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칼로 – 김현

Frida Kahlo 초현실주의 화가. 멕시코 혁명 기간 동안 멕시코시티 근교에서 보낸 어린 시절.아이를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갈 운명에 놓이게 했던 열 여덟살 때의 끔찍한 열차사고.벽화가 디에고 리베라와의 전격적인 결혼.이사무 노구치나 레온 트로츠키와 같은 다양한 부류의 남자들과의 간헐적인 연애 사건.리베라를 통해 관련을 맺게 된 공산당 활동 등.멕시코의 민속과 문화에 열중했었고, 비극적 정경에 대해 극적인 애정을 품었던 초현실주의 화가. 그리고 그녀의 전설만큼이나 풍부하고 매혹적인 그림들.10월 중순.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몸, 탐스러운 긴머리. 밴드 프리다칼로의 김현을 만났다.

 프리다칼로김현

1. 자화상


남태제*> 형 고향이 어디죠?

 

김현> 태어난 덴 대전이고 이사를 많이 다녔어. 어려서는 안양에서 살았고 비교적 오래 살았던 곳은 장항이었지. 왔다 갔다 했어. 되게 복잡해, 아버지가 방랑벽이 심했거든.

 

 그는우리 집의 굴레라고 표현했다. 가족들과는 완전히 틀린 방식으로 살아가기. 다른 삶을 살려고 안간힘을 쓴 것이 오늘의 그를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키운 건 8할의 바람이라며 그가 웃는다.

 

 > 그때까지만 해도 음악이 내 인생이라고 생각 못했어. 그러다 갑자기 이거라는 생각이 너무 절실하게 들더라구.  

 

김현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다채로운 이력에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다. 전통무예를 일생의 업으로 삼으려고 했던 어린 시절, 연극 배우, 음악다방 DJ, 술집 지배인 그리고 음반사 작사가 등등.

 

> 그런 것들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아. 내 목소리에도 녹아 있겠고. 정서에도 그렇고.

 

> 배를 탄 적도 있다면서요?

> 2. 사실 복잡한데, 배를 그렇게 타게 된 것도 좋아하는 여자 때문이었어. 그 여자 때문에 내 인생 전체가 우울해진 거 같아. 사귄 게 한 3, 4개월 됐나? 그런데 어느날 사라졌어. 그 사람이 후암동 살았거든. 사라진 그 사람 집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가면서 한 7,8년을 살았어. 혹시나 하고

 

먼지 나는 여름 신작로 위에 죽어가는 개망초꽃 오래 된 사진처럼 언젠가 그의 일생 딱 한 번 그 신작로를 지나갔었네안개 같은 먼지 속에 짧은 순간 그녀 일생 전체가 부르르 흔들렸었네 – 채호기, <오래된 사진>

 

> 배도 타고 뱃일도 하고 그런 거였어. 2집 타이틀 곡이 <어부사시사>잖아. 아버지가 바다에서 실종되셨지. 우리 집안 내력인가봐. 할아버지도 그러셨거든. 어려서는 아버지랑 관계가 안 좋아서 별 생각이 안 났는데 철이 들수록 바다 생각이 자꾸 나. 그래서 곡을 쓰다보면 바다 얘기가 많이 나오지. 글을 쓸 때도 그래, 왠지 모르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섬바다를 모르고 바다에 와서 바다 저 너머를 그리워한 죄 저 홀로 세상에 외로이 와서 사람의 사랑을 그리워 한 죄로나는, 나는, 나는   – 프리다칼로 2 <어부사시사> 중에서

김현은 80년대 중후반 음악다방 DJ를 했다. 명동의 <휘앙새>, 종로의 <미완성>은 서울에서 음악다방 또는 음악감상실이 사라질 무렵 마지막으로 남았던 곳들이다. 비지스의 , 비틀즈의 , 락웰의 등이 인기곡이었던 시절. 간간이 그는 마크노플러나 트래시재프먼의 노래를 틀어주곤 했다.

 

> 음악다방 시절 경험이나 분위기가 이후 음악 생활에 영향을 많이 미쳤겠죠?

> 그럼, 무척 많이.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들한테 텍스트는 일단 외국 음악이니까. 음악을 많이 안 듣고도 밴드를 할 수 있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는 거지. 발전된 형식을 들으면서기교라든가 실력을 쌓아야 하는 건 당연하잖아. 카피를 안 해보면 자기 음악에서 수용이 안되는 거지.

 

> 영화감독을 봐도 비디오 대여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경우가 많죠.

> 정말 음악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음반 매니아들이기도 해. 들어보면서 카피하고. 영화나 음악이나 마찬가지지.

김현의 음악생활은 당시 대부분의 밴드들이 그랬던 것처럼 밴드 몇팀이 소극장을 함께 빌려서 공연을 하는 방식이었다. <파고다>, <는깨>가 당시 밴드들이 애용하던 소극장들이다.

 

> 밴드로서 첫 공연을 하게 된 건 언제죠?

> 스물 셋이었을 거야. 주점 뮤직박스에서 디제이를 했는데, 지배인이 그만두면서 내가 그 일까지 하게 됐지. 그러다 보면 그 동네에서 왔다 갔다 하는 애들을 다 만나잖아. 기타치는 애가 놀러 왔다가 음악 해 볼 생각없냐구, 얘기가 됐지.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거야. 이란 팀이었어.

 

> 그래서 어디서 공연했는데요?

