가보니까 마치 내 10번째 생일이 어제였던 거 같아요.

하하하. 한국의 좋은 점이 뭐냐,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짜증날 수도 있겠지만, 한번 더 말해주세요.
> 아뇨. 좋았던 게 뭐냐는 묻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맛있는 게 뭐냐, 비슷한 게 뭐냐, 이런 질문을 주로 받았어요…… 무사히 이때까지 오며 나쁜 것을 많이 안 봐서 너무 다행이라 생각했고, 가장 좋았던 거는 여기 사회에 문제가 없었던 것이고 좋았다고 생각하거든요…

무슨 소리인지 자밀랴에게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말은 ‘그래도 내가 있는 동안 전쟁이나 소요 같은 것은 없지 않았느냐’는 취지였다.

> 또 사람들의 마음이라든지 교제하는 스타일이 괜찮아서 좋구요…

한국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거리감이 별로 없다는 말씀 같은데… 자밀랴 씨는 한국 친구들이 상당히 많다고 들었는데요.
> 약간 우리 키르기즈 사람과 비슷한 성격이 있어요.

하하, 한국 사람들은 일상적으로는 시끄럽고 에티켓이 없다고 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어 아무 데서나 트림하고 코 풀고…
> 아, 트림! 호호호. 에, 근데 그런 면을 떠나서 그냥 사람들의 넓은 마음과 손님에 대한 개념 – 손님에게는 잘 해 주고, 맛있는 거 대접하고 – 그런 게 키르기즈랑 비슷해요. 호호호. 우정도… 빨리 친해질 수 있고… 근데 먼저 말 안 걸면 한국사람들이 무뚝뚝하게 먼저 말 안하더라고요. 그런 것이 어색했지만, 나중에 날 보기 싫어서 그런 눈치를 주는 것이 아니었구나- 알았죠.

이 대목에서 자밀랴는 자신이 한국 사회를 파악하는 핵심적인 개념을 말했다.

> 근데 우리 사회에 거의 없는 것이 진짜 한국에만 있는 게 … 눈치란 개념인 것 같아요.
예?? 한국에만 있다…?
> 예, 한국에만 있고 키르기즈스탄에는 없다… 여기는 눈치가 너무나 중요한 부분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사람들이 교제하는 데…

눈치가 말의 함의가 넓은데, “체면”을 말하는 건가요?
> 체면은 우리나라에도 있는데… 눈치라는 게 더 깊은 무엇인데요… 눈치라는 게 특히 여자들의 사이에서는 정말 무서울 정도인 거 같아요.

자밀랴가 말한 “눈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싶어서 인터뷰를 참관, 또는 구경하고 있던 다른 한국인들로부터도 질문이 날아들었다.

“눈치”라는 걸 어떤 때 느끼나요? 어떤 걸 떠올리시고 “눈치”란 말을 쓰는 건지요?
> 서로 이야기를 할 때 내가 이야기 전에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 생각해서, 이것을 하지 않아야겠다고 하거나, 하나를 이야기하는데 2개 3개를 생각하면서 전혀 다른 것을 행동하는 것이죠… 어떤, 뭐라 그래야 되나? 프레임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처음 볼 때 상당히 자유롭게 행동한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이 보이는 것 뿐이고 안에는 철로 만든 보이지 않는 프레임이 있는 것 같아요. 하하.

상당히 심층적인 데까지 파악했네요?
> 심층적? (‘깊은’이라고 설명했다) 아, 그것은 깊이 이야길 안 해도 다 보이던데요! 하하하하.

음, “눈치”로 알아버렸군요? ^^
> 하하하. 나도 한국 와서 눈치 실습을 했죠. 하하. 근데 나는 잘 안되더라고요!

