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네트워크그룹대표 배재광

2000년이 다 가던 지난 12 30, 배재광 씨와의 인터뷰를 위해 서초동으로 향했다. 
서울대 법대 출신에다 사시 합격한 사람이니, 온갖 종류의들이 난무하는 서초동에서 만나는 것은 당연했다고 생각했다.

배재광 씨의 약력은 이렇다. 1965년生, 1984년 서울대 법대 입학, 1990년 서울대 법대 졸업, 1996년 제38회 사법시험 합격. 그러니, 배재광 씨의 직업을 현직 법조인으로 기대하기 십상일 것이고, 그건 상식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상식을 넘는다,는 게 우리 <퍼슨웹> 인터뷰이의 특징 아닌가. 배재광 씨는 판검사도 변호사도 아니고 벤처기업인이었다. 아니, 사시 합격했는데? 연수원 1년 다니다 때려치웠단다. 그리고 벤처 사업에 여념이 없단다.

가끔씩 명함 수집가라 부를 만한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자기 이름이 적힌 점에서는 똑같지만, 소속 집단의 이름은 전혀 다른 명함을 여러 장 들고 다니는 사람.. 이 배재광이란 사람도 그런 종류였다. 그렇지만 이건 해도해도 좀 너무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벤처네트워크 그룹(벤처 캐피털, 벤처법률지원센터) 대표, ()엔씨소프트 이사, () 엔키노 이사, () 한글과컴퓨터 감사, ()Law Media Group 이사, 벤처기업협회 자문위운, 인터넷 기업협회 이사, 전경련 법제도 분과위원회 자문위원, 정보통신진흥협회 ASP 컨소시엄 자문위 부위원장, 한국인터넷 정보센터 위원, 카이스트 자문위원, 한국인터넷 쇼핑몰협회 회장, 퍼시픽벤처스 대표이사……

1. 벤처네트워크그룹, 법철학회, 서울대 법대, NL

휘일: 대학은 84학번이고 고향은 경북 울진, 대구와 서울에서 학교 생활하다가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입학. 맞나?
배재광 씨: 그렇다.

휘일: 듣기론 대학 다닐 때 운동권이었다던데, 대학 시절 이야기 좀 해 주면
: 뻔하게 산 사람들 하고는 다소 좀 다르게 살았다. 난 선배들이 한 운동이라든가 활동에는 잘 적응을 못했다. 난 재밌게 살고, 젊게 살고, 사람들하고 많이 어울리고, 그런 따뜻한 관계를 좋아했고 추구했는데, 그때 전반적인 상황이 내 적성과는 잘 안 맞았다. 

: 사람들하고 만나는 게 별로 편하지 않았다. 2학년 1학기까지 일하다가 정리하고 한 1년 쉬었다. 그 동안 공부도 하고 고민도 하고 하다가, 3학년 2학기 때 내가 한 번 시작해 보아야겠m다 싶어, 내가 생각하던 대로 동아리를 만들기로 했다. 그때는 언더활동이 일단 다 오픈된 상태였고. 물론 학회 중심이었지만, 학회란 패밀리 체제가 외화된 정도였다. 난 학회보다는 동아리를 지향했다.

 ………. 패밀리,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이다. 요즘 청소년이나 대학생들이야 패밀리 하면양군(YG) 패밀리처럼 같은 기획사에 속한 가수들 명칭을 생각하거나 마피아 조직을 연상할지도 모르겠지만, 80년대에 대학가에서 패밀리(정확히는 빼밀리, 약칭“)란 같은 지하 학생운동 서클에 속한 집단을 일컫는 말이었다. 속칭집사람이라고도 하면서.

‘4대 패밀리 ‘5대 패밀리니 하는 것도 있었는데, 패밀리에 대해 말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기밀을 다루듯 속삭임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나의 큰 패밀리 안에, 여러 개의 학습 서클이 있었고, 누가 거기에 속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밀에 가까운 일이라서 패밀리에 관한 정확한 사실을 알기 어려웠다. 소문과 전설이 더 많았다. 
패밀리가 드러나는 순간이란 무시무시한 그림표가 첨부된 안기부나 보안사 따위의 수사 발표날이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이 또한 고문이나 짜맞추기에 의한 엉터리가 많았을 것이다. 1년 이상 사귄 친구가 알고 보니 같은 패밀리 소속이라 놀라던 순간들도 있었다. 상상을 초월한 폭압과 그에 대해 끓어오르던 저항이 공존하던 그 때가 아니고는 다시 볼 수 없는 기기묘묘한 역사적 유산이 아닐 수 없다
. 
여하튼 지하 패밀리가 학회 형태로 오픈되어 대중조직으로 변신을 도모한 시기가 85년 말∼86년 초였다. 배재광 씨가 2학년에서 3학년이 되던 무렵에 해당한다.

