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물리학도의 변신
박경신 씨의 경력은 꽤 흥미롭다. 그는 원래 아인슈타인을 존경하는 과학도였다. 대전 과학고등학교 1학년 시절 이미 과기대에 합격했지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 탓에 다시 LA의 공립 고등학교에서 2년을 보낸다. 그리고 <하버드대 물리학과>에서 대학생활을 보낸 후 에 진학, 변호사가 되었다. 지금은 2년 전 귀국하여 <한동대 법학부>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법무법인 한결>에서 공익 및 국제법무에 관해 파트타임 자문을 하며 <참여연대>에서도 자원활동을 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귀국한 지식인인 사실 우리는 귀국한 지식인인 그와의 인터뷰에서 ‘역시 한국인이야’라는 민족적 우애감 따위를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귀국은 ‘조국에 봉사하라’는 박정희식 정언명령과 다른 것이어야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달랐다. 오히려 우리는 그가 미국의 대학 시절을 경유하며 “좌파적” 지식인으로 사상적 변화를 겪었다는 점, 그리고 변호사로서 미국과 한국에서 나름의 “실천”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점에 흥미를 느꼈다. 이를테면 ‘좌파적 지식인’이라는 딱지는, 민족적 정체성을 대체할 우리의 부적(符籍)이었다. 실제로 그는 그랬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 내내 어떤 식의 이름 붙이기도 거부했다. 그 때문에 인터뷰는 보이지 않게 어려움을 겪었다.
아니, 인터뷰가 어려움을 겪은 것은 그의 거부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좌우편향적 시선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좌파라는 일견 국제주의적 언술 내부에 ‘그래봐야 당신이 한국 현실에 대해 뭘 알겠어’라는 또 다른 구분짓기의 욕망을, 우리는 은밀히 숨겨 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건대 박경신 씨가 그 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인터뷰는 술자리와 함께 시작됐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인터뷰 자체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내비쳤다. 연신 술잔을 건네며 ‘어떤 얘기가 나올지 한 번 끝까지 가 보자구요’라는 그의 호탕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터뷰는 어떤 선들을 넘지 못했다. 말하자면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고 싶다’는 내밀한 욕망을 끌어내는 데 우린 실패했다. 아니, 실제로 그는 그것들을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세밀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듣기에 그/우리는 너무 일찍 취해버렸다.
그렇다고 박경신 씨가 준비된 이야기를 했다고 단정짓는 것은 성급한 오해이다. 그는 충분히 열려 있었고 무엇이든 이야기해 줄 태세가 되어 있었다. 일단 LA 공립 고등학교에서 시작되는 그의 미국 학창시절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박 : LA에 갔더니 주변 사람들이 “도심에 살더라도 되도록이면 학교는 교외로 보내라”고 하더라고요. 원래 LA High School이라고 코리아타운을 학군으로 하는 공립학교가 있어요. 이 학교가 유명한 학교인데, 왜냐하면 마약 단속하면 항상 1, 2위를 다투는 학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민 초기 한국 애들은 모두 거기로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변에서는 그 곳으로 보내지 말라는 거였죠.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거기로 갔어요. 학교 식당에 가 보면 다 눈에 띄어요. 행색만 봐도 이민 온 지 얼마나 됐는지… 어떤 애들은 거기서 태어난 애들도 있지만, 어떤 애들은 ‘아, 엊그제 비행기에서 내렸다’고 하고… 거기 한인 학생회가 있었어요. 전부 한국말로 했죠. 전체가 3천 명 정도인데 그 중에 한 2백 명 정도가 한국 애들이었어요.
고등학교 하나에 3천명이라니, 우리로 치면 작은 대학 하나와 맞먹는다. 반도 따로 없고 선생 사무실이 곧 강의실이다. 자기 시간표에 따라 강의실을 찾아가서 그 선생 수업을 들어야 하는, 우리로 치면 대학과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다.
박: 저는 LA High School로 간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랑스럽기도 하고요. 거기에는 한국 친구들이 많아서 도움을 많이 받았죠.
