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난파(難破) 그리고 당(黨)
퍼슨웹> 경력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이름은 장병락이요. 1934년 7월 25일생. 출생지는 함경남도 고은군인데 아주 어렸을 때 원산에 나왔어요.
거기 나와서 해방 전, 그러니까 41년에 공립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했는데 4학년 때 해방이 됐어요. 기쁨, 감격이란 건 못 느꼈어. 왜 못느꼈냐면 그때 장티푸스를 앓고 있어서 해방이 된 것도 나중에야 알았지. 그리고 나서 원산공업중학교 입학하고 48년도에 졸업했지. 그 해에 또 원산 고급중학교에 들어갔고.
갈월동에 있는 <만남의 집>에서 장병락 씨를 만났다. 그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 1934. 7.25 원산시 와우동 출생. 원산공업중학교, 원산고급중학교 졸업.
– 1950. 6.23 해군하사관 학교 자원 입대. 전쟁 발발 후 보병으로 참전.
– 1959. 3. 제대와 동시에 당으로부터 소환.
– 1962. 3. 정치공작원 안내선의 기관장으로 남파(해상 안내원)
– 1962. 4. 5. 체포됨. 무기징역 선고 받고 37년 복역
1962년 이후 37년간 그의 이력은 보탤 게 없다. 37년간 그는 오직 한 곳에서, 하나의 일만 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34년생이면 예순 일곱이다. 37년간이니, 생의 1/2이상의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이력에 보탤 게 생겼다. 다른 “비전향 장기수”들과 함께 그는 오는 9월 2일 북송(!)된다. 아니, 귀환한다. 그에게는 64세가 되었을 처와 백일이 되기 전에 두고 온 아들(현재 39세)이 있다고 한다. 바닷길로 와서 이제 돌아가는 장병락 씨의 아내는 페넬로페처럼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퍼> 당시 원산이라든가 해방 정국의 분위기에 대해서 기억하시는 게 있나요?
원산은 1920년 원산 제네스트 사건으로 유명한 데지요. 근데 해방 뒤 특별한 분위기는 기억 안나. 우리 정권이 수립됐으니까. 사회주의 정권은 아니지만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 세워졌으니까 당연히 해방 전하고는 달랐지. 노동자, 농민 근로하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으니까 분위기는 아무래도 달랐지.
퍼> 월남한 사람들도 있었겠죠?
그럼. 해방이 되고 토지를 5정보 이상 갖고 있던 사람들 건 몰수했거든. 친일파, 민족반역자 이런 것들은 다 월남해 버렸지. 친일하던 놈들, 경찰하던 놈들 자기가 알아서 다 도망갔지.
퍼> 인민군에는 언제 들어가셨나요?
50년 전쟁 직전, 6월 25일 조국해방전쟁이 발발하지 않았습니까? 그 며칠 전에 내가 해군에 지원입대 했죠. 17살이었죠.
퍼> 자원을 한 특별한 분위기나 이유가 있었나요?
무슨 분위기 보다도 군대들이 멋져 보이고, 조직 생활하는 게 좋은 거 같아서 들어갔죠.
퍼>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셨다고 하던데요.
정확히는 해군 기술훈련소였죠. 해군사관학교이긴 한데 하사관급 기술간부를 양성하는 곳이에요.
퍼> 바로 전쟁에 참여하셨습니까?
나는 배 못탔어. 갓 들어갔으니까. 배 탈려면 기술훈련을 받아야 된단 말에요. 육군하고는 달라요. 조국 전쟁이 일어나면서 제해권은 완전히 미국놈들한테 뺐겼어. 우리 인민 해군에게 배가 몇 척이 있긴 했는데 그 아이들하고 싸우다가 침몰되고 그랬죠. 어뢰정 네 척갖고 순양함을 깬 사례도 있어. 순향함을 깰라면 말야 원래는 어뢰정 60척은 있어야 대항할 수 있다고 그러는데, 근데 네 척 갖고 가라앉혔거든. 대단한 거였어요. 그게 6월 27일이었어요.