: 86년부터 동아리를 운영해서 87년에는 한 30명 정도의 후배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동아리 이름은법철학회였다. 87년 당시 법철학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86, 87학번이라면 누구나 그 시절이 가장 보람있고 즐거웠던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정도로 우린 재밌게 살았다.

휘일: 90년에 졸업한 걸로 들었는데, 졸업 전에 군대에 갔다 왔나?
: 아니, 수업 안 듣고 하다 보니 학사경고 맞고 그래서 6년만에 졸업한 거다.

휘일: 졸업 후에는?
: 우리 동아리는 이념보다 오히려 정서적 유대 관계를 더 중시했다. 바깥에서 보면 집단적인 패거리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렇기에 졸업했다고 해서 맏형 격인 내가 빠질 수가 없었다. 애들 고민 계속 들어줘야 했고 또 돌봐주어야 했다. 신입생들 교육도 담당하면서 92,3년까지 계속 그렇게 했다.

……… 법철학회 동아리를 두고 외부에서는깡패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만큼 결속력이 강했다는 뜻이란다. 왜 검찰에서 인사 단행되어 후배가 상관이 되면, 사시에 먼저 합격한 선배들이 동시에 옷 벗는 진풍경이 벌어지지 않는가. 한국의 엘리트 집단으로 자처하는 검찰이 거의 깡패 집단과 똑같은 행태를 보이면서. 어쩌면 배재광 사단도 그렇게 외부인에게 비쳐졌는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이념보다 정서적 유대를 더 중시했다는 이 대목은 한 번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내 생각에 배재광 씨의 이러한 성향은 무엇보다 그의자본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는 주요한 요인이 된다고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적극적으로 기업활동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배재광 씨는 인터뷰에서 시종 자본의 합리화, 인간화를 강조했다. 그는자본()’에 대해서 인간적인 접근이 가능하다고 믿는 듯했다.

휘일: 그런데, 정서적 유대 관계를 중시하고 이념보다는 인간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 성향은 대체로 소위 NL(National Liberation : 민족해방)로 분류되는 정파에서 잘 확인되는데..
법철학회는 어떤 정파에 속했나, 아님 어느 정파에 가까웠나?

: NL이었다.(역시!)

휘일: 내가 알기로 그 당시 법대는 백태웅 씨의 영향력으로 인해 CA(Constituent Assembly: 제헌의회파) 세력이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법대 학생 잡지인 Fides CA 성향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서로 알력은 없었나?

: 아니 심했다. NL쪽은 주로 널널한 애들이었는데 CA쪽은 훨씬 전투적이었고, 원래 CA 원조가 게이트라는 곳이었는데 그 게이트가 백태웅 선배가 있었던 곳이고 거기서 피데스가 나왔고.. 그러니 꽤 뿌리가 깊지. 내 이전까지는 그랬고 86년 당시 나처럼 생각하던 사람은 나와 다른 한 친구 둘 뿐이었다. 그래서 그 친구가 만든 게법사회학회‘, 내가 만든 게법철학회였다. 그 이후로 법대 선거에서 NL이 계속 이겼다. 내가 학교를 떠나 있던 88, 89년에는 CA에게 빼앗겼지만 90년 이후는 다시 우리가 잡았다.

휘일: 그럼 법대 내부 조직만 있었나 아니면 법대 외부 조직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 상태였나?
: 아니, 나는 조직 활동은 하지 않았다. 법대 이외의 사람들과는 인간적인 관계만 맺었지 조직을 꾸리지는 않았다. 일은 86학번 이후의 후배들이 주로 했고 조직 활동도 후배들이 했지 나는 하지 않았다. 서울대 전체의 NL쪽 애들하고는 조직적 관계는 없었다. 그렇지만 다 잘 알았다.