그걸 처음 느낀 건 언제예요? 또는 어떤 계기로 그걸 이해하게 되었는지?
> 그것을 이론적으로 배우긴 했는데, 그런 것이 있겠다는 차원에서 – 중세기 사회를 생각해봤을 때 – 왕과 벼슬아치들의 관계… 근데 여기 와서 민주주의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통적인 풍습도 남아 있고 눈치라는 개념도 강하고……

그럼 “눈치”가 ‘상하관계의 엄격함’을 말하는 건가요?
> 아뇨. 친구들하고의 관계에서도, 오늘 내가 개고기를 먹고 싶은데, 개고기를 먹으러 가자 –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고 눈치를 보며 내가 개고기를 좋아한다 싫어한다 말하더라고요. 좋아하지만, 안 먹는다 – 그런 거 있지 않아요? 하하하. 

본인은 오히려 한국 생활하면서 눈치본 적 없어요?
> 해볼려고 하는데 저는 잘 안 되라고요. 연습이 부족해서.

자밀랴의 동료 학생이 끼어 들었다.


 

다소 공격적인 발언이라 생각했는데, 자밀랴는 아주 잘 넘겨 받았다.  

 
> 어, 고마워!

> 너 내가 보기엔 눈치 아주 잘 봐… 

 

눈치라… 대화를 종합하면- 그것은 체면이기도 하고, 허식이기도 하고, 겉과 속이 다른 어떤 태도이기도 하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참거나 안 하는 것… 이 모두는 한국인의 자의식으로부터 비롯할 텐데, 이것이 한국인이 가진 키르기즈인과는 전혀 다른 특징이라는 것이다. 

외국인의 한국인

한국 사람들이 배타적이지만, 사실 외국인에게 바라는 것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한국인들이 바라는 외국인 상이 있고요. 그래서 한국인들의 구미에 맞는 외국인들에게는 잘 대하고 눈치보지만, 안 그런 외국인에게는 심하게 하죠…
> 저도 여기서 딴 외국인을 봐서 아는 건데… 만약에 내가 서울대 국제지역원 학생이 아니라면 그런 경우를 당했을지 모르는데… 여기 학생들은 개방적이고 외국에도 많이 갔다 와서 다른 문화를 알기 때문에.. 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만약에 명동이나 이런 데 나가서 딴 사람들하고 접근되면 안 그럴 때도 많죠. 특히 그냥 일을 하러 온 몇 명 외국인들을 만나 봤는데, 한 사람은 불법 체류자였는데, 그건 사람을 대하는 게 아니었대요. 맞고요. 그런 것이 많죠. 다른 대접을 하는 거.

그런 “다른” 대접을 받은 적이 있어요?
> 저는 아니에요. 저도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관심이 있어서 많이 물어봤는데, 그냥 노동하러 온 사람들은 정말 아니죠… 사람들이 같이 사는 세계니까 어느 나라나 그런 게 있겠죠. 

유난히 미국인이나 선진국 사람들(주로 백인)을 대하는 거나, 동남아 중앙아시아 사람에게는 괴상한 우월감을 갖고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것 말이다. 
> 나쁘다고까지 이야길 안 해도 약간 다르게 대하는 건 있죠. 때리거나 욕 하거나 그런 걸 제가 직접 본 건 없으니까요. 그런데 어떤 한국 사람한테 물어보면 외국인은 딱 두 종류밖에 없어요. 일본과 미국인… 거기 못 끼면 다 외계인처럼 생각하는 것도 있어요. 

종합할 때, 자밀랴는 “비교적” 한국에 우호적인 외국인이다. 자밀랴의 말대로 이는 자신의 조건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그는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학생 신분이고, 상대적으로 외국인들에게 개방적인 학생들 사이에서 생활하기 때문일 터이다. 자밀랴는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 중에서 분명 행복한 축에 속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자밀랴 자신이 가진 미덕 – 적어도 겉보기에 그녀는 무척 명민하고 적극적이며 활달하고 잘 웃는다. 게다가 한국어도 아주 잘 한다. – 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본다.

