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란 눈의 신부님
미아삼거리에서 돌산마을 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인터뷰에 나설 때마다 어떤 두려움이 미열처럼 번지며 가슴이 두근거린다. 초보 인터뷰어의 숫기 없음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나를 기다리는 것이, 그저 낯선 사람과의 한담(閑談)이 아니라, 한없는 무게로 나를 엄습하는 다른 한 삶과의 대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버스가 번잡한 도로를 벗어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부서진 집들 사이로 반쯤 깎여 나간 가파른 언덕이 보인다. 여기저기 무너진 집들의 잔해가 쓰레기와 뒤섞여 쌓여 있다.
이제 막 아파트가 들어서는 한 켠에는 채 철거되지 않은 텅 빈 집들이 있어,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누추하고 고단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누런 맨살을 드러낸 채, 대지는 그렇게 엎드러져 있었다. 미아 5지구(미아6동) 재개발지역! 가난은 수챗물처럼 저기 저 아래로 흘러 들지 않고, 야박한 세상에 쫓겨 오히려 위쪽으로, 좁고 가파른 언덕으로 내몰렸던 것이다.
언덕 맨꼭대기 돌산 종점에서 내리자 콘테이너 박스 같은 임시 건물 몇 채가 눈 앞에 들어온다. 그 중 한 동에 이르러 현관문을 두드렸다. 눈이 파란, 작은 체구의 할아버지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가 안광훈 신부님이다.
싱크대 하나와 화장실 하나, 5평 남짓한 집은 한 눈에도 좁아 보였지만, 소박하면서도 단정하다. 화분 두어 개와 도자기 몇 점, 책장에 꽂힌 적지 않은 책들. 창으로 햇살이 비쳐들어 따뜻한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이 허술한 건물에서 어떻게, 겨울을 날 수 있었을까. 꽃샘 추위가 여전한 언덕 위로 가끔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지나간다.
커피를 내놓고 앉는 안광훈 신부님께 인사와 함께 몇 마디를 여쭸다. 처음부터 너무 무거운 질문이 아닌지. 그러나 단도직입, 그게 내 방식이다.
퍼슨웹 : 개인적인 욕망과 세속적인 꿈도 포기해야 하니까, 신부가 된다는 건 어려운 일인데요. 신부가 되었던 데 무슨 사연이 있었던가요?
안광훈 : 그것도 꿈이지. 뭐.
짧은 대답에 이어 신부님은 빙그레 웃는다.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이라고 해야 하나. 웃음이 천진스럽다.
퍼 : 보통 사람들은 그런 꿈 잘 안 꾸잖아요? (웃음)
안 : 그렇죠. 성소(聖召)라고 하죠?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 사명감이라고 할 수도 있죠. 그런데 신부가 된 데에는 호기심도 있었죠. 어릴 때, 외국사람들은 어떻게 사나 하는… 외방선교회 소속 신학대학에 간 것도 그 때문이죠. 처음부터 외국으로 나갈 생각이었으니까요.
신부가 되고, 그것도 당시 지지리도 가난하고 우울한 나라 한국을 택한 것을 두고 그는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그 나이 때에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러나 단순히 ‘호기심’이란 말로, 그의 지난 행적을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 또한 어린 시절, 결혼도 하지 않고 아프리카 오지의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은 있었으니까.
퍼 : 그래도 고민같은 게 있었을 텐데요?
안 : 없다고 할 수 없지. 그치만 지금까지 후회한 건 없어. 누구든지 다 살다보면 걱정, 고민있고, 문제가 있지.
그렇다. 누구에게나 다 걱정거리가 있고, 그래서 고민이 있다. 내성적인 성격이었다지만, 그에게도 여자 친구가 있었고 무엇보다 꿈꾸는 젊음이 있었다. 삶 자체가 번뇌인 것을, 어찌 고민이 없었으랴. 그 점에서 그는 진실하다. 그러나 자신이 걸어온 길을 후회하지 않는 데에는 그런 ‘진실’만으로는 부족하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의 끊임없는 ‘투쟁’이 있어야 한다.
대상이 없는 공포를 불안이라고 한다. 따라서 불안은 내재적인 것이며, 어쩔 수 없이 존재론적인 물음과 맞닿아 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내가 가는 지금 이 길은 제대로 가는 것인가… 그 또한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자문하며 얼마나 괴로웠을 것인가. 어쩌면 그에게 물음을 던지는 가운데 내 우울의 원인도 조금은 분명해질지도 모른다.
퍼 : 신부님의 살아오신 이력을 간단하게나마 들려 주신다면요?
안 : 1941년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65년 호주 시드니 신학대를 졸업하면서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한국에 왔으니까, 여기 온 지 올해로 꼭 서른 다섯 해가 되는 셈입니다.
안광훈 신부님의 예순 해 삶을 아래와 같이 요약해본다.
1959(19살)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뉴질랜드 고향을 떠남.
1965(25살) 천주교 외방선교회 소속 시드니 신학대 졸업. 사제 서품 받다.
1966(26살)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국내 선교 시작.
1968(28살) 이태 정도의 어학과정을 마치고 강원도 산골짜기, 정선 천주교회 부임.
70년대 안신부의 교구장이었었던 지학순 주교와 함께 유신체제에 맞서 격렬히 투쟁.
결국 지학순 주교 구속.
1980(40살) 안식년. 미국 버클리대에서 신학 석사과정.
1981(41살) 다시 서울대교구 목동 성당 부임. 철거투쟁 시작.
1986(46살) 혜화동 신학대학원 원장. 신학생들에게 강의도 하며 지도.
1991(51살) 두번째 안식년. 이스라엘에서 신학 공부. 시카고 카톨릭 대학에서 6개월 쯤 공부.
1992(52살) 미아 5동 천주교회 부임과 함께 6동 달동네로 전입. 미아동에서 이후 10년간 빈민 운동.
2001현재 (61살) 민주노동당 강북성북 지부 고문
2. 가난은 악(惡)이다
퍼 : 신부님의 삶에서 빈민운동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여기 미아동에서만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니까요. 빈민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요?
안 : 강원도 정선교회를 마치고, 1981년 다시 서울대교구 목동 성당에 부임했을 때죠. 거기 간 지 한 2달만에 목동 신시가지 재개발 발표가 나고, 안양천변에 사는 사람들이 쫓겨 나게 되었어요. 강제철거로. 세입자들이 쫓겨나면 어디 갈 데가 있어야지요. 그러니 그 사람들 당연히 철거반대투쟁 하게 되고. 근데 그 사람들 모일 만한 장소가 없어 성당 빌려 주고… 그러다가 그 사람들 투쟁 도와주게 되었고 자연히 빈민문제 관심 갖게 되었죠. 처음엔 그렇게 시작했지. 우연히. 거기서 85년까지 그런 활동했죠. 그러면서 철거, 세입자 문제 많은 경험 얻게 되었죠.
그는 빈민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 ‘우연’이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전력(前歷)이 있는데?
퍼 : 그럼, 빈민운동을 시작하신 것은 그 때부터라는 말씀입니까?
안 : 사실 빈민운동이야 정선에서도 한 거죠. 그곳 사람들 아주 가난했으니까. 예를 들어, 병원도 없어 아주 간단한 병, 맹장 때문에 죽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아주 급할 때, 눈 오고 그러면. 병원은 원주나 강릉으로나 가야 있었으니까. 농사도 아주 벼농사는 안되고 밭농산데, 옥수수 감자 그런 것 먹고 살았죠. 나도 그거 먹고 살았어요. 이젠 교통도 많이 좋아졌고..