요즘 외고가 잘나간다고 하지만, 당시의 과학고와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전국의 수재들이 앞을 다투던 곳이었으니까. 남들은 적어도 3년, 재수 없으면(!) 4, 5년 걸리는 고교 시절을 과학고생들은 단 2년 만에 패스한다. 그는 그 중에서도 ‘특공대’의 일원이었다. 2년도 길다, 1년이면 충분하다는 교장의 엄명에 의해 만들어진, 과기대 특공대. 그처럼 특별한 대우를 받던 그가, 마약 단속 1, 2위를 다투는 미국 공립학교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박 : 제 나름대로 적응을 했죠. 저야 과기대를 뿌리치고 왔으니까, 어디가고 싶냐고 물으면, 난 MIT 같은 곳을 가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애들이 다 웃는 거예요. 우리 학교에서는 거길 가본 적이 없다나요. 말도 안 된다는 소리를 듣고 처음에는 좀 절망도 했죠.
호주머니 속의 송곳이라고 하던가. 박경신 씨는 결국 하버드 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그렇지만 그가 LA High School에게 느끼는 애정은 모교심 일반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박: 실제로 60년대에는 가장 전통 있는 학교였다고 해요. 그런데, 60년대 와츠 폭동이라는 인종 폭동으로 유태인이나 백인들이 교외로 모두 빠져나갔죠. 그리고 흑인들, 라티노들이 들어오면서 학교의 전반적인 질이 낮아졌다고 합니다. 사실 미국에서 인종문제는 계급문제를 살짝 가리고 있어요. 그걸 뚫기가 참 힘들지만요. 그러니까 누가 가난하다고 하면 그냥 가난한 게 아니라 가난한 라티노, 가난한 흑인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절대적인 숫자로 보면 저소특층이나 빈민 중에서 백인 비율이 가장 높습니다. 백인들은 그런 사회적 불균등을 “그래, 나 공부 못한다. 그래도 인간답게 같이 살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래 난 누구 모른다. 그래도 나 좀 취직시켜달라” 이러는 거죠.
그러다 보니 백인 빈민층은 자연스레 문제의 핵심에서 비켜납니다. 가난한 건 모두 흑인, 라티노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계급 문제조차도 인종 차별 문제로 환원해 버립니다. 착각을 하는 거죠. 이제 “빈민=흑인 여성”이라는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을 만들어 버리는 언론도 큰 영향을 미치죠.
박: 학부 2학년을 마치고 한국에 갔다 온 적이 있어요. 2학년 때 이철 의원이 하버드에서 했던 강의를 들은 게 계기가 됐죠. 89년도였습니다. 박정희 정권 때 자기가 당했던 수모에 대해서 이야기했죠. 총영사가 강의장에 따라와서 반론을 제기하려고 하는데, 그 사람 영어가 안되는 겁니다.
이철 의원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길래 저도 따라가서 같이 담배를 피웠습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어이 방학 때 한 번 와서 인턴이라도 해라, 이러는 겁니다. 그때 무슨 인턴이라는 게 있었나요? 그래도 무작정 갔습니다.
한국을 떠난 지 4년 만이었다. 자신이 앞으로 한국에서 살 것인지 말 것인지, 아니 관계를 맺을 것인지 맺지 않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고 싶었단다. 이철 의원 사무실에서 그가 한 일은 대부분 번역이었다. 무보수 인턴이었던 탓에 번역 아르바이트도 했다. <주간야구>의 메이저리그 뉴스를 번역하는 일이었다.
박 : 89년도에 왜 전교조 문제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국회의사당 왔다갔다 하면서 꽤 인상깊었어요. 선생님들이 국회의사당 담벼락에 앉아있고, 전경들도 그 옆에 쭉 서 있고… 그때는 잘 이해가 안됐지만, 어쨌거나 한국을 갔다 오면서 저한테는 상당히 치명적인 인상이었습니다.
“치명적 인상”.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변화가 이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4년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받은 치명적 인상이 그의 진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90년 가을 그가 보스턴으로 돌아가면서, 하버드대에는 풍물패가 생긴다.
박: 저는 부쇠했습니다. 상쇠는 꽹가리고 부쇠는 징이죠. 마침 그때 한국말을 못하는 친구가 저희 클럽에 들어왔거든요. 그래서 이 애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친구에게 상쇠를 맡겼죠. 그 친구는 나중에 피리도 불고, 장구도 잘 치게 됐습니다. 지금은 의사를 하고 있지만요.