> 예식장에서 했어. 기타치는 애 형이 결혼을 한 대. 웃기지? 노래도 뭘 불렀냐면 노사연의 만남이었나? , 진짜그거 하고 금새 해체됐어. 그 뒤로 만들면 해체되고 만들면 해체되고프리다칼로 만들면서 안정된 거지.

 

> 밴드 이름이 뭐였어요?

> 리틀윙. , 아니구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 워낙 몸담은 많은 밴드가 많아서.

> , 이팀 저팀.

 

> 87년이었나요? 파고다 극장이라고 했나요? (안타깝다는 듯) 기억이 잘 안나요?

> 그때 극장도 아니고 묘한 데였는데. 이름이 잘 안 떠오르네.

 

> 결과는 어땠어요?

> 그냥 아는 사람들한테 표파는 거야. 3천원, 2천원. 부모님도 와서 보고. 집에 가서 한탄을 하시더라구. 떼거지로 나오니까 춤이나 추는 줄 아셨는데, 기타 치고 드럼 소리 나니까 시끄러워서 정신이 없으셨나봐. 친척들 모이신 자리에서 맥주를 드시다 한숨을 푹푹시시더래.

 

> 그때는 역시 카피곡?

> 그렇지, 거의. 주로 짐 핸드릭스꺼. 그때도 블루스 락이었지.

 

> 형은 처음부터 그런 거죠?

> . 나는 헤비메탈도 해본 적이 없고 블루스 락으로 초지일관했지.

 

> 음악 시작할 때 특히 영향받은 뮤지션을 든다면?

> 자니 윈터나

 

> 자니 윈터? 들어본 거는 같은 데 좀 생소하네요?

> 우리나라에선 블루스 매니아 아니면 잘 모르지. 백인인데 흑인 보다 더 끈적끈적해. 하드락에 가까운 블루스 락을 하는데 정말 잘해.

 

> ?

> , 지미 핸드릭스. 특히 도어즈 영향을 많이 받았어.

 

> 사이키델릭한 거군요. 근데 왜 마약은 싫어해요?

> 몰라, 우리나라가 좀 자유로웠으면 편견이 없었을 텐데하하

 

> 도어즈도 블루스를 약간 하긴 했죠?

> 그치, 있지. 60년대 중후반 플라워무브먼트라고, 그때 나왔던 음악들은 다 블루스를 기본으로 했어. 지금 들어도 가장 아름다웠던 때인 거 같아. 우드스탁이 69년에 열렸잖아.

 

> 거기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거죠?

> 있지. 그건 나만 있는 게 아니잖아. 전인권씨 노래 중에 <머리에 꽃을>이란 노래도 있잖아. 꽃의 시위라고 했었어. 히피즘이지.

 

> 제니스 조플린도 좋아했죠? 어떻게 보면 형 창법이 좀 비슷하지 않아요?

> 그렇지? 어떤 선배가 그랬어. 현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뭔지 아니, 그건 꾸미지 않고 쓰는 소리다. 그때 내가 목소리에 자신이 없었어. 그 형이 용기를 줄려고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네 목소리에 달콤함과 악마의 목소리가 둘 다 들어있다, 그렇게 칭찬을 해 주는거야. 그 말이 굉장한 힘이 됐어. 그 칭찬이 오늘까지 온 거 같아. 가끔 보고 싶어, 그 선배.

 

> 초창기에 외국음악 카피할 때 정통 하드락쪽, 레드 제플린이라든가 이런 쪽 음악들도 했어요?

> 그럼. 레드 제플린꺼. 프리다칼로 초창기에 특히 많이 했었어.

 

> 그 외에 또 좋아하는 하드락 밴드가?

> 마이클 솅커, MSG…

 

> 유럽쪽 하드락하고 부르스가 기반이 된거군요. 핑크플로이드도 무척 좋아하잖아요?

> . 우리 멤버들이 다 좋아하지. 음악 듣다보면 하드락만 해선 재미가 없거든. 오소독소하고 예술적인 부분은 프로그레시브나 아트락쪽에 많잖아. 듣는 만큼 자연히 음악이 옮겨가는 거야. 2집에선 사이키델릭하고 프로그레시브를 좀 건드려놨어. 1집에서 <러시안룰렛>이 그쪽이죠?

 

 

> 그건 좀 한국적인 느낌이 드는데. 2집에선 사이키델릭이나 프로그레시브로 더 깊숙히 들어간거지. 14분짜리 있잖아, <지구에서 보내는 마지막 러브레터>. 실험해 본 거야. 우린 만족스러운데, 사람들은 좀 안 그렇나봐. 우리 나라 락이 유행을 좀 타잖아요. 언더그라운도도 그런 거 같거든요. 80년대까지는 헤비메탈이었고.

> 그 중에서도 LA메탈, 그 후엔 얼터너티브였지.

 

> . 멜로디가 있는 메인스트림에 가깝죠. 요즘 언더에서는 펑크나 하드코어가 인기죠? 하지만 프로그레시브나 사이키델릭처럼 진지한 음악을 하는 데는 별로 없는 거 같아요.

> 맞아. 음악에 대한 느낌들이 인스턴트화되어 있거든. 쉽게 빨려드는 소모품정도? 음악을 통해서 인생을 다듬는다는 의미가 없다는 거지. 폴 사이먼이 그랬다는 거야. 자기 아들이 어떤 어떤 음악을 듣더라, 자기도 좋긴 하지만 과연 그것들이 인생에 어떤 의미를 줄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 그때도 우리 나라에서 블루스 락을 하던 팀이 있었나요?