“안과 밖”이라는 기획 씨리즈를 시작하며 여러 인터뷰 대상이 떠올랐다. 동남아 노동자, 홍콩인 기업가, 미군, 베트남 유학생, 러시아 댄서, 중국인 학자 등등… 자밀랴처럼 우호적이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외국인들을 만날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일한 대가도 받지 못하고, 불구가 된 네팔 노동자들이 “꾸꾸루 버짜 (개새끼), 코리안!”이라고 외쳤다던가. 한국(인) 때문에 초래된 불행을 삶을 견디어내고 있을 외국인들이 키우고 있을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적개심을 생각하면 절로 식은땀이 돋는 듯하다. 

키르기즈스탄에서 한국 사람이나 기업에 대한 평판은 어떤 편인가요?
> 평판? Reputation? 처음엔 처음 보는 사람들이니까 그냥 좋아했는데 지금은 나빠졌죠. 나중에 한국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안 좋은 행동을 해 버리니까 인상이 나빠진 거죠. 하하하.

자밀랴는 조심스러워 그랬는지 웃으면서 이야기를 끝냈는데, 듣는 우리는 심각해졌다.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여행 경험이 있는 대학원생들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덧붙였다. 중국이나 동남아 등지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 기업인이나 상인의 평판은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무척 나쁘다고 한다. 이 때문에 현지의 고려인들도 덩달아 욕 먹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구매력이 높은 화폐를 가진 한국인들 중에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니 마치 누가 시킨 듯 한결 같이 질 나쁜 졸부 혹은 천민자본가 행세를 하는 이들이 많다. 노동자를 혹사·착취하거나 자본주의적인 훈련이 덜 된 ‘순진한’ 현지인들에게 사기치는 것은 상당히 기본적인 일일지 모른다. 특히 돈으로 그 나라의 여성을 사고 현지처를 두거나 하는 행태는 외국인들에게 이해받거나 용서받기 힘든 일일 수 있다.

왜 그럴까? 왜 중국, 연변,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에서 한결 같은 나쁜 평판을 들을까? 건전한 자본가(주의)와 천민자본(가)주의가 따로 있다는 식의 말에는 별로 동의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이런 사례들을 들으면 그들 우리 상인·기업가(중의 ‘몰지각한 일부’라 해 두자.)가 건강하고 창의적이며 금욕적인 건전한 자본주의(또는 자본가들)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그리고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지 않을 수 있겠는가?

4. 동창회, 향우회 – 변태들의 모임?

: 자밀랴가 본 한국 특산물(2)

외국인은 타자? 아니 에얼리언(Alien 외계인)이다.

자밀랴가 갖고 있는 외국인으로서의, “타자”로서의 자기의식에 대해 물어 보려 하였다. 타자라는 말에 자밀랴가 고개를 갸웃하자, 동석한 대학원생들이 설명하려 Otherness, Stranger 등의 영어단어를 들었는데… 듣고 있던 그녀는 뜻밖에 “음, 에얼리언!(Alien)”이라 내뱉었다.

> 여기서 한국말 외국인을 에얼리언으로 번역하기도 하더라고요. 에얼리언 카드(외국인 카드)… 내가 에얼리언이더라고요. 특히 한국에서 에얼리언이라는 표현을 많이 써요.  

  

포리너(foreigner)가 아니라 에얼리언이라는 표현을 쓰는 정부의 공식 서류들이 있다는 것이다. 에얼리언이라! 시고니 위버 나오는 SF영화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절대로 어감 좋은 말이 아니다. 영어 말 자체도 그렇다. 그 말의 동사형(alienate)은 그대로 ‘소외시키다, 이간질하다’는 뜻이 된다. 소외시키다. 타자가 되게 하다… 결국 ‘에얼리언’이라는 말은 그냥 다르다는 뜻이 아니다. 한마디로 이질적이며, 어울릴 수 없다는 한국인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말, 고치면 좋겠다. 

