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실패기 -2월 18일 부평에서…
1. 13:00 남문
2월 18일, 부평으로 떠나며 우리는 대강 다음과 같은 계획을 잡았다. 우선 2월 20일 프랑스로 출발하는 김우중 체포결사대 중 1명인 황이민 민주노동당 기획국장과 인터뷰를 한다, 그러고나서 부평 공장 안에서 철야농성 중인 대우자동차 노조원과 가족들을 만난다. 일단 17일, 전화를 통해 황 국장과 오후 2시 부평 공장 안에서 만나기로 했다. 노조원과의 인터뷰는 현장에서 부탁을 하면 될 터…
18일, 우리가 부평구청 역에 도착한 건 오후 1시. 지하철 역 입구 계단을 벗어나자 바로 부평경찰서다. 경찰서 정문을 막고 선 전경들 때문에 잠시 긴장한다. 바퀴벌레, 그들을 보고 긴장하는 것도 꽤 오랜 만이다. 그리고 지체없이 노조 사무실이 가까이 있는 남문으로 향한다. 그러나 공장 출입구 역시 칙칙한 군복과 빙충맞게 반짝이는 화이버가 점령하고 있다. 출입 불가. 공장 안에는 정리해고 통지서를 받은 노조원과 가족들 800여명이 며칠째 농성 중이다. 우리는 지금 그 밖을 맴돌고 있다.
(이 페이지의 일부 현장 사진은 “노동의 소리“에서 받은 것이다. http://www.nodong.com)
공장으로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준비해 온 번호로 전화를 건다. 모두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학 대변인이 핸드폰을 받은 건 1시 30분경. 그의 목소리를 확인하는가 싶었는데, 곧 끊긴다. 그 후로도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어렵사리 황이민 국장과 전화 연결이 됐다. 그는 다른 곳에 있다. 그가 전화번호를 하나 알려준다. 유만형 씨. 20일 프랑스로 김우중을 잡으러 떠나는 체포결사대 중 한 명. 대우자동차 노동자다. 그는 지금 고향집에서 오는 길이라고 한다. 그가 부평에 도착할 시간은 3시 30분. 공장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묻자 노조 사무실 전화번호를 불러준다. 그리고 그와 인터뷰 약속을 잡는다. 그런데 노조 사무실 역시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는다. 우리는, 경찰이 방해전파를 쏘는 것 같다는 농담을 주고 받는다. 그리고 몇 차례 시도 끝에 저쪽에서 수화기를 든다. 들어갈 수 있는가. 직원조차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일단 유만형 씨를 밖에서 만나기로 한다.
기다리는 동안 피시방에 갔다. 그제서야 우리는 공장 주변의 살벌한 분위기, 연결되지 않는 전화들의 의미를 알았다. 우리가 도착하기 1시간 전, 정문에서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공장 안의 농성장으로 결합하려는 노조원들과 가족들을 경찰이 막으면서 부상자가 생긴 것. 그 와중에 최종학 대변인이 연행되었다는 소식도 속보로 떴다. 불과 1시간 전의 일이다. 여기 부평에서.
15:30 정문
정문을 향해 걷고 있는 우리 곁으로 후속 병력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 그리고 공장 안에서 들려오는 스피커의 다급한 목소리. 공장 안에는 노동자들만 있는 게 아니다. 아이들과 부인들이 함께하고 있다. 어제 뉴스에는 우유병을 물고 있는 어린 아기의 모습도 비쳤다. 5, 6개월씩 밀린 월급은 고사하고 임대아파트에서 살던 이들은 이제 길거리로 나앉게 생겼다. 그들의 마지막 거처는 공장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그들이 내몰릴 곳이 있기나 한 건가. 그러나 겹겹이 공장을 둘러싼 전경들은 공장 안의 노동자들과 가족들을 차츰 죄어오고 있었다.
유만형 씨와는 대우자동차 정문을 마주보고 있는 부평 세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후 3시 30분, 약속한 시간이 되자 빵모자를 쓴 노동자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유만형 씨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 길을 걷는데, 갑자기 길가에서 누군가 소리친다.
“대우, 힘내!”