가난이라… 그는 정선이 예전에 비해서는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고 말한다. 7년 전인가. 태백시에 갔을 때 본 충격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태백역에 내렸을 때, 마주 보이는 산들은 나무 하나 없는 온통 검은 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처음엔 산에 불을 질러, 밭농사를 하나 싶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물어 보니, 탄을 채취하고 버려진 산을 다시 가꾸기 위해서(그것도 최근에 시작된 일이라는데)라고 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과연 광산 폐석을 밭모양으로 정돈해 놓고 틈틈이 어린 나무도 심어 놓은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태백에 대한 인상은 이때 이미 결정되어 버렸다.
검은 도시! 보이는 산과 내, 폐광촌 뿐 아니라 진폐증을 앓다 죽어가는 거무튀튀한 광부의 얼굴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미래 속에서 이방인인 내게는 온통 검은 빛깔만 보였다. “탄광촌에도 희망이 있나요?”라며 태백을 떠나고 싶어하는 14살 소녀의 말(『한겨레 21』 창간호)이 아니더라도, 탄광마저 줄줄이 문을 닫는 바람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태백시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퍼 : 목동에서의 빈민운동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계기야 우연이었다지만 목동 이후로 지금까지 20년 넘게 꾸준히 빈민운동을 해오셨는데?
안 : 빈민문제는 한국에 오면서부터 관심이 있었어요. 정선에 있을 때도 그랬고. 서울에 올 때도 변두리 가난한 교회로 왔어요. 그때 목동은 아주 가난한 동네였는데, 사람들은 청계천이나 여의도 쪽, 안양천변 조그만 집에서 살았죠.
그때 큰 집이라고 해봐야 9평짜리였고, 대개는 5-6평이었어요.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구요.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데 재개발 발표가 나면서 갑자기 이 사람들이 쫓겨나게 생겼어요. 교회는 자기땅이라 문제 없었는데, 불법 세입자뿐만 아니라, 집 지은 사람들도 땅이 자기 것이 아니니, 보상은커녕 무조건 나가라 하니까,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라, 막막하죠. 그래도 집주인들은 나아요. ‘딱지’라도 받아서 불법이지만 그거 팔고는 죄다 나가 버렸으니까. 정작 세입자들은 받는 것도 없고 돈벌이도 시원찮고, 게다가 학교 다니는 아이들도 있으니 어디 갈 데가 있어야지. 정부에서 그 사람들을 경기도 어딘가로 보내려고 했다더라구요. 장위동, 상계동 철거민들을 다 포천으로 보내려고 했던 것처럼. 그렇게 되면 더욱 살 길도 없고.. 그래서 그건 좀 못됐다, 나쁘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철거투쟁은 시작되었죠. 어떻게 지역 재개발하는 것도 좋은데, 우선은 그 지역 주민들을 위해 재개발해야 올바른 재개발이지, 그렇지 않고 지역 주민들 다 쫓아내고, 돈 많은 사람들 위해서 고층아파트 짓고 모범 도시 만들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예요. 어쨌거나 지금 목동, 아주 부자 동네 된 것은 그 때 재개발 때문이죠.
‘가난해도 행복했던’ – 이 말에 숨은 거짓과 기만이여! – 난장이 가족은 아침을 먹던 조각마루에서 철거 계고장을 받는다.
어머니는 식사를 중단했다. 나는 어머니의 밥상을 내려다 보았다. 보리밥에 까만 된장, 그리고 시든 고추 두어 개와 조린 감자. 나는 어머니를 위해 철거 계고장을 천천히 읽었다.
낙 원 구
주택 : 444, 1 — 197x. 4. 10
수신 : 서울특별시 낙원구 행복동 46번지의 1839 김불이 귀하
제목 : 재개발 사업구역 및 고지대 건물 철거 지시
귀하 소유 아래 표시 건물은 주택 개량 촉진법에 관한 임시 조치법에 따라 행복 3구역 재개발 지구로 지정되어…… (중략)…… 197x. 9. 30까지 자진 철거할 것을 명합니다. 만일 위 기일까지 자진 철거하지 않을 경우에는 행정 대집행법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강제 철거하고 그 비용은 귀하로부터 징수하겠습니다. …… (후략)
낙 원 구 청 장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철거 계고장이 날아든 뒤로 난장이 가족은 벼랑 끝에 내몰린다. 집은 끝내 헐리고 만다. 17살 영희는 헐값에 빼앗긴 아파트 입주권을 되찾기 위해 몸을 판다. 집 나간 딸을 찾던 난장이는 벽돌 공장 굴뚝에서 떨어져 죽는다.
도시재개발법은 제 1조에서 ‘도시의 건전한 발전’과 ‘공공복리’를 그 목적으로 삼는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땅을 가진 사람들한테나 해당되는 말이다.
퍼 : 한국에서는 대외적인 큰 행사가 있으면, 눈에 보기 싫고 지저분하다고 생각되는 건 감추고 덮고 멀리 치워버리려고만 합니다. 노점상 문제도 그렇고…
안 : 목동은 공항 옆인데, 공항에서 들어오면서 지저분한 거 보기 싫으니까 다 치워버려야지, 그런 식이었죠. 더구나 그 때는 88올림픽도 있었고. 어쨌거나 그 때 투쟁 참 많이도 했어요. 최루탄 가스도 많이 마시고. 그 때 나하고 같은 성당에 있던 장옥자 수녀님은….
아, 무서워 무서워. (이 대목에서 그는 몸서리를 치듯 손사래를 쳤다.) 그 양반 항상 앞장 섰어요. 맞기도 많이 맞았고. 전투 경찰들은 사람들이 성당에 못 들어가게 하고 또 못 나가게 하고… 거 참 대단했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 얻은 게 없었어요.
퍼 : 철거투쟁에서 “얻은 게 없었다”니요?
안 : 없었죠. 경험 밖에. 단지 그 경험 가지고 그 다음에 상계동 터질 때 더 유식하게 싸울 수 있었죠. 지역 주민들뿐만 아니라, 대학생들도 많이 와서 도와 주었죠. 물론 상계동에서도 얻은 것 많지 않았지. 그렇지만 그런 철거 싸움 경험 많이 얻고 해서 이제 싸울 때마다 조금 더 나아지고, 조금 더 얻고..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런 가이주(假移住) 단지 얻게 된거죠.
퍼 : 상계동 철거투쟁에서는요?
안 : 그게 아마 88올림픽 직전인 87-88년이었죠? 목동 직후였으니까. 그 당시 상계동도 재개발 발표가 나면서 철거투쟁이 심했죠. 난 그때 신학대학원에 있었을 때니까,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은 아니었고 관심을 많이 갖고 있었지. 거기엔 예수회 소속 정일오 신부님이 가 있었어요.
<상계동 올림픽>이라 했던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위해, 상계동에서는 86년부터 88년 사이에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죽고 다쳐야 했다. 안광훈 신부는 목동과 상계동에서의 직.간접적인 철거투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아 5지구와 삼양동 일대의 철거투쟁에서는 훨씬 더 조직적으로 대응한다. 그가 달동네로 유명한 삼양동 일대를 찾아든 데에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삼양동에도 곧 철거문제가 불거질 것을 예상했던 것이다.