어떤 때 당신이 ‘타자’임을 느끼는지?
> 외국인이라는 것이 절실히 느껴질 때는 한국 사람들의 전통적인 것을 가까이서 봤을 때, 한국 사회에만 있는 것을 보고 있을 때, 그 사람들의 습관·관습 같은 걸 봤을 때-. 예를 들면 절에 가면 기도를 다르게 하고, 절에 있는 아줌마들이 살아가는 이야기하고 할 때, 뭣 때문에 절에 오고 그러는지? 또 예를 들어 노인들이 주말이 되면 물병 들고 어떤 산으로 가는데, 왜 그 산으로만 꼭 가고 왜 그 사람들하고만 다니는지…

변태들의 모임

> 그리고 무슨 모임, 회의들이 있잖아요…?


자밀랴의 동료 학생은 그녀가 한국인들의 “모임”에 대해서 낯설어 하고, 당혹해 한다고 했다.

 

 

어떤 모임이 이상한가요?


> 모임이라는 게, 옛날 유럽에 있었던 마슨(메이슨 mason)같은 느낌이 드는 거더라고요. 우리 “무슨 동창회 모임” 있다 하면 “우리는 딴 사람과 틀리고 우리들만 간다, 너희들은 비껴라” – 이거는 상상이 안 가요. 왜 그렇게 하는지? 우리는 아이들도, 부모님도 데리고 가고 지나가다 만난 친구도 거기 데려갈 수 있거든요. 여기서는 철저한 게 있더라고요.

 

그렇다. 우리는 어떤 친구가 아무리 나와 친하거나 심지어 이성친구라 해도, 매우 특별한 어떤 허가가 없으면, 그가 내가 속한 어떤 다른 집단(예컨대 OO동창회, XX향우회)의 모임에 절대로 데려가지 못한다. 내가 만약 광주 출신이면 나와 목숨을 거는 친구라도 그가 광주 출신이 아닌 한, 다른 광주 출신들과의 모임에는 못 데려간다. 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우리의 각종 모임이 자밀랴의 눈에는 마치 비밀 결사(프리메이슨) 같은 조직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 어떤 친구가 너는 못 간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슨 남자 변태들 모임인 줄 알았어요…

한 방 되게 맞은 느낌이다. 자밀랴의 말을 듣고서야 그걸 깨닫는다. 자밀랴는 ‘타자’라는 어휘를 이해하기 힘들어했지만, 한국인이 한국인들끼리 “배제하는” 그 무시무시한 ‘배타적’ 행동 기제를 매우 예리하게 짚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남들은 절대로 참석하지 못하는 “우리끼리만의” 패거리를 만들어 ‘따’를 만들고, 나 스스로가 어떤 이들에게는 ‘따’인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그런 한에서 우리는 변태일 수도 있다.
그 ‘따’는 우리 내부의 에얼리언들이기도 하다. 전라도, 여성, 지방 등은 그 에얼리언들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러니 하물며 외국인은 얼마나 쉽게 “외계인”이 될 것인가. 자밀랴는 다시 쐐기를 박는다.

> 그 때부터 눈치도 생기는 거 아닌가요?

보편성과 특수성


한국의 나쁜 점에 또다른 무엇이 있냐고 자밀랴에게 물었다. 그래서, 관료주의 또는 행정편의주의 문제가 떠올랐다. 자밀랴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낭패를 봤다고 한다. 그녀를 초청한 한국 기관의 담당자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업무인수도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나 몰라라”하는 공무원들의 태도가 그녀를 국제미아로 만들 뻔 한 것이다.

 

> 여기에는 이스테빌리시먼트,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갈 때 정말 그 담당자 한 사람이 아니면 아는 사람이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관공서 뿐 아니라, 공항, 백화점 다 마찬가지더라고요.

우리도 가끔 경험하게 되는 관료주의나 행정편의주의의 문제를 지적한 것인데, 아마 외국인에게 그런 문제는 더 절실히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말 설고, 낯선 데가 아니냐.