휘일: 농담 같은 진담으로 NL쪽 운동권들은 품성이 좋다고 하는데, 90년대 이후 거대 이념의 도태 속에서 많은 조직이 와해되었지만 조직 자체보다 품성이나 인간적 유대를 중시하였다면 아직도 사람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을 듯도 한데, 어떤가?


우리는 아직도 모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 그렇다. 우리는  84학번부터 2000년 학번까지 한 해에 두세 번씩 여전히 모인다. 92년부터 세운 원칙이, “약속을 정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조건 모인다, 취소나 연기는 없다는 것이다.

휘일: 그럼 그 모이는 수가 적지 않겠는데?
: 거의 8-90, 올해(2000) 100명 가까이 모였다.

휘일: 이 사람들이 차츰 성장해서 사회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될 것인데, 이 인적인 풀이 어떤 활동을 하기를 바라는가?
: 원래부터 우리 집단은 이념적 성향을 뚜렷이 하지 않았다. 솔직히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면 사회적으로 소중한 자원들 아닌가, 그러니 각자 자신들이 활동하는 영역에서 올바르게, 그렇다고 개인적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사회 전체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로 활약해주기를 바란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해서 사회 전체에 다양하게 퍼져나갔으면 하는 바램은 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정치를 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럼 우리는 그 사람을 적극적으로 밀어줄 작정이다.  나처럼 자본이 흘러 다니는 곳에서 자본의 합리화를 위해 힘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모아져서 나라가 잘 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라가 잘 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대목, 배재광 씨의 말 그대로이다. 아무리 반복해서 녹음기를 돌려도 배재광 씨가 이 말을 할 때 어색해 했거나 망설인 인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정말 그렇게 믿는 모양이었다. 나 같은 사람은 절대 쓰지 않는 말이라서, 좀 놀랄 수밖에 없었다.

2. 서초동에서 서초동으로
                      :
사업연수원에서 벤처법률지원센터까지

 
휘일: 96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는데, 사시준비는 언제부터 왜 하게 되었나?
배재광 씨: 93년부터 시작했다. 86, 87학번이 대학 졸업하고 군대 갔다 왔을 시점, 나도 방위를 갔다 왔는데 그 시점이 93년 무렵이었다. 92학번 후배까지는 풀로 봐주고 그리고는 우리도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법대를 나왔으니 사법시험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변호사가 되면 사회활동을 하는 데에 장점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법연수원의 공부 방식이 싫었다

휘일: 그런데 내 듣기론 당신은 사법연수원을 1년만 다니고 자퇴하였다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가?
: 뭐 불미스러운 일이지. 일단은 연수원에서 별로 안 좋았고, 적응도 잘 못했고, 연수원장하고 사이도 나빴고.. 연수원 다닐 때 난 불성실했고. 개인적으로 연수원에서 강요하는 학습 스타일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이었다.

휘일: 어떤 것이었나?
: 무조건 외우는 거다. 판결문 외우고, 그럼 점수 잘 나오고. 그리고 글을 쓰는 데도 몇 칸 띄우고 몇 줄 들여쓰고, 3칸 들여써야 하는데 2칸 들여쓰면 점수 깎고, 뭐 그런 식이었다. 제목 쓸 땐 몇 칸, 그 다음 줄 쓸 땐 몇 칸 띄우고 등등.. 난 그런 데 적응도 못했다. 싫기도 했고.

휘일: 가만, 가만 있어 보자! 소위천하제일 서울 법대사람들이 사법연수원에는 제일 많을 것이고, 그 사람들이 다 그렇게 교육을 받는단 말인가?
: 그렇다. 고등학교 다닐 때, 대학 다닐 때까지는 멋졌던 친구가 이런 과정을 마친 다음에는 거의 규격화된 방식으로 성격도 고착화되고 사고방식도 굳어지고 만다.

휘일: 그럼, 그 잘난 천하제일 서울 법대 애들을 데려다가 완전히 창의성은 거의 거세해 버린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겠나?
: 가장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애들을 교육시켜 가장 가능성이 없는 애들로 만든 교육 체계의 가장 정점에 있는 게 바로 사법연수원이다. 악명 높은 사법시험 객관식 문제보다 몇 술 더 뜨는 게 사법연수원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유치한 시험만 계속 치는 곳이다.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사시에 합격하려고 난리일까. 정말 이런 굴욕을 당하면서까지 판검사, 변호사가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그럼 결국 법조인들 가슴에 아로새겨진 자부심이란 그 굴욕의 과정을 견뎠다는 인고의 심리적 보상에 지나지 않는가.