퍼> 그러면?
난 라진 기술훈련학교에 있었어요. 전쟁이 일어나고서도 훈련을 계속 받았어요. 근데 우리가 후퇴하게 되니까… 가만 앉아서 공부만 할 수는 없거든.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몰아내야 하니까. 그러니까 그때부터는 걷어치고 보병훈련을 받았지. 받다가 10월말에 육군으로서 전투에 참여했지. 길주,명천 전투였어요. 보병으로 참가한거죠.
퍼> 전쟁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까?
그냥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났다, 이렇게 생각한 거죠. 미국놈들이 사주해서 이승만이가 전쟁을 일으켰다, 그렇게만 알고 있지.
퍼> 조국해방전쟁…그때도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그때 나는 17살 아니요? 그렇게 교양받았고 따로 판단할 능력은 없었거든.
퍼> 전쟁이 3년이나 계속 될거라는 생각도 하셨나요?
그 생각은 못했지. 병사로서 말야, 17살이었고. 그런 판단은 안했어.
퍼> 어쨌든 전쟁은 누구의 승리도 아닌 것으로 끝났는데…
그래? 그 전쟁에서 우리는 승리했다고 보는데? 위대한 조국해방 전쟁에서 우리는 승리했다고 봐. 패배했다고는 안 봐.
퍼> 59년 3월까지 군 생활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후는?
내가 9년이나 군대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으로 공민으로서의 임무는 다 한거거든. 근데 군 생활이 끝나자마자 동시에 연락부에 소환된거요. 대남 사업이란 게 척후 사업이고 굉장히 중요한 거잖아요. 북에서 일하는 거랑 또 다른 거거든. 생명을 내 놓고 하는 거니까. 그때 조선노동당이 130만이라고 했는데, 그 130만 당원 중에서 말야, 당에서 나를 정치적으로 믿고 소환해 준 데 대해서는 자부심을 갖는다고.
대남 사업에 나오는 공작원이나 안내원 이런 사람들이요, 진짜 당에서 믿는 사람들만 보내는 거요. 사생활이 흐리멍텅하거나 정치적으로 신임할 수 없는 사람들은 보내지않는 거요. 철저하게 검토한 사람들만 보내는 거요. 그렇게 검토하고 검토한 사람들 보내도 전향한 사람들, 많지는 않지만, 있지 않아요?
만약 연락부로 소환되지 않았다면 그는 법학을 전공할려고 했다. 그 말을 할 때 웬지 그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다른 꿈도 있었을까?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면 큰 상선의 기관장이 되고 싶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 갈린 조국의 현실은 그가 젊은 시절 품었던 꿈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대남 공작선의 기관장으로 대남 사업에 참여하던 중 사고로 남쪽 감옥에 갇히게 된다. 먼 옛날의 오딧세이처럼. 그리고 40여 년 넘게 성상(星霜)이 그의 어깨 위로, 주름진 이마 위로 쌓였다.
퍼> 당원은 언제 되셨습니까?
낸 좀 빨리 됐는데, 1953년 3월 24일에 내가 입당했거든. 그때가 19살이었죠. 입당하는 거 엄청나게 힘들어요. 입당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정치의식도 중요하고 본인 성분, 근무 성적 이런 거 다 돼야 할 수 있는 거요. 그렇다고 입당했다고 해서 특별히 받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퍼> 전쟁을 전후로 해서 남한의 많은 사회주의자들, 그러니까 남로당원들이 월북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만나신 적이 있나요?
그게 남로당이란 게 말이요, 간단히 말해서 박헌영이 일본 정보기관의 끄나풀이었거든요. 해방 되고 나서 미국놈들이 제일 먼저 뒤진 게 그거야. 박헌영이가 일본놈의 첩보기관에서 협작한 놈이란 문건을 미국놈 기관에서 입수한 거란 말야. 그걸 알고 나서 ‘너 우리랑 같이 하자’, 박헌영이한테 그랬단 말이지. 그 사람이 일제시대에도 숱하게 자기 동지들 팔아먹고 못살게 그런 놈이거든. 감옥에 들어가서도 살아 나오고 나오고 그런 거야.
