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코 가려는 그를 붙잡았다. 내 말의 요지는 이랬다.
나한테 원래 하려던 얘기 해라, 들어주겠다. 대신 나랑 인터뷰하자. 맞교환 아니냐. 어쨌든 난 당신한테 관심이 있고 당신 얘기를 듣고 싶은 거다. 물론 사리에 맞는 말은 아니다. 그의 말마따나 나의 관심은 불순한 것이었다.
주섬주섬 가방에서 녹음기며 마이크를 꺼냈다. 말하는 와중에도 그는 녹음기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선 나도 쉽게 녹음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홍당무> 왜 인터뷰를 못하겠다는 거죠?
이도인> 개인적인 얘기를 인터뷰하면 오해를 살 수가 있으니까요.
홍> 지금 계신 곳에 누가 되지 않게 할께요.
이> 그래도 안돼요.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몇 번의 실랑이를 거치면서 난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가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화장실에선가 본 주문을 읊었다. 한자가 희한해서 기억에 남아 있었다.
훔치훔치.
그랬더니 뜻밖에 그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기억해 낸 주문은 그와 다른 쪽의 것이었나보다.
한참 동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1861년. 최수은. 강을 내리다. 그리고 갑자년, 그것을 걷어버리다. 여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을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우선은 내가 제대로 설명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말해 준 것처럼 여기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은 직접 도장에 찾아가 보거나 민족종교 대사전 같은 것을 들춰보면 되리라. 딴 세상의 일년이 이 땅의 12만 9천 6백년에 해당한다든가 64억 8천만년 이전에 우주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 대학 같은 책 보면 신에 대해서 쭉 설명해놨어요.
홍> 공부 많이하셨나봐요? 에…괜찮아요. 편안하게 말씀하세요. 저도 공부가 돼잖아요. 저도 그 시대에 관심 많아요.
그는 여전히 녹음기에 신경을 썼지만, 조금 지나자 테입이 돌아가는 걸 모른 척 했다. 그걸 나는 인터뷰를 해도 좋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홍> 입도는 언제 하셨어요?
이> 후후…
홍> 계기라든가 이런 거 없었어요?
이> 나중에 말씀드릴께요. 선생님께서 정말 이걸 배우고 싶고 민족적인 것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면 알아야돼요.
홍> 예…그런데 전 이런 경험이 있었거든요. 아까는 좋은 얘기로 시작하셨잖아요. 근데 언젠가는 당신 귀신을 업고 다닌다든가, 집안에 무슨 일 있지 않냐 이렇게 섬뜩하게 말하는 사람 만난 적 있거든요. 같은 쪽 사람들이예요?
이> 저는 신기가 없어서 그런데, 그런 거 보는 사람도 있어요.
홍> 그 사람들은 어떻게 보게 된 건데요?
이> 신기가 있는 사람들이 도를 닦으러 오기도 하거든요. 그런 기운 있는 사람도 있고 맨 정신으로 닦는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이 다 있으니까.
홍> 그런가요?
이> 가장 낮은 차원이 기가 있다는 걸 이해하는 거니까. 산수에서 구구단을 알아야 미분적분 할 거 아니요? 이 차원을 이해 못하면 안돼니까 그것부터 얘기하느라 그런거죠.
홍> 뭐, 지금 제가 그걸 미신이다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니구요.
이> 사람마다 다 다른 거예요. 자기 기질에 따라 다른 거거든요. 도도 기질에 따라 닦는 거에요. 이건 법이 없어요. 자유 자재로 하니까. 세상이 도판이거든요. 어떤 사람은 공원에서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길거리에서도 하고 가정을 방문하면서 하기도 하고.
홍> 다 다르다 말이죠? 선생은 어떻게 하십니까?
이> 전 학교 같은 데서…
홍> 선생님이세요?
이> 아니,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다구요. 특히 대학생들하고 많이 얘기하죠. 어떤 사람은 어쩌구 저쩌구 막 소리 지르면서 하잖아요. 그런 거 우리가 시켜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법이 없으니까,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죠.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죠.
홍> 선생은 그렇게 안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이> 기질이 다른 거죠. 절마다 기풍이 다르다고 하잖아요.
홍> 기분 나쁘다고 화내는 사람이랑 다툰 적은 없었어요?
