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호의 귀를 자르다
난다킴 : 애니메이션을 하게 된 동기나,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오성윤 PD : 원래 어렸을 때부터 그림하기로 작정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그림을 그렸는데, 당연히 나는 최고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정신적으로 그런 게 심한데… 어렸을 때부터 그런 거에 시달려서 참 피곤하다(웃음). 그런데 떨어진 거다. 내 그림은 누가 그려준 거라 탈락시켰다는 후문을 들었다. 나 혼자 다 그렸는데.
난 : 어떤 대회였는데?
오 : 쪽팔리지만 교내 사생대회. 하하하. 그런 후문을 듣고 미대 가기로 결심을 했다.
그때 귀 잘린 고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아! 그 사람처럼 그림을 그려보자’는 생각하기도 했다. 당연히 대학 들어와서도 소위 방탕한 생활을 이상처럼 생각하고 살았는데, 정작 미대에 들어가서는 실망했다. 가르치는 것도 그렇고, 귀 잘린 고호의 모습을 가지려던 나의 모습도 실망스럽고… 뭘 어떻게 그려야 될지도 헷갈렸다.
그러던 중 그는 연극반에 들어갔고, 어떤 목적을 갖고 들어간 건 아니었지만, 돌이켜 보니 그림에서 헤맸던 것들을 연극에서 찾은 것이라고 했다.
오 : 내가 그려내는 것들에 대한 소통의 체계가 너무 없다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의미가 없었던 거다. 이야기로서의 그림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는데, 그걸 전달할 수 있는 그림의 능력이나 소통체계가 전혀 안 보였다. 연극은 즉자적인 대중과 만나면서 같이 웃고 같이 침묵한다. 연극은 바로바로 알 수 있었다. 연극은 어쨌든 이야기잖은가. 그런 모습이 즐겁고 좋아서 소위 미대 연극반을 다닌 거다. 일년에 반 이상은 연극활동을 하고 그림은 그 중에 반 정도. 그렇게 써클에서 뜻맞는 애들끼리 했다.
그런데 70년대 말 80년대 초, 그때 소위 전체 운동판에서 문화 운동이라는 것이 거세게 커졌다. 그러다 보니까 내 그림의 한계에 대한 질문도 많아졌다. 또 학교에서 70년대 말부터 마당극 운동 같은 게 있었는데 그런 것들과 부대끼면서 내가 연극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됐다.
나는 주로 부조리극 같은 걸 좋아했다. 이오네스코, 아라발… 이런 연극은 조금은 철학적 사색이 담긴 듯하면서도 웃긴다. 그런 희극적 요소의 새로움 같은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다른 캠퍼스의 큰 움직임은 이런 연극하고는 다른 것이었다. 전체 운동에서 문화 운동으로서의 큰 물결이 있었기 때문에 방황을 많이 했다. 어설프게 그쪽에 한 발을 담가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개인전까지 해봤다. 졸업하자마자 했으니까 우리 학번에서는 처음으로 한 거였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마스터베이션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군대를 가버렸다. 군대에 갔다오니 80년대 말의 전체 운동이나 문화 운동판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영화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어긋남 덕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오 : 군대를 갔다 오니까 문화 운동 속에서 막 영화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그때 장산곶매가 한창 이름을 날리면서 작품 활동도 했을 때다. 멀티 슬라이드쇼라는 게 지금은 아주 별볼일 없는 매체가 됐지만, 그때는 소위 노동운동판에서 아주 유력한 매체였다. 그것도 일종의 애니메이션 개념이 섞여 있는 것인데,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가지고 유기적으로, 계속 장면을 바꾸면서 연출하는 모습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80년대 초에 연극했던 것과 다르게 80년대 말에 제대를 하고 나오니깐 어떤 영상에 대한 개념들, 멀티라든가 작은 영화 운동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연극을 하려고 했다가 그것을 보니까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대중도 연극보다 상당히 많았다. 그동안 내가 의문시했던 ‘이야기 만들기와 전달하기’라는 측면에서 영화가 훨씬 더 우수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직접 확인하고 나서는 그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에 대한 관심은 어렸을 때부터 많았다고 한다. 명화극장은 빼놓지 않고 보고, 국민학생 시절 매맞으면서도 주말 밤마다 늦게까지 TV를 봤을 만큼, 그러니까 헐리우드 키드 못지 않은 영화광이었다고 한다.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보통 만화가들이 어린 시절부터 만화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자기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실망스럽지는 않냐는 질문과 함께.