하버드에서 풍물 소리가 울린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질 않았다. 멀리까지 울려 퍼지는 북소리, 귀청을 째는 쇳소리. 우리야 그 장단을 앞세워 교내 시위를 하곤 했지만… 글쎄, 미국 대학에서도?
박: 하하, 똑같습니다. 아유, 그때 한 번 오셨으면 아마 놀라셨을 겁니다. 하버드 캠퍼스에서 데모 같은 거 하면 늘 저희가 나가곤 했죠.
퍼: 미국에서는 학내 시위 이슈가 뭡니까?
박: 인종 문제하고 사회적 이슈, 뭐 그런 것들이었죠.
그의 부전공은 철학이었다고 한다.
박: 유물변증법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영미법, 분석철학 중심이라 가르칠 사람이 딱 한 사람 밖에 없었어요. 학생들 사이에는 제법 인기가 있는 분야인데도… 로버트 터커(Robert Tucker)가 쓴 <맑스 엥겔스 리더(The Marx-Engels Reader)>라는 책이 있죠? 보통 빨간 책이라고 부르면 아는데. 그거하고 <자본론> 같은 걸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절 사로잡은 건 헤겔이었습니다만… 맑스는 하버드에서 철학자가 아니라 정치학자로 분류됩니다. 진리를 추구하던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죠. 맑스가 헤겔의 적자라는 의미에서 학부 때는 헤겔 공부를 더 많이 했습니다. 물론 헤겔이 더 난해했던 탓도 있지만…
박경신 씨가 풍물패에서 주로 공부한 것은 한국 역사라고 했다.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한 줄씩 번역하며 읽는 방식이었다. 우리의 대학 체험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꽤 놀라웠다. 유물변증법과 역사야말로 이른바 의식화의 기초 과정이 아니었던가. 더군다나 풍물이라니.
과학자를 꿈꾸던 박경신씨는 결국 로스쿨을 졸업한 미국 변호사가 됐다. 그가 왜 고교 시절의 꿈을 접고 로스쿨로 방향 전환을 했는지는 깜빡하고 묻지 못했다. 아마도 술잔이 적지 않게 오고 간 탓이리라. 그렇지만 그때는 마치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야기를 듣다 가끔 그가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사실을 잊기조차 했으니까. 변호사가 된 박경신 씨는 주로 소수 민족 문제와 도심부의 빈민층 문제를 주로 맡게 된다.
박: 주로 도심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민권이나 노동과 관련된 부분들이었죠. 물론 그 문제들을 체제 내적으로 푸는 과정이었습니다만… 라티노, 한국인 식당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일이라든가, 소수 민족에게 불리한 대중교통정책 관련 소송들을 맡았었죠.
LA는 주거지가 상당히 넓게 퍼져 있는 지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하철로는 이 넓은 지역을 감당하기 힘들고 세밀하게 얽혀 있는 버스 노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도심 한 가운데의 다운타운과 부유한 백인층이 살고 있는 외곽을 잇는 지하철만 계속 만들었다는 것. 반대로 도심의 빈민 지역 사이를 잇는 버스 노선은 좀처럼 만들지 않기 때문에 인종 차별로 소송을 걸었다는 것이다.
박: 인종차별이다, 이거죠. 그래서 소송에서 이겼어요. 그런데 이건 이미 1960년대 와츠 폭동 이후에 나온 <크리스토퍼 리포트>에서 지적한 것이었거든요. 당시 인종폭동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도심의 대중교통 정책이라고 결론을 냈던 겁니다. 도심에서 차가 없는 사람들이 장을 보러 가는데, 버스가 1시간에 1대밖에 안 오는 거죠. 실제로는 20분에 1대씩은 와야 되는데… 이런 문제들이 바로 민중들의 삶을 억누르는 겁니다. 그게 폭발한 게 와츠 폭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후 30년 동안 LA 시정부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겁니다. 그게 바로 인종차별이라는 거였습니다.