남쪽에서 민주역량이 셌어요. 내가 보건대 북보다 더 셌어. 근데 그 조직을 다 파괴하고 말아먹고 미국놈을 들여보낸 거야. 52년에 그런 문제가 나와서 재판하게 된거지. 그러니 남로당원들이 사상검토를 받지 않을 수가 없었지. 평당원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간부라고 하는 사람들은 영향 하에 있었으니까.
퍼> 주변에 남로당 출신들은 없었습니까?
소위 민청 생활한 사람도 있지만 생소한 사람들도 많았죠. 내가 같이 생활한 사람들은 거의 그런 사람들이었어요. 다시 말해서 의용군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었지. 인민 군대가 해방시킨 지역에서 자원한 사람들이요. 내가 알기로는 강제로 입대한 게 아니라 자원한 거란 말요. 내 주변엔 대체로 인민군에 들어와서 새로 입당한 사람들이었거든. 그리고는 인민부대 와서 정치학습 받는거요. 철저한 학습을 받는거죠. 정치의식을 주입시켜서 당원도 되고 하는 거지.
퍼> 남로당에 대해서 지금 말씀하신 것과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만…
박헌영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건 잘못이요. 증거도 다 있어요. 해방 되가지고 그 훌륭한 조직들, 동지들 다 팔아먹었단 말요.
퍼> 북측의 일방적인 평가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북에서 재판했던 판, 검사들이 꼭두각시요 뭐요. 자기들이 진술도 다 했어요. 다 얘기했어요. 지금도 저기 봉천동에 계신 장기수 분한테 가면, 그 분이 검사하던 분이라, 만나보면 자세히 알고 있어요. 숙청이 아니란 말요.
나는 다소 생각이 달랐으나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38년여 그 모진 폭력과 인간 이하의 생활 속에서 굳히고 굳힌 정신의 힘 앞에서 어찌 얄팍한 지식의 잣대를 댈 수 있으랴. 그 순간 만큼은 잠시 접어두어도 좋으리라. 역사는 승리한 자의 몫이라는 냉엄한 법칙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패배를 인정하라는 오랜 동안의 폭력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킴으로써 마침내 승리한 그가 아닌가. 이제 짧은 시간이나마 그가 보상을 받을 차례이다. 내가 그의 이념, 그의 조국에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관계없지 않은가. 어쨌건 그의 정신은 승리했으므로.
다만, 패배한 자들,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연민은 별도로 하고 말이다.
시간도 비껴간 0.75평의 독방
퍼> 감옥에서 얼마나 계셨던거죠?
만 37년이지만, 햇수로는 38년이지.
퍼> 오랜 세월 감옥 생활에 건강을 유지하기 힘드셨을텐데, 뵙기에 무척 정정하시네요.
감옥에서 제때 제때 식사 하고, 밖에서처럼 과로를 하는 것도 없고, 담배나 술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낮에는 간수 눈을 피해서 책도 서서 봤어요. 그게 건강에 좋으니까. 앉아서는 잘 안 봤다고. 잘 때만 눕고 그 외에는 자주 왔다갔다하고.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지.
그리고 항상 배가 고팠어. 사람이 항상 배가 고파야 해. 그게 건강에 좋았어. 밥 좀 한참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많았어. 춥고 배고프고…
난 위장이랑 폐가 좀 나빴어요. 단식을 엄청 나게 했어. 헤아일 수 없을 정도로. 폐가 나쁜 사람은 단식이 금물입니다. 그래도 피를 토하면서 단식을 했어요.
퍼> 단식 이유는 주로 뭐 였습니까?
생활에 대한 문제지. 밥을 달라, 책을 넣어 달라, 면회를 시켜주라. 이런 투쟁이요. 감옥에서는요, 말로 해서는 안돼. 최고 투쟁은 단식이야. 단식을 해야 이 사람들이 겁이 나서 뭘 들어주지. 말로 하면 콧방구 낀다구. 단식하면 마지 못해서 들어주긴 하지.