> 거의 없었지. 지금도 블루스 락은 손을 잘 안돼. 일단은 외국에서도 많이 안 하니까. 듣는 것 조차도 몇 년 걸려, 부르스 쪽으로 가기까지. 레드 제플린을 찾아 들어가기까지도 그렇고. 매니아가 많지 않지. 음악도 쉽지 않고, 연주도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보기에는 노인네 음악 같지만 연주 자체가 일단 너무 힘든거야. 오래 파야 가능한 음악이지.

 

> 형이 음악을 계속 해오면서 줄곧 소수의 관객, 소수의 팬들하고 해야 했던 것도 그 때문 아닐까요?

> 원인이 거기에 있다고도 할 수 있지. 앞으로 우리 음악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어. 기본은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하드락인데, 아트락이나 사이키델릭이 섞일 가능성이 많지. 외국적이기보다는 한국적인 걸로 변해가야겠고. 우린 가사도 잘 들리는 편이니까.

 

> 블루스 락을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 몰라. 마약같은 거 아닐까. 원초적이야. 1번 듣는 거랑 2번 듣는 거랑 다르고, 10번 들어도 그때마다 깊은 맛이 우러나는 거 같아. 시간이 흐를수록 어렵고 깊게 느껴져. 형식이야 사실 복잡한 게 없지. 블루스란 게 12소절 진행이고 마디가 계속 돌아가는 거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려워져.

 

> 어떻게 보면 블루스 락은 6-70년대 지나간 음악이라고도 할 수 있잖아요. 사람들의 감수성은 아주 빠른 속도로 변해 가고 있는데 불안하지 않아요?

> 물론, 그런 느낌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끌리는 걸 어떡해. 원래 블루스라는 장르 자체가 그렇게 순탄하질 못해. 뮤지션들 말년이 다 우울하지. 몇 사람 빼 놓고는. 태생 자체가 그래서 그럴까? 흑인 노예들이 목화 따면서 부르던 노래잖아. 주인 집 딸은 학교 가는데 흑인 노예 딸은 목화씨나 따고 있고. 자기 한 달래면서 부르던 노래지. 그래서 음악도 단순하게 출발했어. 특별한 지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12 소절을 계속 돌렸던 거야. 일종의 노동요지.

 

> 그런 점에서 우리 고유의 정서랑 맞아떨어지는 점도 있나요?

> , 많은 관련이 있어. 굳이 남의 거라는 생각이 안들거든. 파와 시를 뺀 5음계는 세계 어디에나 있는 토속음계야.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지. 블루스란 게 토속음계를 쓰니까 우리나라 음악에도 매칭이 잘된다구. <어부사시사>도 국악을 섞어 봤어. 잘 맞어. 슬픔, 한 그런 느낌도 통하고. 계속 음악을 할수록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흐르는 걸.

* 대담자 남태제 씨는 독립영화감독으로서, 인디밴드에 관한 다큐멘타리 <전선은 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 “대중음악의 해방구 언더그라운드 편을 제작했다. 또한 ’97인디락 페스티발에서 영상을 담당하기도 했다.

 

 

 


2. 어쩌면 사는 게 꿈인지 몰라

 

남태제> 요즘 여가시간엔 뭐해요?

김현> 컴퓨터 배우느라고 월부로 사다 놨어.

> 홈페이지 관리도 직접 해요?

> 아니, 아직 그 수준은 아냐. (손가락 두 개를 내밀며) 아직 이렇게 치는데자생적인 팬클럽이 있어. 나이가 많지, 20대 넘어서 다들 30대니까. 홈페이지 관리하는 친구도 결혼한 친군데 바뻐. (프리다칼로 홈페이지 : http://www.frida.co.kr)

> 그래도 깔끔하고 내용이 충실하던데요?

> 우리 스타일이랑 맞는 거 같아.

> 팬클럽 이름이 뭐더라?

> 천성(“천성은 프리다칼로 1집의 타이틀 곡이기도 하다. 이 페이지의 일부 사진과 mp3파일은 위의 프리다칼로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혀둔다.) 핑클도 P잖아. 그래서 천리안 동호회에 같이 붙어있었는데, 우리껀 없어져버렸어. 우린 활동을 잘 안해. 공연을 떼로 보러 오는 것도 아니고.

> 나이든 사람이 주로 하면 그래요. 바뻐서. 들어와도 그냥 보고도 나오고.

> 가끔 전화 오면 그런 얘기도 하더라. 자기들은 좋은데 그래 가지고 생활은 어떻게 하냐, 우리들이야 물론 좋지만맘대로 되나 그게.

> 프리다칼로 결성할 무렵으로 얘기를 옮겨 볼까요? 그때 모인 멤버가 어떻게 됐죠?

> 베이스에 안근우, 드럼에 이동우, 기타에 문건식 그리고 나, 이렇게 네명이 최초 멤버지. 다들 10여년씩 넘게 음악하던 친구들이야.

지금은 멤버 일부가 교체됐다. 베이스는 김원기, 드럼은 송기정이다.

> 공식결성된 게 언제죠?

> 95년도. 종로가면 개구멍집이라고 이면수랑 막걸리 파는 데 있어. 막걸리 먹으면서 거기서 작당했어

> 처음부터 블루스 락으로 의기투합을 한 거예요?

> 아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가게 된 거야. 멤버가 교체가 되도 나랑 건식이가 있으니까 색깔은 안변하더라구.

> 건식씨는 기타칠 때 이펙터를 안쓰더라구요. 이유가 있을 거 같은데요.