오 : 그렇게 영화 하기로 마음먹고 성남에다 작업실을 차려 팀원을 모았다. 그건 애니메이션팀이 아니고 영화팀이었다. 이름도 ‘황토’라고 짓고, 7, 8명이 모였는데 다 미대출신이었다. 그런데 영화라는 장르는 어깨 너머 배웠던 것과 전혀 다른 매카니즘이 있었고 노하우도 전혀 달랐다. 다 미대출신이다 보니 끌어갈 수 있는 힘이 약했다. 그러다 영화과 출신을 끌어 들였는데, 아무튼 영화는 워크?? 한 번 정도 해보고 더 진행을 못하게 됐다. 도리어 영화 하겠다는 의지마저 꺾였다.
그런데 팀원 중에 애니메이션에 경험이 있던 친구가, 7명의 장기가 다 그림 그리는 거니까 그림으로 영화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을 하게 되었다. 대학교 때 <발자국>이라는 프랑스 애니메이션을 인상적으로 본 건 있었지만, 솔직히 만화라든가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없었다. 어찌보면 문화의 흐름 속에 계속 이끌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난 : 어떤 애니메이션을 했는지?
오 : 각 노동운동판에 비디오 테이프를 뿌리는 <노동자 뉴스>가 그때 운동판에서 아주 유력한 하나의 매체였다. 지금도 있지만. 거기에 애니메이션이 잠깐 들어간다. 애니메이션으로 한 첫 작품은 ‘3자 개입 금지법’을 만화적으로 푼 애니메이션으로 5분짜리였다. 그게 <노동자 뉴스>에 실린 걸 시작으로 애니메이션을 계속 하게 된 거다.
난 : 서울 애니메이션(서울 무비)에도 있었던데?
오 : 그때 당시에는 애니메이션이라는 게 아주 생소한 개념이었다. 지금은 히로시마에서 상을 받는 일이 자주 있지만 그때만 해도 애니메이션 영화제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하다 이용배 씨라고 애니메이션에 경험이 있는 사람과 만나 일을 같이 하게 됐다. 이럴 게 아니라 기존 프로덕션에 창작 기획팀을 만들어 거기 들어가서 풀어보자고 해서 거기에 들어갔다. 뭘 해야할지 아무 대책없이 들어갔고, 결국 바둑이나 두고 게임이나 하고 포카도 쳤다. 그때 세월을 생각하면 너무 바보 같았다.
난 : 그 기간이 얼마 정도?
오 : 한 육 개월. 그런데 너무나 중요한 시기였던 거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애니메이션 외국잡지를 봤는데, 뒤의 인덱스를 보니까 무슨 애니메이션 페스티발이 엄청 많더라구. 어, 여기 한번 내볼까 해서, 또 작품을 하게 됐다. <와불>이라고 그 작품을 서울 무비의 제작지원을 받아 만들게 됐다.
난 : <와불>은 같이 만든 건가?
오 : 서울 무비의 창작 기획팀에서 만든 거다. 그게 국내 최초의 한국 애니메이션 창작기획팀이었다. 그래서 출품도 했고.
난 : 성과는?
오 : 좋은 성과는 아니었고, <앙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발>에 처녀 출품작들을 공개 상영하는 ‘주목할 만한 신인들’에 들어갔다. <로카르노>나 <칸느>를 보면 ‘주목할 만한 시선’, 이렇게 되면 꽤 쳐 주는 건데, 그런 개념은 아닌 것 같다. 프랑스 앙시에서 하는 공개 상영을 보러 가기도 했다.
난 : 어땠나?
오 : 물론 필름 작업을 했지만 큰 스크린에서 우리 작품이 상영되는 건 처음 봤다.