이> 아, 처음엔 도를 잘 몰랐을 때 그랬는데. 우리가 원래 해원상생의 법인데, 그것도 잘 모르고,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려고 그랬던 적이 있었죠. 그러다가 깨닫는거죠. 내가 지금도 도력이 있다, 그러면 지금 여기 계신 분도 쫘–악 바꿀 수 있죠. 그런데 지금 그렇지 않으니까…덕이 있고 도가 높고 이러면 그 사람 밑으로 사람이 솔솔 몰려요.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도를 긍정적으로 보는 거예요. 사람들이 바뀌는 거죠. 무도한 사람에서 유도한 사람으로…
홍> 그래도 바쁘게 가는데 막 잡으면 화내기도 하잖아요.
이> 꼭 말해주고 싶은 열정 때문에 그러는 건데. 그리고 어디 빠지면 좌우가 안보이는 것도 있죠.
홍> 그래도 집착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아무리 그 사람한테 말해주고 싶다고 하더라도, 몇 번이고 거부할 땐 그게 또 그 사람 운명 아닐까요?
이> 느낌이 있어요, 저 사람이다 하는. 그 느낌이라는 게 전생의 인연이죠. 내가 살기가 많다, 그럼 살기가 많은 사람만 만나는거야. 뭔가 엄청난 걸 봤는데 말해주고 싶죠, 당연히.
홍> 하하. 그래서 우리가 만났나봐요. 그래도 섬뜩한 얘기하면 기분 나뻐요.
이> 전 아직 잘 못보니까. 그렇게 만나는 것도 인연이 있으니까 만나는 건 분명해요. 어떤 에너지가 있잖아요? 그걸 보는 거죠. 살기일 수도 있고, 덕일 수도 있고. 그런 게 보이면 웬지 도와주고 싶은 거죠. 어떻게 하면 잘 돼게 해줄까 하고. 아이구 결혼 했어? 누구 소개시켜 줄까? 이런 얘기도 나올 수 있고.
홍> 참, 결혼 하셨어요?
이> 예…전 아직 안했어요.
홍> 그럼 여복이 없으신건가?
이> 전…아직 할 일이 좀 많다보니까. 근데 이해는 되세요?
홍> 그럼요.
이> 잘 모르실 수도 있는데… 이런 차원을 실제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40 프로밖에 안돼요.
홍> 포덕활동 말고 달리 도를 닦는 방법이 있나요?
이> 기도문도 외고…정해진 법이 있죠.
홍> 단전호흡도 잘 하세요? 거긴 좀 관심이 있는데…건강 같은거…
이> 우린 단전호흡 보다도 수도를 주 목적으로 하고. 그건 부차적인 거죠. 나중에 주문수련을 한다건가, 그런 거 할 때… 우린 마음 닦는 걸 중요시하니까요. 우리 근본 취지가 뭐냐. 앞으로 사람이 덕을 닦아 놔야 될 세상이 오기 때문에, 사람을 대우하고 의를 갖추고 예를 갖추는 그런 걸 배워나가는 거죠. 자기를 바꾸는 거죠.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스님들이 수도를 하듯이 도를 추구하는 거죠. 그 법이 다를 뿐이예요.
나는 미련한 속인 역할을 다 했다. 그는 내가 진심이길 바라는 눈치였고, 나도 가능한 그럴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이 먼지 낀 세상에서 사는 내 관심에는 역시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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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십대의 구멍
난, ‘그‘라는 개인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을 쫓는 그의 삶은 어떤 무늬를 지니고 있는 걸까? 그는 여전히 사적인 질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틈이 벌어졌다. 그가 아직 도통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와 나 사이에 조그만 샛길이 난다.
홍> 지금 혼자 사시나요?
이> 저는 지금 도장에 있어요.
홍> 부모님은 계시구요?
이> 사적인 얘긴데…
홍> 그러니까요…좀 특별하게 사시잖아요. 수행이나 고행이라고도 할 수 있을텐데요. 왜 평범하게 살지 않는거야 하는 주변의 삐딱한 시선도 있을 법하구요.
이> 집안에서는 반대를 많이 했죠. 도를 잘 모르니까. 가화라고 하는데, 집안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거. 나같은 경우는 오십프로 밖에 안됐어요. 나이가 좀 들었으니까, 지가 알아서 하겟지, 나이 삼십이 넘었는데 지 길 가겠지, 그러면서도 부모가 못미더워서 걱정하시는 게 있잖아요. 스님이 출가하는 거랑 다른 게 아닌데.