안 : 두 번째 안식년을 마치고 92년에 다시 한국에 와서는 뭐할까 생각하면서 목동에서의 경험을 살려 도시빈민, 주거권, 철거 문제 등을 연구하고자 여러 군데 다녀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돌산교회(89년부터 빈민선교를 시작. 미아 6동에서 공부방, 야학, 주민도서실, 무료진료소 등을 운영해 오고 있다.) 김성훈 목사를 만나 여기로 오게 되었어요.
퍼 : 교회에서 신부님한테 가라고 해서, 여기로 온 게 아니구요?
안 ; 그럼요. 들어올 때부터 철거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틀림없이 그런 문제가 있을 거다,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퍼 : 그렇다면, 부임하신 성당이 여기에 있었던 건가요?
안 : 아뇨, 집 전세 하나 얻어서 여기에 들어왔죠. 성당은 미아 5동에 있었구요. 그 때 이 곳에는 젊은 신부님이 계셨는데, 저를 크게 환영하고 뒷받침 많이 해주었어요. 나도 그 신부님 성당에서 좀 도와 주었죠. 지금까지도 내 교회, 그 사이에 선교본당이 아래에 하나 생겼는데, 두 신부 사이, 두 교회 사이 아주 좋아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주 어려울 때, 철거투쟁 교회도 많이 도와 줬어요.
말하자면, 그는 위장전입을 했던 것이다. 마치 80년대의 운동가들이 ‘위장 취업’하여 공장으로 갔던 것처럼. 그 자신이 한 사람의 세입자로서. 철거투쟁이 있을 것을 알고 그것을 조직하기 위해. 1992년 12월 겨울의 일이었다. 가난한 동네의 사람들은 자기들과 똑같이 허름한 집에서 이웃하며 사는 파란 눈의 서양인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퍼 : 아니, 신부님이 성당의 사택에서 사시질 않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을 텐데요?
안 : 그렇지. 여기 92년도에 들어왔는데, 이상한 거야. 사람들이 볼 때. 내가 외국 사람이니까. 그런데 한 3년 사는 동안, 골목길도 왔다갔다 하고 옆집 사람들 알게 되어 인사하고 그리고 가게에서 물건도 팔아주고 아줌마들, 동네 애들 알면서 서서히 친해지고 하니까 아, 사는 가보다 사람들이 생각했지. 그리고 김목사하고 공부방 운영하면서 가끔 거기서 애들 영어도 가르쳐 주고 그랬지.
퍼 : 이 지역에서의 철거투쟁은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안 : 이 동네에서 그렇게 한 3년쯤 살았을 때지, 아마. 지역 재개발한다고 해서 그럼 우리가 뭉쳐야 되겠다, 김 목사하고 나하고 방법 좀 연구하고. 김 목사는 돌산 교회에서 관심 있는 사람들 모여라 하고. 처음부터 같이 계획 세우고 실행했지. 세입자 대책 위원회 세우고 회의를 소집했어요. 나는 간사를 맡았지. 이게 96년도쯤이죠.
퍼 : 세입자 대책 위원회에서 지금까지 한 5년 동안 투쟁한 건가요?
안 : 5년 동안은 아니지. 오히려 우리는 채 2년도 싸우지 않고 해결을 보았지.
그렇게 짧은 시간에 해결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조직적인 투쟁의 결과였다. 1995년 11월, 미아 5지구 재개발 사업이 인가되자, 12월 28일 돌산교회에서 첫 모임을 갖고, 세입자 대책위를 조직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3월 2일에는 ‘세대위’ 결성을 갖고 현판식을 갖는다. 그리고 <세입자소식>을 발행하고, 철탑을 건립하는 한편, 청장년부, 여성부, 규찰대 등을 조직한다. <전국주거연합> 등과 연대하여, 1996년 3.27, 4.26의 대대적인 폭력적 강제철거와 이후에도 계속 기도된 몇 차례의 강제철거에 격렬히 맞서 싸운다. 그 결과 96년 9월 20일, 임시거주를 위한 가이주 단지를 세우기로 조합과 합의를 맺는다. 물론 철거투쟁은 98년 3월 가이주단지가 완공되고 입주를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퍼 : 2년만에 성과가 있었다니 놀랍습니다. 굉장히 힘든 투쟁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안 : 예. 그렇지만 가이주단지가 완공될 때쯤에는 세입자들 얼마 안 남았어요. 여기도 역시 집주인들은 재개발 조합하고 합의해 융자 받고 살짝 다 가버렸어요. 아주 빨리. 원래 ‘세대위’ 세울 때, 한 180세대 가입하고 투쟁 시작했어요.
그런데, 철거 깡패들이 무서운 데다 사람들이 집을 비울 때는 그들이 집을 부수고 쓰레기를 마구 버리니까, 파리·쥐는 물론이고 냄새도 너무 심하고 해서 이런 데서 애들 키우기 어렵다, 그러고는 하나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철거측에서 가끔 빈 집에 불도 놓고, 한밤중에 불이 나고 해서 사람들이 무섭고 불안해하고 그래서 빠져 나가고… 우리 집도 불을 냈었는데, 빨리 나가라고, 다행히 그 지역 주민들이 보고 와서 내 집 살려 줬어요.
1997년 3월 8일자 <중앙일보>에 ‘미아동 재개발 연쇄 방화 의혹’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강북구 미아 1, 6, 7동에서 넉 달 새 90여 건의 화재 사고가 발생했는데 미아 6동에만 50여 건이 발생했다는 기사였다. 불이 난 곳의 대부분은 남은 세입자들 주변의 빈집들이었다. 신문은 누군가 세입자를 쫓아내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지른 것으로 추정하였다.
안 : 철거용역들의 폭력적 강제철거가 계속 되었어도 우리는 조합하고 합의하려고 지역을 떠나지 않았어요. 돌산 위에 땅 좀 마련하고 땅에다 임시 시설 마련할 수 있는 비용을 달라고요. 강제철거는 단지 마을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마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죠. 이런 의미에서 철거투쟁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임대아파트가 지어질 때까지 가이주단지로 옮기려는 것은 마을 공동체를 지속시키기 위한 의미도 있는 거예요. 조합은 처음에 비해당자가 너무 많다, 어쩌고 하면서 합의를 질질 끌더니 결국 55세대를 인정하고 7억을 건네 주었어요. 첨에는 자기네들이 지어주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 없다, 현금 주면 우리가 짓겠다고 했죠. 자기네들이 집을 지어 주었으면 아주 엉망이었을 거예요. 그 때 정릉 4동, 미아 1동, 7동 등 다른 곳의 철거지역도 우리와 동시에 합의 중이었는데 우리가 젤 빨랐어요. 조직적인 대응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젤 잘 되었다고 봐야죠. 목동에서는 이런 단지는 생각도 할 수 없었죠. 미아 7동은 우리보다 한 1년 뒤에 이런 단지 얻었죠. 반면, 미아 1동은 잘못되어, 얻은 건 있었지만, 이런 단지는 안 생겼죠.
퍼 : 신부님의 철거투쟁에 대해, 외국인이 뭐 하러 남의 나라 문제에 그렇게 신경쓰고 그러냐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요?
