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크로드로 달리는 기차
7월 10일 서안에서 천수(天水)로 가기 위해 우루무치[烏魯木齊]가 종착지인 열차를 탔다. 열차 안에서 우연히 위구르 대학생 몇 명과 만났다. 이들은 방학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거나 대학을 졸업하고서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열차는 비록 서안에서 신강성(新疆省) 성도(省都 ; 우리나라 도청소재지에 해당한다)인 우루무치로 향하는 것이었지만 승객의 대부분은 한족들이었다. 위구르족과 같은 소수민족 학생들은 집에 갈 때 같은 소수민족 학생끼리 모여서 함께 가는 경우가 많다.
알다시피 중국은 다민족 국가로 무려 55개 민족이 살고 있다. 13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신강성에서 위구르족은 최대의 숫자를 점하고 있다.
이들은 장거리 열차의 지루함을 덜기 위해 함께 열차에 오른 것인데, 침대차도 아닌 딱딱한 의자칸 열차에 앉아 우루무치까지 앞으로 족히 45시간 정도는 더 가야 했다. 나는 6명이 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위구르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이들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3인용 의자 두 개를 모두 차지하고서는 서로의 어깨를 베개 삼아 기대어 있었다.
그 중 한 여학생을 붙잡고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그녀는 갈색 눈에 반곱슬의 갈색 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한족과는 생김새가 크게 달랐다. 이란계 혈통인 듯 했다.
류준형(이하, 류): 안녕하세요?
굴자르: 예!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고 표정 또한 냉랭했다.
류: 저는 한국에서 온 사람인데요.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몇 시간 째 열차만 타고 있으니 굉장히 심심하네요.
난 그때까지 꼬박 7시간을 앉아 있었다.
굴: 한국인이세요? 반갑습니다!
한국인이냐고 되묻는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미소를 머금은 모습으로 변했다. 아마도 내가 한족이라고 짐작하고 경계하는 것 같았다.
류: 올해 몇 살이죠?
굴: 하하… 숙녀에게 그런 걸 물어봐도 되는 건가요? 올해 23살이예요. 뱀띠죠.
중국에서도 나이를 말하고는 띠로 출생년도를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류: 어디서 태어났나요?
굴: 신강성 호탄[和田]에서 태어났어요. 대학가기 전까지는 호탄에서 생활했죠.
和田은 중국식 이름인데, 위그루어식 발음은 호탄이다. 호탄은 타클라마칸 남부에 속한 지역으로 예전 실크로드 천산남로에 위치한 중요한 오아시스 도시 중 하나였다. 이 지역은 예전부터 옥(玉)이 많이 생산되어 중국에 다량 반입되었는데, 이 때문에 돈황 근처 관문의 이름이 옥문관(玉門關)이라 이름 붙일 정도였다.
류: 대학은 어디에서 다니는데요?
굴: 강서성(江西省) 남창(南昌)에 있는 재경대학(財經大學)에 다니고 있죠.
류: 우와, 그렇게 먼 곳까지 유학을 다 가다니, 왜 남창까지 갔나요?
굴: 뭐 일종의 단련이라고 할 수 있죠. 하하… 아시다시피 신강 지역은 너무 건조하고 덥잖아요, 그래서 남쪽으로 대학 진학을 했죠. 저한테 남방은 푸르름이 있는 그런 지역이죠.
그런데 이제 졸업을 했으니 앞으로 남방에 갈 일이 또 있을까 모르겠요. 좀 아쉽네요.
류: 졸업을 하신거예요! 그럼 지금 귀향하고 계시는 거군요. 이제 직장을 구해야 할 것 같은데, 어디서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굴: 제 전공이 경제학이니깐 이것과 관련된 것이면 뭐든지 괜찮아요. 얼마간의 수입이 보장되고 안정된 직장이라면 근무처야 전국 어디든 상관없겠죠. 요즘 같아서는 안정된 직장이 가장 우선일 것 같네요. 몇 년 사이 下崗問題[실업문제]가 아주 심각해졌거든요. 저도 예외일 수 없겠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시간이 새벽 2시쯤 되었다. 나의 질문에 응해주던 위그루족 여대생은 눈이 빨게 지면서 좀 피곤해 하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서로 친숙해졌겠지 싶었다.
더 이상 주변 이야기를 하다가는 정작 물어보고 싶은 것을 놓칠세라 곧바로 위그르족과 한족 간의 관계로 화제를 돌려봤다.