> 들고 다니는 걸 번거로워 하기도 하지만, 비교적 내츄럴한 사운드를 내고 싶어서 그렇지. 우리가 비록 전자변환 장치로 소리를 일그러트리긴 해도 굳이 한번 더 그러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외국에서도 블루스 뮤지션은 그거 안써.

> , 프리다칼로라는 이름은 어떻게 정하게 된거죠?

> 내가 그때 프리다칼로 전기를 읽고 있었거든. 건식이가 저 이름도 좋다, 그러더라고. 마침 얘기를 못 꺼내다가 잘 됐다고 생각했지.

> 그때 프리다칼로 전기를 읽었던 이유가 있었나요?

> 그 전에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이라는 이연주 시집을 읽고 있었거든. 결국 그 시인은 자살했지. 그러다 프리다칼로라는 여자 화가가 그 비슷한 삶을 살았다는 걸 알게 됐어. 그 여자 전기를 읽은 거야. 그리고는 사고가 변했어. 그 전에는 아름다운 세상, 뭐 이런거나 꿈꾸는 소년이었는데. 그 뒤로는 눈에 보이는 걸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힘들어지더라구. 뭔가 외면하는 것들, 절박하지만 회피하는 것들 속에 진짜 아름다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 두 여자를 통해서 그걸 알게 됐어.

간음한다

간음당한다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이

뼈를 발라낸

도살당한 고깃덩어리와 씹힌다

이연주, <유토피아는 없다>에서

> 그러고 보면 1집 앨범 타이틀이 <자화상>이잖아요. 프리다칼로가 제일 많이 그린 게 또 자화상이기도 하구요.

> 그래. 프리다칼로는 자기 삶이 그림의 주제였어. 나도 역시 내 삶이 1집에 그대로 담기길 원했고. 곡들도 다 그런 배경에서 나왔지. 눈에는 보여도 손에 닿지 않아서 느끼는 그리움이나 외로움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해. 나 역시 그걸 찾기 위해서 음악을 하는 거구. 구절들이 다 그렇지. “아주 흐린 날 내가 꾸는 꿈이 슬픈 꿈인지 몰라“, “나의 마지막 여행이 행복하길, 그리고 다시는 이 땅에 오지 않길. 이런 날이면 당신이 그리워, 그리워외롭고 회한 같은 게 들 때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누군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랄까? 이상하게 어렸을 때부터 그게 내 주제였어. 어떤 행복한 일이 있어도 뭔가 설명되지 않는 그리움이 있는거야. 대상이 뭔지 모르겠지만.

> 집이 딴 데 있는 거 같은 느낌?

> . 잠깐 머무는 도중에 생긴 일처럼.

어쩌면 사는 게 꿈인지 몰라

어쩌면 모든 게 꿈인지 몰라

프리다칼로 <러시안룰렛> 에서

> 그런 걸 낭만주의적 사고방식이라고 하죠. 하하하

> 근데 그게 인생을 무지 피곤하게 만들어.

> 보통은 돈이라든가 권력이라든가 이런 걸 현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무리 즐거워도 진짜는 다른 데 있는 거 같고

> 그래. 진짜 즐거울 때는 내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야. 몰입되는 그 순간들이지. 그때면 다른 생각들이 전혀 안들어. 다른 데서는 그런 느낌들을 찾을 수가 없어. 내가 가장 치열해지는 거야. 무대 올라가기 2, 30분전부터 무대에서 내려온 후 잠깐. 무대에서 내려오면 허탈해져서 술을 안 먹을 수 없게 되고.

그의 어릴 적 꿈 중 하나는 시인이었다. 30이 훌쩍 넘은 지금도 그는 시집을 읽고 있다. 가사의 질박함 속에서도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건 세상을 헤쳐 오면서도 잃어버리지 않은 그의 섬세한 감수성 덕택이다. 아니, 언어는 그의 블루스 락을 생리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린다.

> 블루스라는 게 12소절 밖에 안되고 오랜 동안 나올 수 있는 건 다 나왔단 말이지. 그런데 새로울 게 없는 블루스를 한국말로 하면 어감이 너무 이상한거야. 그래도 과감하게 해보자, 대신 가사나 어법을 완전히 다르게 해보자. 그래서 만든게 <파라노이드 사막>이야. 오리지널 블루스 곡은 처음이었지. 지금도 인도를 꿈꾸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정서가 썩 내키지 않았어. 정작 가 봐도 그렇지 않을 거야, 그런 건 없는 거 아닐까. “눈부신 것은 절망케 한다. 사람은 사막을 찾아, 별이 없는 지상의 사막을…” 이렇게 시작하지.

물병 속에 꿈꾸는 물고기

눈부신 것들이 나를 화나게 한다

왜그리 왜그리 멀기만 한지

오 사랑하면 보이나 뭐가

믿었던 것들이 꿈이 아니길 바래

사람은 사막을 사막을 찾아

별이 없는 지상의 사막을

하지만 준비된 건 이별일지니

파라노이드 사막 속에서

프라다칼로 <파라노이드 사막>에서

> 1집 앨범에 <박규씨>라는 노래가 있잖아요. “박규/빠큐라는 가사가 풍자적이고 가락도 구전가요라 재미있었는데, 전래적이고 풍자적인 데 관심이 있어요?

> 관심이 있지. 구전가요를 찾아서 우리 걸로 재창조하는 거 재미있잖아? 락밴드라면 해보고 싶은 것들이지. 2집에서도 해볼려고 했는데… 3집에는 꼭 다시 할거야.