처음에 이렇게 보기 시작해서(테이블 위로 꼿꼿이 앉는 포즈) 끝날 때쯤 되니까 의도적인 건 아니었는데 이렇게 계속 내려가서(의자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앉는 포즈) 앞 의자 위로 눈만 내놓고 있더라. 쪽팔려서… 그 큰 스크린에서 보니까 허점들이 엄청 보이고, 화면발도 안 좋고, 촌스럽고… 와, 말 그대로 쥐구멍… 창피하더라구.
난 : 그래도 많이 배웠겠다.
오 : 그렇다. 혼자 가서 정말 힘들게 지냈다. 방을 못 잡아 비오는데 야외에서 자기도 했다. 잔디밭에 들어가 슬리핑백 속에 누웠는데 비가 떨어지는 거였다. 말도 안 통하지… 미치겠는데, 게다가 내 작품을 보게 되니까 충격까지 받았다.
난 : <와불> 이후 활동은?
오 : 서울 무비에서 계속 활동했다. 자그마치 8년을. 마지막으로 한 게 <둘리> 극장용 장편 기획을 하고, <영혼 기병 라젠카>까지 기획만 하고 나왔다. 그동안 단편일도 하고 여러 가지를 했다. 방송물 같은 것도 빵 원에서 시작했다. 그게 재미있었는데, 사람들이 사업을 하려면 그래야 되겠지만, 돈 한 푼 안 받고 30초짜리를 넘겨 준 것 갖고 돈벌이가 시작됐다.
그래서 백만 원짜리까지, 그렇게 늘어나는 게 보이니까 재미있더라. 빵 원에서 이백만 원짜리, 오백만 원짜리, 그 다음에 억 대도 생기더라. 이억, 삼억 그러다가 십억 일이 생기더라.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계속 그렇게 규모가 커지다 보니까 욕심도 나고 시리즈나 극장용도 한 번 해야겠다 해서 했던 게 <아기공룡 둘리의 얼음별 대모험> 하고 비디오물 등.
이것저것 다 했다. 90년 초반만 해도 애니메이션으로 할 수 있는 돈벌이 일 자체가 없었다. 지금은 뭐 TV, 극장, 인터넷, 플래시까지 난리가 아닌데, 그때만 해도 방송국에서 기획을 하고 세영이라든가 대원 이런 큰 회사들이 독점했다. 우리 같은 신생 회사가 뚫고 나가기가 무척 힘든 상황이었다. 비디오, 타이틀, 리서치 애니메이션 등 뭐든지 했다.
난 : 아까 만화를 사랑한다든가 이런 마인드는 별로 없다고 했는데.
오 : 없었다. 없었는데 지금은 좀 다르다. 내가 하려고 하는 애니메이션 스타일과 다른 사람들이 하려는 스타일이 좀 다른 것 같다. 알다시피 <오돌또기> 같은 것도. 소위 내가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영화적 애니메이션이랄까 그런 것들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아니면 뭔가 특별하거나.
2. 소외없이 창조는 없다
난다킴 : 작업한 작품 중에 애착을 가지는 건?
오성윤 PD : 애착까지 가는 작품은 없다. 내 손으로 올곧게 닿은 게 없기도 하다. 난 프로듀서이기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른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 들어갔던 삽입 애니메이션이 좋았던 것 같다.
난 : 그 영화에 캐스팅될 뻔 했다던데?
오 : 스물 일곱 살에 애니메이션을 시작했는데 서른이 되니까, 원래 영화하려고 했는데라는 생각에 영화 유학 가려고 서울무비 회사를 무작정 그만두고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집에서 엄청 말렸다. 그런데 부산에 굿을 보러 갔다가 장선우 감독을 만났다.
난 : 그전에는 장선우 감독을 몰랐나.
오 : 몰랐다. 그때 처음 만났다.
난 : 누가 먼저 접근을?
오 : 내가 먼저 했지… 중간에 브로커가 있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연기도 많이 했었거든… 연극할 때 연기하는 걸 되게 좋아해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했었다.
난 : 어떤 배역? 지나가는 행인?
오 : 아니, 주연도 많이 했지. <날개>에서 이상 역할도 많이 했다.
난 : 오∼ 이상. <날개>를 각색해서?