휘일: 1년 다니다 나올 때, 갈등은 없었나?
: 일단 자퇴서를 내기는 했지만, 반드시 자의로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타의도 있었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연수원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인터넷을 개인적으로 공부하고 탐색하던 과정이었고, IT에 관심도 많았다. 97년도엔 연수원 다니면서 벤처법률지원센터를 아예 냈다. 거기서 무료상담도 하고, 그러던 중이어서 연수원 나오자마자 무척이나 바빴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얻는 것도 있고 잃는 것도 있었다. 연수원 다니면서 이미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사법연수원생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었고, 그 관계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굳이 변호사 자격증이 없어도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사람들은 다 변호사가 될 것이라고 알고 있어서 내가 적절히 그것을 활용한 면도 있었다. 굳이 나서서 부인하지는 않았다.

휘일: 그럼 연수원 다닐 때부터 이 방면으로의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말인데?

: 2가지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연수원을 마치고 나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는 지역공동체를 만들어보아야겠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마 우리나라도 IT산업이 곧 열릴 것이니 미리 선점해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후배들에게 어떤 길을 열어주고도 싶었다. 사실 사법연수원 마친다고 해도 갈 데가 없거든. 그래서 내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놓는다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내 혼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길, 벤처와 관련 있는 로펌, 로펌 아닌 로펌 같은 것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2가지 가운데 이쪽을 선택한 거다.

휘일: 그럼 연수원 다니면서 벤처법률지원센터를 열었을 때, 누구와 함께 일했나?
: 내 후배들하고였다. 연수원에 함께 있던 후배들.

휘일: 벤처법률지원센터는 주로 어떤 일을 하는 곳이었나?
: 주로 컨설팅을 했다. legal적인 컨설팅. 법률적인 것만을 생각하지는 않았고 경영 컨설팅도 함께 했었다. 나는 법이라는 백 그라운드를 가지고 경영이나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휘일: 법률자문은 이해가 되는데 경영 컨설팅은 따로 훈련을 해야 할 듯한데, 어떻게 공부했나?
: 사실 제대로 된 훈련이 필요하긴 한데.. 그렇지만 내가 지금껏 살아온 과정이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는 것이었다. 또 누구보다도 나 자신 젊고 어린 후배들하고 대화를 많이 했고 고민을 들어주고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했으니, 그게 밑거름이 되었다. 
경영 컨설팅이라는 게 객관적인 사실을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더 중요한데, 설득하고 이해하고 해서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과정 전체가 컨설팅인 탓이다. 그런 일을 하는 데에 나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휘일: 벤처법률지원센터는 바로 법인으로 시작했나?
: 처음엔 무료 상담소였다. 연수원생은 공무원이라서 회사를 만들 수 없었고, 이름만 벤처법률지원센터라 하고, 98년에 많은 활동을 하다가 99년에 회사로 전환했다.

벤처네트워크그룹법률, 컨설팅, 자본 삼각편대

휘일: 돈은 어떻게 벌었나?
: 우리는 사람 자체가 자본이니, 컨설팅의 기본성격이 그렇고 나가는 돈은 별로 없었고, 99년과 2000 2년 동안 벌었다.

휘일: 현재 벤처네트워크그룹 대표이신데, 거기에 벤처법률지원센터와 함께 AT Ventures(벤처캐피탈)이 포함되어 있다는데 이건 창투사인가?
: 원래 퍼시픽벤처스라는 창투사를 운영하였다. 주택은행에서 자본 200억을 받아 한 회사다. 그런데 그 사람들하고 일하는 게 너무 힘들어 그만 두고, AT Ventures라는 창투사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애초에 11월 정도에 만들 생각이었는데, 경제상황이 너무 어려워서 자본이 다 안 들어와 1월이나 2월 정도에 시작될 것 같다.