안 : 경찰하고 철거깡패들, 재개발조합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하죠. 협박도 하면서요.
퍼 : 그럴 때, 뭐라 그러세요?
안 : 난 말 안 해. 우리 지역 주민들이 말하죠. 무식한 소리하지 말라고 그 사람들한테 막 따져요. 난 답변 안 해도 돼요. (웃음)
퍼 : 여기는 언제까지 살 수 있습니까? 아파트가 다 지어질 때까지?
안 : 원래 그런 계약이었죠. 처음 가이주단지에 들어 올 때는 한 3-4년 있다 공공임대아파트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아직 공사 시작도 안 했어요.
퍼 : 아니, 왜요? 그럼, 아직 철거투쟁 안 끝난 건가요?
안 : 철거투쟁 끝났는데, 하지만 우리 건설회사, 우성 IMF때 빵꾸 나서, 부도로 없어졌어요. 적어도 3년은 여기에 더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퍼 : 허 참! 하필 ‘우성’이었어요?
안 : 그 사람들이 못 지어줘요. 법정관리 중이라서 다시 시작해야해요. 게다가 재개발조합까지 부도 나가지고 법정관리에 들어갔으니까. 그래서 지금 조사중인데. 변호사 하나 나와서 조합이 우리하고 계약한 게 어떤 게 있는지, 우리가 받은 게 얼마고 어디에 썼는지, 다행히 우리가 돈 빼돌린 게 한 푼도 없어요. 우리 걱정할 게 없지만, 이 문제 언제 해결될지, 집을 언제 지어줄지 알 수 없지.
퍼 : 그러면, 다시 막 싸우고 그래야 되는 것 아닌가요?
안 : 아직까지 싸울 거야 없죠. 그러나 결과가 안 좋은 쪽으로 나게 되면 꼭 싸워야지. 그리고 아직까지 여기 사는 사람들 중에 비해당자는, 나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안신부님은 독신이라서 해당이 안 된다.), 공공임대 아파트 들어갈 권리 없어요. 될 수 있으면 우리가 다 몽땅 들어 갈려고 하는데, 그때 가서 마지막 한바탕 해야될 것 같은데..
‘마지막 한바탕’을 얘기하는 그의 얼굴에는 비장함보다는 예의 그 천진한 웃음이 다시 활짝 피었다.
퍼 : 철거투쟁의 의미라고 할까, 그런 것을 평가해 보시면?
안 : 지역주민들이 모두 마지막까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두를 위해서 희생적으로 잘 했어요. 그래서 성공했다고 봐요. 나 한 사람 어떻게 해서 잘 됐다고 할 수 없죠. 지금도 여기 가이주단지에 들어와서도 계속해서 모범적인 마을 만들려고 경제적인 문제 같이 해결하고, 여러 가지 협동 운동도 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환경 문제에 대해서 같이 연구하고. 어렵지만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해 보자, 하는 그런 정신이 남아 있으니까. 그래서 재미있어요. 마을 운영위원회도 한 달에 두 번씩 있어요.
마을 운영위원회도 한 달에 두 번씩 있어요. 다들 모여서 마을문제 같이 연구하고 그리고 두 달에 한 번씩 초대 강사를 불러 노동법에 대해서나 다른 여러 가지 협동운동에 대해서 교육도 받죠. 때로 법률상담도 하고.
“오늘도 비상 싸이렌 소리가 온 동네로 울려 퍼진다.
어느 곳인가, 철거 용역이 온 것 같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두근두근.. 어느덧 사무실 주변에 한 두 사람 모여들기 시작하고
집행부 임원들은 각자의 역할 분담과 회원들의 배치를 지시한다
귓가에선 여전히 맥박 소리만 들려올 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는다
모두들 상기된 얼굴과 긴장된 모습으로 싸움이 예상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눈 앞에 거대한 몸짓의 용역이 보인다……(중략)
결판은 났다. 오늘도 우리는 이긴 것이다
비록 부딪쳐서 온 몸이 상처 투성이고 어디 한 군데아프지 않은 곳이 없지만……(중략)
……옆 집에 사는 사람의 얼굴도 모르고 살던 우리가
언제인가부터 한 사람, 한 사람 형제처럼 가까워지고
하루도 보지 않으면 안될 사이가 되어 버린 지금, 마음이 든든해 진다
우리 모두 모이면 무슨 일이든 못할 게 없다.”
– <세대위 설립 2주년 및 가이주 단지 입주식 기념 자료집>에서, 어느 아낙의 글.
퍼 : 지금까지의 철거투쟁이 공동체 운동으로 발전하여 나아간다는 건가요?
안 : 이 지역은 그 다음 단계로 나아 가야죠. 철거는 다 끝났으니까. 공동체운동과 환경운동으로 가야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지역의 철거문제에 대해 무관심 한 것은 아니예요. 예를 들어, 부천이나 서초동 비닐하우스 문제 아직도 우리는 관심 많이 갖고 있어요. 거기 문제 생길 때 거기 가서 함께 철거투쟁도 하고요. 우리는 회비도 각 가정 3000원씩 두 번 내요. 한 번은 다른 지역을 위해서지요.
안광훈 신부는 98년 3월 가이주단지 입주와 성공적인 투쟁을 기뻐하며 이렇게 말한다.
“1차 작업이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이제 2차 작업도 잘 되도록 노력 많이 해야 되겠습니다. 2차 작업이란 것은 우리 돌산마을을 더 아름답고 평화롭고 행복한 마을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우리의 투쟁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얻었고 배운 것이 많습니다. 그 모든 경험과 교훈을 잘 이용해서 정말 모범적이며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사랑과 관심과 협조를 보답해야 할 의무도 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철거를 당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한 지역 주민들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우리의 도움과 뒷받침을 계속적으로 주어야 되겠습니다.” – <세대위 설립 2주년 및 가이주 단지 입주식 기념 자료집>에서
가난과 그에 대한 투쟁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옆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빈민운동은 그저 주거권·생존권 수호 자원에서만 머물지 않고 스스로의 운동력에 의해, 공동체운동과 환경운동으로- 더 이타적이고 보편적인 운동단계로 끊임없이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이 아름다운 마을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1997년 12월 25일, <돌산마을의 크리스마스>라는 다큐멘터리로 MBC에서 방영된 적도 있다.
3. 그리고 사랑은 투쟁이다
1999년 2월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잇단 재개발로 빈민사목의 여건이 크게 변함에 따라 서울 동-서-남-북 4개 지역에 선교본당을 신설하였다. 선교본당의 특징은 성당 건물을 따로 짓지 않고 사제의 숙소나 신자·주민의 집에서 미사나 모임을 갖는다는 점이다. 또한 주임사제는 생활을 도와주는 사람이나 사무원 없이 모든 활동을 스스로 한다. 미아 6동 아래에 있는 안광훈 신부의 선교본당도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퍼 : 1999년에 서울 4개 지역에서 빈민사목이 시작되었는데, 그 때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장이셨던 이기우 신부님은 “선교본당의 목적은 교세 확장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며, 사제들이 먼저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면서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에 힘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적 가난’이라고 할 때, 가난이 복음적 또는 기독교적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가난에 ‘기독교적’인 가난이 따로 있다는 것인지…
안 : 청빈, 우리가 청빈운동 좀 하고 있지만 빈곤, 굶주림 그 자체는 악한 것이죠. 좋은 것이 아니고. 사람이 가난해서 너무너무 못 살 정도가 된다면, 그건 분명히 악한 거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한 생활 선택하는 거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가난하게 살고 그 사람들의 수준 올리기 위해서 싸우는 거고. 그러나 어느 정도는 있죠.