오 : 대본이 있었다. 그 대본을 우리가 각색해서. 내가 처음 연출한 게 이상의 <날개>였다.
난 : 오∼ 연출에서 주연까지! 설마 무대미술까지?
오 : 그런 것까지는 안했다. 그런 건 쫄따구들이 하고.(웃음) 누가 장감독에게 소개시켜줬다. 연기를 하고 싶어한다고. 장감독은 눈도 안 마주치더라구. ‘뭐, 그래 알았어(고개를 돌리는 연기!)’ 그러더라구. 그러더니 몇 달 있다가 전화가 왔다. 이런 거 하려고 하는데 한 번 해보지 않겠냐구. 그러면서 소설책을 한 권 던져주더라.
그런데 당시에는 내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서울무비 기획실장직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했어야 했다. 기획실장을 맡은 지 2, 3개월밖에 안된 상태였기 때문에 영화를 하게 되면 이걸 버리게 되는 거니까 할 수 없었다. 장감독을 만났더니 ‘읽어봤냐’ 하시더라구. ‘네, 대충 읽어 봤는데요…’ 그 말하는 순간에 벌써 얘기가 끝나버리더라구.
딱! 손가락 치는 동작 – 역시 연기가 몸에 배여서 그런지 오PD는 동작이 많았다.
오 : 대충 읽어 봤다니까 거기서 이 양반이 맛이 뿅 가서 감히 캐스팅하려고 그러는데 뭐 대충 읽어봐 그 순간 짤렸다. 거절하려고 그랬던 건데, 그래서 안 하게 됐다.
미련이 남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배우는 해보고 싶단다. 나이먹고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단다.
난 : 꽤 다양한 길로 온 셈인데.
오 : 그런 것들이 내가 애니메이션 하는 데 있어서 정말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애니메이션이 주로 테이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몸으로 느끼지 않으면 애니메이션의 액팅 연출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디즈니 스튜디오에 가면 제작실 자체가 무슨 정신병원 같다고 한다. 그리다 말고 옆에 복도로 나가 자기가 막 연기해 본단다. 자기가 물리적인 힘과 연기와 표정 이런 걸 몸으로 느끼지 않으면 제대로 할 수 없다. 나도 애니 연출을 좀 해봤지만 연극을 했던 것이 정말 많이 도움이 됐다. 애니메이션은 총체예술이다. 미술, 연기, 영화 이런 게 다 녹아들어가는 거기 때문에, 나한테는 굉장히 소중한 단계였다는 생각이 결론적으로 든다.
난 : 애니메이션을 하면서 보람을 느낄 때는?
오 : 그림 그리고, 시나리오 쓰는 일만 창조적인 것 같지만 기획자나 프로듀서도 매우 창조적인 역할이고 그런 정신과 능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프로듀서의 역할 중에 이 프로젝트에 맞는 창조적인 인력들을 찾아내고, 그 사람들이 잘 어울리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잘 어울려 서로의 창조적인 능력들이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하는 게 제작 프로듀서에게 제일 중요한 역할이다. 그건 계산으로 되는 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 사람들이 잘 만나서 자기 자리에 있는 모습을 보면 무척 즐겁다.
난 : 현장에서 느끼는 어려움이 있다면?
오 : 역시 창조력인 것 같다. 십 년 넘게 해왔지만 계속 제일 큰 문제는 그 부분이다. 주변에 그림 그리는 사람, 책 만드는 사람도 많은데, 똑같은 어려움을 토로한다. 남 탓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교육받아온 것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할 수밖에 없다. 왜 우리가 이렇게 허덕일까.
다른 예를 들면 어린이 창작동화에도 문제가 심각하다. 글 쓸 사람이 없다는 게 보통 문제가 아니다. 아주 재미있고 창조적이고 새롭고, 잘 깎여진 그런 동화작가가 없다. 다섯 명 정도 손에 꼽는다고 한다. 아이를 둔 내 처도 동화 일러스트레이터라 아이들 책을 많이 보는데 그렇게 이야기한다. 무엇을 창조해내는 게 너무나 힘들다. 뭐 돈 같이 여러 가지 뻔한 이야기들은 많지만 나는 그게 참 힘들고 실패도 많이 했다. <오돌또기> 시나리오 때문에 4년 간 헤매고 있다. 96년부터 시작해서 박재동 선생님이랑 나랑 머리 싸매도 잘 안 나온다.