그런데 이 문제를 둘러싸고 자밀랴와 국제지역원의 동료 학생들간에 흥미로운 논란이 있었다. 그런 관료주의의 문제가 비단 한국에만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국제 여행 경험이 많은 그 학생들이 반론 아닌 반론으로 제기했던 것이다. 특히 러시아와 그 주변 국가들을 여행하다가 비자문제(?)로 경찰서까지 간 적이 있었던 동료 학생은 러시아야말로 그런 문제가 심하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사실, 사람들을 관공서나 접수대에서 뺑뺑이 돌리고 무작정 기다리게 만드는 그런 관료주의의 문제는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아무리 줄을 길게 서 있어도 미국의 접수계원들은 “땡” 12가 되면 밥을 먹으러 가 버리고, 이탈리아의 철도공무원은 발차 시간이 임박해서 표를 다급히 바꾸러 온 승객이 앞에서 애타게 호소하건 말건 옆자리 동료와 잡담을 나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소위 “급행료” 없이는 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문제는 인간사회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인지, 한국만의 폐해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 분명히 있다. 외국인이 느끼는 이러한 ‘나쁜 점’을 어떻게 개선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얘기할 때, 조선일보 식의 에티켓 운동과 같은 것으로 치환시켜서 예의를 갖추자는 식으로 얘기되면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에서 하는 예의바른 어쩌고 하는 한국인 만들기 운동의 문제는 무엇이냐….. 그것은 일종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그야말로 ‘특정’ 외국인들(주로는 서구의 국가들이다)이 보이는 행태를 일반화시켜서, 그 나라 사람들 혹은 유사한 문명권의 사람들은 대체로 그러한 ‘예의바름’을 보이는 것으로 성급한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리고 한국인의 행태는 반대의 측면에서 ‘그렇지 못한 것’으로 일반화시킨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른바 인간사회 어디서나 타당한 것과 특정한 국가에만 타당한 것들의 경계가 흐릿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선일보의 에티켓 운동은 기본적으로 그러한 행태가 생겨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진정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외국에 여행했을 때 나는 특별히 외국인들, 특히 서양인들이 예의바르다거나 혹은 그들이 다른 외국인들에게 친절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만약 예의바르다고 할 만한 것이 있다고 인정하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마이너한 문제인 ‘예의’의 문제일 따름이다. 그런 문제를 두고 국민성이나 그 나라 혹은 문명 사람들의 태도와 마인드의 문제로 귀속시키는 것은 지나친 태도이다. 예의니, 에티켓이니 하지말고, 차라리 그냥 우리 물건 더 많이 팔아먹기 위해서, 서구인의 기준에 우리를 맞추자, 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하다…   

그런데, 이처럼 문제를 약간 다른 차원으로까지 확대하고 나와 한국 학생들끼리 한참 이야기하며, “맞어, 맞어” 서로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나름의 결론을 내리려 할 때였다. 자밀랴는 약간 화가 나 있었다. “한국은 양반이고 러시아는 정말 심하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결코 유쾌하지 않았으리라.    

> 그러니까 한국의 약점을 물어보려 하면, 그대로 듣고 있든지, 안 그럼 물어보지 말든지…

우리는 일시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고, 반론의 당사자였던 자밀랴의 친구는 “내가 안 물어 봤어”라며 꼬리를 내렸다. 그러자 자밀랴가 톤을 더 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 그럼, 기어 들어가지 말든지!

>……그런 경우가 많았어요. 내가 다 말한 다음에 그 말들이 우물 속에 빠진 것 같더라고요. 말을 하다 하다 보면 그 말들이 이 만큼 거품이 되는데 갑자기 우물에 빠진 거예요. 발자국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요.

우리는 외국인에게 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어떤 실제적인 조언을 듣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망측스런’ 현재 상태에 대한 솔직한 비판을 바라는 것이거나, 또는 조언을 구하여 우리의 객관적인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반대로 그 질문을 받는 외국인이 우리 구미에 맞는 외국인이 되어야 한다는 괴상한 의도에서 묻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말하는 진정한 충고는 사실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너들이 뭘 알아서?” …… 한국은 더 더 “세계화·국제화”되어야 한다. 나도 ‘국제인’이 되고 싶다. 그러나 언제나, 그 방향과 방법이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