법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인지’를 했는가 아닌가는 매우 중요한 것이거든요. 교통은 경제의 핏줄 아닙니까? 폭동 이후로 그곳 경제는 계속 악화됐습니다. 오히려 와츠 폭동 이전에는 흑인들이 호텔도 갖고 있었고 일정한 상권도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들이 전부 파괴되었습니다. 지금 흑인들 지역에 가보면, 가게가 세 개 건너 하나씩밖에 없어요. 나머지 두 개는 다 문 닫은 거죠. 30년 전의 보고서에서 이미 지적한 사실인데도 하나도 개선된 게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스스로를 소수 민족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수 중의 일부로 볼 것인가라는 문제로 갈등한다는 것. 성실한 탓에 일정한 부를 축적하고 중산층에 속하는 한국인들의 경우, 사회 내의 차별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박: 예를 들어서 한국인들은 24시간 가게에서 일하느라고 자식들에게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다 마약이나 범죄에 빠지는 경우, 그게 경제적인 문제 그러니까 계급적이거나 계층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문화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어떤 인종적인 문제나 계급적인 문제가 사안으로 떠올랐을 때 한국 재미동포들이 상당히 우왕좌왕 합니다.
가령 ‘소수민족 특례법 폐지안’이 올라왔을 때, 한국인들 내부에서 “아이, 우리 자식들 공부 잘하니까 그거 폐지되면 대학교에 더 많이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나옵니다. 실제로 그런 생각으로 지지하는 분들도 많았죠. 그런 생각을 불식시키는 게 제 활동 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대학교 간다고 성공하는 건 아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승부는 대학교 이후, 그러니까 취직한 다음이라고 말이죠.
미국 거주 한국인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나 중국 동포들에 대한 우리의 멸시와 상대적 우월감 또한 민족적 폐쇄성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민족적 기질이 원래 그런 것일까? 예컨대 지정학적 문제, 그러니까 잦은 외침에 강박 관념 갖은 게 생겨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원래는 안 그랬는데 식민지적 근대화, 그러니까 비합리적인 근대화를 거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까?
2. 독점을 깨라
박: 레이블링, 혹은 사람들을 자꾸 어떤 그룹의 일원으로 규정하려고 하는 것, 이런 게 실천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레이블링이 가지고 있는 어떤 역사적인 무게가 있기 때문에, 그걸 자꾸 개인들에게 감당하라고 하는 건 힘든 일입니다.
내 상표는 뭐다, 라고 붙이지 않아도 쓸만한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그런 것들을 그 아이디어별로 모아서 좋은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야합니다. 사람별로 분류를 하기 시작하면 ‘쟤는 어디 계열이야’ ‘쟤는 어디 파야.’ 이런 식으로 되면 곤란하죠.
인터뷰는 꽤 자유분방하게 진행됐다. 그러다보니 앞에 쌓아놓은 술병도 어지간히 많아졌다. 박경신 씨가 호기있게 술잔을 딱딱 내려놓는 소리도 점점 커졌다. 이야기의 갈피도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자꾸 흘렀다.
박: 아무래도 좌파들은 자유잖습니까. 헤겔이 기본적인 문제를 푼 다음부터가 사실 문제인데, 그 이후로 인간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당위이자 기본이라는 것이죠. 패션(Passion)들, 제가 영어로 번역된 걸 읽었으니까, 예, 그 열정들이 거미줄같이 서로 얽힌 관계 속에서 당위가 현실로 다가온다, 이런 거. 그 속에서 결국 좌파들은 어떤 자유인가, 그러니까 나의 자유는 틀림없이 헤겔의 어떤 변증법적인 시스템 속에서 뭔가 올바른 것일 테다, 그런 막연한 기대를 갖는 거죠.
지나간 이야기지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줄 안다. 이상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상적인 것이다, 라는 헤겔의 주술을. 박경신 씨가 그 기억의 덤불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박: 미국에 있었을 때에도 제가 ‘맑스주의에 심취했다’ 이런 건 절대로 아니었어요, 절대로. 단지 주변의 어떤 실질적인 문제들을 풀려는 사람들하고 자꾸 대화를 하다 보니까 이 사람들의 사상적 배경을 접하게 되고 ‘아! 나도 좀 알아야 되겠다’ 그런 생각에서 공부를 시작했던 겁니다. 결국 맑스주의가 추구하고 있는 게 뭐냐? 그건 진실에 대한 믿음이다 이거죠.