마당에서 눈을 쓸던 50대 후반 가량의 아저씨다. 아마도 조끼에 쓰인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이라는 글자를 보았을 것이다. 자주 있는 일인 듯, 유만형 씨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예, 감사합니다. 꼭 정리해고 철회시키겠습니다“
2. 김우중 체포결사대 대장 유만형 씨
주택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자그마한 체구, 수줍은 듯한 얼굴. 사진기를 들이대자 이내 유만형씨의 얼굴과 몸은 굳어졌다. 순박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력 15년의 고참 노동자다. 87년 11월 유만형 씨는 대우자동차에 입사했다.
유만형> 어제 뉴스에 가족들 들어와서 집회하는 거 나오니까 전화를 하셨더라구요, 조심하라고. 그래서 걱정하시지 말라고 말씀드리러 갔다 왔어요.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먼 길을 떠나기에 앞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간 것임을. 그렇지만 부모님께 프랑스에 간다는 말씀도 드렸을까?
유> 인사드리러 간 김에 프랑스에 간다고도 말씀드렸어요. 노조 홍보 활동하러 간다고… 다른 건 안하냐고 물으세요. 그래서 김우중 잡아올 거라고 말했습니다. 크게 염려는 안하세요. 해고 당한 건 아직 모르시죠. 괜히 걱정만 하실테니까. 안심시켜 드리고 바로 올라오는 길입니다.
원래 김우중 체포결사대 대장은 김성갑 노조 수석부위원장이었다. 그렇지만 사태가 급박해지면서 수석부위원장이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인데다가 출국 심사에 걸릴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유만형 씨는 현재 해고자 신분. 해외매각 반대 투쟁으로 작년 2월 24일자로 해고된 상태다. 유만형 씨는 자신이 체포결사대로 프랑스에 가게 된 것은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신분이 안전하기 때문일 뿐이라고, 노조에서 특명을 내리면 그것을 성실하게 수행할 뿐이라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는 해외로 나가는 것이 두 번째라고 했다.
유> 해외여행은 아니고 회사가 일본에 가서 일하라고 해서… 연수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팔려갔던 거죠. 스즈끼라고, 거기서 4개월 동안 일하고 왔어요. 일본 자동차 노동자들 근면성을 보고 배우라는 거였는데, 말이 그렇지 죽도록 일만 하다 왔죠.
동료를 바리케이트 뒤에 남겨두고 떠나는 지금 그의 심정은 어떨까?
유> 프랑스 간다고 하니까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행이나 개인적인 목적으로 간다면 마음도 부풀고 하겠지만… 지금 제가 가는 건 우리 생존권 때문에 가는 겁니다. 대우를 이 지경으로 만든 김우중을 잡고 그 놈이 뒤로 빼돌린 재산을 되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돈만 있으면 대우차 빵빵 돌릴 수도 있고, 지금 정리해고도 명분을 잃게 됩니다. 저렇게 싸우고 있는데 떠나려고 하니까 마음이 상당히 무겁습니다. 더군다나 가족들까지 들어와서 목숨 걸고 투쟁을 하고 있는데, 저 혼자 떠난다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착잡합니다.
그는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지 않았다. 현지 유학생들과 교민들이 벌써 체포결사대에게 도움을 주기로 약속을 한 상태다. 프랑스 금속연맹과도 이야기가 되어 있다. 정작 그가 걱정하는 것은, 15년 넘게 자신의 일터였으며 지금은 동료들과 그 가족들이 최후의 진지를 쌓아 놓은 이 곳, 공장이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무사할 것인가이다. 그는 동료들을 믿는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동료들과 가족들이 회사와 경찰들로부터 공장을 지켜낼 것이라고, 그래서 자신이 돌아왔을 때 모두에게 활동보고를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유만형 씨는 과연 김우중을 잡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김우중을 잡으러 프랑스에 간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검찰의 수사 의지에 대해서는 결코 신뢰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김우중을 소환하겠다고 했지만, 인터폴에 의뢰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 그는 체포결사대의 활동이 검찰과 정치권에게 김우중 체포에 대한 정치적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 사실 우리가 간다고 김우중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 곳에 가면 벌써 다른 데로 숨어들겠죠.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오죽하면 우리 노동자가 김우중을 잡으러 그 먼 곳까지 가겠습니까? 검찰이 잡는다고 말만 할 뿐 아무 노력도 안하니까 그런 것 아닌가요? 잡으라는 놈은 안 잡고 왜 여기들 다 와 있는 거죠? 이게 말이 됩니까…
유만형 씨는 프랑스에서의 활동 계획을 상세히 밝히지 않았다. 이곳에서 계획하고 있는 것과 실제 상황에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우중의 별장이 있다는 니스에도 갈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프랑스 전국을 다닐 것이라고만 우회적으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의 마음은 프랑스가 아니라 부평 공장 안에 있었다. 우리에게도, 인터뷰를 하려면 직접 공장 안으로 들어가서 농성 가족들을 직접 만나보라고 했다. 그래야 훨씬 생생한 사실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담을 넘어서 들어가지 않겠냐고, 아예 사나흘 정도 같이 생활해 보는 게 좋을 것이라고 진지하게 권유했다. 그들을 휘어감고 있는 분노와 울분, 설움에 대해 말하려면, 사실 그래야 한다. 우리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렇지만 유만형 씨에게라도 간접적이나마 공장 안 상황을 듣고 싶었다.