난 : 따로 스토리 작가가 없나?
오 : 있었다. 두 명이나 갈아 치웠다. 새롭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고 충분하지도 않았다. 결국 교육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걸 극복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자신밖에 없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소외시키는 방법이 제일 좋은 것 같다. 자기 자신을. 나도 나 자신을 소외시켜 보려고 노력했다. 지금 현재 자기가 있는 위치나 공간이나 조건들로부터 계속 일탈하려고 하는 노력들이 우리 현재의 교육체제에서는 제일 좋은 것 같다.
난 : 자기 소외?
오 : 자기를 소외시키지 않고는 우리 교육환경에서 창조력이 나오기 힘들다. 그런 기질이 있는 사람만 하는 게 아니라 다들 하지 않나. 탈선, 일탈, 소외. 환경으로부터의 소외, 자기로부터의 소외, 자기 주변으로부터의 소외를 계속 하는 거다. 예술가들 보면 그게 창조력을 위한 소외의 몸부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생각해도 맛만 본 것 같다. 안타깝고 후회스러운 점이 더 깊이 못 들어갔다는 건데, 맛만 보다 보니까 프로듀서밖에 못하는 거다.
난 : 만일 깊이 들어갔다면?
오 : 감독이나 연출가가 됐겠지. 화가가 됐거나. 주체적으로 작품을 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맛만 보아서 프로듀서밖에 못 됐다. 그래도 다른 프로듀서들보다는 유리한 게 많은 것 같다. 계산하는 건 상대적으로 못하지만, 그 반대 것들은 다른 사람보다 잘하는 장점이 있는 것 같다.
난 : 앞으로 정말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오 : 연출을 제대로 한 번 해보고 싶다. 지금도 계속 끊임없이 소외작용을 하고 있다. 언젠가는 연출을 해야 되니까.
난 : <고인돌> 같은 경우는 연출을 맡았지 않은가?
오 : 내가 제작 지휘를 맡았고, 단편들마다 감독들이 따로 있었다. 나는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둘 다 하게 될 것 같다. 워낙 하고 싶었던 것이고… 결국은 다시 돌아오는 셈이다. 그냥 돌아오는 건 아니고 그런 전력 속에서 현재 애니메이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나에게 무척 좋은 수업이다. 제작 프로듀서나 지휘를 하기 때문에 연출도 보고 콘티도 보고 여러 것들을 본다. 애니메이션을 하면서 많은 노하우가 생길 것 같다.
예를 들어 애니메이션은 자유연기를 시켜놓고 카메라로 찍는 그런 기법이 없다. 여기에서는 모든 걸 다 손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엄청나게 계산적인 장르가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눈초리, 눈 깜박임 하나, 표정 하나 하나를 다 만든다. 또 미술이라는 영역은 너무나 중요한 장르이다. 그런 것들을 잘 살려서 영화를 만들면 뭔가 새롭고 재미있는 게 하나 나올 것 같다. 물론 영화에도 미장센같이 다 계산을 하지만 미술은 그것에 대해 색조라든가 더 철저하게 한다. 하나 빠진다면 조명이지.
난 : 혹시 <고인돌> 하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없었나?
오 : <고인돌> 회의를 하면 온갖 얘기가 다 나온다. 상스러운 욕도 나오고 섹스에 대한 얘기는 우리 팀원끼리 대화 중에 일상이 되어 버렸다. 보통 잘 못하는 이야기도 아무 거리낌없이 우리는 막 한다. 기획 아이디어 회의를 해야 하니까. 그러다 외부 손님이 왔다 기분 나빠해서 난처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난 : <고인돌> 같은 작품은 하면서 즐거웠을 것 같다.
오 : 즐겁다. 코메디니까. 그런데 사실 괴롭기도 하다. 코메디가 얼마나 괴로운지… 어휴. 감동을 주거나 눈물 흘리게 하는 건 오히려 쉬운 것 같다. 물론 아주 쉽지만은 않겠지만, 웃긴다는 건 진짜 어렵다. 웃긴다는 게 너무 힘들다는 걸 요번에 깊이 느꼈고, 그 뒤로 개그맨들 보면 대단한 사람들 많다고 새롭게 보게 됐다.