홍>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래도 어쨌든 부모님이 미련이 남으셨다는 이야기일 거 같은데요.
이> 아직도 그렇죠…장가도 가고 애도 낳고 이런 거 바라시죠. 때가 되면 저도 장가 가야죠.
홍> 배우자는 같은 동료 중에서?
이> 아뇨. 꼭 그런 건 아니죠. 도는 말이요, 천지자연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거예요.
홍> 그래도 좀 어려울 겉같은데요.
이> 뭐 그러니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죠. 빨리 해야죠. 결혼할 나이도 좀 넘었고.
부모의 걱정까지도 드러내는 그의 순박함에 연민 비슷한 걸 느꼈다. 그러나 난 관념 속에서만 위태로울 뿐이다. 그는 자신이 수도에 전념하지 못한다는 점을 부끄러워 했다. 그에게도 현실의 더께가 달라붙어 있는거다. 그걸 열등감이라고 불러도 될까?
홍> 나이 어린 사람도 있죠?
이> 도 전체로 보면 나이 어린 사람도 많죠.
홍> 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도장 생활 할수 있어요?
이> 학교 공부하면서 왔다갔다 하죠. 나이가 어려도 도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집에다 얘기 하고 도장 생활 하는 사람도 있죠. 대단하죠. 나보다 낫죠. 난 직장생활하고 있으니까. 도에 전념을 못하는 거니까.
홍> 나이가 어려도 한 수 위네요? 호칭이 있어요?
이> 선각이라고 그러죠. 제가 서른 다섯이 넘었는데요. 제 선각은 나보다 나이가 어려요.
홍> 선각?
이> 나한테 도를 전해 준 사람…스물 다섯살도 있고 스물 여섯살도 있고. 나이가 어려도 깨달은 바가 크니까, 가르침을 받고 모시는 거죠. 정신이 크다고 할 수 있죠.
홍> 직장에선 압니까?
이> 하하…알죠… 자꾸 개인적인 걸…
홍> 그런 생활이 곧 진리고 도 아닙니까?
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천차만물인거예요. 엄청나게 큰 도를 얘기하는 데, 예를 들어 지구를 알아야 되는데 여기 계신 분은 아프리카의 어느 한 부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거예요. 그러구선 지구가 이렇다, 이렇게 말하면 안돼죠.
홍> 예…제가 지금 나눈 대화를 갖고 전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께요.
이> 또 내가 도가 높지 않고 전념을 못해서 그렇지, 도가 높은 사람은 개인적인 거 전혀 없어요.
홍> 전념하시지 못하는 이유는 뭐예요?
이> 확실히 뭐다, 이거다 이런 게 있어야 하는데…
홍> 방금은 분명한 걸로 말씀하셨잖아요.
이> 아직 깨달은 바가 적으니까요. 저 말고 딱 깨달은 사람이랑 말하면 또 달라요.
홍> 도장 생활 오래하셨어요?
이> 허허
결국 무심결에 그가 93년도에 입도했다는 걸 실토했다. 예상외였다. 무려 7년이 넘었다. 자신의 못남까지도 감추지 않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경지일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난 그가 삼십대라는 사실에 그 구멍의 뿌리가 있으려니 짐작한다. 뭐랄까, 겸손이라고 하기는 허술해 보이는 것, 그러니까 그쯤되면 맘 먹은 대로 안되는 게 있다는, 뭐 그런, 약간의 포기하면서도 살 줄 아는 그런거? 이쯤이면 그와 나 사이의 샛길이 좀 더 넓어진 셈인데…역시 짐작이려니 한다.
홍> 언제 선생 도가 완성되는 겁니까?
이> 완성?
홍> 부족하다고 했잖아요.
이> 그건 알 수 없어요
홍> 그래도…
이> 업보도 풀리고 뭐가 바뀌고 그래야 되는거지.
홍> 입도 하고 나서 그 전이랑 크게 바뀐 건 뭐죠?
이> 달라진 건 많죠.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홍> 가장 중요한 건?
이> 사람이 많이 달라졌죠.
홍> 지금 평온해 보이는데, 그 전에는 난폭했다는 걸까요?
이> 그 전에는 내성적이었는데 외향적으로 바꼈죠. 과거지향적이고 부정적인 기운에 덮였었는데, 신명, 귀신 신에 밝을 명, 항상 자연은 전진하는 거니까 전진하는 기운만 있는거죠. 과거 따져봐야 소용없잖아요? 고칠거에요, 뭐할 거에요?