넉넉하게 살 때에는, 먹을 만큼 먹을 수 있고 애들 교육도 실시할 수 있고, 집도 있고, 아플 때는 병원 가서 치료받을 수 있고, 그 정도 되면 만족해야 하고. 그 이상 욕심부리지 말고 오히려 그만큼 못사는 사람들과 같이 해야죠. 그런 운동이 기독교적 가난이지.
퍼 : 가난 자체는 악이요, 그래서 이겨내고 넘어서야 되지만, 아주 부유한 것도 악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까?
안 : 그렇죠.
문득 엉뚱한 의문이 생긴다. 가난이 악이라면, 그 자신은 왜 이리 가난하게 사는 걸까? 30년을 넘게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왔고, 지금도 5평 남짓한 집에서 궁색하게 살고 있지 않나. 자신이 너무 부유해질까봐?
“이 렌즈콩은 너무나 맛이 있고, 육체는 그것을 너무나 즐기고 있는데 그것은 큰 죄악입니다. 나는 재를 한 줌 뿌리겠습니다. 이 말을 하자마자 그는 화로에서 재를 집어 자기 접시에 뿌리고는 다시 먹기 시작했다. 나를 용서하세요. 형제분들. 내 육신은 더 많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나는 육신이 반란을 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 뿐입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성프란시스>에서
퍼 : 청빈을 말씀 하셨는데, 성프란시스가 말한 청빈과 비슷한가요?
안 : 그렇죠. 완전히 똑같지는 않겠지만. 어쨌거나 그가 가난을 선택한 이유가 있어요. 우리도 그렇죠. 가난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악해서. 마더 테레사도 마찬가지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은 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살리기 위해서, 더 잘 살게 하기 위해서 그런 생활 선택한 것이죠. 전 그것이 모든 사람이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역시 어떤 성소, 특별한 소명이 있어야죠.
1182년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이탈리아 아씨시의 프란시스는 시절 방종한 생활을 일삼다, 회심하여 일체의 소유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기로 결심한다. 완전한 가난, 완전한 복종, 완전한 사랑을 설교하며 ‘걸인교단’으로 알려진 프란시스 수도회를 창설한다. 그가 일체의 소유를 버렸다고 해서, 소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가족과 땀 흘린 노동과 그 열매를 누리는 것이 하느님이 주신 것임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학적일 정도로 지독하게 가난을 실천했다. 그에게 가난은 철저한 자기 부정이며, 신 앞에 선 죄인으로서의 자기 고백이었다. 그것은 신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가난을 죄로 본 것은 아니다. 그에게 가난은 ‘개인적 구원’의 차원일 뿐이다. 그가 사회적 빈곤에 관심을 가졌다거나 그것을 극복하고자 애썼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퍼 : 교회에서도 가끔 가난에 대해 설교를 합니다만…
안 : 교회는 가난하게 살아야지.
퍼 : 신도들에게만 가난을 얘기하고, 교회 자신은 가난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한 가난에 대한 설교가 ‘영적인’ 부분에만 치우쳐진 듯도 합니다.
안 : 신자들도 역시 그런 욕심 버려야죠. 살만큼 가질 권리가 있지만, 인간답게 사는 그 이상은 가질 권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다른 사람 거 빼앗는 거죠. 못살게 하는 거죠.
신부님이 내 질문을 잘못 알아 들으신 것일까? 교회가 커지고 화려해지면서 가난한 이들은 점점 더 발을 붙이기가 어렵게 된다. 교회는 ‘마음이 가난한 자'(the poor in spirit, 마태복음 5:1절)의 복에 대해서는 많이들 설교하지만, 말 그대로 ‘가난한 자'(ye poor, 누가복음 6:20-21절)가 누리게 될 복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누가복음은 ‘지금 굶주리는 자'(ye that hunger now), ‘지금 눈물 흘리는 자'(ye that weep now)들의 ‘지금 이곳’에서의 가난을 얘기하고 있지만, 화려한 교회의 설교자들은 마음이나 영혼의 가난, 추상적인 가난만을 말함으로써 이 땅 위의 고통으로부터는 애써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들 노동자와 가족들이 공장 주변에 빈민굴을 형성하고 살았다. 노동자들은 싸고 독한 술을 마셨다.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복음만이 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참혹한 생활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아편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1997년 4월 28일. 천주교 빈민사목위원회는 창립 10주년 기념으로 청빈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청빈선언대행진’이라는 이색행진을 벌였다. 이 날 채택된 ‘청빈운동선언문’은 ‘빈곤한 현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빈곤’ 현상을 경계하며, 가난한 이들을 끌어 안기 위해, 아울러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청빈을 생활에서 실천하자고 강조했다.
퍼 : 조금 전에 가난을 죄라고 하셨는데… 제가 다니는 교회만 하더라도 목사님은 죄에 대해서는 많이 설교 하지만, 무엇이 죄인지는 얘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남을 괴롭히고 속이고 빼앗고 죽이는 것은 잘못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을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고, 두리뭉실하게 ‘죄는 나쁜 것이다’하고는 넘어 갑니다. 정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신도들 중에도 그런 죄 짓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텐데, 아마 부담스러워 은근슬쩍 넘어가는 건지…
그러면서도 젊은 사람들이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 갖고 비판하고 그러면 설교자는 사회문제를 얘기하기 전에 자기 죄부터 보라고, 너도 죄인인데, 남 욕할 거 뭐 있냐는 식으로 말하죠.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본다는 겁니다.
안 : 다 죄인이죠, 뭐. 죄인 아닌 사람 있나요? 그렇지만 죄 있는 사람은 사회문제에 대해 따질 자격 없다, 그럴 수는 없죠. 악은 악이고. 악을 보면서도 못 본 척하고 지나가면 그 자체는 죄이죠, 잘못이죠. 그래서 나는 약하고 그래서 뭐,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악을 볼 때는 악으로 판단해야지.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하고 자기 죄만 생각하고 해서는 안되죠.
퍼 : 자기 죄만 생각하는 것도 이기적일 수 있다?
안 : 그렇죠. 자기 죄만 생각하는 사람은 사회의 죄를 보지 못하니까요. 오로지 자기 구원만 생각하겠죠. 물론 위선자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되죠. 남만 판단하고 자기 자신은 판단하지 않으면 그건 문제니까
퍼 : 신부님께서는 성경을 “아주 넓게 해석한다”고 하셨는데 질문이 좀 추상적이지만, 어떤 부분을 어떻게 해석한다는 것인지. 예를 들어, 유일신 개념마저도 넓게 해석한다는 것인가요?
안 : 아, 그건 말고. 개신교에서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많이 강조하고, 이상한 징표나 앞으로 올 혼란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지만, 난 거기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어요. 예언 그런 거.
난 성경을 볼 때는 사회의 눈으로 읽어 봐요. 구약성경도 그렇고 신약도 그렇고. 성경의 내용은 사회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 따지실(‘나무란다’ 또는 ‘비판.질책한다’는 의미인 듯) 때 그 사람이 가난한 사람 괴롭히기 때문에 따지셨죠. 예수님이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셨죠. 나병환자들이나, 배고픈 사람들이나 아파하는 사람들, 과부나 소외된 사람. 그리고 따지실 때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 높은 사람, 권력 있는 사람, 재산 가진 사람들을 따지고.