류: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신강 지역의 역사에 관한 몇 가지 책을 읽어 봤었는데요, 제가 본 책에서는 위구르족과 한족(漢族)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하던데, 실제는 어떤가요?
그녀는 좀 전까지만 해도 느티나무 마냥 늘어놓고 있던 두 팔을 재빨리 올려 휙휙 저었다.
굴: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아주 좋아요.
이 대목에서 그녀는 이상하게도 강조하는 부사어를 많이 사용했다.
류: 그럼 굴자르의 경우, 한족을 대하는 태도나 한국인을 대하는 태도가 별 차이 없다는 뜻인가요?
굴: 당연하죠. 모두 같아요. 위구르족과 한족과의 관계는 아주 좋아요. 우리 모두는 한 집안 사람이잖아요. 나 역시 중국 사람이구요.
순간, 나는 굴자르에게서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주위를 많이 살피는 듯했다. 나는 굴자르의 대답에 뭔가 숨겨진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좀더 적극적으로 물어보고자, 과감한 단어를 써가며 질문을 했다.
류: 위구르족과 한족의 사이가 좋다구요? 아, 그래요? 제가 이제까지 알던 것과는 조금 다르군요. 제가 생각할 때는 과거의 역사적 경험도 있고 해서 둘 사이가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얼마 전에 들은 뉴스에 의하면 위구르족도 티벳(西藏)의 장족(藏族)들처럼 독립을 원한다고 하던데, 그건 어떻게 된 거죠?
갑자기 앞자리에서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중국어가 아니었다. 위구르어였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굴자르는 그 소리를 듣고는 멈칫했다.
위구르족은 자신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생활하는 민족이다. 그들의 언어와 문자는 아랍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문자의 경우 그 생김새가 아랍문자와 매우 유사하다. 이는 일반 한족의 경우 알아듣거나 읽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굴: 아, 저… 이 질문에 대해서는 그다지 대답하고 싶지 않은데요.
그녀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분위기가 좀 험악해지자, 난 더 이상 위구르족과 한족과의 관계나 위구르족 독립문제에 관해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내게는 매우 궁금한 것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당시 열차 안에는 입석까지 포함해서 승객이 꽉 차있는 상태였다. 승객 대부분은 한족들이었는데, 굴자르는 그 주위의 한족들을 의식했던 것이다. 더구나 객차 안의 한족들은 외국인을 만나볼 기회가 많지 않아, 내가 열차를 탈 때부터 나의 말이나 행동에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굴자르는 나의 질문에 대답하기가 더욱 꺼려졌던 것이다. 나의 직설적인 질문에 당황해 하는 굴자르를 편하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다시 일상에 관한 질문에 들어갔다.
류: 하하…(멋쩍은 웃음을 웃으며) 아, 그래요. 그럼 할 수 없죠. 제가 괜한 질문을 했나 보군요. 미안합니다. 그럼 이제 가정에 관해서 좀 물어봐도 될까요? 집에 식구가 어떻게 되죠?
굴: 네 식구예요. 아버지, 어머니, 동생 그리고 저.
류: 듣기로 소수민족은 2명씩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하던데, 그래서 집에 애들이 2명 있는 건가요?
중국의 가족계획은 ‘계획생육(計劃生育)’이라고 하는데 한족은 1명, 소수민족의 경우는 2명까지 자녀를 낳을 수 있다.
굴: 아뇨, 그렇지 않아요. 물론 요즘의 가족계획에 따른다면 2명까지만 낳을 수 있지만 제가 태어날 당시에는 그런 법이 시행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제 친구들 중에는 5식구, 6식구인 친구도 있어요. 한국은 ‘계획생육‘ 같은 것 없나요?
류: ‘계획생육‘과 유사한 일종의 사회 운동이 있었어요. 한국도 인구밀도가 높은 편이라 가족계획에 관한 문제가 예전에 매스컴에서 자주 거론되곤 했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졌죠. 강제성이 있던 건 아니구요. 한국에 대해 이전에 좀 들은 것이 있나요?
굴: 주로 텔레비젼을 통해 한국에 관한 것을 알게 되죠. 한국 드라마도 가끔 봐요.
류: 그럼 한국 연예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나요?