그런데 어떻게 보면 상당히 건달적인 게 있거든요? 뭐냐면 진짜 경험론자인 칸트나 데이비드 흄과 같은 사람들의 고민을 100% 깰 수가 없어요. 깰 수가 없는데도 결국엔 ‘우리는 이거다! 이게 올바른 삶이다.’ 그렇게 나가는 거거든요? 그건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결국에는 기독교도 일종의 자위고 맑시즘도 일종의 자위라고 봅니다. 그럼 왜 경험주의가 필요하냐?
박 : 미국에 살면서도 저는 그런 어떤 이상을 현실화하려는 게 아니고, 현실을 더 현실화하려는, 그러니까 현실을 더 합리적으로, 현실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노력들을 조금 더 열심히 하자는 것 뿐이었죠. 어쨌거나 현실을 보다 현실답게 만드는 활동 속에서, 심지어 그게 리버럴리스트다, 개량주의자다라고 비판받더라도, 그 속에서 현실의 모순이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이게 모순이라는 중의가 모아졌을 때 변화도 가능할 겁니다.
박경신 씨가 이야기 틈틈이 강조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경험론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실리적이고 실증적이어야 한다는 것. 웃으면서 간혹 자신의 이야기가 좌우로부터 동시에 비판받기도 한다면서, 자신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아마도 자신도 원하지 않는 어떤 선이 자기 위를 지나가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리라.
박: 교수들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전문 분야를 빨리 정하고 그것만 해야지, 딴 거 하기 시작하면 ‘왜 내 밥그릇 뺏냐’고 공격 들어옵니다. 완전히 왕따 당하죠. 그러니까 분과를 넘나드는 공부가 이뤄지지 않아요. 학자들도 그러니 직업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그런 걸 하지 않으면 전체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거든요. 활동가들, 학자들 그리고 정책적인 결정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공동 활동, 공동 논의 없이는 참 힘들다고 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한국 사람들은 누구를 만나도 운동권이에요. 와서 느낀 겁니다. 사회 전체가 역동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기층 민중 누구를 만나도 다 변화에 동의하고, 좋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죠, 누구나 정치적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 개인의 생활들은 학연, 지연, 혈연에서 자유롭지 못하거든요. 그건 좌우를 가릴 것 없이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념과 비젼을 갖지 못한 채 논리 이전의 혈연성, 친연성을 강조하는 것, 결국 그 놈의 ‘연’이 문제다. 합리성과 논리를 넘어서는 그 ‘연’과의 동거를 박경신 씨가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박: 자유기업센터인가요? 공병호씨가 하던 거. 물론 그 의도는 상당히 썩은 것일 수 있는데, 그 아이디어 자체들은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면이 많이 있다고 보거든요? 예를 들어서 자본주의라고 했을 때, 자본주의는 ‘레쎄 제 페얼’,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라, 그런데 그 앞에 숨겨져 있는 룰을 지키면서 제대로 하라는 거거든요? 그런데 한국사회 같은 경우엔 룰이 없다구요.
그럼 그 룰이 뭐냐? 그 룰을 밝혀 내자는 거거든요. 그 룰을 그 밝혀 내는 과정에서 이 사회의 모순이 드러난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왜 대기업들이나 정부는 그렇게 독점규제법을 스스로가 어겨 가면서도, 왜 농부나 농민이나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그 같은 배려를 하지 없는가? 만약에 실제로 독점규제법을 제대로 적용할려면 끝까지 적용하자는 거죠.
박경신 씨는 변호사 정원제가 잘못이라고 했다. 밥그릇 싸움이라면 견해의 차를 뛰어넘어 대동단결하는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자칫하면 스스로를 고립시킬 수도 있는 주장이다. 그가 해외파라 철 모르는 소리라고 몰아부칠 사람도 있을 테고, 미국 변호사니까 그만큼 경쟁력이 있어서 하는 소리 아니냐고 역정을 낼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의 견해는 매우 단호했는데, 그건 이른바 독과점이라는 거였고 자본주의 룰에도 맞지 않는다는 거였다. 듣기에 따라서는 그가 풀리지 않는 모순, 그러니까 시스템의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는 느낌을 준다. 요컨대 이것도 제대로 못하는 게 무슨 자본주의냐는.