유> 제가 해고되기 전에 있던 곳이 조합 1부예요. 의원퇴직 전에 한 천 명 정도 됐는데, 지금은 9백여명 되고요. 그런데 이번에 정리해고된 사람이 498명인가? 절반이 넘어요.
지난 인터뷰에서 최종학 씨는, 회사가 오직 정리해고에만 열중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2월 중순까지 정리해고를 마무리짓겠다던 회사측의 의도대로, 현실이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GM과의 매각 협상에서 정리해고 문제가 전제 조건이 된 것은 GM이 부평 공장 폐쇄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정리해고의 기준은 무엇일까?
유> 회사에서는 인사고과를 갖고 했다는데, 고과라는 게 직,공장놈들 눈에 맞으면 올려주는 거고, 지들 잘못한 거에 싫은 소리하면 팍팍 내려가는 거죠. 그리고 노동조합 지침을 충실히 따른 사람들이 주로 당한 거에요. 저희 직장 같은 경우도 제가 소위원하면서 전원 참석시켰어요. 참석률이 엄청 좋았어요. 어제 떨어진 거 보니까 4명 빼고 다예요. 좀 나이 많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런데 웃긴 건 회사쪽 말 열심히 쫓던 사람들도 짤렸다는 거예요.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충성하고 엎드리래면 엎드리는 시늉까지 하던 사람들이… 회사에서 니네는 아니다, 조합 말 듣지 말고 회사 말 들어라, 그러면서 회사 꼭두각시 노릇하던 조장들도 다 떨어졌어요.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낀다는 거죠. 자기가 짤린 것도 모르고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공장 지키던 놈도 있으니… 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죠.
이번에 정리해고 통지서를 받은 사람은 1750명. 이렇게 많은 사람을 잘라내고도 과연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걸까?
유> 지금 정리해고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처지가 안 돼요. 노동강도가 엄청나게 강해질 거고… 어짜피 지엠은 부평공장을 폐쇄하려고 하니까, 내년 돼서 차가 잘 안팔리니까 생산목표를 줄인다고 하면서 인원을 또 줄일꺼란 말이에요. 그럼 또 나가야 돼요. 창원도 지금 마티즈가 잘 나가니까 가만 두고 있는데, 마티즈 후속 모델을 집어 넣지 않았단 말예요.
마티즈가 안 나가면 거기도 이런 꼴 나는 거죠. 군산은 지형이 좋고 땅도 넓으니까… 부평이랑 창원 기계 다 옮겨도 충분하단 말이에요. 부평은 땅 장사한다고 하고. 지엠은 대우자동차 거저로 먹겠다는 거거든요. GM에 매각되면 지금 남아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 신세에요. 창원도 그렇고. 마티즈만 구형 모델되면 단계적으로 부평공장 꼴을 밟을 수 밖에…
그동안 희망퇴직이다, 의원퇴직이다 해서 나간 사람들도 꽤 된다. 직장을 떠난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지금 정리해고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유> 조합에서는 의원퇴직 하지 말라고, 지금 어려워도 견디자고 했는데… 10년, 20년 근무해도 뭐 할 줄 아는 게 있겠어요? 모르는 사람들은 자동차 회사에서 그렇게 오래 근무했으면 자동차 박사일텐데 나와서 카센타라도 하면 되지 않냐 그러는데, 그렇지가 않죠. 분야별로 나눠져 있기 때문에 자기 파트 일만 할 수 있는 거지, 전체적으로는 몰라요. 단순조립공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가서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나가서 기껏 해봤자, 노가다를 하거나 조그만 분식점을 한다던가 슈퍼를 하는 건데… 그렇지만 실직 당한 사람이 한 둘인가요? 대우자동차만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하는 게 결국 똑같다구요. 게다가 대우차 이렇게 되는 바람에 인천 경기도 바닥인데, 해 봐야 많지도 않은 퇴직금 말아먹는 거죠. 막상 할 게 없는 거죠.