굴: 안재욱을 알아요. 많은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죠. 친구들이 잘 생겼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보기엔 별론데…
연예계에 관한 얘기를 하니깐 금새 분위기가 살아났다. 그런데 잠시 친구를 찾아 옆 열차로 갔던 한 명의 위구르 학생이 돌아왔다. 난 그에게 자리를 내주고 내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쉽지만 여기서 굴자르와의 대화도 접어야 했다.
내 자리로 돌아 오기 전에 다른 위구르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 중 한 학생이 나에게 우루무치에 있는 자신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우루무치에 오면 연락하라는 것이었다. 난 이 학생이 뭔가 나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고, 그녀가 전해준 쪽지를 꼭 쥐고 자리로 돌아왔다.
2.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라 , 위구르인 !’
일주일 후 우루무치에 도착했다. 우루무치는 각종 간판과 표지판이 한자와 위구르어로 적혀 있어 중국 내에서 소수민족의 냄새를 물씬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이튿날 쪽지를 전해준 위구르 여대생과의 연결이 이루어졌다. 곧 그 여학생의 초대로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약시무씨즈!”
위그루의 인사말이다.
류준형: 또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반갑습니다.
아이비파(이하, 아): 잘 지내셨어요? 여행은 즐거웠구요? 여기까지 와주셔서 제가 오히려 더 고맙습니다.
그녀의 집은 전통 가옥이 아니라 우리나라 연립주택에 해당하는 그런 양식의 건물이었다. 이 지역은 우루무치에서 공장지대에 속하는 곳인데, 위구르인이 적지 않게 거주하고 있는 곳이었다.
류: 이쪽인가요?
아: 이리로 오세요. 여기서 신발을 벗으시고, 들어가 앉으세요.
위구르인들은 한족과 다르게 우리처럼 좌식생활을 하며 잠도 바닥에서 잔다. 방 중앙에는 우리의 밥상 형태의 것이 놓여져 있었으며, 창문이 없는 벽 양쪽에는 카펫이 실내를 꾸미고 있었다. 양쪽 카펫의 상부 중앙에는 가죽 케이스로 포장된 코란이, 그 옆으로는 예전 우리네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유리에 낀 가족 사진이 걸려 있다. 이외에 가구로는 오디오, VCD, 전화, TV 등 한국의 보통 가정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류: 벽에 걸린 카펫이 멋있네요? 구입한 건가요, 아님 직접 만든 건가요?
아: 당연히 산 거죠. 아주 오래 전에 그러니깐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산 거예요. 우리 집뿐만 아니라 위구르 가정에서는 카펫으로 집안 장식을 하는 경우가 많죠.
아이비파의 어머니가 과일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중국어를 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그저 자상한 웃음만 지어 보이면서 들고 온 수박과 하미과(모양은 호박과 비슷하고 맛이 참외와 흡사한 과일로 신강지역에서 다량으로 생산되는 과일이다)를 건네 줬다. 아이비파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위구르인의 생활이 주된 화제가 되었다.
류: 중국의 서북 지역인 이곳 신강성 중에 위구르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 어디죠?
아: 음… 저도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카슈가르일 꺼예요. 비록 신강성에서 가장 큰 도시는 아니지만 우루무치보다 휠씬 이전에 생긴 도시죠. 이외에도 쿠차(庫車), 호탄(和田) 등등에 많이 살고 있죠.
류: 우루무치의 인구비율은 어떤가요? 제가 듣기로는 위구르족과 한족의 비율이 50:50이라고 하던데 실제로 그런가요?
아: 제가 느끼기에는 한족이 50%이상인 것 같아요. 도시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족이죠. 아마 앞으로는 한족이 더 많아질 것이 확실해요. 과거에는 우루무치 시내의 야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위구르족이었는데 이제는 한족 상인들이 상당히 많아졌어요. 심지어 양꼬치마저 한족들이 만들어 팔 정도니깐요. 물론 맛은 우리 위구르족이 만든 것과는 비교할 수 없죠.
양꼬치는 신강지역 무슬림들이 주로 먹는 음식인데, 이것을 주로 위구르족이나 회족들이 팔아서 양꼬치는 이들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류: 위구르족 인구비율이 점점 줄어드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아니면 위구르인들이 우루무치를 많이 떠나서 이런 결과가 생긴 건가요?
아: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위구르인의 숫자는 크게 변하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늘었죠. 제가 비유를 하나 들죠. 이것을 보세요.