박: 법치주의와 시장경제는 표리관계에 놓여 있거든요. 그 법령에 대한 실증적인 조사 없이 그냥 자본주의는 비인간적인 거다, 이렇게 이야기해서는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자본주의 체제가 잘못됐다면 어떤 조항이 어디서 잘못돼서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 그걸 밝혀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게 ‘반독점법’입니다. 앤타이-트러스트 로(Anti-Trust Law)라고 그러죠? 그게 그 경제법의 어떤 외부적인 경계를 짓고 있는 거거든요? 예를 들어서, 스탠다드 오일이나 마이크로소프트나 벨 이런 기업들을 국가 스스로가 다 쪼개 버렸단 말이에요? 특별히 그 사람들이 기업을 비도덕적으로 운영했다, 이래서 그런 게 아니거든요? 자본주의의 어떤 한계를 보여주는 거란 말이죠. 그런 기업들을 깨부수지 못하면, 자본주의가 살아 남을 수 없다라는 걸 보여 주는 거였죠.
그런데 그 공부를 하다보면, 결국에는 사유 재산의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사유 재산의 한계가 나오고, 사유재산의 어떤 공적인 한계, 공법적인 한계들이 나오는 거고. 그럼 도대체 사유 재산의 실체가 뭐냐? 경제학자들, 법학자들이 이런 점에 대해서 보다 공부를 많이 하고 그런 공부가 활동가들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가 지금 총체적인 난국을 겪고 있는 게 저는 어떤 레이블링, 그러니까 사람들을 자꾸 어떤 그룹의 일원으로 규정하려는 데서 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박경신 씨는 독과점이 자본주의 스스로 안고 있는 모순이라고 했다. 경쟁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부문이나 직업에 대한 허가제들이 전부 폐지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룰에 따르자면 소비자 보호의 범위를 벗어난 허가제는 모두 독과점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지식에 대해 독점적 지위를 누리려고 법적 제한을 두는 것 역시 불공정한 것이다. 변호사 정원제가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임은 물론이다.
박: 꼭 공익사건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서, 임대차계약에 문제가 생겨서 보증금 못 받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건 십만 원 짜리 사건이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런 거 맡아줄 수 있는 변호사 한사람이 더 필요한거지, 공익을 여가로 하는 변호사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진짜 먹고살기 힘들어서라도 공익 활동을 해야 되는 그런 변호사들이 나와야 되는 체제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내 집 앞마당을 쓸면 세상이 좋아진다”. 박경신 씨가 법조계 내부에서 변호사 정원제 문제를 집요하게 문제삼는 건 바로 그런 신념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앞마당은 정부에서 치워야 한다”는 ‘농담’도 덧붙였다. 왜? 세금 내니까!
박 : 렌트, 지대라는 게 있잖아요. 그게 자본가들에 의해서만 관철되는 건 아닙니다. 지식인들에 의해서도 관철되고 있죠. 지식인들의 경우에는 어떤 검증도 없이 관철되고 있으니까 더 문제죠. 이 단어가 독일 단어인지, 대륙법 단어인지 혹은 영미법 단어인지 알고 있다, 그거 하나만 갖고 혹은 그런 류의 지식 하나만 갖고 나는 다른 사람보다 월급 세 배를 받아야 된다, 이런 겁니다. 그거 진짜 문제죠. 그런 식으로 어떤 부가 계속 상층부로 흡수되는 체제가 지금의 한국입니다.
한국에서는 공증을 한 번 하는데 10만원 정도 든다. 반면 미국에서는 공증을 거의 공짜로 받는다고 한다. 은행에서 받는 경우도 있고. 유료 공증 제도 역시 변호사의 독과점을 유지하는 제도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박: 한국에서는 법적으로 문서를 낼 때에는 직능 단체에 가서 10만 원을 내지 않으면 인정을 안하겠다, 법적 효력을 인정해주지 않겠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꽁짜로 받을 수 있어요. 은행에 가면. 꽁짜는 아닌데 거의 꽁짜죠. 10불. 사안에 따라선 그냥 꽁짜로 해 줘요. 그렇죠. 수입인지보다 싸죠.