전 예수님을 사회활동가로 봐요.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죠. 예레미야도 이사야도. 그들이 따질 때면 왜 내 백성을 괴롭히느냐, 하면서 왕하고 높은 사람들한테 따져요. 그거 다 사회의 눈으로 보면, 충분히 입장을 이해할 수 있고, 나는 또 그들과 같이 해야 한다고 봐요.
퍼 : 맞아요. 예수님은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고 세리, 창녀를 친구라고까지 하셨죠.
그런데, 민중신학은 예수님의 신성을 좀 소홀히 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안 : 소홀히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너무 한 쪽만 강조하지는 말자는 것이죠. 인성,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었죠. 감정도 있고 화 낼 줄 알고 속에 아픈 적도 있고… 그래서 예수님을 인간이라고 보는 것이고.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성을 봐야죠. 우리가 인간으로서 그 인간성을 보고 본받아야 되지 않나 생각해요
아직 한국말이 서투른 것일까. 그는 자주 ‘따진다’는 말을 썼는데, 무슨 뜻인지 그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신부님은 지금까지 유난히 ‘투쟁’이란 말을 많이 쓰셨다. 불쑥 짖궂은 생각이 났다.
퍼 : 아까부터 신부님은 투쟁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성직자면 투쟁보다는 인자한 목소리로 ‘사랑’을 더 많이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웃음)
안 : 아니, 나도 뭐, 사랑이라는 얘기도 많이 해요. 동네 사람들 다 사랑하고.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 사랑하죠.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괴롭히는 그 사람들하고는 싸워야죠. 왜, 왜 내 가족, 내 사랑하는 사람 괴롭히고 못살게 하느냐, 그러면 안 된다, 따지면서요.
신부님은 나를 따라 웃으시면서도 자못 정색을 하셨다.
난장이의 큰아들, 영수가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아야 할 최소한도의 대우를 위해 싸워야 돼. 싸움은 언제나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부딪쳐 일어나는 거야. 우리가 어느 쪽인가를 생각해 봐.”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4. 가난에도, 가난을 넘고자 하는 투쟁에도
국경은 없다
문득 신부님의 방을 다시 둘러본다. 비치는 햇살은 따뜻하고 평화스럽기까지 하다. 방 안의 사물들은 하나 같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30년 넘는 세월을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가난에 맞서 싸워온 그 거친 삶에 비해, 이 방은 너무나 아늑하고 평온하다. 아니, 평화롭기는 신부님 얼굴 만한 데가 없다. 방을 둘러 보던 시선은 낮은 탁자 위에 놓인, 민주노동당에서 낸 잡지에 머무른다. 그러고 보니, 그는 민주노동당 당원이었다.
퍼 : 그런데 신부님으로서 특정정당의 당원이 된다는 것은 좀 부담스러우실 것 같은데…
안 : 사실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죠. 그러나 당원이 된 것은 이미 당에 가입하신 분들이 나에게 지도해 달라고 부탁해 왔기 때문이고. 더구나 노동당은 내가 관심은 있고 노동당 운동 자체가 좋다고 보니까, 참가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거죠. 노동당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 잘못된 정치로 나아가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가입하게 되었죠.
내가 직접 정치운동 하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고. 선거 때 내가 나가서 유세하거나 우리 신도들에게 누구 찍으라 강조하거나 할 것이 아니고 단지 내가 당원들을 올바로 지도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는 민주노동당에 가입한 것이 신부로서가 아닌, 개인 자격이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혹 교회나 남들에게 부담을 주게 될까 하는 염려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노동당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는 않았다.
안 :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분이 다 뉴질랜드 노동당 당원이셨어요. 물론 두 분 다 노동자셨구요. 할아버지는 회사원이셨는데, 심장병에 걸려 내가 태어나고 몇 개월만에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에 대한 직접 기억은 없지만, 얘기를 들어보니까, 뉴질랜드 노동당이 첨 생길 때부터 열렬히 활동하셨다고 그래요. 아버님은 공무원이셨는데, 우체부 일도 하시고 전화국에 기술자로 있으면서 거기서 평생 일하셨어요. 그러니까 우리 집안은 노동당 집안이었죠. 그래서 보수당이나 다른 당 얘기는 아주, 뭐, 꺼낼 수도 없었지요. 선거 때는 나는 선거권 없었지만 어머니하고 둘이 가서 노동당 표 찍고 그랬죠.
안광훈 신부는 뉴질랜드 노동당
퍼 : 뉴질랜드 노동당에 대해서, 그리고 민주노동당에 대해서 잠깐 말씀 좀 해주시면?
안 : 뉴질랜드 노동당은 19세기 말쯤에 생겼어요. 한국의 민주노동당과는 거의 100년 차이가 나죠.
퍼 : 신부님 할아버지가 활동하셨을 때는 거의 초창기였다고요? 그럼 고생도 엄청나게 많았겠네요?
안 : 그럼요. 처음엔 탄압도 많이 받았고 투쟁도 많이 했죠. 첫 노동당 정부가 성립된 건 1935년 이고, 50년도까지, 한 15년을 죽 정권을 잡았죠.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노동당과, 보수당이 번갈아 가면서 했죠. 대개 한 6년에 한 번씩. 지금 현 정부도 노동당 정부죠.
신부님의 말에 따르면 뉴질랜드 노동당이 국회의원을 처음 배출한 건, 1916년이었다고 한다. 진보정당 운동이 척박한 한국의 현실에서 볼 때, 무려 15년간 집권한 적도 있다는 뉴질랜드 노동당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부러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양자가 성격은 좀 다르겠지만. 1950년대 조봉암의 진보정당 운동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진보정당 운동은 줄기차게 지속되어 오긴 했지만, 한 번도 뿌리내리지는 못했다. 선거 때마다 진보 정당은 나타났지만, 선거가 끝나고 생존하지 못했다. 그나마 2000년 벽두에 창당된 민주노동당은 선거 뒤에도 간신히 살아 남았으니 감지덕지 하다고 해야할까. 뉴질랜드 노동당이 근 20년 만에 국회의원을 하나 냈다면, 민주노동당은 세월이 얼마나 지나야 민중의 대표를 원내에 보낼 수 있을까.
퍼 : 어떻게 보면, 그 때의 분위기가 노동당이 정권 잡기가 더 쉬웠을 수도 있네요.
안 : 세계사적인 관점에서는 그럴 수 있죠. 그 때는 이미 사회주의 소련이 성립했을 때니까. 그렇지만 여전히 부자들이 권력 잡아서 쉽게 안 내놓았죠. 그래서 투쟁도 많이 하고 폭력적인 파업도 많았죠.
퍼 : 한국 민주 노동당은 아직 한참 멀었을까요?
안 : 머리 잘 써 야죠. 모르겠어요.. 양심적으로 욕심 없이 부정 없이 믿음직하게 잘 해나가면 사람들이 그 사실 알게 되고, 그러면 표를 주겠죠.
퍼 : 그렇죠. 평상시에 잘 해야되는 건데.. 선거 때야 너도나도 지역민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일하겠다 하니까, 어느 놈이 정말인지 믿을 수가 있어야죠.