감옥 생활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1만원의 영치금을 받았다.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1993년도에 비로소 편지를 받았다. 동국대학교의 어느 여학생이었다. 감옥 밖의 타인을 30여년 만에 그렇게 만났다. 간단한 안부만이 적힌 편지. 그러나 그 여학생은 그 후로도 계속 편지를 보내왔고 1998년도에 첫 면회가 이루어졌다. 그것도 몇 년 동안이나 매해 그의 생일에 맞춰 대전까지 내려와 면회를 신청한 덕택이었다. 그의 방 한 켠에는 그 여학생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퍼> 책은 무얼 보셨습니까?
처음에는 사회과학 서적은 생각할 수도 없었지. 수학, 어학, 화학 이런 거만 잔뜩 갖다 주는 거야. 어학도 좀 공부하다 화학도 좀 공부하다 그러면서도 잡거하는 사람들 중에 학습을 체계적으로 전문적으로 한 사람들이 있거든, 그럼 같이 공부하는 거야. 그리고 독방에 있을 때는 또 타자를 했어요. 타자로 학습을 한 거죠. 마지막에 나올 때는 주체사상에 대한 것도 조금씩 볼 수 있었고.
퍼> 사회에 대한 궁금증도 대단하셨을 텐데요…
신문 볼려고 얼마나 싸웠는데… 굶어도 말야 소식 하나가 더 중요하거든. 왔다 갔다 하다 타이틀 하나만 봐도 말요, 큰 정보나 얻은 듯이 타자하고 그랬어요. 88년 말부터는 신문 마음대로 볼 수 있었어요. 소식 하나에 힘을 냈거든. 어떤 사람들은 말야 굶어서 생긴 돈으로 남들이 버리는 신문을 사기도 했다고.
퍼> 전향공작은 언제부터 시작됐습니까?
전향공작반이라는 것은 1972년 7.4 공동성명이 나오고, 그 다음 해 73년 8월에 소위 전향공작반이란 게 생겼어요. 전향공작반이란게 교무과 소속인데 원래 없던 걸 특별히 만들었어요. 우리 대전 같은 데서는 세 사람이 한 조야. 그게 세 조가 있었어요. 7급 이상인데, 대학 갓 나온 애들 시험을 쳐서 만들었다지.
그때가 월남이 사회주의 국가로 떨어지고 박정희가 유신헌법 맹근다고 3선 개헌하면서 정세가 상당히 안좋을때라.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들 다 전향시켜라 얘기 했다 이거야. 그런 특별지시가 내렸다지.
테러 안 당한 사람이 없었어요. 많고 적고 그 차이 뿐이죠. 다 당했어요. 잠 안재우는 것도 수없이 많았지만, 제일 힘들었던 게 때리는 거 이런 건 참고 견딜 수 있는데 가족을 동원시키는 건 정말 못참는다는 거요. 난 그런 경우가 없었지만. 일제 시대 때도 그랬대.
퍼> 어떤 때 가장 힘드셨습니까?
난 매 맞는 것도 그렇지만 춥고 배고픈 게 한 두달 가는 게 아니까…그보다도 젤 힘들었던 건 같이 싸우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다 나갈 때 마음이 아프더라구. 맞아 죽어 넘어가기도 하고 꺽여서 나가기도 하고…의지가 약해서 나간 거지…울면서…안타깝더라구. 교도소 소장이란 놈이 조만간에 특별사를 없앱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특별사거든. 때려 죽이건 다 전향시키건 거길 비우겠다, 이거였지.
모욕적인 말을 듣고 왔을 때, 특히 공화국에 대해서, 수령과 당에 대해서 모욕적인 말을 들을 때 제일 기분이 나뻤어.죽지않을 만큼 때려. 낮에는 가만 두고. 깡패랑 한 명씩 넣어 두는 거지. 마침 한 명이 맞아 죽었어. 어떻게 알았냐, 죽은 사람 다음 사람이 맞으러 들어갔는데, 나무로 만든 변기통에 피가 벌겋더라 이거야.