> 그 노래 곡조가 원래 뭐더라? 당다라당당 당당 당다라 당당당!

> 당나귀 송이라고 그러나?

> 토속음악에 대한 관심이라고도 할 수 있나요?

> 그 전에 DJ할 때 관심이 많았거든. 폴 사이먼이 하는 작업에도 그렇고. 1집에 아라비아스케일이 들어있는 <난지도> 가 그런 쪽이라고 할 수 있지. 좀 더 해 봐야지.

> 1집의 <러시안룰렛>이나 2집의 <지구에서 보내는 마지막 러브레터>같은 프로그레시브나 아트락쪽을 계속 해보고 싶은 거죠? 3집은 어떻게 계획하고 있어요?

> 그런 걸로 꽉 채운 더블 앨범을 내보고 싶은데, 지금 한 곡만 넣어도 어렵다고 하니…3집에서는 내츄럴한 악기를 많이 쓸려고. 어쿠스틱을 많이 써서 레드 제플린과 비슷한 질감을 낼까해. 거부감은 좀 줄어들겠지.

> 1집 앨범의 느낌이 강렬했기도 했고 멤버들이 그동안 살아온 과정도 그랬지만, 너무 어둡고 허무하고 염세적이라는 평이 많았는데

> 겉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 어두운 건 희망을 얘기하는 거기도 해. 그 너머에 있는 희망, 그리움, 그런 거지. 정말 우리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걸 느낄거야. 그런 정서들을 애써 피할 필요도 없고앞으로 어떻게 변할 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밝은 게 좀 안 어울리긴 안 어울려. 밝은 노래도 내가 부르면 슬퍼진다나?

> 가벼운 밝음이 싫은 거겠죠. 끝까지 밀어부쳐서 본질에 다가가고 싶은 거라고 해도 좋고대중성에 대해서는 어때요?

> 글쎄. 우리 팀이 일부러 대중성을 쫓기엔 역부족이기도 하지만 그럴 생각도 없어. 좋은 음악이라면 언젠가 알아주지 않을까? 지금 대중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면 그건 아마도 우리가 아직 모자라는 게 있어서 그럴거야. 더 좋은 음악을 만들어야겠지. 상업적인 것과는 관계없이 말야. 이런 생각은 들어. 지금까지 우리 음악을 아무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오랜 시간을 견딜 순 없었겠지. 우린 일부러 방송을 찾아 다니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못 느껴. 좋은 음악을 필요로 할 때면 우릴 찾아오겠지. 돈을 벌기 위해서 음악을 하는 건 아니니까. 하나라도 예술적이고 값어치 있는 음악을 만든다는 게 정말 중요해.

> 그렇지만 원망스러울 때도 있을 거 같은데요?

> 속상할 때가 있지. 안 그렇다면 그게 이상하겠지? 2집 발매 기념 콘서트였는데, 1집 보다 안 좋다고 CD사는 걸 망설이는 팬이 있더라구. 적어도 우리 콘서트를 보러 온 팬이었는데 말야. 음악 하는 사람들이나 평론가들도 2집에 대해서 좋게 평가한다구. 드디어 여기까지 움직였다고. 물론 그런 반응에 개의치 말아야 하는데 듣는 순간에는 속이 상하지.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보자 그러다가도 막상 작업에 들어가면 그렇질 않아.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게 되는 거지. 대중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이미 정해진 거 같아.

> 사실 형네 음악이 대중음악이라고 하기는 힘들잖아요? 프로그래시브나 아트락 정도면 아무래도 매니아 음악이니까.

> 그래. 2집에선 아예 방송용 부르스가 없어. 즉흥으로 연주한 것도 두 곡이나 돼. 집에서 녹음한 걸 그대로 넣기도 했어. 지글지글하는 잡음 무지 들어가고. 정상적인 방식으로 하지 않고 일부러 삑사리 난 것처럼 비틀어서 연주한 것도 들어가고. 몰라, 우린 나이를 먹을 수록 더 깊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그만큼 따라주지 못하는 건지. 그게 프리다칼로의 슬픔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데그렇다고 사람들 쫓아서 음악 만들면 이렇게 고생하면서 음악 할 필요 없잖아. 어짜피 메인스트림에서 비켜 서 있는 게 우리야. 가난도 익숙해져서 내구성도 생겼잖아. 이제는 정말 우리가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수준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2집에 포크곡도 있긴 있어. 하지만 우리가 좋아서 넣은 거야. 대중이 좋아하면 다행이고 안 좋아해도 할 수 없는 거고.

> 2집이 3년만에 나온 건데 좀 오래 걸린 거 아니에요?

> 우린 작업이 굉장히 즉흥적이야. 2집에서 녹음실 안에서 즉흥적으로 만든 게 3곡이나 돼. 게으른 것도 있지만 땡기는 게 없었어. 앞으로는 1년에 한 장씩은 만들려고. 12월부터 라이브하면서 작업하고 3월정도까지는 낼거야. 이제는 우리가 앨범 만든다고 하면 만들어주겠다고 하는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 형네는 그동안 꾸준히 해 왔던 덕분에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어느 정도 만들어졌잖아요.

> 어떻게 보면 우린 행복한 거지. 음악하는 후배들도 그렇고 주위에 사람들도 있고.

> 2집은 인터넷을 통해서 판매하는 이색적인 방법인데요?