공증이란 건, 어떤 사람이 여기에 서명했는가 안 했는가를 누가 증인으로 서줄 수 있다, 이거 아니곤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실제로 재판상의 공증도 미국에서는 더 이상 공증된 문서와 공증되지 않은 문서를 가르지 않아요. 옛날에는 공증된 문서와 공증 안된 문서하고 갈랐어요. 그런데 지금은 자필 서명만 있으면 더 이상 그걸 문제삼지 않죠. 왜냐하면 결국 필적 감정을 통해 진짜 서명을 했는지 안 했는지 가르면 되니까. 증인이, 그것도 공적 증인이 왜 필요하냐 이거죠.
3. 운명 공동체 , 조국
박: 의료사태 때도 참 우스웠던 게- 아니 왜 보건부장관이 나와서 의사들의 수익을 보존해 주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이걸 하겠다. 하∼ 아니 그럼 농민들은 그거 보고서는 “잘하고 있다”, 이렇게 해야 됩니까? 왜 농민들 노동자들의 수익을 보존해 주기 위해선, 이렇게 해야 되겠다는 얘기는 안나옵니까?
퍼: 그런 얘기는 절대로 안 나오죠.
박: 왜 구조조정 할 때는 노동자들의 수익을 보존해 주기 위해서 이렇게 해야 된다는 말을 안하죠? 노동자들 숫자가 더 많아요, 의사들 숫자가 더 많아요? 그러니까 실제로 자본주의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순, 또는 자본주의를 실제 룰대로 적용시켜 보자 이거죠. 누가 살고 누가 죽는지.
퍼: 그런 나라가 있습니까, 혹시. 그런 자본주의를 진짜 룰대로 실천하는 나라가?
박: 그래도 미국이 할만큼 했죠. 그런데 그 안에서도 모순을 밝혀 내려고 계속 노력을 하고 있는데, 결국엔 그 김을 다 제국주의에서 다 빼버리니까. 내부의 문제들을 전부 다 밖으로 가져나가 버리니까… 그러니까 결국엔 국제연대가 필요한 거거든요.(모두 웃음)
내부에서 자본가들이 손해보겠다 싶으면 공장을 그냥 밖으로 옮겨 버리거든요? 밖으로 옮겨 버리는 이유가 밖의 노동력이 싸고, 노동법, 룰이 제대로 적용이 안 되니까… 그러면 제 3세계에서 룰이 제대로 적용되게 떨쳐 일어나야 된다구요. 그러면 자본가들이 갈 데가 없으니까, 그렇게 돼야 하는데 미국 노조들은 국제연대에 관심이 없거든요. 아직까지는.
참, 그는 왜 한국으로 돌아왔을까?
박: 미국에서 변호사 활동하면서 일이 너무 많아서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그렇잖아도 가 보고 싶었던 조국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하니까 앞뒤 안 가리고 그냥 왔습니다. 와서 한 2년 동안 공부 많이 했습니다.
퍼: 지금 “조국”이라는 말이 꽤 미묘하게 울리네요.
박: 다른 건 없고 그냥 가족의 연장선 아닐까요? 망해도 같이 망할 사람들, 그 정도죠.
퍼: 미국 시민권은 갖고 계십니까?
박: 예. 특별히 가질려고 한 건 아닌데, 조국에 올려고 했더니 그게 없으면 군대 가야한다네요. 상당히 아이러니하죠. 조국에 와서 일 할려고 했더니 일하지 말고 군대 가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땄습니다.
더 큰 가족으로서의 조국.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미묘한 지점이다. 사실 우리는 “조국” 같은 단어는 절대 안 쓴다.
박: 한국인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건 봉건적인 사고죠. 내가 인간적으로 살고 싶다, 또는 뭔가 사회를 위해서 살겠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그 일을 어디서 제일 잘 할 수 있겠냐는 겁니다. 그건 한국이지, 아프리카의 어디는 아니거든요. 미국도 마찬가지지만, 상대적으로 제가 잘 알고 있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퍼: 그런 점에서 보면 오히려 미국이 더 좋은 무대일 수 있지 않습니까?