오늘 밤부터 자기가 당해야 하는데, 조금 있다 ‘걷어 쳐’ 그러더래. 앞 사람이 죽은 거지. 최석규라는 사람이 처음에 맞아 죽었어. 거기 들어 갔다 나온 사람은 다 전향했어.누가 죽고 나서야 다른 방법으로 바꾼 거지. 약점을 잡아 가지고 ‘임마 너 왜 서 있어, 나와’ ‘너 왜 웃어’ 하면서 불러, 바늘로 찌르는 거야.
겨울에도 영치된 내의를 찾아 입을 수가 없었어. 이불도 얼마나 작은데…말할 것도 없어. 독방 하나에다 사람을 일곱 여덟씩 가득 넣어서 잠을 잘 수 없게 만들고. 심지어는 말야. 미인계도 쓰는 거라. 한참 춥고 배고플 때 울긋불긋한 옷 입은 여자들이 찰밥 만들어서 꼬시는 거라. 서울에 있는 집에 데리고 나가서 전향 공작 하고…하여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사람이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긴장할 수 밖에 없는 거야. 한 두달이 아니라 몇 년씩 계속되니 건강이 제대로 갈 수가 없지. 가만히 앉아 있어도 깡패 새끼들이 앞 뒤로 왔다 갔다 하고…어떤 때는 책상을 쫘악 놓는 거야. 포로교환하듯 심사를 계속 하는거지. 마지막에 가면 백지랑 볼펜을 놓고 ‘써’ 그래. 뭘 쓰냐 말야, 그러면 ‘아무거나 써라’ 그러는 거야. 심리를 살피는 거지. 겁을 먹었나 안 먹었나 볼려는 거야.
‘난 죽어도 전향 못한다. 장병락’ 이렇게 쓰고 나오니까 저쪽에서 당황하더라고. 웃으면서 나온 거야. ‘저 새낀 정신 나간 놈이야?’ 그런 얘기 하더라구.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히끗 히끗 웃냐는거야…국기에 대한 경례도 안했어. 너 왜 안하는 거야. ‘난 몰라’, 죽도록 맞을 뻔 했지. 반공영화 보면서도 히끗 히끗 웃었단 말야. 그럼 또 걸려서 맞는거야.
그러나 정작 30여 년을 0,75 평의 독방에서 버텨 온 그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때는 94년 북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였다. 며칠을 입에 아무 것도 대지 못한 채 낙담했다. 90년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졌을 때도 충격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94년의 충격은 그와 비교할 정도가 안되었다고 한다.
사상 안 버렸다고 왜 때리냔 말야. 지구상에서 이렇게 잔인하게 전향 공작을 하는 곳은 여기 밖에 없어. 앞으로 우리 나라 역사에서 큰 오점이야. 이건 사실이라구.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거야.
퍼> 이번 비전향 장기수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북과 관련된 분들인데…
남민전 사람들이랑 같이 생활해 본 적이 있거든. 날조된 건 아닌데, 사실은 사실이야. 우리랑 다 같은 사람들인데, 83년도 교황이 왔을 때 어떤 신부가 당신들 석방될 때 전향하라 공작했거든. 가족들도 성화였고. 그래 다 해 버렸어. 그렇지만 결국 그 때 못 나왔거든. 89년인가 그 무렵에 나왔지. 남쪽에서 북과 관계되지 않고 자생적인 사람들,자생적인 좌익들 말야 이 사람들 거의 다 전향했어. 다들 그랬어.
통혁당 있잖아? 신영복이. 그 사람은 좀 나았는데, 결국은 꼬끄라졌어. 이념적으로도 쟁쟁한 사람들이라. 하지만 다 나가더라고. 북에서 온 사람들만 끝끝내 버틴거지.