> 아직까지는 한계가 있지. 쇼핑몰에서 살까말까 고민하고 나가는 사람이 많더래. 아직은 직접 만져보고 사려고 하니까. 아직은 시작단계라고 할 수 있지. 어떻게 인터넷에서 음반을 내냐, 저예산으로 가능하냐는 불신이 많았어. 우리가 맨 처음으로 나섰지. 저예산이지만 소스도 잘 들어가고 제대로 만들어졌어. 우리가 냈다니까 후배팀들도 믿고 따라왔지. <밴드연합>에서도 3팀이나 냈어. <작은아침>이라는 포크락팀하고 <도깨비>. 그리고 <에이쿼터>는 지금 작업 중이고.

> 역시 이번에도 형네가 앞장을 서는군요.

> 우리는 아직 힘이 작잖아. 내가 좀 여건만 나아지면 문화 지형을 바꾸는데 앞장 서고 싶어. 방송이나 라디오의 횡포, 촌지 문제, 정부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게 많거든. 너무 불합리하고 가슴 아픈 일들이 많아.

3. 오래된 혁명처럼

남태제> 그러고 보면 서태지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을 텐데요.
> 문제 많았어. 연예가 중계에서도 갑자기 전화오고. 우리 밴드연합에서 총무를 봤던 최창록이라는 친구가 <크로우>에서 기타를 치다가 서태지 팀으로 갔거든. 스포츠조선에서 <아름다운 밴드연합> 기사를 낸거야.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요즘 라이브는 어떠시냐 이렇게 물어보는 거야. 이 인간들이 왜 이러나. 나랑은 관계 없으니까 쓸데 없는 얘기 하지 마라, 그랬지. 언더그라운드 사정도 알고 있고 영향력도 있으면 서태지가 좀 더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 아냐? 자기도 락을 했으면 사회에 환원해야 할 몫이 있는데

> 음악적인 부분은 어때요?
> 특별한 건 아냐. 이미 3년전 부터 대중화된 음악이잖아. 서태지니까 가능하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지 모르겠지만, 이번 음반같은 경우는 음악적 한계가 분명한 거 같아. 신선하지도 않고. 게다가 라이브가 진검승부라고 할 수 있는데, 락 보컬을 하기에는 목소리에 한계가 있어. 원래 보컬이 아니라 악기 주자였잖아. 작곡이야 어떨지 몰라도, 그 목소리 갖고 일류 밴드가 되긴 힘들어.

> 언더밴드 일부가 안티서태지 연대를 만들었는데
> 방송에서 보고 알았어. 그런 짓 좀 안 했으면 좋겠어. 음악을 잘 만들어야지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걸 만드나. 서태지쪽에서 보더라도 결국 자기를 핑계로 관심을 끄는 거 아냐? 왈가왈부할 이유도 없는 건데. 거기 모인 팀들을 봐도 그렇고자기 음악을 잘 하면 되는 거지. 밴드들이 열 받아서 쓸데없이 그런 거 반대하는 연대나 만들어야 하겠냐?

> 형은 <아름다운 밴드연합> 활동을 쭉 해오고 있잖아요. 결국 인디 씬에 대한 얘기로 옮아가야 할 거 같군요.
> 인디라고 하기보다는 언더그라운드라는 말이 더 나을 거 같아. 너무 의미가 퇴색돼서 이제는 싫어하는 단어가 돼버렸어. 전체적으로 다 그래. 백이라면 백. 언더그라운드라는 말도 사실 별로 좋은 말은 아니지만

> 언더라는 말도 별로 좋은 건 아닌데우리는 독립영화라는 말을 쓰긴 하지만, 사실 우리도 인디영화지 뭐.
> 거긴 순수한 의미로 쓰잖아. 우리는 상업적인 의미가 너무 많아졌어.

> 아름다운 밴드 연합에 대해서 설명 좀 해줘요.
> 그 당시만 해도 우리처럼 활동하는 락밴드에게 음반 제작해 줄려고 하는 데가 별로 없었어. <지구레코드> 같은 데서 해주긴 했는데, 만들어 놓고도 발매를 안하는 거야. 그러니까 자꾸 밀리지. 그래서 나온 자구책 가운데 하나가 영국에서 출발한 저예산 제작의 인디레이블을 생각한 거야. 손에 들고다니면서, 라이브하면서 팔자, 그런 마인드로 시작한 거지. 밴드도 자기 권익을 찾고 언더그라운드 자체의 문화를 찾자, 주류에 큰 자양분을 공급할 수 있는 부분이 되자, 그래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언더가 뜨기 전에나 잠시 머무는 곳이 아니다는 거였지. 그래서 모인 게 <아밴련>이야.

> 그게 언제였죠?
> 97. <인디>가 출범한 게 97 9월 무렵이고.

>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클럽이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었고 라이브도 무척 활발했었죠. 지금보다도 훨씬 더.
> 그래. 지금은 좀 죽어 있어.

> 어떻게 보면 그때가 최전성기였던 거 같아요. 그때 <밴드연합>에 참여했던 팀들이 얼마나 됐죠?
> 27개인가?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어. 근데 그걸 막았지. 검증한다는 것도 우습지만 무방비상태가 되면 연합자체가 데미지를 입을 수 있으니까. 연주라든가 질적인 부분을 우선해서 좀 축소시킨 거지.

> <드럭>에 있는 팀들도 함께 했나요?
> 아냐. 따로였어. 걔네는 우리를 어려워했어. 나이차이도 많이 나고. 우린 걔들이 기타 배우기 전부터 음악을 했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정통 팀들이 주로 모이게 됐어. 헤비메탈, 트래쉬, 하드락, 부르스 락.