안 : 여기도 가만히 보니까, 지역 감정이 심해서 대개 전라도 사람은 무조건 김대중이고, 경상도 사람도 그 쪽 이회창이나 한나라당 쪽을 찍고. 잘하든 못하든 우선 그 단계를 넘어야지. 먼저 젊은 사람들이 책임감 있게 정치를 해 나가야겠죠.
퍼 : 그러면 국민들 가까이 다가서는 정치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안 : 뽑히면 여기 철거문제와 마찬가지로 그 지역 주민들을 위해서 일을 해야지, 당선되면 보이지도 않아. 그 다음 선거 때나 되어야 다시 나타나 찍어 달라 하지. 지금 우리 어머니 사시는 지역은, 바로 우리 여자 수상의 지역구인데 토요일마다 와요. 사무실도 있구요.
퍼 : 수상이 직접?
안 : 네, 수상이 직접. 다른 급한 일이 없으면 직접 와요. 그리고 누구든지 사무실 찾아가서 문제 있는데 도와 달라 그래요. 대개 국회의원들 다 그래요.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쫓겨나요. 와서 뽑아준 사람들 얘기 잘 듣고 해야죠.
1999년 11월 총선에서 승리한 뉴질랜드 노동당 헬렌 클라크 총리는 “뉴질랜드의 시장근본주의적 실험은 실패했다.”고 말하고, 연정을 이룬 급진좌파 성향의 동맹당(Alliance Party)과 함께 과거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정책을 전면 수정하고 있다. – <진보정치> 35호에서
총리가 매주 자기 지역을 돌아보는 나라에서 살았던 그의 눈에, 선거 때나 잠깐 동네를 떠들며 다니는 후보들의 그 뻔한 속이 보일 때,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퍼 : 한국 정치와 뉴질랜드 정치, 아무래도 비교 많이 하게 되나요?
안 : 지금 한국 정치는 뉴질랜드 80년 전과 비슷하죠.
퍼 : 그 정도로 많이 뒤떨어졌습니까? –;;;
안 : 그렇죠. 한국정치는 해방되고 시작됐죠. 이승만 아주 썩은 정치에, 박정희 정권, 그건 뭐, 민주정권 아니었죠. 전두환 노태우도 마찬가지고. 이래저래 60년부터 90년도까지 아주 민주정치 아니었죠? 결국은 그거 제외하면 별로 없었죠.
속이 상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뉴질랜드에 비해 80년 이상이나 뒤떨어진 정치. 90년대라고 해서, 아니, 새 천년이라고 해서 무엇이 달라졌을까.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에서마저도.
이야기를 마무리 해야 할 시간이다. 다시 그의 삶에 관해 묻고 싶어졌다. 시간은 저 높다랗고 거대한 산도 깎아 내리고, 그치지 않을 것 같이 기세좋게 흐르던 강물도 마르게 하며, 결코 시들 것 같지 않던 저 화려한 젊음도 어느 새 미풍에도 흩날리는 낙엽으로 변화시킨다. 한국에 온 지 35년! 그 오랜 시간은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풍화시켜 왔을까.
퍼 : 한국에 오신 지 35년, 이런 질문 드리기 좀 쑥스럽습니다만,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저보다 한국에 더 오래 사셨는데요. 신부님의 민족적 정체성이라고 할까,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은 있습니까?
안 : 더 편하죠. 한국이. 가끔 어머니 계시니까 뉴질랜드도 가지만. 마음은 여기에 있죠.
퍼 : 그래도 뉴질랜드와 비교가 되는 것 없습니까? 한국에 오래 사셨으니까, 이 나라 사람들은 대체 왜 이럴까 하는 뭐, 단점 같은 거 없나요? 한국인인 제가 봐도 답답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닌데요?
안 : 서로 싸우고 하나 되지 못하는 것? 그 원인이야 많이 있죠. 예를 들어, 유교사상, 그거 아주 심해요.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이예요. 그러나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겠죠. 지난 50년의 역사를 보면, 6.25사변 있고, 나라가 갈라졌죠? 그 문제가 아직도 사람들 마음 속에 다 남아 있어요. 전쟁 또 터질지 어떻게 될지 하는 불안감, 그거 무시할 수 없어요. 지나간 역사 어떻게 뒤로 보내야, 앞을 볼 수 있다고 봐요. 몇 년 더 걸리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지만 어디 가도 문제없는 사회, 문제없는 나라, 문화는 없어요.
가난하고 무언가 불합리한 점이 많은 나라에 대하여 서구인들이 흔히 갖게 되는 우월의식과 그는 거리가 있었다. 신부이기에 앞서, 인간과 그의 삶을, 경쟁과 효율성의 관점에서만 보는 것에 반대하는 좌파적 성향 때문은 아닐까. 그는 나름대로 한국사회의 문제점이라고 하는 것의 역사적 기원(?)을 설명했다.
안 : 6.25사변 직후에 다 가난했죠. 부자 없고 별 욕심도 없는데. 후대에 가면서 돈 벌 기회 생기고 그때 아마 다른 사람 밀치고 나 먼저 부자 되어야 된다, 그런 사람들 생기면서 욕심 생기고 재벌 생겼죠. 그래서 재벌 주인들은 어머어마한 재산 모으고, 별 부정도 다하고 탈세도 하고 외국으로 돈 빼돌리고.. 잡히나? 안 잡히지? 김우중, 그 사람 뿐이야?
퍼 : 너무 좋게만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안 : 다만, 한국 사람 이기주의 아주 심해요. 특히 운전할 때 많이 나타나는 데 비켜라 비켜, 나 먼저 간다, 자기만 생각해요.
퍼 : 이기적이라? 좀 의왼데요. 한국사람들은 흔히 정이 많은 민족이라고들 하는데… 유교사회라서 공동체, 정 뭐 그런 걸 강조하지 않나요?
안 : 정선에서 그런 일이 있었어요. 사람들끼리 잘 봐주고 도와주고.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상놈들끼리 한 동네 사는 사람들끼리 그러는 거죠. 위에 사는 사람 아래 사람들에게 잘 해주지 않았죠. 양반들은 상놈들에게 잘해 줬나? 그렇지 않지. 그리고 체면도 있어요. 같은 계급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예의 지키고 해야 되죠. 마음 속에서 진실, 서로서로 그런 것 좀 생겨야 되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다 없어지지. 욕심 때문에. 자본주의도 문제예요. 공산주의 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문제인지도 모르지요. 특히 소비주의..
사람 사이의 정(情)이라는 것이 같은 계급 내에서, 정확하게는 피지배계급 내에서나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인정’이라는 말은 ‘한 민족’이라는 말처럼 계급적 모순을 은폐하는 또 하나의 관념적 허구일 수 있는 것일까.
퍼 : 5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호주로 가셨다면, 고향을 떠나신 지 40년이 넘었네요… 고향 생각이 나거나 외롭거나 하진 않습니까?
안 : 고향은 어머니 계시니까 가끔 생각나죠. 그러나… 외로움, 잘 모르겠어요. 성격이 내성적이라 혼자 조용히 있는 게 더 좋으니까. 그리고 바빠서 어디 외롭고 할 틈이 있어야지. 아.. 매주 한 번 정도는 아들네 집에 가서 술도 마시고 손자들과 놀아주곤 하죠.