노동부에서는 대우자동차 해고자를 위한 재취업 센터를 회사와 공동으로 운영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유> 취업고용센타라고 있어요. 회사 내부에 노사협력부라고, 노조 탄압하던 놈들이 하는 건데, 영종도 신공항에 용역 나가는 거에요. 작업 환경도 엄청 열악하고 그리고 인간적인 대우를 못 받는 건 뻔한 일이죠. 그런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용역하는 거 99프로는 안 갈려고 할 거에요. 임금이나 복지가 여기랑 어느 정도 비슷하다면 재취업이라는 게 말이 되는데, 어느 누구도 가기 싫은 데를 가라고 권유할 수 있어요? 그건 형식적으로 언론 플레이하는 거 밖에 안되요. 얄팍한 수작이죠. 비열한 놈들이에요. 지네들 같으면 거기 가겠어요? 한 마디로 얼른 나가라 이거죠.
인터뷰 내내 차분하게 이야기하던 유만형씨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유> 월급 받아서 애들 키우는 사람들은 못 견뎌요. 잔업, 특근 다 하고 일요일에 나오고 해야 150만원 정도 받아요. 잔업, 특근 없으면 한 120정도? 요즘처럼 1주일 일 하고 1주일 쉬면 80만원 정도 받는데, 거기서 의료보험료, 고용보험료 그런 거 떼고 나면 6-70만원 정도 밖에 안되요. 그거 갖고도 생활이 어려운데 지금 월급이 5, 6개월 체불되어 있다구요. 하도 이런 생활을 오래 하니까, 어이도 없고 해서 지금 웃으면서 이야기하죠, 현장에 들어가서 술 한 잔 먹고 나면 별별 이야기 다 나와요. 이때까지 그래도 그냥 먹고 살 정도는 됐는데, 호화롭게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자기 안 쓰고 절약하면 새끼들 먹여 살렸는데, 그나마도 뺏어버리니까 돌아버리는 거죠.
예정대로라면 그는 2월 20일 2시 55분발 비행기를 타고 출국, 3월 2일이나 3일경에 돌아와야 한다. 그가 프랑스에서 돌아오면 다시 한 번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한다. 그가 웃으며, 다음에 만날 땐 소주나 한 잔 하자고. 부평역으로 가는 길을 일러주고 그는 공장 정문을 향해 바쁘게 뛰어간다.
3. 그러나 그는 떠나지 못했다
2월 19일 18:00
경찰병력 투입을 신중하게 검토하겠다던 경찰청장은, 공장 안팎의 저항이 점차 조직적인 형태를 띠자, 2월 19일 오후 6시 갑작스레 경찰병력을 투입했다. 경찰 헬기가 공장 상공을 날고 포크레인이 공장 담벼락을 허물었다. 식사 중이던 노조원들과 가족들이 황급히 경찰 병력에 맞섰으나 불가항력이었다.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부상을 입고 연행됐으며, 가족들이 농성하던 텐트와 공장 일부가 불탔다. 그날 목격자들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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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30분경 미처 식사를 다 마치지도 못한 상태에서 급보가 전해졌다. 경찰들이 공장안으로 들어올 조짐이라는 소식에 조립사거리를 중심으로 휴식을 취하던 조합원들과 식사를 하던 조합원들이 긴급히 대오를 지어 남문, 서문, 정문으로 달려갔다.
오후 5시 50분 공장위로는 헬기 두대가 선회하고 정문앞에는 수백명의 전경들이 대오를 정비하였다. 곧이어 정문에서 북쪽으로 100여미터 떨어져 있는 문으로 전경들이 공장으로 진입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문앞에는 포크레인 4대가 나타나더니 삽날로 굳게 닫힌 정문을 내리찍고 걷어내 버렸다. 이어 컨테이너 박스를 밀어 진입로를 만들고 옆담장까지 허물어 버렸다.