> <허벅지>?
> . 처음에만. 참관 몇 번 하다가 안 나오더라구. 안영노씨는 우리쪽 마인드가 아니니까. 문화운동쪽 마인드가 강했지. 우린 뮤지션이잖아. <허벅지>는 활동을 아직도 하고 있긴 하지만.

> 한편에는 <아밴련>이 있고 또 한편에는 <개클련>이라고 <개방적 클럽연대>가 있었단 말이죠. 재미있는 건 당시 운동권 조직 용어가 음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했다는 점이에요. 그 와중에 <인디>라는 음반사가 운동적 마인드를 갖고 사업을 해보겠다고 출범한 거고. 언더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갑작스레 조직운동을 하게 된 꼴이죠. <인디> 뿐만 아니라 <밴드 연합>도 그런 역할을 하게 됐고. <개클련>도 나름대로 <땅밑달리기>라든가 이런 행사를 하면서 일정한 역할을 했죠. 당시 사람들이 무척 많이 모이고 기획행사할 때마다 꽉 차고 어떻게 보면 신나던 때인데. 지금은 썰물처럼 빠져나간 거 같아요.
> 맞어. 거품이 빠진거지. <밴드연합> 출범할 당시 생각이 그거였어. 결국은 내 생각이 맞았어. 거품처럼 기획상품으로 락이 반짝했다가 사라져도 원래 농사짓던 우린 밴드들은 그대로 남은 거야.

> <밴드연합>이 출범하게 된 배경을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 거 같아요.
> 그 무렵 내가 교통사고 나서 병원에 있을 때 신문을 봤는데, 밴드가 나오는 게 아니라 클럽 주인이 이따만하게 나오고 클럽 주인이 몇몇 밴드들을 데리고 있고 그런 문화를 클럽 주인들이 만들어 가는 것처럼 나오는 거야. 인터뷰기사가 계속 그렇더라구. 그런 건 <인디>에 관계했던 사람들, 그리고 <팬진공>에서 조장한 거거든. <개클련> 만들면서 그 회의를 움직였던 사람들도 그쪽이었어. 그리고 클럽 업주들. <인디>가 그 중심이었지. 클럽 조직했지 잡지 만들었지, 그럼 그 다음 수순은 당연히 음반사잖아. <민맥>이라는 사회과학 출판사가 있으니까 자체 홍보나 자체 유통구조도 가능했지. <천지인>, <메이데이>가 있었던 <21세기 뮤직센타>가 거기 아니냐. 의욕적이고 계획적으로 시작된 거지. 애초에는 개방적 밴드 연합을 만들 계획까지 있었던 거야. <팬진공>이 주도를 해서 밴드 파티라는 걸 열고 <개밴련>을 만들 계획이었지. 거기 가서 내가, 이건 잘못된 틀이다, 오히려 <밴드 연합>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문제제기를 했어. 그러면서 내 뜻을 따르는 친구들이랑 <밴드 연합>을 만들게 된 거야.

> 그래도 처음에 시작할 때는 기대감이 많았을 텐데요.
> 기대가 많았는데… <인디>의 시행착오, 자금난, 이런 것들… <인디> <자유>를 하면서 문제가 많았어. 이벤트 회사처럼 강산애 부르고 그러면 안되는 거지. 자기문화적 마인드를 더 내세워야하는데 자체 밴드한테는 개런티도 안 주면서 다른 외부팀들한테는 몇 백만원씩 주다가 흥행 망하고어떻게 보면 욕심을 부려서 그런 거 같아. 큰 돈 안들어가도 지속적으로 하는 사업을 해야 했는데. 결국 쓰러지니까 사람들이 허탈해할 수 밖에. 밴드들한테도 인디라는 애초의 의미가 망가졌지. 일단 뜨고 볼 일이다야. 밴드 스스로도 그런 마인드가 없어진 거야. 상업주의에 맞서서 찬란한 자기 음악을 만들어 내고 메인 스트림에 자양분을 대기도 하고 그 스스로 대안이 되기도 하는, 외국에서는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그 좋은 의미가 결국 우리 나라에서는 사기치는 단어가 돼버린거지.

> 이런 건가요. 자생적으로 조금씩 튼튼해지고 토양이 형성될 때까지 그대로 내버려두었으면 자연스럽게 갈 수 있었던 건데
> 의식적으로 조직화하면서 문제가 된 거지.

> 크게 승부수를 거는 모험을 하다 실패를 한 셈이군요.
> 그 후유증이 결국 밴드한테까지 미쳤지. 기획자들이야 자기가 해보고 싶었던 거대한 실험, 기획을 맘껏 해 본거지. 그 사람들한테는 커리어가 될 지 모르겠지만 밴드들은 한동안 절망할 수밖에 없었어. 이제는 극복할 때가 됐지. 밴드들도 자기가 돈을 모아서 저예산으로 앨범을 내는 거지. 그게 제대로 되는 거야.

> 달리 말하면 그 시절의 경험으로부터 배운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 그렇지. 나쁘 면만 있었던 건 아니야. 그 어려운 시기에 그런 것들이 태동해서 락에 대한 인식이 넓어진 건 사실이고, 그때 또 선택할 건 그거 밖에 없었어. <인디>를 믿을 수 밖에. 다른 믿음이 있을 수 없었지. 시대가 너무 척박했으니까.