그녀는 수박이 담겨 있던 쟁반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 지금 이 쟁반에 10개의 수박이 있다고 해보세요. 그럼 여기에는 100% 수박이 담겨 있는 거겠죠. 그런데 여기에다가 하미과 10개를 가져다 놓는다고 생각하면 수박의 비율이 50%로 떨어지겠죠. 현재 우루무치의 인구비율도 이것과 같아요. 근래에 이곳으로 이주해온 한족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거든요. 그래서 결국 한족이 우리들보다 많아지게 되었죠.
류: 한족이 많아져서 기분이 나쁜 것 같네요?
아: 음… 좋지는 않죠. 우리가 오래전부터 살던 곳에 자꾸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서 주인 노릇하니 기분이 좋을 리 없죠. 우리와는 말도 다르고 습관도 다르니깐요.
류: 생활하는 데 불편한 점이 있나요?
아: 일상 생활을 하는데 크게 불편한 점은 없어요. 그러나 예를 들어서 직장을 찾는다고 할 때, 한족 기업주는 우리 위구르 노동자들을 고용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 위구르족 입장에서는 점점 더 직장을 구하기가 힘들어지고 있어요. 저처럼 대학교육을 마치고, 또 중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해도 한족이 운영하는 기업에서는 일을 구하기가 쉽지 않죠. 설령 직장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위구르 전통 복장을 하거나 악세사리를 착용하는 데에는 많은 제약을 받죠.
아: 그런데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한족이 우리 위구르족을 대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죠. 그들은 종종 우리가 소수민족 중에서 소질(素質: 이 단어는 중국어에서 개인의 문화수준과 인격을 포괄하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는데, 한국어에는 적당한 단어가 없다.)이 많이 떨어진다고 말하곤 해요. 그래서 버스를 타거나 물건을 살 때 불친절한 경우도 많고, 바가지를 씌우는 경우도 있죠.
한족들의 소수민족에 대한 평가는 얼마나 한족화(漢族化)되었는가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한화(漢化)된 정도가 비교적 심한 회족(回族)을 가장 영리한 종족이라고 생각하고 저항의식이 강한 위구르족은 단순하고 무식한 종족이라고 여긴다.
류: 그런데 위구르 대학생들은 대학 졸업 후 어떻게 되나요?
아: 우리들은 대학을 졸업하면 일단 고향으로 돌아와야 해요. 절 보세요. 전 서안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이번에 졸업을 하고서는 우루무치로 돌아왔잖아요. 서안에서 직장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전 이번에 아마 정부에서 직장을 구해줄 꺼예요. 소수민족으로 서안에서 유학을 했기 때문이죠.
류: 지난 번 열차에서 굴자르에게 물어봤을 때는 위구르족과 한족의 사이가 좋다고 하던데, 이렇게 차별이나 불공평한 대우를 받으면 한족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아: 당신은 굴자르가 한 말을 그대로 믿고 있나요? 실제는 그렇지 않아요. 당시에는 주위에 위낙 한족들이 많아서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굴자르가 그렇게 얘기한 거죠. 우리 위구르족들은 한족을 좋아하지 않아요. 당신도 우루무치 시내의 위구르족이 많은 지역에서는 될 수 있으면 중국어를 쓰지 마세요. 한족으로 오해받지 않는 것이 좋으니까요.
류: 그런데 위구르족 중에 일부는 한족에 대해서 상당히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던데 이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아: 그들도 실제는 그런 마음이 아닐 꺼예요. 제가 예를 하나 들어보죠. 힘이 센 사람과 몸집이 작고 약한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만약 힘이 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때린다고 하면, 약한 사람은 어떠한 말을 할까요? 힘으로는 당해 낼 수 없으니깐, 아마도 아프다고 소리치며 도망가거나 혹은 이렇게 말하겠죠. 이것은 때리는 것이 아니고 만지는 것이라고요. 왜냐하면 더 세게 맞지 않게 위해서죠.
류: 그럼 근래에 위구르족과 한족 사이에 일어난 큰 사건 같은 것이 있었나요?
아: 사실 저도 6개월 만에 집에 돌아온 터라, 그간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가는 자세히 알지 못해요. 설사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전국에 배포되는 신문에는 거의 실리지 않거든요. 이곳 우루무치에는 위구르인만이 이용하는 시장이 있어요. 상인도 위구르인이고 물건을 사는 사람도 위구르인이죠.