사실 그는 몹시 바쁘다. 인터뷰 약속도 간신히 잡았다. 현재 그가 맡고 있는 직함은 대략 10개. 세입자 대책위원회야 없어졌으니까 관두고. 선교본당 주임, 마을 운영위원회 운영위원, 서울교구 도시빈민사목위원, 선교회평의원, 소매협동조합 이사장, 평화의집(여성 취업, 공동노동을 위한 단체)대표, 민주노동당 강북지부 고문, 신학원 원장 참사위원, 외방선교회 한국지부 참사위원, 그 다음에 이런 것하고 아무 관계 없이 파주에 있는 장애인 공동체인 ‘울타리 공동체’도 관여하시고.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부지런하고 정열적으로 활동하신다. 그러고도 정정하신 걸 보면,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아들이라니…
퍼 : 신부님, 저.. 아들이라면?
안 : 아들? 아.. 80년대 목동에서 철거투쟁 하면서 활동할 때, 열심히 활동하던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나를 아버지, 아버지 하면서 잘 따르고 그랬지. 그리고 그 사람이 같이 활동하던 여성활동가와 결혼할 때, 내가 주례도 서주고 해서 아들처럼 되었죠. 그래서 손자도 생긴 거고.
그러고 보니, 창 옆 벽엔 신부님이 주례를 서는 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남자 아이를 연필로 스케치한 그림 두 장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손자들 얘기를 꺼내자, 손자들이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모른다며 좋아하셨다. 지난 주에는 손자들과 스케이트장을 갔었다고 하셨다.
퍼 : 신부님은 따로 영성의 시간이라고 해야 하나.. 하느님과의 관계라고 해야 하나.. 그건 어떻게 하세요? 바깥 활동만을 많이 하다 보면, 영적으로 피폐해지고 힘들어지고 할 때도 있잖아요? 따로 기도하거나 하는 시간이 있나요?
안 : 그렇죠. 오전. 하루에 한 시간은 꼭 그런 시간을 갖죠. 그리고 가끔 가다 일년에 적어도 일주일은 조용한 곳에 가서 피정(避靜)도 하고.
퍼 : 개인적인 취미생활은?
안 : 독서하고 고고학 연구. 책은 역사나 철학 쪽으로 관심이 있고. 피곤할 때는 소설도 보고. 우스운 얘기지만 요사이 재미있게 보는 책은 『해리포터 이야기』구요. 젊은 애들 다 보는데 무슨 재미가 있나 궁금해서 보기 시작했는데, 대개 재미있네. 볼 만해요.
퍼 : 고고학이라면?
안 : 성서고고학. 91년 두 번째 안식년 받았을 때, 이스라엘, 그리이스, 이집트를 둘러보았는데, 거기서 성서고고학을 접하게 되었고.. 잡지 구독하면서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있어요.
퍼 : 성서고고학 연구라면… 중동 쪽으로 가끔은 가셔야 할텐데?
안 : 아이, 사정이 어디 그래야지.. 그냥 취미니까.
‘연구’라는 말이, 그 자신이 생각해도 쑥스러웠는지, 그는 겸연쩍게 웃었다. ‘방안’에서 ‘잡지’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고고학자? 우스꽝스러운 듯하면서도, 그의 말 속에는 약간의 슬픔과 어우러진 묘한 아름다움이 있다.
퍼 : 술이나 담배는 어떻게?
안 : 술 좋아하는데 지금은 많이 못해요. 소주 한 두 병되나? 담배는 끊는 중이예요. 이번에 성공할지 안 할지 모르는데, 벌써 여러 번 실패했는데..
퍼 : 요즘도 일요일에는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시고요?
안 : 예, 우리 성당에서 미사도 하고 강론도 하고. 여기 선교본당 생긴지 이제 3년 반이지. 지역활동가들하고 철거민 가난한 사람들 모이는 조그만 곳이죠. 보통 일요일 아침하고 수요일 저녁때는 3-40명 모이는 작은 곳이죠.
퍼 : 한국교회는 크고 숫자도 많아야 좋은데?
안 : 그러나 우리 교회는 이 지역에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과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조그마한 교회죠. 도와주기 위해서. 그리고 지역주민을 돕기 위한 교회죠. 다른 목적은 없어요. 교회를 위한 교회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봐야죠. 왜, 한국은 교회가 그렇게 커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무엇을 위한 교회인지. 전 작은 공동체가 좋아요.
퍼 : 이제 한국 나이로 61살, 환갑이신데, 잔치 계획은?
안 : 시월에. 10월 3일 잡았는데, 평일이면 못 오는 사람들도 있고 해서 개천절 공휴일로 정했죠.
퍼 : 환갑이 지나면 귀국을 하신다든지 하는, 다른 계획이 있습니까?
안 : 그런 것은 없어요.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적어도 3년 더. 그 다음에는 모르겠어요.
퍼 : 앞으로 강의나 저술활동 같은 것은?
안 : 강의는 그 때따라. 있으면 하고. 다음 주 화요일 춘천에 강의가 있어요. 초청강의지만. 저 술은 글쎄.. 강의내용도 책자 냈으면 좋겠다 싶지만, 시간이 있어야지. 그래서 안식년 하나 더 좀 받아 가지고 어디 가지도 않고 일년동안 그거만 정리해 볼까 생각중인데..
퍼 : 어쨋거나 앞으로 당분간은 여기 계속 계셔야겠네요? 공동체 운동도 하고 그래야 할테니까.
안 : 그렇죠. 여기 우리 동네만 생각하지 않고 삼양동 지역 다 생각하고. 그래서 저 아래 사거리 실업자를 위한 사업단을 한 3년간(아이엠에프 이후로) 운영하고 있고, 여기 목사님이 운영 하는 공부방 있고, 우리도 가난한 애들을 위해 희망의 집 공부방 운영하고 있고. 평화의 집은 가난한 여성들의 취업을 위해 애쓰고 있는데, 헌옷을 모아다 고쳐서 내다 팔고, 또 이 마을 전체의 협동사업으로 간병사업도 하고 있고요. 아직 할 일이 많죠.
퍼 : 간병사업을 마을 전체의 협동 사업으로 하신다고요?
안 : 그렇죠. 여성들의 간병교육과 취업문제에 대해서 전문가 수녀님이 한 분 계시고 여러 병원에 자리도 마련해 주고 하죠. 그래서 우리 삼양동 지역 더 살기 좋은 지역으로 만들려고, 원래 가난한 동네였지만, 그런 동네로 만들어야죠..
배웅을 나오면서, 그는 또 연락을 하라고 했다.
“술 어떻게 먹어요? 녹음기 없이 술 한잔 하면서 언제 얘기해요. 연락해요. 술 한 두 잔 마시면 얘기 잘하고, 솔직하게 얘기 잘하는데. 난..”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야 그의 본래 이름을 묻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실수였다. 그와 얘기 나누는 동안에 그가 뉴질랜드 출신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었지만, 안광훈이라는 이름 석 자 말고 본래 다른 이름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돌산마을 바람 부는 언덕에는 신을 찾기 위하여 걸인 행색으로 산으로 들로 괴로이 돌아다니던 프란시스 대신에, 가난과 싸우며 가난한 이들을 끌어 안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더불어 사는 가난하면서도 소탈한 프란시스가 서 있다.