쓰레기 뿐인 이 버려진 땅에
떠나가면 아무도 오지 않았지

난지도처럼 우린 술에 취해서
오래된 혁명처럼 쓰러지겠지
우리 이제
다시는 세상에 오지를 말자
그리움을 참으면 꽃이 될까
 – 프리다칼로 <난지도>
중에서

> 중요한 건 클럽에 찾아오는 사람이 꾸준해야 토양이 갖춰지는 건데. 언론에서 많이 다뤘어도 오히려 안 좋아지고 있잖아요?
> 클럽 주인들이 갖고 있는 자본이 너무 열악해. 좀 더 큰 규모로, 장르도 다양화하고 그리고 클럽 색깔도 라이브화해서, 극장 중심으로, 서구처럼 가야해. 열악한 자본으로 하다보니까 시끄럽기만 하고 지저분해지고. 사운드가 좋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금새 싫증을 내는 건 당연하지. 소리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소리가 싫어지니 뭐. 악순환이지.

> 사운드에 불만이 많죠?
> 말도 못하지. 제대로 나오는 데가 별로 없어. 갑갑하지. 후진국이야, 우리나라. 문화 후진국. 기본적으로 클럽 이전에 라이브를 가봐도 그래. 앤지니어링, 조명, 음향 시스템기기는 다 비싼 거야. 우리나라가 다 그래. 녹음실에 가봐도, 외국에서도 잘 안쓰는 몇 억짜리 믹싱기는 우리 나라에서 다 사간대. 근데 만들어내는 건 싸구려 음반, 외국 개인 스튜디어에서 만들어 내느 것보다 못하잖아.

> 엔지니어가 못해서 그런 거에요?
> 공부도 더 해야하지만, 시스템의 모든 부분이 수준미달인거지. 기제는 비싼 데 그걸 제대로 쓰질 못하는 거야.

> 말하자면 클럽 뿐만 아니라 공연이나 녹음 전반과 관련한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거죠? 밴드들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토양인데.
> 그것만 아니라 뭔가 실험할 수 있는 분위기도 열악해. 엔지니어쪽으로 버클리 같은 데 유학도 많이 갔다 온다고. 도제제도라고 하나? 영화처럼. 그 구닥다리 시스템이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거야. 하는 사람만 계속 하는거지. 옛날 트롯트 만들던 사람이 계속 해. 그래서 밴드들이 조금만 역량 있으도 절대 우리나라에서 녹음 안할려고 하지.

> 거기다 유통구조의 문제, 방송국의 횡포. 결국 문제가 시스템 전체에 걸쳐 있군요.
> 어떻게 보면 클럽이 늘어난다고 해도 빤한거야. 열악한 자본으로 만들다 보니까 사람들이 점점 질리는거지. 정부도 그래. 문화진흥기금은 걷어서 어디다 쓰는지 몰라. 곧 일본 문화도 개방된다고 하는데, 자국에 제대로 된 밴드 하나 없으니부끄러운 일이지.

> <밴드연합>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 영화쪽처럼 안티음악제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가칭이지만, 일년에 한번씩 방송 횟수나 앨범 판매에 상관없이 정말로 잘 만든 음반을 선정해서 상금도 주고. 뜻 맞는 사람을 찾고 있어. 여러 문화계 사람들이랑 연대를 해서 시상식도 만들고 홍보도 하면 락 스스로가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기획자가 아니라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을 어떻게 펼쳐갈 지는 답답하지만괜찮은 거 같지 않냐?

> 형네는 <밴드연합>에서도 맏형인 셈인데요. 후배들이 거는 기대도 크겠어요. 한편으로는 부담이 될 수도 있구요.
> 우리가 돕기도 하지만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해. 무슨 이득을 바라고 하는 건 아니지. 사실 밴드들이 모였다는 건 정말 큰 일이거든. 근데 그 동안 매스컴으로부터 외면당해 있었던 거지. 난 우리가 새로운 계보라고 생각해. 그 전에는 개개 밴드들을 묶어줄 카테고리가 없었잖아. 우린 워낙 어려웠을 때 뭉쳐서 지금은 식구나 마찬가지야. 앞으로 계속 해 나가다보면 우리 안에서 끌어갈 만한 팀들도 새로 나오겠지. 우리가 지금까지 끌고 왔는데 후배 중 누군가가 끌어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프리다칼로가 한 발씩 나갈 때마다 <밴드연합>도 앞으로 나간다고 생각해. 그런 점에서는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지. 음악을 만들 때 정식할 수밖에 없거든. 음악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면 우릴 어떻게 믿고 따를 수 있겠어.

> 10년 후에 형이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면 좋겠어요?
> 정말 좋은 음반사를 하나 만들고 싶어. 음악을 계속 하면서 말야. 옛날에 <동아기획> 소속 가수라고 하면 그건 보증수표였어. 그런 색깔있는 음반사를 가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리고 락의 전당 같은 형식으로 장학 기금을 만들고 싶기도 하고.

 

그러므로 뼈는 별
죽음 하나하나가 生의 징검다리다
나그네는 마지막 징검다리의 몇 걸음 앞에다 자기 뼈를 남기고
그런 식으로 萬里를 가야
사막을 횡단하는 나그네 하나 생긴다
물방울이 빈도로써 바위를 뚫듯
萬人의 징검다리가 길 하나를 뚫었지만,
아으, 바람과 안개
다시 萬人分의 뼈를 남겨야 사람 하나 횡단시킬 수 있다
  –
김중식, <물방울은 빈도로써 모래를 뚫지 못한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