휘일: 그럼 벤처네트워크 그룹이란 법률지원센터의 법률적 지원, 경영 컨설팅, 창투사의 자본 등을 삼각편대처럼 묶어서 관리하려는 것인데, 이건 자연스런 결합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참으로 야심찬 기획이라고 보인다. 이걸 바탕으로 다른 무엇을 꿈꾸는 것은 아닌가?

: 작년부터 투자 쪽 일도 함께 추진해 왔다. 법률 지원은 원래부터 시작한 일이고, 경영컨설팅은 법률지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 그렇게 잘 이해하지 않을 뿐이지. 우리 나라는 돈이 귀하고 돈이 가야할 곳에 못 가고, 이런 상황을 타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 자본 쪽 일을 함께 해야 한다. 작년 8월부터 개인적으로 돈을 조금만 벌면 가까운 기업에 투자하고 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모았고, 창투사로 전환한 것은 2000년이다.

휘일: 이런 모델이 많나? 법률, 컨설팅, 자본이 함께 결합한 사례가?
: 거의 없다. 무엇보다 법률 분야는 그냥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법률가를 부릴 수 있는 구조도 아니다. 우리 나라의 법조문화가 워낙 독특해서 그렇다. 나는 백 그라운드 자체가 법쪽이고 솔직히 나보다 법적 인맥을 많이 가진 경우는 거의 없다고 자부한다. 젊은 사람 가운데 8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학번까지 나보다 많은 인맥을 지닌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의문 하나. 컨설팅과 자본이 함께 있어 좋은 점도 있겠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컨설팅이 담당해야 할 임무 중의 하나는 당장 이윤을 얻을 수 없다는 이유로 투자자가 자본을 철수하려고 할 때 기업의 입장에서 투자자를 설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법률, 컨설팅, 자본그 모두가 함께 결합된 그룹이라면 컨설팅 업무가 결국 투자자의 입장에만 편향될 위험은 없을까? 그럴 경우 단기 차익을 노리는 투기성 자본의 횡행이라는, 더 나쁜 상황이 초래되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자본의 기본적인 속성이 이윤 창출이라고 하더라도 사회 공동의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 하는 사회적 제어 장치의 필요성은 부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마치 회계법인이 또 하나의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기업 윤리의 감시자 역할을 담당하듯
. 
아니, 보다 근본적인 의문 하나만 덧붙이자. 결국 이윤이 생긴다면 자본은 지구 끝까지라도 좇아다닌다. 그리고 이윤이 없는 곳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미련없이 떠난다. 그 속에서 꼼지락대는 인간들의 아우성이 어떠하든. 그렇다고 할 때 자본은 과연 인간적 합리화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3. 벤처의 장래 = 이 나라의 미래?
 

휘일: 벤처네트워크그룹을 운영하면 누구보다도 벤처의 현실과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텐데, 다들 어렵다고 하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배재광 씨: 지금 벤처가 어렵다는 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우리 경제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경제의 기초가 약해졌기 때문에 어려워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벤처가 작년(1999)에 워낙에 거품이 심했고 거기에 비추어볼 때 현재가 어렵다는 것이다. 2가지가 합쳐 있어서 어려움이 가중된 것이다. 
벤처 자체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작년과 같은 상황은 있을 수 없고 있었어도 안 된다. 7-80년대 부동산 투기, 8-90년대 주식 투기하던 돈이 몰려와서 벤처에 유입되었는데, 이건 머니 게임일 뿐 투자가 아니었다. 기업이 성장하고 그 가치를 평가받는 게 아니라 머니게임, 돈놀이에 의해서 뻥튀기된 것이다. 그럴 때를 생각하니 지금이 어렵다는 것이고, 정확히는 바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 탓에 어렵게 된 것이다. 지금이 사실 정상적인 상황이고 지금이 비정상적으로 이해되는 것은 지금은 비정상적이라 믿는 사람들 때문이다.

휘일: 벤처란 원래 어려운 거다? 그러니 지금이 정상이다?