3. 꿈이다. 에니메이션은
난다킴 : 다음 작품으로 준비하는 <바리데기> 이야기를 해달라.
오성윤 PD : 원래 장선우 감독이 기획을 했던 거다. 장감독도 굿에 관심이 있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서울대에서 마당극 운동이 새롭게 시작됐다고 봐야하는데. 그때 유인택, 지금 부산대 교수로 있는 최유한, 여전히 활동하는 임진태, 명곤이형 등이 활동했고, 그 분들 할 때 장감독도 있었다.
아까 말했듯이 부산에서 굿도 같이 봤는데, 역시 장감독도 그걸 하고 싶어했더라. 굿을 보면서 저런 굿판같은 영화, 굿판같은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어 했던 거다. 나도 굿이라든가 마당극 형식같은 우리의 예술적 장르에서 뭔가 찾아올 게 없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창조라는 것에 힘들어 할 때 혼자 힘으로 하기 힘드니까 이전 것에서 찾아볼까 했다. 더 깊이 있게는 못 들어갔는데. 장감독도 그런 생각을 오래 한 것 같다.
요번에 <바리데기>는 그 연장선상에서 하는 것 같다. <바리>가 그런 굿의 일종이다. 내용도 참 좋고, 그래서 같이 하게 된 건데. 처음에 같이 하다가 일이 있어 나오게 됐는데, 같이 할 사람을 찾아 다니다가 다시 우리한테 왔다. 역량들이 좀 모여야 제대로 할 수 있겠다 해서 박재동 선생님을 포함해서… 박재동 선생님이 현재 공동감독, 내가 제작 책임프로듀서를 하고 ‘오돌또기’가 같이 한다.
<바리데기>는 지난 9월 21일 작품발표회가 있었는데, 장감독은 공동감독 겸 총감독을 맡고 <박하사탕>, <오! 수정>, <시월애> 같은 작품을 만든 유니코리아 문예투자가 제작비와 마케팅 배급을 맡았다.
난 : 내용을 만드는 건 여기서?
오 : 그렇다. 장감독하고 여기서 같이.
난 : <바리>는 제주도 지방의 서사무가로 알고 있는데.
오 : 바리 설화는 전국 방방곡곡에 다 있다. 비슷한 게 위에도 있었는데 구전되면서 지역색에 맞게 각색된 거다. 그렇듯이 우리가 <바리>를 우리의 설화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에 우리가 <바리>를 전승하는 거다. 각색을 많이 해서, 무대는 실크로드 길로 잡고… 이런저런 설화에서 따오는 것도 많다.
바리가 죽어버린 아버지, 어머니와 그 왕국을 살리기 위해서 감로수(생명수)를 찾아와야 하는데, 그게 서천 서역이 되고, 이쪽에서 저쪽, 그러니까 서역, 인도쪽을 보는 걸 여정으로 잡고 있다. 가다보면 빙산, 모래사막도 만난다. 그런 공간들을 실크로드로 설정해서 9월 25일에 직접 간다. 미술이라는 것도 한국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중국하고 간다라까지 그걸 다 한번 섞어 보려고 한다.
가장 걱정되는 건 그것이 완성된 비쥬얼로 어떻게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다. 장감독은 운주사 방식이라고 하는데, 화순에 있는 운주사에 가면 천불천탑이 있잖은가, 거기 각양각색의 부처상들이 널부러져 있는데 제작방식을 그것에 비유하고 있다. 서로 다른 아트 스타일이 어떻게 만날 수 있나.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가 있겠느냐. 우리가 추하다고 하는 것들이 어우러졌을 때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시시비비를 떠나야 그런 것들이 가능하지 않겠느냐…이런 것들이다.
난 : 불교 철학 냄새가 난다.
오 : 불교적인 선(禪)의 개념을 많이 갖고 있다. 깨달음. 바리가 생명수를 찾아가면서 무언가 하나하나 깨닫게 된다. 등잔불을 들고서 가는 길을 알려 달라고 할 때마다 어떤 걸림돌이 있는데, 그걸 넘어가려면 무슨 깨달음 없이는 넘어갈 수 없다.