인텔리는 원래 간층이요. 사실 사회주의 사회에 가서도 살 수 있고 여기서도 살 수 있는 사람이란 말요. 동요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란 말이요. 우리 같은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거든. 사회주의적 인텔리는 좀 달라도. 물론 남쪽 사람들이 다 그랬다는 건 아냐. 무의식 중에 말야, 전향할 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고서는 말야, 자살한 사람도 있다고. 울릉도 사건이란 게 있었어. 거제돈가 남해 사람인데, 이 사람은 무기를 받았는데, 폐가 하나도 없었어. 이쪽 저쪽 조금만 남은 거라. 전향 공작반이 불러서 수술 시켜줄 테니까 전향해라 그런거야. 난 죽어도 못한다 그러고서는 피 토해 죽었단 말야. 남쪽 사람이 그렇게 깨끗이 죽은 경우도 있긴 있지…
그는 이제 다시 북으로 간다.
이제 그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다. 유예된 시간들, 그것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어쨌거나 그의 남은 시간들이 좀 더 따뜻하고 여유로웠으면 좋겠다. 그를 반겨줄 가족들도 모두 건재하고…
퍼> 왜 30, 40 하는 식으로 나이의 문턱이 있잖아요, 옥에 계시면서 그런 느낌이 드신 적이 있었나요?
40대까지는 몰랐어. 50대 되니까 기분이 이상하더라고. 내가 그만큼 늙었구나, 밖에 나가도 일할 능력이 없어졌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 보면 말야, 0.75평 그 좁은 곳에서 그 시간들을 내가 어떻게 지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퍼> 결혼은 하셨지요?
61년 6월달, 내 나이 스물 여덟이었지. 근 1년 결혼 생활한 거지.
퍼> 기억은?
진짜 너무 짧잖아요? 내가 대남 사업을 하니까 내 처랑 데이트를 한다든가 이런 시간이 없었지.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간혹 감옥에서 외로울 때는 가족 모습들을 떠 올려 보는데, 어머니 누이 다 생생한데, 처랑 아들 모습은 떠 오르질 않아.
퍼> 생사확인은?
모르죠. 몰라…
퍼> 제일 궁금하신 사항일텐데요…
궁금하기는 하지. 살아 있겠다 생각하는 거지. 여기처럼 말야, 1년만 떨어져도 다시 결혼하고 이런 건 있을 수 없지. 죽지만 않았으면 해. 재가 같은 건 안했을 거야.
퍼> 생애의 반을 감옥에서 보내신 건데 억울하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억울하죠, 억울하긴 한데… 만약 내 개인적인 일로 들어갔다면 모르겠는데 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간 거니까 그렇게 억울하진 않아. 30, 40대 이런 황금시기를, 제일 많이 일 할 수 있는 시기를 감옥에서 가만히 앉아 보낸 거지. 그렇지만 가만히 앉아서도 난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기여했다고 봐요. 정치적 신념을 지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난 의미가 있다고 봐요.
퍼> 조금 있으면 북으로 가시겠지요. 앞으로 남은 삶은 어떻게 보내실 계획입니까?
내 생이 다하는 날까지 조국통일을 위해 바치겠어요. 우리 전 세대는 식민지 하에서 항일 투사들이 조국 해방을 위해서 전 생애를 바쳤거든요. 그렇다면 우리 세대에서는 조국 통일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최고 애국자라고 생각해요. 내 세대에는 반드시 통일을 시켜야한다. 내 능력이 다하는 데까지 내 능력에 맞게 통일을 위해서 살겠어요. 그거 외에는 없어요.
그는 자신이 북으로 가면서 남의 지인들과 헤어지게 되는 것이 무척 서운하다고 했다. 다들 잠시 떨어지는 것이니까 너무 서운해 하지 말자고 했단다. 그는 이제 며칠 후면 북으로 간다. 오랜 세월을 떠돌다 마침내 고향으로 귀환하는 오딧세이 마냥. 육신의 고향이자 이념의 고향이기도 한 곳. 그러나 그는 오랜 방랑으로 지친 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설레임에도 흔들리지 않은 채, 일찌감치 또 다른 항해를 꿈꾸고 있다. 그런 그가 마침내 ‘그의 조국’으로 돌아간다. 나도 그에게 또 다시 뵙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