박: 미국에서 안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어쨌든 여태까지 살아온 걸 봤을 때 한국과 미국에서 좀 더 뜻있게 살 수 있겠다, 나는 인간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살 수 있겠다는 거죠. 한국은 제게 그런 곳입니다.
그의 표현처럼 우리는 ‘망해도 함께 망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의 공동체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불순한 시선들이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 경계를 넘나들며 사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히진 않을까?
“결국 당신은 결국 외부인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떠나고 싶은 이들로 득시글거리는 이 땅에서, 당신이 느끼는 운명이란 혹시 사치스러운 것은 아닌가?” 여전히 안과 밖을 가르고 싶어 안달인 우리의 은밀한 욕망은 그렇게 조잘댄다. 어떤 선을 긋고 안과 밖을 구분하려는 못된 욕망들. 누군가를 자꾸 그 선 밖으로 밀어내려는 불순한 의지들.
퍼: 박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이 기본적으로 합리성의 원칙에 입각해 있고, 그런 점에서는 상당히 배울 부분이 많다고 생각이 되는데…… 한편으로는 그런 것들이 한국의 정치현실이라는 측면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다 맞고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될 바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한국 사회를 움직여 나가고 하는 것들은 도리어 더럽고 냄새나고 권력들, 파워 게임들이란 말이죠. 사실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과 이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 아닙니까?
박: 초연하다는 것 말이죠?
퍼: 예컨대 한국에서 일하는 데 있어서 그런 부분이 소외감의 원인으로 작용하진 않나요? 그러니까 국외자적 시선이라는…
박 : 아니 그런 것 같진 않아요. 오히려 어떤 원론적인 변화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서는 동의해 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단지 거기까지 가는 게 힘들다, 그리고 현실의 어떤 요구들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런 문제제기는 있죠. 글쎄요. 제가 거기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퍼: 이런 식의 질문은 어떻습니까? 자본주의적 합리성조차 끝까지 밀고 나가면 자본주의를 넘어서게 된다는 생각이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 과정에서 마키아벨리즘적인 수단을 쓰는 게 오히려 적절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꽤 된단 말이죠. 물론 그 때문에 사태가 더 많이 꼬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만.
박: 그렇죠.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어떤 이상이나 비전을 갖고 있어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학연, 지연, 혈연처럼 봉건적인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관철하려고 하는 거 말씀이죠. 자, 그럼 혁명적인 당파성의 입장에서… 예.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요. (웃음) 그게 용납되어야 하는 거냐? 음. 글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러분들은.
퍼: 그 문제는 아무래도 ‘조직의 문제’였다고 생각되는데요.
박: 그렇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조직이냐? 아니면 민주주의를 내부적으로 관철하는 조직이냐. 글쎄요. 뭐 운동하는 집단은 내부적으로 민주주의를 관철하는 집단이어야겠죠. 그런데 솔직히 전 잘 모르겠습니다. 아까부터 계속 인터뷰하면서 좀 느낀 게, 저는 주변적인 인물이었고, 한가운데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말씀드리기가 좀 버겁습니다
퍼: 아닙니다. 공박할려고 하는 의도는 전혀 없구요. 그런 원론적인 올바름이나 객관적인 올바름, 실증적인 올바름과 그걸 풀어야 하는 실제 현실은 다르니까… 이게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다 꾸어 본 꿈일 거고 그 꿈이 좌절되는 과정 한 복판을 지나왔고… 뭐 그런 것이었습니다. 한번 ‘박경신’이란 인간과 그 인간이 가진 사상은 뭔가, 이런 걸 한 번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박: 서로 물어보고 싶은 거죠. 뭐 서로 물어보고 해답이 없으니까… 맑스같은 인간이 또 나오기 전에는..
우리는 서로 웃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술자리는 다시 이어졌다. 우연히 그의 동료 변호사들과 합석을 하게 됐고 그 자리는 좀더 흥겨운 분위기였다. 그리고 보다 내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간 것 같기도 하다. 한결 친근해진 느낌이었다. 뒤엉킴. 아마 그럴 것이다. 억지스럽게 그를 선 밖으로 밀어내거나 선 안으로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그의 20대가 우리와 비슷한 궤적을 그렸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행여 그 공감이 다른 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선으로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