홍> 고민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거군요?
이> 뭐 이젠 그럴 필요없으니까. 긍정적인 사고 방식으로 바뀐 거죠. 가장 정상적인 사람,
의를 갖추고 예를 갖추고 사람끼리 대화를 나누고 하는 극히 정상적인 인간으로 바뀐 거죠.
3. 한없이 작아져서 사라져라
홍> 포덕할 때 아니더라도, 주로 도 얘기만 하는 거 아니예요?
이> 상황에 따라 다르죠
홍> 예를 들어서…
이> 개인적인 질문은 편견을 낳고 오류를 낳아요. 솔직히 생각해보세요. 도를 접하고 닦는 개인적인 경위라는 게 5백만이면 5백만가지가 다 있잖아요. 근데 그 각각을 얘기하면 오해를 낳잖아요.
홍> 아, 어디라구는 말 안할께요.
이> 아니 할려면 어디라고 해야죠.
홍> 말씀하신 것처럼 오해를 살까봐요.
이> 있는대로 얘기하면 돼죠. 친한 친구라면 개인적인 얘기도 할 수 있죠. 터놓고 내가 힘들고 어려운 게 뭐다, 뭐가 좋더라, 이런거 얘기할 수 있죠. 그렇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객관적인 얘기밖에 못해요. 세상이라는게 껍데기밖에 안돼잖아요. 껍데기만 보고 판단할 수 있거든요. 김대중 욕 막 했던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 만나고 오면 아무 얘기 못합니다. 감화가 된거죠.
갑작스럽게 현실에 대한 발언이 튀어나왔다. 그로서는 일종의 비유에 불과했겠지만, 그 틈을 놓칠새라 엉뚱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
홍> 참, 선거되면 투표도 해요?
이> 지난 번엔 바뻐서 못했어요.
홍> 속세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서는 아니구요?
이> 선거 하라고 하죠. 투표는 하죠.
홍> 그럼 관심도 갖고 계신건가요?
이> 뭐 솔직히 내 코가 석자니까, 별로 관심은 없죠. 내 일 하기도 바쁜데.
홍> 정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는 거군요?
이> 설사 같은 도인끼리도 내 할일이 뭐다, 가령 교정부다 선전부다 하면 자기 일만 하죠. 서로 간섭할 시간도 없고.
이 사람, 여전히 눅눅치 않다. 풀어졌다 싶으면 금새 자기를 잠근다.
홍> 직장생활도 하시는데, IMF라든가 경제라든가 이런 얘기도 하세요?
이> 경제요?
홍> 종교가 뭐든 생활에 관련된 경제 문제란 게 있잖아요.
이> 신문 보죠. 아침에 신문 와요. 텔레비젼도 보고.
홍> 신문은 뭐 보세요?
이> 자기 관심 있는 거 보죠. 다른 사람들은 야구도 보고 그러는데. 전 원래 도 닦기 전부터 스포츠에 관심이 없었어요. 정치도 그렇고. 도인 중에는 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있고,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죠. 박찬호, 박세리 어쩌구…사실 나도 교화를 하다 보면 그런 데 관심이 있어야 돼요. 좀 그렇죠. 사실 박세리가 누군지도 몰랐는데…하하
홍> 텔레비젼은?
이> 보죠. 허준 정도 가끔 봐요.
그는 몇번이고 강조를 했다. 개인적인 게 있어서는 안된다는 거였다. 그렇지만 그 스스로 빗장을 걸었을 뿐, 나는 ‘그‘라는 개인을 보고 있었다. 깨끗하게 빨아 입은 체크 무늬의 잠바, 권색 양복 바지, 흰 운동화. 빨래는 어떻게 할까? 오늘 아침 식사 당번은 누구였을까? 오늘 그가 도장을 나설 때 누가 인사를 했을까? 그가 부인하면 할수록 난, ‘그‘라는 개인이 보고 싶어진다. 정말 그의 생각처럼, 문득 어느 순간 ‘나‘가 사라질 지 수도 있는 걸까?
홍> 예전에는 산 속에서 도를 닦았다잖아요. 요즘엔 이렇게 생활 속에서 도를 닦는 건데요, 여가생활 같은 건 없어요?