그중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한 것이 ‘이도교(二道橋)’라는 곳이예요. 그런데 얼마전에 정부에서는 환경미화를 한다는 구실로 이곳을 모두 철거해 버렸어요. 그래서 이전에 우루무치에서 가장 컸던 시장지역이 이제는 사라져 버렸죠.
이것은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이나 외국인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을 통제할 경우 자주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얼마 전에 조선족도 이와 같은 경험을 당한 적이 있다. 중국 북경에는 ‘오도구(五道口)’라는 한국상점 밀집 지역이 있는데 이 거리도 중국 정부가 조선인 통제 목적으로 작년에 모두 철거해 버렸다.
아: 전 사실 여러분께 바라는 것이 두 가지 있어요.
류: 그게 뭔데요?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건가요?
아: 그렇게 큰 부탁은 아니예요. 다만 여러분들이 한국에 돌아가셔서 우리의 상황을 다른 사람들에게 좀더 정확하게 알려줬으면 하는 바램이예요. 우리가 받는 차별대우, 우리의 고충을 말이예요.
다른 하나는 한국에 돌아간 이후에 꼭 코란경을 한번 읽어 보시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정확한 종교는 이슬람교밖에 없어요.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서울에도 분명히 淸眞寺(이슬람 사원의 중국어식 표현)가 있을 테니깐 그곳에 가서 이슬람교를 접해 보세요. 아셨죠!
류: 예, 알겠어요. 한번 그렇게 해보죠. 그리고 위구르족과 한족들간의 문제도 평화적으로 원만히 해결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 고맙습니다.
아이비파의 어머니가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조반(조飯)’이라고 하는 양고기·피망 볶음밥이었다. 양고기, 피망, 당근과 각종 야채로 볶은 밥으로 큰 쟁반 하나에 그득 담겨 있었다. 위구르족들은 이것을 손님 왔을 때나 많은 식구가 한꺼번에 식사를 할 경우 즐겨 먹는다. 이전에는 이 밥을 손으로 직접 먹었으나 요즘은 숟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류: 이렇게 먹는 건가요?
손가락 사이로 밥알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 아니요. 좀 더 힘을 줘서 밥을 누르세요.
류: 하하… 쉽지 않군요. 그냥 전 숟가락을 써서 먹어야 겠네요.
아: 그러세요. 저도 어렸을 때 이후에는 숟가락을 이용해서 밥을 먹거든요.
벽에 붙은 위구르어 포스터가 보였다.
류: 저건 어디에 쓰이는 건가요?
아: 예배를 드릴 때 쓰는 거예요. 코란경의 구절이 담겨져 있는 거죠. 매일매일 예배를 드리는데 그때마다 이 구절들을 외우곤 합니다. 보통 청진사(淸眞寺)에서는 하루에 6번 예배를 올리지만 일반 가정에서는 그렇지 못하죠. 그러나 예배를 드릴 때는 우리도 메카를 향해서 기도를 합니다.
류: 미안한 질문인데요. 혹시 이슬람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아: 이슬람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믿을 수밖에 없죠. 코란경 속에 담겨져 있는 이야기 중에 틀린 말은 거의 없어요. 또한 코란경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예언서이기도 해요.
류: 한국에는 이슬람교도가 많지 않아서 이슬람교에 대한 인상도 매우 피상적인 경우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이슬람교를 매우 배타적이며 호전적인 종교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저 또한 그랬구요.
아: 그건 이슬람교에 대한 완전한 오해예요. 이슬람교에서는 세상을 크게 두 가지로 보죠. 하나는 마호메트의 성령이 통하는 지역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한 지역이죠. 우리 무슬림들은 성령이 통하게 하기 위해 지하드[聖戰]를 하기도 하는 거죠. 그렇지만 이슬람교 자체를 호전적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한국에 돌아가면 이슬람교에 대해 좀더 공부해 봐야겠군요. 그런데 저한테는 위구르 문자가 참 재미있어요. 그림 같기도 하구 말이예요.
아: 하하… 그런가요. 위구르어는 32개의 字母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중 8개는 장모음이구요. 이것으로 이루어진 위구르어는 비교적 쉽게 배울 수 있죠. 일단 32개의 자모만 모두 외운다면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으니깐요. 한번 배워 보세요. 그렇게 어렵지 않을 꺼예요.
위구르어에 대한 대답이 매우 정형화되어 있고 구체적인 것으로 봐서 다른 민족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받은 듯이 보였다.