<인디애나 존스>에서는 열쇠를 찾아서 구멍에 넣으면 길이 열리는데, 여기서는 그게 아니다. 길은 비슷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 열쇠는 바리 자신의 깨달음에 있다. 나중에 감로수도 어떻게 발견하게 되냐면…
여기서부터는 오프 더 레코드다. 물론 궁금함은 나중에 극장에서 풀기로 하자.
난 : 그런 주제에 많이 공감하나?
오 : 아주 좋다고 생각한다. 공부가 약해서 깊이 있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각색에서 조금 바꿔지긴 하겠는데 그런 시퀀스가 참 매력적이었다. 바리가 빨래 빠는 그게 참 좋았다. 바리가 여정에 지쳐서 ‘저기 가면 마구 할미가 그 길을 가르쳐 줄 것이다’ 해서 가보니까 빙판이다. 거기서 마구 할미가 빨래를 빨고 있는데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니까, 빨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검은 빨래, 흰 빨래가 있어서, 검은 빨래 희게 빨고, 흰 빨래는 검게 빨면 가르쳐 준다고 한다. 그거 우리 <진주난봉가>에 있잖은가.
바리가 그 동안의 여정 때문에 세 가지 문제를 풀어야 했는데 배고픔, 잠, 길을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 세 가지를 풀어야 하는데, 이 할미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거였다. 어떻게 해, 몸으로 때워야지. 그래서 검은 빨래는 막 패니까 어떻게 희게 됐는데, 흰 빨래는 암만 해봤자 검게 될 수가 없잖은가. 그런데 계속 때리니까 손에서 피가 나서 빨래가 검게 변하는 거다. 그리고 할미 몸에 이를 잡아 배고픔을 해결하게 되고, 이번엔 할미가 등잔불을 들고 시냇물 속을 들어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그래서 바리가 고민하다가 잠이 드는데 바닥 속에 진흙소가 달을 먹는 꿈을 꾼다. 그런 과정에서 점차 길을 찾아 나가는데, 꿈이라는 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을 풀어나가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만약 애니메이션이 뭐냐고 묻는다면 이런 것과 비슷하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난 : 나름대로 애니메이션을 뭐라고 생각하는가?
오 : 일단 큰 틀의 영화라고 본다. 지금은 어떤 한 가지 장르를 고집하진 않고, 여러 가지 장르에 대해서 다 한 가지씩 해보고 싶은 욕심이다.
난 : 가령?
오 : 환타지 요소가 많이 들어간 거라든가, 무협, 서사적인 것을 해보고 싶다. <바리데기>도 일종의 서사무가에서 나온 거다. 그건 동양적인 환타지의 개념과 이미지를 많이 상징화해서 낼 건데, 그런 것도 매우 좋은 것 같다.
요즘에 조금 정리가 되는 것은, 아무튼 동양적 환타지라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펼쳐나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화두이지 않을까 싶다. 여러 가지 철학적 사조의 분위기도 내가 아는 범위에서 그런 게 느껴지고, 지구라는 그 자체의 위기감도 그렇고, 서양적 합리주의 위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의 한계도 느낀다. 이런 것들 속에서 우리가 그 동양적 환타지라는 걸 잘 찾아내서 잘 포장해 내고, 대중적으로 잘 어필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바리데기>하면서 많이 느끼고 그전부터 좀 느껴왔다. <오돌또기>도 그런 관점에서 보고 있다.
난 : 이렇게 말해도 좋은가? 애니메이션은 꿈이다?
오 : 그렇게 명제를 만들면 위험하긴 한데, 장자가 나비되는 꿈을 꾸면서 깨달은 것 있잖은가. 현실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각을 못하면 꿈이라고 할 수 있다. 바리가 꾸는 꿈과 비슷한 의미라면 애니메이션은 ‘꿈의 공장’, ‘꿈의 궁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미뤄두었던 답을 주면서 인터뷰는 끝났다. 앞으로 그가 풀어갈 꿈의 이야기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