이> 취미같은 거 없어요. 만나서 얘기하기도 바쁜데.
홍> 너무 무색무취한 거 아니에요? 그러면 젊은 학생들이랑은 얘기하기 곤란하지 않나?
이> 그러니까 신문도 보고 사회 돌아가는 거 얘기하죠.
홍> 신문 중 어느 면을?
이> 그냥 다 봐요. 정치에서 스포츠까지 그냥 무심하게 봐요. 내일 모레 남북정상회담 하는구나, 린다 김이 어쩐구나, 코스닥이 유행이구나 하면서…두루 두루 무심히 봐요.
홍> 증권은 하세요?
이> 그런 거 안하죠. 도를 닦는 사람이 물질적인 거 신경쓰겠어요?
홍>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생명보험이나 저축은?
이> 없어요, 그런거.
홍> 에…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는데, 준비는 해 둬야 되는거 아닙니까?
이> 생각해 봐요. 이 세상 천지가 도판인데.
홍> 그래도 필요할 때가 있잖아요.
이> 만약 절박한 게 있으면 우리 모두 책임져요.
홍> 지금은 가정이 없으셔서 그럴지 모르지만, 가정이 생기면?
이> 모르겠어요, 아직은.
홍> 지금 생활비는요?
이> 그건 프라이버시죠.
홍> 그럼 어느 부분에 제일 많이 쓰세요? 개인적으로 쓸 때 말이예요.
이> 개인적인 생활이 없으니까, 그렇게 쓸 때 없어요. 뭐 내가 지금 데이트 하는 것도 아니고 낚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홍> 즐겨하시는 음식은 있어요?
이> 음식요? 하하하. 별 걸 다 물어보네.
홍> 그래도 어떤 걸 좋아하신다거나.
이> 내 얘기 들으면 알잖아요. 난 도 닦기 전에도 굉장히 고지식하고 그래가지고… 다른 도인은 안 그래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도를 못 닦나봐요. 인간관계도 좁고…
홍> 그러니까, 제 말이 그거잖아요. 다른 사람들이랑 얘기할 때 이런 거 저런 거 얘기할 줄 알아야 이야기 거리가 많이 생기잖아요. 지금 넘 융통성 없으니까, 저도 재미없잖아요. 이런 얘기 물어봐도 도 얘기만 하고, 저 얘기 물어봐도 도 얘기만 하고 그러니…
이> 넘 내가 고지식하게 도를 닦으니까, 사람도 없고. 근데 다른 도인들은 안 그래요.
홍> 잡기라고 해서 멀리 하지는 않아요?
이> 그렇진 않아요. 어떤 하나에 미치잖아요? 그럼 좋은 거에요. 어떤 일에 능통하게 되는거죠.
홍> 그렇지만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로 재미없으신거 아니에요?
이> 아뇨.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여유가 있죠. 다 깨달았으니까 생각에도 여유가 있고. 다 알아버리니까 사람 다스릴 때도 말 한마디만 해도 다 알아듣게끔 하는데.
홍> 어떤 책을 즐겨 보십니까 그러면…음…그러고 어떤 음식 즐겨하세요 그러면…음…그러고
이> 우리가 인제 개벽을 해야 된다고 하는데, 아직 개벽을 못해서, 하하하.
홍> 개인적인 개벽도 있군요?
이> 성격을 개조하는 걸 말하죠. 그러니까 개벽을 잘하는 사람이 도를 잘 닦는다고 얘기하죠.
여기서 테입은 끝났다. 그러나 우리는 그 후로도 한참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의 고지식함을 끝끝내 물고 늘어졌고, 좀 더 다채로울 것을 권고했다. 생각해 보니, 그건 주제 넘는 말이었고, 나 자신에게나 필요한 말이었다.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 보니, 내 말은 틀렸다. 내 구멍의 뿌리는 아마도 어설픔에 있던 것이 아닐까? 내가 지금 개인이라는 이름으로 쌓고 있는 벽들이란 또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인간이 스스로를 개체로 느끼기 시작한 건 불과 몇 백년 전의 일 아니던가?
그는 마침내 어색한 상태에서 내게 입도를 권했고, 난 생각해 보겠다는 한마디로 위기를 넘겼다. 그는 못내 아쉬워 하는 것 같았고, 자신의 도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절감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그가 그렇게 손해를 본 건 아닐게다. 그 이유를 분명히 설명하기는 힘들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