: 그렇다. 지금이 정상이다. 기술과 마케팅으로 승부해서 성공해야지 돈놀이 가지고는 안 된다. 기업의 가치는 근본적으로 본질가치에 수렴한다고 보는데, 돈이라는 것이 본질가치를 직접적으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돈을 잘 이용해서, 좋은 인력을 쓴다든지 M&A를 잘 한다든지 해서 본질가치를 키울 수는 있다. 
작년 같은 경우 우리 나라는 펀딩 자체가 본질가치로 평가되었고 그게 거품의 원인이었다. 새롬 같은 곳이 대표적이다. 새롬은 별 가치 없이 돈이 모여들었다. 돈이 많이 모였으면 그것을 제대로 써서 본질가치를 증대해야 했는데, 새롬은 내세울 게 더 이상 없었다. 미래가치도 없고, 기술이든 마케팅이든 간에.

휘일: 벤처의 평가 핵심은 사람인가, 기술인가?

: 그 질문엔 이런 식으로 답할 수 있다. 보통 벤처 캐피탈에서 투자를 결정할 때, 그 회사의 기술은 10%, 대표이사는 30%, 경영진에 대한 평가가 50%, 마케팅 능력 등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휘일: 결국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인 듯한데, 대표이사를 평가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 이전 시대에는 자본이 중요했지만, 벤처는 무엇보다 사람의 능력이 중요하다. 경우에 따라 한 사람이 100명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더 큰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 벤처는 특히 어려운 조건에서의 싸움인데, 그 제한되고 힘든 상황에서 사람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돈을 배분하는 능력이 결정적이다. 한정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대표이사가 할 일인데, 그게 곧 비전의 제시이다.

휘일: 전반적으로 평가하여 앞으로 벤처의 전망은 어떻게 보나?

: 우리 나라는 경제주체들이 잘못된 관행에 익숙해 있다. 우리는 시장에 신뢰가 없다. 미국 같은 경우 사업을 하는데 자기가 실패할 수도 있지만, 사람한테 속아서 망하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시장에 상호 신뢰가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다. 시장의 핵심은 약속과 신뢰라고 보는데, 우리는 그 관행이 정착되지 못했다. 우리는 하면 다 같이 하고 빠지면 다 같이 빠져나가 버리기 때문에, 이 기술을 개발하면 어떤 부가가치가 생기고 그럼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이고 하는 예측 가능한 신뢰가 부족하다.

투자라는 것은 지금 투자해서 코스닥에 상장하는 것은 아니고 최소 2-3년 후에 상장될 수 있는데, 2-3년 후의 상황을 예측할 수는 없고 그러므로 투자는 계속되어야 한다. 물론 경기에 영향을 받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기본 투자는 지속되어야 한다. 근데 우리 나라를 보자. 주식시장이 어렵다고 하면 모두 다 빠져나가 버린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투자가 이루어지나. 또 지속적인 투자 없이 어떻게 경기가 회복될 수 있나. 2-3년 후에 주식 시장이 어렵다는 게 아니고 지금 어려운 것인데, 2-3년 후를 바라보는 투자도 함께 사라져 버린다. 시장에 신뢰가 없으니, 장기적인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결국 투기만 난무하는 것이다. 6개월 이내에 한탕!

휘일: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말인가?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만한 영역은 없나?

: 11-12월에 걸쳐서 투자자금이 한 3000억 정도 조성될 거다. 그 돈이 아마 2-3월 정도에 쓰일 것 같은데, 투자시장은 내년 상반기에 정상적으로 굴러가지 않겠나 싶고, 효과는 내년 하반기에 조금씩 나타날 거라 본다.

휘일: 어떤가,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능한가?

: 정치적 변혁으로 일거에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80년대식 사고에 의지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이다. 오히려 정치의 변화나 체제의 변화는 밑으로부터 사회의 광범위한 변화를 수반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루어지는 단계이고, 또한 그것이 그간의 변화를 완성시키고 시스템화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행위는 자기가 있는 영역에서 최대로 열심히 투명하게 하는 것이어야 하고, 나는 벤처 쪽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나마 벤처는 한국 경제 상황에서 거의 혁명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기존의 경영방식도 아니고 그야말로 조합적인 회사, 사실 벤처는 모두가 파트너다. 형식은 주식회사일지 몰라도 서로 파트너이고 그래서 주식도 나누어가져야 하고 스톡옵션도 가지고. 그래서 자율적인 성격이 강하고 기존의 기업과는 많이 다르다. 
벤처를 제대로 하게 되면 기업의 투명성이 상당히 제고될 수 있고, 자본주의 내에서 합리적인 자본주의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돈이 갈 곳에 가고 안 갈 곳에 안 간다는 것이다. 물이 흐를 곳에 흐르고 안 흐를 곳에 안 흐르듯이, 사회가 합리적으로 되고 투명해 지면 실력으로 승부하게 되고 공정한 게임이 가능해 질 것이다. 그럼 정현준처럼 사기 치고 하는 것은 통하지 않게 된다. 내가 이 분야에서 있는 이유는 그 싹들과 가능성을 여기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휘일: 당신 또래들은 지금 사회 각계에서 실무자들로 활동하고 있고 조금만 더 지나면 결재권을 행사할 것이다. 솔직히 그 또래들에 대한 신뢰는 어떤가?