류: 위구르어는 아랍어와 비슷한 것 같아요.
아: 위구르어는 아랍어에서 파생된 언어죠. 형태는 아랍어와 비슷하지만 많이 달라져서 위구르어를 안다고 해서 아랍어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우리 집에는 아랍어로 된 코란경도 있지만 예배를 드릴 때는 사용하지 않아요.
류: 저기 옆에 걸려있는 액자 속의 사람들은 모두 아이비파의 가족들인가요?
아: 예, 모두 우리 가족이죠. 할머니를 포함해서 7식구예요. 제가 장녀구요.
류: 어머니는 직장에 다니시나요?
아: 아니요. 중국어를 하지 못하셔서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죠. 지금은 일을 하지 않으시고 집에 계세요.
류: 그럼 아버지만 일을 하시는 건가요?
아: 예, 그렇죠. 그래서 저의 집은 좀 가난한 편이예요. 실은 제가 비록 이번에 졸업을 하기는 했지만 마지막 등록금의 일부를 내지 못해 졸업장을 아직 받아 오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원래부터 이렇게 가난한 것은 아니었어요. 아버지께서 젊으셨을 때는 좀 넉넉한 살림이었죠.
그런데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아버지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셨죠.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 남매를 모두 대학교육까지 시키실 생각이세요. 동생은 지금 우루무치 농업대학에 다니고 있구요.
류: 교육열이 강하신 것 같군요. 다른 위구르족 가정도 그런가요?
아: 글쎄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자녀 교육을 중시하는 집도 있고 그렇지 않은 집도 있어요. 아마도 부모가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하겠죠.
류: 중간에 있는 아기의 사진은 아이비파의 사진인가요?
우리의 백일이나 돌사진과 비슷했다.
아: 예, 저 맞아요.
류: 언제 찍은 사진이죠?
아: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아주 어렸을 때이겠죠. 하하…
류: 한국인들은 아기가 태어난 지 100일이 되면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잔치를 벌리기도 하고 친척들이 집에 찾아와 축하해주기도 하는데 위구르 풍속에도 이런 것이 있나요?
아: 있어요. 아이가 태어난 이후 40일째 되는 날을 기념하죠. 이날이 되면 아이를 정성스럽게 씻기고 머리카락을 잘라 주죠.
류: 왜 하필 40일이죠? 무슨 특별한 뜻이라도 있나요?
아: 글쎄요. 저도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는데, 이슬람교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코란경에 따르면 여자가 아이를 임신한 이후 40일이 되는 날 마호메트가 천사를 내려보내 아이의 성별과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해요. 천사는 아이를 보고 난 이후 마호메트와 아이의 장래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이 아이가 앞으로 어찌 되는가에 대해서요. 이런 일은 40일과 42일 사이에 일어난다고 해요. 그래서 아기가 태어난 지 40일이 되는 날을 기념하고, 아이를 깨끗하게 해주는 거예요.
아이비파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밀가루 반죽을 기름에 튀겨 만든 도너츠와 유사한 빵을 대접했다. 설탕을 솔솔 뿌린 것이 영낙없는 찹살 도너츠 형태였다.
류: 또 이런 것까지 만드셨나요? 너무나 융숭한 대접을 받아 고맙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네요.
아: 아니예요. 우리 위구르인들을 보통 能歌善舞(춤과 노래에 능숙한)한 민족이라고 하는데 그 뿐만 아니라 손님 접대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들이기도 하죠. 여러분은 오늘 우리 집에 찾아오신 손님이니깐 많이 드시고 가셔야 해요. 그래야 우리 할머니께서 기뻐하시거든요.
류: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 꼭 한번 한국에 오세요.
아: 예. 그런 날이 오길 기대합니다.
아이비파와 헤어지고 나는 실크로드 여행을 계속했다.
중국이 이 지역에 진출한 지 벌써 2000년이 넘었다. 동서의 교통로로 적극 활용되기도 하였지만 그로 인해 분쟁도 끊이지 않았다. 우루무치의 위구르족의 삶은 그 흔적이다. 현재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고 싶다는 희망과, 억눌리고 고통받은 지난 역사가 거기엔 공존한다. 위그루인의 얼굴에서 그 양면을 다 볼 수 있다.
한없이 이어진 실크로드 위로 모래바람이 짙게 분다. 그렇게 내 시야는 차츰 흐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