6시 1천여 명의 전경이 정문 컨테이너 박스사이로, 담장을 넘어 일시에 밀어 닥쳤다. 보도블록을 깨어 던지며 저항하던 200여 명의 조합원들이 공장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이때 남문, 서문에서도 진입하는 경찰에 조합원들이 맞섰으나 일시에 쳐들어 오는 4천2백여 명의 무장병력을 막아내기는 역부족. 조립사거리로 밀린 노동자들은 경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바리케이트에 불을 붙이고 화염병으로 던져 한때 공장 상공은 시커먼 연기로 뒤덮였다. 조립1공장 현관입구에도 불길이 치솟았다. 조립사거리를 중심으로 설치되어 있던 천막농성장에도 불이 붙었다. 대기해 있던 소방차들이 들어와 불을 끄기는 했으나 조합원들의 집회장소와 농성장의 중심이었던 조립사거리는 아수라장이었다. 다행히 조합원들은 무사히 퇴각했는지 현장에서 연행되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6시 20분경 조립사거리를 장악한 전경들이 조합원들을 잡으러 조립1공장안으로 진입하려 하자 공장안에 남아 있던 조합원가족 20여 명이 어린아이들을 들쳐업고, 손잡고 막아서며 “폭력경찰 물러가라며” 완강히 저항하였다. 조립1공장을 수색하러 들어갔던 수백명의 경찰은 허탕을 쳤다. 폭력경찰에 맞서 강력히 저항하던 조합원 가족들은 그들을 에워싼 수백명의 경찰에 맞서 처절하게, 그러나 완강하게 투쟁하였다.
가족들의 완강한 저항에 당황해 하던 경찰은 기어이 수백명의 전경과 여경을 동원하여 어린아이 가지 포함된 조합원 가족들을 강제로 두대의 닭장차에 싣고 공장밖으로 빠져나갔다. 헬기 두대와 포크레인 4대, 소방사다리차 등 중장비와 4천2백여 명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조합원들을 공장밖으로 밀어내고 공장을 장악한 경찰은 어두워지자 공장출입문을 완전봉쇄하고 수천명을 새로 공장안으로 투입하여 밤새도록 공장을 수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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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9일 23:00
다음날 오후 2시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는 유만형씨는 무사할까? 혹시 경찰이 바리케이트를 허물던 그 시각 공장 안에 있던 것은 아닐까? 밤 11시 무렵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그가 전화를 받았다. 이쪽의 첫 마디는 괜찮냐는 것이었다. 다친데는 없는가? 내일 출발할 수는 있겠는가? 저쪽 대답을 기다릴 틈도 없이 한꺼번에 질문을 던졌다. 침통한 그의 목소리가 약간의 시간을 두고 이쪽으로 건너왔다.
유> 지금 같은 상황에서 프랑스에 간다는 게 의미가 있겠습니까? 공장이 온통 경찰한테 점령당했는데요… 다시 논의는 해 보겠지만 지금은 일단 보류시키기로 했습니다. 김우중을 잡으러 가는 것 보다는 여기서 공장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합니다.
경찰 진입 당시 유만형씨는 대우차 공투본 사무실에서 방송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던 중이라고 했다. 갑작스런 진압 소식에 현장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된 상태. 지금은 동료들과 소주를 한 잔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좋은 일로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는 그의 인사가 씁쓸하다.
2월 20일 18:00
노조원들과 그 가족들은 이제 공장에서도 쫓겨났다. 그러나 거리로 쫓겨난 그들의 수는 몇 배로 늘어났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모든 힘을 모아 정부와 맞서기로 했다. 지방의 금속 연맹 노동자들도 상경하고 있는 중이며 학생들 또한 점차 대열을 갖추고 부평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20일 6시 공장 앞으로 진격하고 있다. 유만형 씨도 그 안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업은 주부와 노인들이 그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서럽다. 공장 안에서 경찰에게 끌려가며 눈물을 터뜨린 노동자의 부인이 뱉은 그 한마디. 서럽다. 빼앗긴 공장, 빼앗긴 터전을 되찾으로 가는 그들의 긴 행렬을 본다. 그리고 ‘조국’이라는 그 경멸스러운 단어를 곰곰히 씹는다. 참을 수 없는 수치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