: 구체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고, 다만 바램은 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든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든 간에 자신이 현장에서 구체적인 경험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만 어디로 가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과 천착하는 모습을 가져야 한다. 
예컨대 자신이 정치를 한다면, 정치 분야 가운데 복지라면 복지현장에서 일을 많이 해 봐야 한다. 노동이라면 노동현장에서. 그리고 나서 충분히 쌓여 현실을 이해하고 남을 설득할 수 있을 자신이 서면, 그때 가서 정치를 하든 정책 전문가가 되는 길을 가면 좋겠다. 지금 30대들은 질풍노도와 같은 80년대를 겪어 솔직히 겉늙기가 쉽다. 세상이 다 뻔해 보이고 부질없어 보이는 식으로. 그래서 세상을 너무 안이하게 단정하기 쉽다. 그래서 현장에서 구체적인 경험을 충분히 쌓으라고 권하고 싶다.

휘일: 벤처네트워크 그룹 자체의 전망은?

: 그야 자기 하는 일에 기본적으로 긍정적일 수밖에. 사실 이런 식으로 일을 하는 회사가 거의 없다. 앞에서 말했지만 법적인 배경을 가지고 경제 분야에서 일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면에서 독특한 의미가 있고, 또 사회발전상 벤처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 같은 회사의 활동이 무척 필요하고 하니까..

객관적인 상황에서는 비교적 전망이 밝다고 생각하고, 다만 주관적인 판단 우리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직은 확언하기 어렵다. 다만 창투사 같은 것은 앞으로 계속 자본을 끌여들여야 하고, 로펌 같은 것은 실무경험이 매우 중요한데 다행스럽게 김&장에서 오랫동안 M&A를 전문으로 하시던 이경훈 변호사께서 함께 하기로 했다. 그것을 여하히 하는가가 우리의 단기적인 미래를 좌우할 것이고, 장기적인 미래 5-10년 후는 오히려 자신이 있다. 사회의 발전과정과 우리가 하는 일이 같은 방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그 동안 입증했다고 본다.

………….서울대 법대 출신 사람들에게서는 확실히 상대를 의식하지 않는 자신감이 느껴지곤 한다. 그만큼 잘났다는 뜻일 게다. 배재광 씨를 만나면서도 똑같은 느낌이었다. 이 사람은 앞으로 계속 성공의 길을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돈도 많이 벌겠지.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건 도대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이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었고, 배재광 씨는 그런 회의는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핵심이고 자본은 부차적일 뿐이라는 판단은 신념이라기보다는 배재광 씨의 생리나 체질인 듯했다. 그렇지만 배재광 씨가 자본을 배반하지는 않아도 자본은 얼마든지 배재광 씨를 배반할 수 있지 않을까. 자본의 생리를 그 힘을 너무 무시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마지막으로 솔직히 앞으로 돈 잘 벌 것 같은데, 돈 벌어서 어디다 쓸 계획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역시나, 일 자체가 더 중요하고 돈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 아닌가라는 대답. 그래도 꿈이 있다면, 이라고 묻자 교육 방면에 돈을 잘 쓰고 싶다면서, 하고 싶은 일 가운데 하나가 “10-15명의 학생으로 된 학교를 하나 만들어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은연중에 사람은 믿을 만하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 셈이다. 
거기까진 나도 그 뒤를 따르고 싶지만 그 다음이 자본이라면 난 모르겠다. 한참이 지난 뒤 배재광 씨가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다음에도 여전히 인간이 자본을 부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래서 배재광 씨를 지켜보고 싶다. 배재광 씨와 헤어지면서도 시선은 자꾸 뒤에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